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겪어 보기 전에는 모른다더니 나에게 이런 징글징글한 청승끼가 있는 줄은 예전엔 몰랐다. 아니 알고는 있었어도 미확인 사실로서 아닌 척 없는 척 해도 되는 거였다.

꿈에 다시 그녀가 나타났다. 내 앞에서 몸을 푸르르르 털어 나로 하여금 "야! 먼지 나! 저리 가서 털어!"라고 꼭 한 번쯤 야단치게 만들던 그 모습 그대로. 나는 개들과 실갱이를 하다 오후 3시 약속을 깜박 하고 있었다. 2시 35분쯤 휴대폰이 와서 상대방이 3시 약속을 4시 20분이나 6시 20분으로 미루면 안되겠냐고 양해를 구해 왔다. 나는 약속을 6시 20분으로 연기했다. 그러나 물론 나 역시 약속을 깜박하고 있었으며 이제야 잠자리에서 일어난 참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문득 강아지를 바라보고 있는데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이상하게 그녀를 보고 있는데 자꾸 슬픔이 목구멍을 치고 넘어 올라오는 것이다. 어느 사이 나는 그녀를 껴안고 눈물을 철철 흘리면서 하소연도 아닌 통곡도 아닌 애걸도 아닌 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꿈에, 꿈에... 네가 죽는 꿈을 꾸었어. 그런데 잘 모르겠어. 그것이 그때는 난 현실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꿈같지 않게 너무나 생생했거든. 너를 이렇게 껴안고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나는 볼도 꼬집어 보았다. 아팠다. 꿈이 아니었다. 개털 냄새도 먼지도 모두 맡을 수 있는데 어떻게 이게 꿈일 수 있겠는가.

"그런데 어떻게 이게 꿈일 수 있겠니. 이렇게 생생한데. 나는 나쁜 꿈을 꾸었던 거지, 그동안. 그러니 네가 말해 줘야 해. 네가 살아 있다고. 너는 죽은 게 아니라고. 아니 네가 살아 있는 것이 꿈인지 죽은 것이 꿈인지 내게 말해줘. 네가 죽은 것도 꿈이고, 살아 있는 것도 꿈이고. 네가 죽은 것도 현실이고 살아 있는 것도 현실이고. 너무나 혼란스러워. 그러니 네가 말해 줘. 네가 살아 있는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내가 아주 나쁜 꿈을 꾸었던 거라고 네가 말해줘."

나는 그녀를 붙들고 여전히 울고 있었고 그녀는 그 사이 까무잡잡한 피부에 볼이 터질듯이 통통한 세네 살 정도의 단발머리 여자애가 되어 있었다. 커다란 눈망울에서 눈물이 내 눈에서와 같이 볼을 타고 철철 흘러 넘치고 있었다.

무엇인 생시인지 알려 달라는 말에 그 작은 여자아이로 분한 그녀는 그저 눈물만 흘리며 아무 말 하지 않고 나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꿈은 그렇게 깨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알려 달라는 내 말에 내 스스로 깨어나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전에 키웠다가 이런 저런 연고 끝에 납치를 당해 지금은 소식을 알 수 없는 블랙 푸들(그녀와 동갑이었으며 동성애자로서 그녀를 상당히 좋아했다.) K가 찬조출연으로 나왔는데 검은 색 거위가 되어 있었다. 언제나처럼 내 무릎 위로 냉큼 올라와 또아리를 틀고 앉는 것이 K는 거위가 돼도 여전했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chaire 2007-10-02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단발머리 강아진 말이죠. 결코 죽은 게 아닌 거 같아. 죽어 있는 건 우리들일 거예요, 아마. 아무리 생각해도 그쪽이 맞는 것 같아요. 님의 꿈이 계속해서 암시해주는 걸 보면.

난 어제 두시에 잠이 깨서, 다섯시 무렵까지 잠을 못 이뤘어요. 하여 지금 눈이 침침하다는. 굉장히 긴 시간이 굉장히 빨리 진공 상태로 흘러가버리더군요. 어젯밤, 아니 오늘 새벽에는. 불면의 밤이 느는 건, 늙었다는 증거일 뿐인 거라고 위무하고 있어요.



