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로포름 문학과지성 시인선 402
송승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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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승환 시인은 [클로로포름]을 통해 자신의 이전 시집인 [드라이아이스]를 습작으로 만들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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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 문예중앙시선 9
이준규 지음 / 문예중앙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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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규는 [흑배]과 [토마토가 익어가는 계절]을 거치며 생성된 어떤 특성들을 가지고 [삼척]에 들어가더니 곧 새로운 세계로 나가버렸다. 그 세계에는 이를테면 "나는 시인이다"라는 확신과 자부 같은 것들이 있다. 달리 말하면 이런 얘기가 된다. 그는 시를 쓴 것이 아니다. 자신이 쓴 것을 시로 만들버린 것이다. 이런 식의 문답으로도 표현할 수 있겠다. 시란 무엇인가? 시인이 쓴 것.

강성은 시인에게 보내는 "고래"라는 시는 다음과 같이 끝을 맺는다.

"(...)아름다움은 자네가 가지고, 나에겐 시를, 나에겐 오로지 시를, 나에겐 오로지 시를, 조금 더 멍청하고 조금 더 숭고한, 시를"(78쪽)

[삼척]에 가면 그 시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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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을뭐라하지 2011-10-24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짧은 글에 오타가 두 개나 있다니...
 




딕의 소설은 어디까지가 계산적이고 어디까지가 즉흥적인지 구별하기가 무척 어렵다. 거의 모든 부분에서, 순간순간 떠오르는 영감에 의존해서 쓴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강하긴 하다. 기본적인 인물 몇 명만 간단하게 설정한 뒤(직업이나 나이 정도) 그들의 관계나 인물들의 디테일한 부분은 써가면서 떠올린 것 같다.

무엇보다 조직되었다고 인식할 수 있는 소설의 구조 같은 게 거의 없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즉흥적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간 것 같다. 그럼에도 이야기의 아귀가 그럭저럭 잘 맞아떨어진다는 점은 쵸큼 신기하다.

소설의 제목 역시 그 소설의 이야기를 완전히 포섭하지 못한다. 굳이 유빅일 필요도 없고, 높은 성의 사내일 필요도 없으며 닥터 블러드머니일 필요도 없다. 이야기와 제목 사이에 큰 개연성을 못 느끼겠다. 하지만 딱히 그것보다 더 좋은 제목이 떠오르는 것도 아니다. 하나의 메인 스토리를 뽑아내기 어려운 만큼, 하나의 제목을 정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인 것 같다.

그의 소설은 대체로로 디스토피아적인 배경에서 시작된다. 혹은 차츰 그런 상황으로 변해간다. 하지만 그런 환경 속에 사는 등장인물들의 결말은 결국 그럭저럭 해피하다. 딕이 삶을 대하는 태도랄까, 마음가짐 같은 걸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여러 부분에서 도스토예프스키적인 냄새가 많이 난다.



어쨌건,
이번에도 또 발췌.



12쪽
길 건너편에서 은근슬쩍 움직이던 미친놈은 검은 머리에 검은 눈, 그리고 밝은색 피부를 크고 시커먼 코트로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 그가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주위를 힐끔거렸다. 스튜어트는 남자의 공허해 보이는 얼굴과 어딘가를 응시하는 눈, 그리고 입, 특히 입을 보았다. 남자는 입을 단단하게 오므리고 있었는데도 어딘가 모르게 축 늘어져 보였다. 마치 압박감과 긴장감이 이미 오래전에 이빨과 턱을 갈아서 없애버리기라도 한 듯이. 불행해 보이는 남자의 얼굴에는 여전히 긴장감이 남아 있었다 스튜어트는 고개를 돌렸다. / 원래 저런 건가? 그는 궁금했다. 미친다는 건 저런 건가? 저렇게 마음을 좀먹는 건가? 뭔가에 잡아먹힌 것 같잖아...

ㅡ 아니나 다를까, 이 소설에서도 미친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 나타난다.




16쪽
편집증이로군. 스톡스틸 박사가 생각했다. 몇 가지 검사는 해야겠지만 말이야. 로르샤흐 검사(각주: Rorschach test. 스위스 정신의학자 H. 로르샤흐가 발표한 인격진단 검사. 투영법의 대표적인 방법임)는 꼭 해야겠군... 꽤 진행된 잠행성 정신분열증일 수도 있어. 평생 달고 사는 만성 질병이 막바지까지 온 건지도 모르겠군.

ㅡ 위키에 의하면 로르샤흐 검사는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 로르샤흐가 1921년에 개발한 성격검사 방법으로 좌우 대칭의 잉크 얼룩이 있는 열 장의 카드로 이루어져 있다. 형태가 뚜렷하지 않은 카드의 그림을 보여주면서 무엇처럼 보이는지, 무슨 생각이 나는지 등을 자유롭게 말하여 피험자의 성격을 테스트한다. 로르샤흐 테스트 라고도 불린다." (출처: 이곳)


34쪽
아니, 사실 그렇게 행복하지는 않았다. 그냥 평범하게, 무난한 정도로 행복했다. 보니는 아직 일주일에 한 번 - 예전엔 세 번이었지만 - 심리 분석을 받아 여러 측면에서 자기 자신을, 그러니까 자신의 무의식적인 충동이나 현실 상황을 다양하고 체계적으로 왜곡하는 증상 따위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6년에 걸친 심리 분석은 그녀에게 큰 도움이 됐다. 하지만 완전히 나은 건 아니었다. 사실 완전히 낫는다는 건 없었다. 그런 ‘병’은 삶 그 자체였고, 언제나 커지기만 하거나(아니면 현실 적응력이 늘어나거나) 심적으로 정체되기 마련이었다.





34쪽
현재 보니는 [서구의 몰락]을 독일어 원전으로 읽고 있었다. 이제 50쪽을 넘겼는데 읽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 보니가 아는 사람 중에 이 책을 읽은 사람이 어디 또 있으랴?

ㅡ 범우사 판은 1,2,3권이 나왔지만 이미 1,3권은 품절 상태다. 책세상 판은 "1918년 초판 제1권 머리말과 1922년 개정판 머리말, 제1권 서론 그리고 슈펭글러만의 독창적 인식이 담긴 세계사 연표를 함께 번역해 묶어"냈다고 한다.


36-37쪽
보니는 화면 속에서 기술자들이 로켓을 최종 검검하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안정적으로 하는 걸 뭐라고 부르더라? 어쨌든 달결을 한 바구니에 담으면 안 되는 법이지...

ㅡ 이런 걸 뭐라고 하더라... (분산 투자? 응?)




81쪽
이제 예상대로 균형 감각의 왜곡이 청력에도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눈과 귀가 하나의 게슈탈트를 이루다니 아주 매혹적이었다. 처음에는 시력, 다음에는 균형, 그리고 이제는 소리가 일그러져 들렸다.

