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은 잠들다
미야베 미유키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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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베 미유키, 권일영 역, [용은 잠들다], RHK, 2006.

Miyabe Miyuki, [RYU WA NEMURU], 1991.

제45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타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면? 누구나 한 번쯤은 해보았을 이런 발칙한 상상은 멜 깁슨 주연의 영화 <왓 위민 원트>(2000.)로 만들어졌다. 광고 기획자로 일하는 주인공은 어느 날 욕실 바닥에 넘어져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난 뒤에 여자들의 속마음이 들린다는 설정이다. 그는 회사에서 아이디어를 훔쳐 승진하고, 또 좋아하는 여자를 유혹한다. 현실에서 실제로 타인의 마음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다면, 이것은 희극이 아니라 비극에 더 가까울지 모르겠다. 영화보다 훨씬 먼저 출간한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용은 잠들다]는 마음을 읽는 두 초능력 소년에 관한 이야기이다.

  "범인, 잡힐까요?"

  신지가 물었다. 고개를 들고 경찰관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범인이라니?"

  "당연하죠. 맨홀 뚜껑을 열어둔 사람이요. 설마 수도국 직원이 닫는 걸 깜빡했을 리는 없잖아요."(p.31)

  고사카 쇼고는 주간지 <애로 Arrow>의 기자이다. 폭풍우 몰아치던 날에 길가에 펑크 난 자전거를 세워둔 이나무라 신지라는 소년을 차에 태워주는데, 이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둘은 얼마 가지 않아서 도로 한복판에 빗물이 거센 물살을 이루며 흘러가는 것을 보게 된다. 그곳은 맨홀 뚜껑이 열려 있었고, 곧이어 한 아이의 실종 소식이 전해진다. 소년은 누군가 의도적으로 맨홀을 열어 놓았고, 지나가던 아이가 빠져 죽었다는... 그래서 범인을 잡아야 한다는 말을 한다.

  "아니, 능력을 갖고 태어난다......, 이건 정확한 표현이 아니야. 능력은 누구나 갖고 있어. 잠재적으로는 말이야. 다만 대부분 그걸 밖으로 끌어낼 능력이 없는 거지. 밖으로 끌어내는 능력도 함께 갖고 태어나는 아이는 적다고 바로잡아야겠네. 그 양쪽의 능력을 함께 갖추고 있는 사람이 초능력자, 사이킥이지. 그리고 말이야, 내 경우에도 그랬지만 초능력에 가속도가 붙게 되는 것은 열한두 살쯤부터인 모양이야. 2차 성징이라던가? 다른 능력도 마찬가지지. 예술적인 재능이나 운동 능력 같은 것 말이야. 나이가 그쯤 되면 아이 스스로도 알게 되지. 아,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스케치를 더 잘한다, 달리기에서는 누구에게도 뒤진 적이 없다. 몇 번 연습하지도 않았는데 금방 잘해 낼 수 있구나. 그런 것들이 재능이겠지? 어른들은 흔히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나? 이 애는 그림에 재주가 있다. 친척 가운데 누구누구를 닮았다, 분명히 재능이 있어, 유전이야, 라고."(p.77-78)

  "사이킥의 능력도 다른 재능과 마찬가지야. 갖고 있는 사람도 있고, 갖고 있지 않은 사람도 있어. 연습하지 않으면 그 재능은 잠들어 버리지. 연습을 하면 좋아져. 대개는 말이야. 그리고 어느 사이킥이 지니고 있는 능력이 크지 않을 경우 본인이 기분 나빠하거나, 주변 환경이 좋지 않거나 해서 그 힘을 잠들게 해 버린다 해도 전혀 문제될 게 없어. 세계적인 화가가 될 수 있을 만큼 그림에 큰 재능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라 해도 본인이 그림을 그릴 생각이 없다면 평생 그림 한 장 그리지 않고도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잖아? 하지만 사이킥의 경우 그리 쉽게 잠들어주지 않을 정도로 능력이 클 때는 그렇지가 않아. 간단치가 않지. 본인이 그것을 컨트롤할 수 있도록 필사적으로 연습하지 않으면 치명적으로 위험해지는 거야!"(p78)

  어처구니없는 대화였다... 신지는 상대방의 기억을 스캔해서 읽을 수 있다고 한다. 초능력자, 사이킥(Psychic)이라고도 하는 남과 다른 능력을 지닌 존재라고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설명... 능력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대부분 그것을 밖으로 끄집어내지 못한다. 능력은 성장 환경의 영향을 받는데, 재능처럼 개발하기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능력을 컨트롤하지 못하면 치명적인 위험에 빠질 수 있다... 기자는 눈속임에 넘어가지 않아야 한다.

