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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박노자의 '종교-진보운동-사회주의'

노르웨이의 오슬로 대학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는 (러시아계 한국인) 박노자 교수가 지난달 18일 연세대학교 대강당에서 '정교-진보운동-사회주의'라는 주제의 초청강연을 가졌다(이날 강연에는 학생들과 시민 1700여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그 녹취록이 있기에 옮겨온다. 많은 분들이 일독해 보시도록 권유하기 위해서이다(종교에 관한 우리의 '상식'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 녹취록은 '푸하'님의 서재에서, 그리고 강연회 사진은 '데일리서프라이즈'에서 갖고 온 것이다. 군데군데 굵은 글씨로 표시한 강조와 간혹 덧붙여진 군말은 나의 것이다.  

-하필이면 왜 이 주제를 선택했는지에 대해서 먼저 일종의 변명 같은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1∼2년 전에 민중 신학과 가까운 한 기독교 계통의 잡지로부터 현대 한국 기독교를 비판하는 글을 청탁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걸 어떻게 해야 되나 고민하다가 결국엔 '죄송합니다. 못쓰겠습니다' 그렇게 넘어갔습니다. 제 학술 분야가 원래 기독교보다 고대사였기 때문에 불교 공부를 좀더 많이 한 부분도 있었고, 또 신자가 아닌 신분으로 비판하기에는 뭔가가 쉽게 내키지 않은 부분이 있었던 것도 같지만, 사실 그때 제가 거절의 말씀을 드렸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는가 하면   이건 굳이 기독교뿐만 아니라 결국 불교에도 그대로 해당됩니다만   '기업 활동에 대해서 이념적인 비판을 할 수 있는가' 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제가 기업 활동이라고 말씀드린 것은, 얼핏 보면 신을 모독하는 발언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실은 신에 대한 발언이 아니라 현존하는 종교 조직에 대한 발언입니다.(*종교사회학에서는 상식적인 얘기이다. 교회 성장의 중요한 요건 중 하나가 '자리' 곧 '좋은 목'이라는 사실을 목사님들의 상식이듯이. 이미지는 김종서 교수의 <종교사회학>(서울대출판부, 2005)을 가져왔는데, 내가 오래전에 종교학 과목을 수강하며 읽었던 책은 오경환의 <종교사회학>(서광사, 1990)이다.) 그리고 사실은 외국의 사회인류학이라든가 사회학 같은 부문에서는, 특히 종교사회학에서는 요즘  '종교 시장'이라는 용어를 거의 별 거부감 없이 쓰다 보니까 저도 약간의 영향을 받은 것 같은데, 어쨌든 한국의 경우 사찰이든 교회든 예외적인 소수를 제외하면, 일종의 기업 활동으로 보이는 신앙 활동의 형태가 많이 보이기 때문에 이것을 어떤 이념적 입장에서 비판하기가 왠지 맞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여기서 기업 활동이란 우리가 경험적으로 잘 아는 소위 기복 장사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꼭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사찰이나 교회를 찾을 때는 마음 속에 일종의 거래를 하는 듯한 마음으로 찾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는 말씀이지요. 예컨대 "내가 열심히 신앙생활 하고 기도하면 내 아들이 서울대에 입학하겠지" 하고 생각할 때 여기서 신의 축복이란 게 아주 현실적이면서도 물질적으로 나타나는 부분입니다. "신앙 생활 잘 하고 기도를 잘 하면, 대학교 입학뿐 아니라 예컨대 직장에서도 인간 관계가 원만해져서 안 짤리겠죠. 그러니까, 난 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 하면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결국에는 여유있는 생활하고 잘 살 수 있겠지" 하는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은 일종의 "신통력이 있다, 신이나 어떤 초자연적인 힘과 거래할 수 있다"는 조직에 가입해서, 헌금이라는 이름이든 성금이란 이름이든 불전이란 이름이든, 어떤 명목으로 거기에다 일종의 물질적 대가를 바치고 그 대신에 상당히 현실적인 성격의 축복을 돌려 받는, 성격의 신앙 생활이 우리한테는 아주 익숙해진 것이고, 넓은 의미에서 그것은 기복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기복 신앙은 꼭 구체적으로 '자녀 입학하게 해 달라', 아니면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극락왕생하게 해 달라' 하는 것뿐만 아니고 넓은 의미에서 현실 생활이 원만하고, '현실적인 잣대'로 봤을 때 행복한 생활을 초자연적 힘에 의해서 돌려받으려는 것이 기복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찰이든 교회든 수많은 종교단체에서 이와 같은 넓은 의미의 기복을 제공함으로써 상당한 대가를 받고, 또 그 대가로 사찰의 경우엔 동양에서 가장 크다는 대형 불상을 짓고, 교회 같으면 단일 교회로선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를 짓고, 말하자면 기복 장사를 잘 한다는 것을 건물이나 여러 가지 종교적 상징물로 나타내기도 하는데, 결국 그런 거래나 장사에 대해서 이념적 입장에서 뭐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이런 기복 장사, 종교를 신통력이 있는 개인이나 단체와 거래하는 곳으로 이해한다는 것, 또는 종교의 대상으로 신이나 초자연적 힘, 또는 그 힘을 빌려서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들을 생각한다는 것은 어제그제 생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더 비판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습니다.



-혹시 고등학교 때 역사 교과서에서 배웠는지 모르겠지만, 신라의 이차돈이 누군지 기억하십니까? 신라 법흥왕 때의 순교자 이차돈을 잘 기억하시겠지만, 왕이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불교를 도입했는데, 그 과정에서 법흥왕이 이차돈을 희생시킨 거죠. 대신들하고 화해하기 위해서 이차돈을 죽였는데, 결국 대신들의 반대가 무로 돌아가고 불교가 받아들여졌다는 게 우리가 알고 있는 공식적인 이야기인데, 혹시 여러분은 이차돈이 순교했을 때의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삼국유사를 그대로 믿는다면 그것이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동기가 됐는데, 이차돈이 참수당하기 직전에 '만약 부처님에게 신통력이 있다면, 부처님에게 기적을 일으킬 권세가 있다면, 내가 죽고 나서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이렇게 예언하고 참수당한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피 대신에 하얀 물, 그러니까 우유와 같은 색깔의 하얀 물이 갑자기 목에서 솟아 나와, 그 자리에 있는 모든 대신들이 부처가 대단한 신통력을 가진 무서운 신인 줄 알고 거기에 감복하고 불교를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다분히 설화적인 이야기이고, 불교를 믿는 수행자의 목을 칠 때 하얀색의 액체가 나온다는 이야기는 붓다의 본생담(本生譚), '자타카'에서 많이 읽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불교의 설화로서는 유래가 깊은 설화입니다. 그러니까 특별히 신라에서 생긴 설화도 전혀 아닙니다. 어쨌든 여기에서 중요한 부분은, 신라 사람들한테 초기의 붓다, 초기의 부처가 바로 기적을 일으킬 만한 힘을 가진 그런 신통한 존재였고, 불교를 믿는 사람들, 승려나 순교자 이차돈 같은 사람들이 기적을 일으킬 만한 신통력의 소유자로 보인 것입니다.

-우리는 백제가 불교를 일본에 전달했다는 것을 상당한 민족적 긍지로 삼는데, 만약  일본서기 , 일본의 공식 역사를 그대로 믿는다면, 백제 성왕이 일본에 불교를 전수했을 때, '부처를 믿으면 나라 안이 태평할 것이고 붓다가 나라를 지켜줄 수 있다'는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백제에서 불교를 받아들인 일본 지배자의 입장에서는 붓다라는 신이 힘이 세고 무서운 신통력을 갖고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그런 초자연적 존재였던 것이죠. 그런 면에서 종교에다 초자연적 힘을 부여하고, 종교 전문가들, 성직자들을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무섭고도 신비한 도사로 생각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만이 아니고 우리 역사 속에 상당히 깊이 내재돼 있기 때문에 이것을 건드리기가 상당히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과거의 기복과 오늘날의 기복은 상당히 다릅니다. 기복은 복을 빈다는 이야기인데, 복을 누구를 위해서 비는가가 상당히 중요합니다. 예컨대, 자녀가 수능시험을 볼 때 어머님이 사찰에 가서 대입 기도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대입 기도라는 게 결국 내 옆에서 기도를 하는 다른 아줌마의 아들보다 내 아들을 먼저 입학시켜 달라는 이야기가 들어 있는데(청중 웃음), 기도는 같이 하지만 결국 그 속에는 상당한 경쟁 관념이 내재해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현대의 기복은 완전히 장삿속이 되기도 하지만, 아주 원자화된 개인, 말하자면 옆의 아줌마 아들이 아니라 내 아들만을 입학시켜 달라는, 개인·개체 위주의 장사인데, 전통적인 기복이 이것보다는 약간 차원이 높았습니다.

