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를 찾아서 - 인간의 기억에 대한 모든 것
윌바 외스트뷔.힐데 외스트뷔 지음, 안미란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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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신경심리학자 윌바 외스트뷔, 작가 힐데 외스트뷔 자매가 함께 썼다. 기억을 연구하는 윌바, 기억에서 글감을 꺼내어 재구성하는 작가 힐데 모두 기억을 다루는 사람들이다. 「인간의 기억에 관한 모든 것」이란 당당한 부제와 신비로워 보이는 표지에 끌렸고, 연구자들이 밝혀낸 기억의 메커니즘을 문학적 · 비유적으로 표현하여 신선했다. 한 철학자는 '당신이 먹는 것이 곧 당신이다'라고 했다는데, 이 책을 읽고는 '내가 기억하는 것이 곧 나'임을 알게 되었다.

 

 

 

제목의 '해마'는 뇌의 '해마'지만 본문에서는 바다생물 해마로 비유되기도 한다. 기억 연구자가 잠수사들이 잠수 중 기억했던 것을 물 밖으로 나와 회상하는 실험을 진행하는데, 이를 '잠수사들이 해마에서 일어나는 일을 찾는다'고 표현했고, 그것이 책 제목 Diving for Seahorses 이 되었다. 해마는 우리 뇌에서 기억을 관장하는 부분으로, 450년 전 이탈리아 의사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란티우스가 뇌에서 바다생물인 해마와 비슷하게 생긴 작고 꼬부라진 부위를 발견하고 '해마'라 명명했다.

 

 

해마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1950년대 되어서야 밝혀졌다. 한 외과 의사가 뇌전증 환자 헨리 몰레이슨을 낫게 하려고 그의 해마를 제거하는 수술을 해 버렸는데, 헨리는 수술 이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수술 이전의 기억만 갖고 살았다고 한다. 책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헨리 몰레이슨 이야기로 시작하여 기억이 뇌에 어떻게 자리 잡는지, 사람은 무엇을 얼마나 정확하게 기억하는지, 트라우마나 허위 기억은 어떻게 생성되는지, 우리는 왜 어린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는지 등 지금까지 이루어진 기억에 관한 여러 연구결과를 풀어낸다.

 

 

기억은 대뇌피질에 퍼져 있는, 맥락으로 연결된 개별 기억들의 커다란 네크워크다. 뇌와 기억 연구는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장소는 장소 세포나 격자 세포에서 관장하고, 신경 외막은 신경 간 연결점을 보호해 기억 흔적을 단단하게 고정시키며, 뉴런들 사이 연결점에 흔적이 생기면서 장기 기억이 이루어진다는 등의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한다. 이런 연구는 뇌의 반응을 눈으로 볼 수 있는 fMRI가 개발된 덕분이었다. 모든 기억이 해마에 저장되는 건 아니다. 기억에서 해마가 중요한 이유는, "해마가 기억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연출가처럼 하나로 모은다는 것이 기억에 대한 현대의 주도적 이론 중 하나(p99)"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할까? 장기 강화된 경험은 그물망에 엮이고 해마의 장소 세포에 연결되어 우리 뇌에 자리잡는다. 모든 경험이 기억으로 남는 건 아니다. 여러 번 반복되거나 특색있는 경험이 오래 남으며 특히 우리는 삶에서 의미 있는 것을 주로 기억한다. "가장 강력한 기억의 네트워크는 우리가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을 학습할 때 우리가 직접 만들게 된다. (p68)" 그래서 '기억은 인생이고, 내가 기억하는 게 나'인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순간들이 나의 정체성을 이루고, 우리 모두는 기억으로 자서전을 쓰는 작가가 된다.  경험에 구조를 부여하는 이 자서전을 기억 연구에서는 '라이프 스크립트(인생 원고)' 라 한다.

 

 

 

"기억의 운명에는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의미가 있는가가 결정적이다. 개인적인 경험은 우리 자신에 관련된 것들이다. 이들은 우리가 도달하려고 하는 것,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 우리가 우리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들로서 경험하는 것들과 관련이 있다. 우리 자신의 자서전 형태에 중요한 기억들은 우선적으로 저장된다.(p83) "기억은 창조하고 열려 있는, 모든 것을 흡입해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스펀지 같은 도구이다."(p95)

 

 

기억은 불완전하고 늘 재구성된다. 사람들은 기억에 관심이 많아 기억력을 향상시킬 방법을 연구하고 체스 선수나 배우, 노인들은 기억술을 배우기도 하지만, 사실 기억은 디지털 기기로 촬영한 데이터와는 달라서 매우 부정확하다. 기억은 오히려 "계속해서 같은 작품이 매번 새로 무대에 올려지는 극장과 비교할 수 있다.(p148)" "관자놀이 뒤에서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기억의 극장으로부터 조종을 받는다. 공연이 끊이지 않는 이 극장에서는 언제나 해석이 달라지고, 때로는 배우도 바뀐다."(p41)

 

 

만약 있었던 일을 그대로 기억한다면 트라우마도, 기억 왜곡도, 허위 기억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을 변형시킨다. PTSD(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외상후스트레스장애)의 증상 중 하나는 겪었던 사건이 여느 경험과 달리 극단적으로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는 것이다. 트라우마는 기억 시스템이 평소처럼 작동하지 않고, 기억의 볼륨을 최고로 올려 경보를 계속 내보내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같은 사건을 겪어도 내적인 판단과 해석을 내리는 이들은 기억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지만, PTSD를 겪는 이들은 사고의 세부사항을 더 많이 기억하여 항상 몸이 비상사태에 있는 것과 같다고 한다. 저자는 2011년 7월 22일 노르웨이 우퇴위아 섬에 있었던 폭탄 테러 피해자를 인터뷰하며 그 예로 들었다.

