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 미친 반전
유키 하루오 지음, 김은모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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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키 하루오, 김은모 역, [십계], 블루홀6, 2024.

Yuki Haruo, [JIKKAI], 2023.

핵소름! 미친 반전!! 이라기 보다 당혹감!!!

유키 하루오의 소설 [방주](블루홀6, 2023.)를 읽은 독자라면, 같은 세계관을 이어가는 [십계]의 출간을 기다렸을 것이다. 노아의 방주를 모티브로, 클로즈드 서클물의 완성에 가까운 트릭, 마지막 반전의 압권은 최고이다. 이러한 전작의 명성을 기대했지만, 소설 [십계]는 당혹스러웠다. 모세의 십계명하고 연관성은 불명확하고, 장황한 트릭, 예측 가능한 결과라서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살인 사건이었다. 범인은 이 중에 있다. 그러나 아무도 경찰에 신고하려 하지 않았다.

통화권에서 이탈했기 때문은 아니다. 외딴 섬이지만 통신 상태가 양호하므로 자유로이 통화할 수 있다. 그래도 신고는 하지 않는다.

섬을 떠나려고도 하지 않는다.

...

이 섬에 있는 동안, 결코 살인범을 밝혀내서는 안 된다.(p.8-9)

본토에서 떨어진 작은 무인도 에다우치지마섬, 리조트의 개발과 관광 상품의 사업성을 조사하기 위해 방문한 9명은 살인 사건에 휘말린다. 섬의 상속인 오무로와 딸 리에, 나초 관광개발의 사와무라와 아야카와, 구사카 건축사무소의 구사카와 노무라, 하제쿠라 부동산의 후지와라와 오사나이, 그리고 원래 소유주의 친구 야노구치이다. 소유주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상속, 5년 만에 방문한 섬에는 누군가의 사용 흔적이 있고, 작업장에는 폭발물이 가득하다.

1. 섬에 있는 사람은 오늘부터 사흘간 결코 섬을 떠나지 말 것.

2. 살인이 발생했다는 사실은 물론 섬의 상황을 외부에 전달하지 말 것. 당연히 경찰 신고도 금지.

...

10. 살인범이 누구인지 알아내려 하지 말 것. 정체를 밝혀내려 하거나 살인범을 고발하지 말 것.

...(p.88-89)

밤사이 첫 번째 살인이 일어나고, 범인은 십계를 남긴다. 사흘간 섬을 떠나서는 안 되며, 범인을 찾으려고 해서도 안 된다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다른 클로즈드 서클 미스터리와 차이점이 있는데, 외부 환경에 의한 어쩔 수 없는 고립이 아니라 자발적인 고립이다. 10가지 계율 중에서 하나라도 어기면 섬을 폭파하겠다는 협박은... 좋은 날씨, 원활한 통신, 자유로운 상황에서 가족과 동료와 나를 보호하기 위해 고립을 자처한다. 오히려 신고와 범인 색출을 막아서고, 서로를 감시하며, 사흘만 버티자는 분위기이다.

"그렇다면...... 만약 어딘가에서 살인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을 때는 범인을 방해하지 않도록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나야 하는 겁니까?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에요?"

...

살인을 묵인해야 한다.

어쩔 수 없다. 부득이한 일이다.

하지만 만약 피해자가 나라면?(p.208-209)

두 번째와 세 번째 살인이 일어나고... 누가? 어떻게? 왜? 라는 대의 외에 끊임없는 의문을 생성한다. 왜 그렇게 많은 폭탄이 있는지? 왜 사흘간 섬에 있으라고 하는지? 바다 복판의 섬에서 왜 시체 처리에 공을 들이는지? 첫 번째 살인은 왜 일어났는지? 범행의 끝은 어디인지? ... 사건을 목격하게 되었을 때 개입할 것인가? 묵인할 것인가? 피해자가 사랑하는 가족이나 동료라면? 최선의 선택은?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상황윤리와 철학적인 담론이 오갈 수 있지만, 담백하게 본격 미스터리의 범주를 유지한다.