 

 

 



-예를 들어 신라 시대 때 미륵상이나 아미타상을 만들고 거기에다 어떤 명을 새겼는가 하면, 나의 부모를 비롯한 칠세(七世) 친척들을 극락왕생하게 하소서, 그리고 우리 국토가 태평하고 모든 중생들이 깨달음을 얻게끔 하소서 하는 명을 새겼습니다. 결국 나뿐만 아니고 국가 전체가 그리고 모든 중생들이 뭔가를 받도록 비는 그런 마음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차이가 있습니다만, 그래도 근본적으로 기복 신앙이라는 것이 아주 오랜 역사를 갖고 있고, 이미 문화 속에 얽히고설킨 부분이 있기 때문에 제가 그때는 그것에 대해서 뭐라고 얘기하기가 왠지 참 힘들게 느껴졌습니다.

-물론 그때 제게 어떤 생각이 들었냐하면, 기복 장사 자체를 문제 삼기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기복 장사에는 사찰이나 교회라는 공급자가 있는가 하면, 그 장사를 제발 해 달라고 하는 수요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와 사찰들이 갑자기 없어지고 수요만 그대로 남는다면, 예를 들어 무당이나 점쟁이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수요자로 하여금 이런 기복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 상황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바뀌지 않는다면 공급자나 수요자만을 인격적으로 탓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기복 장사 자체를 문제삼을 순 없다 하더라도 소위 '상도덕'은 문제삼을 수 있는 부분입니다. '상도덕' 아시죠? 장사할 때 그래도 어기면 안 되는 일종의 '상도'가 있는데, 기복 장사하는 과정에선 이것이 너무도 많이 어겨지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일반 재벌들끼리 장사를 해도, 만약 LG 휴대폰 쪽에서 '삼성 휴대폰이 곧 고장날 것이니 삼성 휴대폰을 사는 사람은 그것을 행복하게 쓸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악성 흑색 광고를 낸다면 이것은 아마 당장 재판을 받아 상당한 돈을 물을 겁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나왔다는 사람이 '불신지옥'이라고 외친다면 이건 사실 LG 휴대폰만이 진리고 삼성 휴대폰이 거짓이라는 말과 전혀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에는 같은 시장을 놓고 경쟁하는 관계인데. 그걸 또 '불신지옥'이라고 외칠 때에는 꼭 '불신(佛信)지옥', 그러니까 '불교를 믿는다면 지옥이다' 라고 들리기 때문에... (청중 웃음) 이것은 상도덕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장사를 열심히 하겠다고 발벗고 나서도 장사를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청중 웃음)

-이런 부분도 있습니다. 기업체에서는 고용자를 막 다루면 안 되지 않습니까? 삼성이 무노조 경영을 한다고 해서 삼성을 대단히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삼성말고 무노조 경영하는 곳이 '종교 재벌'들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 혹시 대형 교회나 대형 사찰에서 노조를 본 적이 있으십니까? 없죠?(청중 웃음)

-사실은, 삼성보다 대형 교회에서 주인이 아닌 '밑에 사람'으로 일하기가 훨씬 불안합니다. 대형 교회의 부목이나 전도사, 운전사 정도면   뭐 월급이 박한 건 그렇다 치고 언제 짤릴지 모르는 상황이죠. 주목의 마음에 안 들고 노선을 달리 하면 자르는 데 별 절차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노조를 만드는 시도를 2년 전부터 한 것 같은데, 아직 대다수 대형 교회들에 노조가 없습니다. 고용된 사람들이 많은데도 말입니다.

-대형 교회도 그렇지만 최근 부산의 삼광사라는 대형 사찰에서 노조 탄압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비정규직 사찰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려다 사태가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매일노동뉴스>에서 알게 됐습니다. 결국 장사를 한다 하더라도 이렇게 장사를 해서는 무노조 삼성보다 더 못된 장사가 될 것 같아서 좀 문제가 있습니다.

-또, 예를 들어, 아무리 장사를 많이 한다 하더라도 기업체가 정치에 부당하게 압박을 주면 안 된다는 부분이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지금 한국 노무현 정부가 미국과 FTA 투자 협정을 맺고자 하는데 실제로는 이 협정이 체결되면 가장 혜택을 볼 기업체가 어느 기업체인지 뻔하거든요. 삼성입니다. 삼성에서는 아마도 FTA가 맺어지기를 대단히 바라고 있겠지만, 만약에 삼성이 이를 위해 정치권에 상당히 노골적인 로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된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분노할 것입니다.



-그런데 대형 교회들이 성조기를 들고 나와서 미군을 찬양한다든가 'We Love America!'를 부른다면 이것도 결국엔 일종의 기업체의 정치적 압박의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대형 교회의 경우에는 미국과의 역사적 관계도 있고 이해관계도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많은데, 그렇다 하더라도 나라 전체의 정치를 한 집단 위주로 하려고 한다는 건 문제입니다.

 

 

 



-또, [그들이] 성조기를 들고 나올 때 드는 생각은, 미국의 정치인들이나 주류 지식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비유 중 하나, 즉 미국을 '새로운 로마제국'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그러니까 "'새로운 로마제국'처럼 미국이 전 세계를 다스리면서 사람들한테 라틴어 대신 영어를 가르쳐 주고 공동 문화를 만들어 주고 문명의 공간을 확보해 준다." 이것은 미 제국의 주류 지식인들이 제국을 옹호하는 입장의 골자 중 하나인데, 그러면 미 제국의 성조기를 들고 다니는 사람이 결국에는 새로운 로마제국의 깃발을 들고 다니는 꼴이 되는데, 예수를 못 박아 죽인 것은 바로 로마제국이 아닙니까?(청중 웃음) 그러니까, 그런 역사적 관계까지 생각하면 이것은 상당히 기이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실제로는 로마제국에 못 박혀 죽은 예수를 숭배하는 것인지, 아니면 일종의 무한의 힘의 상징인 성조기를 숭배하는 것인지 좀 분간하기 어려운 지경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업체에 대해서 한 가지 문제 삼는 부분이 '탈세'인데, 종교단체 같은 경우엔 탈세도 아니고 '무세'입니다. 세금을 아예 안 냅니다(청중 웃음). 만약, 주요 종교단체들의 수익이 웬만한 중소기업보다 많다는 사실까지 감안한다면, 예컨대 대형 교회에서 세금을 내서 그 세금 전액이 무상 의료나 무상 교육의 실천에 쓰인다든가, 아니면 단순히 이런저런 방법으로 자선에 쓰인다든가 이런 조건을 내세워 세금을 낸다면 이것은 교리에 반대되는 부분이 전혀 없을 텐데, 어쨌든 탈세도 아닌 '무세'라니 이건 참 '상도덕'상 문제가 있지 않나 그런 생각도 있습니다(청중웃음).



