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02) 만약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그 때의 순간으로 돌아가서 젊은 나를 만날 수 있다면, 이야기해보고 싶다. 그가 가진 생각과 기분과 세계관과 계획에 대해서 들어고보 싶다. 그리고 나는 단 한마디도 그를 가르치려들지 않을 것이다. 다만 고맙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나의 불완전한 삶 전체에서 잠시나마 충만함의 기억을 선물해준 순간이었으니까.(...) 그래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슬픈일이다. 어른으로 성숙해 간다는 것은 세계의 복잡성을 초연하게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세계의 복잡성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가 완전함과 충만함의 허구성을 이해하였음을 의미한다. 완전함과 충만함을 내려놓은 사람에게 행복은 없다.”
이 구절에서 놀랐다. ‘단 한마디도 그 때의 나를 가르치려들지 않을 것이다’라는 단호한 결심. 나라면 어떨까? 라고 생각했다. 가르칠 것이다. 그 때의 내가 대화는 커녕 입도 벙긋 못하도록. “그 사람은 만나지마. 그애를 사귄다면 좋은 경험이 될거야. 그들의 목소리를 너무 신경쓰지마. 그 이야기는 마음에 담아두지마. 겨우 그 일로 그렇게 슬퍼하지마. 그 후배는 너무 믿지 않는게 좋을거야. 그 공부는 별 도움이 안돼. 네가 너무 순진하다고 생각하지 않니? 술 좀 그만 먹어. 끼니 좀 거르지마. 요가나 스트레칭을 열심히해. 빨리 경제적으로 자립해. 니가 믿는 것이 너를 가장 힘들게 할거야. 적당히 의심해. 그 사람 존경하지마!” 등등등. 아.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다. 혹시 모르니까 리스트를 좀 적어둘까.
그러나 알고 있다. 그 때의 나는 아주 도전적인 눈을 하고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지금의 나에게 말하겠지. “낙장불입이야. 내가 책임져. 난 지금 누구보다 진실하고 진지한 선택들을 하고있다고. 잔소리 그만.”
믿는 구석이 있었다. 완전함과 충만함으로 당당했고, 이상에 가슴이 뛰었다. 용감하고 겁없는 그때의 반짝이는 나를 떠올리면, 한편으로는 부끄럽지만 보다 더 많이 사랑스럽다. 그래도 덜 사랑스러워도 좋으니까 조금은 늙은 생각을 하면 좋겠다고, 지금의 나는 생각한다. “너무 진지했고 너무 마음을 많이 바쳤기 때문에 훗날의 네가 많이 부서질지도 몰라. 그러니 너무 열심히 하지마.”
*
팟캐를 한편도 빼놓지 않고 들은 것과는 별개로, 채사장의 책을 한권도 읽지 않았었다. 열한계단은 어쩐지 읽고 싶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도서관에 꽂혀있어서 빼온 걸지도) 그리고 책을 읽는 순간, 책이 .. 들렸다!!! 정확히는 책에서 채사장의 목소리가... (-_-;;) 여러분,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채사장 톤으로)
성경과 자본론이라니.
읽을 생각을 하면 하품부터 나올 것 같은 고전들을 쉽고 간결하게 설명해주는 부분은 딱 지대넓얕의 그 느낌이지만, 사실 이 책이 좋았던 이유는 고전마다 담겨있는 채사장의 성장서사였다. 덮고나니 한편의 잘 만든 성장 영화를 본 것 같기도. (일러스트 내 취향)
넘겨짚자면 채사장이 정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책에 앞부분 보다는 뒷부분에 있는 듯하다. 티벳사자의 서-우파니샤드 등으로 정리된 죽음과 내세, 혹은 내면과 영적자아(?) 같은. 팟캐스트 지대넓얕을 통해서도 슬쩍 내비친 것 같긴 한데, 정작 인기를 얻은 것은 ‘세계에 대한 쉽고 재밌는 지식’이라는 컨셉이었던 듯 하고.
“(p.333) 우리가 이 세상에 온 이유는, 현시대가 구획지어놓은 과학과 학문이라는 영역 안에 머물며 거기서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신기한 것들을 만나고 놀라워하며 삶의 의미를 풍부하게 이해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합리주의라는 근현대의 기준 안에 당신의 드넓은 영혼을 구겨넣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죽음 이후에 대한 논의가 미스터리 서가에 버려져있는 것이 아쉽다. 이것은 우리 시대가 죽음 이후의 문제를 어덯게 다루고 있는지를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여주기 대문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사후에 대한 논의 없이 삶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은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 죽음 이후를 배제하고 삶의 의미를 찾는 행위는 실제 인간의 삶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다.
(...) 두가지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죽음에 대한 학문적 접근과 당신 스스로의 이해. 학문은 죽음 이후에 대해 논의하지 않아도 문제 없지만, 당신의 삶은 그렇지 않다. 당신이 서구 근현대 합리주의의 파수꾼이 아니라 자기 삶을 만들어가는 창조자 이길 바란다.”
아마 최근에 나온 책이 이 주제를 담고 있지 않을까 싶다. 대중적인 소재도 아니거니와 약간 사이비 냄새도 나고(ㅋ) 해서 돈 안되는 것과 비효율을 증오하는 한국 사회에서 이 전작들 만큼 먹힐라냐 싶긴 한데- 그래도 채사장인데 먹히겠지뭐. 괜한 남 걱정...
<열한계단>을 읽고나니 개인적으로는 채사장이 권하는 이쪽 분야(죽음, 자아, 영적 세계, 내세, 내지는 초월)에 관심이 생겼다. 물론 팟캐스트로 들을 당시에는 “와, 이 인간 특이하네.” 정도로만 생각했다.
*
“(p.401) 나에겐 경계가 없다. 나는 모든 것에서 이어져 있다. 삶과 죽음에서, 내면과 외부에서, 자아와 세계에서. 그래서 이것이 슬픔이 된다. 출구는 어디에 있는가? 나라는 구면의 밖으로는 어떻게 나가는 것인가? 하지만 그런 것은 없다. 우리는 의식의 지평을 떠나지못할 것이다. 우리는 나를 벗어나지 못한다.”
책의 처음에서 세네카의 격언 "출항과 동시에 폭풍을 만나 표류했다고 해서 그가 긴 항해를 마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항해를 한게 아니라 오랜기간 수면위에 떠있었을 뿐이다."을 언급했던 채사장은 책의 말미에서 다시금 바다로 돌아온다.
인생이라는 항해를 시작하며 열한계단-열두 계단 째를 올랐지만 그가 도달한 어떤 결론은 - '자아'란 결국 수평선(눈에 보이는 경계이지만 사실은 어져있는, 이어져있음으로 닫혀있는)과 같지 않겠느냐는 말 같기도 하고. 알듯 말듯. 일종의 열린/닫힌 결말인건가.
듣기만 하다가 글로 읽고 나니, 채사장은 생각보다 진지하고 또 진지하고 지극히 진지한 사람인 것 같다. 자기 삶을 어떤 서사로 구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탁월한 이야기꾼이기도 하고. 어쩌면 사춘기 때 이후로는 한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 없는 주제들에 대해 채사장 덕에 생각해보게 될지 모를 일이다. 내일은 채사장의 다음책을 읽어봐야겠다. (덧, 그러고 보니 알쓸신잡 제목 지대넓얕 따라했다더니.. 정재승의 ‘열두 발자국’의 제목도 채사장의 ‘열한 계단’을 카피한 것이 아니고 무어란 말인가!!!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