등장하는 인물의 성격이 분명하게 드러났더라면, 주인공의 각성이나 성장을 보여줬더라면, 사건의 동기를 구체화했더라면, 범인이 남긴 계율이 간결했더라면, 최종 선택의 갈림길에서 극적인 위기를 겪었더라면... 치밀한 증거 인멸 미스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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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편지
아밀 지음 / 버터북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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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밀(김지현), [사랑, 편지], 버터북스, 2024.

수많은 담론 중에서 왜 사랑이고, 편지였을까? 연정을 느껴본 지가 언제였는지, 더구나 편지라고는 세금고지서뿐인 척박한 일상에서 잠시 다른 세계를 경험한다. 소설가이고, 번역가이고, 에세이를 쓰는 저자는 사랑에 관한 문화 평론으로 서른세 개의 편지를 보내고 있다. Whispering of love letters라고 하니, 변태적(?)으로 보여도 작가의 의도대로... 편지를 받는 기분으로 사랑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인다.

01. 김행숙 - 공진화하는 연인들... 사랑이라는 것은 너무나 내밀한 주제이고, 나의 가장 소중한 보물과 가장 숨기고 싶은 치부와 가장 찬란한 모습과 가장 초라한 모습을 모두 내보이는 일이라고.(p.9)

02. 캐서린 앤 포터 - 창백한 말, 창백한 기수... 1918년에서 1920년 사이 스페인 독감이 유행하던 시절, 곧 전쟁터에 끌려가서 죽임이 임박한 젊은 군인은 시간을 아끼며 사랑을 한다.

03. 야광토끼 - 빌딩의 숲... 혼자 있을 때의 무서움, 사랑 없을 때의 두려움!

04. 동백과 다프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랑하는 이가 아닌 다른 남자에게 몸을 허락하지 않고 죽음을 선택한 여자는 식물로 다시 태어났다는 설화(신화)가 있다.

05. 세라 워터스 - 게스트... 에로틱하고 긴장감 넘치는 동성의 불륜, 아니 사랑은 안도와 좌절을 남긴다.

06. 포르노그라피... 여자아이의 성욕은 남자아이보다 더 강하게 금기시되는데, 그 금기의 명분은 여자아이의 인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니까요.(... 네 몸이 상한다. 순결을 잃는다. 망신살이 뻗친다.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한다. 인생이 망한다... 여자아이에게 주는 수많은 경고들을 떠올려보세요.)(p.50)

07. 에리카 러스트 - 엘스 시네마... 평등한 쾌락, 다양성, 공정한 보수, 투명성, 안전한 환경, 철저한 동의, 편안한 노동 환경을 추구하는 영화사가 있다.

08. 이이언 - 너는 자고... 잠과 죽음, 사랑하는 당신이 잠든 모습을 보면서

09. 유키카 - 애월... 사랑으로 일상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한다.

10. 버지니아 울프 - 올랜도... 사랑하는 사이에 이루어지는 성적 대상화는 어떤가요?

11. 이슬아 - 남궁인밖에 모르는 남궁인 선생님께... 사랑받고 싶고, 주목받고 싶고, 내 삶을 극화하고 싶고, 그걸로 타인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싶어하는 면이 나에게 분명히 있기는 있구나. 그것 자체는 결코 나쁜 게 아니구나. 그런데도 그것이 여성스러운 악덕이라고 치부하는 여성혐오와, '충분히 주체적인 인간'이 되는 것을 가로막는다고 여기는 페미니스트의 정당화 기제로 나 자신을 억압하고 있었구나.(p.103)

12. 오션 브엉 - 지상에서 우리는 잠시 매혹적이다... 사랑은 우리를 강하게 만들까요? 복종, 사랑 때문에 가능한 일들

13. 데미즈 포스카, 시라이 카이우 - 약속의 네버랜드... 수직적 관계를 중시하는 세상에서 수평적 관계를 추구하기

14. 김사월 - 나방... 부질없는 사랑, 방향 잃은 사랑이더라도 너와의 사랑 기억을 어떻게 외면할 수 있겠어요.

