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1916-1956 편지와 그림들 - 개정판 다빈치 art 12
이중섭 지음, 박재삼 옮김 / 다빈치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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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포크라테스가 말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말이 불현듯 떠오른다.히포크라테스가 환자의 목숨은 짧은데 의술이 발전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린다라는 말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통상 예술하면 서예,그림,춤,조각 등과 같은 것을 떠올리기 마련이다.그런데 한국에서는 예술분야가 제대로 자리를 잡고 밥벌이를 하고 작품과 명성을 날리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린다.요즘에야 대중문화,예술이 발달하여 보편화되었지만 근.현대사에 있어 그림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은 큰 대우를 받지 못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그 대표적인 예가 이중섭화백과 박수근화백이다.

 

 그중에 이중섭화백에 대한 삶의 이력을 살펴 보기로 한다.일제강점기 평안도 평원에서 태어나 한국전쟁이 발발하기전까지 그림을 죽 그려 왔고 평원에서 만난 일본여성 마사코와 혼인을 하게 되는데 한국전쟁으로 인해 가족이 모두 부산으로 피난을 오면서 그림 그리는 일보다는 생계를 위해 일용직도 마다하지 않는 등 힘든 시절을 보내야 했다.한국전쟁이 끝나고 자식(태원,태성)들의 장래를 위해 아내와 자식들은 일본 도쿄로 넘어가고 이중섭화백은 홀로 남아 전전긍긍하는 생활을 하게 된다.충무 등지에서 기거하다 제주도 서귀포에 자리를 잡는가 싶더니 혼자가 된 그에게 따뜻한 인생의 동반자마저 멀리 두고 있기에 고독감과 상실감은 컸던 것으로 보여진다.그에게는 절친과 같은 구상시인이 곁에 있어 마음의 위로가 되었겠지만 그는 멀리 떠나보낸 아내(남덕)과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으로 가득차 있다.

 

 가난과 고독을 술과 담배로 나날을 보내면서 몸과 마음은 병색이 짙어만 가고 식음을 전폐하는 지경에 이르면서 향년 40세의 일기로 운명을 달리했다.그의 유골은 일부는 아내에게 보내고 일부는 한국에 묻혔다고 한다.생전 그렇게 사랑하고 그리워하며 아버지답게 살아가려고 노력했던 이중섭화백은 결국 그 꿈을 실현하지 못한 채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그는 한국전쟁 이후 두 차례(1954년 미협전과 1955년 잡지 신미술)에 출품 및 소개를 했다.그가 선보인 작품은 주로 동물이 위주였는데 소,닭,투우,황소,흰소,새들,투계가 세상에 빛을 발휘하고 그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당시 출품,소개된 작품이 현재로서는 한편도 볼 수가 없다는 안타까운 소식이다.

 

 이중섭화백은 아내 남덕 및 자식들에게 수많은 편지를 보내고 아내는 남편(아고리) 이중섭에게 답장을 보낸다.이중섭화백은 아내 남덕을 최고의 천사,최고의 사랑으로 표현하고 남덕(마사코)는 남편에게 함께하지 못하는 점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이중섭화백은 아내 및 자식들을 향한 그리움과 희망,사랑하는 마음을 실어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나만의 소중하고 소중하고 또 소중한,한없이 착한 오직 유일한 나의 빛,나의 별,나의 태양,나의 애정의 모든 주인인 나만의 천사,가장 사랑하는 현처 남덕 군,건강하게 기운을 내주오.아스파라거스 군이 춥지 않도록 두텁고 따뜻한 옷을 입혀주오.그렇지 않으면 다음에 아고리(이중섭 자신)가 화를 낼 거요.화를 내면 무서워요. - 본문 -

 

