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가
천주희 외 지음 / 낮은산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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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쳐있다.
가족과 애인, 아주 안전한 친구관계 몇몇.
독서와 생계, SNS. 1년 가까이 된 것 같다.
쫄았다. 사람들한테.
관계에 들여야하는 ‘마음’이 마른걸레 쥐어짜듯 했다.
마음이 안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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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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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크려있는 동안 수심깊은 곳에 헤묵어있는 내면의 상처를 들여다보았고, 내가 세상에 얼마나 겁먹어있는 지도 알게 되었다. 나를 돌볼 수 있을 정도로만 강해지자. 그 때 까지, 누구도 돌보겠다고 섣불리 노력하지 말자. 그렇게 마음먹고 있었다. 계속 침잠해 있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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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취약하다. 병든 개와 걸인 여자 같은 처지가 아니더라도 사람은 누구나 취약하다. 누구나 돌봄이 필요하고 돌봄 속에서 살아가고 죽는다. 모든 인간의 공통된 지위로서의 존엄성은 인간의 독립성과 자립, 자율성만이 아니라 인간의 ‘취약함‘을 포함한다. 약하고 상처 입기 쉽기에 그것을 돌아볼 줄 아는 사람들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의 취약성이다. (...) 상처와 취약함을 부인하는 사람은 의존과 돌봄을 열등함, 또는 무력함과 바꿔치기한다. 상처와 취약함을 부인하는 사람은 고통스러워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존엄성을 함부로 취급한다. 도움이 필요한 것은 열등한 것이 아니고 도움을 받는 것이 무력한 것도 아니다. 그렇게 낙인찍는 사회가 열등함과 무력함을 인간의 취약성과 의존성의 가림막으로 사용할 뿐이다. 인간이 존엄하다면, 잘나고 제 힘으로 설 수 있어서가 아니라 인간의 상처와 약함을 서로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상처가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계기라고 한다면, 상처에 대해 뭔가 하려는 반응이 존중일 것이다. (p.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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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주면 마음을 너무 많이 빼앗긴다. 그게 미치도록 힘들었다.
요즘은 다 끊어낸 그 최소한의 관계에서마저 허우적거리고 있음을 느낀다.
취약함을 인정하고도, 누군가에게 의존하기가 어렵다.
애초에 건강한 ‘의존’이란거 안해봐서 잘 모르겠다. 침범하거나 흡수하거나 흡수되거나.
그래도 안다. 손 내밀어야 한다는 걸.
타인을 ‘실감’해야 한다는 걸.
그의 약함을 서로 알아보고 싶다. 건강한 의존을 하고 싶다.
내가 알아본 그의 상처가 나의 상처를 열등하게 바라보지 않았으면 싶다.
존중하고 싶다. 너를.
그래서 한발짝 더 나가고 싶다. 인간.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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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1
부모가 사는 세계는 침묵의 세계 이지만, 자녀는 두 세계를 오가고, 부딪치고 충돌하며 세계를 점점 확장해 나가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나도 ‘장애‘라는 말로 설명할 수없는 세계가 어떻게 만나고 확장되는지 느낄 수 있었다.
너무 당연한 것이지만, ‘장애‘라는 말로 장애인을 동질한 집단으로 범주화할 수 없다. 그리고 어떤 세계든 그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그곳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 듣지 못하는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타인에게 손짓과 표정과 몸짓으로 신호를 보낸다. 타인이 나의 손짓을 바라봐야 하기 때문에 최대한 친절하고 크게 표현해야한다. 그 이야기를 전달 받은 사람은 상대의 손짓이 끝날 때 까지 응시해야한다. 나는 상대에게 손짓으로 신호를 보내고, 상대는 응시할 수밖에 없는 관계. 그 사이에서 언어와 관계의 윤리성을 배운다. 다큐에서 한창 김장준비로 바쁜 엄마에게 불빛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아빠의 모습을 보았다. 소리 없는 세계는 목소리보다 다양한 손짓과 눈빛으로 다양한 언어를 창조한다는 것을 배웠다. 우리가 다중 세계에 살고 있다는 감각은, 신비롭고 어렵고 깊은 사유 속에서 만들어진다.

p.47
‘마음에 들면 원하는 대로 주겠다‘고 하니, 당시 나로서는 이게 웬떡이냐 싶기도 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돈이 오가는 세계에서 ‘마음에 들면‘이나 ‘원하는 대로‘같은 말이야 말로 가장 악질적인 어구일수 있다는 걸 몰랐다.

p.49-50
‘무제한의 수정‘과 ‘원고 불채택(퇴짜, 작업비 지급일 지연)‘등을 제멋대로 행사한다. 노동 시간에 따른 임금을 지불해야한다는 대원칙은 실종된다. 약속보다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수정해도, 정해진 결과물에 따른 최종 지급비는 변하지 않는다. ‘을의 을‘ 입장에서는 다음번 일감도 받아야 생계가 유지 가능하기 때문에, 항의 한번 제대로 할 수 없다.
업체 입장에서 갈수록 많은 일을 외주화 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비용을 절감하고, 손쉽게 노동자를 쓰고 버릴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어떠한 책임‘도 없이 사람을 사용하고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이용하는 데 그 사람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이야 말로 외주화의 가장 큰 매력이다. 책임없는 자유, 리스크 없는 이익, 일화용처럼 쓰고 버릴 수 있는 인적자원에 대한 열망이야말로 이 시대의 꿈이자 시대정신이다.
...
‘책임없는 자유‘는 최종적으로 ‘죽음의 외주화‘로 실현된다.

p.77
대학원이라는 조직에 10년 넘게 자신의 청춘을 바쳐온 젊은 연구자들은, 자신들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주변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잘못된 사람이 나간 것, 이라고 간편하게 규정지어버렸다. 나 역시 그랬다. 같은 처지에 놓인 이가 한 절박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보면서도 응원과 지지보다는 외면과 비난을 택했다. 나는 그들에게 공감하기 보다는 조직의 논리에 공감했다. 나를 감싼 구조가 잘못되었다고 믿었다. 나는 그렇게 주변인들과 함께 괴물이 되어갔다. 누군가의 면전에 퍼붓는 욕설이나 물리적 폭력만이 무기가 아니다. 외면하는 것 역시 당사자에게 겨누는 날카로운 칼이 된다.

p.97
여기서 모든 인권의 초석인 모든 사람의 공통된 지위로서의 존엄성은 자리를 잡기 어려워진다. ‘공통된 지위‘를 부인하게 되면 위계와 서열을 정해야하고, 위계의 가장 센 정당화는 ‘열심‘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다. 존재 자체를 이유로(이주 노동자다, 여성이다, 장애인이다 등등) 보통의 ‘열심‘에 낄 기회조차 없는 사람들은 이중 삼중으로 차단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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