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멘과 모리
요시타케 신스케 지음, 권남희 옮김 / 김영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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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타케 신스케, 권남희 역, [메멘과 모리], 김영사, 2024.

Yoshitake Shinsuke, [MEMEN TO MORI], 2023.

메멘과 모리는 엄마와 아들이 아니라 누나와 동생이다! 요시타케 신스케는 유명한 그림책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이다. 일본에서 그림책 서점대상을, 뉴욕타임스의 최우수 그림책상을 받았다고 하는데... 동네 작은 도서관의 어린이 자료실에 50여 권의 책이 있는 것을 보고 인기를 체감했다. [메멘과 모리]는 첫 번째 장편 그림책이라고 하는데, 세 개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메멘과 모리와 작은 접시

메멘과 모리와 지저분한 눈사람

메멘과 모리와 시시한 영화

일러스트에 관심이 있다면, 작가의 그림을 극찬한다.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 빠르게 한 번 읽었고, 그림의 설명을 듣고 나서 천천히 두 번을 보았다. 인물의 표정과 몸짓, 얼굴의 방향과 시선, 살짝 번진 듯한 펜의 흐름은 대단한 표현력이다. 나는 글에 관심을 두었는데, 다른 누구는 그림에 초점을 맞춘다.

미안...

누나가 만든 접시를

깨뜨렸어......

어마나......

....음.

괜찮아.

또 만들면 되니까.

하지만

세상에 하나뿐인

소중한 접시인데......

괜찮아!

어떤 것이든 언젠가는

깨지기도 하고, 잃어버리기도

하는 거야.

'줄곧 거기에 놓여 있는' 것보다

'함께 뭔가를 한' 것이

더 중요하잖아?

그림을 빼고 보니 꼭 시를 읽는 기분이다. 어린 동생 모리를 향한 누나 메멘의 따뜻한 조언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현실적이면서 미래적이고, 무엇을 정해놓기보다는 무한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메시지이다. 동생의 실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모습에서 내가 갖추지 못한 성숙한 인격을 배우게 된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지저분한 눈사람이었다는 이야기, 시시한 영화를 함께 보고 난 뒤의 감상은... 접시를 깨뜨린 철부지 모리의 모습을 포함해서 내가 사는 세상을 반영하고 있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지만, 여전히 뭔가를 떨어뜨려 깨뜨리고 있고... 지저분한 눈사람으로 아직도 꿈을 좇고 있으며... 이렇게 살다 보면, 결국 시시한 인생으로 끝나는 게 아니냐는 불안감이 있다.

눈사람일 때의 내가 하고 싶었던 걸

하게 해 줄 거야.

그러니까 지금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잔뜩 생각해 두자.

요컨대 사람은 '생각이랑 달라!'하고

깜짝 놀라기 위해 사는 거야.

생각과 달라서

세상은 괴롭고, 힘들고,

즐겁고, 기뻐.

조금만 생각을 바꾸어 언젠가 하게 될 일을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하고 달라서 깜짝 놀라는 일이 일어나는... 그래서 삶은 괴롭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다는 교훈이 있다. 동화적이기도 하고, 철학적이기도 하다. 아이를 위하기도 하고, 어른을 위하기도 한다. 세상에는 시시한 영화는 없고, 시시한 인생도 없다! 귀여운 그림이 마음에 들고, 전혀 모르는 분야를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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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 슈사쿠 단편 선집
엔도 슈사쿠 지음, 이평춘 옮김 / 어문학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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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 슈사쿠, 이평춘 역, [엔도 슈사쿠 단편 선집], 어문학사, 2015.

Endo Shusaku, [KAGEBOSHI], 1968.

전설(?)의 작가를 만났다. 로마 가톨릭 신앙의 소설을 써서 일반 문학을 평정한 엔도 슈사쿠(1923~1996)는 미우라 아야코(1922~1999)와 함께 어렸을 때부터 끊임없이 들어온 이름이다. 일본 대중문화개방(1998~)이 이루어지지 않은 시절에 이미 그의 글과 어록을 인용하고 있었는데, 저작권하고 상관없이 번역했던 것인지 의문이다. 대표작으로 여기는 [침묵](홍성사, 2003.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 앤드류 가필드, 리암 니슨 주연의 영화 <사일런스> 2017. 원작)과 [깊은 강](민음사, 2007.)(두 권의 책은 1996년 작가가 별세하면서 도쿄 후추시에 있는 가톨릭 묘지에 안장할 때 유언대로 함께 관에 넣었다고...)을 가지고 있으면서, 도서관에서 빌린 단편 선집을 먼저 읽은 것은 (행운, 운명이라기보다) 어떤 인도하심이 있었다는 생각이다.