 진실로 사랑했기에 거리로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아내에 대한 최고,최상의 표현을 아낌없이 표출했으며 하루라도 빨리 만나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그에게 그림은 생의 전부이었을 것이다.다만 그의 성격이 유들유들할 만큼 사교적이지 못하고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고지식한 면이 다분했던지 홀로 생각하고 삼키면서 그림 그리기를 쉬지 않고 이어나갔던 것으로 보여진다.부부의 연이 오래도록 이어졌더라면 더할 나위 없었을텐데 안타깝게도 이중섭화백의 운명은 길지 못했던 것 같다.구상화백이 전하는 이중섭화백의 일화는 그의 성정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자신의 무능과 무력,불성실로 자신의 불행을 타인에게 돌리고 세상이나 사회를 저주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세상을 속였어! 그림을 그린답시고 공밥을 얻어먹고 놀고 다니며 훗날 무엇이 될 것처럼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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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유사 - 천년고찰 통도사에 얽힌 동서양 신화 이야기
조용헌 지음, 김세현 그림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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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찰(寺刹) 내지 절이라는 말을 들으면 내면 속에 자리잡은 청정하고 평안한 감각으로 가득차게 된다.태어나서 종교기관 중에서 가장 먼저 절을 찾아 불공을 드리던 할머니,어머니의 정성스러운 공양과 부처님의 자애로운 모습,그리고 산자락 깊은 곳에 고즈넉하게 자리잡은 절은 자연과 함께 살아 있기에 그러한 마음의 평안과 청정,정숙,경건함을 느끼게 한다.개인적으론 근자에는 절을 자주 찾지 못해 아쉽기만 하다.사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산중턱에 절이 있기에 마음을 다잡고 찾아 가는 습관을 들이면 좋을텐데 게으름과 무관심이 절을 멀리하게 되었다고 자조하고 되뇌인다.

 

 한국 역사에 길이 남을 사찰들이 꽤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려시대에는 국교가 불교일 만큼 사찰의 건립이 성행했고 팔관회 등의 연례행사도 있었기에 국리민복의 역할도 했으리라 생각한다.물론 절의 역사가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었지만 사찰의 숫자나 사찰에 대한 기록적인 면에서 보았을 때 고려시대의 사찰은 산자수명(山紫水明)의 요새에 자리를 틀고 불교의 가르침과 수행,탁발 등이 상징적으로 다가온다.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에는 국난을 극복하고 대중들에겐 자비를 베풀기도 하는 사찰은 인도에서 시작된 소승불교가 중국,한국,일본으로 넘어오면서 대승불교로 자리를 잡고 있다.

 

 서기 640년에 건립되었다는 통도사는 유구한 역사 만큼 신비스러운 신화와 수난,영욕이 점철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통도사는 삼국유사에 실린 실제에 가까운 기록물보다는 전해져 오는 신화에 가까운 에피소드들이 가득하다.통도사는 신조(神鳥)숭배사상이 강해서인지 독수리를 신조숭배 신화로 여기고 있다.영축산(榮鷲山)자락에 자리잡고 있으며 독수리는 인간이 피안의 세계로 넘어 가게 되면 육신은 독수리의 밥이 되고 혼령은 하늘로 날아 다시 윤회를 한다는 사상이다.그리고 자장율사가 있는 곳엔 독수리 지명이 따라붙는데 전국에만해도 5군데나 된다.독수리를 신령스러운 신조로 삼았다니 놀랄만도 하다.나라마다 독수리에 얽힌 전설과 신화가 제각각이지만 그 옛날에는 백성들이 죽으면 장작으로 화장을 해야 하는데 형편이 되지 않으니 사체를 길바닥에 놓으면 독수리가 날아와 육신을 쪼아 먹고 혼령은 하늘로 날아간다는 것이다.

 

 국교였던 불교는 고려시대 몽고군의 침략에 의해 소실을 입는 수난을 당하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불교는 찬밥신세가 되면서 갖은 탄압과 모욕을 당해야만 했다.그래서 스님이라는 직업도 조선시대에선 팔천(八賤)에 속할 만큼 천한 직업에 속했던 것이다.다행히 통도사 만큼은 불교에 대한 민중들의 신심과,천년이 넘는 역사에서 오는 무게감,그리고 용이 누워 있는 '영험의 터'라는 풍수신화가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훼손의 위기에서 벗어났다.그 가운데 김만이라는 인물은 통도사의 기세를 와우혈(臥牛穴)로 정착시켜 놓았다고 한다.특히 지령(地靈)에 대한 민간인들의 두터운 풍수사상도 한몫 했으리라 생각한다.

