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맛 - 음식으로 탐사하는 중국 혁명의 풍경들
가쓰미 요이치 지음, 임정은 옮김 / 교양인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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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구 대국인 중국은 음식에서도 세계인의 미각을 돋굴 만한 요리들이 많다.세계 제1위의 인구와 세계 제4위인 광활한 면적 그리고 56개의 소수민족이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인간의 기본 3대 욕구는 의.식.주라고 하지만 가장 원초적이고 본능을 자아내게 하는 것은 식(食)문화가 아닐까 한다.허기를 채워야 신체의 근육이 살아나면서 거동과 사회생활이 가능한 것이다.그런데 중국과 같이 광활한 나라에서는 음식의 종류가 셀 수가 없을 정도이면서 지역마다,기후대마다 음식의 특색이 다를 것이다.

 

 중국은 역사적,문화적,생활환경적인 차원에서 음식의 종류가 정해졌다.내륙은 짜고 매운 맛이 많고 해안가는 담백하고 달콤한 맛이 많은 것이 특색이다.이것을 기후대별로 분류하면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위쪽은 북방의 맛,아래쪽은 남방의 맛으로 분류하고 있다.베이징을 중심으로 한 북방요리,상하이를 중심으로 한 저장요리,홍콩을 중심으로 한 광둥요리 그리고 쓰촨을 중심으로 한 쓰촨요리가 발달했다.

 

 이 글은 요리 평론가인 가쓰미 요이치 저자가 1960년대부터 30여 년간 중국 현지의 음식 탐방을 하면서 풀어낸 중국 음식의 전반적인 특색을 다루고 있다.당연 역사와 문화,(혁명적)인물들과 관련한 요리가 소개되고 있다.모든 분야가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는 가운데 중국의 음식도 전통적으로 분류되고 있는 음식에서 차츰 퇴색되어 가고 있다.이것은 중국의 정치권을 이끌어 가고 있는 정치지도자의 혁명기에 홍보되었던 음식 맛을 되살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이를테면 마오저둥이 국공합작 기간에 매운 맛을 중점 홍보하고,덩샤오핑의 고향 쓰촨의 매운 맛이 어우러져 현대적인 감각으로 중국 어느 곳에서든 재현하고 있다.요리도 유행과 스타일에 민감하듯 중국 요리도 지방색을 고수하되 전통 맛에서 살짝 벗어난 감각으로 기울어 가고 있는 것이다.

 

 베이징 2대 요리인 솬양 러우(양고기 샤브샤브)와 카오야(오리 구이)는 둥라이순과 췐쥐더가 오랜세월 베이징 시민의 벗이 되었다.베이징의 양대산맥인 솬양 러우와 카오야가 현재는 베이징 솬양 러우,베이징 카오야식으로 브랜드명이 바뀌면서 옛명성이 많이 퇴색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대신 앞서 말했듯 중국 현대사에 정치 거물인 마오저둥,저우언라이,덩샤오핑의 미각을 살려 음식 맛을 개발하고 소비자의 구미를 당기고 있는 것이다.특히 베이징 요리는 청말 중국 산둥성에서 올라온 요리사들에 의해 다양하게 개발되었다.또한 중국은 지역에 따라 특색 있는 요리가 줄을 잇고 있는데 공통점이라고 하면 밀가루와 관련한 음식이 많다.기름에 튀기고 볶고 찐 음식은 색,향,맛으로 식객들의 입맛을 돋구고 있다.그중 최고 요리는 상어 지느러미와 제비 집을 최고급으로 여긴다고 한다.(大師級)

 

 청대 건륭제에 의해 한족까지 평정하면서 중국 요리는 만한전석(滿漢全席)으로 격상되면서 진귀한 호사스러움과 고급스러움이 요리에 나타나게 되었다.요리 평론가인 가쓰미 요이치 저자는 중국 각지역의 요리 문화와 정치적 과도기의 음식과 관련한 에피소드를 다양하게 소개하고 있어 중국 음식의 과거,현재의 주소를 가늠하는 시간이 되었다.특히 중국 음식의 풍경은 다채롭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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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의 탄생 - 사라진 암호에서 21세기의 도형문까지 처음 만나는 문자 이야기
탕누어 지음, 김태성 옮김 / 김영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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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자는 사물의 흔적을 찾아주고,우리의 자취를 남겨주며,광대한 세계와 심오한 기억에 대한 효과적인 질문 방법이 되어준다. -P331