그림자

잡종견

6일간의 여행

노방초

나른한 봄날의 황혼

분장하는 남자

흙먼지

만약

[엔도 슈사쿠 단편 선집]은 8개의 단편으로 자전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유년 시절부터 성장 과정, 어머니와 스페인 선교사 신부의 영향, 죽음의 문턱을 오가는 투병 생활, 가톨릭 작가로서의 삶, 결혼 생활과 가족에 관해서... 자기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의 작품은 다신교 사회인 일본에서 일신교인 기독교 사상을 내세워 인간의 죄와 악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룬다고 하는데, 여기에서는 그런 글이 탄생하게 된 배경... 가톨릭 신앙으로의 귀의, 반항과 방황의 삶, 죽음과의 사투, 죄악과의 투쟁 그리고 인간의 나약함과 신의 은총에 관해서 독백하고 있다.

나로서는 당신이 (나로서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보다 더욱 깊은 믿음으로, 더 큰 사랑을 위해 신학교를 버리고 한 여자를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아니 지금이야말로 당신이 옛날보다도 강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그런 어린애 같은 유치한 공상은 깨지고 말았습니다.(p.56)

첫 번째와 마지막 단편 '그림자'와 '만약'은 연관성이 있다. 그의 인생에서 충격적인 배반 사건, 성직자의 환속, 신을 위해 일생 헌신하겠다고 서원한 신부와 수녀가 별 볼 일 없는 여자에게, 병약한 남자에게 빠져 교회에서 떠나는 것을 목격한다. 특히 스페인에서 온 선교사 신부는 30년 이상 신앙의 가르침으로 믿음의 토대를 이루는 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인물이다. 분노와 처참함을 불러일으키는 감정, 그러면서 왜? 라는 의문은 평생의 화두가 되어 그의 작품에서 계속 등장한다. 신앙을 저버린 나약한 인간에 관해서, 더 나아가 배교의 수준으로 확장, 소설 [침묵]에서는 고통받는 이웃을 향한 신의 침묵에 절규하는 페레이라 신부와 로드리고 신부의 모습으로 투영된다.

이렇게 해서 당신과의 길고 긴 만남이 끝났습니다. 생각해 보면, 성애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병실로 찾아온 것이 첫 만남이었는데, 그동안 3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졸음이 왔던 당신의 이야기, 버려진 나의 개, 당신과 산길을 뛸 때의 고통, 기숙사에서의 사건,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가루이자와에서 버터를 내게 준 당신의 동상 걸린 손, 이러한 추억 하나하나가 내 인생의 강물 속에 소중히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남긴 흔적, 우리는 자신이 타인의 인생에 어떤 흔적을 남기며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마치 바람이 모래사장의 소나무 등을 휘게 하고 가지의 방향을 바꾸어 놓듯, 당신과 어머니는 다른 사람들은 물론. 나를 현재의 방향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당신은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습니다.(p.57-58)

'그림자'를 읽으면서 적잖이 놀랐다. 그동안 책을 읽으면서 다양한 삶을 보았고, 부분적으로 닮은 꼴이 있었지만, 내 삶의 전부를 고스란히 옮겨 놓은 것은 처음이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떠나 어머니와 둘이 살고, 기독교 신앙에 의존하고, 반듯하게 자라기를 강요받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반항의 세월, 건강의 문제...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이 나를 지배하는 믿음의 세계, 덫에 걸려 넘어지는 목회자를 수없이 보았고, 아버지와 연을 끊고 살면서 어쩌다 길에서 마주쳐도 못 본 척 지나치는 일 하나까지... 그리고 스페인 선교사 신부의 마지막 모습에서 나 역시 나약한 인간이고, 신의 은총을 간구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내가 소설만 쓰면 완벽히 일치하는 신비로운 경험이다.