ㅡ 게슈탈트 이론은 "우리의 관심은 의미 없는 라인으로 보기보다는 뭔가 의미를 갖는 규칙이나 유사한 요소들을 그룹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가까이 근접해 있는 것들을 밀접하게 연관시켜 보려는 이러한 성향을 게슈탈트 이론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게슈탈트 심리학은 사물을 있는 그대의 형이나 형태로 지각하지 않고, 더욱 단순하고 더욱 규칙적이며 대칭적인 것으로 사물이 지각되는 방식에 대한 인간의 시지각에 대한 원리를 이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한다. (더 자세한 내용은 여기에서.)

ㅡ 게슈탈트란 "게슈탈트라는 말은 형태나 모양을 의미하는 독일어 명사에서 유래했습니다. 영상 인식의 게슈탈트 이론은 독일의 심리학자 막스베르트하이머(Max Wertheimer)가 1910년 여름 기차 여행을 하는 동안 영감을 얻어서 주장하게 되었는데, 그는 기차의 불투명한 벽과 창문 프레임이 부분적으로 자신의 시야를 가리고 있는데도 바깥 경치를 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눈이 단순하게 모든 영상 자극을 받아들이고 뇌는 이러한 감각을 일관된 이미지로 정리한 것으로 결론 내렸습니다. 게슈탈트 심리학자들은 베르트하이머에 의한 최초 연구를 더욱 심화 시켜서 영상 인식은 감각적 요소와 형태를 다양한 그룹으로 조직한 결과라고 결론지었"다고도 한다. (더 자세한 내용은 여기에서)




95쪽
어둠 속에서 하피는 계획을 짰다. 온갖 영감이 떠올랐다. (...) 계획이 어떻고 실행하면 정말 어떻게 될지 궁금해 참을 수가 없었다. 대부분은 생존과 관련이 있었다. 아무도 거대한 사회에 의존하지는 않을 터였다. 아인 랜드(각주: Ayn Rand(1905~1982). 러시아 태생의 미국 소설가이자 철학자)가 책에서 이야기했듯이 작은 마을과 개인 위주의 사회가 될 공산이 컸다.

ㅡ 러시아 태생이 미국 소설가가 나보코프 외에도 또 있다니, 혹시나 싶어 검색했더니 그의 책들이 꽤 많이 보였다. 하지만 대부분이 품절/절판 상태고 [마천루]와 [파운틴 헤드]만이 아직 판매되고 있어서 살펴보았더니 [마천루]와 [파운틴 헤드]는 번역된 제목만 다를 뿐 같은 책이었다...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작가의 이름도 아인 랜드에서 에인 랜드로 바뀐 건지 어떤 건지... 품절 상태인 [낭만주의 선언]도 한번 보고 싶다.
 

124쪽
“이 상황에서 섹스 생각이 나?” 스튜어트는 몰랐다. “빌어먹을. 폭탄이 떨어진 뒤로 한 번도 그런 충동을 느껴본 적이 없다. 무서워서 아예 사라진 것 같다고. 아예.”
“위험이 닥치면 간뇌가 성적 충동을 억제해서 그래.” 켄이 말했다. “하지만 곧 돌아올 거야.”

ㅡ 간뇌라... 그렇군...




131쪽
“위성 방송을 들어요?” 엘던이 흥분해 말했다. “우리는 라디오가 죽었어요. 수리공은 냉장고 부품을 찾으로 샌프란시스코 남쪽 어딘가로 갔고요. 앞으로 한 달은 안 돌아올 거예요. 요새는 뭘 읽어주고 있어요? 마지막으로 들은 게 정말 오래전인데, 그때 파스칼의 [시골사람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고 있었어요.”
“데인저필드는 지금 [인간의 굴레]를 읽고 있어요.”

ㅡ 데인저필드는 대참사가 있던 날 화성으로 떠났다가 "지구 궤도를 벗어나지 못한 채 지구 주위를 공전하며 지상의 사람들에게 음악을 들려주고 책도 읽어주는 DJ로 확약하"(372쪽)는 인물이다. 파스칼의 [시골사람에게 보내는 편지]는 [화성의 타임슬립]에서도 언급됐었는데 이번 책에서도 다시 나왔다. 아무래도 필립 K. 딕이 즐겨 읽었던 책이 아닌가 싶다.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는 발췌해둔 131쪽만 아니라 소설 곳곳에 걸쳐 여러 번 나온다. 딕은 어쩌면 [닥터 블러드머니]를 쓸 즈음하여, 혹은 쓰는 동안, [인간의 굴레]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두 소설 사이에 유사성을 찾을 수도 있을 것 같고.




143쪽
그냥 유문판幽門瓣 경련인 것 같군. 페노바르비탈(각주: 최면, 진정, 항경련 작용이 있는 바르비투르산 유도체)이 있으면 좋겠는데, 몇 년 전에 다 써버렸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심각한 자살 충동을 겪던 아내가 전부 써버렸던 것이다.

ㅡ [알기 쉬운 의학용어 풀이집]에 의하면 페노바르비탈이란 "수면제의 일종. 과잉 복용시 호흡을 억제시켜 생명에 지장을 가져온다. 장기간 복용시 내성이 증가하기도 함. 수면제외에 전신마취시에, 호흡마취 이전에 빠른 마취유도와 환자의 마취에 따른 고통을 감소하기 위한 정맥마취제로 이용한다. 또한, 이 약은 독성작용빈도가 적고, 값이 싸므로 장기간의 치료를 필요로 하는 간질치료제로도 널리 이용된다"고 한다.

ㅡ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페노바르비탈은 지금까지 본 딕의 책에서 자주 나온 것 같다. 작가가 실제로 즐겨(?) 먹었던 약품이 아닐까. [유빅]이나 [높은 성의 사내]에선 출처를 찾기 어렵지만 [화성의 타임슬립]에선 시작하자마자 등장한다. (“페노바르비탈을 먹고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실비아 볼렌은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9쪽)) 근데 이 약품에 대한 각주는 [닥터 블러드머니]에서 처음 본 것 같다.



154쪽
톨만 부인은 쌓아놓은 책 더미를 살펴보고 있었다. “칼 융의 [심리유형론]이 있네요. 심리학도 잘 아는 분야인가요? 좋네요. 먹을 수 있는 버섯 찾는 방법을 가르칠 수 있는 동시에 프로이트와 융에 대해 잘 아는 선생님이라니.”

ㅡ 책 말미에 있는 “작가 연보”에 의하면 실제로 딕은 버클리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 “독일어를 배우고 칼 구스타프 융의 저서를 읽기 시작했다”고 나온다. 소설에서 번역된 [심리유형론]이 어떤 책인지는 모르겠고, 우선 집에 있는 융 자서전부터 읽어봤으면 좋겠네.


201쪽
보니가 누군가와 바람을 피워 비정상적인 아이를 낳은 일을 가지고 스스로 비난하고 죄책감을 느낀다면 그 결과는 에디에게 돌아갈 거야. 보니는 에디를 미워하고 에디에게 모두 풀어버리겠지. 언제나 그런 식이야. 아이는 부모가 과거에 저지른 일에 대한 비난의 대상이지.


203쪽
“나한테도 그 소릴 해요.” 조지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보니는 인류가 일만 하다 사라지는 쇠똥구리라고 보거든요. 당연히 자기는 빼고요.”


