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분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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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분’은 어떠할 때 일어날까?라는 명제가 뇌리 속을 한참이나 떠나질 못하고 뱅글뱅글 맴돌았다.내 뜻대로 하지 못하고 억지로 누군가의 지시나 강요에 의해 질질 끌려 간다는 내키지 않은 비자발적 복종의 상태나 심리적 반항감이 울분이지 않을까를 생각해 본다.또한 내가 이 세상에 살면서 수많은 사람들과 접촉하고 대화를 나누며 의견이 좁혀 지지 않을 때도 별 수 없이 체제에 따르고 조직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기에 따를 수 밖에 없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저자 필립 로스와 글의 주인공 마커스는 1930년대 초반생이다.동시대를 살고 느끼며 공감을 자아내려 했던 저자는 마커스의 삶의 단면을 촘촘하면서도 한 인간의 심리적 내면을 타자와의 관계를 통하여 서술하려 했음을 깨닫게 된다.둘의 공통점이라 하면 유대인의 피가 흐른다는 점이다.당시 얼마 지나지 않아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독일의 히틀러는 홀로코스트라는 대명목으로 유대인을 청소하였는데 작가는 아마도 당시 미국 사회에서 존경받지 못하고 눈에 가시로 여겨지던 유대인의 단면을 보여주려 하지 않았나도 생각이 든다.

 마커스는 아버지 형제들이 정육점을 하는 푸주간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며 아버지의 잔심부름 내지 가끔은 닭의 똥구멍을 후벼 파면서 내장까지 손으로 적출하는등 궂은 일도 습관화하지만 나이가 들고 사춘기에 접어 들면서 정육점에서 벗어나 술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한다.그곳에 들르는 손님들이 대부분 마커스 또래들이어 자연스레 이성을 알게 되고 2차 성징이 오면서 눈이 맞은 상대 올리비아와 영원히 함께 할거 같은 섹스를 즐기기도 하는 마커스는 학구열이 높아 아버지가 사는 고향에서 멀찌기 떨어진 대학에 입학을 하게 되면서 문제의 울분을 가슴에 담게 된다.

 마음의 평정과 학습의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기숙사 방을 두 차례 옮기면서 학장에게 그는 찍히게 되고 면담을 하게 되는데 방을 자주 옮기는 이유는 룸 메이트들의 관계가 껄끄럽고 이기적인 발상이라는 이유로 강제 퇴학 및 군 징집을 당할 거라고 훈시를 듣는다.그리고 당시 한국 전쟁의 와중이기에 한반도로 이동하여 유엔군의 일원으로 싸우다 전사할 수도 있음을 암시하게 된다.과연 그는 퇴학,군징집으로 인한 전사의 그늘까지 머리 속에 드리워지게 되고 그의 성기를 애무해준 올리비아는 어떻게 된일인지 자살 기도까지 하게 된다.

 마커스는 러셀의 종교관 특히 신에 대한 개념을 철저하게 믿지 않았나 싶다.신이라는 개념 자체가 자유로운 인간에게는 가치가 없는 것이라는 것을.또한 20대 초반의 젊은 남학생들의 얄궂은 장난과 광분이 섞인 ’와인스버그대학의 하얀 팬티 습격 사건’과 채플에도 정기적으로 참석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마커스는 한반도의 한국 전쟁에 끌려 가고 한반도에 휴전이 성립될 무렵 차갑고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가게 된다.

 누구나 자신의 의지와 뜻대로 살 수는 없는 법이겠지만 마커스는 어쩌면 솔직하고 똑똑한 아이로 모난 돌로 학과장에게 비춰지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며 엎친데 덮친 격으로 ’하얀 팬티 습격 사건’과 명확하진 않지만 교내에서 보이지 않은 따돌림을 당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든다.그는 부모가  사이가 좋지 않고 칼질을 밥벌이로 하는 정육점의 가업을 잇는다는 생각은 마커스에겐 심적으로 부담이고 허락을 하지 않았을 것이어 자신이 학업에 매진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과 동시에 사회의 기둥이 되고 싶었던 마커스만의 자유인을 꿈꾸었을지 모른다.

