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만든 사람들 - 일생에 한번은 역사에 미쳐라!
현경병 지음 / 무한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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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의 역사는 오늘을 살아가는 거울이요 교훈이다.인간이 문명을 발전시켜 오고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과거의 역사는 단지 기록물이 아닌 시시비비의 교훈으로 삼아 미래를 더욱 밝고 건설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이정표라고 생각을 한다.다양하고 복잡한 시대인 현대사회에서 집단과 사회를 이끌어 가는 지식인,지도자는 특히 잘못된 역사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는 의지와 노력이 우선시되어야 하는 것이다.그래서 역사와 관련한 인물,사건,소설 등을 독파하게 되면 마음에 남는 소중한 것은 과거의 역사 속에서 무엇을 얻고 버릴 것인가 라는 값진 교훈인 것이다.

 

 중국은 유구한 역사,세계 4위의 면적,세계 최고의 인구(14억 정도),G2국가 등 눈에 띄는 심볼마크가 많다.인구가 세계 1위이다 보니 다방면에서 최고 인재가 나올 확률도 많다고 본다.신화시대라고 불리는 3황5제,하나라로부터 상,주(춘추전국시대),진,한,삼국시대,위진남북조시대,수,당,5대10국시대,요,송,금,원,명,청,중화민국,신중국에 이르기까지 중국을 이끌면서 세인들의 뇌리에 각인이 되고 있는 인물들은 셀 수 없을 정도이다.한자문화권에 속해 있는 한국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중국과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은 때가 없을 정도로 긴밀하면서도 불편한 관계가 지속되어 오고 있다.2010년 G2국가로 부상한 중국은 명실공히 경제,정치,군사적인 면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당당하고 담대하게 내세우고 있는 것은 전혀 놀라울 일이 아니다.신중국 창립 이후 제 5세대 지도자 시진핑은 '중궈멍(중국의 꿈)'을 하나 하나 실현해 나가고 있다.시진핑을 비롯한 7인의 중국 상무위원들은 '해야 할 일을 주도적으로 한다(主動作爲)'라는 대원칙을 내세워 대내외 정책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앞서서 한자문화권인 한국은 중국의 문자인 한자부터 그들이 남긴 다양한 저작물을 통해 한국인의 의식과 정신작용에 깊게 침착해 있다.유학으로 대변되는 공자의 도덕과 예절정치는 한국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가운데,상하관계,예의범절,조상숭배의식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지켜야 하다는 의식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또한 중국 4대 기서인 삼국지연의,수호지,서유기,금병매를 비롯하여 삼국지,초한지,열국지 등이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특히 삼국지,초한지,열국지는 당대의 인물과 사건 등이 개연성과 상상력이 잘 가미되어 독자들의 흡인력을 더 해 주고 있는 셈이다.이러한 얘기를 통해 흥미반,학습반의 효과를 안기고 있다.개인이 사회생활을 하는 가운데 처세,경영,인간관계,리더십 등이 무엇인가를 느끼고 깨닫게 한다.

 

 현경병저자는 이번 도서에서 처음 접하게 되었다.저자는 역사를 통해 원하는 바를 체득하는 역사광으로서 중국 역사 속에 생멸해 간 12인의 지도자급 인물들의 치세와 업적을 다루면서 독자들이 무엇을 얻을 것인가를 직.간접적으로 제시하고 있다.이 글에 소개되고 있는 중국을 만든 위인들은 대부분 알고 있을 법한 인물들로 꾸며져 있다.공자,진시황,유방,한 무제,조조,당 태종(이세민),무측천(측천무후),주원장,강희제,건륭제,모택동,등소평 등이다.저자의 말대로 이 12인의 공통점은 평소 책을 가까이 하는 생활을 했고,자신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했으며,어려운 가정환경과 성장과정을 이겨 내어 자신을 강하게 하면서 뜻을 이룬 인물들이다.일종의 자수성가형 인물들이라는 생각이 든다.나아가 백행의 근본이 되는 효를 부모님에게 지극정성을 다했던 인물들이라는 점도 빼놓을 수가 없다.