-또, 제가 늘 한국 종교에 관해 문제 삼고자 하는 또 하나의 부분은 '상품 강매'입니다. 일반 회사가 그렇게 하면 당장 걸리겠지만, 예를 들어 종교 재단이 세운 학교에서 학생들한테 예배시키는 것은 결국 '상품 강매'와 다른 게 뭐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본인들이 신앙 시장에서 본인들의 상품을 열심히 마케팅하고 추진하는 것까진 좋은데, 본인들의 회사에서 운영하는 학교의 학생들한테까지 그 상품을 사게끔 강제한다면 이건 헌법상의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상도덕'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국이나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주류 종교를 얘기할 때, 이것은 단순히 기복 장사로만 얘기할 수 없는 성질의 훨씬 더 복합적인 현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를 들어, 외국의 한인 사회에 왜 하필이면 교회가 그렇게 많은가 물어보면 그것은 신앙이 강해서라기보다는 교회가 일종의 네트워크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으면 미국의 한인 사회나 유럽의 한인 사회에서는 '왕따'를 당하게 돼 있습니다. 교회들이 일부러 왕따 시키지 않더라도 저절로 당하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바깥에서는 그것이 좀더 극명하게 나타날 뿐이지만, 한국 안에서도 보이게 또는 보이지 않게 교연, 즉 교회와 교맥을 통해서 맺어지는 것까지 포함하면, 한국에서 흔히 '관계 자본'이라고 말하는 3연, 즉 학연·혈연·지연말고도 '교연'을 분명히 더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한국 교회나 사찰의 경우에는 또 한 가지 대단히 중요한 기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기존 사회나 기존 질서에 뭔가 신성한 듯한 외피를 덮어 주고 기존 질서를 합리화하는 데 신의 도움을 받는 그런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일반적인 한국 사람이 평생 살면서 진심으로 존경할 만한 공인(public figure)이 과연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아주 일찍 초·중·고등학교에서 국가주의적인 주입을 받아 국가를 대단한 숭배 대상으로 삼을 수 있지만, 국가를 존경하기가 좀 힘들어요.

-국가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되는지 다들 체험적으로 알기 때문에 '추상적인 국가'를 숭배해도 '구체적인 국가'를 존경하기란 좀 힘듭니다. 존경하고 싶어도 곧잘 무슨 최연희 의원의 성파문이든 무슨 파문이든 (청중 웃음)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꼭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추상적으로 운동 경기에서 우리 팀이 꼭 이겨야 한다든가 태극기로 상징되는 추상적인 대한민국이 숭배 대상이 돼도 구체적인 대통령, 국회의원, 고급관료들이 존경 대상이 되기는 아무래도 조금 힘들어요.

-그런데 그런 것도 그렇지만, 예를 들어서 어떤 학교 의식이라든가 어떤 공적인 의식에 대통령을 모신다고 하면 아마 참석자들이 대단히 좋아할 것입니다. 근데 그것은 노무현 씨라는 한 개인이 좋아서 그런 것이라기보다는 아직 대통령직에 추상적으로 권위를 부여하기 때문이죠. "대통령도 왔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는 위계 서열에서는 대단히 높은 사람이 온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아마도 노사모 빼고는 인격적으로 노무현 씨를 아주 진심으로 사모하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을 겁니다.(청중 웃음)

-그러니까, '추상적인 권위 인정'과 '구체적인 인격적 존경,' 이 두 가지는 조금 다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우리가 제도적으로도 존경하게끔 돼 있지만, 좀 신비한 옷을 입고 신비한 말씀을 하고 뭔가 신성한 듯한 아우라(청중 웃음), [즉] 후광을 갖고 나타날 추기경님이나 큰스님이다 하면 대다수 사람들이 제도적인 인정뿐만 아니라 인격적인 존경까지도 하게 돼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그런 공인된 종교 지도자들이 이 체제가 나쁘다든가, 이 체제를 우리가 빨리 바꿔야 한다든가, 이 체제의 문제점이 무엇이라는 말씀을 잘 안 하시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청중 웃음), 사실 맞다고 할 수도 없고 틀리다고 할 수도 없는 말씀을 하도 잘하시기 때문에, 이 분들의 존재 자체는 체제를 상당 부분 합리화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높으신 스님이 <조선일보>나 <동아일보>나 <중앙일보>에 인터뷰하시고 법문다운 좋은 말씀을 하시는데, 그 말씀에는 별 문제가 없어도   어차피 그 말씀 상당 부분이 당나라 후기나 송나라 때 선사들의 책에서 다 베낀, 이미 역사적으로 검증된 말씀이라 별 문제는 없는데   주류 언론에다가 인터뷰한다는 것 자체는 대한민국 제도권의 권위를 높여주는 부분이 있는 겁니다. 그런 면에서 종교는 이 체제가 인간이 살 만하고 이 체제가 인간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체제라는 환상을 피지배자들한테 상당히 효과적으로 덮어씌우는 면이 있는 건데 이것은 굳이 한국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작년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사실, 요한 바오로 2세라는 사람이 여러 가지 주장을 했는데, 그 중 하나가 피임을 종교적 죄악으로 본 겁니다. 그것이 종교적으로 맞다 틀리다 하는 건 제가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서 뭐라 할 수는 없는데, 어쨌든 아프리카, 특히 남부 아프리카의 경우에는 에이즈가 지금 대단히 치성(熾盛)을 부리고 있어서 예컨대 잠비아나 나미비아의 경우에는 에이즈에 전염된 사람이 이미 15퍼센트에서 20퍼센트까지입니다. 이미 나라가 멸종으로 치닫고 있는 거죠.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보호 없는 섹스를 한다는 것은 목숨을 대단히 위협할 만한 부분이 있는 것이죠. 왜냐하면 성교시에 피임하지 않을 경우 곧잘 에이즈가 전염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 교황의 말씀을 듣고 피임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에이즈에 걸려 죽은 사람이 과연 몇 만 명이 되는지 대단히 궁금할 따름입니다.

-낙태 수술에 대한 교황의 입장도 아주 단호하셨는데, 현실적으로 가난한 나라에서는 어차피 키울 수 없는 아이를 낳았다가는 결국 사회적 살인처럼 되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낙태를 절대적으로 반대하는 종교 입장을 따라서 많은 여인들이 결국 낙태하지 않고 아이를 낳았는데, 결국 그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고통으로 빠뜨렸는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그런데 요한 바오로 2세가 죽었을 적에 한국 언론들도 그렇지만 외국 언론에서도 그것을 언급하는 언론이 몇 군데밖에 안 됐고, 대다수는 요한 바오로를 거의 새로운 성인으로 모시고 그랬습니다. 요한 바오로에 대한 비판적인 언급을 여러 언론 중에서도 한두 군데밖에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종교 지도자의 권위는 세계 지배계급에게 그만큼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것은 굳이 한국만의 사정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러한 신성하다 싶은 지도자로 상징되는 종교가 원자화·개체화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결국 '여러분이 불행하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신앙생활이나 인격의 문제가 되는 것이고, 여러분의 불행은 여러분이 종교적인 생활을 하고 인격을 수양해서 언제든지 행복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결국 행복하지 않은 사회에서, 그리고 구조적으로 행복할 수 없는 사회에서 개인이 신과 종교라는 매개체를 통해 거래하면 일단 개인적으로 행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죠.

