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 오디세이 2 미학 오디세이 20주년 기념판 3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3년 11월
구판절판


의미 정보에서 미적 정보로

현대 예술은 그림 밖의 어떤 사물을 지시하지 않는다. 지시하는 게 있다면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 여기서 의미 정보에서 미적 정보로의 전환이 시작된다. 예술 작품의 정보 구조를 우리는 둘로 나눌 수 있다. 가령 루벤스의 <파리스의 심판>을 생각해보라. 우린 이 작품 속의 장면이 어떤 장면인지를 이미 알고 있다. 이게 바로 그 작품의 '의미 정보'다. 이제 이 내용을 머리에서 지워버려라. 나아가 그림 속에 보이는 형체들이 인물이며, 나무며, 들판이라는 사실까지도 잊어버려라. 그럼 그림 속엔 순수한 형태와 색채만 남는다. 이게 바로 작품의 '미적 정보'다. 의미 정보를 중시한 고전 회화에선 형태나 색채가 주제에 종속되어 있었다. 하지만 재현을 포기한 현대 예술엔 내용이나 주제가 있을 수 없다. 다만 색과 형태라는 형식 요소 자체가 가진 아름다움, 즉 미적 정보만 있을 뿐이다. 이제 현대 예술을 보고 '저게 뭘 그린거냐'고 물으면 실례가 되는 건 이 때문이다. 알겠는가?-42~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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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7-01-08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게 뭘 그린거냐?'고 지독하게 묻고 싶지만, 모두들 궁금하지만 꾹 참고 있다고만 생각했기에, 그냥 확 용감하게 질러버릴까 생각했던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참길 잘했군.
여하간 누군가, 현대 미술관에서, '대체 이게 무얼 그린걸까?'고 내게 물어오면 꼭 이 얘길 기억했다가 해 줘야겠다. '그런 것도 모르면서 여긴 왜 왔니?' 하는 듯한 시선으로 입 다물고 있지 말고. 그런 사람들이야 말로, 아마, 속으로는 제일 궁금해서 속이 타고 있는 중일거다, 아마. ㅡ,,ㅡ

진/우맘 2007-01-08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파리스의 심판!
무슨 그림인지 몰라서 잠깐 우울했는데, 검색해보니 다행스럽게도 아는 그림이었군.^^
헤라, 아테네, 아프로디테가 이쁜척~하고 있는, 그 그림이었던게다. ㅎㅎㅎ

얼음장수 2007-03-04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라스 옆에 있는 남자는 헤르메스였던가요?
본 그림인데 금방 까먹네요.

진/우맘 2007-03-05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모자를 보아하니 그런 거 같죠? ^^;
 
흑과 다의 환상 - 하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12월
절판


이해할 수 없다. 노래를 못하면 가수가 될 수 있을 리가 없고, 성적이 나쁘면 갈 수 있는 대학의 범위가 좁아지는 것은 누구나 당연한 일이라고 이해한다. 일을 하기 시작하면, 자기가 어느 정도 출세할 수 있을지 자기 기량을 알게 된다. 그런데 어째서 사랑에 관해서만은 자기에게도 언젠가 근사한 사랑이 찾아올 것이라고 천진하게 믿어 의심치 않는가. -14쪽

자기혐오는 하지 않기로 하고 있다.
먹고사는 데 도움이 되지도 않고, 시간 낭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1년에 몇 번은 자기혐오 쪽에서 제멋대로 나를 찾아온다.
그쪽에서 안 올 거면 이쪽에서 가주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거침없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와 내 안에 털썩 주저앉는다.
-88쪽

리에코는 전부터 어딘가 크게 '일렁이는' 부분을 가진 여자였다. 야무지고, 머리도 좋고, 냉정하면서도 부드럽다. 그런데 늘 그녀의 마음속 어딘가에서 비 내리기 직전의 숲처럼 뭔가가 일렁이고 있다. 전체적으로 균형 잡히고 차분하게 정돈된 가운데 터진 부분이 단 한 군데 있는데, 다른 부분이 완벽한 탓에 그 터진 곳이 눈에 더 띈다. 오히려 그 터진 곳 너머에 망망한 세계가 펼쳐져 있을 것 같은 불안을 느낀다. 하지만 그녀의 경우, 그것이 일종의 신비스러운 매력으로 작용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1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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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7-01-08 0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80p,「리에코는 전부터 어딘가 크게 '일렁이는' 부분을 가진 여자였다.」라는 문장이 마음에 든다. 일본어도 번역도 잘 아는 분야가 아니라서, '일렁인다'는 표현이 작가의 탁월한 선택인지 권영주라는 옮긴이의 기막힌 센스인지를 알 바가 없어 안타까울 뿐.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
하이타니 겐지로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양철북 / 2002년 7월
절판