15. 헤르난 바스 - 팝콘 목걸이... 그림 속 소년들은 상어를 잡으러 비바람이 몰아치는 바다로 떠나면서 달랑 피케 셔츠 한 장에 반바지 한 장을 입고 있어요. 이런 모습을 보면 마치 세상 저 끝까지 가출을 하겠답시고 파자마 차림으로 집 앞 놀이터에 나온 아이를 보는 것만 같죠.(p.130-131)

16. 더 보이즈 - Bloom Bloom... 사랑의 환희에 대한 노래는 자기 자신을 꽃으로 비유하고 있다.

17. 마르그리트 유르스나스 - 왕포는 어떻게 구원되었나... 부와 권력은 진정한 예술과 양립할 수 있는가? 진정한 사랑은?

18. 안톤 체호프 -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공적인 삶과 별개로 사적인 사랑을 하는 이중생활

19. 레드클리프 홀 - 고독의 우물... 1928년 영국에서 발표한 레즈비언 소설은 비정상적이라는 이유로 20년 동안 출판 금지 처분을 받는다. 제도를 벗어난 파격적인 사랑 때문이다.

20. 존 키츠 - 이사벨라, 또는 바질 화분... 이루지 못한 사랑은, 죽은 연인의 머리를 잘라 화분에 담고 씨를 뿌려 식물로 만드는 선택을 한다.

21. 심규선 - 달과 6펜스... 이별 노래를 들으며 무모했던 사랑, 사랑의 욕망을 떠올린다.

22. 허수경 - 수수께끼, 태연 - What Do I Call You?... 사랑했던 연인에서 완벽한 타인이 되어버린 이별의 수수께끼

23. 조해진 - 가장 큰 행복... 세상이 끝나갈 때도, 인류가 멸망하는 순간에도 사랑은 계속된다.

24. 박찬욱 - 헤어질 결심... 이타적이지요? 실로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던진다는 것. 하지만 서래의 선택은 이타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었어요. 모순되게도, 지극히 이기적인 선택이기도 했습니다.(p.197)

25. 기 드 모파상 - 달빛... "언니, 우리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사랑을 사랑하는 경우가 자주 있어. 그리고 그날 밤 언니의 진정한 애인은 달빛이었던 것 같아."... 사랑의 속성... 달빛이 곧 당신이고, 당신이 곧 달빛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렇게 혼동하는 것이 사랑이 아닐까요.(p.205-206)

26. 린이한 -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 사랑의 폭력과 그 폭력에 맞서 싸우는 사랑

27. 앤 카슨 - 남편의 아름다움... 여성으로 상징되는 아름다움, 그것에 굴복해 파멸하는 남성 시인. 익숙한 구도입니다. 여성혐오적인 구도이기도 하죠. 그런데 이 구도의 성별이 반대로 뒤집힌다면 어떨까요?(p.216)

28. 진은영 - 그날 이후... 한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그 우주 전체가 소멸한 것이다.

29. 오스카 와일드 - 행복한 왕자...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태복음 18:3)

30. 뉴진스 - Ditto... 환상, 고통, 성장

31. 이수경 - 이상한 나라의 아홉 용... 깨진 도자기 파편을 이어 붙이고 금분으로 균열을 매워 새로 탄생한 오브제

32. 러블리즈 - Candy Jelly Love... 좋은 이별은 어떤 이별인가요?

맺음말... 마지막 편지

대중소설과 세계문학, 시와 노래, 설화와 신화, 영화와 전시, 그림과 동화 그리고 비참하고 끔찍한 사건을 통해서 들여다본 우리 사회의 편견과 억압을 이야기하는데, 사랑에 관해서 편지로 말하고 있다. 참신한 발상과 해박한 관념과 진솔한 경험 서술은 아주 매력적이다. 이성의 입장에서 전부 동의할 수 없지만, 어쩜 이렇게 내밀한 사랑에 관해서 다양한 이야기를 펼쳐놓을 수 있는지... 문화적 소양과 글 솜씨에 놀란다. 인용한 책을 찾아서 독서의 폭을 넓혀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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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미션 - 죽어야 하는 남자들
야쿠마루 가쿠 지음, 민경욱 옮김 / 크로스로드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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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야쿠마루 가쿠, 민경욱 역, [데스미션], 크로스로드, 2019.

