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물만두 > 느닷없이 나의 허를 찌르는 슬픔에 대하여...
마지막 기회 1
할런 코벤 지음, 이창식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4년 3월
절판


느닷없이 나의 허를 찌르고 들어오는 것은 슬픔이란 놈이다. 슬픔은 내가 눈치채지 못하게 나를 사로잡는 것을 좋아하는 듯하다. 슬픔이 밀려오는 것을 눈치챈다면, 그것을 처리하진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 조종하거나 숨길 수는 있다. 그러나 슬픔은 술 속에 숨어 있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난데없이 튀어나와 나를 놀라게 하고, 비웃고, 정상인 척 가장하고 있는 것을 가차없이 벗겨 내길 좋아한다. 슬픔은 나를 달래 잠들게 하고, 그럼으로써 그런 기습 공격에 더욱 취약하게 만든다.

-112-113 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마태우스 > 시골의사님, 존경합니다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 1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
박경철 지음 / 리더스북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모과양님이 올린 시골의사 얘기를 두어편 쯤 본 뒤, 그 다음부터는 아예 읽지 않았다. 유려한 글솜씨로 보건대 머지않아 책으로 나오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구세대라 그런지 인터넷으로 보는 것보다 책으로 읽는 게 더 감동적이라고 생각하며, 컴퓨터 모니터를 오래 들여다보는 건 시간이 아깝지만 독서는 고상한 취미라는 편견을 갖고 있는 탓이다. 책을 읽어보니 책 나오길 기다린 게 잘한 것 같다.


이 책은 한 외과의가 의사 생활을 하면서 겪은 일들을 담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때로는 안타까워했고-아이가 죽자 목을 맨 엄마의 사연-충격을 받기도 했으며-치매노인 얘기를 읽으면서-진한 감동을 받았고-27세 미녀의 사연에서-분노한 적도 있었다-죽을 뻔한 걸 살려놓았더니 사소한 일을 가지고 의사 멱살을 잡은 환자 얘기에.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평생 동안 경험하는 희로애락의 양은 아마도 일반인들의 만 배쯤은 될 것이다”라는 저자의 말처럼, 많은 의사들이 책 몇권 분량의 이야기를 마음속에 담고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처럼 감동적인 책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을 것이다. 담담한 듯한 그의 문체는 환자의 고통을 실제처럼 느끼게 해주고, 진한 감동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그러니 여기 실린 이야기들을 통해 “내가 그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하고 싶었고, 우리가 말하는 그들이 곧 우리들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음을 공감하고 싶었다”는 저자의 의도는 100% 충족된 게 아닐까.


저자 자신은 물론이고 여기 출연하는 의사들은 참으로 따뜻하고 좋은 분들이다. 아니, 그게 너무 지나쳐 현실의 의사 같지가 않다. 그분들은 환자들을 마치 내 가족처럼 돌보며, 어려운 일이 생기면 만사 제끼고 달려간다. 나병에 걸린 사람을 수술해 주는 장면도 그랬고, 장애를 가진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동료들과 돈을 모아 컴퓨터를 선물”하기도 한다. 대동맥이 절단된 환자를 수술하기 위해 대학 때 은사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는데, 회식 자리에 있던 그 은사는 전공의 몇을 데리고 밤 12시가 넘어 대구에서 안동까지 와 수술을 해준다. 저자의 친구라는 분이 휴대폰으로 도움을 요청한 여자 환자에게 한 말, “진화야! 내 말 잘 들어! 지금 당장 내가 근무하던 종합병원 응급실로 가! 내가 그쪽에 연락해 둘테니 지금 당장 그리로 가!” 그러고 나서 그 친구는 대구에서 차를 몰고 안동으로 향한다. 의사를 숱하게 봤지만, 이런 의사들을 과연 몇이나 봤던가.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이나 책날개에 있는 저자 사진을 들여다봤다. 처음에는 별 느낌이 없었지만 책을 읽어 갈수록 저자의 모습에서 인자함이 느껴지고, 다 읽었을 즈음에는 그 사진이 신선을 찍어놓은 것처럼 영험함이 느껴진다. 존경합니다, 시골의사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로드무비 > 사랑한다는 말은 없어도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
정수일 지음 / 창비 / 200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슬람 문명에 별로 관심이 없는 나는 이슬람과 관련한 정수일 선생의 명성은 들었으되 역서고 저서고 간에 그분의 책 한 권 읽어보지 않았다. 그가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수감되었다는 소식도 석방되었다는 소식도 풍문으로 들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라는 책을 읽고 싶었던 것은 이 책이 그가 그의 아내에게 보낸 옥중편지 묶음이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편지글을 엮어내며'라는 제목의 맨 앞글에서  편지는 공개하지 않는 것이 상례인데 이를 어기고 책을 내는 것에 대해 당혹스럽다고 밝혀놓았다. 그리고 글의  마지막에 '분단의 아픈 시대를 살아가는 한 지성인이 남긴 글로 읽어주기를 바란다'고 써놓아 나는 무척 당혹스러웠다. 자신을 지성인이라고 이렇게 당당하게 칭하는 분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의 졸고를 어쩌고 저쩌고 하는 상투적인 겸손도 지겨웠지만 자신을 지성인이라고 너무도 당당하게 표현하는 부분이 멋져보이면서도 조금 생경스러웠다고 할까.

