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스탠퍼드식 최고의 수면법 - 적게 자도 피곤하지 않은 90분 숙면의 기적
니시노 세이지 지음, 조해선 옮김 / 북라이프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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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퍼드식 최고의 수면법](니시노 세이지/조해선 옮김, 북라이프)-전자책 대여

나는 잠에 매우 민감한 편이다. 잠을 잘 못 자면 나도 모르게 짜증을 낸다. 아기가 신생아 때 잠을 못 자서(정확하게는 두 세 시간마다 일어나야 해서) 매우 힘들었다. 안 그래도 모자란 잠, 산후도우미 이모는 더 자라고 하는데 엄마는 엄마의 필요를 위해 나를 깨울 때 너무 속상했다(산후우울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모든 것이 바뀌는 것은 나에게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2016년에 혼자 감당하기 어려웠던 큰 사건을 겪고나서 결혼 직전까지 6개월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다. ‘못 잔다‘는 건 나에겐 너무나 큰 고역이었고, 현재도 마찬가지다.

알라딘 2+1 전자책 대여 이벤트에 낚여서(?) 책 목록을 훑어보던 중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하면 잘 잘 수 있을까? 하루의 1/3 정도를 잠에 보내는데, 나는 개운하게 일어난 적이 거의 없었다. 전쟁 따위의 무서운 꿈을 자주 꾸고, 일어나면 몸이 긴장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몸이 너무 굳어 있는 느낌이었다. 출근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못 일어나면 어쩌지?‘를 늘 생각하며 잠에 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잘 자고 싶다는 소망이, 일어나서 개운하다고 느끼고 싶다는 소망이 이 책을 대여하도록 이끌었나 보다.

이 책은 수면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 매우 흥미로운 책이었다. 책이 술술 넘어갔다. ‘수면부족‘이라 쓰지 않고 ‘수면부채‘라는 말을 써서 잠이 모자란 상태가 얼마나 해로운 상태인지 말한다. ‘자고 싶은 만큼 자도 수면 부족을 해소하려면 3주가 걸린다!‘(22쪽) 또, ‘수면(자는 시각)과 각성(깨어 있는 시간)은 한 몸이다.‘(8쪽)라는 말도 흥미로웠다. 이 책에서 계속 강조하고 있는 것은 ‘렘수면*논렘수면 주기와 상관없이 수면의 질은 수면이 시작된 직후 90분으로 결정된다.‘(9쪽)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첫 번째 논렘수면‘ 단계에서 깊이 자려면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고민‘(24쪽)하는 것이 중요하며, 나폴레옹처럼 ‘단시간 수면자가 아닌 보통 사람은 적어도 6시간 이상 자는 편이 가장 좋다.‘(25쪽)고 한다. 수면 후 90분을 잘 보내기 위해서는 체온을 낮추어야 한다는 내용도 매우 흥미로웠는데, ‘잠들 때에는 심부 체온을 낮추고 피부 온도를 높여 차이를 좁히‘(48쪽)는 방법을 소개한다. ‘그러려면 먼저 피부 온도를 높인 다음 열을 발산해 심부 체온을 낮춰야 한다.‘(55쪽) 체온뿐 아니라 뇌도 수면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나는 신랑이 옆에서 자거나 이야기를 해주거나 노래를 불러주면 나도 모르게 잠이 드는데 그것은 아마도 잠들기 위해 뇌가 ‘단조로운 상태‘가 되기 때문인 것 같다. 수면의 질을 높이려면 각성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는 내용도 흥미로웠다. 수면과 각성에서 더 나아가서 졸음(오후 슬럼프)까지 다루며 수면의 전반적인 것을 이야기해주는 게 아주 좋았다.
이 책에는 여러 가지 재미있는 실험들도 많았고, 그동안 잠에 대해 갖고 있었던 잘못된 편견을 깨주기도 했다. 잠에 관심 많은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읽어봐도 좋을 책이다.
알게 된다고 해서 다 실천하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족욕‘과 ‘같은 시간에 잠자기‘이지만 참 잘 안 된다. 실천도 하지 않으면서 하루를 피곤하게 시작한다고 징징거리는 것은 정말 이중적인 태도다. 언제쯤 지행합일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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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 했다
하완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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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하완, 웅진지식하우스)-전자책 대여