 

 이렇게 12인의 성장과정,치세와 업적 등을 읽어 가다 보니 고대 한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가 없다.힘의 역학면에서 우위에 있던 중국은 한국과는 수차례의 전쟁을 일삼는 한편 한국이 중국의 책봉,조공관계에 놓이게 되는 안타까운 시대도 있었다.다양한 민족이 합종연횡과 이합집산을 하다 한(漢) 유방에 의해 한족이 중국 민족의 시원이 되고,명 주원장은 명을 침입하려 드는 이민족들을 모두 평정하는 개가를 올리게 된다.일국의 지도자로 등극한 이들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인재,민심,법'을 대원칙으로 삼았다는 점이 무척 인상적이다.현대 한국 정치지도자들이 과연 인재와 민심을 제대로 파악하고 정치개혁에 접붙이기를 하려고나 마음은 먹었을까?나아가 청 건륭제는 가장 넓은 영토를 지배하게 되는데,오늘날 중국 영토와 거의 흡사한 수준이다.중국과 경계를 맺고 있는 나라가 14개국이라고 하니 대국이 아닐 수가 없다.

 

 매관매직,부패,수구세력이 득실거렸던 무능한 청 제국을 쑨원,위옌스카이 등에 의해 멸망시키고 중화민국을 창립하게 되지만 창업의 뜻을 이루지 못한 채,마오저뚱에 의해 현대중국의 기틀이 세워지게 된다.독서광이면서 노동자,농민을 기반으로 국민당을 물리치고 신중국을 세운 마오저뚱은 경제개혁의 실패,정치과오인 문혁,반대세력 숙청이 이어졌지만 현대 중국사에서 마오저뚱만큼 중국인의 뇌리에 강하게 각인된 지도자는 없을 것이다.그의 후계자이면서 장정(長征)의 2인자였던 덩샤오핑은 힘의 과시보다 내실을 추구했다(韜光養晦).정치는 사회주의를 견지하되 경제는 시장자본을 바탕으로 개혁.개방을 가속화한다.그가 시장경제의 실현을 지향하면서 내세운 3보주(三步走)를 지향했다.국민이 따뜻하게 입고 배부르게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溫飽),인민의 생활수준을 중산층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것(小康),최종적인 단계인 다통(大同)은 중국 인민이 풍요롭게 사는 세상을 실현하자고 주장했다.

 

 덩샤오핑은 생의 마감 직전 중국이 풀어가야 할 중점과제로 밝힌 부의 분배 문제는 사회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한국 정치지도자가 새겨 듣고 실천해야 할 과제가 아닐까 한다.그는 중국 인민의 삶을 질을 높여야 인민이 따른다는 말도 매우 시사적이고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가 없다.

 

 "발전 후의 분배를 제대로 하지 못해 많은 부를 소수만이 누리고 대다수 사람들이 누리지 못하면 안 된다.분배가 공평하지 못하게 되고 양극화를 초래하면 발전하지 못했을 때보다 더 중대한 어려움에 처할 것이다.그러므로 반드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P414

 

  중국 역사 속에 나왔다 사라졌던 지도자급들도 인간인지라 실수와 오류,편협,지탄거리가 많을 수 밖에 없다.그러나 그들의 정치 역정을 살펴 보니 대부분 국리민복을 염두에 두고 치세를 해 왔던 점이 공통점은 아닐까 한다.또한 그 어느 때보다도 이익 상충관계가 첨예한 사회구성원들의 삶을 모두 충족시키기는 어렵겠지만 정치 지도자로 창업하려고 했던 초심을 잊지 않기를 바라마지 않는다.즉 창업을 이루었으니 수성(守城)을 잘 하는 것이 길이 남을 한국을 만든 사람들이 아닐까.그런 정치 지도자가 한국에는 부재중이라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고 비극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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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어디까지 알고 있니? - 비행기에 오르기 전 꼭 읽어야 할 미국의 역사
홍세훈 글.그림 / 웅진지식하우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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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학연수,유학으로 가장 많이 가는 곳은 미국이 아닐까 한다.미국이 정치,경제,문화 등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곳이기 때문이다.또한 전세계의 엘리트들이 모여 드는 곳도 미국이기도 하다.짧은 역사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오늘날 정치,군사,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영향력이 크다는 것은 미국의 저력이 실로 막강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미국이 G2국가의 위상을 갖고 있지만 경제위기로 인해 현 오바마정권이 풀어내야 할 문제들도 많다.

