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에게나 남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고통스런 경험을 한 두 번쯤은 겪으며 살아가기 마련이다. 그건 나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여서 꽤 아픈 추억들을 갖고 있다. 

각자 가지는 경험들은 너무나 개인적임으로 타인에게는 별 것 아닌 그저 그런 흔한 일로 치부되어 버릴 지도 모르지만, 그 고통을 감내해 내어야만 하는 당사자들에겐 그건 결코 흔히 벌어지는 그저 그런 평범한 일상은 될 수 없는 것이다. 


난 고통을 겪으며 두 가지 진실에 다다를 수 있었다.

하나는 고통은 결코 인간을 성숙시켜 주지 못하며, 또 다른 하나는 반드시 흉터를 남긴다는 것이다.

그것이 육체적 상처이건 정신적 상처이건 그 상처가 깊은 상처라면 반드시 지울 수 없는 흉터가 남기 마련이다.

 내가 아픈 일을 겪어야만 했을 때 주위사람들은 흔한 위로의 말을 건넸었다.

“괜찮아질꺼야. 시간이 지나면 다 잊혀질꺼야. 힘내렴!”

시간이 지나서 다 잊혀질 고통이었다면 처음부터 그렇게 괴로워하지 않았을 터이다. 그저 마음 한 켠에 잠시 미루어 두었을 터이지....


고통은 인간을 침묵하게 만든다.

참을 만한 고통을 겪으면 사람은 주위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한다. ‘도와달라고. 내 고통을 알아달라고..’ 하지만 결코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닥치면 사람은 침묵하게 된다. 너무나도 힘겨운 고통과의 투쟁에 주위를 돌아다 볼 여유조차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저 나를 잃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겹기 때문이다.


역경은 인간을 강인하게 만든다지만 고통은 인간을 나약하게 만든다.

그게 내가 아픔을 겪으며 깨달은 유일한 진실이었다.

그 후 8년이란 시간이 지나 어느 평온한 오후였다.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라디오을 살며시 켰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8번 의 2악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너무 잘 알려진 곡이어서 그 멜로디를 이미 다 알고 있었음에도 눈물이 터져 나오려고 하고 있었다.

그 순간 <비창>은 이미 아물어져 있다고 믿었던 내 상처를 헤집어 놓고 있었던 것이었다.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금각사>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인간이 가장 잔인할 수 있는 순간은 이처럼 햇살이 빛나고 꽃이 어우러져 피어있는 지극히 평온하고 아름다운 지금이 아닐까...


베토벤의 비창은 바로 그런 잔인한 미소로 나에게 다가왔던 것이었다.

울 수 있었다면 울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껏 목놓아 울 수 없었다. 그건 수치감 때문이 아니라 자존심 때문이었다.

‘난 이미 상처를 잊었고 그건 이제 나에게 아무 일이 아니라고.. 그냥 과거일 뿐이라고... ’

하지만 정말 잊어버린 걸까? 난 결코 잊지 못했다. 단지 잊은 척하려 했을 뿐이었다.

왜냐하면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견뎌내는 것, 잊어버리는 척 하는 것 외엔 없기 때문이란 걸 이미 알고 있던 터였다.


<Pathetique>!

베토벤이 작곡한 32개의 피아노 소나타 중에서 가장 대중의 사랑을 받는 작품은 비창,월광,열정 이 3개의 소나타이다. 그 중 베토벤이 직접 표제를 단 작품은 이 비창이 유일하다.

pathetique는 라틴어 pathos라는 어원에서 유래 되었다. 파토스는 정념,열정,비애 등을 일컫는 말로 인간의 마음이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어디까지나 이성을 의미하는 Logos 에 반하는 것으로 중세 스토아학파에서는 파토스를 질병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이성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격앙된 감정 상태를 표현하기 때문이었다.

더 재미있는 것은 Patience(인내)의 어원도 이 파토스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이다.

비애,애수,슬픔은 인내하고 견뎌내는 것 이외에는 다른 해결 방안이 없기 때문이리라.

베토벤이 청각 상실의 고통을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해 자살을 시도 한 적이 있다는 건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여기 베토벤이 썼던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의 한 부분을 잠깐 실어 보겠다.

 

“나는 여러 번 사람들과 사귀기를 좋아하는 성미 탓에 사람들의 모임에 발을 들여놓은 일이 있었다. 하지만 내 옆의 사람은 멀리서 들려오는 피리 소리를 듣고 있는데 나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다든가, 또 그 사람은 양치는 목자의 노랫소리를 듣고 있는데 내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적에, 그 굴욕감은 어떠하였으리랴, 그러한 경험들로 말미암아 난 거의 절망하기에 이르렀다.....중략... 참으로 비참한 생명이다. 하지만 자극을 받기 쉬운 몸뚱이여서, 아주 조그만 변화일지라도 나를 최선의 상태에서부터 최악의 상태로 던져버리는 것이다!

인종(忍從)! 이제 내가 길잡이로 택해야 할 것은 바로 참고 견디는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하였다. 바라건대 , 참고 견디고자 하는 나의 결심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준엄한 운명의 여신들이 나의 목숨을 가져가기를 원하게 될 때까지.”


억겁의 시간도 그 고통을 잊게 만들어 줄 수 없다면 조용히 인내하는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우리의 삶인 것이다.


“이 세계에는 눈물 조차도 흘릴 수 없는 슬픔이란 것이 존재한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고,혹시라도 설명이 가능하다고 해도 ,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것이다.그런 슬픔은 다른 어떤 형태로도 바뀌어 지지 않고, 다만 바람없는 밤의 눈처럼 그냥 마음에 조용히 쌓여가는 그런 애달픈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혹시 지금 그런 고통을 겪고 계신 분이 있다면

 당신의 절망의 말이 바람에 씻겨 먼지처럼 날아가버리기를 진심으로 기도 드립니다.

 

ps> 혹시 루돌프 제르킨의 비창 들어 보셨습니까?

      제 상처를 뒤집어 놓은 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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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느와르
La Fille aux Cheveux de Lin


4월의 어느 화창한 봄날...

회색빛 아스팔트의 도로위에서 난 파도처럼 쉴새없이 밀려드는 짜증을 감당해 낼 수 없었다. 난 운전 중에 욕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들을 아주 싫어하는 편이지만 그 날은 나도 여지없이 그 부류에 섞여 있었다. 러시아워 시간도 아닌 한 낮! 고통도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면 견딜만한 것이리라. 하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지루한 기다림의 고통은 나를 미치기 일보 직전까지 몰아갔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제어하고자 가만히 혼자 숫자를 세어보았으나 그건 전혀 해결책이 되어 주지 못하고, 어느 순간 헤아리던 숫자까지 까먹어버리자 그건 나에게 극약처방으로 나타났다. 끔찍하리만치 계속되는 욕설의 퍼레이드! 나 자신도 내가 그렇게 많은 욕설을 기억하고 있다는데 놀라고 말았다. 경상도,전라도 사투리,영어,일본어,중국어,, 심지어는 스페인어 욕설까지!


