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빛이 되는 말 한마디 - 희망과 사랑을 전하는 한줄 메시지
별글콘텐츠연구소 엮음 / 별글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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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삶은 입고 먹고 사는 세 가지 조건을 넘어 감정과 이성이라는 특별한 기제를 갖고 있다.감정과 이성이 학습과 경험을 통해 하나 둘씩 두뇌에 저장되기도 하고,기록으로 남겨 장기기억화 되기도 한다.나아가 잊지 않기 위해 남겨 놓은 기록물은 자신을 떠나 수많은 타자들에게 전해지면서 공유와 소통,토론과 교류의 장이 되는 인간만의 멋진 기제가 아닐 수가 없다.삶이 힘들고 팍팍해지면서 재미가 없을 때 나를 격려하고 위로해 주는 말 한마디는 힘은 들지만 삶은 나아가는 것이다 라는 것을 자각한다.

 

 살아간다는 인생길에는 누구에게나 크고 작고,높고 낮은 다종다양한 문제들이 눈앞에 놓여 있거나,그것을 예측하거나 예상치 못하는 경우가 있다.예상되는 문제,사안에 대해서는 미리 대비를 해놓고 예상치 못하는 경우에는 뛰어난 직관력으로 승부수를 띄울 필요도 있다.그만큼 인생이라는 것이 예행 연습없는 마라톤과 같기에 본능과 이성,직관의 힘을 발휘해야 한다.사안의 경중에 따라서는 혼자 풀어나갈 수 있는 것도 있겠지만,다수 내지 조직의 힘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다수가 해결해야 할 경우에는 서로가 공동체적인 힘을 발휘하면서 조직원의 재능과 역량도 충분히 고려해야 잡음과 소음이 없는 가운데 멋진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으리라 판단한다.

 

 그간 짧지만 긴 울림이 있는 명구,고사 등을 통해 삶의 거울이 밝고 넓어졌다는 생각을 한다.특히 한자문화권에 속해 있는 한국사회는 고래로부터 중국의 역사,문화의 영향을 깊게 받았다.그래서 한.중관계를 일의대수(一衣帶水)와 같은 관계라고도 하는 것이다.중국 춘추전국시대,삼국지,초한지,오대십국 등에서 수많은 인물들이 탄생하고 일화를 바탕으로 한 고사들이 많이 만들어졌다.이를 자신의 삶 속으로 접목시켜 살아가는 지혜와 화술,글쓰기 등에 매우 유용하기만 하다.그런데 이번 《내 인생의 빛이 되는 말 한마디》는 별글콘텐츠연구소에서 영문 명구를 발췌하여 희망과 사랑의 메시지를 듬뿍 전하고 있다.1년 365일이기에 하루 하나의 명구를 소화하면서 인생을 살아 가노라면 1년 후에는 지금보다는 몰라보게 변모한 자신을 발견할 수가 있으리라.또한 달라진 자신을 바라보는 이웃과 타자들의 시선 속에서 긍정과 행복을 전하는 열린 마음의 파수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운명처럼 웃음과 약혼했다.웃음소리는 언제나 세상에서 가장 세련된 음악으로 들린다.-헤브룩 엘리스

 

 

 나부터도 그러한데 한국인은 웃음이 많지가 않다.각박하고 치열한 경쟁 속에 살다보니 감성과 정서가 메말랐는지는 모르겠다.그런데 스스로 거울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웃는 연습을 되풀이 한다면 무표정과 한숨 섞인 인생타령은 사그라들지 않을까 한다.웃음은 돈이 필요없는 개인의 노력과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타인에게 선사할 수 있는 것이다.이웃 나라 일본을 몇 번 다녀왔는데 그들은 남.녀 모두가 미소를 생활화하고 있다.어릴 때부터 가정의 훈육과 사회적 학습도 큰 몫을 차지하겠지만 '웃는 얼굴에 침뱉는 법이 없다'는 말이 있듯 더욱 밝고 상생하는 사회를 만들어 가려면 화난 모습보다는 밝고 미소짓는 모습이 나와 너의 삶의 단단한 근육이 되어 주리라.