에세이는 매우 매우 오랜만에 읽은 것 같다. 잘 안 읽는 분야의 책을 왜 읽었냐고 묻는다면, 책 제목이 재미있어서였다. 열심히 살지 않겠다는 글쓴이의 신념(또는 결심)이 드러난달까.

‘노력이 우리를 배신할 때‘.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어.˝, ˝노력하지 않고 얻은 성공은 비겁한 거야.˝(10쪽) 라는 교육, 나도 지금껏 받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열심히 노력했다고 반드시 보상받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열심히 안 했다고 아무런 보상이 없는 것도 아니다.‘(11쪽) 노력을 하는 것은 노력에 합당한 보상을 얻기 위해서라는 것이 사람들의 인식임을 보여준다. Give & Take. 입력이 있으면 산출이 있는 법이다. 적어도 대학생 때까지는 이 원리가 통했다. 공부하면 공부하는 대로 점수가, 학점이 나왔으니까. 하지만 이후로는 가끔 노력해도 노력한 만큼 나오지 않을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러면서 보상에 대해 계속 생각했던 것 같다. 2012년에 요엘을 묵상하면서 보상에 관해 정리했던 게 생각났다.
1. 내게 있어 보상과 하나님께 있어 보상은 다를 수 있는데 그 점을 간과.
2. 꼭 보상이 있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믿음(=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이 있는데 그걸 놓침.
3.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건데, 떡(보상)에 집중.
8년 전이 지금보다 훨씬 생각이 깊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느낌적인 느낌일까. 어쨌든, 그때 보상에 대해 진하게 묵상했음에도, 그 뒤로는 말씀을 잊고 산 건지 책을 보면서 노력이 우리를(나를) 배신한다는 생각을 은연 중에 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난 묵상을 떠올리면서 생각을 다시 가다듬는다.
‘내가 이 나이에 정말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내 나이에 걸맞은 것들을 소유하지 못한 게 아니라, 나만의 가치나 방향을 가지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사실이다.‘(20쪽) 이것은 참 부끄러운 일이다. 나 역시 그러하니까. 기독교적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매우 인본적이었고 다른 사람의 눈치를 많이 봤다. 소유의 문제보다 ‘나만의 가치나 방향‘이 없었다는 게 더 다가온다. 이 글은, ‘나만의 가치나 방향‘에 따라 내가 소유하는 것도 달라진다고 말하는 것 같다. 또,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면 나의 가치와 방향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힘이 들어간다는 건 경직된다는 것, 유연하지 않다는 것,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 욕심을 내고 있다는 것, 겁을 먹고 있다는 것이다.‘(34쪽) 힘이 들어간다는 것을 겁을 먹고 있다는 것까지 생각을 확장시킬 수 있다는 것에(그 통찰력에) 놀랐다. 늘 긴장 상태에 있는 나는 늘 겁을 먹고 있구나.
이외에도 좋은 글들,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글들은 많았다.