한참을 떠들어대다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그 순간 난 아직 짙푸르지는 않은 연한 초록빛의 플라타너스 잎새 사이로 반짝이는 황금빛 물결을 보았다. 햇살이 아직은 연약한 플라타너스의 잎새를 통과해 마치 에메랄드처럼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찰나에 벌어진 자연의 기적에 난 넋이 나가고 말았다. 한참동안 멍하니 지켜보던 난 뒷 차 운전사의 욕설에 비로소 자연이 빚어내는 장엄한 침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전쟁의 참호 속에서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자는 없다라고 말했다지만 그 날 난 자동차의 시트 속에서 신의 존재를 느꼈다. 그 후 난 일순간의 기다림을 참지 못하고 천박하리만치 저열한 내 인격을 고스란히 드러낸 데에 수치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이 나올 정도로 유치한 일이었지만 그 순간 난 기도를 올리기도 했던 것이다.

“오 신이시여! 단 몇 분간을 참지 못하고 당신을 언급하여 욕한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그 때 난 God damn!이란 욕도 했었다)”

어찌됐든 그 다음부턴 탄탄대로였다. 무사히 난 집으로 돌아왔고, 그 후로도 자연이 나에게 보여주었던 그 신비한 황금빛 감동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내 손은 무심코 오디오로 손을 뻗히게 되었고 손에 잡힌건 드뷔시의 전주곡집이었다.


옛날 그리스 사람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믿지 않았다. 모든 것은 다 신의 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용기가 솟아오를땐 그건 전쟁의 신 마르스가 자신에게 용기를 주었기 때문이었고, 사랑의 열정이 넘쳐흐를 땐 그건 비너스가 자신에게 사랑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내가 드뷔시의 전주곡집을 손에 든 것도 그런 영감이 아니었을까 한다.(가끔 황당한 상상도 재미있다)


역시나 그건 탁월한 선택이었고 드뷔시의 <아마빛 머리의 아가씨>는 내가 한 낮의 아스팔트에서 느꼈던 그 감동과 똑같은 감동을 느끼게 만들어 주었다. 아마빛이라... 난 지중해 사람도 아니고 지중해 음식도 하나 할 줄 모르는 지극히 평범한 대한민국 사람이라 실제로 아마유를 본 적은 없다. 다만 보았다면 백과사전에 얼핏나온 작은 사진을 잠시 보았을 뿐이다. 그 때의 사진을 지금 가만히 떠올려보면 그건 금빛에 가까운 밝은 갈색이었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그런 아마빛 머리를 가진 아가씨라... 너무 아름다울 것 같았다. 잔인하리만큼 아름다운 4월의 봄날과 아마빛 머리의 아가씨라... 르느와르의 그림이 떠오른다.


다들 아시다시피 드뷔시는 음악에 색조를 입히고자 시도한 인상주의파 작곡가이다. 쇤베르크와 함께 20세기 전반 음악사에 가장 독보적인 존재라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니다. 기존의 7음계나 9음계의 전통적 작곡기법에서 벗어나 온음음계와 동양적인 5음계를 주로 사용했고 화성과 화음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란 영화를 보면 데일 터너(덱스터 고든이 연기했으나 사실은 재즈 피아니스트 버드 파웰의 이야기이다)가 자신에게 가장 영향을 끼친 사람이라면 찰리 파커와 드뷔시라는 말을 읊조린다.


그 때까지는 아무도 하지 않았던 일이었지..어느날 찰리 파커(재즈사에서 전설적인 인물이다)가 하고 있었고 나도 곧 그걸 하게 되었지.. 그런데 사람들이 그걸 Bebop이라고 부르더군.. (잠시 싱긋이 웃으며) 그건 드뷔시가 가장 처음에 했다고..”


드뷔시의 음악의 총화라면 역시나 피아노 음악이다. 그 자신도 한 때 뛰어난 피아니스트가 되고자 했었고 가장 자신있어 하던 것도 피아노였다. 전주곡집 또한 피아노의 기술을 훈련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 작곡되었고 전주곡 1집은 8개의 손가락 터치를 집중적으로 훈련시키기 위한 것이었고, 전주곡 2집은 페달링을 위시한 음색을 훈련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작곡되었다. 그 자신은 3부작(전주,간주,종주)으로 마무리 지을려고 했으나 전주곡집만으로도 자신이 표현하고 했던 모든 것을 완성해내었다고 믿어서인지 전주곡이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사실 드뷔시의 작품은 듣기에도 까다로운 음악이지만 실제 연주에 있어서도 상당한 기교를 필요로 하는 매우 까다로운 작품이라고 알려져 있다. 지속적인 페달링을 유지하면서 섬세하고 영롱한 음색을 창조해 내는 작업은 매우 힘이 드는게 사실이다. 드뷔시 자신도 자신의 작품을 표현하는데 있어 <페달링의 기술은 사람이 숨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라고 자신의 악보를 출판했던 Jacques Durand에게 거듭 강조했을 정도로 페달링의 기교의 중요성을 역설했을 정도이다.


하지만 나같은 평범한 사람에게는 실제 연주해야만 하는 피아니스트의 고충은 전혀 알지 못하니까 그저 드뷔시가 창조해낸 아름다운 음색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할 따름이다. 드뷔시의 음악에는 모두 표제가 달려있는데 전주곡집 또한 예외가 아니다. 실제로 드뷔시는 곡을 완성하고 난 이후에 표제를 달았다고 하니까 그 자신이 갖고 있던 실제 이미지를 의도해서 작곡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자신 또한 스스로 말하기를 자신의 음악이 본능적이고,비 이성적이며 단지 충동만이 있다라고 했으니까 완성된 작품을 보고 즉흥적으로 표제를 달았다고 난 믿고 있다.(아니라고 한다면 뭐 반론할 근거를 갖고 있는건 아니다)


표제와는 상관없이 음악을 감상하는 것도 괜찮겠지만 분명 드뷔시가 고심해서 지은 표제일터니 그 표제가 상징하는 이미지를 연상하며 음악을 감상하는 것이 더 좋을 듯 싶다. 아마빛 머리의 아가씨의 경우는 프랑스의 고답파 시인 <르콩트 드 릴>의 동명의 시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하니 그 표제를 무시하고 그냥 듣는건... 좀 그렇지 않을까?

