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의 여인 - 한일 역사기행
곽경 지음 / 어문학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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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는 인류의 죄악과 우행(愚行),그리고 불행의 기록이다. - 윈스턴 처칠

 

 개인이든 국가든 지나간 역사를 제대로 알고,역사를 교훈으로 삼아 잘못된 전철을 딛고 현재를 개혁과 변화를 이끌 수가 있고 미래의 일까지 예측하고 재단해 나갈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이것은 역사 학습과 개인적 경험이 토대가 되고 누적되면서 얻은 소중한 지혜라고 생각한다.그래서 지난 역사에 대해 객관적이고 냉철한 시각과 분석,통찰력이 균형을 잃게 되면 힘의 역학 관계에서 또 다시 과거 식민 시대와 같은 일이 되풀이 되지 말라는 법이 있겠는가.

 

 한.일 간의 관계는 굴절된 역사를 중심으로 소개,회자가 되고 있다.흔히 일본은 제국이고 한국은 식민지였다는 이분법이 주류가 되면서 가해자와 피해자 간의 사법적 결론이 아직도 나지 않은 엉거주춤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는 점이 안타깝기만 하다.양국 관계의 현재 및 전향적 미래를 위해 유익할 것이 없다는 것이 지배적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가해자인 일본 정부측의 잘못된 역사 인식과 식민 통치 및 2차 세계대전 등에 대해 전쟁 미화론이 일본 전국 방방곡곡에 깊게 세뇌 되었다는 것이 가공(加恐)할 만한 위협이 아니겠는가.과거 제국이었던 서방 제국(諸國)들은 식민 국가에 대해 정신적,물질적 위로,배상 등이 원만하게 이루어진 점에 비한다면 일본측이 한국을 비롯한 중국,동남아 제국에 저질렀던 온갖 만행은 현재까지도 풀리지 않은 실정이다.그것은 아마 일본 역사 속에 등장하는 사무라이(무사)들이 지녔던 충의 정신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닐까.피해자에게 사죄하고 항복할 바엔 차라리 할복(갓뿌쿠) 자살하는 것이 사무라이들의 정신이고 생존법이었던 것은 아닐런지.

 

