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평전
안도현 지음 / 다산책방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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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8년 월북작가 및 그들의 작품이 해금(解禁)되면서 월북작가에 대한 재평가 및 작품에 대한 소개가 줄을 잇고 있다.해방후 이념과 사상에 의해 남한에서 북한으로 넘어 갔다든지 남으로 내려 오고 싶어도 38선이 가로 막혀 내려 올 수 없었던 작가들도 있다.월북작가들은 주로 일제 강점기에 문인으로서 빛을 발휘하던 분들이고 작가와 작품에 따라서는 ~파(派) 및 계보가 형성되기도 했다.학창시절 국어 교과서에서는 소개가 되지 않아 모르고 지냈던 작가들의 삶과 작품에 대해 늦게나마 접할 수가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그중에 시인이면서 대동아전쟁으로 일본군에 징집을 피해 중국 신징(창춘)에서 해방 직전까지 은둔생활을 하고,해방이 되면서 소련에 의해 끊겨진 경의선으로 인해 더이상 남으로 내려 오지 못하고 북한에서 생의 후반기를 살다간 백석시인의 삶과 작품 세계를 안도현시인은 백석시인에 대해 집중 조명하고 있다.사회에서 배제된 소외되고 힘없는 계층들에 대한 연민의식을 잘 그리고 있는 안도현시인의 시는 백석시인의 시세계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만큼 백석시인에 대한 삶과 시세계에 대해 누구보다도 아낌없는 예찬을 펼쳐 놓고 있다.

 

 백석시인은 1912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1996년 양강도 삼수 관평리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평북 정주는 민족주의 성향이 짙은 고장으로 오산학교를 비롯하여 애국지사,사회인사를 많이 배출한 곳이다.조만식선생을 비롯하여 이승훈,함석헌선생,한경직 목사,시인 김억과 김소월,화가 이중섭 등이 오산학교 출신이면서 정주와 인연이 깊다.백석은 1930년 <조선일보> 신년현상문예에「그 모母와 아들」로 당선이 된다.1929년 광주학생의거에 영향을 받은 오산학교 학생들은 1930년 연초 학생들의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게 되는데,백석은 당시 <동아일보> 정주지국장을 하던 방응모의 지원하에 일본 아오야마학원 영어사범과에 입학을 하게 된다.일본 유학 중에 백석은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시를 탐독하면서 그를 정신적 스승으로 삼는다.그러면서 백석은 자신만의 시세계를 구축해 나가는데 주로 향토색이 짙은 고향의 산천과 추억을 그린 시가 주종을 이룬다.그는 조선일보 교정부에 입사를 하게 되고 백석,신현중,허준이 3인방을 형성하면서 청춘의 낭만을 만끽하게 된다.당시 백석은 박경련여인을 연모하다 보니 신문사 업무 일로 남해쪽을 탐방하다 박경련과의 만남을 갈구하지만 신현중에게 박경련을 빼앗기고 만다.박경련의 부모는 백석과 신현중의 집안과 신분을 비교하여 신현중에게 딸을 주었던 것 같다.

 