 

 그외 스티브잡스의 '여정 그 자체가 선물이다'와 모리스 슈발리에의 '많은 사람이 고독한 이유는 딱 한가지이다.다리를 놓는 대신 댐을 쌓기 때문이다'그리고 스티븐 코비의 '마지막 순간을 마음 속에 새긴 채 시작하라'는 명구가 특별하게 인상에 남는다.인간은 머물러 있는 존재가 아니다.태어나서 죽음에 이를 때까지 말 그대로 이동의 연속이다.그것을 여정이면서 더 나은 삶을 위한 도전과 본능의식이 아닐까 한다.또한 더불어 사는 삶이 해체되면서 개인주의,집단이기주의가 팽배하면서 개인은 스스로 외로움을 타면서 우울증,고독사 등 사회적 문제가 빈번하기만 하다.끝으로 일이든 삶이든 유한하기에 처음 시작할 때에는 마지막을 어떻게 장식해 나갈 것인가에 대해 심사숙고하면서 삶의 목표,일의 계획을 수립해야 할 것이다.

 

 이제는 이렇게 멋지고 가슴 울리는 명언들을 접했으니 실천할 일만 남았다.닫힌 마음을 열고 이웃을 만나면 먼저 미소로 인사하고,하는 일은 열과 성을 다해 매진할 것이며,내가 없는 사후세계를 생각하면서 나만의 인생 버킷리스트를 꾸며 나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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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없으면 내가 없습니다 - 정호승의 새벽편지
정호승 지음, 박항률 그림 / 해냄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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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사는 것이 후회없는 삶일까를 요즘따라 되뇌여 본다.길지도 짧지도 않은 인생살이 여정이 평탄한 길일 수만은 없기에 살다보면 수많은 갈등과 번민,욕망과 탐욕이 마음 속을 비집고 들어온다.이러한 어두운 그림자를 슬기롭게 이겨 나가야 삶의 보람과 가치를 마음으로 느낄텐데 어리석기 그지없는 인간이기에 오류와 실수의 반복이 지속되기도 한다.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내 손을 끌어주고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 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인생살이는 비록 고달플지라도 사랑하는 사람의 격려와 위무에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으리라.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고 내 앞에 놓여진 일과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려고 한다.나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생계와 해결해야 할 산적한 것들로 인해 몸부림을 치기를 다반사와 같이 되풀이하면서 인생의 나이테도 두터워져 가고 삶의 지혜와 성숙도가 높아져 갈 것이다.어려웠던 시절의 길이는 개인차가 나겠지만 그 어려움이라는 것은 경제적인 문제,인간관계,낮은 삶의 질로 인해 힘들어 하는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욕망과 탐욕이 문제라면 눈높이를 낮추고 분수에 맞게 살아가면 그만이다.타자의 시선과 타자와의 비교로 인해 정신적인 갈등과 스트레스,우울증이 높아진다면 삶의 질,정신적인 내면은 더욱 빈약해져가고 암울한 터널을 언제 통과할지 모른다.

 

 정호승시인의 에세이이면서 인생살이의 교훈을 읽노라니 세상은 비록 힘들지만 나 혼자가 아닌 타자와 사물과의 따뜻하고 든든한 애정과 사랑이 있기에 삶은 계속 이어지고 더욱 빛난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한다.작가의 시작(詩作)을 많이 접해보지 못했기에 작품의 세계 및 문체를 잘 알지 못하지만,이 글 속에는 작가의 다채로운 삶의 무늬가 녹아져 있다.한국전쟁 직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고 학창시절 및 생의 대부분을 제2의 고향인 서울에 적을 두고 있다.카톨릭신자이지만 타종교도 관대하게 포용하는 성숙한 면을 보여 주고 있다.글의 중간 중간 타작가 및 타작가와의 만남과 애정을 그리면서 동류의식을 드러내고 있다.더욱 마음을 후려치는 대목은 가족과의 따뜻하고 애정어린 모습이다.작가의 아들이 군입대,제대를 비롯하여 작고한 선친과의 생전 나누었던 부자간의 소풍과도 같던 인간적인 면모,그리고 생존해 계시는 노모에게 효를 다하기 위해 한지붕 밑에 기거하고 있다는 점이 따로따로 살려고 하는 요즘 세대에게 효의 일침을 주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바로 지금이고,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함께 있는 사람이며,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P16 톨스토이