Joule 2007-10-03 0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로해 줄게요. 간만에 처음으로 한 숨 돌릴 만한 여유가 났나 봐요. 그 전에는 화장실에 앉아 있어도 마음이 바빴나 보죠. 화장실 변기에 앉아 있는데 예전에는 몰랐던 내 뱃살이 보였어요, 흉하게. 그때 나는 그것을 보면서 태연히 그렇게 말해 줬어요.

"넌 연애하면 안돼. 양심도 없냐?"

하하. 그런데 나 오늘 이태원에서 재미있는 남정네의 문자를 받고 보니 조금 전의 이 양심의 가책 싹 가시더라구요. 나 제법 고르고 골라 가장 쓸만한 녀석 고른 거였는데. 그 녀석의 문자가 "ㅋㅋ"로 시작하는 건 아무래도 참을 수가 없더라구요. 말하자면 내 뱃살보다요.

Joule 2007-10-03 0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 우리는 나이 들고 있다는 거 반은 긍정하고 반은 부정이에요. 설명은 쉬운데 말하는 게 너무 피곤해 안 할래요. 정 궁금하면 나한테 저당잡힌 3만원어치의 안주를 사든가, 내가 술을 살 테니.
 




BIN 555 shiraz는 친애해 마지 않는 나의 c양과 내가 입을 모아 '우리가 찾아 낸 보물'이라고 인정하는 와인이다. 가격은 이마트에서 2천 3백원. 오늘, 날도 적적하고 해서 이마트 가서 한 병 받아왔다. 어린 시절 내가 가장 아쉬운 대목이 있다면 아빠가 술을 못 드셔서 주전자에 막걸리를 받아와 본 추억이 없다는 것. 부모와 다섯남매를 통틀어 나만 이토록 음주가무를 즐기는 걸 보면 국민학교 5학년 때 내가 굴다리 밑에서 주어온 애라는 나의 굴다리 이론은 상당히 신빙성있는 가설임에도 불구하고 늙어갈수록 엄마를 빼닮아간다는 손위 언니들의 증언 때문에 갈수록 그 진위를 의심받고 있는 상황이다, 아무튼.

우리가 찾아낸 보물임에도 불구하고 꽤 오랫동안(음ㅡ, (.. )( '') 한 달?) 빈 555를 맛보지 못했는데 오늘은 시간도 늦었고, 얼른 술을 사들고 가서 얼른 마셔줘야 내일 수영장에도 갈 수 있으리라는 계산 하에 그냥 아는 와인 중에 가장 최근에 맛보지 못한 것을 고르다 보니 빈555를 집어들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간만에 맛본 빈555는 뭐랄까 빈555의 재발견이랄까. 어머ㅡ, 너 이런 맛이었어! 화들짝! 내가 달콤은근한 와인을 좋아하긴 하는 모양이군. 얘, 어쩌면 이렇게 야사시이(온화하다, 다정하다, 상냥하다 뭐 대충 그런 뜻의 일본어)하니. 욕시, 내가 쫌 보기 보는구나. 기집애, 성격 괜찮네. 뭐 여기까지가 간만의 재회 뒷담.

아참, 사진에 보이는 저 예쁜 파란 그릇은 내가 개당 8천원 주고 산 에밀 앙리라는 수플레 그릇인가 뭔가 하는 것이다. 나는 저 그릇에다 그러니까 깍두기도 담아 먹고, 저렇게 에그 스크램블도 담아 먹고 심심하면 밥도 담아 먹는다. 사진에서만큼 파란 색이 참 예쁘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chaire 2007-08-01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인잔이 저렇게 큰 물건이었던가 하고 깜짝 놀라게 되는군요. 옆의 빈 오오오를 담은 와인 병이 살짝 위축돼 보여요. 빈 오오오는, 시그널보다는 엔딩 가까운 지점에 가야 제 정체를 드러내주는 오묘한 녀석이죠. 그런 녀석과 야밤 데이틀 즐기셨으니, 제가 꿈에 조인성과 만나 데이트했던 것 못지않은 쾌락이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근데 빈의 가격이... 아마, 22,300?
파란 그릇 참 깔끔하고 예뻐요. 근데 그 그릇보다 저 에그 스크램블에 더 놀라고 있습니다. 아니 저런 것도 만들 줄 알다니!!!

