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엔 오랜 민병대 militia‘ 의 역사가 있다. 이는 공권력이 확립되기 전부터 넓은 지역에 흩어져 살던 거주민들이 만들어낸 자기 방어 수단이지만 침략이 곧 ‘개척‘ 이었던 역사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총기 규제를 어렵게 하는 것은 역사적 이유보다는 총기 판매상들이 자신의 ‘재산권‘ 이 침해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미국총기협회는 미국에서 가장 강력한 로비단체 가운데 하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국의 운명은 이제 종교적 기적에 의존하게 되었다. 전쟁의 합리적인 근거가 얼마나 빈약하기에 대통령이 정당화로 제시하는 유일한 이유가 ‘신이 원하신다고 믿기에‘ 며, 이라크전쟁의 유일한 정책이 ‘기적을 바라는 믿음 뿐이란 말인가? ‘기적‘은 부주의한 사람들을 더 부주의하게 만들뿐이다. 신앙의 확신 속에 사는 사람들은 위험스러운 상황이나 도덕적 회의 문제로 고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그들은 미국 청년들을 보이지 않는 적들이 포진한 사막 한 가운데로 보내는 문제를 두고 머리를 쥐어뜯을 필요가 없다. 설사 병사들이 적절한지원이나 방어시설, 사태에 대한 합리적인 판단이나 문화차이에 교육도 없이 파병되는 경우라 하더라도 말이다. 대통령이 믿음 대신 냉철한 현실에 주목했더라면 우리 군대가 적들의 손쉬운 표적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모린다우드, ‘신앙의 희생자‘, <뉴욕타임스>, 2004년 10월 23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물론 이런 경험이 없을 뿐 아니라 흑인들과 이야기조차 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한국인들의 이런 인종적 고정관념이 한국 사회와미국 교민사회를 지배하고 있는데 이는 흔히 두 가지 상반된 결과로 나타난다.
하나는 스스로를 ‘유색인종‘ 이라고 부르는 자기 모멸적 열등의식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무시하고 지배계층과 스스로를 상상적으로 동일시하는 데서 나타나는 정치적 성이다.
한국의 언론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유색인종으로는 처음으로 .……." 나 "한국 찾은 외국인들 ‘원더풀‘ 연발" 혹은 "한국인, 미국 명문대학 합격" 등의 발언이 열등의식에 근거한 것이라면, 다른 소수인종과 연대하기를 거부하고 백인 중산층 위주의 정책을 펴는 공화당을 지지하는 정치적 보수주의는 상상적 동일시의 결과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국의 학교와 기업들이 자신이 속한 사회를 위해 적극적으로 베풀고헌신하는 것은 마음이 관대해서가 아니다. 그들 자신들이야말로 사회의 가장 큰 수혜자임을 잘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고귀한 ‘희생정신‘ 이 아니라 자신이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올바로 아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다.
몇 년 전 한국에서 ‘일류 엘리트론‘으로 유명했던 한 기업 총수가 대학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으려다 학생들의 제지를 받은 사건이 있었다. 이 기업이 여러 학교에 기부금을 내는 것은 분명히 칭찬받을 일이다. 그러나 그 ‘사회 환원‘은 어디까지나 ‘자신‘ 의 차원이 아니라 사회에 진 빚에 대한 ‘보은‘ 의 차원이어야 한다.
만약 삼성의 기부 행위가 감사받을 만하다면, 20여 년 전 소니 ‘워크맨을 마다하고 별 세 개 로고가 찍힌 ‘마이마이‘ 를 사주었던 한국 소비자들의 ‘기부 행위‘ 역시 감사받아야 마땅하다. 당시 그 중소업체의 물건을 애국심만으로 써주고 아낌없이 조언함으로써 세계적 기업으로 키워낸 것이 국민들이었기 때문이다. 평범한 시민들이야말로 그 기업을 ‘먹여살린 은인이 아닐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러한 무관심을 위해 필요한 것은 점원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을 만큼넓거나 시선을 적당히 차단해주는 공간과 구조다. 독서에 불편함은 없지만 적당히 얼굴을 가려주는 간접조명과 부분조명도 필수적이다. 미국인들은 돈을 내고 산 무관심의 안락함 속에서 제 할 일을 하다 소리없이 하나둘 일어섰다.
흥미로운 것은 한국의 커피숍은 스타벅스를 포함해 대부분 더 밝고 개방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객들은 활기찬 분위기 속에서 크게 웃으며 끝없이 대화를 나눈다. 조용히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거나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 앞에조차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친구가 앉아있기 일쑤다. 한국의 커피숍은 분명히 미국의 그것과는 다른 공간이다.
지난여름, 한국의 한 커피숍을 석 달 동안 일터로 사용한 적이 있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찾아갔을 때 그곳의 직원들은아쉬워하며 커피와 케이크 값을 대신 내주었다. 미국에서는 느낄 수 없는 인정이 오가는 한국사회의 축소판을 보는 순간이었다. 그래서일까?
오래 머물기 편한 쪽은 미국 커피숍이지만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곳은언제나 한국인 까닭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