 

 

삶의 길이는 유한하고 단 한 번뿐이다.비록 지금의 고통이 영원하지 않고 단지 소나기마냥 스치고 지나가는 시험물쯤이라고 짐짓 자신을 위무해 본다.작가가 말했듯이 지금의 고통은 팔팔 끓는 물에 삶아진 계란처럼 속이 단단해지느냐,아니면 푹 익은 감자와 같이 단단한 것이 유연하고 부드러워지는 탄력성 있는 존재로 거듭나느냐일 것이다.고통이 지나고 단단한 계란이 되고 부드러운 감자의 꼴로 변모하려면 나름대로 노력과 의지를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자신을 기만하지 않고 타인을 속이지 않는 정직하고 성실한 자세로 일관해 가면서 더불어 사는 삶을 모색하고 실천해야 세상이 더욱 사랑스럽고 밝아져 갈 것이다.한국사회는 지금 이념과 소득의 양극화,학연,지연 등으로 분열되어 있는 상황이다.사건.사고가 발생하면 누구도 총대를 매려고 하지 않는 비도덕적,양심 불감증이 만연해 있다.돈과 물질,명예와 권력이 높다한들 영원하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겠는가.지도자급에 있는 이들이 보다 더 힘없는 계층에게 애정과 사랑을 쏟아부어야 할 때이다.

 

 제4부로 나뉘어진 이 글은 수미일관 따뜻하고 애정어린 인간관계,천륜인 부모자식관계,사물을 의인화한 것들이 무미건조한 시간과 세월을 이어가는 내 마음을 일깨우고 있다.특히 작가의 아버님이 생전 비쩍비쩍 지팡이를 짚으시면서 현관까지 따라 나오면서 "힘 내거라"고 위로해 주셨다는 대목이 오늘따라 '찡'한 감동과 회한을 안겨 준다.오랜 기간 중풍,당뇨,폐렴으로 고생하시다 작고한 선친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재산도 많지 않고 학벌도 변변히 않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 평생 일만 하셨던 분이다.흠이 있다면 젊은 시절 밥보다는 술로 세월을 보내셨다는 점이다.몸관리는 건강할 때 해야 늙어서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여생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을 반면교사로 삼으련다.그러한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리고,아버지와 따뜻한 대화,인생살이 등에 대해 격의없이 대화를 나누지 못한 점 그리고 병석에 있을 때 손,발이라도 자주 주물러 드리지 못한 점 등이 후회스럽기만 하다.

 

 정호승작가의 삶의 얘기를 들으면서 삶을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누구의 눈치나 시선에 사로잡히지 않고 주체적인 인간으로 살아가야겠다는 것이다.그리고 내 곁에 있는 사람,챙겨야 할 대상에게 가식이 없는 진실하고 애정어린 마음을 담아 전해야겠다는 마음이 새삼 물결처럼 일렁였다.오늘따라 부모가 객지로 장사를 나가셔서 국민학교 입학식에 흰수염을 날리며 국민학교에 데려다 주셨던 흑백사진과도 같은 아련한 할아버지의 모습과 코흘리지 말라고 왼쪽 가슴에 헝겊명찰을 달고 토끼마냥 깡총깡총 국민학교를 향해 뜀박질을 하던 나와 할아버지의 진한 혈연이 애정과 사랑으로 승화되어 내 마음 깊은 곳에 각인되어 있는듯 할아버지,아버지의 사랑이 나를 이렇게 성장시켜 주었다고 새삼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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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언어 - 나는 왜 찍는가
이상엽 글.사진 / 북멘토(도서출판)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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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의 제목인 '최후의 언어' 보면서 연상이 된 것은 사람이 임종이 가까워지면서 유족들에게 전하는 유언으로 착각했다.그런데 글과 사진을 접하면서 내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경건하고 엄숙한 심상을 담아 기억과 기념으로 삼을 만한 한 컷의 멋진 피사체를 담으려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은 이상엽 사진작가는 '나는 왜 찍는가'를 주제로 삼아 이곳 저곳을 찾아 다녔던 흔적이 역력하다.어떠한 직종에 있든 프로정신으로 매진해야 살아 남는 세상이다.그도 그럴 것이 작가는 하늘아래 지구촌에 함께 사는 인류로서 힘없는 약자들의 모습을 동류의식을 담아 내고 있는 점이 무척 공감이 가고도 남았다.

