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에게나 남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고통스런 경험을 한 두 번쯤은 겪으며 살아가기 마련이다. 그건 나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여서 꽤 아픈 추억들을 갖고 있다.
각자 가지는 경험들은 너무나 개인적임으로 타인에게는 별 것 아닌 그저 그런 흔한 일로 치부되어 버릴 지도 모르지만, 그 고통을 감내해 내어야만 하는 당사자들에겐 그건 결코 흔히 벌어지는 그저 그런 평범한 일상은 될 수 없는 것이다.
난 고통을 겪으며 두 가지 진실에 다다를 수 있었다.
하나는 고통은 결코 인간을 성숙시켜 주지 못하며, 또 다른 하나는 반드시 흉터를 남긴다는 것이다.
그것이 육체적 상처이건 정신적 상처이건 그 상처가 깊은 상처라면 반드시 지울 수 없는 흉터가 남기 마련이다.
내가 아픈 일을 겪어야만 했을 때 주위사람들은 흔한 위로의 말을 건넸었다.
“괜찮아질꺼야. 시간이 지나면 다 잊혀질꺼야. 힘내렴!”
시간이 지나서 다 잊혀질 고통이었다면 처음부터 그렇게 괴로워하지 않았을 터이다. 그저 마음 한 켠에 잠시 미루어 두었을 터이지....
고통은 인간을 침묵하게 만든다.
참을 만한 고통을 겪으면 사람은 주위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한다. ‘도와달라고. 내 고통을 알아달라고..’ 하지만 결코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닥치면 사람은 침묵하게 된다. 너무나도 힘겨운 고통과의 투쟁에 주위를 돌아다 볼 여유조차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저 나를 잃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겹기 때문이다.
역경은 인간을 강인하게 만든다지만 고통은 인간을 나약하게 만든다.
그게 내가 아픔을 겪으며 깨달은 유일한 진실이었다.
그 후 8년이란 시간이 지나 어느 평온한 오후였다.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라디오을 살며시 켰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8번 의 2악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너무 잘 알려진 곡이어서 그 멜로디를 이미 다 알고 있었음에도 눈물이 터져 나오려고 하고 있었다.
그 순간 <비창>은 이미 아물어져 있다고 믿었던 내 상처를 헤집어 놓고 있었던 것이었다.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금각사>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인간이 가장 잔인할 수 있는 순간은 이처럼 햇살이 빛나고 꽃이 어우러져 피어있는 지극히 평온하고 아름다운 지금이 아닐까...
베토벤의 비창은 바로 그런 잔인한 미소로 나에게 다가왔던 것이었다.
울 수 있었다면 울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껏 목놓아 울 수 없었다. 그건 수치감 때문이 아니라 자존심 때문이었다.
‘난 이미 상처를 잊었고 그건 이제 나에게 아무 일이 아니라고.. 그냥 과거일 뿐이라고... ’
하지만 정말 잊어버린 걸까? 난 결코 잊지 못했다. 단지 잊은 척하려 했을 뿐이었다.
왜냐하면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견뎌내는 것, 잊어버리는 척 하는 것 외엔 없기 때문이란 걸 이미 알고 있던 터였다.
<Pathetique>!
베토벤이 작곡한 32개의 피아노 소나타 중에서 가장 대중의 사랑을 받는 작품은 비창,월광,열정 이 3개의 소나타이다. 그 중 베토벤이 직접 표제를 단 작품은 이 비창이 유일하다.
pathetique는 라틴어 pathos라는 어원에서 유래 되었다. 파토스는 정념,열정,비애 등을 일컫는 말로 인간의 마음이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어디까지나 이성을 의미하는 Logos 에 반하는 것으로 중세 스토아학파에서는 파토스를 질병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이성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격앙된 감정 상태를 표현하기 때문이었다.
더 재미있는 것은 Patience(인내)의 어원도 이 파토스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이다.
비애,애수,슬픔은 인내하고 견뎌내는 것 이외에는 다른 해결 방안이 없기 때문이리라.
베토벤이 청각 상실의 고통을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해 자살을 시도 한 적이 있다는 건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여기 베토벤이 썼던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의 한 부분을 잠깐 실어 보겠다.
“나는 여러 번 사람들과 사귀기를 좋아하는 성미 탓에 사람들의 모임에 발을 들여놓은 일이 있었다. 하지만 내 옆의 사람은 멀리서 들려오는 피리 소리를 듣고 있는데 나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다든가, 또 그 사람은 양치는 목자의 노랫소리를 듣고 있는데 내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적에, 그 굴욕감은 어떠하였으리랴, 그러한 경험들로 말미암아 난 거의 절망하기에 이르렀다.....중략... 참으로 비참한 생명이다. 하지만 자극을 받기 쉬운 몸뚱이여서, 아주 조그만 변화일지라도 나를 최선의 상태에서부터 최악의 상태로 던져버리는 것이다!
인종(忍從)! 이제 내가 길잡이로 택해야 할 것은 바로 참고 견디는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하였다. 바라건대 , 참고 견디고자 하는 나의 결심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준엄한 운명의 여신들이 나의 목숨을 가져가기를 원하게 될 때까지.”
억겁의 시간도 그 고통을 잊게 만들어 줄 수 없다면 조용히 인내하는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우리의 삶인 것이다.
“이 세계에는 눈물 조차도 흘릴 수 없는 슬픔이란 것이 존재한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고,혹시라도 설명이 가능하다고 해도 ,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것이다.그런 슬픔은 다른 어떤 형태로도 바뀌어 지지 않고, 다만 바람없는 밤의 눈처럼 그냥 마음에 조용히 쌓여가는 그런 애달픈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혹시 지금 그런 고통을 겪고 계신 분이 있다면
당신의 절망의 말이 바람에 씻겨 먼지처럼 날아가버리기를 진심으로 기도 드립니다.
ps> 혹시 루돌프 제르킨의 비창 들어 보셨습니까?
제 상처를 뒤집어 놓은 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