Yakumaru Gaku, [SHIMEI], 2012.

일본 미스터리의 작가는 전부 무슨 학원(?)이라도 다니는 건지? 시놉시스만으로 독자의 시선을 끄는 작품이 많다. 물론 내용과 주제를 풀어가는 방식이 중요하지만, 책을 읽기 전부터 궁금증은 폭발한다. 그중에서 야쿠마루 가쿠는 단연 최고라는 생각이다. 그는 사회파 미스터리로 소년법 문제를 다루고, 죄의 본질과 깊은 참회에 관한 글을 쓰고, 이번에는 삶과 죽음을 철학적으로 마주한다. 소설 [데스미션] 죽어야 하는 남자들은 죽음의 경계에 놓인 두 남자의 이야기이다.

이제 곧 자신이 이 세상에서 사라질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됐는데도 마음의 동요는 없었다. 죽음이 닥치면 슬퍼하거나 괴로워하거나 혹은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했다. 물론 그런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런데 자신은 왜 이토록 냉정한 걸까? 어쩌면 자신은 애당초 살아 있다는 실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살아서 즐겁다거나 행복하다거나 하는 생각을 해 본 적 없었다. 자신이 이 세상을 살아온 증거를 마음속으로 찾아봐도 추억은 대부분 빛바랜 모습을 하고 있다.(p.42-43)

의학적으로 시한부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기분일까? 고칠 수 없는 병으로 죽어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심리학에서 대부분은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고, 조금이라도 더 사랑하는 이와 시간을 보내려고 할 것이다. 나도 이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고... 그런데 여기에서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한 남자는 희열을 느끼며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하고, 다른 남자는 두려움을 느끼며 자기의 일을 완수하려 한다. 극단적인 상황에서 인간의 본성은 집요하고 처절하다.

이 여자를 죽이고 싶다-. 온몸의 혈관에 매혹적인 독소가 내달리기 시작한 듯, 몸도 마음도 그 욕망에 매였다. 지금이라면...... 이 욕망을 풀어놓을 수 있지 않을까. 더는 주저할 게 없다. 자신은 곧 죽는다. 경찰에 잡히는 것은 두렵지 않다... 이제 곧 자신은 죽는다. 적어도 이 세상에서 사라지기 전에 내내 자신을 괴롭혔던, 내내 봉인해 왔던 욕망을 풀어 버리고 싶었다.(p.51)

그저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이다. 그런 인간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죽을 수밖에 없다. 죽음은 두려운 게 아니다. 자신은 눈앞에 죽음이 닥쳤기에,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였기에 비로소 이 세상의 진정한 기쁨과 가치를 깨달을 수 있었다.(p.118)

사카키 신이치는 어린 시절을 기억하지 못한다. 과거의 어떤 사고(사건)로 귀가 들리지 않는데, 고막이 찢어져서 보청기를 해야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첫사랑이었던 친구를 대학에서 다시 만나지만, 두 번이나 버림받는다. 졸업 후에는 증권회사에 다니다가 일을 그만두고 데이 트레이더가 되어 주식 매매로 큰돈을 번다. 하지만 그는 위암으로 죽어가고 있다. 감춰진 기억, 무난하지 않은 인생은 삶의 의지보다 욕망의 분출, 살의의 쾌락을 갈망한다.

아오이 료는 경시청 수사 1과 순사부장, 강력반 형사이다. 진급보다 현장에서 발로 뛰는 타입으로, 23년 차 수사관은 340구의 시체를 대면했다. 아내의 임종 순간에도 범인의 뒤를 쫓는 강한 성격의 소유자인데, 가정에 소홀한 것이 이유였을까? 딸과 아들은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서먹한 관계이다. 그는 3년 전에 치료한 위암이 재발한다. 수없이 많은 죽음을 수사한 베테랑이지만, 죽음 앞에서는 두려움이 앞선다.