 

 대표적인 불교스님은 자장율사와 진표율사가 있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율사라는 점,신이력(神異力)의 소유자,계(戒)를 주는 방식을 통해 중생들을 교화했다는 점이고,통도사와 금산사에 각각 계단(戒壇(이 남아 있다는 점을 꼽을 수가 있다.지향점에 관해서는 자장은 문수화엄이었고 진표는 지장미륵이었던 점인데 문수는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이고,화엄은 대승불교 사상의 종합 결집판이라는 점이다.화엄의 핵심은 일체유심조 즉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다'와 '일즉다 다즉일'인데 '부분이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부분이다'라는 사상체계이다.인상적인 부분은 도를 닦아 경지에 오른 고승은 여섯 가지 특별한 능력을 지니게 된다는 것인데 천안통,천이통,신족통,숙명통,타심통,누진통이 그것이다.천안통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도 볼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고 하는데 요즘말로 하면 천리안에 가깝지 않을까 한다.

 

 그외 팔천계급이었던 조선시대의 스님인 혜경스님과 영의정 권돈인과의 우정으로 통도사는 기사회생되었다는 점이다.구하라는 구한말 스님은 부패한 조선사회를 개혁해야겠다는 의지를 불사르면서 통도사를 개혁했다고 한다.잉어가 용이 되는 시기로서 후천개벽이라고도 하는데 이를 두고 어변성룡(魚變成龍)이라고 한다.구하스님은 일제강점기시 한용운선생을 물심양면으로 도와 주기도 했다.나아가 한국 간화선의 대표적인 선(禪)지식 가운데 한 분인 경봉선사 등은 통도사에 씨를 뿌리고 꽃을 피웠다면 월하스님에 의해 열매를 맺었다고 한다.일제강점기 말 통도사의 소나무들을 모두 베어가려고 하던 참에 해방이 되면서 통도사입구의 소나무 숲 경내는 온전히 살아 남았다고도 한다.

 

 조용헌저자에 의해 통도사의 역사,지세 및 한국불교의 역사 및 신화,시대와 스님들이 불교사상과 이념을 한결같이 지켜 내려온 점을 어느 종교를 떠나 한국의 보물이다.불교에 관련한 신화는 아시아국가를 비롯하여 근자 불교를 연구하는 서양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보편화되고 대중적으로 변화해 가고 있다.오랜 역사와 신화,에피소드가 가득찬 통도사를 통해 한국 불교사를 어느 정도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삶의 지혜마저 얻을 수가 있어 소중하고 유익한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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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영 - 한국 현대조각의 선구자 시공아트 59
오광수 지음 / 시공아트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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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시대를 살다간 명인들의 삶을 조명하면서 내 삶에 대입해 보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지금까지는 주로 정치,경제,사회에 관련한 인물들의 평전 내지 일대기를 읽었지만 현대조각의 선구자였던 김종영 삶에 대해서는 이번이 처음이라 그 관심과 기대가 컸다.나무와 돌을 깎고 세심하게 다듬어 완성한 조각품은 가히 걸작이라 아니할 수가 없다.한국조각의 역사가 길고 깊지 않은 탓인지 김종영 조각가로서는 사명감과 자부심으로 한국 조각의 역사에 심혈을 기울이고 획을 그었던 것으로 느껴진다.

 

 김종영조각가는 로댕의 영향을 받고 일본에서 조각수업을 마치게 되고 그의 본격적인 조각품은 1949년 <여인좌상>으로부터 시작된다.한국 근대조각가로서 김복진의 조각의 삶은 그 뿌리와 원형으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으며 현대적 조각의 이정표를 열었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김종영을 비롯한 윤효중,김경승 등이 대학과 조소과를 열게 되는데 서울대의 김종영,홍익대의 윤효중으로 조각의 학풍을 열어간다.서울대가 관학의 풍조라면 홍익대는 사학으로서 자유분방함을 보여 준다.김종영이 조용하고 학구적인 선비의 이미지라면,윤효중은 활달하면서 사교적인 모던풍이라고 할 수가 있다.

 

 조각은 종교의 영향을 받으면서 형성된 예술분야라고 생각하는데,한국은 배불숭유정책으로 인해 조선시대에는 조각이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일제강점기 유학파였던 이들에 의해 서양의 조각과 일본의 조각이 융합되어 한국에 이식되어 온 것은 아닌가 싶다.그러면서도 김종영과 같은 조각가는 왜색을 탈피하여 그만의 독특한 조각법을 창조해 나가고 있다.1950년대 초에는 카톨릭에 귀의하여 카톨릭 성향의 조각 전시를 하기도 한다.그는 서울대교수로서 1948년부터 1980년 정년 때까지 조각가로서의 한 시대를 풍미했다.김종영조각가는 조용한 선비의 풍모의 소유자로서 학교와 집을 시계추와 같이 다닌 것으로 유명하다고 할 정도였기에 비사교적이고 혼자 사색하고 창작하는 모티브를 얻어 갔던 것으로 보여진다.