 

 미국에 유학을 가든 어학연수를 가든 최소한 미국의 역사,문화,종교,지리 등 기초지식을 갖고 떠나는 것이 미국 현지인과 의사소통은 물론 그들의 과거,현재를 이해하면서 소통과 교류가 한층 더 좋아질 것이다.손자병법에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고 하지 않았는가.나는 미국의 역사,문화,정치,경제,군사 등에 대해 어렴풋하게나마 알고는 있지만 비체계적이고 통속적인 수준일 뿐이다.다만 지리에 대해서만큼은 관심이 많아서인지 미국의 50개주(州)의 이름은 모두 기억하고,주요 대도시도 알고 있어 미국소설을 읽다 지명이 나오면 뇌 속에 저장된 것이 꿈틀거리며 전두엽으로 튀어나오는 것 같아 기분이 유쾌하다.

 

 미국은 본래 원주민인 인디언이 오랜 세월 살아 왔지만 영국의 청교도인들에 강제이주를 당하면서 수많은 인디언이 희생을 당해야 했다.미국이 독립을 했지만 인디언은 본방 사수를 하려다 결국 총칼에 의해 인디언의 최고지도자급이 희생을 당하면서(운디드 니 학살사건) 인디언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지금은 알래스카주에 약간의 원주민 후손들이 생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미국은 독립을 하면서 본격적인 산업화,근대화가 시작되면서 철강산업,석유산업이 발달하게 되었다.그 유명한 엔드류 카네기와 록펠러가 각각 철강과 석유로 거부가 되었는데 엔드류 카네기는 자선사업가로도 유명하다.록 펠러는 일개 경리직원에서 거부로 거듭나게 되는데,오늘날에는 초국적 종자기업인 몬산토기업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상징기업이기도 하여 카네기와 크게 대조가 된다.

 

 영문과를 전공한 홍세훈저자는 다양한 이력의 소유자이다.미국 듀크대학에서 미국종교사 연구로 석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한국어 강사,한국국제협력단에 취업을 했지만 그가 하고 싶었던 일은 유쾌하고 유익한 만화를 그리는 것이었다고 한다.그래서 미국의 역사,문화,정치,경제 등을 망라하여 만화로 소개를 한 뒤 서머리 형식으로 각분야에 대해 통합정리하는 방식으로 이 글을 엮었다.절제,근면정신으로 신대륙인 아메리카에 정착한 청교도인들은 식민지 영토확장을 불려 나간다.멕시코의 땅이었던 뉴멕시코 및 캘리포니아를 미국땅으로 삼고 알래스카를 매입하기도 하며 20세기 초에는 하와이까지 영토를 넓혀 가기도 했다.

 

 양차대전을 통해 그들은 직.간접적인 경제성장의 동인이 된다.특히 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은 미달러화가 전세계의 화폐본위가 되면서 미국은 정치,군사,경제적인 면에서 리더십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된다.미국은 겉으로는 우방국을 자처하면서도 그들의 이익과 상충하게 되면 물리적인 힘을 통해서라도 약소국을 종속화하려고 한다.즉 힘의 역학을 인정사정없이 발휘하는 것이다.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은 다양한 국내외 빅 이슈가 발생하게 되는데,승산도 없었던 베트남 통킹만 사건,카터 행정부 시절 이란 회교도인들이 미대사관을 직원들을 인질로 삼아 군사적으로 구출하려던 이란 침공작전,레이건 행정부의 카리브해안 제도인 그레나다 침공작전,20세기 말 걸프전,21세기 초 미.이라크 전쟁 등으로 미국은 재정을 거의 탕진하다시피 했다.게다가 주택을 담보로 대출을 일삼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리먼 브러더스 금융회사의 도산으로 경제위기의 늪은 깊어져만 가고 있다.