드뷔시의 아마빛 머리의 아가씨를 듣고 르콩트 드 릴이 썼다는 동명의 시를 구해보고자 열심히 뛰어다녔으나(?) 구하진 못했다.

대신 마르셀 프루스트의 이 시로 대신 해본다. 아마 드뷔시의 아마빛 머리의 아가씨를 감상하는데 충분한 도움을 줄 수 있을 듯 싶다.


금 빛은 오래 머물 수 없는 것


자연의 첫 푸름은 금 빛입니다.

오래 머물기 가장 어려운 색깔이지요


자연의 첫 잎은 꽃 잎입니다.

하지만 한 시간을 미처 머물지 못합니다.

꽃은 곧 잎으로 바뀌니까요

 

낙원은 슬픔으로 가라앉고

새벽은 낮으로 퇴색해 버리는 것!


금 빛은 오래 머물 수 없는 것이지요


<아마빛 머리의 아가씨>는 드뷔시의 곡 중에서 <달빛>과 더불어 가장 멜로디 라인이 아름다운 곡 중 하나이다. 매우 청초하고 아름다운 음색과 멜로디를 갖고 있지만 조용히 듣다 보면 웬지 모를 슬픔을 내재하고 있다는걸 느낄 수 있다. 금 빛이 오래 머물 수 없는 것처럼 아마빛 머리의 아가씨의 아름다움도 지속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그 모든 것은 오래 머무를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청춘,사랑,열정,행복,기쁨 그 어느 것도 영원히 우리 곁에 머물 수 없다. 영원히 흘러가는 시간의 강 속에서는  모든 것이 다 퇴색되어 버리고 만다. 그것이 우리 인간만이 갖고 있는 슬픔이 아닐까 한다.

유한할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존재가 슬픔을 낳는 것이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책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둘이서 같은 침대에서 잔다고 해도 눈을 감는 건 결국 혼자니까..”


함께 있어도 고독해지고 슬퍼지는 것. 우리의 존재자체가 슬픔이기 때문이리라...



ps>드뷔시의 전주곡집에는 꽤나 훌룡한 연주가 많다고 보는데 나한테 있어서 결정반은 아직 없다

     기제킹,미켈란젤리.굴다 모두 다 좋은 연주이지만 약간씩의 미스터치도 있고 미스터치를 빼고서

     라도 얼마간의 아쉬움이 남는 연주들이다.

    만약 버드파웰이 전주곡집을 녹음했다라면... 그건 나에게는 최고의 드뷔시 전주곡집이 되었을텐

    데... 정말 아쉽다.

    재즈 피아니스트를 은연중에 무시하는 분들도 계시는데 호로비츠가 재즈 피아니스트인 아트 테

   이텀의 연주를 듣고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라고 극찬한 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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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키노 > 넥타이 종류별 매는 방법

출처 : daelimtextile.com
V존의 인상을 결정하는 요소 중에서 중요한 것들 중의 하나가 넥타이 매듭법이다.
셔츠의 카라 형태나 넥타이 폭의 너비,또는 생지의 두께에 의해서 그에 적합한 매듭법으로 V존을 연출할줄 안다는것는 "넥타이를 맨다"는 고유의 의미를 높여 주는 것의 하나라 여겨진다.
셔츠카라 사이의 열림이 거의 수평에 가까운 와이드카라 셔츠가 유행한다고 할 때 그것에 어울리는 형태의 넥타이를 잘 선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매듭법으로 연출하느냐에 따라서 전체적인 분위기와 느낌이 확연히 달라지게 되므로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몆가지 넥타이 매듭법에 대해서 잘 알아 놓는 것도 자신의 개성과 패션 감각을 높이는 방법의 하나라 생각된다.
넥타이의 매는방법을 188여가지나 적어놓은 책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실용적인 면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되는 매듭법은 포인 핸드넥타이 기준으로는 플레인 놋트, 윈저놋트, 하프윈저놋트, 크로스놋트, 더블놋트, 브라인드 폴드놋트, 보우타이를 기준으로는 >베이직놋트와 더블 베이직놋트 이며, 아스콧타이는 논 놋트이다.


※딤플 (Dimple) 이란?
딤플 이란 보조개라는 말로 넥타이를 맷을 때 매듭밑에 만드는 옴폭한 홈을 뜻한다.
넥타이매듭에 있어서 크게 두가지 흐름이 있는데 하나는 영국인과 앵글로 어메리칸들이 선호하는 방식이고 또 하나는 프랑스식인데 전자는 매듭밑에 딤플을 만드는 매듭법이고, 후자는 딤플을 만들지 않는다기보다는 딤플을 의식하지않고 가볍게 살짝 매는 방법이다. 이 딤플에는 넥타이를 비교적 가늘게 맷을 때 잘 어울리는 「센터 딤플」과 비교적 굵은 와이드 타이에 잘 어울리는「더블 딤플」두가지 타입이 있다.
센터 딤플은 매듭 바로 밑 중앙의 한군데, 더블 딤플은 매듭 바로 밑 중앙의 양단에 홈을 만드는 방법으로 당연히 센터 딤플 보다 더블 딤플이 고도의 테크닉을 요구한다.
딤플이 없이 꽉 조여진 매듭의 넥타이를 착용한 사람을 보면 여유가 없는 듯한 느낌과 단지 넥타이를 매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에 비해 넥타이매듭 하단에 우아한 딤플을 연출한 모습은, 보다 넉넉하게 여유있고 풍성한 느낌을 받는다.
 
 
가장 기본적으로 포플러한 매듭방법으로19세기 중엽 넥 웨어의 주류를 이루던 나비 매듭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로 등장하였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가장 활용 범위가 넒은 매듭법으로 우리 나라에서도 윈저 놋트, 하프윈저 놋트와 함께 가장 선호 되는 넥타이 매듭 법이다.
이 매듭법은 대검을 좌우 어느 쪽에도 걸지 않고 한 바퀴 만 감아 내려 매는 것으로 매듭 모양이 길고 가늘게 형성되므로 '얼굴이 마르고 삼각형에 가까운 사람에게 잘 어울리는 매듭법'이며 경쾌하고 산뜻한 느낌을 준다.
응용범위가 넓어서 확실히 익혀둔다면 어떤종류의 넥타이도 잘 멜 수 있게 한다.
       
 
  매듭의 중심이 흐트러지기 쉬우므로 좌측 끈에 밀려 한쪽으로 밀리지 않도록 주의.
매듭의 밑 쪽 중심에 만드는 딤플이 심플하게 보이도록 한다.
 