최선의 선택, 후회 없는 선택을 해야 해. 물론 그런 생각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지만 모든 것이 나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생각은 참으로 오만한 생각이었다.(32쪽)
무언가를 해야만 의미 있는 시간이 아니다. 때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더 큰 의미가 있다. 나에겐 그런 시간이 필요했다.(47쪽)
자신만의 취향이란 어쩌면 무수히 많은 실패를 통해 만들어지는 건 아닐는지.(65쪽)
그것(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은 ‘찾는‘ 게 아니라 ‘찾아오는‘ 것이었다.(83쪽)
한 가지 분명한 건, 영원히 회사에 다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모두 퇴사를 한다.(90쪽)
혹시 지금 뒤처지고 있는 건 아닐까 불안하다면 아마도 뒤처진 게 맞을 거다. 하지만 뒤쫓을 필요는 없다. 자신만의 속도와 길을 찾는 게 더 중요하다. 느린 건 창피한 게 아니다. 인정하자. 우린 뒤처졌다.(126쪽)
나 자신을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때가 자존감이 가장 낮았고, 나 자신이 별거 아니라고 인정하고 나서야 자존감이 지금의 ‘보통‘ 수준으로 올라온 것이니 인생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143쪽)
속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나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지금 내 욕망은 어디서 온 것일까?‘
‘나의 삶은 불행한 것일까?‘
‘나는 세상에 속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148쪽)
무언가를 얻었을 땐 얻은 것에 집중하느라 잃은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무언가를 잃었을 땐 잃은 것에 집중하느라 얻은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154쪽)
이야기를 잃어버리고 결과만으로 어떤 사람을 평가 내리는 습관은 부메랑처럼 돌아와 내 삶을 평가한다.(158쪽)
그러나 나는 결과에만 관심이 있었고, 과정은 그 결과를 얻기 위해 견뎌야 하는 인내의 시간 정도로 생각했다. 과정 그 자체로도 충분히 재미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말이다. 그러니 쉽게 지칠 수밖에. 재미없는 걸 계속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내가 부러워했던 사람들은 과정 자체를 즐기는 사람들이 아니었을까?(164쪽)

이 글들 하나 하나 곱씹으면서 글을 쓴다면 서평이 매우 길어질 것 같아서 여기에서 멈춘다.
이 책을 읽고 사람들은 다들 무언가를 얻기 위해 살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엇을 얻으려고 하나?‘를 생각한다. 노력에 대한 ‘보상‘, 나의 가치와 방향에 따른 ‘소유‘, 얻고 싶은 ‘결과‘. 무언가를 얻고 싶은 욕망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다.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니까. 욕망에 흔들리지 않는 가치와 방향, 그것을 찾기 위해 지금껏 분투해왔던 것 같다. 나는 욕망에 흔들리는 것을 죄악시했고, 현대사회는 마음껏 욕망에 흔들리라고 말한다. 내가 얻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나열해보면 내가 어떤 욕망에 흔들리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정리가 된다. 욕망이 가치와 방향이다.

보상에 대한 이전의 묵상들을 다시 읽어보며, 서평을 마무리한다.

2013.8.13. 유일한 보상, 하나님나라
1. 요즘은 양용의 교수님의 ‘하나님 나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2. 하나님 나라라고 하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말씀이 먼저 떠오릅니다.
3. 문득, 저에게 ‘더해주실 이 모든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4. 이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수고한 만큼 그에 상응하게 보상하는 정비례의 원리로 셈합니다(물론, 불법이 난무하기도 합니다.). 이 원리에 익숙한 저는 하나님 나라에서도 그렇게 셈할 거라고 착각하고 있었나 봅니다. 상이든 벌이든 모든 갚아주심이 다 은혜라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주신 것과 주실 것의 (눈에 보이는) 양과 질을 따져보고 있었던 제 모습을 봅니다.
5.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누구에게나 그 수고보다 못하지 않은, 그리고 사실은 수고보다 훨씬 더 많이 보상해 주시는 은혜의 원리가 적용됩니다.
6. 또, 이 세상에서 제자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 남보다 많이 포기하고 수고할 때, 희생한다는 생각이 들거나 하나님이 주실 보상을 바라고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7.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모든 소유권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는 것의 유일한 보상은 하나님 나라 그 자체라는 사실이며,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기 위해서 애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8. 레위인에게 기업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 어떤 더해주실 것보다도 유일한 보상 하나님 나라를 얻기 위해 고군분투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2013.9.8. 결과는 하나님의 것
1. 학습지도 연구대회 예선 전 일주일 동안 연습을 한 번도 하지 않았을 정도로 대회에 나가기 싫었습니다.
2. 예선대회 전날에도 본선대회에 안 나가고 싶어 대충 쓸지 말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충 쓰는 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냥..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3. 원하진 않았지만 예선에서 붙고, 본선을 준비하면서 결과를 놓기로 했습니다. 이미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4. 본선 결과가 좋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선하신 것을 믿었기에 아쉽지 않았습니다.
5. 이 대회를 겪으면서 최근 몇 년간의 대회들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노력한 대로 주어지지 않았던 평가 결과에 적잖게 실망하고 분개했었습니다.
6. 그동안 하나님께서는 제가 노력하는 대로, 혹은 그 이상으로 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노력하면 따라오는 결과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7. 대회의 결과를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는 사라지고, 그 대회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지 않고.
8. 순종과 함께 하나님의 것으로 돌려드리는 것,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것. 이것이 어떤 상황에서든 잊지 않아야 할 지표임을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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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아이야, 천천히 오렴 - 아이와 엄마의 ‘처음들’의 기록
룽잉타이 지음, 이지희 옮김 / 양철북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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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야, 천천히 오렴](룽잉타이/이지희 옮김, 양철북)-전자책