246쪽
“고마워요.” 앤드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어쩌면 세상은 과거의 것들을 다시 되살려가기 시작하는 건지도 몰랐다. 예의와 관습, 몰입 등 세상을 진정으로 아름답게 만들어주던 형식을. 스튜어트 맥콘치가 하는 이런 말, 이런 게 진짜야. 앤드류는 생각했다. 단순한 흉내가 아니라 살아남은 자야. 이 사람은 어떻게 해서인지 그 모든 일을 벌어지는 동안에도 과거의 세계관과 열정을 보존해냈어. 여전히 계획을 짜고 궁리하고 허풍을 치고 있지. 아무것도 그를 막을 수 없을 거야.

ㅡ 처음엔 딕이 진짜와 가짜에 대한 혹은 진실과 거짓에 대한 인식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차음 그가 진짜와 가짜에 대한 구별, 또는 사실과 환상에 대한 구별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이건 가짜가 분명해. 속임수야. 진짜가 아니야”(278쪽) 같은 구절을 보면. 어쩌면 딕은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가짜인지 헷갈렸던 게 아닐까.


254쪽
에디가 말했다. “죽는다는 건 어떤 거야? 나도 언젠간 죽을 거니까 알고 싶어.”
“그건 좀 웃긴 거야. 구멍에 빠져서 위를 올려다보는 거야. 그리고 약간 맥이 빠진 듯한 건데, 음, 그러니까 텅 빈 것처럼 말이야. 뭔지 알겠어? 그랬다가 잠시 후에 다시 돌아오는 거야. 날아가버렸다가 날아가버린 곳으로 다시 돌아오는 거라고! 이거,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네가 지금 있는 곳으로 돌아온다는 거야. 그것도 빵빵하고 살아 있는 채로.”

ㅡ 단순한 상상일까. 어쩌면 유사하게나마 실제로 경험했을 일일지도...


266쪽
“미치겠네.” 반즈가 말했다. “이 사람은 당신이 무슨 얘길 하는지 몰라요. 정신이 이상하다고요.” 반즈는 스톡스틸 박사에게 말했다. “의사 선생님. 사람이 문화나 가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면 정신분열증 아닌가요? 이 사람이 그래요. 들어보시라니까요.”

ㅡ 그렇군...


267쪽
뒤에서 블루스겔드가 중얼거렸다. “똑같은 사람이 분명하다고요, 스톡스틸 선생. 왜냐하면 내가 길에서 그놈과 마주쳤을 때, 그때 난 사료 가게에서 사료를 사고 있었는데, 녀석이 이상한 표정으로 날 보더라고. 마치 놀리는 것처럼. 그런데 녀석이 알아챈 거요. 나를 놀리면 내가 다시 그런 일이 벌어지게 할 수 있다는 걸. 이번에는 녀석이 겁먹었지. 예전에 한 번 봤으니까 아는 거요. 그건 사실 아니오, 스톡스틸 선생? 지금도 녀석은 알거요. 내 말이 맞지요?”

ㅡ 강박 증상이 있는 사람의 모습을 잘 보여준 것 같다. 


268쪽
차라리 그날 다 같이 죽는 게 나았을지도 몰라. 보니는 생각했다. 그러면 병신이나 기형아나 방사능 검둥이나 돌연변이로 지능이 높아진 동물을 보지 않을 수 있었을 테니까. 전쟁을 시작만 해놓고 끝장을 안 봤어. 난 지쳤고 이제 쉬고 싶어.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 어디든 가서 눞고 싶어. 어둡고 아무도 말하지 않는 곳으로 가서 영원히. / 그러자 좀 더 현실적인 생각이 떠올랐다. 어쩌면 이 문제는 모두 내가 아직 알맞은 남자를 못 찾았기 때문에 생긴 건지도 몰라. 그러면 아직 안 늦었어. 난 아직 젊고 뚱뚱하지도 않잖아. 그리고 다들 내 치아 상태가 좋다고 말하지. 아직 할 수 있어. 계속 살펴봐야 해.

ㅡ 이 부분 역시, 등장인물의 ‘남자 집착증(?)’이 어떤 식으로 합리화되는지 잘 보여준다.

 
272쪽
블루스겔드는 팔짱을 끼고 눈을 감은 채 앉아서 힘을 모으는 일에 집중했다. 힘이여 자라라. 그가 중얼거렸다. 세계 어디서든 내 명령을 들어라. 과거에 그랬듯이 모두 힘을 합쳐 강력해져라. 그대들 모두에게 고한다. / 그러나 라디오 스피커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정신을 산만하게 해서 집중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잠깐. 블루스겔드는 생각했다. 난 방해받으면 안 돼. 계획이 어긋난다고. 누가 이렇게 떠드는 거지? 전부 이자의 말을 듣고 있어. 이자로부터 지시를 받는 건가?

ㅡ 하피의 초능력 때문에, 처음엔 블루스겔드 역시 초능력을 가졌고 그로 인해 재앙이 닥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구절에 와서야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브루스겔드는 자신이 예전에 행했던 실험의 실패로 인한 죄책감이 빚어낸 정신 질환, 즉 “전지전능하다는 강박적 환각”(275쪽)에 휩싸여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소설 뒤로 갈수록 이 사실 또한 아리송하게 된다. 특히 “데인저필드는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며 창문을 통해 기이한 폭발을 계속 지켜보았다. 더 먼 곳에서 희미하게 폭발 하나가 보였다.”(283쪽) 같은 구절. 그러니까 블루스겔드는 정말 초능력을 가진 사람일 수도 있고, 단순히 정신질환자일 수도 있는 것이다.




282쪽
데인저필드는 자기 자신을 위해 바흐의 B단조 미사곡을 틀었다. 웅장한 합창 소리가 위성 안을 채우며 모든 것을 잊게 해주었다. 몸속의 고통, 창밖으로 보이는 흐릿하고 오래된 폭발. 이 모두가 마음속에서 사라졌다.



ㅡ 책 말미의 “작가 연보”를 보면 10대 시절 딕은 “고전 음악과 오페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실제로 음악에 대한 얘기는 딕의 소설들에서 꾸준히 나왔던 것 같다. “그러는 동안 음악을 좀 들어볼까요. 정통 밴조(각주: 미국의 민속 음악이나 재즈에 쓰이는 현악기. 기타와 비슷하나 공명동이 작은북처럼 생겼으며 현은 4~5줄이다) 연주 어때요? 과거 미국의 정통 포크 뮤직... ‘페니의 농장에서’. 위대한 포크 음악가인 피트 시거가 부릅니다”(335쪽) 같은 대목도 나온다.