  현실과 비현실, 합리와 불합리는 아주 잘 어우러진 형태로 공존한다.

  영원히 교차할 일이 없는 철길과도 같다. 우리는 그 양쪽에 바퀴를 얹고 달리고 있다. 그래서 철저하게 현실적이어야 할 정치가가 무당에게 점을 보거나, 현실을 초월해야 할 종교가가 세금을 안 내려고 머리를 쥐어짠다. 인텔리전트 빌딩을 지으면서도 진지한 얼굴로 고사를 지낸다. 합리의 레일 쪽으로 너무 기울어지면 냉혈한이 되고, 불합리의 레일로 기울어지면 광신도가 된다. 그리고 결국에는 어느 지점에선가 탈선하게 되어 있다.(p.88-89)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서, 합리와 불합리 사이에서... 그가 본 것은 전부 사실일까? 남의 기억을 읽는다고 해도 그것을 객관적으로 드러낼 방법은 없다. 누구나 속마음을 부인하고 거짓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진실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 감정으로만 치우치면 자칫 일을 그르칠 수 있다. 세상 경험 없는 소년은 맨홀 뚜껑을 열어 놓은 범인을 찾았어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초능력이 무기력하고, 오히려 정신세계를 갉아먹는 부정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보고 싶지 않고, 듣고 싶지 않은 것을 모두 보고, 듣는다면... 이것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끊임없이 밀려오는 속마음, 속마음, 속마음의 홍수. 거기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능력을 컨트롤해야 할 뿐 아니라 자기감정까지 자제해야 한다. 속된 말로 듣고도 못 들은 척, 보고도 못 본 척해야 한다. 보통 사람들은 다른 이가 말이나 태도로 표현하지 않는 한 주위 사람들의 속마음을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다소 문제가 있어도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전부 들린다면? 듣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면? 듣지 않아야 마음의 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과연 그 호기심을 완전히 억누를 수 있을까? 그리고 상대방의 진심을 알게 되고 나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로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p.144-145)

  오다 나오야라는 소년이 편집부를 찾아온다. 신지의 능력을 전면 부정하면서 그가 속임수를 썼다고 주장한다. 초능력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으니 더는 만나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한다. 신지와 나오야는 어떤 관계일까? 초능력을 말하는 소년과 이것을 부인하는 소년 사이에는 어떤 비밀이 있는 것일까? 눈앞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진짜 사이킥이라면, 그에 걸맞은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조사하면서 주변 사람의 이야기를 청취하기로 한다.

  오다 나오야는 어떤 시행착오를 거쳤기에 그런 결론에 다다른 것일까. 툭하면 다투는 어머니와 할머니의 모습. 인생의 목적을 잃고 술에 빠져든 아버지. 그들의 속마음과 고뇌 그리고 꿈과 희망. 그런 것들이 빤히 보이면서도 자기 힘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걸 깨달아, 모든 걸 단절하고 살아가는 길을 선택한 것일까.(p.392-393)

  "이따금 이런 생각을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정말로 자기 자신 안에 용을 한 마리 키우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요. 상상도 할 수 없는 능력을 갖춘, 신비한 모습의 용을 말이죠. 그 용은 잠들어 있거나, 깨어 있거나, 함부로 움직이고 있거나, 병들어 있거나 하죠."(p.469)

  우리는 모두 자기 자신 안에 용을 한 마리씩 키우고 있는 것일까? 남과 다른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이런저런 여건으로 끌어내지 못하고 다른 삶을 사는 것은 아닐까? 용이 깨어날 때,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그런데 특별한 능력은 대가를 감수해야 한다. 타인의 생각을 읽을 수 있으면, 상처로 결국 단절된 삶을 살게 된다. 고사카 쇼고에게 의문의 편지가 배달되고, 누군가 과거의 기억을 건드리며 협박을 한다. 진실을 알기에 피할 수 없는 싸움이 시작되고, 또 누군가는 그만큼의 아픔을 겪어야 한다. 초능력의 명과 암을 확실히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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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의 등산일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1
미나토 가나에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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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토 가나에, 심정명 역, [여자들의 등산일기], 비채, 2019.