8월 책뜰안애에 갔을 때 권일한 선생님이 추천해주신 책이다. 권일한 선생님이 추천해 주시는 책을 계속 읽으니 선생님의 감수성(?)이 어떤지 조금 알 것 같다. 선생님이 추천해주시는 책들은 전부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따뜻함‘이 있다. 이 책도 따뜻한 책이다. 룽잉타이의 다른 책도 읽을 예정이다.

책 표지에 적혀 있는 부제(?)대로 ‘아이와 엄마의 ‘처음들‘의 기록‘이 적혀 있는 책이다. 글쓴이가 아이를 어떻게 키웠는지 먼저 경험한 내용을 글로 풀어주어 좋았다고 할까. 이 책은 여러 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 마음에 와닿았던 부분들을 소개해 본다.
‘왕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에 나오는 부분이다. ‘어차피 긴 시간 성장해나가는 동안 이 아이는 인간 세상의 온갖 추악한 일을 수없이 목격할 것이다. 그런데 굳이 두 살 때부터 사람들 사이의 원한에 대해 알게 할 필요가 있을까.‘(21쪽) 아마 부모라면 누구라도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글쓴이가 고르는 책들마다 다 비슷한 내용이 펼쳐지고, 그런 책들을 아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두다가 ‘엄마는 피식, 웃고 말았다. 이것이야말로 검열이 아니고 무엇일까? 책들을 미리 검사하고 금지시키는 것이니 말이다. ...(중략)... 검열도 별것 아니구나. 민중을 두 살짜리 어린아이로 여기는 것일 뿐.‘(22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검열이 필요한 ‘영역‘이 있다고 생각한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묻는다면 서평이 길어지니까 여기까지.

˝그렇게 많은 너의 꿈과 계획이, 엄마가 되고 나서 모두 실현할 수 없게 된 거지?˝
엄마는 녹초가 된 몸을 소파에 기대며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그래서, 후회하니?˝
...(중략)...
잠시 후 엄마가 입을 열었다.
˝아니, 그렇지는 않아.˝ 그리고 다시 침묵. ˝어떤 경험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가 없거든......˝(29쪽)