 건축사인 곽경 저자는 과거 굴절된 한.일 역사의 원점(源点)을 찾아 나섰다.거의 1주간의 일본 여정을 누비면서 일본이 한.일 과거사를 어떻게 정립해 나갔는가,한국 침략사 및 식민 통치를 위한 만반의 준비 과정은 어느 계층에 의해 형성되었는가,그리고 제국주의가 종언을 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차여차하면 또 다시 군국주의의 부활을 5분 대기조마냥 기다리고 있는 것이 일본 정부의 속셈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속이 타들어 가는 것을 꾹 참아야 했다.일본 민족,문화는 루스 베네디트가 쓴 『국화와 칼』와 같이 양면성을 띠고 있다고 보면 된다.겉마음과 속마음 즉 혼네와 다테마에의 불일치성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곽경 저자의 일본 역사 탐방은 일본에 천자문을 전한 왕인 묘를 찾아 가는 것을 시작으로 에도시대의 탄생과 막부의 붕괴 그리고 메이지 유신을 기점으로 서구문물 도입,제국주의의 발흥,조선 병탄,2차 세계 대전과 일본인들의 귀환(인양) 기념관 등에 이르기까지 지난 한.일 역사의 굴곡과 비탄을 현장감 있게 들려 주고 있다.마침 이쓰코라는 일본 여인이 저자와 합류하게 되면서 과거 한.일 역사의 시작과 과정,그리고 마침표가 없는 불우한 관계를 몸과 마음으로 느끼게 한다.두 분은 영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고 겉으로는 화평의 분위기가 흐르지만 속마음은 어떠했을까.역사의 가해국과 피해국의 후세가 나누는 대화는 극히 단편적일 뿐이다.저자는 임진왜란,메이지 유신 탄생과 더불어 시작된 대외 팽창주의 및 제국주의는 결국 패전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한 조선 정벌이 메이지 유신 주역 중 하나인 사이고 다카모리에 의해 정한론으로 시작되는가 싶더니 메이지 유신 주역들 마음이 한통속은 아니었던 것 같다.사이고 다카모리는 세이난 전쟁을 일으켜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려고 하지만 결국 승산이 보이지 않자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한편 구한말 조선의 정정(政情)은 규율과 질서가 없었던 부패와 무능이 판치던 시절이었다.세도가들이 득실하고 개화파와 쇄국파들이 갈라지면서 조선,청,일본이 벌였던 청.일전쟁에서 일본은 러.일전쟁까지 승승장구하면서 조선을 한입에 꼴깍 삼키고 말았다.조선이 일본에게 속국이 되는 시점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인 을미사변(1895년 7월 23일)을 기점으로 삼는다.조선 정벌의 시점이 비록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기록되고 있지만 실제 일본인의 뇌리에 깊게 각인되고 있는 것은 신공황후가 삼한(신라,백제,고구려)를 정벌했다는 날조극부터 시작된다.중국의 유명한 고사 삼인성호(三人成虎)가 상기되는 바이다.일본이 왜곡,날조하고 있는 역사는 비단 신공황후의 삼한 정벌 뿐만이 아닌 셀 수 없이 많다.(고사기,일본서기 등)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정권인 에도 바쿠후 시대가 들어서게 되면서 300여 년 정도 일본은 평화의 시대를 맞이하지만,메이지 유신 정권이 들어설 무렵,일본은 서양의 대외 개방을 하면서 서구 문물의 적극 도입과 일반인들의 보통 교육 정책도 보편화한다.동시에 번(藩)을 폐하고 현(縣)을 두는 폐번치현 제도를 실시하고,류큐왕국(오키나와)까지 일본으로 강제 편입시킨다.특별하게 인상 깊은 점은 각료 및 군의 파벌이 초슈(야마구치현)와 사쓰마(가고시마) 출신이 대거 포진되어 있는 점이다.그외 히젠(사가현) 및 도사(고치현) 출신도 메이지 유신 탄생과 제국주의 시대 권력과 명예를 위해 결사적으로 나서게 되는데,대표적인 것이 정한론의 기수 사이고 다카모리와 죽마고우였던 오쿠보 도시미치의 내치론이 대립하면서 권력의 무정함을 실감케 했다.또 하나 현 일본 총리는 아베신조다.그의 외증조부격인 오시마 요시마사가 자행한 경복궁 습격,고종 체포,청.일 전쟁 진두지휘를 비롯하여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 및 그의 실제(實弟) 사토 에이사쿠(모두 총리 역임),친부 아베 신타로가 아베신조의 정치적 스승이고 정치적 DNA를 승계한 셈이다.아베신조를 제외한 그의 조상들의 본향이 야마구치현 하기(萩)와 나가토(長門)이다.그런 까닭인지 아베신조는 정치적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조상의 본향을 찾아 음덕을 기리는 것 같다.

 

 일본은 종전을 맞이하면서 식민 국가에서 생존권을 보장 받았던 자국민들의 귀환(인양)에 대해 대대적인 홍보를 하고 있다.하카타 인양 기념관을 비롯하여 유수의 인양 기념관을 눈여겨 보면 속에서 구토가 날 지경이다.식민국가에 대한 모욕은 기본일 뿐만 아니라 누가 전쟁의 가해자이고 피해자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이다.식민지에서 떵떵 거리며 살았던 일본인들,그들은 식민 국가인 조선인들을 만주 등으로 강제 이주 시키고(사민 정책이던가?) 그들은 일본 제국에 의해 토지 보상,상업권 등 생존이 확실하게 보장되었던 시절을 잊었던 말인가.일본 정부는 그들이 남루한 옷차림과 거짓꼴로 귀환하던 모습에 대해 일본 본토인의 동정과 연민을 사게 하려던 의도가 다분하다.