Joule 2007-08-03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덩달아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아무래도 각도를 제가 잘못 잡은 게 아닌가 싶어요. 빈555를 당분간 꽤 오래 마시지 않을 것 같기도 해요. 단 향과 단 맛이 참 강한 술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느꼈던 것 같기도 하고. 에그 스크램블은 쉽잖아요. 계란 후라이보다도 더. 달궈진 후라이팬에 달걀을 깨뜨려 넣고 나무 젓가락으로 마구 헝클면 돼요. 소금 살살 뿌리고.

2007-08-19 2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누에 2007-08-27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처음보는 신기한 이름의 와인이네요. 가격도 저렴하고 ^^

다락방 2007-09-14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에그 스크램블이 그렇게 만드는 거로군요!! 이제 알았네. 늘 계란후라이 반숙만 해먹었거든요 :)

다락방 2007-09-18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쥴님의 이 페이퍼를 읽고나서 이마트를 갔는데요, 그곳에서는 왜 이 와인이 8,000원이었죠? 이것도 그러니까 종류가 다양한가요? 제가 통 와인을 몰라서 말이죠. orz

Joule 2007-09-18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격을 제가 잘못 썼어요. 2만 3천원을 음주 페이퍼다 보니 2천 3백원으로 잘못 썼네요. 그런데 BIN555는 딱 하나로 알고 있어요. BIN 시리즈는 포도 품종 별로 뒤에 붙는 번호가 달라지는 거 같더라구요.
 

# 1
꿈 속에서 내가 나를 보았다. 뒷모습이었는데. 족히 100킬로그램은 나갈 듯한 거구로 뒤뚱뒤뚱 걷고 있는 모습이었다. 뒤에서 바라다 본 내 모습은 살들이 어찌나 넘쳐나는지 살과 살이 덩어리져 겹쳐지고 패이고,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체증이 걸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내 자신의 뒷모습을 본 나는 상당한 충격에 빠져 주위 사람들에게 분노를 터뜨리고 있었다. 요지인즉슨 내가 저 지경이 되도록 왜 아무도 진실을 말해 주지 않았느냐는 것. 모두들 나 듣기 좋으라고 예쁘다, 예쁘다하고 거짓말만 하니까 내 자신이 예쁜 줄 알고 방심한 끝에 내가 저렇게 흉하게 된 것 아니겠느냐고. 그러나 과연 '낙천주의자'답게 나는 나 자신의 엄청나게 비대한 뒷모습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린다. "운동을 정말 열심히 해야겠어!"    


한 두 달 전부터 나는 내 자신이 흉측하게 살이 쪄간다는 두려움에 조금씩 시달리다가 몇 주 전부터는 혼자 있을 때조차 굉장한 신경증으로 시달릴 만큼 내 자신의 몸을 경멸하기 시작했다. 거울 보는 것도 피하고 잠을 잘 때도 내 몸이 풍선처럼 아예 뻥하고 터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부대끼며 잠자리를 뒤척이곤 했었다. 주위 사람들이 나를 예전과 다름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보는 것은 살이 쪘다고 말하면 내가 충격을 받을까봐 입을 다무는 것이고, 조금 더 여윈 것 같다고 하면 살이 쪄가고 있는 나를 위로하기 위한 말로 들리니 이것은 거의 강박증에 가까운 병적인 상태가 아닌가. 더구나 저 꿈을 꾸던 지난 밤 나는 하이네켄 세 깡을 마시고 배가 고파 비빔국수를 말아 먹고 30분도 지나지 않아 잠자리에 들었다. 그 전날도 물론 마찬가지였고. 그러니 꿈 속에서 내가 찰흙덩어리를 무신경하게 합쳐 놓은 것 같은 비대한 몸으로 뒤뚱거린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오늘 수영장에 등록하고 왔다.