 백석이 시인으로서 전성기는 1935년부터 1941년까지 7년 동안이 된다고 한다.시집 《사슴을 발표하면서 격찬과 비판이 엇갈리지만 비판은 오히려 백석만의 시세계를 공고히 다져 나가는 계기가 된다.다니던 조선일보사를 사직하고 영어교사가 꿈이었던 백석은 함흥의 영생고보에 영어교사로 부임하는 한편 백석은 외국어에 관심이 많아 러시아어도 영어 못지 않은 수준으로 끌어 올린다.한참 피가 끓어 오르는 청춘시기에 연모하던 박경련마저 빼앗기는 꼴이 되니 상심이 컸지만,권번(券番)출신인 자야(김영한)와 가까워지면서 1년 정도의 동거생활을 하게 된다.1930년대 문인들이 하나 둘씩 소개가 되고 있는데,이미 알고 있는 작가도 있고 생소한 작가도 있다.모두(冒頭)에서도 말했듯 이념과 사상에 의해 분단된 상황에서 납북 인사 및 북한에 잔류한 작가들에 대해서는 반공을 국시로 삼았던 해방 이후부터 해금시기까지 꽁꽁 얼어붙은 동면의 시기였다.1930년대 백석은 여류 시인들과도 자주 어울린다.최정희,모윤숙,노천명이다.그러나 일제는 대동아공영권의 차원에서 조선의 젊은이들을 강제 징집을 하던 시절이라,백석은 결단코 일본군 앞잡이는 하지 않겠다는 각오하에 자야와의 단꿈을 잠시 접고 중국 신징(창춘)으로 몸을 옮긴다.그곳에서 대략 5년 정도를 보내게 되는데 시쓰기는 거의 접고 세관원과 같은 일을 하면서 해방이 될 날만을 기다린다.

 

 백석의 삶의 후반기라고 할 수 있는 북한 생활은 찬밥 신세와 별반 다름없다.월북한 작가들과의 모임 및 토론 등이 있었지만 백석은 러시아 문학 작품의 번역에 몰입한다.백석은 고리키의 작품에 심취했던 것으로 보이며,그가 남긴 동시는 고작 4편 정도이다.아동문학과 관련하여 백석만의 동시세계를 펼쳐 나가고자 했지만 북한에서의 글쓰기도 주체사상에 어긋난다는 명분하에 백석은 개마고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삼수갑산 관평리에서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농장(염소,양 키우기)일을 하게 된다.북한식 하방운동이 아닐 수가 없다.또한 남북 분단이 낳은 문학사의 비극이 아닐 수가 없다.서울에서 1년 정도 동거했던 자야(김영한)은 후일 산자락에 위치한 요정을 법정스님에게 시주하면서 요정은 길상사로 탈바꿈하게 된다.평범한 농민의 신분으로 돌아간 백석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작가였다.그는 친근한 평안도 방언과 토속적인 음식을 주재료로 시쓰기를 일관하고 있다.비록 평안도 방언이 주는 어감은 익숙하지는 않지만 백석시인이 생전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어린시절 자주 먹던 음식들이 그에게는 잊을 수 없는 기억과 추억으로 살아 있었을 것이다.나아가 그의 시세계는 백석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혼(魂)이 살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아울러 안도현작가는 백석의 삶과 작품을 평하려 최대한의 자료와 증언을 생생하게 되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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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의 시절 - 당신도 가끔 내 생각하시나요?
신철 글.그림 / 초록비책공방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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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는 잊지 못할 학예회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초등학교 1학년 때의 기억으로 돌아간다.남학생은 토끼와 같이 깡총깡총 뛰놀던 시절이었고,여학생은 나비와 같이 나폴나폴 날 듯한 잘닥말하면서 고사리와 같은 체구로 담임선생님의 인솔하에 학예회를 떠났다.초등학교에 입학하여 두 달 남짓 되었던 시기로 기억한다.포장이 되지 않은 신작로는 겨우 시내버스 한 대가 다닐 정도의 좁은 길로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졌다고 하는데,사람의 발길이라도 스치면 잔돌,먼지가 휘 일어나곤 했다.학교에서 학예회 장소까지의 거리는 대략 3키로 정도이고,무대는 히말라야시다가 소풍온 손님들을 넉넉한 마음으로 반겨주던 우거진 잔디밭이었다.