 

제2기 미행정부를 이끌고 있는 버락 오바마는 미국 경제회생과 건강의료개혁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현재 그는 실패한 대통령으로 여겨지고 있는 가운데 미국 최초의 흑인대통령으로서 과연 그는 어려운 국난과 대외관계를 어떻게 이끌어 갈 것인지 주목을 아니 할 수가 없다.G2국가인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경제대국으로 나아가고 있는 가운데 미국은 군사적인 면에서 일본에게 러브 콜을 하고 있고,중국은 시진핑의 '중국의 꿈'을 선언한 가운데 지정학적인 면에서 한국의 대외관계는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에 대해 관심이 간다.한국은 장기화되는 경제위기 속에서 사회양극화는 심화되고,금융권의 외국인의 외자 비율이 막대하며,한국 굴지의 기업주식의 큰 손들도 대부분 외국인 투자가 많기에 한국의 미래가 그리 밝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미국의 정치,경제,군사적인 면을 알게 되면 당연 한국의 정치,경제,군사의 향방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현정부는 문자 그대로 사회양극화,소득 불균형,보편적인 복지문제를 실천해야 하는 것이 상생하는 길이고,정부와 국가에 신뢰와 지지를 아낌없이 보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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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똥장수 - 어느 중국인 노동자의 일상과 혁명
신규환 지음 / 푸른역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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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나고 사회인이 되기 직전까지 적(籍)을 두었던 산골집은 재래식 화장실에 우물물을 퍼올리던 펌프가 먹고 마시고 배설해 주던 생활의 근간이었다.재래식 화장실은 치간(측간)이라고 했다.태어나기 전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깊게 땅을 파서 만들어 놓은 일명 똥통은 장방형에 위에는 두꺼운 목재를 촘촘하게 배열시키고 뒤를 보는 곳만 약간 틈을 벌여 놓았고,옆에는 뒤엄자리라고 하여 온갖 음식물 찌꺼기 및 밥을 짓고 난 뒤 남은 재를 쌓아 놓았다.소변은 두엄자리에서 보고 변은 목재 사이에서 보게 되는데 배설할 시간이 되면 늘상 가는 곳임에도 변뇨가 뒤섞여 코를 찌르는 냄새를 적응하지 못했다.특히 여름날에는 파리떼,모기,애벌레 등이 들끓기도 했다.날이 풀리고 얼었던 땅이 녹게 되면 할아버지는 머슴과 같이 똥담는 통에 통국자로 퍼올려 양어깨에 지고 밭에 거름으로 쓰기도 했다.오랜 세월 분뇨에 익숙했던 할아버지께서는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고 거름을 주기 위해 묵묵히 고샅을 지나 밭으로 향하던 모습이 선연하기만 하다.

 

 도회지 역시 마찬가지였다.대학을 다니면서 몇 차례 자취생활을 한 적이 있는데,경제적인 관계로 수세식화장실이 딸린 집은 얻지 못하고 고가(古家)를 전전긍긍했다.1980년대 중반 무렵이고 서울의 변두리쪽이어서인지 문화주택이라고 하는 빨간기와집은 으례 재래식 화장실이었다.그런데 재래식 화장실의 변뇨를 퍼가는 차량이 정기적으로 정해진 시간대(주로 아침)에 구역을 도는데,중간고사,기말고사 철이 다가오면 새벽 일찍 도서관 자리를 잡고 아침밥을 먹으러 자취집에 들르는데,분뇨차량이 눈에 들어오면서 고약한 냄새가 풀풀 날리면서 입을 막고 뜀박질을 하곤 했던 시절이 있다.그후 도시개발화가 이루어지고 재래식이 수세식으로 바뀌면서 고약스럽고 소름 끼치는 냄새를 맡지 않게 되었다.