 

 곽경 저자와 함께 떠난 한.일 역사 탐방은 일본 제국이 한국에 가한 피의 역사를 다시 한 번 상기케 한다.비단 한.일 관계 뿐만 아닌 지난 중.일 역사,동남아와 일본 역사 속의 관계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특히 일본의 역사는 한국에게 전수,영향을 받은 것이 많다.그들의 민족의 기원도 한반도에서 넘어갔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한국에게 받은 문화,문물들을 하나 둘씩 제거해 가면서 일본화를 철저히 하고 있는 셈이다.이쯤에서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의 속내(혼네)를 정확하고 철저하게 인식하고 분석하여 다시는 한.일 간 피의 역사가 재발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특히 섬나라 근성에 대한 연구,분석도 시간이 되는대로 탐구해 나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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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민낯
신동윤 지음 / 어문학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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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정치 체제는 사회적 시장경제에 있다.일종의 중국식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셈인데,정치적 민주주의만 제외하고는 모든 분야가 대외적으로 개방이 되었을 정도로 과거 시장경제 이전의 모습과는 상전벽해일 정도로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룩하면서 돈과 물질을 숭배하는 사조가 개개인에게 깊게 자리 잡고 있다.특히 덩샤오핑은 흑묘백묘(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의미로 공산주의,사회주의를 떠나 인민을 위한 것이라면 모두 수용하겠다는 취지)론은 풍부한 노동력과 외자 유치,기술이전이 맞아 떨어지면서 중국 경제는 경이로울 정도의 결과치를 보여 주고 있다.19세기 이전 중국이 세계를 리드하던 시절로 되돌아 가는 듯한 역사의 순환(?)을 목도하게 된다.

 

 중국의 사회 현상을 매체(TV,인터넷.책자 등)를 통해 어느 정도 알게 되었지만,늘 반복되는 내용들이 많아 식상한 느낌이 없지 않았다.이것은 내가 접했던 내용들이 시대에 뒤지고 업그레이드가 되지 않은 내용들을 접한 소이도 있을 것이다.돈과 물질,욕망을 향해 달려 가는 중국 사회의 표피를 걷어내어 중국 사회의 신경망이 어떻게 조성되어 있는가를 바르게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은 한국정부 및 개인에게 매우 유익한 정보가 아닐 수가 없다.한국 제1의 수출 대국 중국,중국 역시 제3의 수출 대국이 한국으로서 명실 공히 경제적 파트너십을 유감없이 발휘해야 할 시기이다.게다가 한.중수교 20주년을 맞이하면서 한.중 FTA까지 발효되었으니 보다 밝고 상생의 단계를 끌어 올리기 위해 한.중 양국은 두 번 다시 없을 기회를 잘 발휘해 나가야 할 것이다.

 

 마오저뚱 사후 덩샤오핑의 시장 개방의 가속화는 연안 도시(1군 도시)를 비롯하여 중.서부 2,3군 도시에 이르기까지 산업화,도시화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신중국이 탄생하면서 마오저둥의 치세 기간에는 사장되었던 즉 마오의 사상과 체제에 반하는 것들이 시장 경제로 되돌아 서면서 부활을 하고 있다.문혁 당시 구시대물로 치부되었던 것(사상,문화,풍습,습관 등)들이 복고 열풍과 함께 중국 인민들의 마음 안으로 들어와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중국은 1가구 1자녀 정책을 고수하고 있기에 낳은 자녀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소황제,소공주식으로 부모의 관심과 격려,지원을 받는다.더욱이 대외개방이 이루어지면서 중국 사회에 서구 문화,문명도 침투하면서 중국 사회 전반이 자본주의 일색으로 바뀌었다.내가 20여 년 전에 중국 산동성 연안 도시를 다녀온 적이 있는데 당시 도시의 거리,중국 인민의 복장,언행,사고는 공산주의 색깔에서 완전 벗어나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중국 인민들의 개인의 생각과 경제적 관념,국가관 역시 획일적인 집단체제에서 사리사욕과 입신출세 등이 우세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이 시장 개방을 하면서 동부 연안 도시(14개)의 개인당 GDP는 어느 서방 국가 못지 않은 높은 소득을 보이고 있다.마오에 의해 단절되고 사장되었던 것들이 되살아 나면서 개인의 욕망은 어느때보다도 분출하고 있다.1자녀를 둔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녀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교육비 지원은 교육왕국인 한국 이상이면 이상이지 그 이하는 아닐 것이다.이와는 대조적으로 돈과 물질이라는 자본주의로 인해 인민들의 사고 관념이 개인주의로 흐르는 것을 완화하기 위해 죽었던 공자의 사상이 부활하고,입신출세,돈이 되는 것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또한 산업화,도시화가 덜 된 중국 중.서부 지역 사람들이 시장 개방이 잘 된 도회지로 밀려와 노동자(농민공)로 살아가지만 기존 사람들과의 소득 격차는 크게 벌어지고 있다.농민공들은 이중 신분을 유지하지만 도시인 신분으로 살아가기는 제도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다.흥미로운 점은 성에 대한 인식이 매우 개방적이라는 것이다.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슈퍼모델 선발대회,성형 수술,거리낌 없는 성생활 등이다.