 
 
 
  밝은 색조의 무지, 또는 극히 작은 무늬의 타이로 다소 재치있고 장난끼 섞인 느낌을 나타내 보고 싶을 때 시도해 봄직한 매듭 법이다.
무지 또는 무지 감각의 넥타이로서 만드는 V존은 당연 대단히 심플한것 이 되지만 이 매듭법은 그 심플함에 조금 변화를 줄 수가 있다.
플레인 놋트와 같은형으로 매듭의 중앙을 비스듬하게 달리는 1가락의 줄기가 그 비결이라 크로스 된 매듭의 선이 충만한 생동감을 준다. 무지 넥타이는 자칫하면 단순히 넥타이를 매고 있을 뿐이라는 느낌이 되기가 쉬운데 이런 변화가 이미지를 변화시킨다. 넥타이 자체보다도 매듭의 독특함이 전체 이미지에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는 점에서 다른 매듭 법보다 한층 더 두드러진다. 따라서 이 매듭법을 사용할 경우에는코디네이트 전체를 조금 억제하고 이 매듭법 만으로 연출 한 다고 하는 생각을하면 좋다. 실용성도 비교적 높은 매듭법이다.
       
 
  심플함에 변화를 주는 이 크로스 놋트는 무늬가 큰 넥타이는 피하고 수수한 느낌의 넥타이를 해야 한다. 무늬가 너무 크면 색다르게 변환 매듭의 재미가 오히려 역효과로 되어 전체가 너무 두드러진 게 되어버린다. 또 하나 주의해야 될 것은 넥타이의 소재인데, 실크 타이로도 훌륭한 매듭을 할 수 있지만 울 타이라면 음영의 효과가 보다 강하게 된다.
 
 
  보우타이의 가장 기본적인 매듭 법이 이 베이직 놋트이다.
오늘날과 같은 보우 타이가 탄생한 것은 19세기 말경이라고 한다. 퇴폐와 향략의 세기말 적인 사회 풍조 중에서 당시의 상류 계급 남성들 사이에는 급진적인 넥타이에 대한 욕구가 있었었다.
그때까지 유행하던 크라바트를 대신할 새로운 칼라 장식에 대한 여러 가기 시도에 의해 생긴것이 펠트 형태의 천으로 묶는 나비 넥타이라는 것이었다. 나비 매듭으로 묶는 이 새로운 넥타이는 그 신선함으로 맺을 때 칼라의 모던한 이미지는 당시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한 것이 였으며 이후 여러 가지 형태의 보우 타이가 났으나 그 매듭법만은 이 베이직 놋트뿐이였다고 한다. 포멀 웨어 착장시 빠지지 않는 보우 타이는 평상시 그다지 사용할 기회가 적어 완벽하게 매기까지 는 숙련을 요한다. 요즘은 아예 매듭지어져 있어 띠로 두르기만 하면되는 보우 타이도 시판되고 있으나 자신이 스스로 매어 그 방법을 알아 놓는것도 좋겠다.
       
 
  매듭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 균형을 이루도록 매는 것이 중요하다.
 
 
 
  일반적인 넥타이 매듭 법으로는 자주 사용되지 않는 매듭 법이지만 한 번쯤 변화를 시도해 봄직한 넥타이 매듭 법이다.
방법은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넥타이를 감아서 뒤쪽 앞으로 묶어 통상의 셔츠 속에 감추어져 있는 부분이 바깥쪽으로 보이게 하게 하 는 매듭 법이다.
전체적으로 소프트하게 마무리하므로 V존에 부드러움을 나타내고자 할 때 적합한 매듭법이다. 보통의 포인 핸드 타입의 넥타이보다는 아스콧 타이에 잘 어울리는 매듭이며 아스콧타이에 적 용하면 한층 부드러움이 더해져 니드 한 연출이 가능하다. 여름철에는 린넨 재킷에 코튼 또는 린넨의 타이를 논 놋트를 적용해 보는 것도 색다른 멋을 연 출할 수 있다. 특별히 큰 특징이 없는 자켓을 좀 니드 하게 입고 싶을 때 효과를 발휘 할 수 있는 매듭이다.
       
 
  좌우로 끌어넣은 부분이 서로 대칭이 되도록 유의할 것. 양쪽에 감겨진 2개의 매듭이 깨끗하게 삼각형을 이루도록 조정할 것. 강하게 꽉 조여 매면 이 작업이 어려우므로 주의한다. 가벼운 느낌을 내기 위해서는 아스콧 타이가 적격이지만 부드러운 실크 프린트 타이등에도 적용 할 수있다.
 
 
 
  윈저 놋트의 정갈함과 단정함이 좋기는 하지만 매듭이 너무 크다고 생각 될 경우 적합한 매듭 법이 하프윈저 놋트이다.
세미 윈저 놋트라고도 부르는 이 매듭 법은 가는 넥타이를 맺을 때 매듭 이 가늘고 길게 되는 것을 피하고자 할 때 적합한 매듭이다.
윈저 놋트는 매듭 중심에서 대검을 좌우로 2회 걸지만 하프윈저 놋트는 이것을 한번만 거므로 매듭 의 볼륨감이 윈저 놋트 보다는 다소 작다. 한쪽에만 대검을 걸기 때문에 좌우를 균등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각 과정에서 꽉 조여야 할 필요가 있다. 생지가 두꺼운 넥타이는 윈저놋트와 거의 같은 볼륨감을, 심지를 넣지 않은 것 같은 얇은 넥 타이는 플레인 놋트 같은 심플함을 연출 할 수 있는 매듭 법이다. 단정하고 깔끔한 이미지로 비즈니스 정장에 가장 잘 어울리는 매듭법중 하나이다.
       
 
  윈저 놋트의 경우와 같이 두꺼운 넥타이는 매듭이 크게 되므로 피하는 것이 좋다.
 
 
  보우타이를 내는 방법 중 가장 손쉬운 방법 중의 하나이다.
원링 놋트라 부르는 것은 매듭 후 고리가 하나만 생기는 것에 연유한다. 매듭 후의 상태는 타이가 수평한 일직선이 되지 않고 한쪽으로 약간 기 울여지게 된다. 이것이 이 매듭의 특징이며 멋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에나 잘 어울리는 매듭으로 는 볼 수 없으며 가까운 동료들의 파티등에 적용하기 에 적당한 매듭이다. 이 매듭의 장점의 하나는 타이의 소재, 종류에 구애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카라부분이 허전할 때 스카프나 치프, 리본 등을 이용해서 자신만이 타이를 연출해보는것도 개성 있는 패션 연출을 위한 지혜이다.
       