 

 지금 그 시절 우물물,펌프질을 해서 퍼올린 물,재래식 화장실 등은 생활수준과 산업화가 진전되면서 거의 사라져 간 생활의 유물이 되어 버렸다.현대는 초국적 종자기업이 만든 농약과 비료,종자를 사용하고 있는  시대이다 보니 분뇨처리는 공공하수도에 의해 수세화되어 종말처리를 한다든지 정화조로 처리하고 있는 상황이다.위생적이고 환경적인 측면에서 생활의 편리함과 질병의 우려가 없으니 매우 다행스럽다는 생각을 한다.사람이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본능행위가 불과 몇 십년 전까지만 해도 개인이 일일이 손으로 퍼나르면서 생계를 이어가던 시절이 있었다.자동차가 보편화되기 전에는 인력거가 사람을 맞이하고 태워다 주기도 하고,깨끗한 물을 원하는 세대에게는 물장사가 새벽잠을 깨우기도 했으며,분뇨차가 없었을 때에는 똥장수들이 찾아와 분뇨를 퍼가면서 수고비를 주기도 했다.

 

 이 글은 20세기 초 중국 베이징의 하층민의 고단한 삶 시기별로 전해주고 있다.베이징의 똥장수는 그 자체가 삶을 지탱해 주는 생계거리이기에 똥을 집하처리하는 똥공장(분창)과 일정구역의 똥장수를 관리하는 분도 그리고 가가호호 돌아다니면서 똥을 푸는 똥장수가 마치 피라미드와 같이 이권과 생존권이 얽혀져 있다.시대가 바뀌면서 사람의 의식구조도 바뀌지만 직종도 명멸하기 마련이다.인구 14억에 가까운 중국은 오랜 기간 봉건적이고 사회주의의 틀에서 깨어난지 불과 30여 년 밖에는 되지 않았다.그러한 까닭에 중국인민이 먹고 사는 문제가 급선무이었기에 위생관념,환경오염과 같은 선진문화의 도입은 우선순위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공장노동자,인력거꾼,똥장수,물장수들은 시민들을 상대로 돈을 뜯기도 하고 물주로부터 부당한 노동조건을 당하게 되면 태업(怠業)도 불사했다.비록 똥장수이지만 조직망이 갖춰져 있어 혹시라도 농한기(農閑期)를 이용하여 외지에서 떠돌이 똥장수 기존의 똥장수가 부딪히기라도 하면 밥줄을 위협한다고 생각하여 똥장수들은 피터지도록 싸우기도 했다.똥장수는 위에 분도주(糞道主)가 있고 그 위에는 기업형 분창주(糞廠主)가 있었다.특히 분창주는 이권과 관련하여 시정부와 긴밀한 결탁관계를 맺었기에,분창주는 막강한 분벌을 이용하여 세력을 확대하고 부녀자 납치,강간 그외 축재도 어마어마하기만 했다.베이징 시정부는 분벌악패를 근절한다는 명목하에 위더순과 순싱구이 등을 법정에 내세운다.사안의 경중에 따라 사형,징역,교화노동 등에 처하게 된다.

 