"지능 장애는 하나의 병이기 때문에 되도록 그에 적합한 시설이 갖춰진 곳에서 효과적인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그 때문에 특수 학교가 있는 겁니다. 우리 학교 같은 보통 학교에서 정상아와 함께 학습해서 무엇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그 아이만 고통스러울 뿐이죠. 미나코의 경우도 앞으로 한 달 남짓 지나면 다시 전학을 갈 겁니다. 모처럼 친해졌다 싶었는데 또 새로운 곳에서 고생해야 하는 아이가 불쌍한 거죠."
"잠깐."
큰 소리가 났다. 아다치 선생님이었다.
"아, 야유를 못하게 하니 괴롭구먼."
다들 폭소를 터뜨렸다.
"무라노 선생님이 틀린 말을 하고 있으니 바로잡겠소."
아다치 선생님은 고압적으로 말했다. 이런 말투와 직선적인 성격 때문에 다들 거북스러워하는 것이리라.
"아까 치료라는 말을 썼는데, 위가 나빠서 치료한다는 의미의 치료였다면 무라노 선생님은 뭔가 잘못 알고 있거나 아니면 무식한 겁니다. 대뇌의 세포, 즉 신경 세포가 재생되지 않는다는 것쯤은 중학생도 알고 있는 사실로, 지능 장애아의 교육이 다른 교육과 다른 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무라노 선생님은 무엇을 배우겠느냐고 반문했지만, 그런 사고 방식이 오늘날 정신 장애아 교육의 가장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을 알고 계시는지?
독일 빌레펠트에 세워진 의료복지 시설에서 정신 장애자들과 평생을 지내 온 어느 수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효과가 있으면 하고 효과가 없으면 안 한다는 생각을 합리주의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이것을 인간의 생활 방식에 적용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아이들은 이곳에서 보내는 하루하루가 인생입니다. 그 인생을 이 아이들 나름대로 기쁜 마음으로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목표도 여기에 있습니다.'라고요.
무라노 선생님, 우리 교사들은 이 말을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고다니 선생님은 아마 이 얘기를 모를 겁니다. 그러나 이 말을 그대로 실천한 것이 바로 고다니 선생님 아닐까요?"
무라노 선생님은 할 말이 없었다. -1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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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6-12-19 1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은 이곳에서 보내는 하루하루가 인생입니다....
아이들은, 우리 아이들은, 교실에서 보내는 매 시간이 인생인거다. 교육 이전에, 인생.

마노아 2006-12-19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육 이전에 인생... 새겨둡니다.

짱꿀라 2006-12-19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또 한번 읽어도 명작이지요. 밑줄긋기에 나온 문장들 잘 읽고 갑니다.
 
바람의 그림자 1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책장을 넘기다가 독특한 문구, 웃음을 동반하는 기지 넘치는 표현, 다이어리에 적어 넣고 싶은 고상한 금언을 만나게 되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다.

주로 누워서 뒹굴뒹굴 독서를 즐기는데다가 “책은 깨~끗이 보는 것!”이라는 강박적인 가르침을 받은 세대이기에, 그런 만남의 순간에 나는 책장 모서리를 접어놓고는 한다.

하지만 대체, 접는 페이지가 그냥 넘어가는 페이지보다 많아서야. 이런 난감한 희열을 봤나! 서재에 접속해서 <밑줄 긋기>를 해 놓으려다, 자칫 책 두 권을 몽땅 쳐내려가게 될까봐 그냥 멈췄다.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이 작가, 욕심도 많다. 남들은 한 편에 한두 개도 될까 말까 한 빛나는 언어를 몽땅 그러모아, 작품 하나에 맑은 밤의 별처럼 촘촘히 박아 넣다니! 대체 뒤에 남은 작가들은 어쩌란 말인가.^^


이 길고, 복잡한 이야기를 무엇에 비유해야 할까. 얽혀버린 실타래, 끝없이 벗겨지는 양파, 혼을 빼앗는 직소퍼즐,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미로.... 그러나 모두, 적절하지 않다. 실타래를 풀어야 하는 짜증도, 양파껍질이 풍기는 독기도, 퍼즐을 맞춰내는 인내도, 미로를 헤매는 공포도. 바람의 그림자와 함께 하는 여정에서는 순수한 지적 희열 이외의 어떤 고통도 동반하지 않기 때문이다.

각각의 인생을 품고 있는 등장인물들과 겹치고 포개진 수많은 사건들, 아무리 정교하게 배치하고 알맞은 수순으로 풀어낸다 할지라도 자칫 리듬을 잃으면 삽시간에 지루해져 버리고 말텐데. 책을 덮는 마지막 순간까지 때론 빠르게, 때론 느리게 능란하게 풀어내는 이야기에 휘말려버리는 것을 보면....작가가 각고의 노력을 동반한 천재라는 가정 외에도, 분명, <바람의 그림자>에는 공들인 마법이 걸려있음에 분명하리라.