"회의에서 보고하라는 말을 들은 후 너는 무슨 큰 실수를 하지 않을까 하고 내내 겁을 먹었지. 자신이 뭔가 실수하는 바람에 범인을 놓칠까 봐. 범인이 잡히지 않은 한 그 생각은 한없이 계속되지. 죽을 때까지 그런 생각을 품게 돼. 그게 이 일의 원동력이야."(p.140)

"정말 지독한 사건이더군요. 아오이 씨가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면서까지 사명감을 느끼는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그 사건을 수사하는 사람이 아오이 씨 혼자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밖에도 많잖아요."

"그렇습니다...... 저 혼자만의 집념이죠."

"그게 자녀 분들과 함께 남은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중요합니까?"(p.193-194)

사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을 때, 사카키는 이성의 제어를 놓아버리고 오랜 바람을 실현한다. 연이어 터지는 여성 연쇄살인 사건, 경찰의 수사가 진행되는데, 아오이는 생명을 다할 때까지 범인을 잡으려고 한다. 죽어야 하는 남자들의 대결, 살인 욕망과 수사 원동력의 싸움은 논리적이지 않고 감정적이다. 병마의 현실에서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라는 의문이 드는데, 결국 과거의 사건이 원인이다. 죽음 앞에서의 우선순위는, 나는 논리적으로 삶을 마무리할 수 있을까?

"종교라......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죠."

그렇게 대답하자 다카키는 조금 탐색하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말로는 잘 표현할 수 없어요. 하지만 제 죽음이 다가왔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제까지 왜 이렇게 살아왔는지, 그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제가 살면서 해야만 하는 일...... 사명 같은 것을 생각하게 됐어요."

"사명?"(p.369)

죽는 게 무섭다-.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 죽는데 왜 이토록 죽음이 두려울까-? 그것은 아마도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는 게 아닐 거라는 생각을 최근에야 하기 시작했다. 남겨 두고 떠나야 하는 소중한 존재를 생각할 때면 아오이는 견딜 수 없이 두려워졌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람과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것이 두렵고,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멋진 장소를 발견한 사람은 그 존재가 사라질까 봐 두려운 게 아닐까. 그리고 죄를 저지른 사람은 앞으로 자신이 알 수 없는 세계에 버려져 죄의 대가를 받게 될까 봐 두려워한다. 틀림없이 죽음 자체가 두려운 게 아니다. 모두 죽기 직전 자신의 인생이라는 거울을 보게 되는 일이 두려운 것이다.(p.406)

작가는 죽음 앞에서 인간의 욕망과 두려움을 말하고 있다. 이전하고는 다른 스타일로 글을 썼다는데, 철학적인 담론 외에 심리적인 고뇌와 성애의 묘사 그리고 경찰소설의 특징을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너무 힘이 들어갔던 것일까? 한 권의 소설 안에 많은 것을 담고 있어서 [사명](死命) 죽음과 생명, 죽게 된 목숨이 원서의 제목인데, [사명](使命) 맡겨진 임무로 오해하게 한다. 왜 국내 번역의 제목을 [데스미션]으로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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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올리언스에 가기로 했다
이인규.홍윤이 지음 / 버터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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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규, 홍윤이, [뉴올리언스에 가기로 했다], 버터북스, 2023.

올해는 순문학을 포함해서 일본소설에 집중하려고 했다. 하지만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여행 에세이(와 미술 에세이)의 유혹을 참지 못했다. 다행히 집에서 가까운 도서관이 '여행 및 지리 분야 특성화'라서 읽을 책은 충분하다. 북아메리카 대륙, 미국 남부, 루이지애나 주, 뉴올리언스가 눈에 들어왔다. 외국으로... 나라가 아닌 특정 도시로 떠나는 여행, 그것도 반복해서 찾는 곳이라는 게 흥미롭다.

여행지에서 버스킹하는 뮤지션들을 마주할 때면 마음이 스스로 무장해제되었고, 이왕이면 더 많은 음악을 느슨하게 듣는 여행을 해보자고 생각했다. 남들이 잘 가지 않는 곳에서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느껴보고 싶었다. 그렇다. 나는 뉴올리언스에 가고 싶었다.(p.15)

여행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준비해야 하는 건 '떠나고자 하는 마음'이다. 여비나 일정 같은 건 마음이 준비되면 따라오게 돼 있다.

...