 

 숫기가 없어 부끄러움을 많이 타던 나는 어떻게 학예회 대상으로 뽑혔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짝은 같은 동네 여학생이었다.교감,교사,부모가 모인 자리에서 산토끼 반주에 맞춰 산토끼처럼 연기를 했다.경쾌한 풍금 소리에 맞춰 왼쪽,오른쪽으로 산토끼 뛰는 흉내를 내면서 짝인 여학생의 눈빛을 보는데 살짝 얼굴에 피어 오르는 미소가 수수하기만 했다.어린마음이었지만 내 짝에 대한 예쁜 얼굴과 순수함이 그대로 내 마음 속으로 번져 오는 듯 가슴이 눈이 녹고 땅이 풀리는 봄날의 햇살과 같이 따뜻하기만 했다.당시 짝의 집은 마을 중심에서 약간 떨어진 길가에 있었고,하꼬방이라는 간이 가게를 하고 있었다.나무로 된 미닫이 문을 열고 독과자,츄잉껌(초승달과 펭귄이 그려진 껌)를 산다든지 막걸리 심부름을 갈 때엔 으례 짝의 집으로 갔는데,가게는 짝의 할머니께서 보셨다.지금 생각하니 짝의 할머니는 배움이 많아서인지 세상 돌아가는 얘기부터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다식했다.막걸리를 술독 항아리에서 조롱박으로 퍼올려 양은 주전자에 담아 주시곤 했는데 가끔 내 짝은 내가 온 것을 눈치 채고 방문을 빼곰히 열고 살짝 웃으면서 나를 쳐다 보면서 "잘 가"라고 인사를 먼저 건네기도 했다.좁은 논 옆의 샛길과 탱자나무 과수원 울타리를 끼고 집으로 오는 날은 그렇게 기분이 상쾌할 수가 없었다.

 

 사실 학예회에서 내 짝이 되었던 같은 마을 친구는 붙어 다닐 정도로 친밀하지는 않았다.초.중학교가 남.녀공학이었기에 등교길에서 만난다든지 버스안에서 만났을 때 안부 인사와 신변 잡기와 같은 간단한 대화만 나누는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학예회에서 여자라는 이성과의 첫만남은 내게는 잊을 수가 없는 추억이다.굳이 짝을 만나려고 그 집을 기웃거리고 안달복달하지는 않았지만 수수한 단발머리와 절제할 줄 아는 말씨 그리고 살짝 미소를 전해 주는 그 모습이 내게는 봄날 산과 들에 피어나는 진달래,개나리 이상으로 화사하고 밝기만 하다.고등학교부터 면단위에서 도회지로 통학을 하게 되면서 자주 만나지를 못하고 짝의 할머니께서 작고하면서 짝은 어디론가 이사를 했다고 들었을 뿐이다.나 또한 잊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데,가끔 초등학교 동창회에 나가게 되면 중년이 되어 나타난 남자,여자 동창생들 속에서 그녀만은 나타나지를 않는 것이다.그녀의 부모,오빠,언니,남동생 모두 같은 마을에서 태어나고 성장해서인지 어린시절의 순수함과 온기 가득찬 이웃간의 나눔과 정이 그립기만 하다.어느 날인가 양복 입은 그녀의 아버지와 양산을 쓰고 치마,저고리를 입고 다정하게 길을 걷다 인사를 하게 되었는데,밝고 인자한 모습으로 나를 대해 준 그녀의 부모님의 인상이 그녀에게도 전해졌으리라.다음 동창회 때에는 여자 동창생을 통해서 연락처를 알아 보리라.

 