 

 문자가 발명되기 전에는 입으로 내뱉는 말과 몸짓과 같은 비언어적 요소에 의해 의사전달이 되었을 것이다.그런데 세상을 안다고 하는 깨우친 자들은 당대의 생각과 감정,사실 등을 어떠한 형식으로든 남기려고 했을 것이다.그러나 소리를 대표하는 말을 어떠한 도구,수단에 의해 기록하려 고뇌의 시간이 많았을 것이다.세계 최초의 문자는 수메르인에 의한 설형(쐐기)문자,진흙 등에 새긴 상징문자 등이었다.시간이 흘러 이집트,중국 황하 문명으로 불리는 상형문자가 선을 보이게 된다.

 

 이 글이 중국 한자의 탄생과 관련한 이야기이기에 한자의 탄생을 살펴 보면 한자의 첫 등장은 현재 정교하고 간체화된 문자가 아닌 그림과 같은 상형문자였던 것으로 보인다.사람과 사물의 모양과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소의 어깨뼈,거북의 등껍질에 송곳과 같은 날카로운 도구로 새김질을 했다.즉 새와 동물들이 남긴 발자국에 착안하여 문자를 새기게 되었는데 그 주인공이 전설상의 인물이면서 왕의 사관(史官)인 창힐(蒼颉)이었다.(상나라 말기인 기원전 3,000∼3,500년에 만든 갑골문이 발견되고 있다)

 

 이렇게 소의 견갑골,거북의 등껍질에 새긴 갑골문인 상형문자들은 차츰 다양한 의미를 갖게 된다.사람이나 사물을 본뜬 상형문자,두 글자가 조합하여 한 글자가 형성하는데 한 글자는 뜻을 한 글자는 음을 나타내는 형성문자,두 개의 뜻 글자가 모여 새로운 글자를 형성하는 회의문자,추상적인 뜻을 점이나 선으로 그린 지사문자,본래의 뜻과 음에서 새로운 뜻과 음으로 파생되는 전주문자 그리고 맨마지막 외래어와 같이 한자로 표기할 수 없는 단어를 한자의 음을 빌려와 사용되는 가차문가가 있다.이것은 흔히 육서(六書)라고 불리며 후일 금문,소전,예서,해서,행서,초서와 같은 서체 변천이 있었다.예를 들면 노예를 다스리는데에는 예서를 사용했다.

 

 이 글은 타이완의 문화비평가이면서 인문학의 콘텐츠를 발굴하고 있는 탕눠(唐諾) 저자 한자의 탄생과 관련하여 육서,조자(造字),문자의 의미,형성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 등을 소개하고 있다.문자는 생물과 동일하게 탄생과 성장,사멸을 반복하고 있다.특히 시시각각으로 속도전에 있는 현대사회에서는 문자,언어도 자연스레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복잡하고 의미가 불투명한 것들은 자연스레 사장되고 만다.한자도 마찬가지로 복잡한 획수,고어에 나올 법한 한자들은 중국 현대화에 발맞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면서 문어와 같이 경직된 문자 표현보다는 일반인들의 언어를 중심으로 평이하면서도 보편적인 어휘,문장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이것은 후스(胡適)에 의한 백화운동이 문어에서 현대문으로 가는 디딤돌이 되었다.그는 옛것을 고수하다보면 개혁과 변화를 이룰 수 없다(食古不化)는 취지하에 중국어의 현대화를 꾀했던 것이다.