 세상 일이란 어떻게 살고 처세하여야 인간다운 대접과 삶을 영위할 수가 있을지를 고민해 보는 시간이 되었다.저자 필립 로스 역시 유대인으로서 유대인의 청춘 시절을 마커스라는 인물을 내세워 저자가 보고 느끼고 있으리라 여겨지는 개연성을 통하여 마커스의 자유 의지와 선택이 설 자리가 없는 사회 체제에 맞춰 살아가야만 하는 약한 인간의 단면을 뭉클하게 그려낸 것으로 평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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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 Ⅱ
돈 드릴로 지음, 유정완 옮김 / 창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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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의 현대 4대 작가 알려진 돈 드리로의 '마오 2'를 읽으면서 무한 독재의 권력과 종교가가 얼마나 민중을 수탈하고 배타적이며 우상화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으며 그 수족들 역시 얼마만큼 추종하며 콩고물이라도 더 얻어 챙기려고 하는지를 암시적으로 알게 되었다.이러한 가운데 양심적인 지식인,글을 쓰는 작가들은 그들의 행태와 비사를 적나라하게 민중들에게 알릴 권리가 있고 알아 내야 하는 여정을 서사적이고도 치밀하게 보여준 점에 크게 고무되었다.

 통일교회 문선명의 무니즘,중국 공산 혁명의 주역 마오쩌뚱의 마오이즘,이란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등이 이를 여실히 말해 주고 있다.스콧,캐런,브리타,빌등이 신도,사진작가,소설가로서 이 글을 엮어가고 들려주고 있다.합동 결혼식과 원리 연구회로 잘 알려진 문선명의 통일 교회,마오쩌뚱식에 의한 중국 인민에 의한 공산주의 혁명의 여정,호메이니의 이슬람 교도들의 열렬한 우상화등이 빌이라는 작가와 브리타라는 사진작가,통일교 신도였다가 빠져 나온 캐런등이 일정한 장소에서 대화를 나누고 가치관을 공유하며 현대 사회의 광신적이고 폭압적인 배타적인 종교가들과 정치 권력의 부패를 소재로 글을 쓰는 것에 앙심을 품고 작가와 문학과 지성인에 대한 탄압을 계기로 주인공 빌은 지식인의 설 자리가 과연 무엇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그만의 가치관,열정,고집을 피력해 나간다.

 해방전 북한에서 태어난 문선명은 신의 계시를 받고 모든 사람들을 하느님의 사랑 속에서 하나의 우주 원리 안에서 함께 나아간다는 통일교 원리 안에서 신도들은 그들 자유 의사에 의하여 선남선녀가 결혼을 하지 않고 문선명 교주가 맺어준 사람들끼리 혼인을 맺고 바로 둘만의 보금자리를 갖는 것 또한 불허한다고 한다.식후 40일간은 통일교 원리에 따라 따로 떨어져 살면서 세상을 더 넓게 보고 삶을 깨우친 다음 그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해로(?)의 기약을 지켜야 한다.다만 캐런처럼 통일교의 비인간적이고 혹독한 교리와 실천이 생리에 맞지 않았는지 도중에 뛰쳐 나오게 되며 이러한 실상을 주위 지인들에게 알리고 세상에 풍자하게 됨을 알게 된다.