 
  보통의 보우타이로 충분하지만 목뒤에서 길이 조정이 가능한 타입의 보우타이가 적격이다. 매듭의 끈부분이 너무 짧거나 길면 검선이 밑으로 쳐기지게 되어 이 매듭의 장점이 반감되므로 주의
 
 
  세계적인 베스트 드레서 였던 영국의 윈저공이 창안한 넥타이 매듭 법으 로 폭이 넓은 매듭이 특징이다.
윈저공 (1936년 에드워드 8세로 즉위했으나 미국인 이혼녀 심프슨 부인 과의 사랑으로 국민적 반대에 부딪쳐 10개월만에 왕위를 버리고 윈저공 이 됨)이 왕세자 시절 당시 궁정 외교가 성행하여 친선사절로 세계 각지 를 돌아다녔는데 그의 옷차림은 신문과 잡지 그리고 귀족 영화를 통해서
세계로 퍼져나가 강렬한 인상을 남겼었다. 그가 한번 입었던 옷차림은 그것이 점잖은 것이든 파격적인 것이든 그대로 정석으로 받아들여져 당시 귀족은 물론 세계 비즈니스맨들에게 대 유행되었다. 이 윈저 놋트도 윈저공 자신이 즐겨 입는 스프레드 칼라(Spread colla)셔츠의 깃 사이를 정리하 기 위해 이 매듭을 고안했다고 전해지지만 정작 윈저공 자신은 이것을 부정하였다한다. 윈저 놋트가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역시 브리티시 스타일이다. 매듭이 역간 수평으로 퍼지는 매듭법이므로 특히 윈도우 칼라에 잘 어울린다. 얼굴이 비교적 길거나 턱이 홀쭉한 서구인들이 얼굴모양을 짧게 보이게 하기 위한 매듭이다.
       
 
  대검을 걸칠 때 조르는 상태를 양쪽 걸린 부위의 조임이 균등한 상태를 유지 할 것. 또 매듭이 너무 크면 품위가 없이 보이게 되므로 두꺼운 넥타이는 피하는 것이 좋다. 매듭의 밑쪽 중심에 하나 또는 두 개의 딤플을 만들면 매듭자체가 주는 강한 인상이 보다 부드러워 지고 여유 있어 보인다.
 
 
  비즈니스 슈즈가 아닌 캐주얼 슈트나 주말에 드레스다운을 즐길 때 사용되는 매듭 법이다.
매는 법은 플레이 놋트와 같다. 플레인 놋트로 넥타이를 맨 후, 대검과 소검을 좌우로 뻗쳐 놓는다.
통상의 플레인 놋트에서의 매듭은 밑을 향하여 원추형을 만들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좌우로 잡아 당겨서 원추형을 반대로 향하게 한다. 이로써 대검과 소검은 좌우로 나누어져 나란히 내려지게 되는데 이런 작업으로 보통의 넥타이가 변해 유니크한 것으로 변신하는 모양은 정말 감동적이다. 넥타이를 사용한 드레스다운은 어느 정도 패션에 흥미를 가지고 있으면 바로 생각이나는 테마이 기도 하며 평소와 다른 새로운 느낌을 연출 할 수 있다.
       
 
  대검과 소검이 거의 같은 길이가 되게 매도록 한다. 진즈의 차림에 맞추거나 닛트 폴로의 칼라에도 잘 코디네이트되며 전체적으로 와일드한 느낌을 나타낸다.
 
 
  더블크로스 놋트는격조 높은 중후한 느낌을 주는 매듭 법으로 유럽의 신사들이 애용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의 특징은 뭐니뭐니해도 매듭부분에 있다. 교차되어 균형을 이룬 Z형 매듭에서 넥타이의 섬세한 풍요로움이 살아 난다 하겠다.
매듭법은 큰 날을 좌우한번씩 감은 후 그 위에 다시 두 번 감은 후 감은 매듭 속으로 넣어 앞으로 내린다. 이 매듭법을 사용하면 옷깃이 꽉 조이는 느낌이 들게 되므로 착용감을 크게 느끼게 한다. 와이드칼라셔츠나 깃을 높이 세운 레귤러칼라의 드레스셔츠에 잘 어울리며 윙 칼라의 셔츠에 적 용하면 보다 격조 높은 세미 포멀함이 연출된다. 무지 넥타이 또는 화려한 모티브의 실크 타이에 잘 어울린다.
       
 
  매듭 위에 넥타이가 교차하고 있는 것을 잘 보이도록 조절할 것 매듭이 여러 겹이 되므로 너무 두꺼운 넥타이는 피하는 것이 좋으며 타이의 폭도 넓은 것보 다는 좁은 것이 적합하다.
 
 
  넥타이 매듭 법 중에서 가장 오래전부터 있어 왔던 매듭 법이다
17세기, 화려함이 즉에 달했던 루이 14세 시대에 생겨난 매듭 법으로 당 시는 현재와 같은 보우타이가 아니고 오히려(차라리) 리본 타이에 가까 운 것을 맷다고 한다.
당시에는 낵타이를 매는 이렇다 할 매듭 법도 없었고 넥타이의 길이도 현재처럼 어떤 정도로 통일 되어져 있었던 것이 아니었으므로 멋쟁이들은 되도록 독특한 방법으로 매고자 했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갖은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는데 이 더블 베이직 놋트는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 한 것이었다.
       
 
  베이직 노트보다 고름을 하나 더 잡아매는 이 방법은 매우 세련된 브이 존을 연출한다. 특히 좁고 길쭉한 보우타이를 사용하면 멋지게 묶이는데 양끝의 처짐에 각별히 신경써야 한다. 양끝이 적당히 흘러 내리도록 묶는 것이 세련된 모양으로 만드는 방법이다.
 
 
  플레인 놋트의 변형 매듭 중의 하나가 발룬 놋트인데 매듭의 윗 부분 을 당겨 올려 부풀게한 것이 특징이다.
매듭 윗부분에 부풀어오르게 한다는 의미로 발룬 놋트라 부른다. 매듭 법은 플레인 놋트와 동일하다. 우선 플레인 놋트를 기본으로 매듭을 만든 후 꽉 조여 형을 완성한 후 윗 부분을 조금 당겨 올린 후 다시 매듭을 조이면 된다. 매듭이 느슨하게 되면 야무지지 못한 느낌과 싸구려 넥타이를 매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게되므 로 주의한다. 능숙하게 매면 매듭의 풍성함은 마치 열기구 같은 폼으로 만들어 V존의 즐거움을 넓혀준다. 열기구 같은 화려한 폼, 이것이 발룬 이라는 명칭의 뉴앙스이다.
19세기에는 당시의 셔츠의 크고 높은 깃에 어울리는 방법으로 실제로도 자주 사용 되었다고 한다. 보통의 플레인 놋트에서는 작아서 바란스가 나빠 좀더 훌륭한 매듭을 만들고 싶은 경우 에 유효한 매듭 법이다.
       