지금도 내 소설에는 이따금 개나 새가 등장하는데, 그것은 단순한 장식이 아닙니다. 그때의 나에게는 다른 사람한테 털어놓을 수 없는 고독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 바로 이 개였습니다. 지금도 슬픈 표정을 한, 눈물 고인 개의 눈을 보고 있으면 나는 왠지 그리스도의 눈이 생각납니다. 물론 그 그리스도는 모든 것에 자신감을 지니고 있던 이전의 당신과 같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짓밟히며 그 발 아래에서 묵묵히 인간을 바라보는 지친 후미에의 그리스도입니다.(p.23)

'잡종견'은,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개와 새는 나와 동행하는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어렸을 때 키우던 잡종 개는 고독한 그에게 유일하게 슬픔을 이야기할 수 있는 동반자였다.

"글쎄요. 어머니와 같은 생활 방식...... 부럽기는 하지만, 나로서는 도저히 따라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어째서?'

"한 사람을 행복하게 할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을 그만큼 상처 입히잖아요. 역시 나 같은 사람은 그것을 못 견뎌 할 거예요."(p.98-99)

'6일간의 여행'은 어머니의 흔적을 찾아 살던 집, 다니던 교회를 방문하는 이야기이다. 어머니는 누군가에게는 행복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상처를 주었다. 우리는 모두 타인의 인생에 흔적을 남기고, 영향을 주고 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말다툼이 또 시작된다. 아내에게 화를 내면서, 베이루트에서 그냥 비행기를 탔더라면 지금쯤 하네다에 도착했을 거라고 남편은 생각했다. 도쿄에 돌아가면, 또 여기저기 거래처에 인사하러 다니고, 연회에 참석하고, 일요일에는 접대 골프에 갈 것이다.

나무 한 그루에 표찰이 붙어 있는데, 여기는 유다가 목을 맨, 피의 밭이라고 쓰여 있다. 갑자기 어딘가의 라디오에서 재즈 음악이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p.133)

'노방초'는, 여행 중인 부부는 요르단에서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하는 중에 일상의 문제로 다툰다.

그는 퇴원한 후에도 한 달에 한 번은 의사에게 진찰을 받고 있다. 병원에 갈 때마다, 그는 다시 얻은 자유를 조심스레 되씹으면서 자신이 3년 동안 지냈던 4층을 살그머니 올라가 본다. 그러나 환자의 방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아직 입원해 있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퇴원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 상처를 입히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p.168)

'나른한 봄날의 황혼'과 '만약'은 투병으로 연결되어 있다. 폐결핵으로 3년간의 입원 생활은 본인의 괴로움은 물론이고 가정 경제의 어려움을 초래하기도 했었나 보다. 여성스러웠던 아내는 운전면허를 따고 그가 부탁한 무거운 책을 옮기며 강인한 아줌마가 되어 있었고, 목숨을 담보로 세 번째 수술을 가까스로 성공해서 병원에서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순교자들이 있었고, 가족의 평범한 일상이 있다.

"나는 내 작품에서 여자에 대해 쓰지 않아. 아니, 쓰지 않는 게 아니고, 쓸 수 없는 거야."

"쓸 수 있게 된다면, 소설가로서 제 몫을 하는 셈이지."

"그런데 어떨까? 지금까지 소설 가운데 묘사해온 여자는 정말 여자인 걸까? 남자의 눈으로 본, 남자가 상상한 여자가 아닐까?"(p.207-208)

'분장하는 남자'는, 작가에게 있어서 병약함과 3년의 입원은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나 보다. 경험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분장 도구를 구매해 노인으로 변장하고 거리에 나선다. 또 여자로 변장해 보기도 하고... 그가 얼마나 죽음과 가까이 있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나른한 봄날의 황혼'과 더불어 애잔함이 느껴진다.

불쾌하게 느껴졌던 흙먼지가 그렇게 싫게 느껴지지 않게 된 것은 그 이후부터였다. 창틀이나 툇마루에 쌓인 잿빛 먼지를 입으로 불면서, 그는 이것이 조각난 토기를 사용하던 고대인들의 삶의 흔적이라고 걸레질을 멈추며 생각에 잠긴다. 더러는 인생이 끝난 뒤, 그 위에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가 계속 쌓이고 쌓여 흔적도 남기지 않고 모든 것을 지워간다는 사실에 감동마저 느낀다.(p.224)

'흙먼지'는, 도쿄를 벗어난 주택가에 흙먼지가 날린다. 바람에 날리는 흙먼지는 과거의 세월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뒤덮는다.