 못 먹고 못 사는 중국 인민 해방을 위하여 사회주의 원리에 입각한 공산 혁명은 중국 인민들에게 환영을 받았지만 그는 근시안적이고 시행착오적인 역사의 궤적이 증명하고 있듯 1950년대 후반 약진 운동으로 인해 인민은 더욱 궁핍해지고 관료들의 부패와 해서패관 사건이 모태가 된 문화 대혁명으로 인한 수많은 지주,지식인,반체제 인사들이 하방운동에 의해 좌천되고 피를 흘리며 중국의 발전을 몇 십년이나 지체시킨 장본인이 마오쩌뚱이라고 볼 수 있다.하지만 그들은 '마오쩌뚱 어록'을 성경 말씀이나 삶의 지침서마냥 외우고 암송하는등 그야말로 마오쩌뚱은 죽어서도 신격화되어 숭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다만 마오쩌뚱은 중국 인민의 메시아로서의 주석으로서의 이미지를 확고히 하기 위해 사진을 이용했는데 그가 갑자기 죽었다는 허위 보도를 통한 인민들의 반응을 철저하게 이용했음을 알게 된다.그리고 조만간 그의 복귀를 알리고,활력을 과시하고,혁명을 고양시키기 위해 사진을 이용했던 것이다.작가 빌 역시 위장된 사망으로 주위 사람들과 그를 아는 지인들에게 애간장을 타게 하고 더 깊숙히 은신처로 숨어 들어갔던 것이며 그것은 사진을 이용함으로써 죽음과 부활이라는 순환을 고안해 냈던 것이다.

 글을 쓰는 작가든 르포든 사진작가든 허구를 자신 속에 세계를 축소시켜 넣고,또 다른 허구는 사회질서 위에 펼쳐지기 위해 사회질서를 향하여 밀고 나아감을 알게 되고 작가란 의식을 드러내고 의미의 흐름을 증가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인물을 창조한다고 말할 수도 있음을 알게 된다.

 앤디 워홀 팝아트에서 따온 마오 2를 읽으면서 자본주의의 그늘에 드리워진 광신적이고 배타적인 종교가와 신도들의 행태,이념과 체제를 굳건하게 하기 위해 일사분란하게 이루어져 가는 신격화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현대 권력가들의 폭압과 탄압 속에서 양심과 지식인이 과연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를 시사적으로 보여 주는 독창적이고 지적이며 통찰력이 풍부함을 느끼게 해 준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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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에
유순하 지음 / 문이당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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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에’를 읽으면서 우리 사회의 가부장적 권위의식과 막힌 소통,중간자적 교통정리,부모.형제간의 짙은 불화의식을 숨이 막히도록 절감했고, 주인공의 아버지에 대한 연민의식과 혈육의 정을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다.멍에란 수레나 쟁기를 끌기 위해 마소의 목에 얹는 구부러진 막대의 사전적 의미와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구속 억압을 나타내는 말로서 이 글의 주인공 초로의 가장은 90자리에 있는 봉건적이고 권위적이며 폭압적인 전제군주의 모습을 그린 아버지이다.사리에 어둡고 자신의 비위에 거슬리는 언행에는 가차없이 아내,아들들을 인정사정없이 완력으로 휘두르며 집안의 분위기를 일시에 먹구름으로 만들어 놓는 현대판 고수이다.

주인공은 정년을 앞둔 중등학교 교사로서 학교와 배식업체간의 금전적 비리에 맞서다 힘없이 퇴직하게 되고 집안에 나앉게 되며 백수생활을 하게 되는데 집안의 헝클어진 분위기와 자신의 나약한 심경과 입장을 고백체로 컴퓨터에 파일로 저장해 놓은 것을 자신이 출타중일 때 대학에 시간강사로 있는 며느리가 몰래 훔쳐 보면서 이 이야기는 전개가 되고 집안의 모든 면모가 백일하에 드러나게 된다.