 

 복잡다기하면서 무수히 많은 한자의 조어 관계,한자의 형성과정을 살펴 보노라니 문자의 역사가 그리 간단치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중국 허뻬이성에서 발견한  5,000여 개의 갑골문 가운데 겨우 1,000여 개만 식별,해석 가능하다고 한다.문자는 면밀하고 신중하며 경제적이고 참을성 있게 새로운 사물과 새로운 개념의 생존 능력과 영향력을 평가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다.즉,사물과 개념이 사람들 마음속에 깊이 자리를 잡고,일상생활에서 널리 인식되고 응요되기 전에는 쉽게 문자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그래서 문자가 사회 관습의 실증으로서 가지는 의미는 더 강력하고 분명한 것으로서 역사적 고증이나 고고학 영역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한자의 탄생과 더불어 한자 하나 하나의 조어 관계가 갖은 의미와 사회에서 문자,언어가 갖는 기능과 역할에 대해 음미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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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인간이 만든 자연 - 한중일 전통가옥문화 삼국지
김경은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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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중.일 가옥문화의 원류를 찾아서

 

 두 다리 쭉 뻗고 푹 잘 수 있는 거주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 삶의 기본은 해결된 셈이 아닐까 한다.개인의 경제적 수준에 맞춰 집의 구조,크기도 제각각이겠지만 현대 한국사회의 가옥구조는 대부분 공동주택의 형식을 띤 구조가 대부분이다.이름하여 빌라,아파트가 대부분이고 단독주택은 서열상 밀리고 있다.한국의 전통 가옥은 기와집 형태의 한옥임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한정된 지역,공간에만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이는 일제강점기,해방 직후 미 군정 치하를 거치면서 한옥은 보존대상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말았다.

 

 

 좋은 터에 멋진 집을 짓고 온가족이 한지붕 아래에서 오손도손 살아가던 시절은 이제 다시는 오지 않는 것일까.비록 누추하고 옹색했던 시절이 엊그제와 같은데 이미 긴 세월에 묻혀 잊혀 가고 있다.유교문화를 중시했던 조선시대는 가부장 제도,조상숭배 의식,남존여비 사상이 강했던 봉건사회였다.농경문화가 발달했던 사회이다 보니 가옥은 대부분 초가의 형태가 주가 되고 담은 돌로 쌓은 석담이 대부분이었다.풍수지리사상에 입각하여 가옥의 구조를 배산임수(背山臨水)에 중점을 두었다.집터를 잡고 집짓기가 시작되면 구들장부터 기둥,대들보 작업을 거치는데 나무와 흙이 주재료였다.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지낼 수 있도록 대대로 문화유전을 전수했던 것이다.지붕의 재료만 다를 뿐 기와집도 그러한 원칙을 고수하면서 집짓기를 이어 나갔던 것이다.

 

 한자문화권에 속한 한.중.일 3국의 '의식주문화'를 섭렵해 보는 멋진 문화강의를 접하게 되었다.김경은 저자는 3국의 가옥형태의 기준은 18세기 중엽의 수도를 기준으로 삼았다.의식주 문화는 해당 국가의 세계관,역사,국민성,사회변화 등이 함축되고 이는 한 나라의 정체성(Identity)을 보여주기에 문화적 특징을 이해하는데 좋은 길라잡이가 되어 준다.한.중.일 3국 모두가 농경문화권에 속하면서도 가옥 구조는 3인3색일 정도로 이질적인 요소가 강하다.그것은 각 나라가 오랜 세월 겪으면서 체득한 지혜가 문화 속에 자리매김되면서 면면이 이어져 왔던 것으로 보인다.예를 들어 한국의 가옥은 풍수지리사상이 절대적일 정도로 배산임수의 형태를 선호했고,중국은 햇빛이 잘 드는 남향을 선호하고 있다.나아가 일본은 남쪽에서 북상하는 잦은 태풍을 피하기 위해 북향집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대륙기질이 강한 중국,반도기질이 강한 한국 그리고 섬나라 근성(시마곤조)이 강한 일본의 가옥구조는 당연 기후와 풍토,외세의 영향을 적잖이 받았다.중국은 빈번한 외침과 재해가 폐쇄적인 가옥구조인 사합원(四合院)을 두고 있다.사합원은 다세대가 한곳에 머물게 된다.혼인을 해도 분가하지 않고 사합원의 규모를 늘려 가면서 집단가족제도를 취하고 있다.사합원은 쯔진청과 베이징으로 확대된다.마치 가옥의 구조가 바둑판과 같이 정방형의 모습을 띠고 있는 것이다.한국은 적장자 원칙에 의해 둘째부터는 분가하게 된다.가옥의 구조는 안채,사랑채를 두고 있으며 좀 지체가 높은 사람의 경우에는 중문도 두고 있다.남존여비사상이 강했던 조선에서 본부인이 기거하는 안채를 가옥의 중심으로 두었던 것은 이례적인 현상으로 보인다.일본 가옥은 나가야와 마치야가 산업화 과정에서 정착했다.쇼군,사무라이,영주 등이 살았던 마치야 그리고 일반 서민들,즉 노동자들은 나가야라는 가옥에서 군집형태로 살아가고 있다.