318쪽
스톡스틸 박사가 곧바로 마이크에 대호 말했다. “좋아요. 데인저필드 씨. 당신이 겪고 있다는 통증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저기, 위성에 종이봉투가 있습니까? 탄산가스요법을 시도해보려고요. 우리 함께요. 종이봉투를 들고 그 안에 숨을 내쉬세요. 그 안에다 숨을 내쉬고 들이쉬기를 계속하세요. 그러면 마지막엔 순수한 탄산가스를 들이마시게 될 겁니다. 이해하시겠죠? 사소해 보이지만 합당한 근거가 있는 요법이에요. 아시다시피 산수가 너무 많으면 간뇌의 특정 반응을 유발해 자율신경계에 나쁜 순환을 일으킵니다. 자율신경계가 너무 활성화되어서 나타나는 증상 중 하나가 연동항진인데요, 그것 때문에 통증이 오는 걸지도 모릅니다. 기본적으로 그건 근심 걱정 때문에 오는 증상입니다.”


319쪽
“폐소공포증은 공간 감각의 혼란이라는 점에서 직접적으로 간뇌와 연관된 공포증이에요. 실제 위험이나 상상의 위험 때문에 공황 상태에 빠지는 것과 관련이 있어요. 도망치고 싶은 욕구에 대한 억압인 겁니다.”


323쪽
“난 담배 안 피워요.” 하피가 담배를 훑어보며 말했다. 하피는 그 귀한 담배를 한 움큼 집어 들어 뭉갰다. 가루가 떨어졌다. “담배는 암을 유발하죠.”
“음.” 앤드류가 말했다. “양면성이란 게 있긴 한데. 그게...”

ㅡ 하지만 그 양면성이란 건 흡연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그런 양면성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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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성의 사내]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기대에 부흥할 만한 재미는 그닥 느끼지 못했다. 사실 기대가 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이미 절판된 시공사 판 [높은 성의 사나이] 가격이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적게는(?) 17500원, 22500원, 많게는 40000원이라는 가격이 책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번역본이 나왔는데도 현재까지 가격에는 변동이 없는 것 같다. 도대체 얼마나 독자들이 오매불망 찾고 있는, 보고 싶어 하는 소설이길래 원가 8500원짜리 책이 이렇게도 뻥튀기 되어서 판매되는 것인가.



 
우리의 볼라뇨 역시 [괄호 치고]에서 이 소설에 대해 짤막하지만 한 마디 보태 내 기대에 불을 지폈다. "딕은 [높은 성의 사내]에서, 그가 즐겨 사용하는 방식으로, 리얼리티라는 것이 얼마나 쉽게 변할 수 있는지 그리하여 역사란 것이 얼마나 쉽게 변할 수 있는지 우리에게 말해준다."(197쪽) 추천이라기보다는 간단히 언급하는 정도에 그쳤다고 생각했는데, 다음 페이지에선 이런 찬사를 보냈다. 딕은 "[높은 성의 사내]로 현대 미국 소설에 혁명을 일으켰다."(198쪽)





어쩌면 기대가 컸다기보다는, 필립 딕의 소설을 보며 내가 느끼고자 하는 것이 너무 획일화되어 있기 때문에 [높은 성의 사내]에서 큰 재미를 보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바라는 것이라곤, 머릿속이 취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 것. [유빅]에서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그렇게 취해버리기에 [높은 성의 사내]는 별다른 굴곡 없이 너무나도 멀쩡한(?) 소설이었다.





[주역]을 읽고 이 소설을 봤으면 어땠을까. 조금 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었을까.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 대부분은 [주역]에 많이 의존하면서 생활한다.

"주역은 점괘를 구하는 사람이 품은 더 근본적인 물음을 인식하고, 겉으로 드러난 질문에 답해주는 한편 알게 모르게 속에 숨은 의문에도 답을 줄 때가 많다"(40쪽), "3천 행이 넘는 주역을 통틀어 가장 끔찍한 내용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전체 점괘는 길하다 할 수 있었다. / 어떤 쪽을 따라야 할까?"(90쪽)와 같이 주역을 수식하는 구절이 자주 등장한다.

이런 의지를 보이기도 한다.

"불안한 점괘가 섞여서 나오긴 했지만(...) 끝까지 창조적으로 일하는 거야. 최대한 열심히, 역동적으로 살아야지. (...) 점괘가 내게 그렇게 말하고 있어. 운명은 결국 어떻게든 우리를 쓰러뜨릴 테지만, 그때까지도 내겐 할 일이 있어."(92쪽)

실제 책 말미에 실린 "역자 후기"를 보더라도 작가가 [주역]에 많이 의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필립 K. 딕은 1961년(...) 같은 해 [주역]을 처음으로 접한 뒤로 20여 년간 주역의 점괘를 참고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작가의 실제 생활은 이 책에서도 여러 가지 형태로 드러납니다. 심지어 이 책의 줄거리 일부는 [주역]으로 얻은 점괘를 참고하기도 했다고 합니다."(445쪽) 흥미로운 일이다. 

(근데 "작가 연보"에선 [주역]을 [역경]이라고 번역했는데... 어떤 게 맞는 거지?)


등장인물들은 [주역]과 더불어 [메뚜기는 무겁게 짓누른다]라는 소설도 읽는다. 물론 가공의 책이다. 이 책을 쓴 사람은 호손 아벤젠. [높은 성의 사내]에서 바로 그 사내이다. [메뚜기...]는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1945년 이후 실제로 진행된 현대사와 비슷한 세상을 가상으로 다"룬다. 말하자면 "가상 소설 속 가상 소설인 셈"이다. "히틀러는 전범으로 체포 당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미국이 앞장서서 세계를 이상향으로 이끌고 있는 세상"(446쪽)이다.

줄리아나라는 인물은 작가인 호손 아벤젠을 찾아가 이렇게 묻는다.

"그럼 왜 그 책을 쓰셨죠?"(432쪽)

그러자 아벤젠이 이렇게 답한다.

"모든 사람에겐 자신만의 비밀이 있습니다. (...) 당신은 당신 비밀이 있고 나도 나름대로의 비밀이 있죠. 내 책을 읽었다면 본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가 스스로 본 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처럼."(433쪽)

이들의 긴 대화는 결국 [주역]에 이르게 된다. 줄리아나가 이렇게 외친다.

"주역에게 묻습니다. 왜 [메뚜기는 무겁게 짓누른다]라는 책을 썼습니까? 우리는 뭘 배워야 합니까?"(439쪽)

줄리아나는 동전을 던지고, 그 결과를 종이에 적는다.

"상괘는 손巽이고 하괘는 태兌군."
"표를 보지 않고도 어떤 괘인지 아세요?"
"그렇소." 아벤젠이 말했다.
"중부中孚괘. '내면이 진실'이죠. 저도 책을 보지 않아도 알아요. 그리고 이게 무슨 의미인지도 알죠." 줄리아나가 말했다.
(...)
"그러면 내 책이 진실이라는 겁니까?"
"그래요." 줄리아나가 말했다. (439-440쪽)

어쩌면 이것이, 필립 K. 딕이 [높은 성의 사내]라는 작품을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인지도 모르겠다.



다음은 그냥... 발췌.


56쪽
줄리아나는 생각했다. 디젤이 특실 창문에서 몸을 던졌다고 했지? 바다를 건너는 배에서 몸을 던져 자살했다고 했던가? 어쩌면 나도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할지 몰라. 하지만 이곳에는 바다가 없지. 그래도 늘 방법은 있게 마련이야. 셰익스피어의 작품처럼.