90을 내다보는 아버지,어머니를 모시고 살게 되지만 주인공은 2남 2녀의 형제중에 차남으로서 형이 부모를 모셔야하지만 어찌 된일인지 그가 맡게 되고,유년,청년,장년내내 아버지는 걸핏하면 폭행,폭언으로 일삼는데,중국의 순임금의 아버지,고수가 생각이 났다.매사 자신의 뜻과 비위에 맞지 않을때는 나이,지위를 막론하고 손,발로 폭행을 휘두르며 일순 평지풍파를 일으키게 되는 어리석음과 눈이 먼 노인으로 둔갑하게 된다.둘째 아들 집에 붙박혀 살게 된 이유는 작은 며느리의 음식솜씨가 아버지의 입맛에 맞아서라는 얘기를 읽으면서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또한 그의 어머지는 노쇠한 몸이었건만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90남편의 손지검에 의해 얼굴에 상처를 안기도 했고 돌아가시고 난 뒤에다 마누라가 불쌍하다는 생각을 뒤늦게 깨달은 것같다.

형제간에 불화가 있고 만남이나 대화도 원활하지 않은 집안은 어찌보면 권위주의적이고 폭군과 같은 늙은 아버지의 잘못된 가정교육과 정체성에서 기인한 것같다.마치 늙어 죽는날까지 가족들을 안하무인으로 일관하고 사랑채에 틀어박혀 며느리의 밥상챙기기,비위맞추기,딸자식들과 모종의 속닥대기등을 감지할 수 있었고,사단의 발생은 거의가 사소한 것에서 비롯됨을 알게 되었는데,아버지는 죽기전에 작은 며느리 앞으로 통장을 넘겨 주기로 했는데,어찌된 일인지 며느리가 시아버지 재산이 탐이 나서 통장을 빼앗아 간걸로 법원에 각각 원고,피고로 소장이 날라 왔을 때에는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종국에는 마음이 풀려 고소를 취하하게 되지만...그럴때 시어머니는 중간에서 가정을 위해 참고 또 참으라고 신신당부하지만 사람인지라 주인공과 며느리는 패륜을 저지르고라도 아버지를 패서 나쁜 버릇을 고치려 하지만,막상 그 순간이 오면 인간의 착한 본성으로 돌아가게 되는데,솔로몬의 지혜를 빌리고 싶은 마음이 내내 일어났다.

시어머니도 결국 화장을 해서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고 주인공은 자신이 살아온 날,현재의 삶 속에서 눈에 거슬리는 아버지,형제와 제대로 아버지,남편으로서 역할을 못해 상실감과 자괴심을 앉고 불현듯 막다른 골목으로 치달으며 자살이라는 운명을 생각하게 되는데...그래도 함께 할 가족,부모형제의 질긴 끄나풀은 버릴 수가 없었나보다.그간 2주간의 잠행끝에 집으로 돌아오고,남겨진 아버지는 중풍으로 쓰러져 자식들의 병간호를 받으며 예전보다는 마음이 누그러지고 원수같이 지내던 형제들도 조금씩 좋은 방향으로 변해가게 됨을 느끼게 되었다.

누구나 가정의 환경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이 글에서처럼 폐쇄적이고 주먹이 앞서는 가정이라면 가슴이 막히고 힘이 들어서 한시도 살 수가 없을것이다.요즘 세대가 이러한 글을 읽을까라는 생각이 들지만 아직도 눈이 멀고 사리에 어두우며 자신만이 한 가정의 막강한 가장이라는 잘못된 인성과 습성을 갖고 있는 집안이 있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며,한 집안을 이끌어가는 가족구성원이 제일 힘이 들겠고 참고 견디며 살아가는 것은 어쩌면 가족이라는 운명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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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밖의 길 - 유순하 장편소설
유순하 지음 / 책세상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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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밖의 길’이 주는 이미지는 단순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뭔가 독자들에게 여운과 사념을 품게 해 주는 묘한 끌림이 있어,이 글이 꽤나 부피가 나가지만 짬을 내어 독서를 하는 내게는 주요 등장인물 3~4명이 이끌어가는 심적 고민,갈등,방황등을 작가는 로망과 서사,생명의 소중함등을 일깨워 주는 휴먼소설로서는 오래도록 내 가슴 속에 반향과 울림이 있을거 같다.