 중국 하층민의 직업인 물장수부터 똥장수,인력거꾼,접대부 등에 대한 기원은 명대부터 시작하여 청조,그리고 민국시기,난징정부시기,일본점령기,베이징정부시기 등으로 나뉘어 똥장수들의 삶의 애환을 그리고 있다.또한 똥장수들의 대부분이 산동성 출신이 많다는 점이 특징이며 이들은 베이징에서 동향네트워크를 형성하면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지연을 적극 활용하기도 했다.20세기 초 중국은 위생시설이 극히 열악한 시절이어서인지 똥장수들은 기생충병,하지정맥류,결핵,위장병 등을 주로 앓았다.일종의 직업병이다.일본이 중국 정부를 삼키면서 도시계획에 들어가고 분변개혁을 하게 되면서 똥장수들은 그들의 생계가 위협을 받고 퇴출될 불안감에 폭동을 일으키기도 한다.위생처리가 안된 물로 빨래를 하고 밥을 짓는 등 당시 중국의 환경오염은 일반인들에게 각종 질병을 안겨 주었다.이질,두창,티푸스,성홍열,콜레라 등이다.똥장수 중에서 가장 밑바닥에 있는 똥장수들은 윗선의 눈치를 보아야 하고 많지 않은 급료로 식구를 부양해 나가야 했다.1950년대 초 분벌악패(糞閥惡覇)의 주동자들을 체포.처벌하면서 위생개혁,환경문제로 점진적으로 개선되어 갔던 것으로 보여진다.이 글을 읽으면서 지난 한국사회의 물장수,똥장수,인력거꾼,접대부(기생) 등과 관련한 그들의 애환을 음미해 보는 소중한 역사학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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훔볼트의 대륙 - 남아메리카의 발명자, 훔볼트의 남미 견문록
울리 쿨케 지음, 최윤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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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 조사하는 일은 도전정신과 용기가 우선시되어야 한다.특히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오지의 세계를 탐험한다는 것은 어지간해서는 나서기 어려운 일인데 이것을 자신의 사명감으로 여기고 전인미답의 남미 대륙의 허브를 발견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훔볼트이다.개인적으로는 훔볼트에 대해서는 생경하기만 하지만,그가 중남미 대륙을 발견하고 그 결과물에 대한 것을 정리하여 유럽에 전달한 점은 인류문화사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생각한다.그는 식물학,동물학,지리학,인류학,광물학,언어학,물리학 등 다방면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어 '걸어 다니는 대학'이라 할 정도이다.독일 당시 프로이센의 남작으로서 프랑스의 봉플랑과 함께 아마존강과 오리노코강의 생태계를 직접 답사했던 것이다.

 

 훔볼트는 보기 드물게 90세의 장수를 했던 인물로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도 《코스모스 전5권》의 저작을 위해 온몸을 쏟아 부었던 것으로 전해진다.이 도서에는 훔볼트가 통나무를 이용하여 지중해에 몸을 싣고 중남미에 발을 내딛으면서 원주민 인디오와 함께 또는 봉플랑과 단둘이서 죽음을 무릎쓰고 열대림을 헤쳐나가는 한편,동굴 속에서는 스페인 제국이 남긴 금괴 등도 발견한다.1799년 남미 대륙 탐험에 나선 훔볼트는 오리노코강,아마존강의 생태를 목격하면서 꼼꼼하게 견문록을 작성한다.당시 남미 대륙은 '황금 칠을 한 자'라는 엘도라도가 정복자들의 시대가 남긴 것으로서 남미 대륙은 광물질의 노다지로 알려진 곳이기도 했다.

 

 훔볼트가 남미 대륙을 탐험하게 된 배경에는 나폴레옹의 대 변혁과 독일의 정신적 황금기라는 시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훔볼트의 집안은 어머니의 대단한 교육열에 힘입어 교양과 지식을 쌓기에 충분했다.형인 빌헬름 폰 훔볼트는 면학에 열을 쏟는 반면 알렉산터 폰 훔볼트는 공부보다는 동물,식물,천문,지리 등에 더 관심이 쏠렸던 것으로 보인다.훔볼트가 왕성한 사회생활을 하던 시기에는 루소,괴테 등 문예부흥기였다.훔볼트에 앞서 세계 일주 여행을 다녀 온 제임스 쿡이 두 번씩이나 세계 여행을 다녀온 것에 훔볼트는 미지에의 동경과 호기심으로 충만했던 것은 아닐까 한다.