 시간과 세월의 무게 만큼 삶의 무게도 단단해져 가는 이 시절,순수의 시절을 떠올리다 보니 아련한 흑백사진 속을 들여다 보는 것과 같이 학예회에서 내 마음을 움직이게 했던 짝과 부모형제들은 모두 다 무사했으면 좋겠다.격의 없이 살았던 그 시절,엊그제와 같이 기억은 생생한데 우연히라도 길을 가다 그녀를 만나게 된다면 내겐 그만한 행운은 없으리라.시와 같이 길지 않은 문장이면서도 알록달록한 다양한 삽화와 함께 하는 추억의 순수함으로 돌아가는 시간은 내내 즐거운 상상과 지친 심신을 위로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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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정오에서 세상을 바라보다
서태옥 글.사진 / 초록비책공방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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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나이에서 3으로 나누니 어느덧 오후 5시에 가까워오고 있다.누가 자신의 나이에서 3으로 나누면 하루어느 시간대인지 감을 잡았는지는 모르지만 나이라는 나이테는 쉼없이 달려 가고만 있기에 때로는 서글프기도 하고 때로는 지나가 버린 시간대를 고요한 마음으로 되돌아 본다.가장 시간이 흐르지 않았던 때는 역시 부모의 슬하에 있었던 시기였다는 생각이 들고,직장생활,결혼,출산,육아,집장만,경제위기 등을 지나오면서 탱탱했던 마음의 근육도 순간 순간 물에 불린 콩껍질과 같이 쭈글쭈글해 간다.정령 내 나이는 인생의 정오를 이미 지나버렸지만 젊은이들의 인생의 시간대보다는 풍부한 경험과 문제해결 능력 그리고 나만의 삶의 목적이 내 마음을 요동치고 있기에 나는 이 시간대에 함몰되어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보다 나은 삶을 위해 긍정의 힘과 에너지를 불살라 가고 싶다.

 

 오후 5시대의 내 인생은 오랜 시간 양조장에서 숨죽이고 살아 온 와인과 같이 내 삶의 깊은 맛과 향기를 있는 그대로 전해 주고 싶다.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가정사로 인해 몸과 마음이 많이 지치고 속병까지 있지만 사람도 만나고 책도 읽으며 산책을 꾸준히 하면서 이 시간대가 내 인생에서 값진 교훈이고 경험이었노라고 언젠가는 말할 날이 있을거야 라고 스스로 위로를 하고 있다.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이웃이라도 먼저 인사를 나누면서 보다 적극적인 내가 되려고 노력한다.애완견을 데리고 짙게 드리워진 오솔길을 걷고 있는 아주머니의 동물사랑도 보기가 좋고 버스를 타려 허겁지겁 뛰다 하이힐이 삐걱하여 넘어진 아주머니를 일으켜 세워주는 젊은 청년의 모습도 보기가 좋다.예전에는 무관심으로 일색했던 내가 이제는 사람에 대해 보다 관심과 애정을 갖게 되었는가 싶을 정도로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는 내가 어떻게 먼저 다가서느냐에 따라 사회의 모습도 달라질 것이라는 믿음이 강렬하기만 하다.

 

 우리는 모두가 수직상승형의 사회구조에서 살고 있다.아마 역사상 가장 치열하고 각박한 경쟁의 시대에 살고 있지는 않을까 싶다.정직하고 성실하게 사는 사람은 바보 취급 당하기 쉽고,영악하고 기회를 잘 포착하는 사람은 신분적 상승,경제적 여유를 만끽하고 있다.이것을 타자와 비교하려고 들면 몸과 마음은 더욱 초조와 불안감으로 황폐해져 가고 자신이 원하던 삶과는 더욱 멀어지게 된다.인생의 나이 오후 5시대를 향하고 있는 나는 돈과 물질은 좀 여유가 없어 풍족하지는 못해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꾸준히 즐기면서 해 나가고 싶다.아직은 확실하게 뭐라고 얘기할 수는 없지만 삶의 후반부는 지금보다는 일도 즐겁고 삶의 질도 높아지기를 바라마지 않는다.내 생활 가치관에 요행은 바라지 않기에 내 피와 땀의 결과치만은 받아 가면서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누리고 싶다.