그가 옥중에서 아내에게 써서 보낸 이 편지들은 나중에 책으로 묶을 것을 염두에 두고 쓰신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엄숙하고 정갈하고 한결같을 수가 없다.

13, 4년 전 나도 광주교도소에 몇십 년째 복역중인 한 장기수 어른과 몇 년 동안 꽤 많은 편지를 주고받은 적이 있다. 환갑을 조금 지난 분이었는데 얼마나 다정하고 재기가 넘치는 편지를 쓰시는지 그의 편지를 읽으면 옥중에 있는 사람과 바깥에 있는 사람과, 또 우리들의 연령이 바뀐 것 같다고 느꼈다. 내가 편지 속에서 느꼈던 넘치는 그 에너지대로 그분은 출소하자마자 옥중에서 혼자 책으로 공부한 한의학 지식을 살려 민중탕제원에서 일을 하시고, 또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식까지 올리셨다. 나는 신문을 통해 그분의 출옥 소식을 듣고 결혼 소식을 들었다.  아이를 업고 남편과 신림동인지 봉천동인지 무슨 성당에서 열린 그의 결혼식에 참석했지만 인파를 뚫지 못하고 먼빛으로 뵙고만 왔다. 영화 <송환>을 보러가서 극장 화면을 통해 본 내 옛 펜팔 남자친구(?)는 여전히 젊고 패기가 넘치는 모습이어서 기분이 좋았다.(언젠가 페이퍼로 쓴 적이 있다.)

1980년대 말, 몇 년째 줄기차게 백수였던 나는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으며 한 구절 한 구절에 너무 열광한 나머지 엎어지고 자빠졌다. 신영복 선생은 나에게 그 책을 통해 용기를 줌으로써 인생에 어떤 모션(!)을 취하게 했으며 결과적으로 나는 취직이 되어 서울로 올라왔다. 이렇듯 책은 어떤 사람의 인생 행로를 구체적으로 바꾸기도 한다. 이 정도면 내가 사람들의 옥중서신에 특별한 관심을 갖는 이유가 이해 될 것이다.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는 담담하고 정갈하되 어쩌면 조금은 심심한 옥중서신이다. 어느 날 불쑥 엄습한 외로움과 괴로움을 아내에게 에둘러 호소할 법도 한데 눈을 씻고봐도 그런 기미는 찾아볼 수 없다.

