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경의 <장미의 이름은 장미>를 읽으려고 책을 펼쳤는데 페이지 사이에 리플릿 하나가 끼워져 있다. 짤막한 책 소개가 곁들여져 있는 책 광고 리플릿. 나는 그런 광고지, 전단지, 소위 찌라시에 약하다. 있으면 일단 읽는다. 꼼꼼하게 시간을 들여 정독한다. 별 소득 없이 훑어내려가다가 <2021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소개 문구를 읽고 나는 빵 터져버렸다. "이 결과가 심사위원들에게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ㅋㅋㅋㅋㅋ "블라인드 심사가 발견해낸 문진영이라는 낯설고도 준비된 이름" 아마도 암묵적 수상자로 점찍어두었던 작가가 있었는데 블라인드 심사를 하고 나서 결과를 보니 듣보잡 엉뚱한 작가가 수상자가 된 상황이었던 걸까. 인정하고 싶진 않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딱히 마음은 내키지 않아서 나온 심사평처럼 읽혔다. 신선한 충격이었다라 ㅋㅋㅋ 갑자기 문진영 작가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 장바구니에 작가의 책들을 담는다.   

   






    



미리보기로 문진영 작가의 글들을 읽다가 나의 최애 최은영 작가가 떠오른 건 퍽 자연스럽다. <밝은 밤>은 읽기 전이고, <애쓰지 않아도>는 아직 주문조차 안 한 상태. 책 소개에 나와 있는 작가의 말을 읽었다. 

최소한의 권리를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이미 충분히 가졌으며 더는 요구하지 말라고 말하는 이들을 본다. 불편하게 하지 말고 민폐 끼치지 말고 예쁘게 자기 의견을 피력하라는 이들을 본다. 누군가의 불편함이 조롱거리가 되는 모습을 본다. 더 노골적으로, 더 공적인 방식으로 약한 이들을 궁지로 몰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다. 인간성의 기준점이 점점 더 내려가는 기분을 느낀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많은 것들이 나아질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힘을 더해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멋있어서 내가 으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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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좋은데 책은 읽지 않는다. 책을 집어들었다가도 한두 페이지 읽다 말고 금세 해찰한다. 차라리 가라앉으면 좋을 것을 둥둥 부유하는 마음. 어쩌면 '날이 좋은데'가 아니고 '날이 좋아서'인지도. 간질간질 공기가 따뜻해서. 내일은 다른 책을 챙겨가봐야겠다. 필독서여도 재미없으면 완독하지 않기, 잘 만큼 잤으면 일어나기, 하루를 알차게 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 버리기. 나와 비슷한 면이 많은, 해방클럽 부장님의 해방일지.


화사하게 피었던 철쭉들이 햇빛에 바래고 찬 비에 너덜너덜해져 벌써 행색이 초라하다. 아무래도 이른 감이 있다. 일주일쯤 더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몰락해가는 철쭉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어쭙잖은 위무의 말들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올 것 같아 조심하는 편이다. 염창희(이민기)가 그랬다. 할까 말까 망설이다 하는 말 중에 해서 후회 안 하는 말이 없다고. 하면 안 된다는 걸 아니까 망설이는 거라고. 근데 굳이 말을 해가지고 안 좋은 끝을 보고 만다고. 


퇴근길 식자재마트에 들러 당근과 사과와 치토스 한 봉을 샀다. 당근은 100g에 200원도 안 했고 사과는 9,800원에 8개. 당근 주스를 해먹으려고 산 건데 사과가 맛있어서 오랜만에 사과 한 알을 다 먹었다. 치토스도 먹고. 아몬드도 먹고. 뭐 먹은 게 많네...



구 씨의 멀리뛰기를 보고 난 후, 아버지가 따서 길에 둔 호박 두 개를 집어들고 집으로 가면서 염창희의 혼자 신난 발걸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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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띠 비띠 스파이더 노래 불러주세요." 에이미가 꼬물거리는 손가락으로 라이머콩을 꼭 쥐고 사랑스럽게 부탁했다. 이저벨은--지긋지긋해서--안 부르겠다고 한다. 너무 피곤해서 안 부르겠다고. 하지만 에이미는 더없이 사랑스럽고 귀여운 아이이며, 엄마가 식탁 맞은편에 앉아 있는 것이, 팔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 것이 마냥 기쁘다. 아이는 행복해서 다리를 대롱대롱 흔들고, 분홍색 잇몸에 하얀 조약돌처럼 박힌 앙증맞은 치아를 드러내며 조그맣고 촉촉한 입으로 활짝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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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2-04-22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띠 비띠 스파이더 ...˝ 저 이 노래 아는데...ㅋㅋ

Joule 2022-04-27 17:24   좋아요 0 | URL
와~ 정말요! 아기 키우는 집에서는 유명한 노래인가 보네요. ㅋㅋ

moonnight 2022-05-01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카아이들이 아기였을 때가 떠올랐어요. 아기 에이미 너무 귀엽네요. ^^

Joule 2022-05-02 16:02   좋아요 0 | URL
저는 조카도 타인처럼 냉정하게 봐져서 달밤 님의 조카 사랑이 가늠도 상상도 잘 안 될 때가 많아요. 어떤 기분인지.
 