 

 피사체는 비단 사람만이 아니다.역사,문화,사회부조리,기억에 남는 현장물 등을 담아 내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사진을 찍는 사진가는 피사체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숨을 고르고 마음을 정리한 후에 '이만 하면 멋진 작품이 될 수 있겠다'라는 판단이 섰을 때 셔터 소리마저도 소음으로 여기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셔터를 누르는 조준사격과 같은 것이다.이상엽작가가 선보인 작품들은 다채롭기만 하다.컬러 사진이 주종을 이루는 시대에서 굳이 흑백사진을 선보이면서 독자들에게 아련한 추억과 흩어진 기억의 편린들을 한 곳으로 응집하게 하는 인간적인 면모를 풍기고 있다.나 역시 지나간 과거의 추억과 기억들을 기록한 실제 사진은 전무하다시피해서 이번 도서 안에 등장하는 피사체들은 공감과 아픔,상처,자연순환 논리를 무의식 중에 온몸을 타고 돈다.

 

 해인사 지관스님의 다비식(茶毘式),고기리의 풍경,동막천의 자연습지,백령도 가는 길,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불편한 한.미.일 관계,국내정치 등을 찍은 살풍경,비정규직 노동자의 철탑농성,천안 독립기념관,고구려 광개토대왕 및 고국원왕의 왕릉,오녀산성의 모습,도시 재개발로 몸살을 앓는 중국의 비리덩어리 및 위생개혁 캠페인,실크로드가 시작되는 시안 주변의 모습,바이칼 호수의 자연생태계와 주변 풍경,명청시대 가장 흥했던 홍춘의 예스러운 모습,설악산과 금강산을 포개 놓은 듯한 황산의 절경,말라카 궁 화랑과 이슬람인들의 일상,영주댐 건설로 곧 수몰지역으로 변할 경북 영주의 내성천(乃城川)의 자연습지,새만금 건설 후 정부측의 이율배반정책,불러도 대답없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고통과 아픔,육체적,정신적으로 힘은 들지만 밝은 표정의 비정규직사람들의 모습이 차례대로 소개가 되고 있다.

 