'쓸데없는 양념을 치지 않은 담백하고 순수하고 평범한 삶이 진짜 삶'이라는 일절이나 , 민들레를 일러 '세상에서 가장 흔하고 수수한 것이 가장 아름답다'고 표현하는 것에서 그의 철학의 일단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배고프면 밥먹고 곤하면 잠잔다' '새끼줄을 톱삼아 나무를 베다'  '얼마간 부족한 것이 행복의 필수조건' 이라는 소제목들,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는 이 책 제목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서울구치소에서 대구교도소로 이감하기 전날 면회온 아내는 이렇게 말한다. "입산수행하는 셈치고 마음 편히 보내세요." 옥중의 남편에게 이렇게 말하는 아내라니! 그녀의 편지까지 몇 장 실었으면 정말 얼마나 좋았을까?

화답이라도 하는 듯, '감옥은 한낱 외로움과 괴로움의 공간만은 아니고 서로의 사랑과 믿음, 연대를 확인하고 굳히는 공간이기도 하오.' 출옥 전날 그가 아내에게 옥중에서 마지막으로 쓴 편지의 한 구절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그가 얼마나 이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인지 고결한 학자인지 실천적인 지식인인지 존경할 수밖에 없는 위대한 인간의 풍모를 보았다. 읽고 있는 책 여백에 녹두장군의 시를 메모하고, 또  국어사전에서 만난 낯선 우리말을 빽빽히 독서중인 책의 여백에 적어가며 복습한 사진을 보고는 잠시 숙연한 기분에 젖기도 했다.  결혼기념일 날 아내에게 쓴 편지  '너그럽고 검소하게'는 내 수첩에 몽땅 옮겨 적고 싶었고......

어쩌면 들뜨고 조급한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읽어내려간 이 책에서 나는 저자가 말한 많은 것을 놓쳤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랑한다'고 직접 말로 표현하진 않았어도 그가 아내에게 보내는 무한한 신뢰와 사랑의 마음은 읽을 수 있었다. 자신의 민족과 학문에 대한 한 지성인의 절절한 회고록을 두고  무슨 사랑 타령이냐고? 글쎄 말이다. 그런데 난 그런 이상한 독법으로 이 책을 읽었다.

 


'수고하는 당신에게'라고 써내려간 선생의 편지. 그는 아내에게 어떤 행운을 주고 싶었던 것일까?  직접 만든 듯한 네잎클로버 도장으로 네 페이지의 편지 귀퉁이를 맞춘 것이 눈에 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아영엄마 > 겸허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보름달의 전설
미하엘 엔데 지음, 비네테 슈뢰더 그림, 김경연 옮김 / 보림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이 그림책은 옮긴이의 말에 나오듯이 "그림책을 아이들이나 읽는 책으로 생각한다면, 이 책은 그림책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삶에 대한 성찰을 이끌어내는 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뒤늦음이라는 탄식이 붙지 않아도 좋을 책으로 은자와 도둑의 이야기를 통해 나의 삶, 아집, 편견, 집착, 고정관념 등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고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결혼식을 하루 앞둔 신부가 다른 사내와 도망친 것으로 인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한 남자가 세상은 허위로 가득차 있다고 생각하고 성서연구에 몰두한다.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는다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과 부대끼고 살아야 할 이 세상의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일이다. 그것도 평생을 함께 하기로 약속한 이의 배신은 한 사람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트리고 세상을 살아갈 힘을 앗아버리기에 충분한 것이다. 세상을 등진 젊은이는 학문에 심취하지만 이 길에서 또 한번의 절망을 겪는다. 방대한 저서를 남긴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년의 깨달음이란 것이 자신의 모든 책이 속이 빈 지푸라기에 지나지 않는다니, 이 얼마나 허망한 노릇이란 말이다. 결국 이 남자는 물이 나오지 않은 땅에서 우물을 파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안식을 찾게 된 것은 어느 동굴 안에서 잠을 청했다가 그 곳에 머물라는 목소리를 듣고부터이다. 이후로 동굴에 머물며 '영원'을 향한 구도의 길에 들어선 남자는 명상에 잠기고, 그의 깊은 영혼의 평화는 숲의 동물들에게까지 감응된다. 세월의 흐름을 잊어버린 듯한 평온한 모습의 노인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붉은 열매가 달린 나무-뒤편의 다른 나무들과는 달리- 한그루를 보고 있자니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고뇌하다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보리수나무 아래에 앉아 수도하는 싯다르타의 모습이 떠오른다. 부처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애쓴 것처럼 은자는 어느 날 숲에 찾아 든 도둑을 회개의 길로 이끌며 그를 위해 열심히 기도한다.