-그런데, 이 메시지는 이 종교를 창시한 사람들, 예수님이나 부처님하고는 별 관계가 없고 바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와 직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소비자이자 노동자들한테 모든 사회적 문제를 인격이나 수양 문제로 돌리기를 원하는 게 아마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핵심이 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교회는 기복 장사하는 기업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이 기업체의 정체는 체제 전체를 합리화하고 공고화하고 아주 당연할 뿐만 아니라 거의 신성하다 싶은 것으로 만드는 기능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맑스가 종교에 대해서 한 말을 혹시 기억하십니까? "민중의 아편"이라는 말이 제일 유명해졌는데, 그 문장에서는 그 이야기뿐만 아니라 다른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짓밟힌 존재의 신음소리'라는 얘기죠. 그러니까 종교는 맑스가 보기에는 '짓밟힌 존재의 신음소리이자 민중을 위한 아편'이라고 이야기한 건데, 그런 면에서 맑스는 신음할 수밖에 없는 곳에서는 사람들이 종교를 찾게 돼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입니다. 맑스는 종교가 단순히 위에서 강요하는 '아편'이라기보다는 이 상황을, 행복할 수 없는 상황을 사람들이 바꾸지 않는 한은  결국 민중이 저절로 찾게 돼 있는 불가피한 것, 또는 일부분이나마 민중의 현실적 상황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특히 전근대 사회에서는 수많은 종교 이단들이 바로 민중의 반항 의지, 저항 의지를 대변했고, 말 그대로 민중의 신음소리를 담았다는 것이 맑스의 종교론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지금의 한국 현실을 중심으로 본다면 종교는 과연 '짓밟힌 존재의 신음 소리'에 더 가깝습니까, 아니면 '민중을 위한 아편'에 더 가깝습니까? 둘 다 종교의 기능을 묘사하는 얘기인데 저는 잘 모르겠지만 얼핏 보기에는 '짓밟힌 존재의 신음 소리'보다 그 신음 소리를 진통시켜 주고 침묵을 강요하고, 그래서 결국에는 상처가 아프지 않게 진통시키는 일종의 마취제에 더 가까운 것 같은 느낌입니다. 물론 아주 아플 때 마취제를 먹게 돼 있지만, 마취제·진통제를 먹는다고 해서 상처가 아물지 않는 게 문제입니다. 당분간 아프지는 않겠지만 상처는 그래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무엇이냐면, 지금의 종교가 기존 체제를 옹립하고 합리화하고 체제로 인한 개인의 불행을 개인적인, 상당히 자기 기만적인 행복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종교들의 원래 모습이 과연 맞는가 하는 점입니다. 종교가 정말 민중을 위한 아편 정도라면 하필이면 기독교나 불교, 이슬람이 왜 그렇게 오래도록 존재해 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바보가 아니거든요. 기만이라면 상당히 빨리 깨우칠 수 있는 부분인데, 또 실제로는 신음하는 소리, 짓밟힌 사람이 신음하는 소리를 담지 않은 종교는 지금 봤을 때는 그렇게 오래 안 가요.

-예컨대, 최근에 만들어진 소위 신흥종교들 중에는 상당히 빨리 쇠퇴하는 종교들이 꽤 있는데, 통일교만 해도 1960∼70년대에 특히, 미국이나 일본에서 교세 확장을 많이 했지만 지금은 실제로 교세가 상당히 쇠미해졌습니다. 기존의 신자도 많이 탈락하고 새로운 신자 확보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됐는데,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습니다만, 그 중 하나는 실제 통일교 교리에서는 이 "짓밟힌 사람의 신음소리"를 거의 들어볼 수 없다는 부분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문선명한테 카리스마가 있지만 문선명이 미국의 지도층·지배층하고 너무 가깝기 때문에 아무래도 "짓밟힌 사람의 신음소리" 듣기에는 조금 어려운 종교입니다.

-그러니까, 신흥종교를 봐도 알 수 있지만 대개 아픈 사람의 신음 소리를 담아 주지 않는 종교는 장수하지는 못합니다. 기독교나 불교, 이슬람이 이 때까지 장수해 온 비밀이 있다면, 그것이 만들어졌을 때 그 종교를 만든 사람들이 분명히 민중 편에 섰던 것이고, 민중의 그 신음 소리를 많이 담고 민중이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 쪽으로 나아가자고 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오랫동안 예수나 붓다, 무하마드의 카리스마를 이용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용하려면 일단 카리스마가 있어야 하는데 결국 붓다나 예수님, 무하마드에게 그 카리스마를 만들어 준 것이 아마도 종교 속에 담겨 있는, 그러니까 초기 불교나 초기 기독교, 초기 이슬람에 담겨 있는 상당히 강력한 평등 정신이나 저항 정신이 아닌가 싶습니다.

 

 

 

 

-불교에 대해서 저항 정신이란 말이 아마 지금의 불교를 보면 어울리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의 제도 불교는 저항과 전혀 어울리는 모습은 아닌데, 실제로 붓다라는 사람 - 원래 상류계급에 속했다가 진리를 찾겠다고 혼자 뛰쳐나와 6년 동안 고생해 결국 뭔가를 깨달았다는 그 붓다 - 은 그 깨달은 것이 공(空)과 연기(緣起)라는 진리였는데, 이 진리대로라면 당시 인도 계급 제도인 카스트 제도나 남녀차별이 사실 존재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부처님이 실제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불경을 통해서는 읽어내기가 대단히 힘듭니다. 대다수 불경들이 붓다가 죽은 뒤 4∼5백 년 뒤에 만들어진 글들입니다. 거기에 붓다가 그렇게 말했다고 돼 있지만, 그건 사실과 전혀 관계 없습니다. 실제 붓다의 육성에 가장 가까운 초기 경전들 중에서도 붓다의 말씀을 거의 그대로 담았다고 믿어지는 것은 아마 <숫타니파타> 라든가 그 정도 경전 몇 개이고요, <니카야>, <아함경(阿含經)> 이라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초기 경전도 붓다가 죽은 지 훨씬 뒤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붓다가 실제로 무슨 얘기를 했는지 아마  숫타니파타 를 보면 대충 알 수가 있겠지만   윤색된 부분도 있고 가미된 부분도 있습니다만   붓다는 처음에 깨닫고 나서는 무엇보다 인간의 평등을 많이 얘기했습니다.

-진정한 바라문이 무엇이냐? 바라문은 인도의 성직자 계급입니다. 당시에는 계급 질서 맨 위에 있었다는 성직자 계급인데, 이 바라문에게 붓다가 얘기한 것은 사람 귀하다는 것이 결국에는 남에게 자비를 베풀고 탐욕을 내지 않는 것이고, 사람들 사이에 절대 차별을 두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동물들 사이에서는 '내 종이다, 내 종이 아니다. 동류다, 이류다' 이렇게 서로 차별할 수 있지만, 사람들은 모두 다 똑같다 이런 얘기를 한 것입니다. 붓다가 깨달은 이치는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공허하다. 그리고 우리의 존재는 여러 가지 요인들로 만들어지는 이유와 결과의 순환이다" 이런 것이었는데, 거기에서는 영구한 계급 차별이라는 부분이 개입될 수 없는 그런 가르침을 만든 것입니다.

-붓다는 만인 평등을 외치기도 하고, 동물 죽여서 제사 지내는 것을 반대하기도 하고, 남자와 여자가 원칙적으로 평등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죠. 또, 붓다의 생활 방식은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탁발 아니었습니까? 탁발이라 하면 동냥을 구하는 것인데, 실제 붓다가 탁발하면서 뭘 했었냐면 요즘 말로 아마 심리정신과의 상담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민중이 밥을 줄 때는 뭘 물어보지 않습니까? 붓다가 그 대답을 하고 여러 사람들에게 생활 문제 풀어 주고 어떻게 바르게 살아야 하는지 얘기해 주고, 말하자면 상담을 해 주고 식량을 받는 그런 거래를 하는 것인데, 그것은 민중과 아주 가까운 생활 방식이기도 했습니다.

-붓다는 기적을 절대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신통력이나 기적이라는 부분은 붓다에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아들을 부활시켜 달라고 애원하는 한 여자한테 붓다는 '그래요? 한 번 부활시켜 보겠습니다. 그런데 당신 마을에서 친척 중에 죽은 사람이 아무도 없는 그런 사람을 한 번 찾아 주면 제가 당신 아들도 부활시켜 보겠습니다' 하고 말한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무슨 얘기냐면, 붓다의 원래 가르침은 신통력, 초자연적 힘, 신이라는 것이 전혀 필요하지 않았던 겁니다. 붓다는 대단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던 거죠. 민중한테 붓다는 존경받는 스승이었습니다.