우리는 2017년에 처음 뉴올리언스를 여행했다. 그리고 뉴올리언스를 잊지 못해 각자 한 번씩 더 방문했다. 이 책은 우리가 따로 또 같이 뉴올리언스를 여행하는 틈틈이 쓰였지만, 함께 여행한 첫 여행에 무게를 더 싣고자 했다. 출간 시점을 기준으로 달라진 상황은 추가 여행과 취재를 통해 보완했다. 이 책을 시작할 때 서점에는 (어린이책 한 권을 제외하면) 제목에 '뉴올리언스'가 들어가는 책이 없었다.(p.24-25)

이인규는 엔터테인먼트에서, 홍윤이는 디자인하고 관련한 일을 한다. 두 여자가 함께 또 따로 여행한 뉴올리언스는 입체적이면서 다양한 시각을 제공한다. 죽기 전에 꼭 가야 하는 유명한 여행지가 아니라 즉흥 연주가 흘러넘치는 곳에서 자유로운 여행을 말하고 있다. 여행의 준비는 떠나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한다. 어쩌면 내가 이 책을 읽는 이유인지 모르겠다. 코로나19 이후 어딘가로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닫힌 마음을 두드리고 있다.

지금은 꽃과 음악으로 가득한 평화로운 광장이지만 과거엔 피로 가득한 공개 처형장이었다고 전해진다. 프랑스 식민지였다가 스페인 식민지로, 다시 프랑스 땅이 되었다가 결국 미국 땅이 되기까지의 아픈 역사까지 고스란히 받아들이기 위함일까. 이곳에는 프랑스, 스페인, 미국 국기가 모두 게양대에 걸려 있다.(p.36)

케이준과 함께 나오는 연관 검색어가 바로 크리올이다. 크리올은 유럽계와 아프리카계 혼혈을 뜻하는 단어이자, 그들이 먹는 음식을 뜻하기도 한다. 크리올 음식의 정의는 대개 이렇다. '미국 남부 지역의 음식으로 프랑스, 스페인, 서아프리카, 미국 원주민, 아이티, 독일, 이탈리아 음식이 섞인 것.' 이 정의에 슬쩍 다른 나라를 끼워 넣어도 아무도 틀린 걸 못 알아차릴 정도다!(p.138-140)

뉴올리언스(New Orleans)는 미시시피 강변에 위치한 재즈의 고향이고, 프랑스와 아프리카 문화가 융합된 용광로 같은 곳이다. 역사적으로 프랑스의 식민지였다가 스페인의 지배를 당한, 아프리카계 노예의 설움과 흑백 혼혈의 갈등, 마크 트웨인의 소설 [톰 소여의 모험]과 [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배경, 윌리엄 포크너의 첫 번째 소설 [병사의 보수]를 집필한 그리고 루이 암스트롱까지... 이것은 크레올과 케이준을, 재즈 음악을 비롯한 문화적으로 융성한 도시를 형성했다. 도시 전체가 음악이고, 문화이고, 맛집인 곳이 또 있을까? 글과 사진만으로도 몸을 들썩이게 하는 아주 매력적인 곳이다.

'재즈' 페스티벌과 재즈 '페스티벌'에 가고 싶은 두 사람은 그렇게 재즈 페스티벌을 중심으로 일정을 짰다. 재즈 페스티벌 기간에 뉴올리언스에 가려면 우선 경비가 조금 더 든다. 페스티벌은 매년 4월 말에서 5월 초까지 2주간 열리며 이때가 뉴올리언스 여행의 성수기다.(p.99-100)

뉴올리언스에서는 연간 약 130건 이상의 축제가 열린다. 1년이 약 52주인데 축제가 130건 이상이라니... 역산하면 이곳에선 매주 두 건 이상의 축제가 열리고 있는 셈이다!(p.142)

축제의 도시로 떠나는 여행은... 잭슨 스퀘어, 버본 스트리트, 프리저베이션 홀, 유러피언 재즈펍, 프렌치먼 스트리트, 뮤지컬 레전드 공원, 프렌치 쿼터, 뉴올리언스 재즈 앤드 헤리티지 페스티벌, 레코드숍에서의 재즈를 안내한다. 케이준과 크리올 음식, 굴 축제, 맛없는 검보, 흙 맛 나는 커피와 쿠바에는 없는 쿠바 샌드위치, 카페 뒤 몽드와 카페 베녜에서의 맛 경험은 경이롭다. 로열 스트리트, 현대 미술관, 포크너 하우스 북스, 루이 암스트롱 공원, 스트리트 카, 미시시피 강, 재즈 박물관과 남부 미술관은 꼭 가보고 싶은 곳이다.