 

 

기억을 가위질하고 포토샵하는 과정에서 사실이 아닌 걸 믿게 되기도 한다. 허위 기억이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어떻게 일어났다고 믿을 수 있는지 놀랍지만, 오래된 일일수록, 일상적인 일일수록 허위 기억이 생기기 쉽다고 한다. 허위 기억이 생기는 경우 중 가장 주목해야 할 장소는 법정이다. 취조나 심문 과정에서 사법 체계가 증인들의 허위 진술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진술을 할 때 압력을 가하거나 사람들을 모아놓고 심문하면, 기억에 오류가 생기고 그 피해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는다. 특히 법정에서와 같이 정확한 기억이 필요한 상황에서 허위 기억이 발생하지 않도록 돕는 연구가 필요하다.

 

 

늘 궁금했던 문제, 우리는 왜 어린 시절을 기억하지 못할까? 해마가 아직 성숙하지 않아서? 퍼트리샤 바워의 연구에 따르면, 서너 살 유아들도 몇 달에서 일 년 전까지의 일을 기억하지만 그 기억은 수명이 짧아서 나이를 먹어가며 점점 초기 기억을 잊는다고 한다. 즉 어릴수록 ‘기억의 유통기간’이 짧고, “어린이가 나이를 먹으면서 기억은 점점 유통 기간이 길어져서, 통조림처럼 거의 제한이 없는 성숙한 보존성에 도달한다(p268)”는 설명이다. 만약 아이가 어렸을 때 일을 부모가 아이에게 지속적으로 얘기해준다면, 그 아이는 실제 경험의 ‘허위 기억’을 저장하게 된다. 부모에게 들은 이야기를 마치 자신의 진짜 기억처럼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에게 행복한 유년 기억을 심어주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기억의 진화적 효용이다. 변형되고 왜곡되기 쉬운 취약한 인간의 기억, 대체 어떤 효용이 있는 걸까? 디지털 기기로 녹화와 녹음을 하듯 정확하게 기억하면 좋을 텐데 왜 기억은 변형되고 왜곡될까? 저자는 기억을 유연하게 변형시킴으로써 미래에 다가올 일을 상상할 수 있다고 한다. 진화심리학적으로 기억이라는 정신작용이 생존과 재생산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설명하자면, 기억은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람쥐가 부지런히 도토리를 묻어놓았던 자리를 기억해야 겨울에 찾아 먹을 수 있는 것처럼 모든 생물은 기억을 필요로 한다. 사람에게 기억은 일어났던 일을 상상하는 것이라 볼 수 있는데, 위험했던 순간을 기억하고, 앞으로 다가올 위험을 상상하며 방어할 준비를 하는 능력 덕분에 인류가 돌도끼를 만들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fMRI를 통해서도 “기억을 할 때나 미래를 생각할 때나 공통의 일련의 뇌 영역이 두드러져 나타나는 것(319)"이 발견되었다니 연구자들의 통찰이 놀랍다.

 

 

우리는 깨어있는 시간의 반 정도를 기억하고 상상하는데 보낸다고 한다. 일어났던 일과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생각하는 이런 '시간 여행'은 ‘디폴트 네트워크’ 즉 휴식 상태에서 활성화된다. '과거는 연료고, 기억은 모터로 미래를 상상하게 한다'는 저자의 비유가 멋지다.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은 창의적 문제해결력의 바탕이 되고,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행위를 하도록 이끌기도 한다. 윤리와 규범을 지켰을 때 돌아올 사회적 보상을 세밀하게 상상하는 사람일수록 그 보상을 더 크게 느끼고, 자신의 행동을 잘 통제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기억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무슨 일이 생길지 상상하고, 미래 비전을 다른 구성원과 공유한다.

 

 

마지막으로 검은 배경에 해마와 뇌가 은은하게 떠 있는 아름다운 표지를 말하고 싶다. 초등학교 때 미술시간, 크레파스로 밑바탕에 무지개색을 칠하고 그 위를 모두 검은색으로 덮어버린 후, 이쑤시개로 긁어내어 아래 무지개색을 드러내던 기억이 떠오르는 표지였다. 기억은 뇌라는 블랙박스 안에 저장되어 볼 수도, 꺼내어 관찰할 수도 없다. 아직은 블랙박스 속이 훤히 보일 창을 내지는 못하지만, 연구자들의 노력으로 일부분이나마 슬쩍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언젠가 뇌 안의 기억 지도가 밝혀질 날을 오기를. 문학적이고 서정적인 과학서다. 기억이란 무엇이며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지 궁금하신 분들께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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