나의 이러한 생활 태도는 가능한 한 다른 사람의 인생에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는 마음에서다.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의 인생을 스쳐 갔기에, B의 인생이 다른 방향으로 휘어버리는 일이 있다. 나 때문에 다른 사람 인생의 방향이 바뀌는 경우가 그것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왠지 모르게 두려워진다. 그리스도교 신자인 나는 이전에 그것을 '죄'라고 생각하여, 다른 사람의 인생에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했다. 혹시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의 인생에 흔적을 남겨야 한다면, 그것은 내 가족만으로 족하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는 오늘날까지 파국을 겪는 사소설 작가들을 흉내 내지 못하는지 모른다.(p.249-250)

하지만 이 '만약'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결혼하여 지금껏 사는 것이다. 우리 인생에서 이 우연을 빚어내고 있는 존재는 도대체 무엇일까. 우연은 정말로 단순한 우연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p.252)

'만약'은, 등에 지퍼 자국 같은 수술 흔적을 남긴 치료자들은, 내가 왜 결핵에 걸렸을까? 를 질문한다. 전차나 영화관에서 우연히 옆에 앉은 사람 중에 결핵 환자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답을 듣는데, 여기서 만약이라는 가정을 하게 된다. 만약... 그 사람 옆에 앉지 않았더라면, 결핵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수술을 결정하지 않았더라면, 아버지하고 관계가 좋았더라면... 인생의 모든 부분에서 선택의 갈림길이 있었다. 무수한 경우의 수를 단순히 우연으로 여길 수 있겠지만, 배후에는 어떤 절대자가 있는 게 아니냐는 생각을 한다. 결혼의 배경과 소설가의 삶을 드러낸다.

책을 다 읽은 후에는 사소한 문장 하나하나가 되살아나는 진기한 경험을 한다. 단편 '그림자'는 인생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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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 치마를 입은 여자
이마무라 나쓰코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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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무라 나쓰코, 홍은주 역, [보라색 치마를 입은 여자], 문학동네, 2020.

Imamura Natsuko, [MURASAKI NO SKIRT NO ONNA], 2019.

제161회 아쿠타가와상

표지가 벗겨져서 아무런 정보 없이 제목만으로 운명처럼 읽었다. 작가는 누구이고, 아쿠타가와상을 받은 것을 몰랐는데, 그만큼 보라색 치마를 입은 여자에게 끌렸나 보다. 나는 무엇을 기대한 것일까? 보라색 짧은 치마나 속옷이 아니니 관능미는 아닐 것이고, 치마를 입은 미녀가 아니니 환상 연애는 더욱 아니다. 그냥 보라색 취향을 지닌 평범하지 않은 여자의 일상이 궁금했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에 들어가 보고 싶었다.

우리 동네에 '보라색 치마'로 불리는 사람이 있다. 언제나 보라색 치마를 입고 다녀서 그렇게 불린다.(p.5)

보라색 치마가 내 언니와 닮았다면 보라색 치마가 동생인 나와도 닮았다는 말이 될까, 되지 않을까. 공통점이 없지도 않다. 저쪽이 '보라색 치마'라면 이쪽은 이른바 '노란색 카디건'이라 할 수 있으니까.(p.7)

요컨대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하면, 나는 꽤 오래전부터, 보라색 치마와 친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있다.(p.14)

아담한 체형에 푸석푸석한 검은 머리, 뺨에는 드문드문 기미가 있고... 보라색 치마는 일주일에 한 번 상점가 빵집에 들른다. 사람들 사이를 재빠르게 지나 공원에서 크림빵을 먹는다. 보라색 치마는 내 언니를 닮은 것 같고, 내 친구를 닮은 것 같고,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패널을 닮은 것 같고, 동네 마트의 캐셔를 닮은 것 같다. 나는 그녀와 친구가 되고 싶다. 나는 노란색 카디건을 입은 여자이다.