 

 삶에 힘을 실어 주는 글과 생각,사진들로 아로 새겨진 이 글은 고단하게 살아 가는 우리 이웃들의 삶을 위무해 주는 글 모음집이다.그리 화려하지도 않지만 그리 낯설지도 않은 풍경들과 짤막짤막한 글들이 삶의 잠언(箴言)과 같고 시(詩)와도 같게 다가온다.누구나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을 기점으로 죽음의 종국으로 치닫고 있다.죽음을 의식하여 죽음의 중력에 끌려 가는 삶이 아닌 보다 더 멋진 삶을 구가하면서 오래도록 삶의 방식에 머무르려는 강렬한 삶의 의지와 자세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한다.인생의 시간대가 새벽이든 정오든 초저녁이든 한밤중이든 자신의 마음자세가 어떠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 이 글을 읽으면서 수미일관 느끼는 바이다.나를 위로해 주는 인생의 잠언을 만나게 되어 참으로 마음이 비상이라도 할 듯 깃털과 같이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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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내게 무엇을 묻더라도 - 더 깊고 강한, 아름다운 당신을 위한 마음의 당부
김미라 지음 / 쌤앤파커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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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엄벙덤벙 나이만 들어 가고 해 놓은 일이 없으니 자식들에게 무엇을 남겨 줄 것인가를 생각하면 자괴감이 많이 든다.의학과 과학수준이 발달하여 수명이 늘었다고는 하지만 중년의 나이가 되니 이제는 오르막길을 오르는 일보다는 산 정상에서 서서히 하산하는 노정에 있는 것이 틀림없다.이것은 자연의 섭리이고 규율이며 순명이라는 생각마저 든다.영겁에 견주어 보면 인생은 찰나와 같다고 했는데 태어나면서 받은 축복을 값지고 의미있게 살아 가는 것만이 받은 축복에 대한 답례라는 생각마저 드는 것이 요즘 나의 심상이다.

 

 '삶'이 어느 시대든 각박하고 치열했던 것은 변함이 없을 것이지만 오늘날과 같이 돈과 물질에 찌들려 살아야만 하는 시대는 목을 조이는 것과 같이 답답함마저 들게 한다.아무리 재주와 능력이 있어도 치고 올라오는 신진세대들에게 자리를 물려 주어야 하고,구조조정이라는 옥쇄가 한참 일할 가장(家長)들을 밖으로 내몰고 있는 상황이니 언제 지치고 상처난 마음을 치유하고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할 여유가 있을까.가늘고 길게 늘어진 외길을 느리게 걷기도 하고 뜀박질처럼 질주하기도 하기만 했지 햇빛 드는 베란다를 앞에 두고 가족이 오붓하게 도란도란 얘기를 나눈다든지,몇 일만이라도 만사를 망각하려 어디론가 힐링 여행이라도 다녀 왔던가.지난 올 시간과 세월의 조각 조각을 커다란 프레임에 시간대별로 맞춰 놓고 마음으로 그때 그날을 돌이켜 보면 '영원히 그대로 멈춰 있을 것만 같았던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구나'라고 쓸쓸한 미소가 양입술을 꿈틀거리게 한다.생각해 보면 인생은 거꾸로 퇴행하는 것이 아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는 진리를 새삼 깨닫게 되니 봉두난발과 같은 어수선한 마음을 다잡아 즐겁고 행복된 날들을 그리며 살아가야겠다는 다짐이 새삼 일어난다.

 

 '별이 빛나는 밤'의 작가로 널리 알려진 김미라작가의 이번 글은 내 어깨에 묵직한 납덩어리를 잠시나마 내려 놓아주고 있는 힐링이 듬뿍 담긴 글모음집이다.1990년대 자취하던 시절,회사 동료들과 회식이 끝나고 택시를 타고 귀가하면서 들려 오던 '별이 빛나는 밤'의 배경음악은 하루 동안 회사일에 시달리고 지친 몸과 마음을 쿠션 있는 소파에 눕혀 주는 역할을 했다.음악과 함께 사연까지 듣다 보면 밤하늘에 하얀 꽃가루와 같이 온 우주를 하얗게 수를 놓고 잠든 이들에게 살포시 내려 와 도닥도닥 위로를 해주기라도 하듯 밤공기는 차가웠지만 하늘은 그렇게도 따뜻한 어머니 품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었다.