 
  매듭 윗 쪽 부분을 당겨 올릴 경우에 정 중앙으로 수직으로 당겨 올릴 것. 넥타이는 질이 좋은 약간 두꺼운 실크소재의 것을 사용하면 매무새가 깨끗하다.
 
 
  가는 넥타이 매듭 법으로 플레인 놋트보다도 작은 볼륨감을 나타내고 싶거나 심지가 부드러워서 쭉 펴지는 화사한 넥타이를 맬 때 적격인 매듭 법이다.
매듭 법은 플레인 놋트의 대검고리를 1회 더 감아서 2중 고리로 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2중 고리로 인하여 볼륨감도 어느 정도 나오고 매듭도 단단히 결속되므로 심플한 V존을 연출할 수 있다.보통의 비즈니스 슈트에 약간의 좁은 듯 한 롱 칼라 셔츠에 잘 어울리는 매듭으로 여가 에서 비즈니스까지 실용도가 높은 매듭법의 하나이다. 오히려 대단히 형태가 좋은 깃 언저리를 만들 수가 있다. 얼굴형이 두터운 사각형이나 긴 삼각형에 잘 어울린다.
       
 
  대검이 이중 고리로 되므로 첫 번째 고리가 두 번째 고리 밑 부문에 조금 보이게 된다. 이것이 이 매듭법의 특징이므로 그것을 감추기 위한 조정은 불필요하다. 오히려 이 작은 삐져나옴이 포인트이다.
 
 
  블라인드 폴드 놋트는 V존을 장식하는 넥타이 매는 법 중에서 넥타이 자체의 존재감이 가장 강하게 어필되는 넥타이 착용법이다. 이제까지 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V존을 형성하여 강렬한 이미지를 표현한다.
매는 법은 플레인 놋트 상태에서 대검을 매듭의 뒤쪽으로 돌려 앞으로 빼낸는 것이다.
이 매듭 법은 실제로 그리스의 해운왕 오나시스가 즐겨하던 넥타이 매듭 법으로 실용도 높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시험해보면 알겠지만 단지 조금의 변화도 이처럼 전혀 다른 V존의 연출이 가능하다. 이 매듭 법은 중후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싶을 때라든가 파티 등 모임의 자리에서 세 미 포멀 한 느낌을 나타내고자 할 때 적절한 매듭 법 중의 하나이다.
       
 
  이 매듭법은 스포티한 복장에서는 역효과가 난다. 또한 사용하는 넥타이도 보통의 가는 트래드 한 무늬의 폭이 너무 넓지 않은 넥타이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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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는 20세기를 어떻게 추억해야 할까? 아마 20세기 처럼 많은 전쟁과 비극이 일어난 100년은 아마 없을 터이다. 1차 세계대전에 이은 스페인 내전 발발, 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쟁, 한국전쟁, 베트남전... 가까이는 걸프전에 이은 이라크 전 까지 수세기 동안 수많은 전쟁으로 죽어간 사람보다 이 100년 사이에 벌어진 참사들로 우린 더 많은 생명들을 잃었다.

20세기는 인류가 대지에 두 발로 선 이래 가장 많은 피를 흘린 잔혹의 역사로 기억될 것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비극의 역사에도 유난히 빛을 발하는 4명의 사람이 있었다.

인류의 눈을 대지가 아닌 하늘로 돌린 아인쉬타인, 철학의 종언을 고했던 비트겐슈타인, 단 한사람의 힘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걸 몸소 보여준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천상의 소리는 바로 이런 것이다라는 걸 들려준 클라라 하스킬!  난 20세기를 굳이 말하라고 한다면 그 참혹했던 피의 역사보다는 이 4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1960년 12월 7일 브뤼셀의 한 역에서 등이 굽은 곱추 노파 한 사람이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숨졌다. 그녀의 외모는 추하기 이를때없는 한낱 곱추 노파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녀는 위대한 피아니스트이자 숭고한 영혼을 지닌 인간이었다. 그녀의 이 어이없고 쓸쓸한 죽음은 그녀가 평생 등에 짊어지고 있었던 불행이라는 무거운 짐을 드디어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는 걸 의미했다. 또한 죽음은 그녀를 한평생 가혹하게 가두어 두었던 좁고 갑갑한 육체라는 감옥에서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이기도 했다.

 

많은 예술가들이 자신의 질병과 싸워 위대한 창작을 쏟아 놓은 예는 굳이 클라라 하스킬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많이 있다.  반신불수를 극복하고 메시아를 잉태한 헨델, 청력상실을 딛고 환희의 송가를 부른 베토벤, 고독과 함께 찾아온 매독의 고통 슈베르트,끊임없는 정신질환과 싸워야만 했던 반 고흐,..... 가까이는 오토 클렘페러와 자클린 뒤프레까지..

하지만 여타의 다른 예술가와는 달리 클라라 하스킬에게 불행은 너무나 급작스럽고 빨리 찾아왔다. 그녀가 겨우 18세 되던 1913년 세포 경화증(Sclerosis)이라는 당시에는 병명 조차 알려지지 않은  병이 그녀를 엄습했다. 이 병은 면역질환의 일종으로 세포끼리 붙어버려 뼈와 근육이 붙거나 경화되어버리는 무시무시한 질병이었다.  이 병은 그녀에게 모든 걸 앗아갔다. 여성으로서의 아름다움,청춘,사랑 그 모든 걸 강탈해버렸지만 그녀에게 유일하게 빼앗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그건 바로 음악이었다. 이 가혹한 天刑의 질병도 그녀에게 음악만은 가져갈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음악이 그녀가 삶을 지탱할 수 있게 해 준 유일한 버팀목이 되었다.

 

4년간 온 몸에 깁스를 한채 병상 침대에서 누워 있어야만 했던 클라라 하스킬은 드디어 불굴의 의지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그동안의 긴 투병으로 머리카락은 윤기를 잃었고 건강하고 아름다웠던 등은 어느새 추한 곱추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피아노를 칠 수 있다라는 희망으로 병마를 잠시나마 이겨낼 수 있었고 다시 연주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닥친 불행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이은 나치의 파리입성! 유태인이었던 클라라 하스킬은 다시 기나긴 도피생활을 준비해야만 했다. 일찍 부모를 여윈 하스킬은 단 혼자의 힘으로 성치 않은 자신의 육체를 이끌어 세워 암울한 도피 생활을 해야했고 그런 그녀의 유일한 대화상대로 남은건 그녀가 키우던 고양이 한마리였다. 도피생활로 인한 극심한 긴장과 공포는 결국 뇌졸증을 불러왔고 유리와도 같았던 그녀의 육체는 다시 깨어지고 말았다. 신의 시기심에서 출발한 이 가혹한 징벌에 자신도 죄책감을 느꼈는지 하스킬에게 구원의 손길을 잠시 내려주웠다. 수술을 하지 않으면 살아날 수 없었던 하스킬은 우연히 하스킬의 소식을 들은 유태인 의사의 도움으로 간신히 죽음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다시 음악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예전의 동지는 다시 적으로 돌아섰다. 동/서 진영으로 갈라져 보이지 않는 전쟁을 시작하였고 서로는 자신의 체제의 우월성을 끊임없이 선전하기 시작했다. 코간편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냉전이 시작된 것이다.