그러던 은자가 어느 날인가부터 변한다. 은자는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자신을 찾아오는 존재의 말을 믿었으며 수행을 많이 한 오직 자신만이 그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도둑에게도 관찰능력과 하나의 깨달음이 있었으니, 그것을 통해 눈앞에 보이는 것의 외양을 곧이곧대로 믿지 아니하고 과감히 화살을 쏜 것이다. 톨스토이 원작의 <구두장이 마틴>을 보면 마틴은 예수님이 자신을 찾아 오시겠노라는 목소리를 듣고 하루 종일 그 분이 오시길 기다린다. 그 하루 동안 마틴은 추위에 떨고, 헐벗고,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집 안으로 불러들여 자기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선행을 베푼다. 그리하여 밤이 늦도록 마틴이 기다렸던 예수님은 분명히 그 날 마틴에게 다녀가셨으되 머리에 후광을 두르고 천사를 거느린 휘황찬란한 모습이 아닌 가난한 이의 모습으로 마틴에게 대접을 받으셨던 것이다.

"나더러 대천사를 속이라는 말이냐? 그분이 너에게 나타나려 했다면 너를 찾았을게다! 게다가 나는 네가 그분이 나타난 것을 알아차리기나 할지 의심스럽다. 그만큼 너는 눈뜬장님이다. 그래. 나는 제가 그런 성스런 현상을 보기에는 눈이 멀었다고 확신한다. 그러니 아들아, 네 불경스런 소망은 잊도록 해라."

은자는 지나친 자만과 대천사의 겉모습에 눈이 멀어 주위를 살필 여유도, 사물의 본질을 파악할 혜안도 잃어버렸으나 도둑의 대답을 통해 꿈에서 들은 약속이 이미 실현되었음을 깨닫는다. 무엇이든 지나치게 연연하고 그것에 집착하게 되면 진실을 보아야 할 우리의 눈에는 이를 가리는 한 꺼풀의 장막이 드리워져 진실을 알아보지 못하고 비켜나갈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통해 삶의 진리나 깨달음이 멀리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높디높은 곳에서만 그것을 찾으려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된다. "팔십 노인도 세 살 먹은 아이한테 배울 것이 있다"라는 우리나라 속담처럼 어린 아이에게서도 배울 것이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나를 낮추고 겸허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성자가 아니더라도 깨달음에 다다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책을 덮으면서<끝없는 이야기>로 나를 매료시켰던 미하엘 엔데의 또 다른 작품을 만나게 된 것이 반가웠고, <개구리 왕자>에서 섬세한 묘사와 그림 곳곳에 비현실적인 것들을 내포한 독특한 화풍이 인상에 남는 비네테 슈뢰더가 그림을 그렸다기에 기대감을 가지고 보았는데, 인물들의 변화에 따른 색채 대응도 차별화되어 있으며 세밀하게 그려진 그림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어딘지 모르게 비현실적인 공간을 들여다보는 듯한 몽환적인 느낌이 드는 것이 그의 화풍이 잘 느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바람구두 > 죽어라 열심히 사는 꿈
거창한 꿈
장 자끄 상뻬 지음, 윤정임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4월
평점 :
절판


"괴물처럼 연기를 내뿜는 쇳덩이를 보고 도망치는 사람들 모습이 어지러운 속도로 달리는 차 창을 통해 눈앞에 펼쳐지고 있소. 나를 실은 기차는 소리유를 향하고 있소. 그곳에서 부치게 될 이 편지는 닷새 후면 당신에게 도착할 거요. 우리가 알게 된 건 고작 4년밖에 되지 않소. 하지만 지난 3월 당신의 손에 입을 맞출 수 있게 된 이래, 내 가슴은 성급함으로 요동치고 있다오. 언젠가 우리의 약혼을 기념하게 될 날을 기대해도 좋다고 대답해주오. (내가 일주일 내에 도착하게 될 -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지요 - 마드리드에서 그 대답을 해주시오.) 지금이 7월이오. 그러니 깊이 생각해보시오. 그리고 내년 초까지 대답해주시오. 기한이 촉박하다는 건 나도 알고 있소. 그리고 엘리자벳, 당신을 몰아붙이고 싶지 않소. 하지만 이제 우린 속도의 시대로 들어섰고 나 역시 이 시대 사람이니 어쩔 도리가 없다오." <본문 55쪽>