Minato Kanae, [YAMA ONNA NIKKI], 2014.

  어쩌면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지난 3월 말에 깜짝 방한한 미나토 가나에를 만났다. 이번에는 살인이 없고, 등산하는 여자들에 관해서이다. 어느 인터뷰에서 늘 놀라움을 주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는데, 치유 이야기라니... 이전과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다른 모습이다. 그런데 이게 매우 자연스럽고, 치밀한 글솜씨는 색다른 감동을 연출한다. 남자인데도 여자의 고민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할 정도로 심리묘사는 대단하다. 여성주의든 뭐든 소설은 일단 재미부터... 이러한 공식(?)을 잘 따르고 있다. 소설 [여자들의 등산일기]는 8개의 단편 모음이다.

  묘코 산

  히우치 산

  야리가타케

  리시리

  시로우마다케

  긴토키 산

  통가리로

  가라페스에 가자

  이십 대에서 사십 대까지 등장하는 여자들은 모두 나름의 사연을 안고 산을 찾는다. 결혼에 관해서, 과거의 틀에서, 가족 관계에서, 자매 사이에서, 삶의 변화에서, 옛사랑을 추억하며, 산에서 등산 친구 사귀기... 등 현실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 산을 오르며 하나같이 대자연 속에서 고민을 잊고 자아를 성찰하는데, 철학적이라기보다는 일상적이다.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산에서 만나는 사람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결국에는 관계의 문제인가? 등산의 여정은 매우 사실적이고, 당장 주말에 산에 가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다.

  백화점을 그만두는 것? 편리한 도시를 떠나 시골로 옮겨가는 것? 시부모와 동거하는 것? 치매에 걸린 할머니 병시중을 거들어야 한다는 것?

  이런 것들에 거부감을 느끼는 나는 인간으로서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있는 걸까?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 일은 누구나 받아들일까? 이 정도 일로 결혼을 망설이기 시작한 나는 이제까지 내가 경멸해온 제멋대로인 여자들과 같은 부류인 걸까?(p.20-21)

  마루후쿠 백화점에 근무하는 리쓰코는 시댁의 부담감으로 결혼을 고민한다. 약혼자는 결혼 후에 고향으로 내려가서 가업을 잇고, 부모를 모실 생각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가, 시부모를 모시고, 병시중을 해야 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하필이면, 같이 산에 오르는 동기 유미는 상사와 불륜을 벌이고 있다. 이런 그녀가 괜히 못마땅하다!

  - 또 그러신다, 거품경제 시대의 분위기가 미쓰코 씨한테는 고스란히 남아 있잖아요.

  배알이 뒤틀리는 것을 참으면서 고하나에게 어디가 그 시대 같으냐고 물어보았다.

  - 머리 모양이라든지, 화장이라든지, 옷이라든지, 가방이라든지, 시계라든지, 구두라든지......

  그만 됐어, 하고 말을 끊었다.(p.63-64)

  독신으로 거품경제 시절의 화려한 이미지가 남은 미쓰코는 맞선 파티에서 간자키를 만났다. 수수한 남자는 등산 데이트를 제안하고, 꼼꼼한 준비로 그녀에게 산행의 즐거움을 알려주려고 한다. 그런데 남자가 알지 못한 게 있었으니... 시골 출신의 여자가 도쿄의 대기업에 들어가서 지낸 세월은 그녀를 다른 사람으로 보이게끔 했다. 자신을 속이는 생활, 결국 여자는 본색(?)을 드러낸다.

