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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방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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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걸어 잠근 외딴방> 

 

  그녀처럼 더듬거리며 나, 쓰려고 한다. 쓰려고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려놓고 몇 번을, 다시 몇 번을 망설인다. 이 글은…… 그래 이 글은, 그녀의 아픔을 헤집고 헤집어 결국 내 아픔을 빤히 들여다보는 일이라는 것을…… 나는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이 리뷰가 어디까지 닿아서 나를, 그 시절 외톨이 갔던 나를, 캄캄한 외딴방에 밀어 넣을지 두렵다.

  열일곱의 나, 처음으로 접해보던 야간자율학습시간에 감독선생님의 눈을 피해 <외딴방>을 몰래 펴서 읽는다. 소설 속에서 그녀는 컨베이너 위에서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베껴 쓰고 있는 중이다. 나도 그녀를 따라해 본다. 그녀의 문장들을 훔쳐오고 싶어서 노트 뒷장에 그녀의 문장을 조심스럽게 옮긴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이들은 첫 야간자율학습시간이 지루할 법도 한데, 고등학생이 되었다는 압박감 때문인지 문제집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40개의 검은 머리통들이 일제히 책상에 눈을 고정하고 있다. 바보처럼 미련하게. 나 그 시절 책 속에 헤겔을 읽던 미서처럼, 그리고 그녀 안에 발견하지 못한 그녀처럼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난 너희들과 달라’ 
 

  오만함과 자만심이 교복스커트 밑으로 뚝뚝 떨어졌다. 그때는 그녀를 이해했던 것이 아니라 나의 자만심에 그녀를 덧입혔다. 그녀의 문장들을 빌려다 쓰면서 그녀의 문장들만 바라봤다. 아픔을 상처를 이야기하던 그녀의 열등감과 힘들게 고백하던 희재 언니의 이야기를 까맣게 잊었다. 그녀가 우물 안에 던져버린 쇠스랑같이, 쇠스랑이 발등을 찍던 아픔만 기억하고 상처를 만들어준 것들을 우물 안에 놓고 달아났다.

  그리고 6년이 지난 지금, 그녀가 우물 안에 던져버린 쇠스랑이 마음에 걸리 듯, 내가 던져버리려 했던 나에게 상처를 만들어준 날카로운 모든 것들이 마음에 걸린다. 그래서 다시 그녀를, 읽는다. 그 우물 안의 쇠스랑을 그녀 대신, 내가, 집어 올린다. 그녀의 쇠스랑은 물에 삭아 너덜너덜했다. 그녀가 힘들게 고백했던 희재 언니의 죽음, 그 외딴방의 기억들. 그 기억들은 그녀가 소설을 쓰기 전까지는 다 삭아버린 쇠스랑 같았을 거다. 자루는 삭았지만 여전히 발등을 찍었던 앞갈퀴는 날카로웠겠지. 그랬다. 나는 도망치려고만 했지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외상은 아물었지만 내상은 덧나고 덧나 짓물러 있었다.

  그녀가 좋아했던 희재 언니처럼 내가 좋아했던 J, 외톨이였던 J는 내 손을 놓지 않았었다. 대학생이 되면 넌 그림을 그리고 난 글을 쓰고, 작업실을 빙자한 자취방을 얻자고 했다. 서로의 잠버릇을, 음악과 책을. 그래 희재언니의 선반위에 놓여있던 자주색 하이힐처럼 기억하자고. 외딴방이 아니라 ‘아반도네’라는 멋진 이름까지 붙이자며 웃었다. 연습장에 우리의 외딴방을 상상해 그리던 J는 행복해 보였다.
다른 아이들의 속삭임, ‘J는 우리와 다른 아이야.’ ‘자살시도까지 했었데’ ‘쟤, 지금 쇼하는 거야.’
나는 그녀처럼 어쩔 수 없다고 말하면 용서받을 수 있을까? 그녀가 문을 걸어 잠근 그 외딴방처럼 나도 J를 외딴방에 밀어 넣고 문을 잠갔다. 쇠스랑으로 발을 찍히고 너무 아파서 뺄 수도 없는 아픔은 이런 것일까.