책장을 덮고 그 행복한 여운을 되새김질 하다가, 결국 건넌방으로 넘어와 책상 앞에 앉았다. 이 느낌을 살려 몇 줄의 헌사라도 기록하지 않으면, 바람의 그림자에 묻어온 마법에서 말짱 깨어버릴 것만 같은 불안 때문에. 


바람의 그림자

그 제목부터 이미, 타고난 원전(原典)인 책이 있다. 이제야, 소설에 대한 내 막연한 향수병이 그 고향을 찾았다는 뿌듯함에 태어난 연도를 살폈다. 2001년, 어라, 조금은 더 나이 먹은 책일 줄 알았는데.....? 태어날 때부터 이미 <고전>의 품격을 갖춘 소설. <바람의 그림자>는 시간을 거슬러, 과거에 이미 존재한 많은 책들의 원전이 될 가치가 있는, 타고난 명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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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6-10-25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접는 페이지가 그냥 넘어가는 페이지보다 많아서야. 이런 난감한 희열을 봤나! 서재에 접속해서 <밑줄 긋기>를 해 놓으려다, 자칫 책 두 권을 몽땅 쳐내려가게 될까봐 그냥 멈췄다...저랑 똑같으시네요.......추.천.

진/우맘 2006-10-25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 ^^
정말, 어디다가 멋진 말만 모아놓은 우물 같은 걸 숨겨놓은 작가 같애요. 그죠?

야클 2006-11-24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멋진 소설이죠. ^^
 
1파운드의 슬픔
이시다 이라 지음, 정유리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사실, 딱히 리뷰를 쓸 것도 없다. 책에 대한 내 감상을, 작가 스스로가 가장 정확하게 말해버렸네. 
역자후기에 인용된 이시다 이라의 인터뷰를 볼까.

 "연애 단편을 쓰는 게 저한테는 잘 맞는 것 같습니다. 꼭 작은 케이크를 예쁘게 마무리하는 파티쉐 같은 느낌이에요. 전 과장된 이야기보다는, 보통 여성이 보통 남성에게 마음이 이끌리는 그 순간이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들 연애를 하고 있는 줄 착각하지만, 알고 보면 다들 쓸쓸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생에서 연애의 찬스란 그리 몇 번 없는 것이죠. 그 순간을 모아담는 것이 즐거워요."

예쁘게 마무리 된 작은 케이크....그렇다. 이 책 속에 담겨진 열 개의 연애이야기들은, 생크림과 갖가지 과일, 초콜릿으로 깜찍하게 장식된 달콤한 디저트 같은 느낌이다.


-엠파스 이미지 검색에서 퍼왔어요-

열 개의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모두 30대 초 중반의 남녀. 사실 나이만 그렇지 대부분 결혼을 하지 않은 직장인이기 때문에 라이프 스타일 자체는 20대 미혼 남녀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그들이 나누는 대화, 품는 생각에는 한결 무르익은 담론...같은 것이 느껴진다. 치기나 쓸데없는 오기, 과도한 열정 혹은 착각. 경험 부족에서 오는 연애의 쓸데 없는 거품이 없다. 그렇기에 그들의 연애는 한결 더 담백하고, 그 떨림조차 섬세하다.

 이대로 가다간 생활에 치어 말라죽어버릴 것 같다. 이런 무미건조한 생활에 물기를 더해줄 뭔가가 없을까? 대단한 걸 바라는 게 아니다. 온몸에 행복의 비를 뿌려달라는 게 아니다. 자신이 식물들에게 주는 물처럼 그저 약간의 물기를 더해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없을까? 바싹 말라붙은 마음의 표면이 촉촉하게 젖을 수 있을 정도로 그저 약간이면 되니까. 남편이 있고, 아이가 있고, 평범한 결혼생활을 보내고 있는 여자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사치스러운 걸까? - 90p, '11월의 꽃망울' 中 -

그래, 가끔 고기에 소증이 돋듯 연애소설이 읽고 싶은 이유는, 바로 그런 거 아닐까. 충분히 행복하지만 그만큼 평범하고 버석버석한 일상의 뒷면에 칙칙, 분무기로 살짝 물을 뿌려주는 정도. 누구에게나 한 번쯤 있었을, 그리고 한 번쯤 다가올 그런 작은 사랑의 단상들을 베어무는 순간.... 그 달콤함이 내 것이라고 잠시, 상상해보는 가운데 말랐던 마음엔 살짝, 물기가 도는 건지도.

연애도 해 보고 싶고, 케잌도 먹고 싶어졌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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