 

 셀 수도 없이 수많은 삶의 편린들을 한 땀 한 땀 수놓은 자수와 같이 아름답고 정교하며 섬세한 글들이 지친 내마음을 녹여 준다.김미라작가는 방송 30여 년을 오직 외줄기로 뚜벅뚜벅 걸어온 방송계의 멋진 전령사가 아닌가 싶다.깊고 웅숭한 연륜과 경험이 고스란히 꾸밈없이 들여 오는 것 같다.젊은이들에게는 용기를 주고 나이 든 분들에게는 위로를 건네 주는 따뜻하고 담백한 글들이 거짓과 과장,몰염치와 부패로 얼룩진 세상이 맑고 고요한 명경지수의 상태로 변화되어 갔으면 하는 바램이다.정말 주옥과 같고 그대로 따라하고 싶은 글귀들이 너무나 많다.욕망,탐욕,거짓,기만,포장된 이중인격 등이 세찬 물살에 모두 씻겨 내려갔으면 한다.

 

 세월이 갈수록 멀리해야 할 것들.

 따뜻함 없는 인연,욕심으로 가득한 마음 창고,넘치는 감상,감당할 수 없는 열정,차가운 미소,과장하는 버릇,참견하려는 습관. -P40

 

 또한 마음 사용설명서는 김미라작가만의 위트와 센스가 충일하기만 하다.고통은 10개월 무이자 할부를 활용하고,감동은 일시불로 구입할 것.사랑은 30년 만기 국채를 그리고 우정은 연금처럼 납입하고,행복은 언제든 입출금이 가능한 통장에 넣어둘 것을 권함.이렇게 하려면 부족하고 또 부족한 나는 할 일이 많다.잊었던 친구를 다시 찾아 잘린 우정에 새순이 돋도록 내 마음의 진심을 변함없이 퍼주어야 할 것이고,내가 무관심했던 가족과 지인들의 아픔을 동정과 연민으로 위무하고,내일 내가 이 세상을 떠난다 라는 심정으로 오늘을 열정과 성실로 살아 가노라 라고 각오를 해 본다.여린 존재에서는 내 마음을 울리고 말았다.세상에서 가장 강한 아버지,세상에서 가장 인내심 깊은 어머니는 이제 한 분은 작고하고,한 분만 남으셨다.강한 것 같으면서도 세월과 함께 이제는 여리고 약해진 모습으로 계신다.잘 해 드리고 싶고 보답하고 싶어도 뜻대로 되지 않은 심정이 오늘따라 두 눈가를 뜨겁게 적시운다.그중에 가종 소중한 삶의 덕목은 사랑의 법칙이 아닐까 한다.그 사람이 원할 때,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그 사람이 원하는 방식대로 주어라.사랑에 필요한 법칙은 이것뿐이다.사랑의 관계는 주고 받는 것이 최고이지만 줄 때는 받지 않을 것을 생각하고,멀리 있어 더욱 그립고 소중하다고 느껴지는 관계가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사회라는 거친 바다에 진입한 청년들은 비록 세태가 교과서와 같은 규칙과 공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좋은 전철만 밟고 지나가기를 바란다.우주의 주인공은 바로 자신이기에 이리 저리 휩쓸리고 방황하다 보면 시간은 어느덧 다른 사람 곁에 서 있다.자신의 삶다운 삶을 꾸려 나가기 위해서 삶의 목적을 분명히 세우고 한 발 한 발 딛고 우뚝 서려는 뚝심과 의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청년기에 몸과 마음으로 축적한 경험들은 장.노년기에 이르러서 멋진 추억이 되고 행복의 거름이 되어 주리라 생각을 한다.나도 그렇게 하려고 마음은 굴뚝같다.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시간과 영혼,바람과 함께 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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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장하는 PD와의 대화 방송문화진흥총서 140
홍경수 지음 / 사람in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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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이 살아 온 길을 누군가와의 대화를 나누고 못다한 사연을 고백하는 시간은 본인에게는 성찰의 시간이 될 것이고,다가오는 미래를 위한 디딤돌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우리말에 '팔방미인(八方美人)'이라는 말이 있다.모든 방면에 재주와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는 의미이다.반면 '한 우물을 파라'는 말도 있다.나에게는 전자의 말이 꽤 다방면에 능력을 갖추고 있어 사회에 크게 보탬이 되고,자신의 삶의 질을 고양시켜 줄 수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어 사회초년기에는 팔방미인이라는 말이 크게 와 닿았는데,나이가 들어가면서 '한 우물을 파라'는 말이 더욱 현실적이고 전문적인 인재로 평가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생각해 보면 다방면에 능숙한 사람은 학문의 깊이가 결여될 수도 있으며,전문적인 능력을 갖춘 사람은 편협과 오류를 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글로벌,국제화시대이면서 시시각각 쏟아져 나오는 정보처리,지식의 축적,균형과 조화를 이룬 시각과 관점을 갖춰 나가려면 아무래도 자신이 하고 있는 분야는 물론이고 관련된 학문까지는 두루 학습하고 되새기면서 적기에 자신의 의견과 주의(主意)를 관철해 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한다.