  그녀의 소설을 읽으면서 실제인지 픽션인지 구분 짓기도 힘든 글을 고해성사처럼 받아들이면서 나는 수도 없이 J를 생각했다. 내 리뷰도 수필인지 리뷰인지 구분 짓기 힘든 글을 누군가 고해성사처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어린 여공의 감당할 수 없던 사회적 상황도, 전화를 걸어오던 하계숙의 물음도, 새를 찍고 싶은 꿈을 가진 외사촌도, 가발을 쓰고 학원에서 강의를 하던 큰오빠도, 눈동자에서 최루탄 냄새가 나던 셋째 오빠도, 글을 읽지 못해 늘 같은 페이지를 펴두던 엄마도, 그리고 결국엔 아프게 토해냈던 희미한 웃음을 가진 희재 언니도,

  내가 감당하기 힘들었던 입시상황도, 전화를 걸어와 J를 험담하던 아이들의 이야기도, 대학에만 가면 모든 것이 좋아질 것 같다던 꿈을 가진 반 아이들도, 밥을 드시다 뱉어낸 어금니를 바라보던 아빠도, 늘 아침밥을 먹이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신 엄마의 뒷모습도, 그리고 결국엔 행복하게 아반도네를 그리던 J도.

  모두, 이젠 외딴방에서 J를 데려온다.
그리고 빈 외딴방에 삭아버린 쇠스랑을 조용히 벽에 걸어둔다. 그녀와 희재언니가 머리를 자주 부딪치던 자주색 하이힐이 놓여있던 선반 옆에.

  누구나 이 소설을 읽으면서 우물에 던져버렸던 자신의 아픈 기억을 끄집어 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깊은 우물 냄새가 나는 상처를 들여 다 봤을 것이다. 환하게 떠오르는 아픔이란 저 밑에서 고요히 고여 있는 우물물처럼 짙다. 그 짙음을 희석해주는 소설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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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 Mother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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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 절대 모성애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마더 포스터중 가장 영화를 함축하고 있는 포스터 (개인적으로) 김혜자의 광기어린 표정과 외면하는 아들의 어두운 실루엣> 

 

* 마더는 살인과 성에 대한 이야기다.

 

'마더'는 살인에 관한 이야기다. 더 나아가 살인과 '성'에 관한 이야기다. '마더'를 모성애에 관한 영화라고 생각했다면 큰 오해다. 마더는 절대 모성애에 관한 영화가 아닌 것이다.

  그저 모성애는 '마더'를 추동하는 에너지일 뿐이다. 그 모성애가 살인을 불러일으키고 영화는 모성애는 아들을 살인자로 만든다. 모성애로 모자는 끔찍한 기억이 한,두개 쯤 들어 났을 뿐이다. 

 




* 디테일에만 신경쓴 아쉬운 영화  

 영화의 전반적인 평을 간단히 말하자면 영화는 루즈했다. '괴물'의 그 긴박함은 어디갔으며 '살인의 추억'의 그 숨통을 죄여오는 듯한 긴장감은 어디갔는지 모르겠다. 지루했고 슬펐고 끝나고 나면 김혜자의 연기만이 머릿 속에 남을 뿐이다. 원빈의 바보연기는 그는 어느 순간 바보였다 원빈으로 돌아오길 몇차례. 절대 원빈이 바보로 보이지 않는다. 물론 영화는 김혜자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으나, 원빈의 얼마든지 바보연기를 보여줄 기회가 있었다. 원빈은 그저 바보연기를 했다. 절대로 바보로 보이지 않는다.
 


 

<이얼굴이 어떻게 바보로 보인단말인가?...>

 

 

 영화의 영상미는 훌륭했다. 처음 장면에서 김혜자가 미친척 춤을 추는 장면에 압도당했다.

 첫 장면에서 김혜자는 갈대가 우거진 누런 들판에서 정신을 놓은 것 같은 표정으로 춤을 춘다. 놀라운 것은 배경음이 깔리고 그에 맞게 춤을 추는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음악이 없는 채로 춤을 추고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문제는 그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지면서 배경음과 어울린다는 점이었다.영화를 보는 동안 몇몇 사람들은 웃었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그 춤사위가 무언가 무거웠다. 정신을 놓은 사람이 추는 춤사위가 아니라,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이 미쳐가지 못해서 추는 춤같았다. 김혜자가 주로 입고 있는 자줏빛옷과 꽃무늬옷들 하며, 약재상의 어둡고 약재 냄새가 날 것만 같은 분위기 그리고 입구쪽이 환한 그 곳에는 언제나 아들이 있는, 그런장면들이 인상깊게 남았다.


 



*  잤니? 잤어?

   영화에서는 잤다는 말이 굉장히 많이 나온다. 심지어 엄마랑 잔다는 도준의 말에 형사마저도 엄마랑 잤냐 며 놀라워한다. 영화 전반에 흐르는 성의 인식은 바보 '도준'을 통해 거미줄처럼 연결된다. 도준은 여자랑 자고 싶어하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엄마마저도 도준에게 여자랑 잤냐고 물어보며 정력에 좋은 음식을 권하기도 한다. 