 

 

 

 

 

 나무와 돌,기와,짚으로 엮은 한옥은 앞과 뒤가 트인 형태로 중국과 일본과 같은 인위적인 정원은 없는 대신 산과 근접한 뒤뜰에 야생화를 심어 자연과 가까이하려고 했다.취사와 난방은 땔감을 위주로 구들장으로 들어가는 열기(대류,전도,복사)가 돌을 달구면서 추운 겨울을 나게 되었던 것이다.한국 가옥은 구들장과 마루가 있는데 마루에서 담넘어 자연을 관조하면서 시를 읊조리는 시인묵객을 연상케 한다.그리 높지 않은 돌담은 탁 트인 자연을 응시하면서 이웃과의 소통을 이어나갔던 것이다.이에 반해 중국은 잦은 외침과 재해로 외부에 대한 경계의식 및 불신이 강했던 만큼 철옹성과 같이 높게 올린 담장을 짓다보니 내부의 모습은 전혀 알 수가 없는 폐쇄적인 가옥구조인 것이다.다만 중국은 전통적으로 가족을 아끼고 사랑하는 가족 공동체가 발달하게 되고,세계 속에 산재되어 있는 결집력 강한 화상(華商)을 연상케 한다.일본은 마치야(町屋),나가야(長屋) 그리고 잇코다테(一戶建て:단독주택)의 형태가 있다.그런데 일본의 가옥은 집안에서 어떻게 얼마만큼의 공(功) 내지 역할을 했는가에 따라 가옥배치와 구성에 영향을 준다고 한다.특이한 점은 일본 가옥은 여성을 위한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벼농사,불교.유교,한자와 같은 공통점이 있는 한.중.일 가옥구조는 유사하다기보다는 이질적인 요소가 많다.그것은 각 나라의 정체성,기후와 풍토,대외관계를 통해 축적된 문화적 유전자가 다르기 때문이다.하나 더 난방구조를 살펴 보면 한국은 얼었던 몸이 녹을 정도의 구들장 문화가 발달하고,중국은 기후대가 다양해서 일률적이지 않지만 대체적으로 난방구조가 없다.북방(동북3성)에는 한국의 구들장과 비슷한 화덕이 있다.1990년대 중국 산동지역 중국인 집에 초대받아 갔던 적이 있는데 추위를 나기 위해서 라디에이터,난로와 같은 난방장치가 있을 뿐이었다.일본의 난방장치는 이로리와 고따츠가 있다.방바닥 또는 마룻바닥을 네모나게 파서 땔감을 가운데에 넣어 실내를 따뜻하게 만들었다.첨언하면  구들장이 난방장치로 합리적,효율적이어 유럽 일부 나라에서는 한국의 온돌문화를 모방하고 있다는 소식이다.동북아 국가인 한.중.일은 사후 세계에 대한 관념이 다르다.조상의 신위를 모시고 제를 지내는 풍습은 거의 비슷하지만 한국만큼 조상의 명복을 빌고 후손들의 건강과 재복을 바라는 것은 세계 제일일 것이다.이것은 묘자리 명당문화와 사후 순환논리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각국의 의식주 문화를 이해하게 되면 그 나라의 문화의 유전자를 거의 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이것은 단시간에 축적되어 밖으로 드러난 것이 아니다.오랜세월 풍화작용에 의해 퇴적되고 마모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면서 진화되어 온 결과물이다.역사,문화적으로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던 한.중.일 3국의 터와 집의 의미를 찾아 가면서 주거문화 속에 내재되어 있는 가족제도,난방장치,좌식과 입식문화,목욕,화장실 문화에 이르기까지 다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황인종이라는 비슷한 얼굴형태에 정치,경제,군사적으로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현 상황에서 한.중.일 3국이 좀 더 문화를 기본으로 정치,경제,외교적이니 면에서 가까워지기를 바란다.그 옛날 수로를 따라 철로를 따라 자유롭고 평화롭게 선린외교를 펼치던 시절이 있지 않았는가.김정은 저자는 3국의 문화에 대한 이해를 돋구기 위해 다양하게 관련 글을 인용해서인지 내용이 매우 알차고 탄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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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수용소 - 내 이름은 르네 타르디 슈탈라크ⅡB 수용소의 전쟁 포로였다
자크 타르디 지음, 박홍진 옮김 / 길찾기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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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전쟁은 개인에게 무엇을 남길까.두말할 나위없이 외상후 심한 트라우마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전쟁의 명목이 다양하지만 대개는 국가 지도자의 영웅심과 민족의 우월성 그리고 배타적 종교관을 넘어 자원전쟁과 같은 것이 군사적,경제적 우월성을 앞세워 약세국에게 총탄의 세례를 안길 것이다.청년층은 국토 방위를 위해 의무적으로 전쟁에 나가야 한다.전쟁 상황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는 예측불허가 될 수도 있으며 전쟁 상황에 따라서는 지리멸렬하게 이어지면서 물적,인적 피해는 천문학적으로 불어날 것이다.이것은 전쟁 역사를 통해 얻은 값진 교훈이다.그렇다면 전쟁으로 인해 과연 승전국은 어느 나라이고 패전국은 어느 나라인가 라는 원초적인 물음도 있겠지만 전쟁이라는 것은 해당 국가 모두가 상처와 후유증을 앓게 마련이다.상처와 후유증은 전장(戰場)의 중심부에서 총부리와 총탄의 세례를 간신히 피해 가면서 운좋게 살아 남은 자라고 생각이 든다.