 

 피디(PD)출신으로 피디 주제로 학위를 받은 서울대 박사 1호인 홍경수저자는 한국 PD계에서 내놓으라 할 만한 인지도와 사회에 끼친 영향도를 감안하여 7인의 PD를 모시고 그들의 PD생활의 이력과 소회,그리고 포부 등을 대화 형식으로 펼쳐 나가고 있다.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말까지는 다큐멘터리 및 《PD수첩》 등을 자주 청취하기도 했다.PD와 관련 있는 학과가 신문방송학과이다 보니 일명 신방과 친구들이 방송계로 진출하는 것을 보면서 가끔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방송.언론계에 발을 디디려면 영어,국어,상식 세 과목과 면접만 잘 치루면 들어갈 수가 있었는데,성적도 좋아야 하겠지만 성격이 외향적이고 직관력과 판단력,사람 사귀기에 능한 성격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어,방송계통은 잠시 백일몽으로 끝나 버렸다.

 

 이 글에 등장하고 있는 PD들은 이미 익숙한 존재도 있고,생소한 분도 있다.모두 여전히 제작 현장을 떠나지 않은 현역이면서 이미 자신의 역사를 이룩한 장인과 같은 존재들이다.짧게는 10여 년부터 길게는 40여 년 가까이 연예,오락,드라마,영화 분야에서 사명감을 갖고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분들이다.아울러 PD 개개인의 삶에 직조되어진 한국 TV 방송의 역사이고,한국 방송 구조의 현 단계이며,대중적 영상 제작의 미래에 대한 하나의 가늠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홍성수저자는 PD의 개인적인 스타일,창의력에 대한 통제,사회적 책임과 영향력으로 질문과 대답을 통해 PD의 제작 과정과 프로듀서의 문화적 의미를 파헤치고자 시도하고 있다.

 

 '피디는 TV 프로덕션을 책임지는 사람'이다.피디는 일하는 기강을 세우며 기준을 강제한다.이상적으로 피디는 창의적인 팀의 대표로서 행정과 예산을 고려하는 사업가이면서도 예술가이며,스태프들의 재능을 고양시키며 프로젝트이 비젼을 제공한다. -P17 레스 브라운(Les Brown)

 

 