  도준이 죽인 쌀떡소녀에게는 비극적인 일상으로 남자를 증오하는 대상으로 바꾸어가고 도준이 좋아하는 재수생은 도준의 친구 진태와 자며 끊임없이 도준에게 웃어준다. 
  쌀떡소녀의 죽음으로 표면 위로 올라온 마을의 '성'대한 굴레는 아정의 친구, 고등학생, 그리고 고물상 할아버지, 기도원 종팔이로 옮겨가며 칭칭 휘감는다. 영화는 성과 살인을 거밀줄처럼 희미하지만 천천히 옭아맨다. 그 거미줄 밖에는 '진태'만이 유유히 차를 몰며 사라진다.


 

* 도준은 정말 바보일까?

 

 일부 사람들은 도준이 다섯살때 자신에게 농약을 먹여 죽이려고 한 엄마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바보연기를 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건 너무 과잉해석이고 내가 생각하기엔 도준은 정신이 나갔다 들어왔다 한다.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바보'가 아닌 순간에도 바보인 척 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카스병(농약)을 기억한 것과 글씨를 읽을 수 있다며 도장을 찍는 부분이다. 자신이 '살인' 한 것을 알고 있으면서 끊임없이 사람들을 헷갈리게 한다. '농락'이며 의도적 교란이다.목격자인 할아버지를 기억하며 엄마를 찾는 부분은 자신의 살인을 부정하려 함이고, 엄마에게 침 놓는 은색 보관함을 건내주며 엄마에게 왜 그 곳에 갔는지 물어보지 않고 '잘챙겨야지'하는 장면은 도준은 엄마의 살인을 알고 자신과동질감을 느끼는 부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 엔딩에 관하여

 

 은색 침통을 받아들고, 그렇게 영화 내내 나쁜 기억을 잊게 해준다는 침 자리에 도준모는 침을 놓는다. 그리고 관광버스에서 춤을 추는 아주머니들 사이에 섞여 춤을 춘다. 뚜렷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저물어가는 붉은 노을 빛에 검은 실루엣들만이 끊임없이 춤을 추는지 허우적거리는지 모를정도로 화면은 흔들린다. 이 장면은 처음 김혜자가 미친 척 하며 춤을 추었던 장면과 오버랩 되는데, 처음에는 도준모가 고물상 아저씨의 집을 불태우고 나와서 정신을 놓고 들판에서 춤을 췄다고 생각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아니다. 도준모는 아들이 준 침통을 받는 순간 미쳤고 버스에서 춤을 춘 것이 아니라 들판에서 춤을 춘 것이다.


* 두번 씩 살인을 한 모자

 

 도준과 도준모는 두 번 씩 살인을 한다. 아정과 고물상 아저씨를 각각 죽이고, 결국에는 서로를 한 번씩 죽였다. 농약을 먹여서 죽이려했고, 은색 침통으로 살인의 기억을 되집어 주며 서로의 삶을 죽인다. 이것은 모성애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는 증거다. 서로의 삶을 끌어당기고 있으면서 사실은 서로 놓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두 모자. 마더는 절대 모성애에 관한 영화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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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은 2집 - '지은' 
  



 

이웃 블로거이자, 사랑스런 친구에게 선물받은 오지은 2집

그녀의 노래를 우연히 듣고 미친듯이 빠져들었던 그날 밤을 기억한다.

 

전곡을 다 찾아서 우선 가사를 봤다

(직업병 비스무리한, 가사 위주의 노래 선곡;)

그녀의 말대로 정말 일기장을 아무 페이지나

뜯어서 가사를 만든 느낌이다

솔직하고 진실되며 그러나 혼란스러운

누구나 생각해봤을 듯한

뻔한 사랑 노래가 아니라

절실한 사랑노래들이었다.



 

 

<분혹생 씨디에 깔끔하게 지은 이라는 하얀 글자>

심플!

 



 

<가사집>은 씨디에 붙여있는 형식 (굳이 분리하려면 분리할 수 있다!)

오히려 분실될리 없고 편하다

가사집 안에 있는 그녀의 사진들

정말 매력적이다.

 




 

아이의 목소리와 중저음 목소리를 넘나드는 그녀의 창법은

그녀의 노래들과 잘어울린다.