이 글에 등장하는 주인공 변(卞)씨,일본인 후미꼬(文子)씨,프랑스인 존씨등이 여행길에서 만나 마음의 친구가 되어 주고,같이 동행하면서 서로의 관심사와 끌림을 멋지게 맺어가는 여정을 읽으면서,조그만한 울타리 속에서만 살아오고 있는 내게도 또 다른 세계,여행의 묘미,길에서 만나 속으로만 애태우던 뜨거운 욕망이 사실혼으로 이어지기도 하면서 내면에 잠자고 있던 원초적 본능마저 살아나는 듯이 주인공들과 함께 길 여행길에 동참하는듯 몰입해 가고 있었다.

변씨,후미꼬씨,미스터 존 모두 하나씩 큼지막한 사연을 안고,그 아픈 사연을 떨쳐 버리기라도 하고 싶었던지 그들은 선진국들이 자랑하는 멋진 명소,문화시설을 돌아보는 여정이 아니라,그 옛날 역사와 문화유적을 자랑하는,개화가 덜 되어 있는 곳이지만 그래도 사람의 냄새가 풍겨오는 곳을 저자는 알차게 소개를 하고,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나 주위의 여건,풍물등을 아낌없이 보여 주고 있어 살아있는 현장감과 역사의 한 페이지를 읽어 가는 데에 커다란 매력을 안겨 주었던 거같다.

변씨 남편은 화가로서 출품한 작품이 반체제(1980년대) 색깔을 띤다고 해서 갖은 수모를 당하면서 자살을 택하고,후미꼬씨는 연예인으로서 잘 나가던 남편이 유명 가수와 신접살림을 차리면서 이혼의 상처를 안게 되고,미스터 존은 어머니가 집시족이고 집시족으로는 행세하기 어렵고  멸시받는 프랑스에서 어머니마저 여의자 홀로 남겨진 자신은 강도라는 범죄를 안고  입옥을 하게 되지만 감옥 안에서 썼던 글이 좋은 평가를 받자 곧 출옥을 하고 받은 인지세로,이 3명은 카트만두,캘커타등지에서 조우하게 된다.

풍광이 멋진 네팔의 카트만두,흙먼지,소음,굶어 죽어가는 빈민이 3천만명이 넘는다는 인도,문화와 예술의 도시 파리,그리고 안데스의 마추픽추의 잉카유적,칠레의 산티아고,마지막 여정처인 이스터 섬등이 하나의 파노라마로 각인되어 가며,이들이 만나고 헤어지며 또 다시 우연 아닌 우연으로 재회하게 되는 장면에서는 ’사람은 살아있고 마음 속에 만나고 싶은 마음이 살아 있다면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는 인연설이 내내 머리 속에 뿌듯하게 자리잡아 감을 느꼈다.

특히 변씨는 자신이 집시족이라는 불우한 환경과 열등의식인지는 몰라도 말수도 적지만 착한 분이라는 것을 많이 느꼈다.인도 캘커타에는 테레사수녀를 기리고 죽음을  목적에 있는 환자분들을 구제하는 구제원이 있는데 변씨와 존은 이곳에서 만나 인간적인 면과 그들의 상처를 위로하고 씻어 줄 수 있으리라는 긍정적인 인연의 싹이 트여 가면서 다음 여정지인 마추픽추에서 재회하면서 속에 있는 진심을 토로해 나간다.또한 후미꼬도 칠레 산티아고에서 재회하면서 변씨와는 자매의 연을 맺는 여행길에서의 또 다른 삶의 길을 발견하게 됨을 알게 되었다.