-그런데 붓다에게 한 가지 좀 아쉬운 점은, 붓다는 일종의 초기 공산주의적인 공동체인 승가를 만들기 위해 국가 권력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해 자기 제자, 수행자들과 함께 숲 속에서 살기로 한 것인데요. 그것은 어찌 보면 민중과도 가까운 거리에서 사는 효과가 있기도 했고, 또 어찌 보면 그런 저항의 태도, 아주 소극적인 저항의 태도에는 문제점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들한테는 처자를 버리고 수행자가 된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붓다는 자기 부인 야쇼타라와 아들 라후라를 내버려두어도 그들을 먹여 살릴 만한 사람이 충분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처자를 버리고 수행자가 된다는 게 훨씬 더 부담이 큽니다. 그래서 붓다의 제자들 중에는 대개 수행 생활을 해도 되는 상당한 재력과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대다수였고, 결국 그 사람들이 붓다가 죽자마자 붓다의 가르침을 자기 편한 대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붓다의 제자 중에는 노예 출신들도 있었는데, 붓다가 죽고 나서는 노비는 스님이 될 수 없다는 계율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니까 노비나 왕의 고용자한테는 스님이 되는 기회를 막아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붓다가 했는지 아니면 그 제자가 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아마도 초기 불교의 주류 승단에서 한 것 같은데, 처음부터 여성이 승려가 되는 데 대단히 까다로운 조건들이 있었습니다. 소위 '팔경법'[尼八敬戒]이라는 건데, 여덟 가지로 여승이 남자 승려를 공경해야 한다, 아무리 나이 어린 남자스님이라 하더라도 나이 많은 여자 스님이 먼저 꼭 절해야 한다든가 하는 법들이 만들어졌는데, 그것이 붓다에게 가탁(假託)돼 있지만 실제로는 그 제자들이 만든 것 아닌가 싶습니다.

-어쨌든 불교는 상당 부분 아주 초기부터 왜곡되기 시작했고 체제에 편입되기 시작했는데, 인도를 통일했다는 아쇼카왕 때는 불교가 왕의 국교가 돼서 거의 원래 정신을 이미 잃어버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중국이나 한국으로 유입된 불교는 이미 절대평등주의적이고 남녀평등주의적인 붓다의 가르침과는 거의 관계 없다 싶은, 이미 체제에 완전히 편입된 종교였습니다. 그런데 붓다라는 스승의 카리스마가 있었기에 후기의 승단, 후기의 승려들이 그것을 계속 이용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싶고, 바로 그런 붓다의 카리스마는 불교가 그래도 죽지 않고 계속 민중들한테 인기가 있는 비결이 아닌가 싶습니다.

 

 

 



-불교에 대한 묘사는 기독교에 대한 묘사와 놀랍게도 비슷합니다. 아마도 복음서를 읽으신 분은 다 아시겠지만, 특히 누가복음에는 계급투쟁적이라 할까요. 상류 계급에 대한 상당한 혐오감이 담겨 있습니다. '배부른 사람들이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니고 배고픈 사람들이 배부르게 되리라' 하고 돼 있고, '부자가 하늘나라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보다도 어렵다'는 말은 체제에 편입된 사람이라면 도저히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도 그렇지만 그런 체제 반대적인 발언들이 가장 많은 책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 같은 경우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곧 올 것으로 기술을 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올 때 로마제국이 망할 것이고, 로마제국에 협력했던 부자들이 결국 벌을 받을 것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재미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복음서들이 최종 편집되는 것은 180년대라고들 추정하고 있습니다. 180년대에 이미 기독교는 거의 체제에 편입된 종교였습니다. 그럼에도 이미 체제에 협력하고 있던 교단 지도자들이 '부자들이 복을 받을 수 없고 하나님 나라 갈 수 없다'는 예수의 진짜 말씀을 남겨 놓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프롤레타리아로서의 예수의 카리스마가 그 사람들한테 필요했던 것입니다. 예수가 만약에 부자들이 하늘나라로 갈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과연 기독교가 이렇게 빠른 속도로 확산될 수 있었겠습니까? 이미 2세기의 기독교는 상당히 보수화됐는데, 그래도 예수의 원래 정신은 상징적으로라도 복음서에 담아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었던 것이고, 그런 예수의 정신이 있었기에 기독교는 지금까지도 수많은 짓밟힌 사람들한테 영감을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서의 편집 과정이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게 4복음서 - 마태·마가·누가·요한 복음 - 에는 재미있게도 노예의 존재나 노예제에 대해 아무 언급이 없는 겁니다. 예수가 살았다고 믿어지는 1세기 초반에는 노예제가 경제의 주춧돌이었습니다. 노예들이 대단히 많았고, 예수가 부자 보고 하늘나라 못 간다고 했다면 분명히 노예 문제에 대해 발언을 안 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복음서에는 아무 말이 없습니다.

-노예에 대한 얘기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하면, 사도 바울 그러니까 기독교 보수화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사도 바울이 나중에 '종들이여, 주인들에게 복종하라' 하고 말한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이 그대로 신약에 담겨져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결국 그 편집 과정에서는 말하자면 대중한테 어필할 수 있는 미끼 밥을 남겨 두기는 했는데, 상당 부분은 바울 사도와 그 제자들의 보수적인 이데올로기로 메워진 것 아닌가 싶은 것입니다.

 

 

 

 


-기독교도 그렇지만 또 아주 재미있는 예가 이슬람입니다. 이슬람을 창시한 무하마드라는 사람은 메카라는 상업 도시에서 '거지가 왜 이렇게 많은가. 왜 부자들은 이렇게 잘 살고 못사는 사람은 왜 이렇게 못사는가' 이런 불만이 출발점이 돼서 새로운 종교를 만든 사람이었습니다. 무하마드와 그 공동체가 메디나에서 망명중이었을 때, 당시에 예배할 수 있는 장소가 무하마드의 집뿐이었는데, 그 집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함께 예배를 봤습니다.

-그런데 무하마드가 죽고 나서 무하마드의 계승자 우마르가 거의 맨 먼저 개악을 한 것 중의 하나가 '남자와 여자는 예배를 따로 봐야 한다'는 법률을 정한 겁니다. 무하마드의 원래 육성을 담은 코란의 기록을 보면 여성의 권리를 상당 부분 주장했습니다. 이혼권이나 피임권리나 유산상속권이나, 여자와 남자는 원래 알라신에 의해서 평등한 존재로 만들어졌다는 등 여성 권리에 대한 주장들이 상당히 많은데, 나중의 이슬람 율법을 보면 이게 상당 부분 뒤집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슬람권의 페미니스트들을 보면, 상당 부분 서구의 페미니즘에서도 영감을 받지만, '무하마드의 진짜 정신을 살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슬람을 페미니즘의 원천으로 생각하는 여성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슬람을 보든, 기독교를 보든, 불교를 보든 우리가 살고 있는 계급 사회에서 고등 종교의 스토리는 놀라울 만큼 비슷합니다. 제가 뭔가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입장에서 기존 종교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지는 게 좋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이제 그것을 결론 삼아 끝내겠습니다.

 

 

 



-결국 지금 성직자 집단이 대표하는 기존의 제도권 종교를 그대로 인정하기는 상당히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 가르침은 그 종교를 만들었다는 사람들의 생각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사실, 옛날에 한용운 스님이 <조선불교유신론>에서 "만약 붓다의 가르침이 맞다면 나도 붓다가 될 수 있는 존재인데 왜 사찰에 가서 불상 앞에 절해야 하는가. 나 자신에게 절해도 되는데" 하고 말했습니다. 또는 "명부전에 가서 부모님들이나 내 자신이 극락왕생하게 해 달라고 비는 것이 재판관한테 뇌물 주는 것하고 무엇이 다르냐. 결국에는 내가 죄가 없으면 왕생할 거고 죄가 있다면 아무리 빌어도 안 될 텐데, 뇌물 주듯이 비는 게 다 뭐냐" 하고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결국 만해 한용운의 정신을 살려서 우리가 기존 종교가 분명히 그 원래 정신과 다른 부분을 당연히 비판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대신 우리가 맑스주의자가 된다 하더라도 속류 맑시스트나 스탈린주의자들처럼 '종교, 그 정체는 무용지물이다. 마약이다' 하고 버리기보다는 그 종교를 만든 사람들의 진짜 의지가 무엇이었는지, 왜 그 사람들한테 그렇게 많은 민중이 모였는지, 왜 그 사람들이 지금도 민중한테 이렇게 귀중한 이름들인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지금 베네수엘라의 수많은 빈민들의 집에 딱 두 개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차베스 대통령이죠. 그러니까 양쪽을 상당히 가깝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하여튼 왜 하필이면 수많은 빈민들한테 예수는 지금도 이렇게 영감을 주는지, 우리가 진정한 맑시스트라면 스탈린주의 식으로 종교를 무조건 팽개치기보다는 종교를 비판함과 동시에 종교에 대한, 원래 종교의 모습에 대해 나름으로 애착을 가지는 것도 좋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사실 이 문제는 러시아의 볼셰비키들에게도 고전적인 문제였다. '건신론(God-building)'을 둘러싼 논쟁이 대표적이다. 고리키의 <어머니>나 <고백> 같은 작품에는 그런 문제의식이 많이 반영돼 있다. '오래된 미래'는 '종교-진보운동-사회주의'의 문제에도 예외가 아니다. 역사적 예수의 삶으로부터 진보운동의 영감을 얻고자 하는 김규항의 경우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06. 04.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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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비공개 > 이벤트 응모 ^-^