 

쪼잔한 부연:
펜의 종류에 상관없이 업무를 볼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내가 꼭 원하는 두께와 내가 꼭 원하는 부드러움과 내가 꼭 원하는 양의 잉크가 흘러 나오지 않으면 그것이 신경을 긁어서 도무지 업무에 집중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그러니 세상에는 100킬로그램의 체중이 나가도 행복하고 당당하게 잘 사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친모가 말씀하시길 나는 성격이 너무 더러워서 키우는 것도 보통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런 기억을 떠올리면 조금 위로가 된다. 그러니까 날 때부터 이랬단 말이지.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nada 2007-07-31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어쩌나. 전 요즘 꼬챙이처럼 마르고 있는데. (본의 아닌 염장인가요? 도망가자..)
여름이라 아무도 밥을 하겠다고 나서질 않네요. 그래서 그냥 굶고 있어요.
저로선 너무 당연한 인과관계예요.ㅋ (자랑이라고..ㅉ)

Joule 2007-07-31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정말 웬만하면 이 이야기를 안하려고 했는데요. 사실 저 꿈을 꾸던 날 밤, 꽃양배추님도 제 꿈에 나왔답니다. 아주아주 못생긴 처자로요. 그래 꿈속에 제가 안이쁜 처자이신 꽃양배추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죠. "흥, 내 이럴 줄 알았어! 글 좀 쓰는 처자치고 이쁜 애가 없드라니까. 근데 저거 로쟈님도 아실까. 로쟈님이 아마 꽃양배추의 저리도 아리땁지 않은 모습을 보면......오호호호, 상상만 해도 신이 나는구만." 이랬다니까요. 얼마나 꽃양배추님에게 질투가 났으면. 쯧쯧. 쫌 가엾지 않나요.

chaire 2007-08-01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쯧쯧. 쥴 님은 아마 꽃양배추 처자께서 예에전에 유럽인가 어디로 여행을 가셨을 때 버스를 기다리면서인가 찍은 사진을 올렸던 것을 못 보셨던 모양입니다. ㅋㅋ. 그 사진을 목격한 제 입장에서 나름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애석하게도 꽃양배추 님은 꽤나 곱상한 얼굴과 적당 이상의 키에다 착한 몸매, 게다가 나쁘지 않게 날카로운 미소와 세련된 감각을 지닌 분이시더군요. ㅋㄷㅋㄷ.
음. 이쯤에서 하나 더 밝히자면, 물론 쥴 님은 천하에 따를 수 없는 미모를 가졌다는 거 웬만한 분들은 다 알고 있는데, 아무리 저 멋진 잉크의 비유를 가져다 쓴다 하더라도, 세속의 기준으로 그리 착하지 않은 형태와 마무리로 이뤄진 신체를 가진 몇몇 사람들에게는 쥴 님의 저 다이어트 욕망이 '에이 참. 어이없어' 하는 비판을 당겨올지도 모른다는. 어쨌거나 수영이사 환영하는 바이고...

Joule 2007-08-03 16:49   좋아요 0 | URL
이거 좀 뜬금없는 이야기인데 언젠가 카이레님이 해주셨던 말이 저는 인생에서 가장 감동적이지 않겠나 싶어요. 신이 저를 만들 때 너무 사치를 부렸다던가하는 말이었는데 아무래도 제가 원작자가 아니다보니 정확한 표현은 기억이 안나는군요. 그 말 들을 때 참 나 카이레님의 머릿속에는 도대체 어떤 사전이 들어 있길래 저렇게 근사하게 말할 수 있는건가 했다니까요. 그러니까 저에게는 모든 게 다른 사람들보다도 조금씩 더 많다는, 과잉하다는 거였잖아요. 근데 저에게 그 말 해주셨을 때 제가 고맙다고 했나요? 해야 되는데.

nada 2007-08-01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흐 너무나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꿈 이야기, 자~알 보았습니다.
ㅡ_ㅡ (째려보는 이모티콘인 거, 아시죠오?)
근데 카이레 님, 선글라스로 두루뭉실 가린 사진에서 어떻게 저런 풍성한 해석이 나왔답니까. 혹시 사진에서 영을 보시는 심령술사 아니시온지. ㅋㅋ 카이레 님 말씀처럼 저 부연조항은 너무나 품격 있는 잉크의 비유로 무장하고 있지만서도, 에.. 숨길 수 없는 내숭과 새침끼가 포착된다는 점을 밝혀 드리며...에헤라 도망가자~

