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었다. 
읽겠다고 오만원빵까지 했는 데, 매일 20페이지도 채 못읽는 스스로를 한심해 하며.
두뇌 풀가동을 하는 데도 너무 잠이 쏟아졌다. 

나름 올해 페미니즘 책 읽으면서 독서근육 키웠다고 생각했는 데.. 나, 아직 멀었구나..
그나 저나, 이거 다 읽은 사람들 진짜 대단하다. 천잰가. 아니면 한문박사?

연말에 폭풍 야근을 하면서, 책을 도저히 읽을 기운이 안나서 5만원을 벌고 있으니 그냥 내기에 졌다라고 생각했다.
크리스마스 연휴, 그래도 1권은 읽어야지.. 다시 굳세게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내 굳센 마음이................굳센 빡침으로 바뀌었다.

325페이지 '음경적 결혼'에서. (뭐 이런 음경같은 번역이 다있어!!!) 


도저히 못읽겠네. 읽었던 사람들이 번역 엉망이라 할 때, 갈아탈걸. 말 좀 들을걸.
번역 땜에 포기하자니, 지금까지 읽은 게 너무 아까워 주문을 하기로 했다.
동서문화사 제2의성을. (가만.. 나 제2의 성에 돈 얼마 쓴거야.. 보부아르여...)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독서를 못한게 아니라 이 번역이 정말로 문제였다는 것을!! (번역하기 어려운 책이었을 수도 있고, 내가 고전에 좀 취약한 것도 있지만!!!!!!)

이제서야 막 책읽기를 시작한 초보독서가로서 솔직히 지금까진... 번역에 대해서 문제제기 하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거품을 무는지 좀 이해도 안되고 고생한 역자도 안쓰럽고 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처음으로 내가. 바로. 내가. 거품이 물어지더라. 이도 악물었다.

이건 페이퍼써서 찍어서 올려야해!! 제2의성에 제2의 피해자를 막아야해!! 다른 페이지들을 찾기 시작했다.


보이는 가? 저 양물이 설마 그 양물인가? 고민한 나의 물음표가??? 
양물, 
난 이 양물이 설마 그 양물? 하면서 국어사전을 뒤졌었지.
버마재비 같은 것일 수도 있으니까 하면서. (버마재비의 악몽)

근데 국어사전 양물에는 한가지 뜻만 있었다. 그 양물이 맞았다. 
양물=남근=음경 다양한 한자말들이 있었다...


동서에서는 양물을 남근으로 바꿨을 뿐인데 완벽하게 이해가 되었다.

허허...

그래.... 30년전 번역이니까... 30년전에는 남근을 양물이라고 했나보지.........

근데 꼭 그 선택밖에 없었느냔 말이다.



이를테면



양물의 자존심.......
응..... 자존심.....

자, 동서의 번역을 보자. 


유연하다. 남자의 자존심.

이 정도로 번역 했어도 됐잖아!!!!!!!!

어쨌든 "음경적 결혼" 이후에도 꽤 성실히 346페이지 까지 진도를 뺐었는데...


보이십니까? 저 '아....' 가 (진짜 제대로 화나서.. 저 페이지에서 그냥 결제를 해버렸다는.)

내재의 수면에서 뭘 어째?



아... 여자는 남자의 잠들어있는 내재성을 끌어낸다는 뜻이었어...

......지금까지 내가 읽은 거 무엇?........ 

어쩐지 아무것도 기억에 안남더라....

.........난...... 아마 제2의 성 1권을 읽지 않은 것일지도 몰라.........(깊은 깨달음)

세상에..... 스에상에........


동서로 갈아타고 나서 눈이다 환해졌다~ 심봉사 눈뜨듯 진도 퐉퐉나간다. 
오늘 드디어 끙끙대던 1권 털었다!!! 한번에 100페이지 넘게 읽었다고!!!!!!!!

암튼 이번에 호되게 당했다...

사실 어느 정도 참아주고 읽을만 한 부분도 있었는 데,'신화'파트에 프랑스 문학작품들에 나타난 여성혐오 분석 부분은 정말 이해가 불가능한 지경이었다. 지나친 한문공격에 중요한 부분 읽는 것 같은 데, 무슨 말인지 당최 읽어도 읽어도 읽어도......... 읽어지지 않..



여하튼, 제2의 성을 포기한게 아니라 을유 제2의 성을 포기했다는 글입니다.
90년대 번역 정말 아니올시다!!! 
(30년전 책을 표지만 바꿔서 재인쇄할 때는 30년전 번역이라고 표지에도 써주는 양심을 기대합니다.)

우리나라 번역 수준 엄청 높아졌구나.
앞으로 번역된 책을 읽을 때는 2000년대 이후 번역본을 찾겠다고.. 
아무리 탑골뮤직이 유행이고 뉴트로니 레트로니 응답하라니 90년대의 힙이니 해도
나는 한문말고 영어가 더 중요한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임을 기억할 것. 


