나는 다른 엄마들에 비해 덜 힘들게 육아를 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그 시간 동안 지금처럼 서평도 쓰고, 책도 읽고, 피아노도 친다. 하지만 내가 아기와 놀지 않는 시간 동안은 분명, 아기와 멀어지고 있다. 아기가 옆에 있는 순간은 힘들지만 괜찮은 순간이다.
‘아이를 가진 제자에게‘에서 글쓴이는 이렇게 편지를 썼다. ‘두 사람의 아이이니, 아이를 낳는 것 역시 두 사람 모두의 일이야.‘(35쪽) 멋진 말이라고 생각했다. ‘아이 엄마가 가장 큰 ‘권한‘을 지니게 되고, 어느 누구라도 ‘생모‘의 권리를 존중해주어야 하지. 아기는 먼저 엄마의 아들이고, 그다음으로 자신의 손자라는 사실을 내 어머니는 분명히 알고 계셨어. ...(중략)... ˝물론 결정은 엄마인 너의 몫이야.˝ ...(중략)... 사랑과 관련된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풀어나가기가 어렵지 않아. 두려워해야 할 것은 증오야. 사랑이 아니라.‘(37쪽) 감사하게도 나는 시댁이 매우 가까운 편이라, 시어머니께서 아기를 매일 봐주신다. 내가 키우고 싶은 방식과 어머니가 키우고 싶으신 방식은 다르고, 물론 충돌할 때가 있다. 제일 스트레스 받았던 것은 신생아 때였는데, 모유를 먹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가 울면 모유를 먹여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을 들을 때였다(지금 생각해도 스트레스다.). 모유 먹이는 간격을 점차 늘려가야 하는데 아기가 배고파서 우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머리가 아팠다. 친정 엄마랑도 이 문제로 날선 분위기를 만들 때가 많았는데, 한국에서는 ˝물론 결정은 엄마인 너의 몫이야.˝라는 말을 듣기가 참 어려운 것 같다. 그럼에도 그런 말들을 하시는 건 아이를 사랑해서일 거라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누그러지기는 한다(아기가 울면 불안해지기 때문에 빨리 울음을 달래려는 목적으로 모유를 먹이라고 말한다면 싫겠지만.).
신기했던 이야기는 ‘여와 이야기‘였다. 여와는 중국 고대 신화 속의 여신인데, ˝여와는 기뻐하며 진흙인형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단다. 아주 단순한 이름이었지. ‘사람‘이라고 말이야.˝(41쪽)라고 이야기를 해주었다. 여와란 이름 자체에서 ‘여호와‘를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었고, 글쓴이가 마지막에 말한 부분에서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중국에도 이런 신화가 있다는 게 참 신기했다. 노아의 방주 이야기처럼 여기 저기 퍼져 나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 이야기를 해주는 와중에 아이의 발견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엄마, 엄마 눈 속에, 눈동자에, 내가 있어. 안안이 있어. 정말이야......˝(41쪽)
아이를 키우면서 분명 아이와 나의 갈등은 존재할 것이다. 아이가 하기를 바라는 행동이 있을 것이고, 아이는 그 행동을 하기 싫어할 수 있다. 그럴 때 내가 글쓴이처럼 ˝좋아, 엄마가 강요하지 않을게. 하지만 네가 컸을 때 엄마가 억지로 시키지 않았다고 거꾸로 엄마를 원망하지는 말아줘.˝(105쪽)라고 말하면 아이는 이해할까? 이해해주면 좋겠다. 열아홉의 안안처럼 ‘하지만 지금 나는 나와는 다른 엄마의 문화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그런 엄마가 자랑스럽다.‘(107쪽)고 말해주면 좋겠다. 아기에게 나의 시간을 좀더 내주어야겠다. 나에게 책 읽는 시간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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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미니미니북) 더클래식 세계문학 미니미니북 9
윤동주 지음 / 더클래식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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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윤동주, 더클래식)-미니미니북 + 독서모임 후기