Joule 2007-08-03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숭과 새침은 제가 가지지 못한 덕목들인뎁쇼. 사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가끔 거울 보다가 깜짝깜짝 놀라기는 해요. 너무 귀여워서요. 그러나 어떤 귀염둥이라도 지켜야 할 정도라는 게 있는 법. 요즘 수영복 입으면서 정신 차리기 잘 했다는 생각 해요. 세상에 판판했던 배가 양푼 뒤집어놓은 것처럼 볼록하더라니까요. 물론 배가 어느 정도 있어야 무게 중심도 잡을 수 있고 힘도 좀 쓸 수 있다는 건 알지만 볼록 튀어나온 양푼 같은 배는 사실 너무 넘사스러운 거 맞잖아요. 근데 저도 그 사진 보여 주시면 안돼요?
 
HOW TO READ 라캉 How To Read 시리즈
슬라보예 지젝 지음, 박정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섹스란 섹스라는 환상에 대해 마침표를 찍는 것이다. 실체라고 생각되어지는 그것을 가짐으로써 더는 '진짜 환상'이 가능하지 않게 되므로. 그래서 욕망하는 누군가를 가장 오래도록 애착할 수 있는 방법은 섹스의 시간을 가능한 한 뒤로 (물론 영원히 그 혹은 그녀와 섹스하지 않는다면 더 좋겠지만 이게 말처럼 쉽지는 않으니) 미루는 것이다. 혹은 역으로 누군가에 대한 욕망을 끊고 싶다면 그와 손도 잡기 전에 일단 잠자리부터 가질 일이다. 그렇다면 자고 나니 더 좋아지더라, 이런 경우는 뭘까. 기본적으로 환상을 제조해내는 데 제법 괜찮은 기술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내 환상보다 더 쓸만하다거나 더 근사한 섹스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어 잘 모르겠다. 그러니 쌩얼 소녀가 멋진 키스로써 개구리를 완소남으로 변신시키자 그 완소남이 다시 뜨거운 키스 세례를 퍼부어 쌩얼 소녀를 카스 맥주로 바꿔 마셔 버렸다는 지젝의 이야기가 나는 정말이지 마음에 들었다.


동일한 공간에서 동시에 여러 가지 모순된 환상 요소들을 껴안음으로써, 다시 말해서, 두 명의 주체는 각기 그, 그녀 자신의 주관적 환상 속에 포함되어 있다. 소녀는 본래 젊은 남자인 개구리의 환상을 갖고, 남자는 실제로는 맥주병인 소녀의 환상을 갖는다.



그러나 섹스는 이 허울을 벗겨낸다. 이 남자가 사실 개구리였다는 것에 대한 자각 혹은 통찰 혹은 씁쓸한 확인.


외관(appearance)은 위반을 숨기기 위해 거짓 장막을 칠 때 나타는 것이 아니라 숨겨야 하는 위반이 있는 것처럼 가장할 때 나타난다. 정확한 의미에서 라캉에게 환상이란 이런 허울(semblance)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실재를 은폐하고 있는 가면이 아니라, 가면 뒤에 뭔가 숨겨져 있다는 착각이다.



그러나 나를 무엇보다 즐겁게 한 대목은 현실과 꿈을 동등한 자격으로서 취급한 부분이었는데 지젝인지 라캉인지 프로이트에 의하면 현실에는 우리가 상처받지 않기 위한 많은 환상 장치가 있으므로 이 현실이야말로 구조화된 환상이고 '실재'와 대면할 수 있는 곳은 바로 꿈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말했어?)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이야기지만 나에게 개가 있었던 시절, 그 개는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잠으로 보내곤 했는데 어느날 어쩌면 저 개에게 나는 꿈 속에 자주 보이는 얼굴 동그란 '어떤' 여자애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는 현실인 것이 그 개에게는 꿈인 것이다. 그러니 내 개는 죽은 것이 아니고 다만 얼굴이 동그란 여자애가 나오는 꿈을 더 이상 꾸지 않게 된 것일 따름이다. 사실이건 아니건 참으로 근사하지 않은가. 꿈은 아픈 현실을 비켜서, 현실은 아픈 꿈을 비켜서 존재한다는 그것이.