노란색 카디건은 보라색 치마를 뒤따르며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설명한다. 표면적으로 둘의 관계는 완벽한 타인이고, 관계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책을 읽는 내내 어떤 상징성을 떠올리려고 했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동시에 등장한 것이라는 생각, 타인이 의식하는 나와 내가 의식하는 나라는 생각, 자아의 분열이라는 생각... 그래서 그토록 가까운 친구가 되고 싶어 한 것은 뭔가 어긋난 것을 회복하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판단했다. 어쨌든 마지막에는 보라색 치마가 앉았던 공원의 자리에 노란색 카디건이 앉아 있다.

"미안한데요오, 안 들렸는데 다시 한번 부탁해요오."

사실은 들렸다. 히노입니다, 마유코입니다, 라고 그녀는 확실히 말했다. 일명 보라색 치마라고 합니다, 라고. 노란색 카디건의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p.31)

지금 '마유 씨'의 손톱은 새빨갛고 끝이 뾰족하다. 그 뾰족한 손톱으로 '마유 씨'는 공중전화 버튼을 누른다. 누르고는 끊고, 누르고는 끊고를 되풀이한다... 덕분에 나까지 소장 집 전화번호를 외워버렸다.(p.102)

보라색 치마는 호텔에서 청소 스태프로 일하게 된다. 육상부 출신답게 빠른 움직임으로 의외의 적응을 하고, 동료들과 친분을 쌓고, 공원의 아이들과 어울리는 등 생활의 변화가 일어난다. 하지만 가정이 있는 파견업체 소장과 사귀면서 다시 어그러지는데... 외모가 바뀌고, 사내 규정을 위반하고,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고, 관계가 틀어져서 결국에는 호텔에서 도망쳐 나간다. 평범하지 않은 여자의 일상이고,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가 분명하다. 그런데 재미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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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기담 - 운명적인 만남을 원한다면 목숨을 걸어라
아키요시 리카코 지음, 장혜영 옮김 / 대원씨아이(단행본)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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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요시 리카코, 정혜영 역, [결혼기담], 대원씨아이, 2021.

Akiyoshi Rikako, [KONKATSU CHUDOKU], 2017.

결혼에 관해서는 우리나 일본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가 보다. 나이 들어감의 서글픔, 일생을 함께할만한, 놓치고 싶지 않은, 부모의 바람... 등이 얽히고설켜 있다. 모든 게 순조로우면 좋으련만, 작가의 고약한(?) 글솜씨는 네 남녀의 결혼을 파국으로 몰아넣는다. 특히 막판 비틀기가 일품인데, 유쾌하고 따뜻한 이야기가 한순간에 끔찍하고 냉혹한 이야기로 돌변한다. 아키요시 리카코의 소설 [절대정의](아프로스미디어, 2018.), [작열](마시멜로, 2020.), [결혼기담]을 연이어 읽었다.

이상적인 남자

결혼 활동 매뉴얼

이과 여자의 결혼 활동

대리 결혼 활동

순전히 결혼이 목적인 사람의 결혼 활동은 매우 치열하다. 거센 나이의 압박을 극복해야 하고, 격렬한 쟁탈전을 벌이며, 관계 유지를 위해서는 전략적이어야 하고, 부모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 아, 복잡하고 심란하다... 이런 세상을 꼬집고 싶었을까? 끊임없이 경쟁하는 결혼 활동의 이면에는 다른 꿍꿍이가 있고, 등장하는 여자는 전부 치밀하고 계획적이다.

후회가 눈물이 되어 흐른다. 앞으로 여섯 달만 지나면 마흔이다. 최근엔 새로운 만남의 기회조차 없다. 다음번 사랑이 과연 있을까? 아니, 있다 해도 결혼을 전제로 한 교제가 가능할까?(p.10)

행복한 반면, 한편으로 의문이 고개를 쳐든다.

...이렇게 멋진 사람이 왜 지금까지 혼자였을까?

...알수록 더 괜찮은데, 그럴수록 더 이상하다. 어쩌면 뭔가 치명적인 걸 놓치고 있는 게 아닐까...(p.22)

서른 살의 화려함하고는 다르게 마흔 살을 앞둔 여자는 절박하다. 친구들은 다 결혼했는데, 자신은 이 나이에 새로운 만남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사오리는 결혼상담소 페이트(FATE)를 찾아간다.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의외로 괜찮은 남자를 소개받는다. 수수한 스타일의 미남자, 결혼 상대로는 이상적인데... 왜 이런 남자가 아직 혼자인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는 건 아닌지? 남자의 뒤를 조사한다. 나이 든 여자의 심리, 결혼을 앞둔 여자의 불안을 잘 표현하고 있다.