 

 이렇게 시장 개방 정책에 따라 중국 현대사회의 모습이 바람직한 점도 있고 그렇지 않은 점도 있다.서구식 시장 개방이 광풍과 같이 밀여 오면서 중국인이 오랜 세월 지녔던 보수적이고 체제.이념적인 것들이 서구식 개인주의 사상과 혼돈을 빚으면서 근래에는 홍색 열풍이 다시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지역 경제 활성화,일당 지배의 정통성 강화,내부 불만 완충 등이 마오 시대의 체제를 다시 보여 주려는 것으로 풀이된다.중국이 시장 개방,높은 경제률 이면에 해결해야 할 문제들도 꽤 많이 있다.빈부 격차,환경,생태계,기후 온난화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모두에서 말했듯 현대 중국은 정치 민주화만 빼고 모든 분야가 서구식으로 변해 가고 있는데,그에 대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잘 순치시켜 나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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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 - 임진왜란부터 태평양전쟁까지 동아시아 오백년사 메디치 WEA 총서 4
김시덕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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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샌드위치 형태의 모습을 띠고 있다.한반도는 또한 이웃 주변국들과 정치,군사적인 관계를 놓고 역사 속에서 침략과 방어의 반복을 거듭해 오면서 국가의 명운이 달라져 왔다.현재 지정학적으로 보면 좌로는 중국 우로는 일본 그리고 위로는 러시아 및 북한이 에워싸고 있다.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국가의 존속을 위해 힘의 역학을 내세우면서 팽팽한 긴장감과 유화책으로 대응해 나가고 있다.

 

 이러한 각도에서 한.중.일 3국은 지정학적 위치와 힘의 역학을 교묘하게 활용하면서 외교노선,국가정책을 수행해 나가고 있다.해방후 정치 강대국에 의해 한반도는 반영구적으로 분단이 되면서 유례없는 사상.이념 논쟁과 분쟁이 끊이지 않는 비극의 시대가 언제 끝날지 예측불허에 놓여 있다.게다가 한.중.일의 과거,현재의 관계가 결코 우호적이고 상생의 관계는 결코 아니었고 아닌 만큼 한국의 존속을 위해 과거 씻을 수 없는 불행한 역사에 대해 사과와 배상 등을 받아내되 이것에 몰입된 듯한 정치.외교노선을 구사해서는 안될 것이다.한국의 미래가 지금보다 더 삶의 질이 높아지고 살기 좋은 나라로 거듭나기 위해 어떠한 정책노선과 현실적인 방안이 한국 풍토에 좋을 것인가를 더 염두에 두고 사회제도,시스템을 펼쳤으면 한다.