 

 '가정을 경영하면서도 가정으로부터의 자유,사회를 살아가면서도 사회로부터의 자유,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직장으로부터의 자유'를 그의 삶의 모티브로 삼고 있다.이러한 자기로부터의 해방에서 참다운 예술가의 삶을 터득하고 궁구했을 것으로 보여진다.그리고 그가 흠모했던 인물은 완당 김정희이다.속세와 비타협적인 성격은 그의 작품 속에 오롯이 담겨져 있다.비타협적인 예술이념은 세잔의 성격과 흡사하다고 한다.

 

 그가 초기 여인상을 비롯한 인체조각에 예술혼을 불살랐다면 후기로 넘어갈 수록 자연친화적인 작품들을 잉태하고 있다.그는 나무,돌,브론즈,철,석고,시멘트 등을 소재로 삼고 있는데,양적으로 보아서는 목조와 석조가 단연 중심을 이루고 있다.그의 작품의 세계는 인물,식물,산으로 이어지고 있다.즉 그는 자연현상에서 구조의 원리와 공간의 미를 경험하고 조형의 기술적 방법을 탐구했던 것으로 보여진다.예술가로서 그는 무엇을 그리느냐보다는 어떻게 그리느냐를 중요시했다.기술의 전통보다는 자연현상을 관찰하면서 인간과 자연이 합치가 되는 것을 늘 상상하고 작품화하지 않았을까 한다.작품을 구상하고 창작에 몰입할 때그는 늘 작가와 매재(媒材)가 호흡의 일치를 이루어야 제대로 된 제작의 공정이 나온다고 하는 대목은 무척 공감이 가고도 남는다.나아가 그가 남긴 추상화의 과정을 보면 상형성에서 출발하여 요약의 단계를 거치고 다시 상형성을 극복해 가는 것을 삼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인체,식물,자연,산으로 이어지는 그의 조각작품 세계는 인간이 자연에서와서 자연으로 가는 귀결성을 함축하고 있다고 본다.그는 내면을 채우기 위해 홀로 있는 연습을 부단히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그의 내면의 세계는 '무위자연'의 도에 순응하여 작위함도,드러내는 일도 없이 저절로 감화하게 하기 때문이다라는 <노자 도덕경>의 경지를 염원하고 자연의 법칙에 충실하려던 생활 신념을 강하게 어필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조각외에도 서예,드로잉,유화 등 다수의 작품이 실려져 있다.그의 삶은 조각의 길이었지만 때론 이를 벗어나 불각의 경지를 추구했던 점도 그의 내면 세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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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살리는 집
노은주.임형남 지음 / 예담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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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살고 있는 내 집에 만족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월세,전세,자가 등 주거의 형태도 제각각이다.살아가는데 편리함과 자기만의 공간을 갖을 수 있기에 단독주택보다는 맨션,아파트 등 현대적 건축을 선호하는 것이 주거공간의 대세이다.좁은 면적에 많은 사람들을 수용하고 현대적 인테리어로 치장하여 주부들의 일손을 덜어 주는 것도 현대식 빌라,아파트가 주는 장점이기도 하다.다만 지금 살고 있는 집들이 대부분 현대식 구조에 맞춰 지어진 것들이 대부분이다 보니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해 주는 이웃간의 정,소통과 대화 등이 단절되어 있는 것은 물질적 풍요 속에 정신적 빈곤함이 깃들여 있는 것은 아닐까 한다.