 1864년 영국인 윌리엄 헨리 폭스 텔벗 의해 사진이 발명되고 양차대전에서 더욱 사진기 및 사진술이 발달되어 왔다.작가는 글을 전개하면서 자신이 최초 구입했던 사진기와 타사진기 등의 장단점과 기능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띄인다.옛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기는 어렵지만 재현하려고 하는 척 한다는 작가의 솔직한 멘트와 사진을 찍을 때 하는 일은 사물에 대한 해답을 찾는 작업이라고 윈 블록이 말한 부분도 크게 공감을 샀다.디카가 발달된 현대에서 전문사진가는 수동형 사진기를 즐겨 휴대한다고 한다.피사체를 정하고 포착하여 숨을 고르는 등 다소 느리지만 한 컷의 사진이 모든 사람들의 기억과 공감을 부여한다면 사진가에게는 그만한 보람과 가치가 어디 있겠는가.4월 중순경에 발생한 세월호 침몰 사건과 관련하여 작가는 일본 노작가 마루야마 겐치가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에서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국가란 누구의 것인가.독재국가는 물론,이상적인 민주주의 국가 역시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특정 소수의 것이다.더는 민주적일 수 없을 만큼 민주적인 국가라 하더라도 실제로 그 나라는 특정 소수의 사유물이거나 거의 사유화된 동산이며 부동산이다." -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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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평전
안도현 지음 / 다산책방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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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8년 월북작가 및 그들의 작품이 해금(解禁)되면서 월북작가에 대한 재평가 및 작품에 대한 소개가 줄을 잇고 있다.해방후 이념과 사상에 의해 남한에서 북한으로 넘어 갔다든지 남으로 내려 오고 싶어도 38선이 가로 막혀 내려 올 수 없었던 작가들도 있다.월북작가들은 주로 일제 강점기에 문인으로서 빛을 발휘하던 분들이고 작가와 작품에 따라서는 ~파(派) 및 계보가 형성되기도 했다.학창시절 국어 교과서에서는 소개가 되지 않아 모르고 지냈던 작가들의 삶과 작품에 대해 늦게나마 접할 수가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그중에 시인이면서 대동아전쟁으로 일본군에 징집을 피해 중국 신징(창춘)에서 해방 직전까지 은둔생활을 하고,해방이 되면서 소련에 의해 끊겨진 경의선으로 인해 더이상 남으로 내려 오지 못하고 북한에서 생의 후반기를 살다간 백석시인의 삶과 작품 세계를 안도현시인은 백석시인에 대해 집중 조명하고 있다.사회에서 배제된 소외되고 힘없는 계층들에 대한 연민의식을 잘 그리고 있는 안도현시인의 시는 백석시인의 시세계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만큼 백석시인에 대한 삶과 시세계에 대해 누구보다도 아낌없는 예찬을 펼쳐 놓고 있다.

 

 백석시인은 1912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1996년 양강도 삼수 관평리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평북 정주는 민족주의 성향이 짙은 고장으로 오산학교를 비롯하여 애국지사,사회인사를 많이 배출한 곳이다.조만식선생을 비롯하여 이승훈,함석헌선생,한경직 목사,시인 김억과 김소월,화가 이중섭 등이 오산학교 출신이면서 정주와 인연이 깊다.백석은 1930년 <조선일보> 신년현상문예에「그 모母와 아들」로 당선이 된다.1929년 광주학생의거에 영향을 받은 오산학교 학생들은 1930년 연초 학생들의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게 되는데,백석은 당시 <동아일보> 정주지국장을 하던 방응모의 지원하에 일본 아오야마학원 영어사범과에 입학을 하게 된다.일본 유학 중에 백석은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시를 탐독하면서 그를 정신적 스승으로 삼는다.그러면서 백석은 자신만의 시세계를 구축해 나가는데 주로 향토색이 짙은 고향의 산천과 추억을 그린 시가 주종을 이룬다.그는 조선일보 교정부에 입사를 하게 되고 백석,신현중,허준이 3인방을 형성하면서 청춘의 낭만을 만끽하게 된다.당시 백석은 박경련여인을 연모하다 보니 신문사 업무 일로 남해쪽을 탐방하다 박경련과의 만남을 갈구하지만 신현중에게 박경련을 빼앗기고 만다.박경련의 부모는 백석과 신현중의 집안과 신분을 비교하여 신현중에게 딸을 주었던 것 같다.

 