ㅡ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선 세익스피어의 작품을 다시 읽어봐야 할 텐데...


71쪽
이상을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예술의 과업이죠.

ㅡ 그렇다면 과연 소설의 과업은...? (그런 게 있으려나...)


74-75쪽
하지만 '미쳤다'는 건 무슨 뜻일까? 바이네스는 생각했다. 법적 정의 말이다. 무슨 뜻이지? 느껴지기도 하고 보이기도 하지만, 그게 도대체 뭐지? (...)
그는 그들이 저지르는 짓, 그들의 존재 자체가 미친 것이다. 그들의 무의식. 그들이 다른 이들에 대해 무지한 것. 그들이 다른 이들에게 저지르는 짓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 그들이 야기했고 야기하는 파괴행위가 미친 짓이다. (...) 명예로운 인간이 아니라 명예 자체를 중시한다. 관념이 현실이 되고, 현실은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다. 선善은 존재하나 좋은 사람은 없다. 공간과 시간을 보는 관점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지금' '이곳'을 관통해 거대하고 깊은 어둠 속 불변의 존재들을 본다. (...) 미친놈들은 화강암, 먼지, 무생물이 되려는 열망에 부응한다. 그들은 '자연' 자체를 거들고 싶어 한다. (...) 그들은 역사의 희생자가 아니라 행위자가 되려 한다. 스스로 신의 권능을 가졌다고, 신과 같다고 믿는다. 바로 그것이 그들이 지닌 근본적인 광기다. (...) 자만도 아니고 긍지도 아니다. 자아가 극단적으로 부풀어 오른 상태다."(74-76쪽)

ㅡ 광기, 미침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계속된다.


118쪽
소설이니까 대부분 꾸며낸 이야기죠. 재미있게 쓰지 않으면 아무도 안 읽을 테니까 말이에요. 흥미 위주로 쓴 부분도 있어요.

ㅡ 딕은 소설에서 '재미'라는 요소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닥 재미가 없었...


236쪽
일본이 지배하는 미국, 이라는 배경인 만큼 일본 문화에 대한 언급도 나오는데 다음과 같은 하이쿠, 와카도 등장한다. "봄비가 떨어지는데, 아이들은 갖고 놀던 공이 비에 젖은 채 지붕 위에 놓여 있네"(80쪽), "뻐꾸기 울음을 듣고는 / 그쪽을 바라보았다 / 소리가 나는 쪽에서 / 나는 무엇을 보았나? / 동 트는 하늘 위에는 창백한 달뿐"




ㅡ 처음엔 이 하이쿠가 누구의 것인지, 그리고 출처가 어딘지 궁금했다. 그래서 각주를 따로 달아주지 않은 역자와 편집자에게 투덜거렸는데 나중에 봤더니 책 서두 "감사의 말" 속에 작가가 직접 적어두었다.

"요산 부손이 지은 7880쪽의 하이쿠는 해롤드 G. 핸더슨이 번역한 것으로 도날드 킨이 편집하고 엮은 [일본 문학 선집 제1권](그로브 프레스 사, 1955, 뉴욕)에 실렸다.
  235236쪽에 등장하는 와카는 치요의 작품으로 다이세츠 T. 스즈키가 지은 [禪 그리고 일본 문화](판테온 북스 볼링겐 시리즈64, 1959, 뉴욕)에서 직접 번역한 것이다."(4쪽)


"해봐. 직접 디자인하는 거야. 아니면 디자인 없이 즉흥적으로 만들어봐도 좋고. 멋대로 해보는 거야. 애들 놀이처럼."(88쪽)

ㅡ 딕은 자신의 소설을 이렇게 쓰고 싶었던 게 아닐까.




ㅡ 소설에선 여러 차례 "1860년에 생산한 콜트 44구경"이 등장하는데, (그리고 역시나 발사된다!) [총백과사전]에선 이 총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콜트 모델 1860년형 육군 리볼버는 세 번째 모델인 드래군을 계승하는 총으로 남북전쟁 기간 중 양측에서 가장 폭넓게 사용되었다. 제조사인 콜트사에 따르면 1860년부터 1873년까지 약 20만 500정이 생산되었고 그중 미국 정부가 최소한 12만 7156정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 총은 충격 격발식 무기로 탄창 앞쪽의 장전기를 사용해 장전하는데, 가장 큰 특징은 즉각 발화가 가능한 종이 탄피를 사용했기 때문에 사수가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무게는 무거운 편으로 철 또는 강철로 만들어졌고 방아쇠울과 전방 지지대는 황동으로 만들어졌다. 황동 날형 전방 가늠쇠와 공이치기 격발자에 있는 홈을 가늠쇠를 사용하여 조준한다. 장기간의 생산으로 많은 변형이 나왔지만 탄 구경은 0.44in로 구정되었는데 콜트 1861년형 네이비 모델(Navy Model 1861)의 0.36in 또는 0.44in 구경을 채택한 것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70쪽)


158쪽
그런 능력은 자신처럼 고위직이라면 갖춰야 할 기본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사람을 알아보는 것. 타인에 대한 직관력. 형식과 겉모습을 배제하고 마음을 꿰뚫어보는 능력.

ㅡ 꼭 고위직이 아니더라도 이런 능력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183쪽
칠던은 직접 종이를 벗겨 선물을 보여주었다. 백여 년 전 뉴잉글랜드의 고래잡이배 선원들이 상아 조각에 그림을 새긴 것으로, 스크림쇼라고 부르는 작고 화려한 예술품이었다. 늙은 선원들이 시간이 남을 때 만들곤 했다는 공예품을 알아보고 두 사람은 얼굴이 환해졌다. 오래전의 미국 문화가 이보다 더 집약된 물건도 없을 것이다.

ㅡ 그러니까 스크림쇼라 함은 이런 게 아닌가 싶다.



(출처: http://www.feelway.com/gv_today_1711237139.html)


191쪽
물론 많이 팔리는 책이 좋은 건 아니죠. 누구나 그건 압니다. 베스트 셀러는 대다수가 쓰레기니까요.

ㅡ 몇 십 페이지 뒤에는 앞의 말에 반박이라도 하듯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상상을 불러내는 소설의 힘은 위대한 거야. 아무리 싸구려 인기소설이라도 말이지."(218쪽)


192쪽
뉴올리언스 재즈는 진정한 진짜 미국 전통음악입니다. 이땅에서 생겨난 음악이죠. 다른 음악은 모두 유럽에서 건너왔습니다.

ㅡ 뉴올리언스 재즈라는 걸 듣고 싶은데 뭘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혹시 누가 소개 좀...)