늘 눈으로 읽기만 실천하다가, 이벤트에 혹해서(^^;) 글 한번 남겨요. 바람구두님 늘 고맙습니다.. ^^ 01. 사행시 짓기 바 스락거리는 소리마저 조심스러운 우리 사무실에서 나는 오늘도 람(남) 들 눈을 피해 알라딘 서재를 둘러보고 있다. 물론, 누군가의 구 두소리가 가까워지면 잠시 Alt+Tab을 눌러 영문 홈페이지에서 뭔가를 읽는 척 해야 하는 것은 두 번 말하면 입아픈, 사무실 인터넷 사용 예절이지요? ㅎㅎ 02. 나는 이 맛에 여기 온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그래도 온라인에는 좀 많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더불어 좋은 책들도 소개받구요.. 03. 바람구두! 이런 책을 읽고, 이런 글을 써라. 딱, 지금처럼만? ^^ 하지만 머리가 딱딱한 저로서는 조금은 더 쉬운 글이 많길 바랍니다. 04. 내가 추천하는 서재인(물론 본인과 저는 제외하고. ^^) 파란여우님, 로쟈님, 아프락사스님 들은 알라딘에선 모르는 사람이 아마 없으실테죠? 전 남들 다 아는 걸 제일 늦게 아는 축에 속해서 그냥 이분들을 추천할게요. 05. 이벤트 당첨되면 이런 걸 해주라! 만나주세요! 라고 하면 당황하시겠죠? ㅋ 그냥 좋은 글 읽는 걸로 만족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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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늘빵님의 "책 "

저랑 비슷한 분들이 이렇게 많을 줄이야.. 외출할때 책 고르다 시간이 지연된다는 데는 백배공감... ^^ 특히 저는 시댁이 안산이라서 지하철타는 시간이 긴데, 시댁갈때는 항상 책 몇권씩 고르느라 시간을 많이 지체해서 남편한테 혼나거든요(다 읽지도 않을책 무겁게 들고 간다고도 야단).. 그래서 저는 항상 핸드백도 제일 큰놈만 고른답니다. 책이 안들어가는 핸드백은 무용지물이죠.. ㅎㅎ 아프락사스님 항상 즐겁게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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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두려워하랴?

토니 마이어스의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앨피)를 읽었다. 분량도 많지 않지만, 좋아하는 철학자에 관한 책이어서 단숨에 읽었다, 는 아니고, 며칠 걸려 읽었다. 중간에 다른 일들이 항상 끼어들기 때문인데, 생각해보니 오고가는 전철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읽은 듯하다. 복사한 원서까지 무릎에 펴놓고...

일단 우리말 번역본은 아마도 좀더 편안하게 독자에게 어필하기 위해서, '갖은 짓'(친근한 표현으로)을 다했다. 그냥 '슬라보예 지젝'으로 돼 있는 원서의 제목을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로 바꿔놓았을 때 이미 힌트를 얻을 수 있는 것이지만, 책의 소제목들도 대부분이 옷을 갈아입거나 분칠을 했다(가령, "The curse of Jacques: Limitations on the influence of Zizek"이란 절은 두 대목으로 나뉘어 각각 "다른 사람들이 싫어하는 혹은 생뚱맞은", "데리다와 라캉을 중재하려는 시도는 실패한다!"라 이름붙여졌다). 그리고 용어들도 가급적 이해하기 쉬운 걸로 바꾸었으며(가령 '누빔점'으로 번역되던 point de caption은 '소파 고정점'으로 바뀌었다) 원서에는 한 장도 들어가 있지 않은 인물사진/참고사진 등도 꽤 여러 장 집어넣었다(이런저런 이유로 책의 분량은 142쪽짜리 원서의 2배 가량이 되었다. 부록으로 원서에 없는 글 한편이 국역본에는 더 들어가 있더라도). 한마디로 편집자가 부릴 수 있는 수단은 다 부려본 게 아닌가라는 인상을 책을 읽으면서 받았다. 해서 한국어 독자들이 훨씬 더 친근감 있는 지젝을 만날 수 있는 멍석은 마련된 셈(*point de caption은 point de capiton의 오타이다. 이유가 없지는 않은 게 275쪽 '찾아보기'에 point de caption으로 잘못 타이핑돼 있고, 나는 그걸 받아적었던 것. 본문 134쪽에는 제대로 표기돼 있다) .

책이 나오기까지의 자초지종과는 무관한, 약간 도취적인 역자서문을 뒤로 하고 본문으로 들어가면, 한 입 크기로 잘 썰어놓은 지젝을 만나게 되는바, 우리말로 된 '가장 쉬운 지젝 입문서'란 선입견에 걸맞는 내용들이 펼쳐진다. 솔직히 두드러진 경력의 소유자로 보이지 않는 저자이지만 이 만한 '정리력'을 선보이는 게 영미학계의 '내공'이 아닌가란 생각도 든다. 1급 학자들을 뒷받침하는 2급 학자층이 두터워야, 즉 미드필드가 두터워야 새로운 이론/업적이 나오든가 말든가, 골도 들어가든가 말든가 한다. 골대 앞에 한 명 세워놓고 골이 들어가기만을 기다리는 건 전근대적인 방식이자 요즘의 동네축구도 못되는 방식이다. 하긴 핑계거리가 없는 건 아니다. 이들은 영어사용자들이고, 지젝이 영어로 쓴 책들을 읽은 것이기 때문("지젝은 유연하면서 쉽게 이해되는 문체로 글을 쓰는데"(229쪽) 같은 소리를 들으면 기분 나쁜 한국 독자들도 있겠다). 애당초 지젝이 한국어로 책을 썼다면, '나'라도 이런 정리를 못하랴 싶다. 하지만, 핑계는 핑계로 내버려두기로 하자.  

어쨌든 이 슬로베니아 출신의 '괴물' 철학자는 영어권 학계/이론계에 등장한 지 불과 15년 정도만에 '우리 시대의 사상가' 명단에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을 등재시켰다. 그리고 일부 회의적인 시각과 비판에도 불구하고, 저자 마이어스의 주장대로 그의 파괴력/영향력은 갈수록 확고해질 가능성이 높다(마이어스의 마지막 문장. "한마디로, 지젝은 존재하게 될 것이다!Quite simply, Zizek will have been." 그러니까 그의 크기가 다 드러나고 제대로 평가받는 건 미래의 일이 될 거란 얘기). 적어도, 1989/1991년 이후 탈냉전 시대, 그리고 2001년 9.11 이후에 '가능한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그의 작업들은 그가 '우리 시대의 철학자'로서 전혀 손색이 없다는 걸 확증해준다. 마이어스의 책은 그런 '지젝 따라잡기'로서 (현재로선) 더없이 유익한 길잡이이다. 그리고, 그런 의의를 책 제목에 반영하자면,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보다 더 적절한 제목은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두려워하랴?"가 될 것이다(초심자라도 두번쯤 책을 통독하게 되면, '웬만한' 지젝을 읽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때때로 다시 참조해가면서).    