이국땅 타지에서 아무도 나를 알지 주지 않는 고독의 길을 헤쳐 나간다면 누구나 인간이 그립고 기대고 싶으며 이들처럼 서로가 벗이 되어 주면서 또 다른 삶을 일구어 나갈 수 있는 계기가 올 수도 있음을 느꼈는데,변씨와 존은 이스터 섬에 안착하면서 마음씨 좋고 성품이 너그러운 ’후아나’할머니 덕분에 삶의 터전인 오두막을 처소로 삼게 되면서,미스터 존은 변씨에게 프로포즈를 정식으로 하게 된다.이 점에서 변씨는 한국인의 외국인과의 결혼관이나 2세에 대한 선입견등을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변씨도 어렵게 내린 판단 끝에 둘은 식은 올리지 않았지만 뜨거운 잠자리를 갖게 되면서 2세를 바라보게 되지만,그간의 여독과 복통과 발열로 인해 2세의 출산을 보지 못하고 식도 올리지 못한채 쓸쓸하게 이스터 섬 바닷가 한 켠에 불귀의 몸이 되고 만다.

이제 변씨는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자초지종을 말할 수 밖에 없고 태어난 아이가 튀기여서 마음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아이를 입양할까 어떻게 할까등 많은 고심 끝에 아이의 이름대로(변희망) 아이의 꿈과 희망을 최대한 살려주기 위해 막연하게 한국을 떠나 프랑스로 몸을 싣는다.길에서 만나 또 다른 길을 찾아 가는 이들의 여정을 저자는 다소는 인위적으로 그들의 만남이 재현되었지만,그래도 변씨와 존씨 사이에서 태어난 ’희망’이는 사생아의 몸이 되겠지만 그의 미래를 위해 일도양단의 결정의식이 현실적이면서도 인간애적인 면이 짙게 깔려 있음을 깨닫는 시간이 되었다.

파우스트의 절실한 탄식에 대한 울림이 있는 문장을 인용해 보려 한다.
"내 마음에는, 아아, 두 개의 충동이 공존하고 있어서,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를 잡아 끌고 있네.하나는 무서운 욕망에 사로잡혀 현세에 매달려 현세적 만족을 얻으려는 충동이요,다른 하나는 세상 먼지를 벗어나 숭고한 선인들의 정신세계로 솟아오르려 하는 충동일세".P439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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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다 우울한 밤에
나카무라 후미노리 지음, 양윤옥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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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는 원초적 자문자답을 하게 될때가 있다.과연 먹고 살기 위해서인지 사랑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권력과 명예,부를 쫓기 위해 허덕거리며인지는 각자가 처해 있는 입장과 생각,가치관,실천력에 의해 달라지리라 생각을 한다.이미 물신이 팽배되어 있고 자신의 욕구,욕망이 달성되지 않을 때엔 도덕과 윤리는 안중에도 없이 자신의 사리사욕을 먼저 챙기는 것을 흔히 보고 듣고 있으며 그 만큼 현대라는 사회는 지식과 산업,자본은 발달되어 있지만 정작 인간답게 살아가는 모습은 오히려 산업이 덜 발달된 사회가 그나마 옹기 종기 모여 정답게 살아가며 자급자족으로 욕심을 내지도 않고 평화로운 모습을 견지했고 그 시절이 그리운건 나만의 사치스런 기억은 아닐 것이다.

 또한 인간의 본능은 과연 무엇일까,배고픔을 채우기 위해,무언가가 되기 위해,일탈의 삶이지만 향정신성에 의존하고 굶주린 육욕을 채우기 위한 존재일까라는 생각이 이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끊임없이 뇌리에 남아 있다.인간은 문명의 발달과 발전을 도모한답시고 어딘가로 향하고 무목적론적으로 확대를 해나가고 있다.그러나 정처는 없는듯 하다.부모의 DNA 즉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라는 타고난 환경적 요인도 인간의 본성에 어느 정도는 영향을 끼치고 겉으로 드러난다고 본다.