내가 욕망의 대상에 얼마나 가깝게 접근하는지와는 무관하게 욕망의 원인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빠져나간다. 또한 일반상대성이론은 관찰자와 관련된 모든 운동의 상대성과 관찰 지점과는 무관하게 일정한 속도로 운동하는 빛의 절대속도 간의 이율배반을 휘어진 공간이라는 개념으로 해결한다. 비슷한 방식으로, 주체가 욕망의 대상으로부터 멀어지거나 가까워지는 것과 욕망의 대상 원인이 지닌 ‘일정한 속도’(와 일정한 거리) 사이의 프로이트식 해결 방법은 욕망의 휘어진 공간에 있다. 때때로 욕망을 실현하는 가장 빠른 길은 대상 목표물을 우회하는 것, 그것 주위를 빙빙 도는 것, 그것과의 만남을 연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젝이 머리말에서 라캉을 가리켜 '탐욕스러운 독자이자 해석자'라고 한 평가를 고스란히 지젝 자신에게 돌려주려고 한다. 프로이트를 해석해내는 라캉의 사유도 대단하지만 라캉을 통역해내는 지젝의 솜씨에는 더 이상 내두를 혀도 없을 지경이니까. 욕망을 설명하면서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을 들먹이는 거 아무나 못하는 거거든.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07-07-26 0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리뷰 참 좋은데요. 저는 라캉을 모르면서 이 책을 슬쩍 또 보관함에 껴 넣어야 겠어요. 저는 How to read 시리즈 중에서 '셰익스피어'만 읽었는데요, 제가 기대하는 책은 아니었어요.그러니까 저는 번역된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보고 감탄했지만, 한번도 원서를 읽은적이 없거든요. 그런데 제가 읽은 『How~셰익스피어』 는 원서를 놓고 읽어야 뭔지 알것 같더라구요.
그러니까 쥴님, 제가 라캉도 모르고, 원서도 읽지 않았다면 이 책을 읽어도 별 느낌이 없을까요?

Joule 2007-07-26 13:49   좋아요 0 | URL
이 책 읽을 때 김영사에서 하룻밤의 지식 여행 시리즈로 나온 라캉 입문서를 화장실에서 가끔 보곤 했는데 흐음, 동명이인의 라캉 같았어요. 지젝의 이 책이 라캉을 이해하기에는 동급최강인 듯 해요. 그리고 사실 라캉과 상관없이 지젝의 매력이 꽤 엄청나서 말이죠. 그의 어법에 조금만 익숙해지면 꽤 삼삼한 재미를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저는 로쟈님께 추천받아 이 책을 보게 되었답니다.

2007-07-26 1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Joule 2007-07-26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캉이 반페미니스트였군요. 프로이트>라캉>지젝으로 연결되는 해석 관계로 인한 부득이함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뭐 암튼, 근데 재미있게 읽으셨다면 님의 현란한 글 솜씨로 리뷰 좀 올려 주지 그러셨어요. 저는 지젝의 이 책 읽으면서 그런 생각은 해봤어요. 지젝이랑 한 번 자 봤으면 좋겠다.

2007-07-26 17: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Joule 2007-07-26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강의실에 얌전하게 앉아서 뭔가를 경청하고 배우는 착한 학생 스탈이 아니라서 그런지 강의실의 후끈한 열기는, 잘 모르겠어요. 그리고 말 잘 하는(거 왜 영업사원 스타일 있잖아요.) 남자는 개인적으로 섹스에는 좀 무성의한 인간이지 않겠는가 하는 느낌이 들더라구요. (뭐 말 잘 하는 남자들에게 제가 관심을 통 못 받아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서도.) 남자는 똑똑하고 글 잘 쓰고 착하고 순진하고 외모 반듯하고 귀염성 있으면 돼요. 아, 유머 감각!

Joule 2007-07-26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참, 내친 김에 제 비밀 하나 알려 드릴게요. 저는 개구리를 완소남으로 바꾸는 능력은 없는 대신, 완소남을 개구리로 바꾸는 능력을 가지고 있답니다.

2007-07-28 08: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누에 2008-01-31 0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 이야기 마음에 남네요.

