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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양장)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젠가…… TV였다. 무슨 쇼프로그램이었는데, 재밌는 실험을 했었다. 잘생긴 수캉아지와 못생긴 수캉아지, 그리고 발랑 까진 듯한 암캐…… 이렇게 세 마리의 개를 네모난 박스 안에 각자 자리 잡게 하고 암캐의 반응을 관찰하는 실험 같은 쇼였다. 당연하게도 암캐는 잘생긴 수캉아지를 선택했다.
이번엔 못생긴 수캉아지에게 페로몬 향수를 진득하게 묻혀 다시 그 박스 안에 집어넣었다. 암캐는 갑자기… 향수를 뿌린 못생긴 수캉아지에게 꼬리를 흔들며 찝쩍대기 시작했다. 비록 개의 시각이 인간의 시각보다 색체의 감각이 매우 떨어진다고는 하지만 향수의 힘을 새롭게 확인하는 계기가 된 프로였다고나 할까?
도심의 먼지처럼 난무하는 이미지들 속에서, 나는 숨막히며 살고 있다. 시각적인 자극 속에서, 보이는 것만 확신하고 느끼는 원근법적인 체험이 도시를 거쳐 살아온 나의 바탕이다. 특히 내 주변을 둘러싼 밀집된 이 뿌연 공간은 내 마음이 머무를 다양한 체험의 감정을 무뎌지고 깎여진 답답한 시멘트로 치장해 놓았다. 그래서 내 시선이 응시하는 곳은 버릇처럼 끌리는 조건반사…… 그 지점이었으리라. 자극도 한두 번이면 능히 즐기겠지만 이미 무감각해질 정도로 무감각해진 내 동공들은 핏줄이 선지 오래다.
그동안 나는 소설을 봐왔다. 읽지 않았다. 내 몸을 소설의 흐름 속에 잠식시키지 못하고 계속 표면 위에서 비쳐지는 그림자만 봐왔다. 문체나 미사여구등에 현혹되어 있었다. 서사보단 묘사에 치중하고 그것으로 작품의 수준을 내 멋대로 지껄이곤 했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는 이러한 나의 편향된 습관에 일침을 놓았다.
이 소설은 냄새의 흐름이 구석구석을 헤집 듯 그 흐름에 끌려, 특히 그르누이의 인생행로에 자연스럽게 이끌리며 서사의 매력을 흠뻑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드러나진 않지만 드러나있고, 말하진 않지만 말하는 냄새라는 강렬한 소재에 신선한 충격과 소설적인 재미 또한 느낄 수 있었다.
향수에 나오는 주인공 그르누이는 정말이지 드러나있지 않은 존재이다. 정체성이란 타인과 나의 관계속에서 복잡하게 얽히는 실장난이다. 그 실장난은 혼자선 즐길 수 없다. 또한 내가 나라는 명증을 사회 안에서 확신하기 위해선, 난 그들과 동일한 조건 위에 서야 한다. 그 조건은 기본적이면서도 나와 타인을 구분짖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냄새가 없는 그르누이에겐 이 기본적인 조건의 결핍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의 방향을 결정했다. 그리고 그것은 향수의 집착으로 드러난다. 물론 그에게 태생적으로 갖춰진 냄새에 대한 특별한 능력은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다. 더욱이 그러한 능력은 필연적으로 갖춰져야 했다. 자신의 몸에 냄새가 없기 때문에 자신을 혼돈의 공허속에 몰아넣지 않기 위해선 자신의 환경을 이루고 있는, 이를테면 외부세계의 냄새를 자신의 공허속에 계속해서 채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르누이는 자신의 공허를 하염없이 가득 채워줄 냄새를 발견한다. 그 냄새는 그르누이에게 자신이 여기 있어야할 필연성을 부여해주었고 그것은 정체성의 확인이다. 그리고 그 냄새의 교감은 사회속에서 타자와의 대화에 연결고리가 된다. 그르누이는 대화를 하고 싶어했다. 그가 바란 대화는 동등한 조건 속에서 인간임을 확인 시켜주는 일상의 가벼움이었을 것이다. 그는 대화의 수단으로 아주 절대적인 향수를 만들어냈지만… 그리고 그가 원했던 것을 이루지만…
결국엔 타자들의, 인간들의 나약함만 확인하였다. 발랑까진 암캐의 반응처럼 이리저리 휘청이는 인간들의 취담 속에서 그르누이는 그 취기에 벗어나 자신과 면전을 대고 이야기 할 수 있는 타자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인간임을 확인하고 싶어했다. 자신의 정체성을 공허한 혼란 속으로 사라지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냄새라는 혼란 속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