"당신은 여기서 태어나고 자라며 영어를 사용했으니 혹시 제가 책 읽는 걸 좀 도와줄 수 있을까요? 조금 까다로운 책이라 어렵네요. 1930년대에 미국 작가가 쓴 소설입니다."
로버트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히 귀한 책인데 어쩌다 구하게 됐습니다. 나다니엘 웨스트 작품이죠. 제목은 [미스 론리하츠]입니다. 재밌게 읽었지만 지은이가 뜻하는 바를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
"유감입니다. 얇은 책인데요. 신문에 칼럼을 쓰는 남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을 위해 오랫동안 상담을 해주다 보니 그만 머리가 이상해져서 자신이 예수라는 환상에 빠지고 말죠. (...)" (198쪽)




222쪽
소설가들은 수없이 많은 속임수를 안다. 괴벨스 박사만 봐도 그렇다. 그도 시작은 같았다. 그도 소설을 썼다. 겉보기에 아무리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라 해도 누구나 내면에 숨은 욕망이 있다. 소설은 그 근본적인 욕망에 호소한다. 그래, 소설가들은 인간을 잘 알아. 인간이 얼마나 무가치한 존재이고 성적 본능에 지배당하며 겁을 집어먹은 채 흔들리고 욕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내던지는지 잘 알지. 소설가는 그저 북을 울리기만 하면 돼. 그럼 저절로 반응이 일어나지. 그러면 웃으면서 얻은 것만 챙기면 되는 거야. (222쪽)

ㅡ 작가가 생각하는 소설관 혹은 소설가관이라고 봐도 괜찮지 않을까.




267쪽
아코디언 밴드가 폴카인지 스코틀랜드 민속음악인지 모를 곡을 연주했다. 줄리아나는 두 가지 음악을 구별할 줄 몰랐다.
"천박하군."
음악이 끝나자 조가 말했다.
"내가 음악에 대해선 꽤 알지. 누가 위대한 지휘자인지 말해줄게. 당신은 기억 못하는 사람일 거야.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모르겠는데."
줄리아나는 여전히 책을 읽고 있었다.
"이탈리아 사람이야. 하지만 나치는 전쟁이 끝나자 그의 정치관을 이유로 들어 지휘를 못하게 했어. 지금은 죽었지. 뉴욕 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인 폰 카라얀은 마음에 안 들어. (...)"


276-277쪽
"나는 지식인이 아니야. 파시즘은 지식인 아니어도 괜찮아. 필요한 건 행동이야. 행동에서 이론이 생겨나지. (...) 사실 미국은 사생아처럼 생겨난 곁가지 신세지. 놈들은 정확히 말해 제국이 아니라 돈만 보고 사는 나라에 불과해. 영혼이 없으니 당연히 미래도 없어. 발전도 없지. (...) 무솔리니 총통이 쓴 글 읽어본 적 있어? 영감이 넘쳐. 멋진 사람이야. 문장도 훌륭해. 모든 사건의 근원이 되는 현상을 잘 설명하지. (...) 게르만인의 기질에는 철학이 지나치게 많아. 연극적 요소도 강하고. 툭하면 집회잖아. 진정한 파시스트는 입으로 떠드는 법이 없어. 행동하지.(...)"


296쪽
폴의 사무실은 작지만 현대적이고 수수하게 꾸며져 있었다. 벽에는 멋진 복제화 한 점이 걸려 있었다. 목계(*牧谿 송나라 말 원나라 초의 승려 화가)가 그린 호랑이 그림은 13세기의 걸작이었다.

ㅡ 목계가 그렸다는 호랑이 그림을 볼 수 있을까 싶어서 검색을 해보았으나 여의치 않았고 대신 다음 블로그를 발견했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i411&logNo=60129454323



ㅡ [갤러리 페이크]란 만화책에 소개된 목계의 그림을 소개하고 있는데 현재 이 만화책은 전부 품절이다. 소장해두면 좋을 것 같은데. 만화방에는 있으려나... 어쨌거나, 중국 화가가 그린 그림을 미국 소설가가 쓴 소설을 통해 알게 되어 일본 만화가가 그린 만화를 통해 보게 되다니...




393쪽
이제 내게 말해봐. 다고미는 장신구에게 말했다. 이제 너는 나를 옭아맸어. 눈이 부시도록 깨끗하고 하얀 빛, 티베트 [사자死者의 서書]에 나오는 사후세계에서나 보이는 빛의 목소리를 듣고 싶군. 하지만 죽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다.

397쪽
사후세계다. 다고미는 생각했다. 뜨거운 바람이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나를 데려간다. 이건 환상이야. 무슨 환상이지? 영혼이 이걸 견딜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 [사자의 서]를 보면 미리 알 수 있다. 죽고 나서도 다른 이들을 감지할 수 있지만 그들은 우리를 적대적으로 대한다. 모든 이는 각자 혼자다. 어느 쪽을 봐도 도움을 받을 수 없다. 끔찍한 여행. 고통과 재탄생으로 이어지는 세계는 혼란에 빠져 달아나려는 영혼을 언제든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망상들.




[높은 성의 사내]를 보니 무라카미 류의 [오 분 후의 세계]가 떠올랐다. (왜 이 소설은 재출간이 안 되는 걸까.) 알라딘엔 책소개가 따로 없고 대신 [장정일의 독서일기2]에 류의 소설이 소개됐다는 정보만 나와 있었다. [독서일기2]를 뒤져보니 중반 좀 지나서 나왔다. 내가 갖고 있는 책은 미학사 판이라 범우사 판과 페이지가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다. 몇 군데 발췌.

"[오분 후의 세계]는 이십 년 가까운 작가 생활 끝에 류가 자신의 대문자를 공표한 소설이다. 도쿄 시민인 오다기리는 아침 조깅 중에 타임 슬립(Time Slip)되어 현실과는 또 다른 세계로 월장한다. 그곳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무렵부터 전혀 다른 시간이 진행된 세계로 두 개의 원폭을 맞고 연합군에게 항복한 것이 아니라, 2,200m의 깊이에 파 놓은 지하 도시로 합참본부가 도피한 이후 오늘까지 열도를 점령한 미국, 영국, 소련, 중국과 게릴라전을 벌이고 있는 또 다른 일본. 대개의 역사 대체 소설은 현실을 원본으로 하여 가상의 세계를 탐험한 주인공이 원래의 현실로 복귀하는 데 반해 이 소설은 가상의 세계가 원본으로 제시되며 도리어 현실이 고려되어서는 안 될 허구로 치부된다."(168쪽)

"주인공은 귀환해서 현실세계의 소시민이 되기보다 일본 해방의 전사가 되기를 선택하는데 바로 그 부분에, 현재의 일본은 미국의 식민지나 다름없다고 늘 주장해 왔던 작가의 호소가 개입해 있다. 비록 무력점령은 아니지만 정신적으로는 식민지나 다름없다는 것이 무라카미 류의 일본의 미국 식민지론 요지이다."(169쪽)

"류처럼 대문자를 발견한 작가의 운명은 이제 무엇일까? 그는 국회의원이 되거나 기껏 역사소설을 빌어 자신의 신념을 간증하지 않을까? 진정 위대한 작가는 자신의 대문자를 파괴해야 한다. 큰 작가가 난해하고 중층적인 것은 그처럼 자신의 의도를 자꾸 배반하기 때문이다."(1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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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trash 2011-09-23 0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지만 류는 문장을 쓸 줄 알지. 그래서 (그 이후로) 시시한 것들만 써도 소설이 된다고 생각하고, 실제로도 되는 모양이지만... 근데 난 이 짧은 문장을 끝내는 것도 힘들기만...