 

 

 20세기 세계는 양차(兩次)대전을 겪으면서 두 축의 이념을 형성하고 경제회복이라는 대과제와 경제중심축의 이동을 들 수가 있다.양차대전에서 독일은 전쟁의 주범으로 꼽히고 있다.1차 세계대전은 오스트리아가 사라예보에 전쟁을 선언하면서 독일,이탈리아가 동맹국으로 참전하게 되고,2차 세계대전은 독일과 소비에트 연방이 폴란드를 침공하고,일본이 1937년 중.일전쟁(난징 대학살)을 일으키면서 2차 세계대전의 기점으로 삼고 있다.특히 독일은 1933년 히틀러가 독일 총리가 되고 아리안 민족의 우월성 및 유대인 말살을 기화로 독일,소비에트 연방 대(對) 영국,미국,프랑스와 같은 나라가 연합국이 되어 한치의 양보도 없이 피말리는 싸움이 이어져 갔다.히틀러가 유대인을 무차별 학살 자행했던 게슈타포 수용소를 시작으로 유대인의 씨말리기 작전은 쥐불놀이와 같이 번져만 갔다.참으로 골 깊은 상처와 후유증을 안긴 희대의 만행이다.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프랑스 군인이 포로가 되어 포로수용소(4년 8개월)에서 직접 체험했던 굶주림과 학대,불명예의 시간을 망각되기 전에 아들에게 구술 및 회고담으로 남긴 《포로수용소》는 그래픽노블의 전형(典型)으로 삼을 만하다.타르디 저자는 할아버지의 1차 세계대전의 경험담,그리고 아버지의 포로수용소의 생생한 경험담을 바탕으로 사실에 가깝도록 포로수용소의 실상을 재현하고 있다.군복무를 한 나는 이렇게 피말리는 생존의 한계를 경험하지 못해 그저 마음으로만 공감할 뿐이다.잿빛을 띤 어스름하고 괴기스러운 분위기의 포로수용소의 거리는 획일적인 바둑판 모양의 천막과 파놉티콘을 연상케 하는 감시탑,철조망,감시병은 포로병사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 넣었던 천형이었다.르네 타르디는 포로수용소 생활의 산증인이면서 전쟁이란 무엇이고 국가란 무엇인가를 냉엄하게 시사하고 있다.