 

 이렇게 현대적 빌라,아파트 등은 설계사,건축업자,시공사,감리를 거쳐 시공되지만 10여 년만 흘르면 집안 곳곳이 균열이 생기면서 뜯고 다시 지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빌라,아파트가 살기에는 편하지만 내구성이 오래가지를 못하는 것이 단점이다.또한 집이라는 거주공간이 의식주를 해결함은 물론 삶의 질을 높이는 공간이기도 하다.그런데 집이라는 공간은 개성과 집안의 내력과 희망을 불어넣는 곳은 아닐까 되새겨 본다.비록 현대적 가옥이 갖고 있는 편리성에는 못미치지만 한국 전통주택을 들여다 보면 시간의 풍상을 견뎌내고 오랜 세월 가문을 빛내여 주고 있는 곳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부부가 건축과 동문인 공저자는 땅과 사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둘 사이를 중재해 건축으로 빚어내는 것이 건축가의 역할이라고 강조하고 있다.집을 짓기 전에 터를 잡고 그 터에 앉아 산과 들,물을 바라보면서 과연 오래 시간 그 터의 임자로서 한세월을 영위하면서 편안하고 인간다우며 자연과 어우러진 삶을 살아가는 것이 거주공간에 대한 단상일 것이다.몇 년 살다 프리미엄이 오른다든지 학군,직장에 따라 철새와 같이 이리 저리 주거공간을 옮겨 가는 것은 삶에 정처가 없다는 의미이고 거주공간에 대한 가치마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개인의 경제적 능력,취향,목적에 따라 거주공간의 크기나 장소는 달라지게 마련이다.대부분 자식들이 사회인이 되기 전까지는 부부는 자식들과 함께 공생공존하면서 살아가고 자식들이 분가를 하게 되면 부부는 노후의 주거공간을 잘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그렇게 하려면 젊은 시절 부지런하고 열심히 살아가면서 돈을 모아 말년에는 자신이 원하고 생을 마감할 때까지 나와 우리를 살리는 윤택하고 멋진 주거공간을 설계해 보는 것이 의미있는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독과 사색의 공간,햇빛이 가득 들어오는 남향집,그리고 멀리 내려다 보이는 산과 강,뒤에는 산새들이 지저귀는 전원의 주택도 고려해 볼 만하다.머리 속에 어떠한 주거공간을 그릴 것인가는 부부가 합심하여 연구하고 이를 건축설계사에 의뢰하여 세세한 공간까지 부탁하면 멋진 주거공간을 연출할 것이다.경제적 능력이 닿는다면 자식들과 함께 거주하는 연결형 주택도 좋은 방법이 되리라 생각한다.가족 구성원간의 대화와 소통이 부재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좀 힘들겠지만)조부모,부모,자식 3세대가 살아가려는 공동체 의식도 매우 소중하다.

 

 각박한 삶,치열한 경쟁의 장에서 주거공간만이라도 자신의 기를 살리고 사람다워지며 자연과 어우러진 삶을 구가하는 것은 요원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노부부는 여생을 느긋하게 보내고 자식들은 직장과 가까운 교외지역을 잘 선택하고 주거공간을 마련하여 삶이 보다 풍요로워지고 건강하고 재물이 따르는 자신만의 집을 지금부터라도 설계해 보았으면 한다.어떠한 주거공간에 사느냐에 따라 건강과 재물이 들어올 수도 있고 빠져나갈 수도 있다는 풍수지리가의 얘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집은 개인의 운세와 역량을 다듬어갈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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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스케치 노트 스케치 노트
아가트 아베르만스 지음, 권루시안 옮김 / 진선아트북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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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도시산업화에 따라 도회지이든 농촌이든 자연의 모습 그대로를 보고 관찰할 기회가 점점 줄어들고 있어 삭막하고 무미건조하다는 생각을 한다.자연의 생태계가 온전하게 보존되어 인간에게 무한한 영감과 감성을 주었던 시절이 마치 오랜 옛날처럼 여겨진다.대부분 건축물 주변에 인공으로 심고 가꾼 것들이 대부분이라 진정한 감성과 멋을 연출하기에는 흡족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어린 시절 산과 들,개울가,저수지 등에 자주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던 동.식물들이 자연과 친화적으로 교유했던 시간이 그립기만 하다.

 

 

 봄이 되면 제비들이 남국에서 날아 와 초가집 처마밑에 둥지를 틀고 새끼를 낳아 먹이를 물어 다 주는 모습,뒷간에 심어진 호박 넝쿨,옥수수 잎사귀에 앉아 이슬과 빗방울로 목을 축이던 청개구리의 모습,따사로운 봄날 담벼락과 텃밭에 어미닭과 병아리가 종종 걸음질치고 뒷다리로 흙을 헤치며 먹이를 찾던 모습,개울가 수초 사이로 날렵하게 헤엄치며 달아나는 물뱀의 모습,처서가 가까워질 무렵 잔서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창공을 훨훨 날던 고추잠자리는 자주 봐왔던 생물들이다.