이번 달 성서교육회 독서모임 책이다. 내가 고른 책이기도 하다. 굳이 왜 시집이냐고 물으신다면, 시를 잘 몰라서라고 답한다. 다른 사람들은 시를 어떻게 읽는지 궁금했다. 학교에서 국어 수업을 할 때 제일 난감한 게 시 수업인데, 교과서 시를 버리지도 못하고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너무 힘들었다. 그렇다고 내가 시를 잘 아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교과서 시가 괜찮은 시인지(그 중에 괜찮은 시도 있다고 하니까) 안 괜찮은 시인지 구분도 잘 못하는, 시에 대해선 문외한이 바로 나다. 그래서 시를 알고 싶었다. 또, 시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법을 알고 싶었다. 시를 공부하고 싶었던 것 같다. 시를 좋아하면 알고 싶어지지 않을까? 그렇다고 내가 시를 좋아하지는 않는 것 같다. 어릴 때, 유치환 시를 외웠다. 김영랑, 김소월 시가 좋았다. 이육사의 이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듣고 그 시를 다시 보게 됐다. 알쓸신잡에서 심훈의 소설과 시를 함께 보며 ‘그 날이 오면‘을 다시 보게 됐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시를 오래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시가 알고 싶어졌을까? 가르치려면 알아야 하니까. ‘가르침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이 질문은 여기에서 더 다루지는 않겠다.
수많은 시 중에 왜 윤동주 시였을까? 살아있는 사람의 작품을 다루고 싶지는 않았다는 게 첫 번째 이유, ‘동주‘라는 영화를 봤다는 게 두 번째 이유, 그 중에 집에 있는 책이 이 책이었다는 게 세 번째 이유다. 젊은 나이에 요절했지만, 지금까지 그의 시가 사랑받는 데는 이유가 있을 터.
사실 시를 읽는 동안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윤동주의 시적 감수성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시는 여러 번 읽어야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법인데, 한 번에 이 시집을 다 읽어야 한다는 생각에 부담이 되었다. 거기다가 내가 고른 책이니 꼭 다 읽어야 한다는 부담이 나를 짓눌렀다. 이번 시즌부터는 책을 선택한 사람이 발제문을 준비하기로 해서, 발제문을 무엇으로 할까, 고민하기도 했다. 결국 내가 생각한 발제문은 ‘가장 마음에 들었던 시와 그 까닭‘, ‘내가 시를 이해하는 방법, 시를 가르치는 방법‘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길‘과 ‘팔복‘이라는 시가 좋았는데, ‘길‘에서는 마지막 연이 마음을 울렸다.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이 생각나기도 했다. 아, 이 시에 대해서는 함께 나누면 참 좋을 것 같다.

독서모임에서 다른 선생님들이 윤동주를 이해한 내용을 듣고서야 윤동주의 시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 그 점이 참 감사했다. ‘서시‘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다 나오는 줄도 몰랐고, 서시와 종시가 존재한다는 것도 몰랐다(윤동주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큰 그림을 알려면 시를 여러 번 읽어봐야 할 것 같다.). 윤동주가 저항시인인지도 잊고 있었다. 일제 시대에 우리 글로 시를 쓴다는 게 얼마나 용기있는 일이었을지 생각하지 못했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윤동주가 직접적으로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지만, 독립운동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울렸던 것을 용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말하기도, 시를 쓰기도 부끄러운 감정들을 용기있게 시로 써내려갔다. 치열하게 살았던 윤동주의 삶이 오늘날을 사는 우리의 삶이어야 하지 않을지. 윤동주는 제 식대로 용기있게 살았는데, 부끄러운 것은 윤동주가 아니라 나다. 부끄러운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괴로워해야 할 것을 괴로워하지 않는 나.
‘태초의 아침‘과 ‘또 태초의 아침‘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도 독서모임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또 태초의 아침‘에서 가죽옷이 아닌 ‘무화과 잎사귀로 부끄런 데를 가‘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라는 질문으로 시작된 시 나눔도 정말 멋졌다. 시 하나를 가지고 시 모임을 해도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들 어쩜 이렇게 윤동주를 잘 이해하고 있으신지. 나에게 없는 눈이어서 부러웠다. 어쨌든 내가 보지 못한 부분을 볼 수 있어서 윤동주의 시를 조금이나마 더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게 참 좋았다.
(결국 시를 이해하는 방법은 나누지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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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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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존 윌리엄스/김승욱 옮김, 알에이치코리아)-전자책

사람의 마음이 말랑말랑해지려면 문학을 읽어야 한다. 요즘 내 마음이 딱딱한 것은 문학을 멀리해서일까. 대단한 책이라는 추천이 많은데, 나는 사실 잘 모르겠다. 내가 소설을 읽는 목적은 오로지 재미라서일까. 머리 식히고 시간 때우기용으로는 소설만한 게 없다.