번역본의 뒷표지에도 박혀 있지만, 마이어스가 지젝의 사상을 요약하기 위해서, 그에게 영향을 준 세 사람(헤겔, 마르크스, 라캉)에 대한 설명 이후에 내세운 핵심 이슈는 다섯 가지이다. (1)주체란 무엇이며, 왜 그토록 중요한가? (2)탈근대성에서 끔찍한 것은 무엇인가? (3)현실과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4)남성과 여성의 관계는 무엇인가? (5)왜 인종주의는 환상인가? 등. 이들 각 장마다 말미에 내용요약(Summary)까지 박스 처리돼 있는 책의 내용을 다시 요약한다는 건 동어반복이겠는지라(나중에 '읽기'를 시도한다면 모를까), 여기서는 국역본을 보완하는 의미에서 몇 가지 오타와 미심쩍은 대목만을 지적해둔다. '이보다 더 쉬울 수 없는 지젝'이지만, 혹 옥의 티 때문에 독서의 재미가 반감되지 않을까라는 우려도 갖게 되기 때문에. 즉, 몇 가지 지적사항만 고려한다면, 책은 지젝 입문서로서 나무랄 데 없다는 걸 거듭 강조해둔다.

-32쪽에서 지젝의 동료이자 두번째 아내였던 '레나타 살레클(Renata Salecl)'의 올바른 표기는 언젠가 지적한 대로 '레나타 살레츨'이며 이미 도서출판b에서도 '살레츨'로 표기하고 있다. 여담이지만, 지난 3월말에 지젝은 아르헨티나에서 세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30년 연하의 신부와(첫결혼을 일찍 한 그이기에 아마도 세번째 신부는 자신의 아들보다 나이가 더 어릴 듯하다). 마이어스가 요약해주고 있는 지적 경력에 따르면, 지젝은 1971년 그러니까 22살에, 철학과 사회학 학사를 취득하고, 1975년에 400쪽에 달하는 학위논문을 쓰고 석사학위를 취득한다. 그리고는 대학교수직을 얻을 뻔하지만, 그의 '강의'가 학생들을 물들게 할지 모른다는 당국자들의 우려 때문에 결국 얻지 못한다. 그는 동료였던 믈라덴 돌라르와 함께 이론정신분석학회를 창설하고(지젝이 회장, 돌라르가 부회장이었다. 둘이 시작한 학회였고), <제문제>란 잡지와 <아날렉타>란 시리즈도 낸다(마이어스에 따르면, 지젝은 자신의 책에 대한 악평이나, 있지도 않은 책에 대한 서평을 잡지에 게재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지젝은 1979년 류블랴나 대학의 사회학연구소의 연구원이 되는데, 당국의 염려/배려에 따라 그는 강의 부담이 전혀 없이 순수하게 연구만을 수행하게 된다(이 때문에 지젝은 방한강연시 자리를 옮길 생각이 없노라고 조크를 섞어 얘기했다. 굳이 의무적인 강의까지 해야 하는 미국 등지의 대학으로 유명세에 걸맞게 옮길 이유가 없다는 것). 그리고 1981년에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인터뷰에 따르면 그의 박사학위논문은 하이데거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는 슬로베니아를 방문했었던 라캉의 사위 자크-알랭 밀레르의 초청으로 친구인 돌라르와 함께 프랑스로 건너가서 밀레르의 세미나에 참석한다(그 세미나를 통해서 비로소 라캉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고 지젝은 고백한바 있다). 지젝은 세미나에 참석하는 한편, 밀레르의 정신분석도 받게 되는데, 이때 두 사람간에 트러블이 있었는지 1985년 밀레르의 지도로 지젝은 정신분석학 박사학위논문을 쓰게 되지만, 밀레르로부터는 논문의 출판을 거부당한다. '좌절'한 지젝은 슬로베니아로 돌아가며 정치활동에 뛰어든 그는 1990년에 슬로베니아 대통령 후보에 출마하기도 한다. 그러는 와중에 출간한 것이 1989년의 (영어권)데뷔작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다. 이후에 그가 현재까지 (영어로) 낸 책이 최소 26권 이상인바(나는 그 중 24-5권 정도를 갖고 있다), 올해도 최소 2권 이상이 나올 예정이다(얼마전에는 란 연구서가 출간되기도 했다).  

이러한 경력에서 마이어스는 두 가지 중요한 모멘트를 지적한다. 비주류/비제도권적 성향과 관련한 것인데, "이와 같은 비제도성으로 인해 적어도 두 번(한번은 석사논문과 관련해서, 다른 한번은 두번째 박사학위와 관련해서) 기성제도에 편입할 기회를 놓쳤지만, 지젝은 제도에 대한 이런 저항을 통해서 자신의 위치를 발견했다... 지젝 이론의 놀라운 성공은 부분적으론 이른 시기에 겪은 실패와 그 실패 속에서 자기 자신을 체제와 이질적인 존재로 인식할 수 있었던 데서 비롯됐다는 것이다."(37쪽) 이러한 교훈을 따르자면, 이론가로서 성공하기 위한 요건은 '실패'이다. 그것도, 두 번. 지젝의 말을 비틀자면,  "이론가는 반드시 두번 실패해야 한다." 마이어스는 주체에 대한 지젝의 특이한 관점/이론이 이러한 자기경험과 무관하지 않을 거라고 지적하는데, 그럴 법한 견해이다.

-58쪽. 라캉의 두 타자에 대해 설명하는 소단락에서 마지막 문장. "따라서 이런 타자성은 동일화 과정으로 내면화될 수 없다는 점에서 상징계의 타자성보다 훨씬 더 극단적이다."(58쪽) 여기서 '상징계'는 '상상계'의 오타이다. 문맥상 '이런 타자성'이란 게 '상징계의 타자성'이므로 원서와 대조하지 않더라도 오타라는 걸 알 수 있다.

-112쪽. "왜냐하면 어머니의 초자아적 명령 아래에서 이 딸에게 남겨진 유일한 쾌락의 통로는 고통의 강도에 개입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에서 '고통의 강도'는 'a degree of pain'을 옮긴 것인데,  별로 중요하진 않지만, '얼마간의 고통' 정도의 뜻이 아닐까 한다. 다른 대목들에서 읽기 편한 쪽으로 옮겨주고 있기 때문에 '고통의 강도'란 표현은 좀 낯설다. 113쪽 소단락에서 "이런 은폐야말로 법이 작동하는 데 필요한 긍정적 조건이기 때문이다"에서는 positive의 역어로 '긍정적'보다는 '실정적'이 낫지 않을까 싶다. 이건 오역을 지적한다기보다는 내 생각이 그렇다는 것이다. positive만 하더라도 우리말로는 적극적/긍정적/능동적/실정적 등으로 옮겨지는바, 일반적인 예상과는 다르게 번역에서 애를 먹는 경우는 상응하는 우리말이 없을 때가 아니라 이처럼 너무 많을 때이다(주체/주어/주제로 번역되는 'subject'나 반성적/반사적/성찰적/재귀적으로 번역되는 reflexive도 마찬가지이다).

-115쪽에서, "이 예수상이 전하는 진짜 메시지는 실재 예수를 주창한 자들에게는 결코 오직 않을 그의 부활이 아니라, 실제 예수가 몸소 보여준 자기발전의 영적 편력이다." '오직 않을'은 물론 '오지 않을'의 오타이고, 시제상 예수의 부활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에 일어난 것이다(미래와 관련된 건 '부활'이 아니라 '재림'이다). 원문은 "Resurrection, which... never actually happened"이므로, "실제적으로는 일어난바 없는 부활" 정도의 뜻으로 옮겨져야겠다.