 

 한반도가 해양(일본,필리핀 등)세력과 대륙(중국,러시아,인도 등)과의 교역과 충돌,분쟁과 전쟁은 오래 되었다.이 도서가 말하는 해양 세력과 대륙과의 연계를 놓고 볼 때 대략 16세기부터 20세기 중반에 걸쳐 유라시아 동부 지역 국가들의 군사,외교 노선을 놓고 보는 것이 (맥락상)부합할 듯 하다.16세기 일본은 무사와 다이묘의 세력이 강했던 시대이면서 오다노부나가 장군이 정권을 휘두르고 있었고 도요토미히데요시는 그 휘하에서 실력을 쌓아 나갔다.그러한 가운데 오다노부나가 장군이 (혼노지에서) 살해되자 도요토미히데요시는 전국 통일을 이루고 조선을 거쳐 명을 정벌하겠다는 '정명가도'의 계획을 세우게 된다.이것이 발단이 되어 터진 것이 임진왜란이다.

 

 당시 명도 일본이 명을 치고자 한다는 음모를 알고 조.명 연합군을 결성하여 조선을 침공한 왜군들을 조.명군이 합세하여 전쟁을 치르지만 장장 7년에 걸친 소모적인 전쟁과 도요토미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임란은 종지부를 찍게 된다.임란이 발발하기 전 일본은 포르투갈,스페인 등으로부터 무역과 선교 목적으로 세계에 대한 안목을 넓혀 나간다.크리스트교 선교 목적은 일본에서 큰 소득은 없었지만 전쟁 무기 제조술은 큰 성과를 거두면서 임란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육.해.공을 종횡무진했던 것으로 보인다.반면 일본은 도요토미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도쿠가와이에야스가 에도막부 정권을 창출하는데 외부와의 교역,전쟁보다는 내치를 다지는데 주력을 했다.특이한 점은 일본이 서양과 교역을 하고 세계지리에 눈뜨게 되면서 생각한 것은 한반도,동남아시아,중국을 삼키려 했던 것이다.이것은 후일 '대동아공영권'과 일맥상통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은 명.청과의 관계 역시 순탄하지만은 않았다.역사,문화적 우월감을 띠고 자국에게 조공관계를 바랐던 명과 유교 사상 및 관료,붕당 정치의 부패로 피폐해진 조선의 사회상은 명과 청에 이끌려 가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그들이 하자고 하는데로 따라 가는 것이 최선이었을지 모른다.명이 멸망하고 누르하치에 의한 후금의 탄생부터 일제 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청은 조선을 종속관계로 삼았다.구한말 청일전쟁 역시 청은 조선 농민군의 봉기를 예단하려 했지만 재조선 영사 및 거류민 보호차원에서 가세한 일본과의 일전에서 패배하고 만다.일본은 청.일 전쟁을 계기로 제국주의 시대르를 맞이하는 계기가 된다.시대는 20세기 후반으로 가게 되면 중국이 만들어 놓은 해양 방어선인 제1도련(第一島链)과 제2도련(第二島链)이다.제1도련을 통과하여 이미 제2도련까지 진출한 상태이다.결국 제1도련 안에 한반도가 중국의 내해에 포섭되어 있다는 사실을 묵과해서는 안된다.

 

 

 

 

 17세기에 이르러 러시아는 캄차카,쿠릴 열도를 개발하게 되고 일본은 아이누족이 살고 있던 북해도,쿠릴 열도,사할린 등의 영토가 제2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실지(失地)가 되면서 러.일간의 영토 외교 분쟁은 생각나면 끄집어 내어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다.게다가 일본은 1905년 을미늑약으로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강제 병합시켜 한.일간 외교 분쟁의 불씨로 남아 있다.

 

 

 

 

 대륙과의 관계가 교역과 상생이라는 것보다는 대치,종속,전쟁 등으로 비화하면서 16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유라시아 동쪽 나라들은 태평성대를 구가하지를 못했다.군사,종교,이념적인 문제가 우선 순위가 되면서 교역과 상생 관계는 뒷전으로 밀리고 말았다.1500년대 일본 전국시대를 비롯하여 임진왜란,누르하치의 여진 통일,홍타이지의 대청국 건국,정묘.병자호란,청군의 산해관 돌파와 북경 함락까지 연쇄반응은 200여 년 지속되었다.중국의 정성공은 해양 세력으로 뻗어 나가는 계기를 마련하고 조선 역시 문순득에 의해 당시의 해양 문명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고,박연,하멜에 의해 해양외사를 파악할 수 있다.

