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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의 등산일기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1
미나토 가나에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19년 4월
평점 :
미나토 가나에, 심정명 역, [여자들의 등산일기], 비채, 2019.
Minato Kanae, [YAMA ONNA NIKKI], 2014.
어쩌면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지난 3월 말에 깜짝 방한한 미나토 가나에를 만났다. 이번에는 살인이 없고, 등산하는 여자들에 관해서이다. 어느 인터뷰에서 늘 놀라움을 주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는데, 치유 이야기라니... 이전과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다른 모습이다. 그런데 이게 매우 자연스럽고, 치밀한 글솜씨는 색다른 감동을 연출한다. 남자인데도 여자의 고민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할 정도로 심리묘사는 대단하다. 여성주의든 뭐든 소설은 일단 재미부터... 이러한 공식(?)을 잘 따르고 있다. 소설 [여자들의 등산일기]는 8개의 단편 모음이다.
묘코 산
히우치 산
야리가타케
리시리 산
시로우마다케
긴토키 산
통가리로
가라페스에 가자
이십 대에서 사십 대까지 등장하는 여자들은 모두 나름의 사연을 안고 산을 찾는다. 결혼에 관해서, 과거의 틀에서, 가족 관계에서, 자매 사이에서, 삶의 변화에서, 옛사랑을 추억하며, 산에서 등산 친구 사귀기... 등 현실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 산을 오르며 하나같이 대자연 속에서 고민을 잊고 자아를 성찰하는데, 철학적이라기보다는 일상적이다.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산에서 만나는 사람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결국에는 관계의 문제인가? 등산의 여정은 매우 사실적이고, 당장 주말에 산에 가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다.
백화점을 그만두는 것? 편리한 도시를 떠나 시골로 옮겨가는 것? 시부모와 동거하는 것? 치매에 걸린 할머니 병시중을 거들어야 한다는 것?
이런 것들에 거부감을 느끼는 나는 인간으로서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있는 걸까?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 일은 누구나 받아들일까? 이 정도 일로 결혼을 망설이기 시작한 나는 이제까지 내가 경멸해온 제멋대로인 여자들과 같은 부류인 걸까?(p.20-21)
마루후쿠 백화점에 근무하는 리쓰코는 시댁의 부담감으로 결혼을 고민한다. 약혼자는 결혼 후에 고향으로 내려가서 가업을 잇고, 부모를 모실 생각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가, 시부모를 모시고, 병시중을 해야 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하필이면, 같이 산에 오르는 동기 유미는 상사와 불륜을 벌이고 있다. 이런 그녀가 괜히 못마땅하다!
- 또 그러신다, 거품경제 시대의 분위기가 미쓰코 씨한테는 고스란히 남아 있잖아요.
배알이 뒤틀리는 것을 참으면서 고하나에게 어디가 그 시대 같으냐고 물어보았다.
- 머리 모양이라든지, 화장이라든지, 옷이라든지, 가방이라든지, 시계라든지, 구두라든지......
그만 됐어, 하고 말을 끊었다.(p.63-64)
독신으로 거품경제 시절의 화려한 이미지가 남은 미쓰코는 맞선 파티에서 간자키를 만났다. 수수한 남자는 등산 데이트를 제안하고, 꼼꼼한 준비로 그녀에게 산행의 즐거움을 알려주려고 한다. 그런데 남자가 알지 못한 게 있었으니... 시골 출신의 여자가 도쿄의 대기업에 들어가서 지낸 세월은 그녀를 다른 사람으로 보이게끔 했다. 자신을 속이는 생활, 결국 여자는 본색(?)을 드러낸다.
어머니도 실은 산에 오르고 싶었던 게 아닐까? 갑자기 높은 산에 가려면 저항감이 들겠지만, 정년퇴직해서 시간이 생긴 아버지가 느긋하게 오를 수 있는 산에 데려가 주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가고 싶지 않은 사람을 억지로 데려가는 것은 좋지 않다. 하지만 가고 싶은 사람에게 집에서 기다려달라고만 하다니, 생각해보면 엄청 제멋대로 아닌가. 딱히 아버지라고 시험을 쳐서 산에 올라갈 허가를 받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p.127-128)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와 등산을 했던 마키노는 정상 도전이 이번이 세 번째이다. 대학 동아리에서 함께 오르다가 부상자가 나와서 실패, 아버지와 함께 오르다가 기상 악화로 포기해야만 했다. 그 뒤로 혼자하는 산행을 즐기게 되었고, 이번에는 꼭 정상에 설 것이다. 산 중턱에서 우연히 중년의 남녀를 만나는데, 그들은 같이 동행할 것을 제안한다. 초보자를 안내하는 압박감과 가족에 관한 생각이 교차한다.
분명 비가 올 것이다.
욕탕에 들어가 있던 언니도 저녁 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으니 똑같은 생각을 했을 터이다. 십오 년 동안 땅을 밟을 필요가 없는 사모님으로 살다 보니 농갓집 딸의 감은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고 자란 집에서 만들어진 징크스는 잊지 않았으리라.