  어머니도 실은 산에 오르고 싶었던 게 아닐까? 갑자기 높은 산에 가려면 저항감이 들겠지만, 정년퇴직해서 시간이 생긴 아버지가 느긋하게 오를 수 있는 산에 데려가 주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가고 싶지 않은 사람을 억지로 데려가는 것은 좋지 않다. 하지만 가고 싶은 사람에게 집에서 기다려달라고만 하다니, 생각해보면 엄청 제멋대로 아닌가. 딱히 아버지라고 시험을 쳐서 산에 올라갈 허가를 받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p.127-128)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와 등산을 했던 마키노는 정상 도전이 이번이 세 번째이다. 대학 동아리에서 함께 오르다가 부상자가 나와서 실패, 아버지와 함께 오르다가 기상 악화로 포기해야만 했다. 그 뒤로 혼자하는 산행을 즐기게 되었고, 이번에는 꼭 정상에 설 것이다. 산 중턱에서 우연히 중년의 남녀를 만나는데, 그들은 같이 동행할 것을 제안한다. 초보자를 안내하는 압박감과 가족에 관한 생각이 교차한다.

  분명 비가 올 것이다.

  욕탕에 들어가 있던 언니도 저녁 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으니 똑같은 생각을 했을 터이다. 십오 년 동안 땅을 밟을 필요가 없는 사모님으로 살다 보니 농갓집 딸의 감은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고 자란 집에서 만들어진 징크스는 잊지 않았으리라.

  미야가와 집안에 이벤트가 있으면 반드시 비가 내린다.(p.148)

  미혼으로 여전히 고향에 머무는 노조미는 출가한 언니와 오랜만에 등산을 하게 된다. 자매가 모이면 어김없이 내리는 빗방울은 이번에도 변함없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쌓인 감정의 골은 빗길 산을 오르며 더 고조되고... 서로가 알지 못했던 것을 이야기하게 된다.

  - 어디 몸이라도 안 좋은 거야?

  - 아니, 이제부터 할 이야기를 술김에 했다고 생각하지 말았으면 해서.

  남편은 이렇게 말하면서 텔레비전을 끄더니 내 쪽으로 돌아앉았다.

  - 이혼해줘.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들은 말을 머릿속에서 세 번 반추한 뒤에 나온 것은 왜라는 한마디였다.

  - 자유로워지고 싶어.(p.203-204)

  십오 년의 결혼생활을 이제 끝내야 하는가? 남편의 이혼 이야기는 청천벽력이었다. 살면서 남편을 간섭하지도, 불평하지도 않았다. 식사와 청소 전반적인 가사는 깔끔하게 했다. 육아에서도 성실했고... 완벽한 전업주부였다. 그런데 남편은 자유롭고 싶다며 이혼을 말한다. 이혼한 여자로 딸을 데리고 고향집에 돌아가서 제대로 살 수 있을까? 혼자서 짊어져야 하는 짐이 무겁다.

  결국 일본 제일은 되지 못했다. 완료형인 이유는 배구를 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대학교 3학년 겨울에 발을 삐어 왼쪽 다리의 인대를 다쳤다. 배구를 하다 다쳤다면 그나마 수긍할 수 있었을 텐데, 취업 활동 설명회에 가던 도중에 넘어지다니 농담 같다. 산 지 얼마 되지 않아 익숙하지 않은 5센티미터 힐의 험프스를 신고 비틀비틀 걷는데 뒤에서 자전거가 달려왔다. 황급히 피하려다 도랑에 빠졌고 결국 이 꼴이 되었다.(p.252)

  마이코는 부상으로 배구를 그만두고, 다른 방향으로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 선수였을 때 하지 못한 일을 하는데... 머리를 기르고, 패션 브랜드를 연구하고, 메이크업의 달인이 되고, 독서를 하고, 혼자 외식을 한다. 하지만 배구와는 다르게 뭔가 채워지지 않는 부족함이 있다. 연극을 보고, 사인을 받으러 가고, 고백을 하고, 등산을 한다... 그래도 부족하면 배구화를 사기로 한다.