닉네임을뭐라하지 2011-09-23 02:16   좋아요 0 | URL
이런 건 그냥 하이쿠로 끝내버리면... 내게 왜 이러는지 오늘 했던 말 저 하늘 위로...

치니 2011-09-23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립 K. 딕을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닉네임을뭐라하지 2011-09-23 14:08   좋아요 0 | URL
호오가 뚜렷하게 갈릴 것 같은 작가라는 생각이 드네요.
 





필립 K. 딕은 자신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일들, 이를테면 분열증적 현상이나 도취 상태 등을 작품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독자들에게 이식시켜주는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소설을 읽고 나면 재미있거나 재미없거나를 떠나서 머릿속이 좀 이상해지는 기분이 든다. 근데 그게 묘하게 기분이 좋다.


다음은 [화성의 타임슬립]을 읽으며 떠올랐던 단상, 혹은 작가나 책들.


61쪽
뉴 이스라엘 거류지 북쪽에 있는 와이즈만 비행장을 햐해 헬리콥터를 몰면서 슈타이너는 이스라엘인들에 대해 악담을 늘어놓았다는 사실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원래는 오토를 못 따라오게 하려고 적당히 꾸며댄 말이었고, 결코 본심이 아니었다. 그가 느끼는 진짜 감정과도 상반되는 말이었다. 그는 자신이 수치심 때문에 그랬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B-G 캠프에 결함이 있는 아들을 맡겨놓았다는 사실 자체가 수치스러웠던 것이다... 수치심이란 도대체 얼마나 강한 충동이길래, 나로 하여그 그런 얼토당토않는 말까지 늘어놓게 만드는 것일까.



ㅡ 수치심과 관련된 에밀 시오랑의 글을 최근에 우연히 보게 되었다. 에밀 시오랑은 이렇게 썼다. "작가의 '영감의 근원'은 바로 그 자신의 수치심이다. 자신 속에서 수치심을 보지 못하거니 회피한다면, 표절작가가 되거나 비판의 대상이 될 것이다." 출처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독설의 팡세]나 [절망의 끝에서]에 나오지 않나 싶은데 현재로선 두 책 다 절판 상태라 일부 도서관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하다.


93쪽
묘한 일이다. 누군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반사적으로 자책하고 책임을 느껴야 하다니. 혹시 내가 어떤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혹은 어떤 일을 했더라면... 막을 수 있지는 않았을까? 그러니 모두 내 잘못이다. 이런 식이다.

ㅡ 지난 금요일에 만난 친구와 자살과 관련된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다음날 본 이 책에서 이런 구절과 맞닥뜨려 기분이 이상했다.


117쪽
"양이란 참 희한한 동물이디." 휘트록이 말했다. "먹이가 될 만한 것, 이를테면 옥수수 줄기 따위를 울타리 너머로 던져주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니? 1마일 떨어진 곳에서도 금세 알아차리고 달려온단다." 휘트록은 껄껄 웃었다. "양은 자기와 직접 관련이 있는 일에 관해서는 엄청나게 똑똑해. 그런 걸 보면 진짜로 똑똑하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지 않니? 똑똑한 사람은 책을 많이 읽었다거나, 어려운 단어를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무엇이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지를 제대로 간파할 줄 아는 사람이야. 똑똑하면 살아가는 데 정말 큰 도움이 된단다."

ㅡ 이 대목에서 나는 곧바로 가카가 떠올랐다. 물론 이 구절에서는 똑똑한 사람이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똑똑한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118쪽
그러나 잭 자신은 티칭머신에 대해 저항감을 느끼고 있었다. 예의 '공립학교'의 이념 자체가 그의 기질과는 상반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학교'란 학생들에게 지식을 전달하거나 가르치는 장소가 아니라, 아이들을 일정한 틀, 그것도 지독하게 제한적인 틀에 넣어 새로 찍어내는 곳이다.


121쪽
'학교' 자체가 신경증을 앓고 있다는 결론을 잭이 내린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었다. '학교'가 원하는 것은 절대로 새로운 일이 일어나지 않으며, 예상을 벗어난 이변 따위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세계였다. 이것은 강박증의 세계이며, 건강함과는 거리가 멀다.

ㅡ 마치 지금 나의 세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강박증의 세계. 건강함과는 거리가 먼.


122쪽
신경증을 너무 나쁘게만 보지 말라는 실비아의 말은 타당했다. 신경증이란 의식적인 멈춤이기 때문이다. 어떤 시점에서 삶을 동결시켜 더 이상 사태가 악화되는 걸 막는 행위라고나 할까.


148쪽
"난 이 곡의 LP판을 갖고 있어." 어니는 계속하며 말했다. "엄청나게 오래된 희귀판이라서 틀어볼 엄두도 못 내지만 말이야."
"LP"판이 뭡니까? 헬리오가발루스가 물었다.
"설명해줘도 어차피 넌 모를 거야. 글렌 굴드가 연주한, 40년이나 된 거지. 어머니한테서 물려받은 가보야. 이런 양손 교차 소나타 연주에는 정말 일가견이 있는 사내였지."



ㅡ 스카를라티라는 이탈리아 작곡가의 건반 소나타 모음집인 것 같은데 들어본 적이 없으니 떠오르는 선율은 있을 리 없고... 대신 최근에 출간된, 글렌 굴드를 등장시키며 출간 당시 큰 화제를 모은 작품이라고 하는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몰락하는 자]가 생각났다.

책소개 일부를 발췌해보자면, "이 작품은 이야기보다는 1인칭 화자의 회상과 성찰이 중심을 이룬다. 챕터 구분도 단락 구분도 없이 의식의 흐름 기법을 차용하였고, 이것은 베른하르트의 특징인 장광설의 문체와 어우러지며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산문의 언덕 너머로 조금이라도 이야기가 끼어들 기미가 보이면 곧바로 쏘아 죽인다”고 말하는 베른하르트는 스스로를 ‘이야기 파괴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과장과 언어 파괴를 주요 기법으로 사용하는 그는 과장이야말로 글쓰기의 필수 요건이며 과장을 통한 현실 파괴와 언어 해체의 작업만이 상투적인 현실 고발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191쪽
죽음은 모든 사람을 동요하게 만들고, 평소에는 안 하던 일을 하게 만든다. 사람의 행위와 감정을 마치 수면 위로 파문이 퍼져나가듯이 밖으로 밖으로 파급시키며, 더 많은 사람들과 사물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328쪽
광기란 무엇일까? 잭은 생각했다. 그에게 관기란 어딘가에서 만프레드를 잃어버리고, 어떻게 언제 그랬는지를 기억 못하는 일이었다. 어젯밤 어니의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거의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도린이 해준 얘기를 바탕으로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하나씩 짜 맞춰본 뒤에야 어렴풋하게나마 전체상을 짐작할 수 있었다. 광기란 자기 삶의 정경이 어쨌는지 일일이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면서 재구성해야 하는 상황을 일컫는다.