미야가와 집안에 이벤트가 있으면 반드시 비가 내린다.(p.148)
미혼으로 여전히 고향에 머무는 노조미는 출가한 언니와 오랜만에 등산을 하게 된다. 자매가 모이면 어김없이 내리는 빗방울은 이번에도 변함없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쌓인 감정의 골은 빗길 산을 오르며 더 고조되고... 서로가 알지 못했던 것을 이야기하게 된다.
- 어디 몸이라도 안 좋은 거야?
- 아니, 이제부터 할 이야기를 술김에 했다고 생각하지 말았으면 해서.
남편은 이렇게 말하면서 텔레비전을 끄더니 내 쪽으로 돌아앉았다.
- 이혼해줘.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들은 말을 머릿속에서 세 번 반추한 뒤에 나온 것은 왜라는 한마디였다.
- 자유로워지고 싶어.(p.203-204)
십오 년의 결혼생활을 이제 끝내야 하는가? 남편의 이혼 이야기는 청천벽력이었다. 살면서 남편을 간섭하지도, 불평하지도 않았다. 식사와 청소 전반적인 가사는 깔끔하게 했다. 육아에서도 성실했고... 완벽한 전업주부였다. 그런데 남편은 자유롭고 싶다며 이혼을 말한다. 이혼한 여자로 딸을 데리고 고향집에 돌아가서 제대로 살 수 있을까? 혼자서 짊어져야 하는 짐이 무겁다.
결국 일본 제일은 되지 못했다. 완료형인 이유는 배구를 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대학교 3학년 겨울에 발을 삐어 왼쪽 다리의 인대를 다쳤다. 배구를 하다 다쳤다면 그나마 수긍할 수 있었을 텐데, 취업 활동 설명회에 가던 도중에 넘어지다니 농담 같다. 산 지 얼마 되지 않아 익숙하지 않은 5센티미터 힐의 험프스를 신고 비틀비틀 걷는데 뒤에서 자전거가 달려왔다. 황급히 피하려다 도랑에 빠졌고 결국 이 꼴이 되었다.(p.252)
마이코는 부상으로 배구를 그만두고, 다른 방향으로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 선수였을 때 하지 못한 일을 하는데... 머리를 기르고, 패션 브랜드를 연구하고, 메이크업의 달인이 되고, 독서를 하고, 혼자 외식을 한다. 하지만 배구와는 다르게 뭔가 채워지지 않는 부족함이 있다. 연극을 보고, 사인을 받으러 가고, 고백을 하고, 등산을 한다... 그래도 부족하면 배구화를 사기로 한다.
자유여행의 반대말이 패키지여행이라면 나는 단연코 자유여행파다. 여행의 즐거움은 반이 계획을 세우는 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취미를 파다 보니 여행회사에 취직했다. 하지만 자유여행도 두 가지 패턴이 있다고 요시다는 말한다. 하나는 출발하기 전에 직접 계획을 짜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내가 생각하는 자유여행. 또 하나는 세세한 것은 무엇도 정하지 않고 맨 처음 목적지로 가서 거기서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는, 요시다가 생각하는 자유여행.(p.280)
여행사에서 일하는 유즈키는 요시다와 뉴질랜드로 여행을 떠난다. 유즈키는 자유롭게 여행 계획을 세우는 자유여행을, 요시다는 무엇 하나 정하지 않고 마음대로 행동하는 자유여행을 추구한다. 서로 같은듯하면서 다른 둘의 스타일은 연애와 여행에서 많은 에피소드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삶을 살아가는 방식은 전혀 다르기에 끝까지 함께하지는 못한다.
산은 생각을 하기에 딱 좋다. 동행이 있어도 말없이 한 줄로 걷고 있으면 자기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때 마음속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문제가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떠오른다. 자기 발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으면 인생도 자기 발로 나아가야만 한다고, 일상생활에서는 외면하던 문제와 똑바로 마주 봐야 할 듯한 느낌이 든다. 이 발로 정상에 도착하면 가슴속에도 빛이 비쳐드는 것 아닐까 하는 기대가 가는 길을 격려해준다. 그렇게 해서 자기 자신과 마주 보면서 걷는 것이 등산이라 생각한다.
산에 오르는 사람은 모두 크고 작든 고민을 갖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p.361-362)
등산이 주는 즐거움... 고민 없이 산을 오르는 사람이 있을까? 결혼해서 직장을 그만두고 시댁 식구들과 얼굴을 맞대고 살아야 한다는 부담감은 일본이나 우리나 별반 차이가 없는듯하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덧칠해진 내 모습은 실제가 아니고, 본래의 나를 잃어버린 채 타인이 기대하는 옷을 입고 있다. 혼자서 다 해낸 줄 알았는데, 내 뒤에는 보이지 않는 도움이 있었다. 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와 자매는 경쟁자가 아니다. 무거운 짐을 혼자서 짊어지기보다는, 때로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해도 된다. 다른 방향으로 시작하는 새로운 일은 적응하기가 어렵다. 인생에서 결단의 순간에는 누군가의 격려와 위로가 필요하다. 산을 마주하고 등산 친구 사귀기... 이런저런 메시지가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