[스토너]도 권일한 선생님의 책 목록 중에 있었다. [스토너]는 [대지] 같았다. 몇 년 전에 읽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대지]를 읽고 ‘한 나라의 흥망성쇠‘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했는데, [스토너]도 ‘한 사람의 흥망성쇠‘를 다루는 것 같다는 공통점 때문이다. 이 책은 스토너가 태어나서 죽기까지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영문학 교수로 살게 된 스토너의 인생 이야기. 전체적으로 논하기에는 내가 소설을 감상하는 수준이 그에 미치지 못하기에, 부분적으로나마 마음에 남았던 구절들을 언급하며 서평을 이어 나가려 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학생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 사이의 간격이 너무 커서 그 간격을 좁히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11쪽) 스토너가 대학교 1학년 때 만났던 영문학 교수 아처 슬론에 대해 글쓴이는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내가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이기에 이 문장이 들어왔는지도 모르겠다. 늘,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내가 가르칠 수 있는 것 사이의 간격이 너무 크다는 생각을 한다. 20대에는 내가 모르는 것을 가르치고, 30대에는 내가 아는 것을 가르치고, 40대에는 학생들이 아는 것을 가르친다고 했던가(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내가 아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할 틈조차 없는 현실이다. 신기하게도, 그 ‘간격‘ 속에서도 스토너는 아처 슬론에게 매료되었다. ‘스토너는 농장에서 허드렛일을 하거나 창문 하나 없는 자신의 다락방에서 흐릿한 램프 불빛에 눈을 깜박이며 공부를 할 때 자신도 모르게 슬론 교수의 모습을 자주 떠올렸다.‘(11쪽) 그후로 스토너는 달라진다. 마치 가드너가 말한 ‘결정적 경험‘을 한 사람처럼. 아처 슬론의 수업을 듣기 전까지 수동적이었던 인생이 자의적으로 바뀌었다. 이 부분을 글쓴이는 ‘나중에, 훨씬 더 나이를 먹은 뒤에 그는 학부의 마지막 두 해를 되돌아보며 마치 다른 사람의 기억을 돌아보듯 까마득한 기분이 들었다.‘(13쪽)고 묘사한다. 캠퍼스의 연인들에게 친밀함을 느꼈던 것은 스토너가 책과 사랑에 빠졌기 때문은 아닌지. 그렇기에 자신의 장래를 ‘웅장한 대학 도서관‘으로 생각하고 두려움 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쫓는다. 내가 두려움이 많은 것은, 사랑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스토너는 후에 아처 슬론과 같은 교수가 된다. ‘신입생들에게 처음 영문학을 가르치면서 허둥거리던 그 시절부터 그는 자신이 영문학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 강의실에서 전달하는 내용 사이에 커다란 틈이 있음을 항상 의식하고 있었다. 그때는 시간이 흘러 경험이 쌓이면 그 틈이 사라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62쪽)
스토너는 이디스를 만나 첫눈에 반한다. 결혼에 성공했지만 불행히도 둘 관계는 썩 좋지 못했다. 이디스를 보면서 나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긴장과 불안을 밀어내기 위해 ‘한층 더 힘들게 새로운 한계까지 자신을 혹사‘(43쪽)시킨다든지,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온갖 피로와 불안을 안고 있다든지. 그것은 아마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배우지 못한 데서 감정을 다른 곳으로 발산시키려 하는 반대급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것임에도 자신의 것이 아닌 양 시간 속에 묻어버린 감정, 몸(32~33쪽에 이디스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나온다.), 이런 것들이 스토너와의 관계에서 이디스의 마음을 열지 못하게 했던 것 같다. 물론 스토너도 이디스의 마음을 여는 방법을 잘 몰랐기에 섣불리 접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스토너가 이디스의 감정을 얻을 수 있었다면, 이후의 삶은 달라졌을 것이다. ˝자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기 위해서는 사랑에 빠져보아야 해요.˝(103쪽) 이디스는 사랑에 빠진 적이 없었다.
스토너와 이디스 사이에 태어난 딸 그레이스는 이디스와 감정적 교류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레이스는 엄마가 매우 오랫동안 집을 비우고 돌아왔을 때 ˝엄마, 보고 싶었어.˝가 아니라 ˝모양이 달라졌어요.˝라고 말했다. 스토너가 이디스의 마음을 열지 못한 채로 결혼생활을 시작했던 것처럼 이디스는 그레이스의 마음을 열지 못한 채 그레이스를 소유하려 했다. 그 순간부터 그레이스는 불행해지기 시작했다. 스토너는 이디스의 감정을 알았지만, 이디스는 그 감정을 인정하지 않았다(적어도 겉으로는). 아마 이디스는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는 것이 두려웠던 것 같다. 또 이디스는 스토너가 집에 만들어둔 서재를 점점 축소시키면서 자신이 집 전체를 관장하려 했다. 마음 둘 곳 없어진 스토너는 학교로 눈을 돌린다. 계속해서 어긋나고 삐걱거린다. 보는 사람이 다 안타깝다. 솔직하게 인정하면 좋으련만. 그렇게 하지 않아서 빙글빙글 돌기만 한다.
내가 제일 흥분했던 부분은 스토너가 워커와 로맥스에게 당하는 부분이었다. 스토너가 옳았지만(이야기가 워커 쪽으로 유리하게 흘러가서 내가 글을 잘못 읽고 있나 생각할 정도였다.), 결국 스토너는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된다. 그 부분을 읽으면서 너무 너무 화가 났다. 나는 ‘억울함‘에 과민반응할 때가 많은데, 스토너는 억울한 사람이었다. 결국 스토너가 로맥스를 한 방 먹이는 것은 죽음을 앞두기 몇 년 전이었다. 이제 와서 한 방 먹이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을 정도로 세월이 지났을 때였다.