인생을 살면서 간직하는 것은 기억이 전부이다시피 해서, 우리가 삶을 생각할 때 채택할 수 있는 유일한 관점은 기억하는 자아의 관점이다. 

내가 강의를 끝내고 어느 청중에게 들은 짧은 이야기는 기억과 경험을 구별하는 어려움을 잘 보여준다. 그는 음반을 틀어 놓고 긴 교향곡을 넋을 놓고 듣고 있었는데, 곡이 끝날 무렵 음반 흡집으로 깜짝 놀랄 잡음이 나는 바람에 "음악 감상을 통째로 망쳤다"고 했다. 그런데 사실은 감상을 망친 게 아니라 감상의 기억을 망쳤을 뿐이다. 감상하는 자아, 즉 경험하는 자아는 곡을 거의 다 들을 때까지 좋은 경험을 했고, 마무리가 안 좋았다고 해서 그 경험이 취소될 수는 없다. 이미 일어난 일이다. 내게 질문을 던졌던 그 사람은 결말이 안 좋았다는 이유로 그때의 경험을 통째로 망쳤다고 했지만, 그것은 음악을 들으며 행복했던 40분을 무시한 평가다. 실제 경험은 과연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을까? 

경험과 그 기억을 혼동하는 것은 인지 착각의 좋은 예이며, 사람들은 경험을 기억으로 바꿔치기 하는 탓에 과거 경험을 망쳤다고 생각한다. 경험하는 자아는 발언권이 없다. 기억하는 자아는 더러 엉터리지만, 삶의 점수를 기록하고 삶의 교훈을 지배하는 자아이며, 결정을 내리는 자아다. 우리가 과거에서 배우는 교훈은 미래 기억의 질을 극대화하되, 미래 경험의 질도 극대화한다는 보장은 없다. 한마디로 기억하는 자아의 횡포다. 

우리는 내 이익과 관련한 선호도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 그것이 내 경험에 근거했어도, 그 경험의 기억이 고작 몇 분 전에 생긴 것일지라도 그러하다. 취향과 결정은 기억에서 나오고, 기억은 엉터리일 수 있다. 이 사실은 인간은 선호도가 일관되고 그것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합리적 행위자 모델의 기초가 되는 생각에 문제를 제기한다. 이런 들쭉날쭉한 선호도는 타고난 것이다.

결혼 생활이 실패라는 생각은 전적으로 기억하는 자아의 관점이다. 이혼은 막판에 불협화음을 낸 교향곡과 같다. 끝이 나쁘다고 해서 전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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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나라에서 운전면허증에, 사고로 사망할 경우 장기 기증을 할지 안 할지 표시해둔다. ... 장기를 기증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사람은 없겠지만, 사람들 대부분이 별생각 없이 이 선택을 한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다.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장기 기증률을 비교한 것이 그 증거인데, 이 수치는 문화가 비슷한 이웃 나라들 사이에서도 크게 달랐다. 2003년에 나온 기사에서, 오스트리아는 장기 기증률이 거의 100퍼센트인 데 반해 독일은 12퍼센트에 그쳤고, 스웨덴은 86퍼센트인 데 반해 덴마크는 고작 4퍼센트였다. 

이 엄청난 차이는 질문 형식이 유발한 틀짜기 효과다. 기증률이 높은 나라는 장기를 기증하고 싶지 않다면 기증 거부 칸에 따로 표시를 해야 하는 '거부 선택' 형식을 택한 나라다. 그러니까 이 간단한 조치를 하지 않으면 기증하겠다는 뜻으로 간주된다. 반면에 기증률이 낮은 나라는 기증하고 싶다면 기증 찬성 칸에 따로 표시를 해야 하는 '찬성 선택'을 택한 나라다. 이게 전부다. 사람들이 장기를 기증할지 안 할지를 예견하는 최고의 단일 지표는 해당 칸에 별도로 표시하지 않았을 때 자동으로 선택되는 기본 옵션을 무엇으로 지정했느냐다. ...

중요한 선택은 해당 상황의 하찮은 특징에 좌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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