 새장 안에 갇힌 붉고 여린 새 한마리가 목이 말라 물 한모금 마시고 몸을 비척이는 순간 이때다 싶게 새장 안을 기던 구렁이 한 마리에게 먹히고 구렁이는 잡히고 몸둥이를 가르니 가녀린 새는 숨이 멎은채 가녀린 약자의 모습을 상징과 응축으로 보여주는 얘기로 시작되는 나카무라후미노리의 이야기는 인간의 본성과 권력,잃어버리고 사라진 인간의 선과 악,윤리와 도덕성을 사유하게 한다.

 교도관의 일상을 그린 이 작품은 살인을 해야 할 정당한 이유도 없이 지천에 깔려 있는 벌레같은 미물을 아무 생각없이 발로 밟고 죽이듯이 살상을 하고 감옥에 끌려 오며 세인들은 죽어도 마땅하다며 범죄 당사자에게 사형의 목소리를 드높이고 주인공 '나'는 고교시절 알고 지내던 여친들과의 만남,덧없는 섹스,또 그리고 주체할 수 없는 자위행위,죄수들과의 대화,연민,그리고 세상은 착하게 변하기를 바라지만 갈수록 사람이 사람을 무섭게 만들어가며 여기에는 권력 또한 가증스러울 정도로(그 사회의 인습,법률 구조에 의해) 인간의 목숨을 파리보다 더 가볍게 여기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사람을 죽이면 응당 그에 따른 댓가를 치르는 것은 인지상정이고 사회가 정한 법에 따르는 것 또한 수긍해야만 할 문제이다.다만 이 글에서처럼 사형수가 사형 처분이 행해지는 날,사형 집행인의 미스와 기계 동작의 오류로 사형수의 목숨이 잠시 부지될때 사형장에 입회한 검사는 유도 실력이 쟁쟁한 교도관을 시켜 둔치로 죽음의 불구덩이로 빠지게 하고 그 사형수는 죄값을 치르게 된다.어쩌면 눈에 보이지 않는 죄수의 회한과 정령이 또 다시 악의 정령으로 살아나 사회가 암울하고 비도적이며 비윤리적인 방향으로 치닫지 않을까 한다.

 살인은 정당화 될 수가 없다.아울러 모든 늘어만 가는 사회의 거대 세력을 끌어 안고 가기엔 너무나도 버겁고 생각이 거기까지 미칠지도 미지수이지만 사형이 존재하는 나라인 일본에서의 얘기일테지만 사형수를 죽인다면 검사 역시 사람을 죽이는 행위가 아닐텐가라고 저자는 휴머니즘의 상실과 암울한 사회 구조를 탄식한다.아무런 이유도 없이 신혼부부를 살해한 '야마이'라는 사형수는 교도관인 '나'에게 편지를 보내와 야마이의 생각의 실타래기를 전해 주는데 아마도 '나'는 야마이에게 든든한 교도관의 모습으로 다가왔는지 모른다.자신에게는 형이 존재하지 않지만 자신만의 생각으로 '나'를 형으로 삼고 싶다고 맺는다.

 무언가가 되고 싶고 확대 재생산을 빌미로 산과 강은 파헤쳐지며 황폐화됨과 동시에 인간의 본성 또한 자연의 선함의 모습에서 굶주린 뱀의 악아리마냥 누군가를 죽여야 하고 그 정당성을 제고하기 위해 사회는 갖은 자,힘있는 자로 이동해 나간다고 본다.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인간답게 살고 싶고 그 이상향을 꿈꾸어 가지만 한 번 맛들인 권력과 힘,명예를 놓치고 싶어하는 바보도 없을거라 생각한다.돈,권력,명예와는 무관한 '나'이지만 강자가 약자를 짓밟고 인명을 미물로 생각하고 대하는 비정한 사회에서 벗어날려면 사회적 약자를 생각하고 보듬어 주고 실천하는 참된 의식인이 많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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