기교섞어서 잘부르는게 아니라

편하게 그저 내뱉는 듯한

그래서 더 진실되고 절실한 음악들이

모여 있는 '지은 2집'

 

 

 

제일 좋아하는' 익숙한 새벽 3시'

 

 

 거리를 걷고 또 친구를 만나고 많이 웃는 하루를 보내도
오늘도 나는 잠 못드는 이제 익숙한 새벽3시

샤워를 하고 좋아하는 향기의 로션을 듬뿍 바르고
요즘 제일 좋아하는 음악 들으면 나아질까

어제 본 귀여운 남자애 얘기를 잔뜩 들떠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이미 알고 있어. 난 걔를 좋아하지 않아

전화기를 전부 뒤져봐도 딱히 보고싶은 사람도 없지만
내가 생각해도 이상한, 지금 누구라도 보고싶어

거리를 걷고 또 친구를 만나고 많이 웃는 하루를 보내도
오늘도 나는 잠 못드는 이제 익숙한 새벽3시

혹시 니가 돌아올지도 모른단 가망없는 상상을 하지만
그런 일 일어난다고 해도 난 너를 좋아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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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바람이 머무는 곳 - Himalaya, where the wind dwell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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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바람이 머무는 곳

 
감독 : 전수일

 

관람일 : 2009년 6월 15일 월요일 14:50분

관람장소 : 야우리 시네마

 

 

<히말라야, 바람이 머무는 곳>

 

내가 걷는 발자국 소리가 크게 들리는 곳, 히말라야

 

  처음부터 큰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졸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영화를 굳이 영화관에서 보겠다고 고집한 것은  영화관이 아니면 절대 못 볼것 같기 때문입니다. 작은 영화관에는 20,30 대의 관람객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이드신 할아버지와 할머니, 중년의 부부와 아주머니들 15명 정도와 영화를 보면서 저희 또래의 관람객이 없다는 것에 씁슬했습니다. 영상의 언어의 길들여져서 흥미위주의 영화선택과 사색하는 것을 기피하는 것 같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영화의 취향은 다양하지만 저희 또래일 수록 많은 영화 편식을 접고 많은 영화를 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히말라야는...>는 스케치 같은 영화입니다. 온갖 화려한 색과 멎들어진 대사 하나 없이 그저 사실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크게크게 스케치된 장면들 속에서 커다란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큰 획으로 그어진 스케치 속에서 제가 찾은 의미는 유난히 크게 들리는 발소리 였습니다. 영화에서 의도적으로 발소리를 크게 들리게끔 한 것은 아니였습니다. 그저 사람의 말소리가 없는 곳에서 주인공 '최'의 걷는 소리는 그가 가는 길과 함께 점차 커져 내 안에서 울렸습니다.  바람소리 발자국 소리 등에 집중하다 보면 '최'와 함께 걷고 있는 기분입니다. 그래서 '최'가 히말라야을 오르는 동안 생각했습니다. 난 어디로 가고 있나? 또렷하게 나는 걷고 있는데 그 뚜벅뚜벅! 거리는 소리는 정처없이 헤메이는 기분이였습니다. 아마 '최'도 그랬겠죠.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거의 대화를 하지 않고, 대화를 하더라도 언어가 달라서 소통하기 불편해보였습니다. 하지만 대화를 뛰어넘는 눈빛과 그 상황에 집중하게 만다는 묘한 힘이 영화를 보게 만들었습니다. 영화는 어쩌면 그런 연출을 의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 '최'는 기러기 아빠로 해고를 당한 뒤 네팔청년 도르지의 유골을 고향에 전달해달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어렵게 찾은 도르지의 집에서  주인공 최는 도르지의 유골을 전해주지 못하고 방황하게 됩니다. 그의 아들과 함께 공놀이를 하고 피리소리를 들으며 그는 아마 죄책감과 그 주위를 떠돌면서 함께 히말라야의 바람소리를 듣습니다.

 

    도르지의 아내는 자꾸 도르지의 안부를 최에게 묻고, 최는 그때마다 말을 피할 뿐입니다. '최'는 결국 도르지의 유골을 끝내 말하지 못하고 그의 가족이 최의 짐에서 도르지의 유골을 발견하고 최에게 돌아갈 것을 권유합니다. 최는 다시 캐리어를 끌고 왔던 길을 되돌아 갑니다.  이번엔 발소가 아니라 캐리어 끄는 소리만이 들립니다. 다시 돌아가는 최는 어쩌면 더 큰 짐을 안고 돌아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히말라야, 바람이 머무는 곳>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한 번쯤 생각하게 되는 영화입니다. 한 번쯤은  복잡하고 긴박한 스토리와 화려한 영상에서 벗어나  히말라야의 풍경을 바라보며 사색해보는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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