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 학살의 문화에 대한 어느 목회자의 수기 통일역사문화신서 1
최태육 지음 / 작가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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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대단한 것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의식 과잉의 20대는 가고, 일상을 조근조근 밟아나가는 것이 새삼스러운 요즘. ‘무엇’보다 ‘왜’보다 ‘어떻게’라는 물음이 따라 붙는다. 이 물음표의 단어는 삶이 조금 축적 된 후라야 중요해지는 것 같다. 쉽게 설명되지 않는 것들 - 방법과 시간을 들였을 때 천천히 나타나는 류의 어휘랄까.


그때는 ‘무엇’이 중요했다. 뜻, 혹은 명분 어쩌면 실리였을 수도 있겠고. 그러나 지나고 나면 남는 것은 ‘어떤’이다. (그 무엇을 위해)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만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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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단종.
많은 것을 이루어낸 세조.
그러나 사람들은 세조의 업적보다 영월로 유배된 단종의 산책길을 기억한다.
수백 년의 역사를 지나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한 것은 세조가 ‘무엇’을 이루었느냐가 아니라, 단종이 ‘어떻게’살았느냐이다.
목숨을 부지하기도 힘들었던 단종에게 무엇을 이루겠다는 목적이 있었겠는가?
이 땅의 세민도 단종이 무엇을 이루었는지 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어떻게 살았는지를 기억할 뿐이다.
단종과 세조의 삶은 이른바 좋은, 심지어 효율성이 있는, 그래서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목적을 달성할 때조차도, 어떻게 행동했는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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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육 목사의 수기이다. 그러나 목회수기가 아니다. 그는 강화에서 목회활동을 하던 도중 교인들의 삶에서 한국전쟁과 학살에 관한 흔적을 발견했다. 그리고 기독교와 학살 관계를 연구하게 되었으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조사위원으로 활동했다. 과정에서 들은 바와 느낀 바를 적은 책이다. 특이한 것은 정리된 논문 형식이 아니다. 읽으면서 나는 마치 시같다. 라고 생각했다. 쉽게 읽히지 않았고 머릿속에 ‘어떻게’로 생생해졌다.

그런 것 같다.
가까운 과거에서 그들이 무엇을 위해서 싸웠고, 또 왜 그렇게까지 잔인하게 사람을 죽였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당시를 살다간 이들에게는 그 것이 중요하겠지만, 그를 살지 않은 많은 이들에게는 그들이 벌인 ‘어떤 참혹함’만이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만이 전해지겠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는지, 어떻게 그런 짓을 시킬 수 있었는지, 어떻게 그렇게 잔혹할 수 있었는지. 말이다.

역사를 지배하고자 하는 이들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다.
두환이 광주학살을 저지른 데에도 ‘무슨’ 명분은 있었을 것이다. 그것도 없이 그렇게 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두환을 여전히 믿고 따르는 이들은 ‘무엇’을 보라고 말한다. 당시의 ‘북괴’를 보라고. 그가 구현한 ‘업적’을 보라고.
역사를 살고 있는 이들은 ‘어떻게’로 바라본다. 계엄군이 광주시민을 어떻게 학살했는지에 먼저 직관적으로 반응한다. 두환, 네가 ‘무엇을 하려 했는지’는 중요치 않다. 네가 ‘무슨 짓을 어떻게 했는지.’를 보라.
우리는 기억한다. 그들의 가치관과 이념이 아니라 그들의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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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기라기도 하고, 만기라기도 알려진 백정,
경찰 황씨가 총살을 하다가 힘들면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 만기에게 쏘라고 했다.
정신연령이 낮았던 만기.
정신지체 장애인을 이용한 것이다.
그는 그렇게 살해도구가 되어 사람들을 학살하였다.
자기 손에 피 묻히기 싫었던 경찰은 빌라도처럼 막걸리에 손을 씻었다. 그렇게 최소 120명이 살해되었다.(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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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나오는 증언자들은 각양각생이다. 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노파, 사람을 다시는 믿을 수 없는 피해자, 70년 전 일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증언하기위해 평생 사건을 곱씹었을 할아버지, 남의 일 인양 관찰자의 시점에서 말하는 학살 가담자, 죄의식이 있는 자, 죄의식이 없는 자. 북을 치는 할머니,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을 느낀 사람. 끝까지 반성하지 않으며 본인에게 도래할 천국을 위해 열심히 교회를 다니는 가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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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서산·태안에서는 무엇인가를 관철시키겠다는 두 가지의 목적이 충돌하였다.
그 결과 사람의 상식과 양심, 그리고 일상적 삶이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무엇인가 이루겠다는 목적의식이 경직되면서 사람들이 학살되기 시작하였다.
나는 그 실상의 일부를 조사하고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를 기록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아마 무엇인가를 관철시키고자 하는 목적의식에 대한 경고일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하는 사람들, 기업, 회사, 시민단체, 학교, 신념에 넘치는 종교단체, 이념에 넘치는 국가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무엇이라는 목적이 삶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삶을 정당화하는 것은 그가 어떻게 살았느냐 일 것이다.
강화 교동면에서는 한국전쟁이 발생한 지 반세기가 지나도 가해자 씨족과 피해자 씨족이 함께 농사를 짓지 않는다. 소원면에서 정씨와 국씨는 한 그릇에 담겨 있는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다. 다소 불분명하고 지엽적이지만 전쟁과 학살의 영향은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전쟁과 학살이 사람들에게 남겨 놓은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동네 사람들끼리 서로 죽일 수 있다는 두려움이다. 국가가 국민을 죽일 수 있다는 것, 아저씨가 조카를 죽일 수 있다는 것, 제자가 선생님을 죽일 수 있다는 것, 친구가 친구를 죽일 수 있다는 두려움이다. 바로 이 두려움이 사람에 대한 불신으로 발전한 것이다. 학살은 사람에게 두려움에 뿌리를 둔 근원적 불신을 심었다.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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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삶을 대하는 방식은 사회·역사 속에서 어떤 식으로든 작동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를 분류, 배제하는 사고방식은
‘어떻게 사느냐’ 보다 ‘삶에서 무엇을 더 이루’고자 했던 사람들의 일부는
전쟁이라는 비극을 만나 타자를 절멸시키는 ‘학살’의 옹호자·가담자·가해자로 수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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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통해 ‘무엇’이 아닌 ‘어떻게’를 배웠다. 
‘학살’의 역사를 제대로 치유하기는커녕 직면조차 한 적이 없는 대한민국에서 혐오, 분류, 배제는 당연한 귀결이다. 국가와 이웃에 의한 직접적인 살해 – 살해에 대한 입 뻥긋 하지 못함 까지도- 그야 말로 ‘존재의 소멸’이라는 공포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을 한국인의 집단 무의식은 그냥 그저 세대가 간다고 해서 사라질리 없다. (그것은 또한 나의 무의식일 것이다)

사회적으로 어떤 해법을 찾아야할지는 알 수 없지만 나 개인은 더러 이런 생각을 하며 지낸다.
당장 쉬운 태도를 갖추지 말아야지. 내가 쉽다는 것은 이미 의식화조차하지 못한 채로 생각이 끝나 버렸다는 것이고, 그것은 멈춰버렸다는 것. 어떤 완고함. 그것을 경계 해야지.

삶에서 ‘어떻게’가 중요해진다는 것은 만들어 가겠다는 시간을 염두한 다짐이다.
그러니까, 그만큼 비워야 하고 물렁물렁해야하고 움직여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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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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