 

 칠흑같이 어두운 망망대해에서 해적들에게 들이키 않기 위해 불을 끄고 항해해야 하는 것이 고역이었을 것이다.천문학 기자재의 눈금,수온,공기압,지구 자기장의 변화와 그 외의 것을 계측해야 하는 난관에 봉착하기도 했다.그러한 가운데서도 훔볼트와 봉플랑은 하늘에서 산산조각되어 흘러 내리는 유성의 찬란함에 넋을 잃고 만다.훔볼트가 신세계로 가는 항해에서 들른 첫 번째 항구는 쿠마나로서 쿠마나인들과 사교계와 교류를 하였지만 그들의 본업인 탐험에 매진해 나갔다.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것이지만 원시림의 원초적인 생태의 모습은 경이로움과 엄숙함마저 들게 한다.갖가지 동.식물과 어패류,원주민 인디오의 원시적인 일상과 생계는 물질적인 풍요로움과 생태계,기후변화를 일삼는 현대사회와는 무척 대조적으로 다가온다.가슴이 탁 트이는 오리노코강,아마존강 유역의 수상 가옥 마을,강의 급류 지대는 때묻지 않은 자연의 위대함을 그대로 재현해 주고 있다.

 

 19세기 초에는 히말라야 에베레트산이 세계 최고봉으로 알려지지 않아서인지 훔볼트와 봉플랑은 에콰도르의 침보라소 산(6,267m)을 최고봉으로 인식하지만 훗날 에베레트산이 최고봉이라는 소식을 듣고 훔볼트는 약간의 질투심을 느꼈다고 한다.강과 산,계곡을 걷고 넘고 건너기를 반복했다.미국의 제3대 대통령이었던 제퍼슨과의 교류를 통해 인류의 미래에 대해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훔볼트는 19세기 초 우랄,알타이 등 중앙아시아를 탐험을 하면서 중앙아시아 지리에 대한 귀중한 자료가 되기도 했다.그는 사진기가 발명되기 전과 막 발명되어 초상화와 실물사진을 보여 준 행운아이기도 하다.남미 대륙에 대한 견문록으로서,다양한 방면에 재능을 발휘했던 인물로서 알렉산더 폰 훔볼트는 위대한 탐험가로서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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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트로와 마르케스 - 20세기 두 전설적 인물의 권력과 우정
스테파니 파니첼리 외 지음, 변선희 옮김 / 예문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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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바에 대해서는 그리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체 게베라 평전》,《의료천국, 쿠바를 가다》를 읽으면서 쿠바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미국 마이애미 주(州)에서 그리 멀지 않은 카리브해에 면하고 있는 사회주의 국가로서 1960년대 피델 카스트로에 의해 쿠바 혁명이 성공하면서 2008년 피델 카스트로가 국회평의회 의장 및 국가원수직을 사임하기까지 쿠바의 사회는 '사회주의'라는 이념과 이해관계에 의해 갈등과 대립의 연속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피델 카스트로가 쿠바 혁명의 일선에 있을 때에는 체 게베라도 동지로서 그에게 힘을 실어 주었고,피델 카스트로는 체 게베라에 대한 신뢰도 컸던 만큼 콩고 독립투쟁을 위해 체 게베라는 혁명가로서 열과 성을 다했다.당시 소련의 제국주의에 맞서기 위한 방편과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1965년 체 게베라는 피델 카스트로와 결별하면서 카스트로의 소련식 신제국주의에 대해 불만을 터뜨리면서 볼리비아 게릴라 준비에 돌입했던 것이다.

 

 카스트로(이하 피델)가 쿠바 혁명의 전설적 인물이면서 정치적인 동지요 영원한 우정을 보여 주고 있는 가르시아 마르케스(이하 가보)은 카스트로가 혁명과 사회적 문제 등에 늘 조언과 중개역할을 하면서 동지로서 때로는 결의형제와 같은 관계로 이어져 갔다.콜롬비아 출생인 피델은 장교 집안에서 출생하여 전쟁과 영웅담에 관한 얘기와 책을 많이 읽으면서 훗날 피델과의 정치적 파트너로서 함께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또한 가보는 198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로서 우리에게는 《백년 동안의 고독》으로 잘 알려진 작가이기도 하다.가보는 결국 피델에게 있어서 미운 정,고운 정이 시간과 세월 만큼 진하게 농축된 관계라고 생각이 든다.특히 1960년대부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쿠바와 그의 주변국가 즉 미국 및 엘살바도르,에콰도르와의 관계가 불안정한 상태에서는 으례 가보가 특사와 같은 협상가로서 수완을 유감없이 발휘했던 민완(民腕)의 대가라는 생각마저 든다.