소련 피아니스트의 대모라 불리던 타티아나 니콜라예바가 처음으로 모차르트의 도시 <잘츠부르크>를 방문하게 되었다. 니콜라예바는 떠나기전 소련의 음악가들로부터 카라얀을 보고 오라는 밀명아닌 밀명을 받게 된다.(서방세계에는 제 2의 토스카니니라 불리는 카라얀이라는 젊은 지휘자가 있으니 그의 연주를 반드시 듣고 오라는 것이었다.) 마침 니콜라예바가 방문했던 시기에 카라얀의 모차르트 연주회가 잘츠부르크에서 열렸고 니콜라예바는 그 연주회에 참석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는 클라라 하스킬이라는 보잘것없고 조그마한 외모의 곱추 노파를 만나게 된다. 그 연주회가 끝난후 그녀는 소련으로 돌아가 이렇게 토로했다.

 

“그녀의 몸은 뒤틀려 있었고, 잿빛 머리카락은 온통 헝클어져 있었다. 마치 마녀처럼 보였다. 그러나 막상 공연이 시작되자 카라얀의 존재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건반으로 손을 옮기자 곧 나의 볼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실로 내가 평생 동안 들은 최고의 모차르트 전문가였다. 그녀의 마력은 너무나 강력해 오케스트라의 총주가 다시 울려퍼질 땐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풍부하면서도 자연스런 음이 오케스트라로 전달되어 지휘자마저 마술에 걸려 있었다. 그녀 덕택에 그들 모두는 음악적 진실을 접하고 있는 것이었다. 결국 이것은 내가 경험한 최고의 콘서트가 되었다.”

 

오늘 우리는 모차르트가 직접 연주한 피아노 협주곡이 어땠는지 알지 못한다. (그가 죽은지 200년이 훨씬 지났고 음반하나 남겨 놓지 않았다 ^^) H.G. 웰즈가 쓴 소설의 타임머신이 발명되지 않은한 그의 연주가 어땠는지는 우린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누군가 모차르트가 연주한 피아노 협주곡이 듣고 싶다고 강짜를 부린다면 클라라 하스킬의 음반을 손에 쥐어주어라. 그곳에 모차르트가 있을 것이다.

모차르트는 의심할 바 없는 천재의 전형이었다. 하지만 클라라 하스킬 또한 그에 못지 않다. 모차르트가 5살때 처음으로 소곡을 작곡하여 그의 천재성을 증명하였다면 그녀는 6살때 처음 들은 모차르트 소나타를 악보도 보지 않고 그대로 쳐 냄으로써  그녀의 천재성을 입증했다. 이른바 절대음감의 소유자였다. 뿐만 아니라 그 곡을 다른 조로 순식간에 편곡하여 다시 쳐냈다고 하니 이 정도 쯤 되면 의심할래야 의심할 수가 없다.(이 외에도 그녀의 천재성에 대한 일화는 굉장히 많이 있다. 스위스에서 연주하기로 한 호로비츠가 제때에 도착하지 못하자 안달이 난 지휘자 헤르만 세르헨이 그녀에게 대역을 부탁하자 그녀는 연주하기로 한 리스트 협주곡 제 1번의 악보를 하루만에 암기해 버렸다. 그 뿐만 아니라 그녀는 피아노 파트만 암기한 것이 아니라 오케스트라 총보까지 모두 암기해 버려 세르헨을 경악시켰다) 

모차르트가 그의 치기어린 천진난만함과 순진함으로 명롱하고 청초한 음악을 창조해 내었다면 클라라 하스킬은 그 고된 불행과 고난 속에서도 결코 잃지않은 영혼의 순결성으로 모차르트가 만들어낸 천상의 음악이 실재한다는 것을 그 청명하고 순수한 소리로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녀를 알고 지내던 모든 사람들은 평생 그녀를 경외했다. 그건 그녀의 뛰어난 천재성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숭고한 인격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모든 청중이 갈채를 보내며 연주회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된 직후에도 겸손함과 수줍음으로써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청소부나 되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청소하는 것 외엔 무엇 하나 몸에 익힌 게 없으니…”

얼마전 내가 쓴 글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연주자는 청중으로부터 마땅히 존중 받아야할 존재이지만 존경 받아야할 존재는 아니라고 연주자로써의 존경은 청중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고...

난 마땅히 클라라 하스킬을 존중이 아닌 존경으로 대한다. 아니 그건 경외라는 말이 더 적확한 표현이리라..

 

브뤼셀의 기차역!

꿈에 부푼 27살의 청년 바이올리니스트 코간은 콩쿠르에 참가하기 위해 브뤼셀 역에 내렸고 조용하고 수줍음 많던 66살의 노파 하스킬은 새로운 공연을 위해 브뤼셀 역에 내렸다. 코간과 하스킬이 거쳐간 그 기차역은 아직도 수많은 사람이 스쳐 지나가며 만남과 이별을 준비하고 있으리라.

 

PS> 전 기독교 신자는 아닙니다만 클라라 하스킬의 생애를 죽 지켜보면 성경의 욥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인지 욥기의 한 구절을 올립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

참조: 바람구두님의 문화망명지의 클라라 하스킬 편을 참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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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라쟈르 기차역
어제 동생의 배웅을 위해 기차역에 나갔다. 

 

낯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고 각자의 만남과 이별을 준비하는 곳.. 기차역

동생을 보내고 돌아서는 내 발걸음은 매우 무거웠다. 떠나는 사람에게 기차역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곳이지만 남겨진 사람에겐 비로소 떠난 사람의 텅빈 공허감을 낯선 공기로 채워야만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배웅을 하러 가는건 죽어도 싫다. 떠나는 사람의 등을 말없이 지켜봐야만 한다는 건 너무나 괴롭고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 두 사람이 있다. 두 사람 모두 그 기차여행이 그들의 마지막 여정이었다.

레오니드 코간과 클라라 하스킬!  동생을 보낸 그 기차역에서 난 두 사람을 보았고 그들의 마지막 기차여행에 잠시 동행해보았다.

 

레오니드 코간! 그처럼 서글픈 비브라토를 낼 수 있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또 있을까?