펼친 면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철도 레일과 그 위로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프랑스 남부의 한적한 시골 농촌을 건너가는 증기기관차. 양떼가 증기기관차의 서슬에 놀라 한쪽으로 도망가고, 가을걷이가 한창인 마을 사람들, 베어낸 밀을 가득 실은 말이 놀라 짐이 떨어지고, 아이들은 집 안으로 줄행랑을 친다. 멀리 미루나무가 높이 솟은 운하로 짚단을 실은 화물선이 양안으로 이끄는 말의 힘에 이끌려 흘러간다. 저 쪽 구석에서 개가 놀라 짖는다.

장 자끄 상뻬의 그림책 "거창한 꿈"에 실려 있는 그림 가운데 하나다. 상뻬는 의뭉스럽다. 의뭉스럽게 이런 그림에 저런 글을 적어두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알게 된 건 고작 4년밖에 안 되었고, 그대 손에(입술도 아니고) 키스 한 건 지난 3월(지금이 7월인데 말이다)인데 결혼해달라고 급하게 말해서 미안하단다. 그것도 속도의 시대로 접어들었으니... 불과 1-200년전 이야기인데도 우리는 얼마나 빠른 시대에 살고 있는지. 장 자끄 상뻬는 이제 확실히 늙었다. 하기사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늙어 있었다. 그가 작품 속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게으름의 철학, 느림의 미학이 아니던가.

어떤 점에서 이 책 "거창한 꿈"이 실제 발표된 연도와 상관없이 국내에서는 지난 2001년 "어설픈 경쟁"과 함께 출간된 건 의미가 있어 보인다. "어설픈 꿈"은 지난 지난 85년작이고, "거창한 꿈"은 97년작임에도 두 작품은 마치 하나로 연결된 듯 보이기 때문이다. 하기사 상뻬의 모든 작품들이 또한 그렇다. 앞의 책에서 "세자르 라베르뉴"란 화가 이야기를 했는데, 거대한 자연 앞에서 스스로 무슨무슨 전람회에서 어떤 상을 받았노라고 떠드는 인물 이야기를 했다면, 이 책에선 그 자연 한 가운데 여인 한 명을 배치하고, 다시 전작의 화가인듯한 인물이 그림을 그리고 있다. 여인이 외친다.

"나 잊지 말아야 해요."

그러고보니 화가와 여인 사이가 제법 멀다. 자연 속에 파묻힌 인간이란 얼마나 작고 왜소한가?

"지난주, 그러니까 내 퇴직을 삼 개월 앞둔 날이었지. 인사과 비서실의 콜레트 부인이 나한테 그러더군. (프로시냐르 씨, 상부에서 <프로시냐르 이후> 문제를 아주 조심스럽게 거론하고 있는 거 아세요?) 라고. 그래서 내가 생각했다네. (<프로시냐르 이후> 를 말하는 것 보니 <프로시냐르라는 존재>가 있긴 있구나) 라고 말일세. 고백컨대, 그 얘길 듣고나서 썩 만족스러웠다네." <본문 17쪽>

문득, 나란 존재가 과연 세상 어디에 그 흔적을 남길 수 있을 것인지... 그래서 사람들은 죽어라 제 이름으로 된 묘비명을 남기고, 죽어라 제 이름으로 된 욕망의 흔적들을 쌓아 올린다. 죽어라 돈을 벌어서 죽어라죽어라... 그리고 결국 죽는다. 한 세월도 가기 전에 모두 잊혀질 일들을 하기 위해... 인간은 죽어라 일하는지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