 

 가보는 자국인 콜롬비아가 정치적 부도덕,부조리에 환멸을 느끼고 자신이 생각하는 사회주의의 이상을 추구하려 콜롬비아를 떠나 멕시코,쿠바 등지를 떠돌았던 것이다.중등학교 시절 가보의 역사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훗날 사회주의 활동과 작가로서의 삶을 살게 했던 동인(動因)이 아니었을까 한다.

 

 "좋은 소설이란 현실을 시의 언어로 바꿔 놓은 것이라는 점이고,또 하나는 인류 최후의 운명은 사회주의라는 것이었다." -P31

 

 가보는 피델과의 만남이 있기 전,푸에르토리코의 독립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또한 칠레의 아엔데 좌파 사회주의정권이 출범하면서 그와의 만남과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그렇다고 피델과 가보의 진한 우정이 계속 이어지지는 않는다.즉 빛과 그림자와 같다.피델이 자신의 정적들에게 무참하게 자행하는 정치보복과 같은 형태는 결코 수용할 수가 없었다.쿠바의 지식인 파디아의 자아비판에 대한 분노가 극치에 달하면서 사회주의 혁명의 불길을 식기도 했다.칠레 아옌데가 쿠데타에 의해 자살을 하면서 피노체트를 비난하고 급진 좌파 잡지 《대안》에 참여하기 위해 다시 쿠바 여행길에 오르면서 피델과의 재회가 성사된다.이를 기점으로 가보는 피델과 쿠바의 사회상에 대해 긍정적으로 주장하는 반면,미국에 대해서는 경제적 봉쇄조치를 맹렬히 비난한다.

 

 한편 가보는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족장의 가을 등을 준비하기 위해 독재자들이 누린 절대적이고 고독한 권력의 모습을 완벽하게 그려내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권력자들의 자서전 혹은 그들을 모티브로 한 소설,고전 작품들을 찾아 읽기도 하며,현역 권력자들에 대한자료를 참고하면서 작품 구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11페이지 분량의 단편을 위해 5백 페이지를 쓰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니,작가의 작품을 위한 고뇌와 열정은 가히 경외심마저 들게 한다.198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자 쿠바의 아바나 시민들은 가보에 대한 찬사와 열렬한 환영을 아끼지 않았다.

 

 1990년대 말 쿠바의 민간인이 해상에서 미국 비행기를 납치하면서 피델은 납치범(민간인)을 즉각 처형한다.어떠한 재판 절차도 없는 가운데 총살형에 처하고 마는데,가보는 이에 대한 코멘트가 없다.가보가 피델의 정치적 동반자이고 협상 파트너라고 한다면 당연 이에 대해 "사형제도를 반대하고,불필요하고 선동적인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라면서 말을 맺는다.이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주제 사라마구와 바르가스 요사는 지식인으로서 쿠바 피델이 정치적 보복에 대해 맹렬히 규탄한다.카스트로는 동생 라울 카스트로에게 주석직을 인계하고,마르케스는 얼마전(2014.4.17)에 타계했다.혁명의 동지로서 때로는 편안한 인간적 우정의 관계로서 카스트로와 마르케스가 보여 주었던 정치적 공생관계는 때로는 천군만마를 얻는 장수와 같은 기분이었을 것이고,때로는 '닭 쫓던 개 지붕쳐다 보는'식이었을지도 모른다.특히 마르케스는 비록 정치가는 아니었지만 카스트롤를 대신하여 국가급 원수들을 직접 만나고 소통하면서 그가 갖고 있는 정치적,문학적 사상과 견해를 충분히 밝혔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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