코간이 활동하던 시기는 미/소의 냉전이 극에 달해있을 때였다. 2차 세계대전이후 잠시간의 평온이 끝나고 미/소간의 보이지 않은 전쟁은 시작되었고 1961년 소련이 보스토크 1호를 쏘아올림으로써 우주 경쟁시대를 열었다. 우주 비행사였던 가가린이 "지구는 푸르렀다. 하지만 그곳에 신은 없었다!"라는 명언과 함께 무사귀환함으로써 그 보이지 않는 전쟁은 비로소 냉전이라는 이름으로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었고 그 이후 세계는 민주주의(실제로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국가 사회주의)라는 두 진영으로 갈라져 치열한 체제 경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체제를 선전하는 것으로 문화/예술 만한 것이 있을까? 그들은 자신의 체제 우수성을 강조하기 위해 문화/예술을 선전물로 적극 도입하게 되었고 뛰어난 연주가들은 그들 선전의 훌룡한 도구로 자리 잡았다.

 

코간이 활동하던 시기에 소련이 자랑하던 바이올리니스트는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였다. 소련이 서방세계의 선전물로 사용하는데는 오이스트라흐 한 사람만으로도 충분했다. 선전물에 두 사람이 등장하기엔 그 자리가 너무 비좁기 때문이리라. 항상 화려한 전면에 나서는 것은 오이스트라흐였고 코간은 그의 커튼 뒤에 묻혀 있을 수 밖에 없었던 시대였다. 그런 코간에게도 드디어 세상에 나설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브뤼셀에서부터 그의 전성시대가 열린 것이다.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대상을 거머진 코간은 이후 열린 파리/런던 공연을 성공리에 마쳤고  모든 성공한 소련 연주자들의 순례코스이기도 한 미국 공연에 올랐다.1958년 보스턴 교향악단과 함께 연주한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은 미국 청중으로부터 장장 20분간에 걸친 커튼 콜을 받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그 이후 소련이 자랑하는 피아니스트인 에밀 길레스의 누이와도 결혼하게 되었고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 피아노의 에밀 길레스와 함께 TRIO를 결성하게 됨으로써 코간의 화려한 전성시대는 최고조에 올랐다.

 

그의 이러한 전성기도 예기치 못한 파국과 함께 막을 내렸다. 그들의 잦은 서방세계로의 화려한 연주여행은 KGB의 감시를 필연적으로 불러왔고 코간에게 그 감시 임무가 주어졌다. (코간은 소련내에서도 소수 그룹이었던 유태인이었다) 그가 살던 시대는 이런 요구에 불복할 수 없었던 때이기도 했다. 하지만 로스트로포비치의 KGB 감시문건이 우연찮게 로스토로포비치에게 알려지면서 그들의 우정은 산산히 금이 갔고 카잘스,티보, 코르토이후 최고로 평가받던 TRIO는 해체되었다. 그 이후 코간은 사과를 위해 수차례 로스트로포비치와의 면담을 요구했으나 단 한번도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 이후 로스토로포비치는 서방으로 망명하여 화려한 그의 명성을 계속 이어갔다.

 

코간은 그 이후 모든 의욕을 잃고 후학 양성에만 힘을 쏟게 되었다. 화려한 조명을 벗어나 다시 그가 원래 살던 어둠의 커텐뒤로 찾아 들어간 것이다. 1982년 12월 빈 공연을 무사히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서둘러 탄 새벽 기차는 원래 순환기 장애가 있던 코간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했고 그 기차가 코간의 고향부근인 우크라이나의 한 역을 지날 무렵  기차 승무원이 텅빈 기차안에서 싸늘히 식어있는 코간의 시체를 발견했다. 그것이 그의 최후였다. 그의 나이 58세였다.

 

사람들은 흔히들 코간의 바이올린 음색을 서늘하다고 말한다. 하이페츠의 음색을 혹한의 한기에 비유하는 사람들이 왜 코간의 음색은 그저 서늘하다고만 말할까? 혹시 그 대답이 코간이 하이페츠에 감히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난 편견을 버리고 그의 음반을 다시 들어보라라고 말해줄 수 밖에 없다.(의외로 이런 사람들이 너무 많다.) 

 

참고로 네이트 사전 검색에 나온 코간에 대한 설명을 들자면

 

러시아 바이올리니스트. 우크라이나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출생. 모스크바음악원을 졸업하였고 1951년 엘리자베트국제콩쿠르 1 위 입상으로 서방측 여러 나라에 그 존재가 알려졌고 55년부터 활발한 국제적 활동을 시작하였다. D.F. 오이스트라흐 이후의 거장(巨匠)으로서 대성(大成)이 기대되었으나 기교적으로는 탁월하면서도 표현에는 깊이를 갖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52년 이후 모스크바음악원에서 교편을 잡고 많은 후진을 육성하였다.

 

난 하이페츠의 연주를 감히 싫어한다고 말하는 편이다.(니가 하이페츠에 대해 뭘 알아! 라고 대꾸하면 할 말은 없다) 그의 연주는 정말 기적적이다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난 그의 연주가 기적적이고 대단히 특출나기는 하지만 그의 음악을 좋아할 수는 없다라고는 말할 수 있다. 그의 정확하고 현란한 기교에는 감히 언급할 수 없지만 그의 연주를 듣다보면 난 마치 나의 신경세포 하나하나가 갈갈히 찢겨나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의 음악은 나를 피곤하게 만든다. 그래서 난 그를 좋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코간은 하이페츠와는 다르다. 그의 음악 또한 싸늘한 한기가 느껴지고 고음역에서는 찢어질듯한 현의 비명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의 연주는 하이페츠의 혹한의 한기와는 다른 약간 쌀쌀한 11월의 차가움 정도랄까....  GUNS N'  ROSES가 노래한 이 그에게 딱 맞는 이미지라고 생각하면 적확한 표현이리라. 바로 그 느낌! 그게 코간이다.

 

심장마비로 죽어가던 코간의 동공에 새겨진, 그가 마지막으로 봤던 영상은 무엇이었을까? 시대가 만들어낸 어찌할 수 없는 삶의 비애와  절친했던 그의 동료를 배신해야만 했던 슬픔, 또 그로 인해 깊이 각인되버린 고독의 상처 그 모두가 어우려져 녹아들아간듯한 고향 우크라이나의 황량한 겨울 풍경이 아니었을까?  어둡고 싸늘히 식어버린 차가운 새벽 기차안에서의 홀로 죽어간 코간!

정말 죽음마저도 코간 답다.

 

PS> 혼자 어디론가 무작정 떠나고 싶을때 반드시 코간의 CD를 챙겨가시길..

       그가 정말 도움이 될 겁니다. 여러분의 여행에 ...

       모네의 생 라쟈르 기차역 그림을 함께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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