 지독한 외로움,신문과 라디오를 탐닉한 것이 창의력의 원천이 되었다는 주철환 PD는 《퀴즈 아카데미》로 잘 알려진 PD이다.그는 마음을 움직이고 훔치는 재주를 가져야 한다고 역설한다.또한 언어적 마술사일 정도로 언어감각이 탁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격을 파(破)하라》를 통해 알게 된 송창의 PD는 뽀뽀뽀를 비롯하여 다양한 연예 오락 프로그램을 진두지취한 분으로서,고정관념을 깨고 새롭고 흥미롭고 공감을 주는 프로그램의 바탕에는 인문학이 깃들어 있어야 하고,일터에 임하는 자세는 설렘과 후배들에게 막힌 곳을 뚫어 주는 기공사(技工士)라고 소신을 밝히고 있다.《PD수첩》에 자주 출연했던 최승호 PD는 MB정부로부터 탄압을 받은 분으로서,사회의 부조리를 다룬 프로그램을 많이 탐사하고 제작했다.그는 탐사저널리즘의 본질을 "큰 권력을 갖고 있는 개인이나 집단이 숨기려고 하는 진실을 파헤쳐 사회구성원에게 알리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그리고 인상적인 부분은 이명박대통령이 퇴임하고 논현동 자택으로 들어간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그는 기민하게 자연인 이명박과 단단히 마음 먹은 인터뷰를 한다."4대강 수심 6미터 비밀,대통령께서 지시하셨습니까?"그랬더니 "어"하고 말았다고 한다.

 

 한류의 역사를 다시 쓴 윤석호 PD는 《가을동화》,《가을연가》의 제작자로 잘 알려져 있다.상상력과 창의력은 자유에서 생겨나고,PD는 자신이 갖고 있는 이미지의 선과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밝힌다.또한 스토리텔이의 효과를 감성적 커뮤니케이션으로 포장해서 관객들에게 흡수가 더 잘 되게 하는 자신만의 신선 같은 것들이 포함된 작품을 구상하고 있다.어린 시절부터 주체적인 행동과 빠른 판단력,추리소설의 탐독이 연출 스타일에 영향을 주었다고 하는 이영돈 PD는 던져주고 풀고 반전,그리고 결론이 특징이며 러시아 항공모함 취재 중 KGB에 잡힌 사연도 소개하고 있다.그리고 시청자의 팽팽한 호기심과 몰입을 유도하기 위해 직접 스태프와 같이 행동하는 모습도 그의 주특기라고 할 수가 있다.TV 음악 프로그램 계보를 이룩한 박해선 PD는 시인이기도 하다.자연과 바다를 벗삼아 성장한 그는 감수성을 키우면서 《열린 음악회》를 비롯하여 심야 음악 토크쇼를 제작하기도 했다.피디는 자신이 본 것을 시청자와 교감하는 몽상가라고 정의하고 있다.현재는 프리랜서 피디로서 세계에서 가장 많은 드라마를 제작한 장본인 이병훈 PD는 44년의 드라마 제작의 관록을 보유하고 있다.《대장금》,《상도》,《마의》 등이 대성공을 거두고,현재는 《대장금 2》를 진지하게 구상하고 있는 중이다.그는 어린시절부터 책벌레로 불릴 만큼 독서는 그의 분신일 정도라고 한다.다양하고 오랜 독서이력이 드라마 제작에 크게 도움을 주었으며,이는 논리력과 상상력의 원천이 되고 있다고 밝힌다.

 

 어떠한 분에에서든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식지 않은 열정과 창의력,간절함으로 똘똘 뭉쳐져 있다면 시간의 문제일 뿐 성공의 열매는 보장받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비록 가는 길이 험하고 힘들어 자포자기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지라도 마음을 추스려 초심을 잃지 않으려는 의지와 자세가 매우 소중하다는 것을 새삼 일깨워 준 계기가 되었다.또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은 반드시 자신의 잠재력과 가능성,그리고 인내와 기다림을 잊지 말아야겠다.타인의 삶을 통해 내 자신의 삶을 견주어 보고 타산지석으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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