ㅡ 그러니까 광기란, 술에 잔뜩 취해 자고 일어나면 아무것도 기억을 못하는 현상을 말하는 건가...는 그냥 농담이고, 진부하지만 광기, 하면 푸코의 [광기의 역사]가... 모리스 블라쇼에 의하면 "원칙적으로 중세에서 19세기까지 감금되는 광기에 관한 이야기이고, 더 심층적으로는 수용이라는 그런 구조의 연구를 통해 광기와 비이성 사이의 대화를 확립하려는 시도이며, 요컨대 완결되자마자 필연적으로 잊혀진 그 모호한 행위, 즉 '한계'의 역사이다. 하나의 문화는 어떤 것을 이 한계 쪽으로 배척하는데, 그것은 그 문화에 대해 외부가 된다."


338쪽
그는 헬리오가발루스가 읽고 있던 책을 집어 올렸다. "파스칼." 그는 소리내어 읽었다. "[시골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하느님 맙소사. 도대체 이런 책을 읽어준 이유가 뭐야? 아니, 이유가 있기는 해?"
"리듬 때문입니다." 헬리오가발루스는 참을성 있게 말했다. "위대한 산문의 운율은 소년의 방황하는 주의력을 매료시키고, 붙들어매는 효과가 있습니다."



ㅡ 필립 K. 딕의 작품에 등장하는 파스칼을 보며, 볼라뇨가 어떤 생각을 했을지, 어떤 기분이 들었을지 궁금하다. 필립 딕을 읽고 나서 파스칼을 읽었을 수도 있으려나... 어찌됐건 산문은 리듬이다! 생각난 김에 책장에서 [팡세]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혹시나 싶어 책 검색을 해봤는데 [시골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가 불과 며칠 전에 출간되었다! 물론 '위대한 산문의 운율'을 얼마나 느낄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시골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대한 다음 출판사 책소개를 보니 [팡세]를 보기 전에 이 책을 보는 게 좋겠다 싶다.

"이 작품에서 파스칼 특유의 문제의식과 새로운 관점 제기, 그만의 독특한 필치가 없었더라면, 교리논쟁을 다룬 이 작품이 오늘날까지 문학사에 기록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상대를 납득시키는 기술’과 ‘상대의 마음에 드는 기술’로 이루어지는 그의 설득술, ‘섬세의 정신’과 ‘기하학의 정신’이 조화를 이루는 그의 수사학론은《시골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진리’ 혹은 ‘진실’을 표현하는 강력한 힘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이유로《시골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는 파스칼과 동시대를 산 라퐁텐느, 라브뤼에르, 라신느로부터 찬사를 받았으며, 심지어 볼테르를 거쳐 베르나노스, 모리악, 줄리앙 그린에게까지 영향을 주게 된다.

이 작품이 갖는 의의는 무엇보다도《팡세》와의 관계에서 단적으로 가늠될 수 있겠다. 우선,《팡세》의 많은 부분이《시골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와 직ㆍ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데, 특히 ‘제주이트’, ‘진리와 폭력’, ‘기적’ 등에 관한 단편들은《시골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가 쓰여진 상황과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 시기적으로도 두 작품이 쓰여진 해는 1656년에서 1658년에 집중되어 있다. 이것은《팡세》가 파스칼이라는 천재적인 수학자이자 과학자의 관념적 산물이 아닌, 구체적인 현실참여와 치열한 자기인식에서 비롯된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려 준다. 또한《시골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대한 정확한 독서와 이해 없이는《팡세》의 올바른 이해 역시 불가능하다는 점을 시사해준다고 하겠다."


349-350쪽
"잠깐만. 담뱃불 좀 붙이고." 실비아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재떨이를 가져왔다. 편하게 앉을 수 있도록 의자 위치를 바꾼 다음, 사건의 전말을 지극히 세세하게, 아슬아슬한 부분에서는 약간의 필수 불가결한 창작을 덧붙여가면서 늘어놓았다.
놀랍게도 이렇게 얘기하는 일은 실제 경험만큼이나 즐거웠다. 아마 그 이상일지도 모르겠다.

ㅡ 어쩌면, 필립 K. 딕이 느끼는/생각하는 창작의 기쁨일지도...


409쪽
실비아는 강렬한 죄책감에 시달리며 생각했다. 내가 오늘 무턱대고 저질렀던 일을 당신이 알게 된다면 느꼈을 종류의 증오를 얘기하는 거로군. "잭ㅡ" 그녀는 어색하게 운을 뗐다. 정확히 뭐라고 해야 할지는 알 수 없지만,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 결혼은 이제 끝났다고 생각해?"
잭은 오랫동안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지?"
"그렇지 않다고 당신이 말하는 것을 듣고 싶어서."
"그렇지 않아." 그는 여전히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실비아는 발가벗겨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남편에게 마음을 읽힌 듯한 기분이었다. 그녀가 무슨 짓을 했는지를 어떤 식으로든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느낌.



ㅡ 잭과 실비아의 대화는 조금 더 이어진다. 이 대화 부분을 읽고 있으려니 레이먼드 카버가 아주 강렬히 생각났다. 대화의 뉘앙스나 그 순간의 이미지가, 카버의 소설 속 일부와 굉장히 흡사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카버의 소설에서 나타나던 모호한 결말과는 달리 발췌해둔 구절에선 비교적 선명하게 끝을 맺는다.




며칠 전 본 홍상수의 [북촌방향]에서도 그렇거니와 [화성의 타임슬립]에서도 선적이고 일회적인 시간 구성을 무너뜨리고 비슷한 장면이 반복되는 구성이 보여지는데(물론 그 방식이나 이유가 다르기는 하지만), 그런 점에서 사쿠라자카 히로시의 [All You Nees Is Kill]이 언뜻 떠올랐다. 이 책을 어떻게 알게 됐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고, 같은 시간이 무한히 반복된다는 구성이 독특하다는 생각에 구해둔 기억만 난다.




마지막 장식은 역시(?) 볼라뇨. 볼라뇨는 [괄호 치고]에 있는 "필립 K. 딕"이라는 짧은 글에서 [화성의 타임슬립]에 대해 다음과 같아 간략하게 언급했다.

"문학적인 측면에서, 가상 의식에 대해 능수능란하게 글을 쓴 사람은 딕이 처음이다. 속도에 대한 인식, 엔트로피에 대한 인식, 천지만물의 아우성에 대한 인식에 관한 글을 쓴 사람 역시 딕이 처음이다. 처음이 아니라면 최고라고 할 수 있다. [화성의 타임슬립]에서 이런 것들을 보여줬는데, 이 소설에 나오는 미래의 묵시적인 예수와도 같은 자폐증 소년은, 역설적인 시간과 공간이나 우리 모두가 향하는 죽음에 대해 느끼고 고통 받는 데 자기 자신을 바친다."(1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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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trash 2011-09-19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KD 걸작선 사고 싶다 사고 싶어

닉네임을뭐라하지 2011-09-19 21:10   좋아요 0 | URL
오프라인 서점에서 한 권씩 신간 사서 보니까 할인 받지 못했다는 아까움이 반드시 봐야겠다는 의무감으로 샤라락 변하는 것 같더... (먼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