아이나와는 경제 관념이 안 맞는지도 모른다. 이건 결혼을 고려할 때 치명적인 단점이 아닐까......?

문득 외울 정도로 읽고 또 읽은 매뉴얼 책 속의 문장이 머리에 떠올랐다. '아무리 예쁜 여자라도 남자에게 지나치게 돈을 쓰게 만드는 여자는 배우자감으로 생각해선 안 된다. 애당초 그렇게 행동하는 시점에서 그 여자는 당신을 결혼 상대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p.84-85)

요리도 잘하고 바지런한 여자. 남을 배려할 줄 알고 마음도 넓고, 돈을 아끼는 것조차 즐길 줄 안다. 아마 이런 여자가 배우자로서는 이상적이리라.

남자는 바보다. 이렇게 좋은 여자인데 아무도 야스코를 거들떠보지 않는다... 자신을 포함해서.(p.94)

서른 살에 집에서 고독사한 친구를 보고 케이스케는 결혼하기로 마음먹는다. 거리 미팅에서 미인인 여자와 못생긴 여자를 만나는데, 운 좋게 미인인 여자와 연결되어 데이트한다. 갈수록 고급 레스토랑과 명품 소비 등으로 씀씀이는 커지고, 어느 순간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다. 하지만 못생긴 여자는 상대를 배려하고 야무진 모습을 보이는데, 점점 못생긴 여자에게 끌린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외모가 성격을 규정하지 않는다는 것, 다 사람 나름이다! 나는 예쁘고 성격 좋은 여자를...;;

그러나 다테오를 본 순간, 난생처음으로 에미의 가슴에 불이 지펴진 것이다. 이 사람을 만나고 싶어. 이 사람과 이야기해보고 싶어. 그의 신부가 되고 싶어...(p.116)

"하지만 이런 건 누구나 다 하는 거 아냐? 나처럼 툴을 사용하지 않을 뿐이지, 다들 머릿속으로 마음에 있는 사람의 취향을 분석하고 거기에 가까워지기 위해 대책을 세우잖아."(p.144)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회사에서 로봇을 개발하는 에미는 TV 프로그램 <미션 천생연분>에 출연한다. 지방 도시의 남자를 대상으로 여성이 고백하는 설정으로, 얼굴이 세상에 공개되어 상당한 각오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첫눈에 반한 남자를 만나기 위한 도전을 시작하는데, 이과 전공을 살려 모든 것을 데이터화하고 시뮬레이션을 돌려 확률을 높인다.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여자의 집념은 대단하다.

바빠서 시간을 못 내는 자식 대신 그 부모가 결혼 활동을 하는 일명 '대리 결혼 활동'. 잡지나 뉴스에 나온 걸 봤을 때, 마스오는 "세상 말세로군" 하며 혀를 찼었다.(p.168)

그렇게 생각하자 가슴이 뛰었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 식사는 뭘 좋아할까. 오랜만에, 양복점에서 맞춘 양복을 입고 갈까?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을 깨닫고 마스오는 문득 손놀림을 멈췄다. 뭐지, 이 달콤하게 들뜨는 기분은.

혹시 히사에에게 느낀 이 기분은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구가 아니라 연정이었던가...(p.189-190)

이제는 부모가 바쁜 아들을 대신해서 결혼 활동을 하는 시대가 되었다. 마스오는 이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아내의 주도로 아들의 결혼을 돕기로 한다. 이벤트에 참가한 부모는 상대 부모를 만나 자식의 정보를 교환하고, 마음에 들면 만남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런데 아들의 결혼은 뒷전이고, 맞선 상대의 엄마에게 연정을 느끼는데...

교훈적인 이야기가 한순간에 뒤통수를 때린다. 네 개의 단편이 모자라서 아쉽다. 두어 개 더 포함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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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열
아키요시 리카코 지음, 김현화 옮김 / 마시멜로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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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키요시 리카코, 김현화 역, [작열], 마시멜로, 2020.

Akiyoshi Rikako, [SHAKUNETSU], 2019.