 백석이 시인으로서 전성기는 1935년부터 1941년까지 7년 동안이 된다고 한다.시집 《사슴을 발표하면서 격찬과 비판이 엇갈리지만 비판은 오히려 백석만의 시세계를 공고히 다져 나가는 계기가 된다.다니던 조선일보사를 사직하고 영어교사가 꿈이었던 백석은 함흥의 영생고보에 영어교사로 부임하는 한편 백석은 외국어에 관심이 많아 러시아어도 영어 못지 않은 수준으로 끌어 올린다.한참 피가 끓어 오르는 청춘시기에 연모하던 박경련마저 빼앗기는 꼴이 되니 상심이 컸지만,권번(券番)출신인 자야(김영한)와 가까워지면서 1년 정도의 동거생활을 하게 된다.1930년대 문인들이 하나 둘씩 소개가 되고 있는데,이미 알고 있는 작가도 있고 생소한 작가도 있다.모두(冒頭)에서도 말했듯 이념과 사상에 의해 분단된 상황에서 납북 인사 및 북한에 잔류한 작가들에 대해서는 반공을 국시로 삼았던 해방 이후부터 해금시기까지 꽁꽁 얼어붙은 동면의 시기였다.1930년대 백석은 여류 시인들과도 자주 어울린다.최정희,모윤숙,노천명이다.그러나 일제는 대동아공영권의 차원에서 조선의 젊은이들을 강제 징집을 하던 시절이라,백석은 결단코 일본군 앞잡이는 하지 않겠다는 각오하에 자야와의 단꿈을 잠시 접고 중국 신징(창춘)으로 몸을 옮긴다.그곳에서 대략 5년 정도를 보내게 되는데 시쓰기는 거의 접고 세관원과 같은 일을 하면서 해방이 될 날만을 기다린다.

 

 백석의 삶의 후반기라고 할 수 있는 북한 생활은 찬밥 신세와 별반 다름없다.월북한 작가들과의 모임 및 토론 등이 있었지만 백석은 러시아 문학 작품의 번역에 몰입한다.백석은 고리키의 작품에 심취했던 것으로 보이며,그가 남긴 동시는 고작 4편 정도이다.아동문학과 관련하여 백석만의 동시세계를 펼쳐 나가고자 했지만 북한에서의 글쓰기도 주체사상에 어긋난다는 명분하에 백석은 개마고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삼수갑산 관평리에서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농장(염소,양 키우기)일을 하게 된다.북한식 하방운동이 아닐 수가 없다.또한 남북 분단이 낳은 문학사의 비극이 아닐 수가 없다.서울에서 1년 정도 동거했던 자야(김영한)은 후일 산자락에 위치한 요정을 법정스님에게 시주하면서 요정은 길상사로 탈바꿈하게 된다.평범한 농민의 신분으로 돌아간 백석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작가였다.그는 친근한 평안도 방언과 토속적인 음식을 주재료로 시쓰기를 일관하고 있다.비록 평안도 방언이 주는 어감은 익숙하지는 않지만 백석시인이 생전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어린시절 자주 먹던 음식들이 그에게는 잊을 수 없는 기억과 추억으로 살아 있었을 것이다.나아가 그의 시세계는 백석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혼(魂)이 살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아울러 안도현작가는 백석의 삶과 작품을 평하려 최대한의 자료와 증언을 생생하게 되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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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의 시절 - 당신도 가끔 내 생각하시나요?
신철 글.그림 / 초록비책공방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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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는 잊지 못할 학예회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초등학교 1학년 때의 기억으로 돌아간다.남학생은 토끼와 같이 깡총깡총 뛰놀던 시절이었고,여학생은 나비와 같이 나폴나폴 날 듯한 잘닥말하면서 고사리와 같은 체구로 담임선생님의 인솔하에 학예회를 떠났다.초등학교에 입학하여 두 달 남짓 되었던 시기로 기억한다.포장이 되지 않은 신작로는 겨우 시내버스 한 대가 다닐 정도의 좁은 길로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졌다고 하는데,사람의 발길이라도 스치면 잔돌,먼지가 휘 일어나곤 했다.학교에서 학예회 장소까지의 거리는 대략 3키로 정도이고,무대는 히말라야시다가 소풍온 손님들을 넉넉한 마음으로 반겨주던 우거진 잔디밭이었다.