-119쪽. 오역이랄 건 없지만, 좀 모호한 대목: "지금까지 타자 속에서 찾으려 했던 것을 이제부터는 우리 자신 속에서 찾으라고 요구한다... 여기서 타자란 그 자체로는 그/그녀의 주체가 못 되는 상상적 사본, 사실상 그/그녀를 향한 메시지로 자기충족적인 자아(타아)의 측면이다." 뒷문장의 원문은 "[T]he Other is reduced to the other, an Imaginary counterpart who is not a subject in his/her own right, but in effect, an aspect of a self-sufficient ego (the other) with a message for him/her."(59쪽) 여기서는 대문자 타자Other와 소문자 타자other 간의 구별이 중요한데, 다른 대목들에서 Other를 '대타자'라고 옮겼으므로, 처음에 나오는 '타자' 역시 '대타자'라고 옮겨져야 한다. 그리고 소문자 타자라는 것, 이런 대타자의 상상적 대응물(counterpart)이다. 그런 한에서, 이 소문자 타자는 (대타자와 같은) 제 값의 주체가 아니며, 단지 자기-충족적인 자아의 측면에 불과하다. 대략 그런 정도로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다.

-147쪽. 첫문장에 '좌파 이데올로기는 한물 갔다가도 얘기되는 오늘날"에서 '좌파'는 동사 leave의 과거분사형left를 명사로 잘못 옮긴 것이다('이데올로기 일반론'이 갑자기 '좌파 이데올로기론'으로 둔갑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편집상의 실수인데, "지젝은 두 죽음.."으로 시작되는 대목부터 149쪽 전체는 147쪽의 "상징적 죽음과 실재적 죽음"이라는 소단락에 이어지는 내용이다. 아마도 책을 급하게 내느라고 꼼꼼하게 교정을 보지 않은 탓으로 보인다(재판을 찍는다면, 마땅히 교정되어야 할 것이다). 해서, "이데올로기에서 현실을 구분해내는 법"이란 장의 결론은 이렇다. "현대 정치의 문제는 그것이 비정치적이라는 것, 현존하는 자본주의 사회 체제를 자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이 구조를 바꾸기 위한 첫 단계는 그 '자연성'이 이데올로기적 형성물임을 폭로하는 것이며, 그런 비판을 위한 첫걸음은 그것의 실행가능성을 수립하는 것이다. 그것이 지젝의 모델이 지향하는 목표이다."(147쪽)

-154쪽. "지젝은 이 공식(=라캉의 성차 공식)의 난폭한 수용에 언제나 경의를 표하지는 않는다." '난폭한 수용'은 'outraged reception'인데, 내가 보기에는 라캉의 성차공식에 대해 '불편해하는', 혹은 '다혈질적인 반응' 정도의 뜻이다. 지젝은 (라캉처럼) 그런 반응에 그다지 개의치 않는다는 것. 조금 내려가서, "이론이 뉘앙스가 풍부한 사유보다 독실한 신임을 얻는 데 더 많은 시간이 드는 이 시대에, 이런 전략은 확실히 참신한 우상파괴처럼 느껴진다." 원문은 "In an era where theory often spends more time establishing its pious credentials than actually articulating nuanced thought..."이다. 번역문은 '이론'과 '사유'를 비교의 대상으로 놓았는데, 이건 오류이다. 이론이 뭐하는 것보다 뭐하는 데 더 시간을 많이 보내는, 즉 더 전력하는 시대에, 란 뜻이어야 한다. nuanced thought란 '뉘앙스가 풍부한 사유'라기보다는 (여러 가지 뉘앙스를 갖고 있어서) '다소 모호한 사유'란 뜻이다. articulate란 것은 그걸 분명하게/명료하게 한다는 뜻이고. 지젝은 그런 뉘앙스를 즐기지 않고 대놓고, 아주 공격적으로 말한다. 에둘러 말하지 않는 것, 그게 지젝다운 면모이다.   

-159쪽. 이것도 편집상의 실수인데, "마르크스가 자유, 평등, 사유재산, 벤담의 <자유. 평등. 사유재산의 배타적 영역과 벤담>에 대해 논할 때"가 말이 되는가? 173쪽에서는 한 문장이 누락됐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은 이데올로기와 비슷하다." 다음에 "우리는 그것을 '성적 차이의 이데올로기'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we may even say that it is the ideology of sexual difference.)가 빠졌다. 마지막 문장의 '일치'는 '화해' 혹은 '조화' 정도의 뜻이다(남성과 여성의 '일치'가 불가능한 건 상식적인 차원에서도 당연하지 않은가?). 원문은 "[I]t is not possible to reconcile 'man' with 'woman'."

-224쪽. 이건 궁금한 점이다. 지젝 비판가들을 다루면서 마이어스가 "Theorists such as Teresa Ebert and Denise Gigante..."라고 한 대목을 번역본은 "좌파 페미니스트로 유명한 테레사 에버트, 프린스턴 대학 영문학 박사과정에 있는 데니스 히간테 같은 좌파 이론가들은"이라고 옮겼다. 역자가 얼마나 '수고'했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테레사 에버트'와 '데니스 히간테'의 뒷조사까지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Gigante'가 '히간테'로 표음된 것은 어떤 근거에서인지?(일부 인구어에서 g와 h 사이에 호환성이 있다는 건 알지만, 이 경우에도 그런 건지 궁금하고 Gigante란 이름만 갖고 이 사람의 출신 국적까지 파악되는 건지 신기하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마지막에 부록으로 실린 글 "향락과 그것의 정치적 부침"은 역자에 따르면, "지젝의 이 책의 한국어판 출간을 기념하여 보내준 미발표 원고"(235쪽)인데, 대부분, 즉 241쪽에서 252쪽까지는 이미 작년에 당대비평 특별호 <아부 그라이브에서 김선일까지>(생각의나무)에 "아메리카 하위문화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또는 럼스펠드가 아부 그라이브에 관해 알고 있는 모르는 것"이란 제목으로 실렸던 것이다. 물론 다른 대목들도 아주 새로운 내용은 아니다(알베르트 슈만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환상의 돌림병>을 참조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유감스러운 건, 252쪽에서 Walter Benjamin을 '발터 베냐민'으로 표기한 것(이전에도 지적한바 있지만, '벤야민'이란 기존의 표기가 어떤 점에서 결격인지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유식한 자들의 이런 '상징폭력'은 불쾌하다. 저서도 아니고 번역서인 경우엔 상식과 관행을 존중하면 된다).

원서의 Further Reading은 번역서에서 '지젝의 모든 것'이란 제목으로 갈무리돼 있다(이 책이 2003년에 나온지라 작년에 나온 <이라크> 등은 서지에서 빠져 있다). 이 책을 읽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서 몇 가지 간추리면, 마이어스는 먼저 지젝의 책 중 단 한권만 읽는다면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을 권하겠다고. 그가 어려운 책으로 꼽는 것은 <부정성과 함께 머물기>(근간)이고, 초심자가 읽기에 가장 좋은 책은 <환상의 돌림병>이다(국역본은 물론 '만만찮다'). 최근에 나온 <까다로운 주체>는 "가장 이해하기 쉬운 편"에 속하는 책이지만, "부분적으로는 무척 어렵"다. 그리고 <믿음에 대하여>는 "지젝의 다른 저작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도 쉽게 읽을 수 있는(그래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인데, 우리의 경우엔 유감스럽게도 가장 못 믿을 책이며 따라서 가장 안 팔린 책이다(나도 뜯어말린 책이지만). 현재까지 나와 있는 지젝 선집으로는 라이트Wright 부부가 편집한  <The Zizek Reader>(Blackwell, 1999)가 있다. 지젝의 원문을 '한번' 읽어보고픈 독자에게 한권만 추천하라고 한다면 이 책을 꼽을 수 있겠다...

05. 05. 16.

P.S. 한 가지. 248쪽에서 언급되고 있는 영화 <이중처벌Double Jeopardy>의 국내 출시명은 <더불 크라임>(1999)이다. 토미 리 존스와 애슐리 저드가 나오는 영화. 애슐리 저드가 찍은 이 계통의 영화들 가운데에서는 가장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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