 

 

 

 

 일본은 오오츠크해 영토 전쟁과 청.일 전쟁,사쓰마번에 의해 각각 홋카이도,타이완,오키나와 영토를 차지하게 되면서 제국주의 시대를 거듭해 나간다.1853년 페리 제독과 맺은 일본의 개국은 내향적인 에도막부 시대의 종언을 고하고 메이지 유신 시대,다이쇼,쇼와 시대를 이어 나간다.한편 청말 청의 사회 부패상은 이화단의 사건이 터지지만 서양 세력에 의해 고배를 맛보면서 굴욕(북경 의정서)을 맛보게 된다.한편 조선은 19세기 후반 불.미에 의한 개항 압력이 불발되지만 제국 세력을 증강시키던 일본에게 강제 불평등 개항을 하고,대외 개방에 미처 단단하게 준비를 하지 못한 조선은 우왕좌왕하다 일본에게 먹히고 만다.

 

 한국 입장에서는 유라시아 제국(諸國)과의 관계가 불명예,굴욕,상실의 연속이었지만 냉정하게 살펴 보면 국가를 이끌어 가는 위정자의 국가관,애국정신,사회 구성원 간의 위화감 정도,삶의 질 등에 의해 국가의 존속에 커다란 영향을 준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자발적으로 국토방위에 얼마나 나설까.사회 구성원의 생각과 의식은 최고치이기에 강요와 억압에 의한 정치 행사(行使)는 먹히지 않는 세상이다.16세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반도가 지정학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임은 부인할 수가 없지만,과거 인국(隣國)과의 껄끄러운 관계 형성을 벗어나 국력과 선린외교를 증강시켜 한반도가 세상을 이끌어 가는 세상이 도래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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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의 나라, 카자흐스탄
김정민 지음 / 글로벌콘텐츠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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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의 근본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은 정체성과 귀속성을 알아가는 심리적 본능일 것이다.생물학적으로는 부모의 결합에 의해 태어났지만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긍심을 갖기 위해서는 국가의 정체성을 아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본능이라고 생각한다.그러한 의미에서 한국인의 뿌리는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알아 가는 것은 실존에 있어 매우 의미있는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카자흐스탄'이라는 나라는 1980년대 후반 대학시절 스탈린이 사할린에 강제징용 및 거주하는 조선인들을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방면으로 강제이주 시키면서 당시 조선인들이 시베리아 열차에 실려 긴 시간 끝에 당착한 곳이 카자흐스탄 사막 지대라고 들었다.이주 과정상 열차에 몸을 실은 조선인들은 추위와 굶주림,질병으로 수많은 인명이 죽어 나갔다.나는 당시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이 담긴 일문을 한국어로 옮기는 작업을 했다.그 뒤로 카자흐스탄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두지 못했다.환웅과 웅녀 사이에 태어난 한민족 시조인 단군은 기원전 2333년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고조선을 세워 약 2천 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단군과 카자흐스탄은 어떠한 함수관계에 있는가에 대해 지적 호기심이 생겼다.

 

 

 김정민 저자는 단군의 나라가 카자흐스탄에서 비롯된다는 것과 관련하여 매우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유목민인 몽골족이 서역으로 이동하고 영토를 넓혀 가면서 몽골족과 카자흐족은 역사,혈연,언어,문화,생활습관 등에서 흡사한 점들이 많다는 것을 간접 체험하게 된다.카자흐족과 몽골족의 역사가 한국가 겹쳐지는 부분이 많은 것도 놀라운 점이기에 이번 기회에 시야를 넓혀 한민족의 기원.뿌리를 찾아가 보는 것은 어떨까 한다.나아가 중앙아시아를 비롯하여 멀리 동유럽과 러시아 등도 한국과 친연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이것은 유라시아 민족이 한국인과 혈연적으로 동질성이 있으며 가까운 동포라는 점에서 크게 주목되는 바이다.