 

 

 당시 독일은 주변 동유럽 국가들을 자기편으로 끌어 모아 세를 불려 나갔다.독일에 패한 프랑스 병사들을 강제 집결시켜 독일 트리에로 간 다음,발트해 연안의 포메라이아의 수용소에서 인간이하의 취급을 당했다고 한다.독일 제국은 포로수용소를 일반병과 장교,임시수용소로 분리하여 차별대우했는데,그 실상은 말로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이다.모포가 없어 짚더미에서 잠을 청해야 하고,몇 백 명의 음식을 여우 몇 마리를 잡아 떼우기도 했으니 얼마나 배가 고팠을까.노역은 죽도록 시키면서 먹는 것은 간에 기별도 가지 않은 판국이었으니,꾀를 낸 병사들은 화장실에서 취사용 도구와 식재료를 구해 허기를 채웠다고도 한다.더욱 황당한 것은 포로병들에게 커피를 제공하는 척 하면서 떡갈나무 잎이나 도토리를 끓여 내었다는 것으로 생색은 낼대로 낸 셈이다.감자캐기 한 바구니 당 담배 한 개피를 얻는데 이것이라도 받을려고 포로병들은 감자캐기 속도를 내었던 것이다.과연 인간의 조건은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수가 없다.

 

 

 

 르네 타르디 탈출을 감행하기 위해 철조망 아래를 파내려는 계획도 세웠지만 철통같은 감시망에 그저 상상으로만 끝나고 만다.동료 샤르도네는 '탈출을 시려하려던 자"라는 이어령비어령식의 보고로 숙소에서 무참히 사살당한다.다행히도 전황(戰況)은 연합국의 편이었는지 1945년 1월 29일 수용소를 떠나라는 명령과 함께 지긋지긋한 수용소를 뒤로 하게 되었던 것이다.포로수용병들에 대한 프랑스 정부가 독일 제국에 보인 무능력과 안주는 포로수용병들이 국가에 대한 신뢰와 떨어뜨렸을 것이다.르네 타르디는 패전국의 포로수용병으로서 삶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강인한 자세가 가상스러웠다.『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저자 빅터 프랭클가 말한 비극적 낙관주의로서 고통,죄책감,죽음에 직면했을 때 닥치는 모든 상황을 최대한 이용할 줄 아는 능력도 르네 타르디에게서 엿볼 수가 있다.르네 타르디는 작가인 아들에게 전쟁의 참상과 포로수용소에서 겪었던 실상을 후세들에게 남겨 전쟁이 주는 교훈을 잊지 않기를 원했을 것이다.개인이 전쟁을 겪은 뒤 안고 살아가야 할 트라우마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국가가 치료하고 보상해야 할 사안이다.이 글을 통해 국가와 전쟁이 갖는 의미와 후유증을 곰곰히 새겨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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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중궁궐 여인들 - 관능으로 천하를 지배한
시앙쓰 지음, 신종욱 옮김 / 미다스북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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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전설적인 왕조인 하,상,주 시대부터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기까지 중국은 군주제를 유지해 왔다.역사가 유구한 만큼 중국 역사 속에는 숨겨진 비사들이 셀 수 없을 정도이다.인과 충효사상을 강조했던 중국의 역대 군주들은 효의 핵심인 대(代)를 잇기 위해 황제 가문의 자손번성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그러한 까닭에 황제는 정실 부인인 황후를 비롯하여 비빈,후궁들을 상대로 성욕을 채우기 위해 정사를 즐겼다.이는 나라를 유지하기 위함이었고,어린 황제 및 태자에게도 결혼 적령기가 될 무렵 조기 성교육을 시키기도 했다.

