몇년 전 아팠을 때, 나는 처음으로 내게 몸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전까지 몸은 옷처럼 입는 것, 혹은 걸치는 것이라 여겼다. 반대였다. 원래 먼저 내 몸이 있고, 마치 거기에 기생하듯 그냥 딱 달라붙어있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그게 사실은 진짜 ‘나’였던 거다. 쉽게 나을 것 같지 않던 아픈 몸은 내가 얼마나 내 존재를 잊고 지냈는 지의 반증 같았다. 몸에게 미안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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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후에 느꼈던 해방감은 역설적으로 사랑이라는 관계에서 내가 얼마나 습관적으로 자아를 축소시키곤 했는지를 돌아보게 했다. 앞으로는 조금도 손해보지 않겠어, 단단히 맘먹었다. 그러나 이리저리 요목조목 다 따지려고 들어도 결국에는 뭐든 퍼주고 있을 나라는 인간의 생겨먹은 기본값을 알아서. 전략을 바꿨다. 방파제를 세우자. 뚝딱뚝딱. 더 쓸려가면 안된다. 이젠 쓸려갈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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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있는 자매들이 비명지르지 않았더라면, 버럭버럭 화내지 않았더라면, 나는 돌아보지 않았을 거다. 방긋방긋 사람 좋은 척, 좋은게 좋은 척, 이해심 넓고 배려하는 척 하며- 평판관리 힘썼겠지. 다행인건 내가 당하는 것이 폭력인지는 몰라도, 남이 아프다고 하면 그건 못참아 하는 사람이 또 나인거라. 나를 잡아챘던 울음들, 비명들, 날선 분노들. 어떻게 해줘야 하나 꿀먹은 벙어리처럼 굴다가, 할 수 있는 건 듣는 것 밖에 없어 듣다가, 들어주고 토닥여주다가 결국 나도 아픈 상태라는 걸, 누구보다 비명지르고 싶어했다는 걸, 알았다. 당연히, 이건 페미니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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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어쨌든.
균열.
정상(이라고 믿었던)의 상태에서 어떤 식으로든 벗어났을 때.
부숴질 때. 금이 갈때. 자잘이 갈라지는 틈 사이로, 침잠해 있던 무언가가 드러날 때. 그때 다시 알게 된 것들. 사실은 잘은 모르고 있었던 것들.
관계든, 건강이든, 사랑이든, 삶이든, 세계든.

다시 인식하기 시작하면, 다른 앎이 시작되면, 그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나는 변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도 변한다. 물론 긍정적으로만 변했던 것은 아니다. (이 시점에서, 긍정적인 변화는 별로 없는 것 같기도.....허허...더 살아봐야 알듯.)

그런데, 어떤 균열 없이- 갈라진 틈 없이- 매끈한 상태로 아는 것을 과연 안다고 할 수 있는 걸까. 모른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안다고도 할 수 없는 거 아닌가.

대체로 균열 속에서 발견되는 치명적인 앎들은 사는 걸 참 버석거리게 한다. 버석버석 하면서, 쭈뼛쭈뼛 대면서, 당장은 변하지도 변화시키지도 못하면서. 어렵기만 하게.

매끈매끈, 꿀떡꿀떡, 호로록호록, 앎을 삼켜가며 살던 어릴 때가 그립다. 그때는 아프지도 않고 이별도 적어서였던지, 굳이 부숴지는 경험없이도, 내가 알고자 한다면 알아지는 거라 생각했다. 아는 게 안무섭고 배불렀다.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 무엇을 알아간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다른 무엇들을 해치거나 착취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걸. 꼭 마리아 미즈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경험적으로 저질러왔단걸...씁쓸...또륵.)

*

알게 되면 싸워야 한다니, 아니 싸우기 시작해야 제대로 알게 된다니...
그게 무려 에코 페미니즘 연구의 방법론이라니..
아, 정말 페미니즘은 너무. 너무. 너무. 치명적이다.
그러나 깨달은 뒤에는 자유를 얻을지니.
그 자유는 또 외롭기도 한 것이라서...
...
읽어.. 말어...? (이러고있다)




여성의 진정한 의식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주는 바가 없다. ‘정상적인‘생활이 파괴되었을 때, 즉 이혼이나 결별 등의 위기가 닥쳤을 때에만 여성이 자신의 진정한 상황에 대해 의식할 기회가 생긴다. 위기에서 실제를 아는 것이다. ... 정상상태가 유지되는 한, 그들은 스스로에게 조차 그 관계가 억압적이거라거나 착취적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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