 

 숫기가 없어 부끄러움을 많이 타던 나는 어떻게 학예회 대상으로 뽑혔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짝은 같은 동네 여학생이었다.교감,교사,부모가 모인 자리에서 산토끼 반주에 맞춰 산토끼처럼 연기를 했다.경쾌한 풍금 소리에 맞춰 왼쪽,오른쪽으로 산토끼 뛰는 흉내를 내면서 짝인 여학생의 눈빛을 보는데 살짝 얼굴에 피어 오르는 미소가 수수하기만 했다.어린마음이었지만 내 짝에 대한 예쁜 얼굴과 순수함이 그대로 내 마음 속으로 번져 오는 듯 가슴이 눈이 녹고 땅이 풀리는 봄날의 햇살과 같이 따뜻하기만 했다.당시 짝의 집은 마을 중심에서 약간 떨어진 길가에 있었고,하꼬방이라는 간이 가게를 하고 있었다.나무로 된 미닫이 문을 열고 독과자,츄잉껌(초승달과 펭귄이 그려진 껌)를 산다든지 막걸리 심부름을 갈 때엔 으례 짝의 집으로 갔는데,가게는 짝의 할머니께서 보셨다.지금 생각하니 짝의 할머니는 배움이 많아서인지 세상 돌아가는 얘기부터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다식했다.막걸리를 술독 항아리에서 조롱박으로 퍼올려 양은 주전자에 담아 주시곤 했는데 가끔 내 짝은 내가 온 것을 눈치 채고 방문을 빼곰히 열고 살짝 웃으면서 나를 쳐다 보면서 "잘 가"라고 인사를 먼저 건네기도 했다.좁은 논 옆의 샛길과 탱자나무 과수원 울타리를 끼고 집으로 오는 날은 그렇게 기분이 상쾌할 수가 없었다.

 

 사실 학예회에서 내 짝이 되었던 같은 마을 친구는 붙어 다닐 정도로 친밀하지는 않았다.초.중학교가 남.녀공학이었기에 등교길에서 만난다든지 버스안에서 만났을 때 안부 인사와 신변 잡기와 같은 간단한 대화만 나누는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학예회에서 여자라는 이성과의 첫만남은 내게는 잊을 수가 없는 추억이다.굳이 짝을 만나려고 그 집을 기웃거리고 안달복달하지는 않았지만 수수한 단발머리와 절제할 줄 아는 말씨 그리고 살짝 미소를 전해 주는 그 모습이 내게는 봄날 산과 들에 피어나는 진달래,개나리 이상으로 화사하고 밝기만 하다.고등학교부터 면단위에서 도회지로 통학을 하게 되면서 자주 만나지를 못하고 짝의 할머니께서 작고하면서 짝은 어디론가 이사를 했다고 들었을 뿐이다.나 또한 잊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데,가끔 초등학교 동창회에 나가게 되면 중년이 되어 나타난 남자,여자 동창생들 속에서 그녀만은 나타나지를 않는 것이다.그녀의 부모,오빠,언니,남동생 모두 같은 마을에서 태어나고 성장해서인지 어린시절의 순수함과 온기 가득찬 이웃간의 나눔과 정이 그립기만 하다.어느 날인가 양복 입은 그녀의 아버지와 양산을 쓰고 치마,저고리를 입고 다정하게 길을 걷다 인사를 하게 되었는데,밝고 인자한 모습으로 나를 대해 준 그녀의 부모님의 인상이 그녀에게도 전해졌으리라.다음 동창회 때에는 여자 동창생을 통해서 연락처를 알아 보리라.

 

 시간과 세월의 무게 만큼 삶의 무게도 단단해져 가는 이 시절,순수의 시절을 떠올리다 보니 아련한 흑백사진 속을 들여다 보는 것과 같이 학예회에서 내 마음을 움직이게 했던 짝과 부모형제들은 모두 다 무사했으면 좋겠다.격의 없이 살았던 그 시절,엊그제와 같이 기억은 생생한데 우연히라도 길을 가다 그녀를 만나게 된다면 내겐 그만한 행운은 없으리라.시와 같이 길지 않은 문장이면서도 알록달록한 다양한 삽화와 함께 하는 추억의 순수함으로 돌아가는 시간은 내내 즐거운 상상과 지친 심신을 위로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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