댓글(14) 먼댓글(1) 좋아요(3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내 삼천원..ㅠㅅㅠ
    from 게으른 독서생활자의 수기 2019-12-29 03:38 
    1권 제1부 사실과 신화 에서 1편 ‘숙명’까지 나는 바쁘므로 (나만 바쁜척ㅋㅋㅋ) 챕터별로 짧게 감상만 남기겠다.****서론 : 망했다. 을유문화사 번역좀 보소... *1편 1장 생물학적 조건 : 난 버마재비가 어떻게 생긴 생물인지도 모르는 데 그의 교미 습관을 알고 말았다. 여튼 여성은 남성보다 종(種, species)에 종속되어 있다. 종.. 이 나쁜 쉐키.. 안그래도 남은 인류애 조금 밖에 없는 데, 여성을 종속시키는 인류라는 종을 어떻게 대해
 
 
반유행열반인 2019-12-29 05: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트로 탑골 번역...ㅋㅋㅋ막 웃을 일 아니고 위로할 일이네요. 쟝쟝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에는 올해보다 갑절로 행복하시길!(갑자기 막 새해 인사 하고 싶어짐 ㅋㅋㅋ)

공쟝쟝 2019-12-29 11:03   좋아요 1 | URL
댓글보고 저도 새해인사하고 싶어짐! ㅋㅋㅋㅋㅋㅋ 반님두 새해복많이받으시구, 올해에도 함께 읽어주시어 고맙습니다!

잠자냥 2019-12-29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 저 번역 어쩔 ㅋㅋㅋ 이거 정말 매우 유익한 포스팅입니다! 전 출판사 이름만 보고 을유 것으로 살까 싶었는데 정말 큰일날뻔 했네요! 와 진짜 을유 버전은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ㅎㅎ

공쟝쟝 2019-12-29 11:52   좋아요 1 | URL
덥썩! 이렇게 제2의 피해를 막았네요! (그리고 돈을 많이쓰고..) 하하, 잠자냥님두 요책 내년엔 꼭 도전하고 승리하시기를 바래요!

원더북 2019-12-29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2의 성 읽어보려고 두 가지 번역본 중 무얼 선택해야 하나 고민 중이었는데 이 글이 없었더라면 저도 제2의 피해자가 될 뻔했네요 ㅎㅎ 감사합니다~ 덕분에 헤매지 않고 열심히 읽어보겠습니다^^

공쟝쟝 2019-12-29 17:55   좋아요 0 | URL
열심히 읽구 쓰실 원더북님의 페이퍼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보부아르 만세~^^

라로 2019-12-29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전 다른 내용의 책 같아요.ㅎㅎ 진짜 좋은 정보에요. 그래서 30여년 전부터 번역책에 대해 느꼈던 막연한 두려움이 바로 이런 이유였겠다는 깨달음의 순간이!!!ㅎㅎ어쨌든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나는 한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공쟝쟝 2019-12-29 17:57   좋아요 0 | URL
요즘의 번역서는 입에 착착 붙더라구요! 라로님두 연말 마무리 잘하시구 새해는 더 행복하시기를🙏

syo 2019-12-29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상 ㄷㄷㄷ에서 올린 제2의 성 페이퍼 가운데 가장 유익한 페이퍼가 아닐까요?? 그리고 5만원 으하하하하하하하

공쟝쟝 2019-12-29 18:54   좋아요 0 | URL
누군가의 (그 누군가는 누가될 것인가!?) 5만원을 희생하여, 제2의성을 도전하실 분들께 유익함을 드렸다면.... *

야리바바 2019-12-31 07: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공쟝쟝님의 이 긴 글을 읽으며 공감했습니다. 전 이렇게 어려운 고전 아니고, 그냥 제인 오스틴의 고전들을 읽으면서 여러 출판사의 책들을 읽었었는데, 을유문화사의 책을 읽으며 그 미묘하지만 거슬리는 번역에 책을 덮고 다른 출판사의 책을 읽었거든요~ 찰스 디킨스의 작품들은 동서문화사가 문안하더라구요~ 오리지날 삽화도 있고... ANNE전집도 동서문화사가 컬러풀하고 완전 끝까지 출판되어서 좋더라구요~ 암튼 번역의 중요성과 동서문화사의 중간은 가는 번역에 공쟝쟝님의 심정과 공감해서 글 남겨요^^ 해피 뉴 이어입니다😀

공쟝쟝 2019-12-31 22:25   좋아요 0 | URL
으허허! 제인오스틴 찰스디킨스! 고전문학을 무려 번역까지 비교하며 읽으시는 이웃님이시군요!! (전 올해 그쪽분야는 한권 읽은 고전 못 읽는 병을 앓는 사람입니다) 비결 좀 알려주세요...!!!
내년엔 야리바바님 본받아서 문학도 좀 보고 그래야 할텐데요 ^_^ 오늘 너무 너무 추웟지요? 감기조심하시구 새해복많이 받으세요~!! :)

추풍오장원 2020-01-05 15: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도움이 되는 글이었습니다. 이정도로 심각한 번역일줄은 몰랐네요...

공쟝쟝 2020-01-05 23:03   좋아요 0 | URL
하하, 역자도 노력 하셨겠지만... 역시 너무 오래전 번역이었달까.. 도움 드리게되어 기쁩니다! 새해 복많이 받자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