 

 우랄-알타이 민족의 형성을 알아 보기 위해 홍수설화를 예로 들어 신화를 풀어 냈는데 매우 흥미롭기만 하다.누흐의 방주가 정착한 지역과 환국과의 관련 파미르 고원에 남은 환국,고조선의 흔적,쿤모왕 신화는 금와왕 신화일까를 비롯하여 북방 민족과 한민족은 동일한 기원을 두고 있다.훈족과 한민족은 동일 민족이고,부여는 늑대의 후예가 세운 나라이고,부여와 흉노는 같은 국가이고,중앙아시아 무사와 고구려 개마무사의 유사성 등을 통해 동질성을 느끼게 한다.나아가 흉노의 서천(西遷),스키타이(이란민족) 민족의 등장,카자흐어와 한국-한자어의 유사성이 언어의 음운학적인 면에서 관심을 갖게 한다.

 

 

 

 중앙아시아로 진출한 조선인들은 비단 중앙아시아에만 머물지 않고 우즈벡,헝가리,불가리아,크로아티아 등으로 진출한다.신화의 이미지 면에서는 북유럽의 신화와 유사한 면도 있고 유럽에 남아 있는 조선의 흔적,즉 알타이-투르크 민족을 중심으로 유럽 민족의 토속신앙과의 유사점 및 유사성은 꽤 흥미진진하기만 하다.슬라브족,켈트족,고대 그리스-로마 문명의 정체성은 무엇인가,동유럽 민족의 형성 등도 수수께끼와 같아 보이지만 알면 알수록 베일에 가려진 신비스러움이 단군의 나라인 조선과 매우 유사하여 동질성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그런데 역사학자 헤로도토스마저 스키타이 민족을 알타이-투르크계로 인정하고 있는데 스키타이 민족을 유럽-인도계로 분류하고 있는 것이다.이것은 서양인들이 아시아 흔적을 제거하려는 의도가 다분하다.일종의 배인 콤플렉스인 것이다.인도의 드라비다어족을 고립시키고 아리아인을 백인시 하는 이유 등 서양인들의 역사적,문화적 열등감을 힘으로 누르려 한다는 점에서 안타깝기만 하다.

 

 비록 수박 겉핥기 식으로 읽었지만 시간이 허락되면 꼼꼼하게 재독하려고 한다.인상 깊은 점이라면  김정민 저자는 한민족의 기원과 관련하여 세세하고 정확한 자료를 수집하여 통합.분석해 놓았다는 점에서 객관적이고 신뢰성이 간다.부차적으로 한국 사학계에서도 한민족의 기원과 관련하여 유라시아의 역사,문화,언어,혈연 등에 대해 연구를 한층 강화하고 범알타이적 역사관을 가진 공동역사서가 탄생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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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양사 편력 1 - 고대에서 근대까지
박상익 지음 / 푸른역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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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사에 대한 지식이 많지 않은 내게 재미와 유익함으로 가득찬 시간이 되어 다행스러웠다.연구논문과 같이 시대별,사회상황,통치체제 등으로 엮어져 있었더라면 재미와 유익함은 반감되었을 것이다.그런데 시대별 주요 이슈를 객관적이면서도 이해력을 돋구기 위해 현대 한국 정치,사회의 단면과 연관지어 놓은 점이 큰 특색이다.시대와 국적은 달라도 정치,사회의 속성,풍향계는 오십보백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인류가 동일하다는 고대를 시작으로 중세,근대 Ⅰ,Ⅱ,현대에 이르는 시기를 99개의 이슈를 발췌해 놓았다.박상익 저자는 존 밀턴과 관련하여 5개의 이슈를 별도로 추가하여 해설해 주고 있다.종교가 권력이 될 때,한국 지식인에게 과연 영혼은 있는가 라는 부분이 (약간)식상하지만 주목되는 부분이었다.세계사를 통해 서양의 역사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슈를 문제화하여 소개하고 있는 것은 내게는 신선한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었다.나치에 의해 유대인이 무참하게 홀로코스트 당하기 직전의 유대인들의 평화로운 일상의 모습을 보니 인간,인류의 운명이란 무엇인가를 되뇌이곤 했다.