‘그는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남들 눈에 틀림없이 실패작으로 보일 자신의 삶을 관조했다. 그는 우정을 원했다. 자신을 인류의 일원으로 붙잡아줄 친밀한 우정. 그에게는 두 친구가 있었지만 한 명은 그 존재가 알려지기도 전에 무의미한 죽음을 맞았고, 다른 한 명은 이제 저 멀리 산 자들의 세상으로 물러나서...... 그는 혼자 있기를 원하면서도 결혼을 통해 다른 사람과 연결된 열정을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그 열정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열정이 죽어버렸다. 그는 사랑을 원했으며, 실제로 사랑을 했다. 하지만 그 사랑을 포기하고, 가능성이라는 혼돈 속으로 보내버렸다. 캐서린.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캐서린.˝
그는 또한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지만, 거의 평생 동안 무심한 교사였음을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언제나 알고 있었다. 그는 온전한 순수성, 성실성을 꿈꿨다. 하지만 타협하는 방법을 찾아냈으며, 몰려드는 시시한 일들에 정신을 빼앗겼다. 그는 지혜를 생각했지만, 오랜 세월의 끝에서 발견한 것은 무지였다.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그는 생각했다. 또 뭐가 있지?
넌 무엇을 기대했나?‘(142쪽)

나는 인생을 되돌아보고 스스로 어떻게 평가를 내리게 될까? 지금 내리는 평가와 스토너가 죽을 때의 나이가 되어 내리는 평가에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나는 어떻게 살기를 기대하고 있는 걸까? 지금 나의 삶은 내가 원하는 삶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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