여행 이야기가 이렇게 재미있다니... 한동안 잊고 있었던 여행의 즐거움을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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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정원 - 제151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오늘의 일본문학 17
시바사키 도모카 지음, 권영주 옮김 / 은행나무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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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시바사키 도모카, 권영주 역, [봄의 정원], 은행나무, 2016.

Shibasaki Tomoka, [HARU NO NIWA], 2014.

제151회 아쿠타가와상

기억과 만남의 이야기라고... 봄이라서 계절하고 어울리는 책을 읽고 싶었다. 당분간 아쿠타가와상하고는 인연을 끊으려고 했는데, 도서관의 일본소설 코너에서 순문학은 전부 문학상하고 연관이 있다. 이쯤이면, 운명인듯하다. 소설 [봄의 정원]은 글로 쓴 사진집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중심 내용을 사진(또는 삽화)으로 수록하면 어땠을까? 상상을 자극해서 이런저런 사연을 덧붙이는데, 기억과 만남보다는 헤어짐의 기억에 관해서라는 생각이다.

여자는 이따금 몸을 내밀었다. 그러면 또 얼굴이 보였다. 검은 테 안경에 다소 짧고 어중간한, 굳이 말하자면 단발머리. 2월에 이사 왔다. 연립 앞에서도 몇 번 본 적이 있는데, 서른 살 넘은 나이, 자신과 같거나 약간 연하일 것이라고 어림짐작했다. 키가 작고, 맨날 티셔츠나 트레이닝복 같은 옷만 입는다. 스케치북 너머에서 여자가 목을 쑥 뺀다. 이쪽을 향해 머리를 숙인다. 다로는 그제야 비로소 여자가 보는 게 정면에 있는 주인집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로의 집이 있는 방향, 주인집 옆집. 물빛 집.(p.8)

다로는, 아버지는 10년 전에 돌아가시고, 아내와는 3년 전에 이혼했다. 그러면서 급하게 이사한 곳이 지금 사는 연립주택 뷰 팰리스 사에키 Ⅲ이다. 2층 끝에는 니시라는 여자가 살고 있는데, 그녀는 베란다에서 맞은편 집을 엿보고 있다. 물빛이 정확히 무슨 색인지 모르겠지만, 물빛 집을 주의 깊게 관찰한다.

부지의 3분의 1 정도는 정원이다. 연립에서 떨어져 있는 쪽이라 다로의 집에서 정원은 보이지 않는다. 골목 모퉁이에 해당되는 위치, 담장 안에 커다란 목백일홍이 있다. 나무껍질이 얼룩덜룩하게 벗겨진 매끄러운 줄기 덕에 다로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약간 거리를 두고 두 그루, 중간 크기와 작은 낙엽수도 보인다. 이 집 앞은 어쩌다 가끔 지날 뿐이지만, 이 목백일홍은 꽃이 자주색, 중간 크기 나무는 흰 매화, 작은 것은 산벚나무 같은 꽃이었다고 기억한다.(p.19)

다로는 출근하는 길에 니시를 보았다. 그녀는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금고 같은 집을 천천히 돌면서 담장 안을 들여다보려고 한다. 물빛 집은 확실히 눈에 띄는 서양식 저택 같은 건물이다. 적갈색 기와지붕, 스테인드글라스를 한 창문과 현관, 멋과 세월이 느껴지는데, 1년 가까이 비어 있다. 그녀는 왜 그 집에 관심을 두고 있을까?