 

 패자도 동화시킨 로마인의 정치적 지혜는 한국 사회를 되돌아 보는 계기가 되었다.한국 사회의 기회구조에 공평하게 참여하고 한국인으로서 소속삼을 갖게 하는 것은 사회 발전의 중요한 조건이고 원동력이다.특히 상생이 아쉬운 시대에서 한국 사회 구성원간의 관용과 배려는 절실한 부분이 아닐까 한다.남북 분단,지역 대립이 팽배한 한국 사회는 '이민족'에 대한 관용을 배워야만 한다.또 하나 '반달리즘'과 피맛골 부분을 읽으면서 문화와 유적을 파괴한다는 것은 반달리즘의 전형이고,개발의 명목하에 피맛골을 전면 헐어내고 현대적 상가로 탈바꿈한 것 역시 반달리즘이 보여 준 상징물이다.산업화,도시화 필요하기는 하지만 오래도록 보존하고 후세에게 물려 줄 유산은 전면 개조하지 않고 개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중세 시대는 교황과 영주가 사회를 지배하던 시기로서 사회적 다양한 영역은 어떠했을까.다행히도  종교.문학.건축.교육 방면의 문명이 활짝 꽃을 피웠던 시기였다.국민들의 생활 수준 향상,국민국가 수립,고등 교육 기관 형성,문학과 예술의 위대함을 증명했던 시기였던 것이다.눈길을 끄는 대목은 20세기 말 미국 케이블 방송이 서기 1000년에서 2000년까지 세계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 중 1위로 뽑힌 사람은 활판인쇄술의 선구자 구텐베르크였다.물론 구텐베르크보다 앞서 만든 직지(直指)는 더욱 자랑스러운 인쇄술이 아닐 수가 없다.

 

 루터의 종교개혁부터 근대로 분류하면서 근대 부분은 상당량의 이슈를 소개하고 있다.루이 14세가 전쟁과 건축에 몰두하여 프랑스 경제를 거덜 냈던 것을 MB 정부와 견주어 들려 주고 있다.국민의 혈세를 거둬 들여 인위적으로 만든 4대강 사업은 수미일관 문제 투성이였다.19세기 말 프랑스에서 거울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 여인들이 거울 앞에서 자신의 미적,심리적 부분을 드러내려 했던 부분이 인상 깊게 다가온다.《옥스퍼드 영어사전》제1권이 간행된 뒤 초판(전 10권)이 완성되기까지 44년이 걸렸다는 점,남녀가 평등 선거권을 획득하기까지 거의 1세기가 걸렸다는 점 등을 접하게 되었다.

 

 21세기 한국 사회는 겉으로는 풍요로운 사회이다.정치적 민주화가 이룩된 만큼 국민의 의식수준이 꽤 높다.그런데 저자가 말한 바와 같이 한국 사회는 감정과잉 사회,'패거리의 이익'을 위한 사회가 아닐까 한다.아무리 옳은 말도 '싸가지 없게'하면 용납하지 않으려 하고,합리적 설명을 들어도 '패거리의 이익'에 어긋나면 한사코 귀를 틀어막는 소통불능의 풍토이다.과연 한국 사회는 합리성.도덕성을 내면화한 '근대적 개인'은 요원한 것인가.이 글은 저자가 서양사의 주요 이슈들을 두루 섭렵한 시간 여행이었다.또한 우리의 현실을 비춰 주는 거울이 될 만한 서양사의 주요 장면들이면서 어떠한 삶을 영위해 가는 것이 후회없는 삶이 될 것인가를 깊게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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