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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 - 그러나 신용은 은행이 평가하는 게 아니다
이건범 지음 / 피어나 / 2014년 12월
평점 :
이건범 사장이 일을 하던 당시, 나는 잡지사 기자로 일하면서 아리수미디어를 취재한 적이 있다. 이건범 사장과도 명함을 나누었다. 당시 시디롬 타이틀은 대세였다. 지금은 영화를 몇 초 만에 다운로드하는 세상이지만, 컴퓨터 상에서 멋진 화면들이 술술 돌아가는 것은 당시 신기한 일이었다. 그 일을 하던 기업이 아리수미디어다.
당시 많은 기업들이 시디롬 타이틀 개발에 뛰어들었다. 멀티미디어 혁명이라는 기치 아래 다양한 하드웨어들이 쏟아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절이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왜 그랬을까.
가격경쟁이 치열하고 몇 만원 하던 것들이 묶음으로 나오는 등 시장 질서가 좋지 않았다. 대기업들이 뛰어들고 나가떨어지고 하는 시기였다. 그곳에서의 아리수미디어는 어떻게 시장에서 살아갔을까. 개인적으로 직장을 옮기고 다른 길을 걸으면서 이 분야의 일들은 과거가 되었다.
'파산'이라는 제목의 책이 나왔다. 누가 쓴 건가.
이건범 사장의 책이다. 이 책에서 이건범 사장은 그때의 일들을 소개한다. 다시 실패하지 않기 위해, 그 즈음의 일들을 새로 기업을 시작하려는 혹은 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남겼다.
좋은 사람들이 모였지만 실패하는 이유는 뭘까.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생각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인가. 그랬던 것 같다. 남의 말을 듣지 않으며 해오던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 했다.
거기까지였던 거다.
"사람의 다양성,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자세는 어떤 종류의 '능력'과도 같다. 그게 쉽게 갖추어지는 것이라면 우리 사회가 지금 이 모양 이 꼴이겠는가? 나는 발전의 가능성이 '역사 및 타인과의 대화'에서 온다고 보았고, 우리 사회와 과거의 역사가 '대화'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대화하는 법을 잘 모르는 게 문제이며, 우리 회사의 구성원 역시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런 문제는 서로 다름을, 타인의 세계가 있음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만들어진다." -84페이지 중에서
저자가 깨달은 일들이 많지만 그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면 바로 다름에 대한 인정이 아닌가 싶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다르게 살라고 하고, 다르게 생각하라고 하지만, 정작 다르게 행동하고 다르게 보는 것들에 대해서 불편해한다.
인정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똑같은 사람, 똑같은 생각만을 한다면 거기에 무슨 발전이 있고 진보가 있겠는가.
회사를 운영하는 후배가 어느 날돈을 좀 빌릴 수 없느냐고 했다. 들어보니 사정이 딱하다. 투자를 받은 돈을 다시 돌려줘야 하는 상황을 맞았다. 투자금을 갖고 들어온 사람이 퇴사하면서 그 돈을 다시 돌려달라는 것이었다.
작은 조직일수록 사람이 중요하다. 어떤 사람이 들어오느냐에 따라서 기업의 운명 달라질 수 있다. 후배는 지금 고통스러운 상황이기도 하지만 조직이 더 커지기 전에 좋은 경험을 미리 한다고 생각한다. 후배는 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까.
저자는 결국, 파산신청으로 회사를 정리했다.
그리고 지금 다른 일을 하며 삶을 살아가고 있다. 지난날의 일들이 그의 삶을 더욱 단단하게 그리고 좀 더 물러나 여유롭게 바라볼 수 있게 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미련은 버리는 게 좋지 않겠나. 마음에 갖고 있어서 도움 될 일이 없다. 과거에 묻히지 말고 현실을 바라보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게 길이라 나는 생각한다.
그래도 이렇게 파란만장했던 순간을 누가 경험할 수 있겠는가. 최고점과 최저점을 함께 찍는 그런 일 말이다.
"내가 참 한심한 놈이다. 그때 난 돈이 시키는 대로 일을 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돈이 시키지도 않은 일마저 나서서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150페이지 중에서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돈이 어떻게 춤을 추고 사람을 주저앉게 만들었는지, 1990년대와 2000년대를 넘어가는 우리 사회의 모습들을 들여다볼 수 있기 기회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의 파산이 비난받을 일만은 아니라고 항변한다. 그가 이 책을 쓴 다른 동기는 아닐지도 모르겠다.
"크기야 어떻든 회사를 꾸준히 경영하는 사람은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부럽다. 그들은 분명 한 가지씩은 비범한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당돌한 질문을 하나 던지고 싶다. 어떤 기업이 망했다고 그 기업과 기업주가 뭔가를 잘못해서 그렇다는 식으로 평가받아야만 하는가?"-252페이지 중에서
실패를 인정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누가 새로운 일들을 하려고 하겠는가. 안전한 길만을 추구한다면 새로운 '땅'은 없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자신의 삶의 경험을 쏟아내며, 오늘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그리고 저자는 '파산의 상처와 복수심이 아니라 사업을 꾸려나가는 동안 가졌던 즐거움과 행복'이 살아가는 힘이라고 말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직원들의 생계를 걱정하며 사업을 마무리한 저자의 마음을 위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