"혹시 가능하면 그 댁 베란다 난간에 올라갈 수 없을까 하는데요. 원래는 여기 바로 윗집에서 제일 잘 보이겠지만, 아시죠, 벌써 이사 가신 거. 절대 강도질을 계획한다든지 몰카 같은 건 아니고요. 그냥 좀, 음, 그러니까 저 집을 좋아하는 것뿐이에요."(p.32)

그림을 그리는 니시는 물빛 집을 보고 싶다면서 다로에게 말을 건넨다. 그녀의 집보다 그의 집이 물빛 집을 보기에 적당하다고 여겼는지... 어쨌든, 새로운 만남의 시작이다. 그녀는 자신이 왜 그 집을 좋아하는지를 들려준다.

"이 집이 그 집이에요."

큰 판형의 얇은 책은 <봄의 정원>이라는 사진집이었다. 책을 펴자 앨범처럼 한 페이지에 사진 네댓 장이 나열되어 있었다. 대다수가 흑백사진이다.

"보세요. 똑같죠?"(p.38-39)

니시가 보여준 <봄의 정원>은 물빛 집을 찍은 사진집이다. 유리 문안에는 널찍한 툇마루가 있고, 다다미방이 이어진 일본식 구조이다. 집 안의 풍경과 함께 젊고 머리가 짧은 여자와 몸이 마른 장발의 남자가 나온다. 1964년 도쿄 올림픽이 열린 해에 지은, 다양한 요소가 포함된 건축물이다. 사진집 <봄의 정원>은 20년 전에 살았던 부부의 일상을 촬영한 것이라고 하는데, 남편은 광고 감독이고 아내는 소극단 배우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니시는 자기의 이야기... 사진집을 보면서 처음으로 결혼과 사랑을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빈집이었을 때는 정지되어 있던 시간이 움직이고 있었다. 건물 자체는 집 안에 아무도 없었던 일주일 전과 똑같은데, 그곳의 기척이며 색조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그곳에서 생활하는 사람이 있는 데 그치지 않고 집 자체가 별안간 생명을 되찾은 듯했다. 사진과 마찬가지로 언제까지고 바라볼 수 있을 줄 알았던 집이 자기 의사를 가지고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았다. 과장된 표현일 수도 있지만, 인형이 인간이 된 것처럼 살아 숨 쉬는 존재의 느낌이었다. 집 앞을 지날 때마다, 우편함에서 빠져나온 봉투라든지 베란다에 널어놓은 시트가 보일 때마다 누가 몸속을 슥 어루만진 감촉이 들었다.(p.57-58)

물빛 집에 새로운 가족이 이사 왔다. 같은 집이지만, 단 일주일 만에 느낌이 다르다. 멈추었던 시간이 움직이고, 색조가 바뀌고, 이전에는 없던 생명력이 느껴진다. 니시는 친분을 쌓아 집을 구경하고, 다로는 집에 관해서 더 많은 것을 알게 된다.

다로는 문득 생각나 사 씨에게 물빛 집에 전에는 어떤 사람이 살았느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사 씨가 이 연립에 17년 살았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사 씨가 이사 왔을 당시 우시지마 다로와 우미무라 가이코는 이미 그 집에 살지 않았다. 사 씨의 기억으로는 미국인 부부가 약 10년, 그 뒤 부부와 중고생 형제가 5년쯤 살았다. 부부와 중고생 형제는 다로도 본 적이 있는 듯했지만 기억이 확실하지는 않았다.(p.74)

누구나 집과 함께한 세월이 있다. 물빛 집은 <봄의 정원> 사진집을 출간한 이후에 행복해 보이던 두 사람은 이혼했고, 미국인 부부가 10년을, 중고생을 둔 가족이 5년을 살다가 나갔다. 이것을 목격하고, 교류한 이웃이 있고... 지금보다 젊은 시절의 추억이 남아 있다. 그때마다 물빛 집은 다른 색을 띠며 시간의 흐름을 맞이했겠지... 새로운 만남은 지나가고, 헤어짐의 기억이 남아 있다.

살면서 얼마나 많은 인연이 스쳐 지나가고 있을까? 죽은 아버지, 헤어진 아내, 그렇게 살게 된 집... 다로와 니시의 만남은 별다른 진전 없이 끝나고... 또 다른 곳에서 새로운 삶을 이어간다. 시작과 끝이 불분명한 불친절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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