Joule 2008-02-04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에 남는 개였거든요.
 
 전출처 : 조선인 > [퍼온글]쥬드님, 쥴님, 바람구두님, 김지님, 오즈마님 받아주세요


평안히 지내셨습니까?
밥맛 좋고 술맛 좋고 잠도 잘 자니 이만하면 평안한거죠. 다만 돈과 섹스가 좀 궁하다면 궁하달까. 하하

독서 좋아하시는 지요?
좋아하는 편입니다만 딱히.

그 이유를 물어 보아도 되겠지요?
돈이 가장 안 들잖아요. 놀이감으로나 선생으로나 훌륭하죠.

한 달에 책을 얼마나 읽나요?
나인투파이브 할 때는 4~7권, 백수인 요즘은 1~3권

주로 읽는 책은 어떤 것인가요?
철학, 인문학, 이따금 문학

당신은 책을 한 마디로 무엇이라고 정의하나요?

당신은 독서를 한 마디로 무엇이라고 정의하나요?
읽는 것 (따라서 찌라시 읽는 것도 독서에 해당된다고 생각함)

한국은 독서율이 상당히 낮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독서율 높아서 뭐하게요. 이 질문을 만든 당신은 책 많이 읽으면 정말 현명해지고 행복해진다고 생각하시나 보네요.

책을 하나만 추천 하시죠? 무엇이든 상관 없습니다.
'추천'이므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혹은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그 책을 추천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도스토예프스키는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라고 생각하거든요. 그의 소설은 읽고 나면 가슴이 화끈거려요. 가슴에 화인이 찍혀서.

만화책도 책이라고 여기시나요?
책이 아니면 뭔데요?

문학을 더 많이 읽나요? 비 문학을 더 많이 읽나요?
비문학 1권 읽는 데 걸리는 시간이 문학 10권 이상 읽는 시간과 맞먹으므로 비슷한 것 같네요.

판타지와 무협지는 "소비문학"이라는 장르로 분류됩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소비문학이 아닌 문학도 있나요?

당신은 한 번이라도 책의 작가가 되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없는데요.

만약 그런 적이 있다면 그때의 기분은 어떻던가요?
전 모르죠.

좋아하는 작가가 있다면 누구입니까?
작가이므로 소설가를 말씀하시는 거죠. 시인도 철학자도 아닌. 그렇다면 도스토예프스키, 플로베르

좋아하는 작가에게 한 말씀 하시죠?
쫌 더 쓰지 그랬어요.

이제 이 문답의 바톤을 넘기실 분들을 선택하세요. 5명 이상, 단 "아무나"는 안됩니다.

카이레님, 얼룩말님, 마태우스님.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얼룩말 2007-05-08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인님께서 쓰신 줄 알고 읽다가, 첫 질문에 대한 답에서 바로 쥴님인 줄 알았습니다(^^)

조선인 2007-05-08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참 꽉 막힌 사람인가봐요. 까라마조프의 형제를 읽을 땐 가계도를 만드느라 정신 없었다는... -.-;;

얼룩말 2007-05-08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서율 높아서 뭐하게요. 에 원츄^.^ 정말 너무 웃겨요.

Joule 2007-05-08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룩말님 대답도 만만찮게 재밌었어요. 조금 전에 엄마에게 김치 받고 혼자 얼굴 찡그리고 있다가 얼룩말님 거 보고서야 좀 웃었거든요. 술 때문에 알아보신거죠, 저인줄. 흠흠.

조선인님, 저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읽을 때 초반부에 도대체 카라모조프의 형제들은 누구야? 그랬다니까요. 등장인물들의 이름 속에 카라마조프라는 글자가 안 나와서요. 그러니 조선인님보다 더 꽉 막힌 사람이 여기 있네요. :)

마늘빵 2007-05-08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도스토예프스키는 아직도 못봤어요. 봐야지 봐야지 하면서 예전에 까라마조프- 빌려다놓고 읽다 뭐때문인지 힘겨워 나중으로 미뤘어요. -_-

chaire 2007-05-09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쥴 님, 데려가서 저도 적어보겠습니다. 덕분에, 간만에 업뎃을 하겠구만요. ㅎㅎ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