 

 

 나아가 가을날 벼가 누렇게 익어갈 무렵에는 벼 잎사귀 사이로 기고 나는 메뚜기,늦가을 새벽 산 속에서 울어대는 부엉이의 소리,하얗게 변한 산비탈에 푸드덕 날다 다시 먹이를 찾아 종종 걸음을 치는 까투리와 장끼가 있으며,장미,산딸기,창포,진달래,감나무 꽃,수련,해바라기,민들레,씀바귀,강아지풀 등 셀 수도 기억해낼 수도 없을 정도로 자연에서 성장해 가는 동.식물들을 해마다 보기를 반복해 왔던 것이다.어린 시절 친숙하기만 했던 것들이라 좀 길게 나열했지만 인간에게 영감과 감성,인간과 자연의 생태계들과의 교호작용이 무한하게 순수했다.그렇게 동.식물과 자연,사람이 무구한 모습으로 일체가 되어 살아가던 시절의 추억이 그립기만 하다.

 

 

 이제는 개발이 덜 된 오지나 시골마을을 일부러 가지 않는 한 위에 나열한 동.식물들을 보고 관찰해 나가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다행히도 자연에 서식하고 있는 갖가지 곤충,조류,파충류,초식,육식동물,나무와 풀 등의 특징과 관찰을 거쳐 종이에 그려 보는 스케치 시간은 뭐라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친숙하기만 하다.어린 시절이 상기되면서 고향의 산과 들,초목과 동.식물들이 계절에 따라 생장소멸해 가는 모습이 선연하기만 하다.아가트 아베르만스가 쓴 <자연 스케치 노트>를 쭉 읽어 보니 취미 삼아서라도 그림 도구를 준비하여 하나 하나 그려 나가는 연습을 해 보고 싶다.

 

 

 초보자도 쉽게 배우고 따라할 수 있도록 스케치의 기본자세와 전반적인 드로잉 과정이 세밀하게 나타나 있다.야외에서 그린든 실내에서 그리든 그리려는 대상에 대한 충분한 특징과 관찰이 필요하다.모든 생물에게서 찾을 수 있는 형태와 볼륨은 공,원통,원뿔 등 세 가지 기본 형태가 있고,빛의 각도에 따른 음영,기본 원색(빨강,파랑,노랑)과 대비되는 보색(補色)관계를 주지한 다음 단계별 스케치 요령을 터득해 나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스스로 직접 스케치북에 연필로 형태를 그리고 구체적인 모습을 담아 내도록 주의를 기울인 후에 물감과 물의 배합을 잘 맞춰 농담(濃淡)을 충분히 살린다면 살아 있는 동.식물들의 모습을 그려낼 수가 있을 것이다.사람이 근접하는 것을 무서워하는 동물들을 관찰하기는 쉽지 않기에 '은신처'를 만들어 그들의 생태를 사진으로 담아 묘사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스케치하려는 대상을 머리,몸통,손과 발 등의 순서로 얼개를 그린 뒤에 세밀한 부분을 완성해 나간다.그리고 색을 칠하면서 농담과 대상물의 전반적인 질감과 구조에 맞춰 그려 보도록 표현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이 글은 전문가의 솜씨,표현이어서인지 살아 꿈틀거려 생동감까지 안겨 주고 있다.처음 스케치하는 사람들은 쉬운 표현법부터 익히고 점점 난해하고 복잡한 대상물을 표현하는 연습을 길러야 할 것이다.

 

 

 취미로 하든 전문적으로 하든 자연에 사는 동.식물들의 생태를 예리하게 관찰하여 특징과 질감,구조 등을 먼저 파악해 놓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그리는 공간.장소도 야외가 될 수도 있고 작업실 및 가정에서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동.식물과 사람이 일체가 되어 스케치 하는 시간만큼은 집중과 몰입에 약간의 상상력을 동원한다면 대상에 대한 묘사력은 날로 증가할 것이다.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평소 동식물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행동으로 관찰하고 전문가가 그려 놓은 작품들을 많이 모방해 보는 것이 스케치를 잘하는 비결이 아닐까 한다.학창시절 잠깐 데생(드로잉)을 해 본 적이 있어 그리 낯설지 않은 시간이었다.다만 오랜 세월 그리는 감각과 연습을 방기한 탓에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스케치 연습을 해 나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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