 

 예와 인,충효를 중시하는 중국 황실에서 황제는 황후 하나만을 바라보고 백년해로했던 군주는 '가물에 콩나듯'했다.대부분의 황제들은 비빈,후궁들과 성행위를 즐기며 성욕에 대한 욕구불만을 채우기도 했다.1회성 만남과 은밀한 성행위도 있었지만,후처와 같이 애지중지하면서 사랑과 권력을 함께 나눠갔던 군주도 있다.반면 비빈,궁녀의 경우에는 가난한 집안환경에서 탈출하기 위해 궁녀로 들어와 궁궐의 의복,미용,춤과 무용을 익히면서 때가 되면 자신의 관능미를 발현하면서 황제의 시선을 사로잡고,사랑과 권력,금력을 차지하기도 했다.비빈,궁녀가 이렇게 황제의 총애를 받으며 무사하게 궁궐의 삶이 이어지고 신분상승이라는 권력과 명예까지 거머쥐었다면 다행이지만 요사스럽고 독살기가 있는 라이벌과 같은 숙적을 만나면 갖은 음모와 패악을 당하기도 했다.궁궐 여인들이 황제의 사랑과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투쟁은 생존경쟁에서 살아 남기 위한 몸부림이고 구중궁궐의 안주인이 되어 권력의 정점인 금과 옥새를 쥐고 싶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궁녀들의 삶을 그린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당시 군주는 다처제를 선호했고 그것이 당연시 되었던 시대여서인지 정비를 비롯하여 수많은 후비,궁녀들이 있었다.이러한 황실제도가 아마 중국 황실제도에서 넘어오지 않았나 싶다.아무튼 중국의 궁궐 여인들의 암투는 권력과 신분상승의 기회이기에 사생결단으로 일관했던 것이 확연하게 드러난다.중국 황제와 비빈,후궁들과의 농염한 성행위는 베이징 자금성 안에서 벌어졌다.경건하고 엄숙해야만 할 황실에서의 성행위는 일면 인간의 본능인 성욕을 채우는 수단이기도 하면서 비빈 및 후궁들에겐 황후의 자리를 노리기도 했다.몇 몇 황후들은 자신의 자리를 빼앗기는 비운을 맞이해야만 했다.연금(軟禁),폐위,자결이라는 절망의 나락으로 곤두박질치기도 했다.중국 황제들의 잠자리는 낱낱이 기록해야 한다고 하니 군주와 궁녀들과의 성행위 기록은 셀 수가 없을 정도이다.특이한 여인은 명 영락제를 홀리고 만 조선의 여인 권비였다.그리고 최고의 성애 안내서는 '용성음도(容成陰道)'이다.

 

 경국지색의 상징 양 귀비는,궁궐 남자들을 거느리며 권력을 즐겼던 측천무후,한 유방의 정비 여태후의 척 씨 부인에 대한 원한과 복수는 읽는 내내 흥미진진하기만 했다.참고로 중국의 4대 미녀는 서시,왕소군,초선,양 귀비이다.양 귀비는 훗날 배를 타고 일본으로 망명했다는 일화가 있고 양 귀비의 후손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도 나왔다고 한다.대가 셌던 여인들은 황제의 마음이 여리고 관대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나아가 중국 황제는 환관출신 가운데 마음에 드는 환관,미남들을 권력 유지를 위한 든든한 동반자 관계로 여기면서 남색을 즐기기도 했다.성 소수자 문제가 현대사회의 주요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는 마당에 중국  구궁궁궐의 황실에서는 일찍부터 동성애가 만연했던 것으로 보인다.가난하고 운명을 바꿀 자신이 없는,게으르고,망상에 빠지는 남정네들이 환관이 되기를 희망했다고 한다.환관들은 거세를 해도 성욕은 살아있기에 중년 이상이 되면 아내와 첩을 거느릴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된다고도 한다.황실에서 황제와 황후,태후,태자 등의 시중역할을 하면서 어느 정도 경륜이 쌓이면 부와 권력까지 차지한다는 장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철통같은 삼엄하고 흑막으로 가려진 자금성 안의 구중궁궐의 역사는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의 본무대이면서 대를 이어가고 성욕을 채우려 했던 군주와 황후,비빈,후궁들의 사랑,권력,신분상승,피로 얼룩진 암투의 연속은 마치 정글의 법칙을 연상케 했다.이 글이 시대별 궁궐의 비사를 서술한 것이 아닌 주제별로 서술한 점이 특징이다.또한 시대별 각국의 당시 상황과 숨겨진 비화까지 소개하고 일목요연하게 소개하고 있어 중국 궁궐의 비사에 대해 관심이 많은 독자에게는 중국 역사 속 인물과 시대별 상황까지 아우를 수가 있어 학습효과도 크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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