지난주에는 이노우에 아레노의 소설 [양배추 볶음에 바치다](문학수첩, 2014.)를 읽으며 등장하는 세 여자에게 순정을 느꼈고, 이번 주에는 [절대정의](아프로스미디어, 2018.)와 [작열]을 읽으며 두 여자에게 몸서리를 쳤다. 아키요시 리카코의 소설에 나오는 여자는 하나같이 집념이 강하다. 정의의 집착, 복수의 의지가 대단한데... 불현듯 인생을 똑바로 살아야 하고, 몸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이것이 문학의 힘인가 보다.

"파편은 생각지도 못한 곳까지 날아간단 말이야.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와서 놀라게 할 때가 있어. 위험천만하지."

짙은 갈색 바닥 위에는 청소기로도 빨아들이지 못한 먼지처럼 자잘한 가루가 남아 있었다. 마치 진짜 뼛가루 같았다. 그리고 종이봉투 안에 마구잡이로 포개져 있던 흰 파편이 유골함에 담긴 뼈처럼 보였다.(p.11)

원하지 않은 불행, 어떤 이유로든 삶이 깨지는 순간이 있다. 아무리 깨끗이 치워도 파편의 조각은 어딘가에 있다가, 어느 순간에 불쑥 튀어나와 또 다른 위협이 된다. 어긋난 인연은 불행을, 날카로운 파편은 복수의 원한을 남긴다. 사랑하는 이를 위한 복수의 집념은 어디까지인가? 작열하는 지옥에서 한 여자의 복수극이 펼쳐진다.

하지만 나는 이 남자의 아내다. 이 남자를 위해 식사를 차리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고 몸을 허락한다.

나는 히데오에게 뭐든 해 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최선을 다하는 상대는 히데오가 아닌 다다토키다.(p.147-148)

증오하는 상대를 곁에 두고 충동을 억누르며 사랑하는 척해야 하는 건 지옥이나 다름없다.

결코 저물 리 없는 증오라는 태양에 온몸이 타들어 갔고 절망의 사막에 맨발이 달구어졌으며 분노의 화염이 몸속에서 이글이글 타올랐다.

하지만 나는 이 작열하는 지옥 속에서 악착같이 나아갔다.

언젠가 이 업보가 집어삼키겠지(p.149)

사키코는 복수를 위해 원수의 아내가 되었다. 눈물을 감추고, 애정 없이 맛있는 음식을 만든다. 죽은 전남편 다다토키는 아파트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는데, 현남편 히데오가 유력한 용의자였다. 얼굴을 바꾸고, 신분을 속여서 그와 결혼했다. 의사인 히데오가 일을 나가면 그때부터 집안을 뒤지며 증거를 찾는다. 어린 시절에 뺑소니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삶이 깨졌다.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불행을 극복하고 사는데, 누군가 그를 죽여서 복수의 원한을 남겼다.

지금까지 히데오와 아무리 데이트를 하고 친밀한 시간을 보내도 다다토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 이유는 늘 절대적으로 다다토키를 위해 행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간접적으로나마 다다토키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떳떳하지 못한 마음만 가득했다. 그건 분명 오늘 하루가 무척이나 즐겁기 때문이다. 히데오와 함께한 외출을 만끽하고 있기 때문이다.(p.189)

사키코는 사건의 전모를 밝히려고 애쓰지만, 구체적인 물증을 찾지 못한다. 히데오는 다정다감하고, 환자 가족으로부터 감사와 존경의 대상으로 평판이 좋다. 무엇보다 사키코를 진심으로 대하는데, 아이를 낳아 미래를 계획하고 있다. 복수의 대상인데, 당혹스러움... 길에서 교통사고를 목격하고 곧바로 응급처치로 생명을 구하는 것을 보면서, 설마 의사가 살인을? 의문이 생긴다. 날이 갈수록 살의의 충동은 애정으로 바뀌고, 결혼생활을 즐기고 있다.

심경의 변화, 심리의 묘사가 좋다. 원한의 복수를 끝마칠 것인지? 아니면 그냥 다 묻고 이대로 살 것인지? 신분이 탄로 나서 어쩌면 내가 살해당할지 모르는 팽팽한 긴장... 시작은 일본 미스터리인데, 갈수록 영미 스릴러의 느낌이다. 평범함이 소중한 인생이 있다. 거짓된 결혼이지만, 역설적으로 잠시의 행복... 어긋난 인연이 아니고 처음부터 둘이 만났더라면, 매 순간을 소중히 여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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