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에게 홀린다는 얘기는 들어봤지만...며칠 전 괴이한 일을 겪었습니다.
수요일, 회식을 마친 후 집에 돌아오다가 갑자기 세탁소에 맡긴 바지 생각이 나더군요.
아파트 놀이터를 가로질러 후문으로 가는데, 오잉?
놀이터 미끄럼틀 옆에 새하얗고 커다란(토끼치고는 제법 컸습니다) 토끼 한 마리가 다소곳이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왠 토끼? 어느 집에서 가출했나? 요 건너 술집 메뉴에 토끼탕도 있더니만...거긴가? 뭐지? 뭐지?'
잠시 머리 속이 복잡한 후, 이 추운 데 저기 있으면 얼어 죽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토끼야...나랑 따뜻한 경비실로 가자...방송 하면 주인이 나올거야...다가가는데
여전히 다소곳한 토끼, 그냥 잡힐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다가가서 손을 뻗친 순간,
타닥, 타닥, 타닥. 몇 미터를 달아나더군요. 멀리도 안 가고 또 다소곳...
다가가 허리를 굽히는 데 타다닥, 타다닥, 타다닥...또 다가가면 타닥, 타닥...
그렇게 놀이터를 다섯 바퀴 쯤 돌고 나니 애초의 목적은 잊고 오로지 '잡자!'하고 눈에 불이 들어오더군요.
슬슬 잠바를 벗었습니다. 손 뻗을 거리에서 달아나니 잠바로 덮치자는 심산이었지요.
조용히 다가가서 잠바를 휙! 날렸는데~ 헉...삐융~ 잠바의 짧은 체공시간동안
이 토끼, 놀라운 속도로 달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잠바가 털퍽, 모래밭에 떨어지는 순간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더군요.
추운 밤, 놀이터에서 잠바를 바닥에 던지고 있는 내 모습...'안 돼, 저건 예사 토끼가 아닌가봐. 정신차리자 정신...'하며
잠바를 털어 입고 뒤도 안 돌아보고 세탁소로 향했습니다.
다녀오는 길, 그래도 토끼가 있으면 경비실에 얘기나 하려고 했는데...없더군요.
꿈이라면, 잡았다면 태몽이라 하겠습니다.
괴이한 밤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