  자유여행의 반대말이 패키지여행이라면 나는 단연코 자유여행파다. 여행의 즐거움은 반이 계획을 세우는 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취미를 파다 보니 여행회사에 취직했다. 하지만 자유여행도 두 가지 패턴이 있다고 요시다는 말한다. 하나는 출발하기 전에 직접 계획을 짜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내가 생각하는 자유여행. 또 하나는 세세한 것은 무엇도 정하지 않고 맨 처음 목적지로 가서 거기서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는, 요시다가 생각하는 자유여행.(p.280)

  여행사에서 일하는 유즈키는 요시다와 뉴질랜드로 여행을 떠난다. 유즈키는 자유롭게 여행 계획을 세우는 자유여행을, 요시다는 무엇 하나 정하지 않고 마음대로 행동하는 자유여행을 추구한다. 서로 같은듯하면서 다른 둘의 스타일은 연애와 여행에서 많은 에피소드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삶을 살아가는 방식은 전혀 다르기에 끝까지 함께하지는 못한다.

  산은 생각을 하기에 딱 좋다. 동행이 있어도 말없이 한 줄로 걷고 있으면 자기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때 마음속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문제가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떠오른다. 자기 발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으면 인생도 자기 발로 나아가야만 한다고, 일상생활에서는 외면하던 문제와 똑바로 마주 봐야 할 듯한 느낌이 든다. 이 발로 정상에 도착하면 가슴속에도 빛이 비쳐드는 것 아닐까 하는 기대가 가는 길을 격려해준다. 그렇게 해서 자기 자신과 마주 보면서 걷는 것이 등산이라 생각한다.

  산에 오르는 사람은 모두 크고 작든 고민을 갖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p.361-362)

  등산이 주는 즐거움... 고민 없이 산을 오르는 사람이 있을까? 결혼해서 직장을 그만두고 시댁 식구들과 얼굴을 맞대고 살아야 한다는 부담감은 일본이나 우리나 별반 차이가 없는듯하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덧칠해진 내 모습은 실제가 아니고,  본래의 나를 잃어버린 채 타인이 기대하는 옷을 입고 있다. 혼자서 다 해낸 줄 알았는데, 내 뒤에는 보이지 않는 도움이 있었다. 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와 자매는 경쟁자가 아니다. 무거운 짐을 혼자서 짊어지기보다는, 때로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해도 된다. 다른 방향으로 시작하는 새로운 일은 적응하기가 어렵다. 인생에서 결단의 순간에는 누군가의 격려와 위로가 필요하다. 산을 마주하고 등산 친구 사귀기... 이런저런 메시지가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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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로베리 나이트 히메카와 레이코 형사 시리즈 1
혼다 테쓰야 지음, 한성례 옮김 / 씨엘북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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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다 테쓰야, 한성례 역, [스트로베리 나이트], 씨엘북스, 2012.

Honda Tetsuya, [STRAWBERRY NIGHT], 2006.

  일본 미스터리에서 범죄소설과 경찰소설을 구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마는, 경찰소설은 특유의 클리셰가 있다. 남성 중심으로 마초적인 성격이 강하고, 계급 간의 갈등이 있으며, 수사 회의를 중심으로 내용을 전개한다. 경찰 한 명 한 명이 유닛으로 배정된 지역을 탐문하고, 범인을 코너로 몰면서 생기는 헛발질... 동료애와 사명감 같은 게 있다. 도쿄 도 경시청 수사 1과 경위 히메카와 레이코를 주인공으로 하는 혼다 테쓰야의 소설 [스트로베리 나이트]는 다른 점이 있다면, 여성을 앞세운다.

  경찰은 군대와 마찬가지로 계급 사회다.

  경찰 세계에는 일반 회사의 직급과 다르게 계급이 아홉 단계로 이루어진다. 말단에서부터 순경, 경사, 경위, 경감, 경정, 총경, 경무관, 치안감, 치안정감 순이다. 관할서 서장은 경찰청으로 따지면 과장과 같은 계급이다. 경시청의 주요 부장은 각 현경의 본부장보다도 계급이 높다.

  계급은 처음 만난 사이라도 서열의 상하 관계를 명확히 하고 명령 계통의 신속한 확립을 가능하게 한다. 예를 들면 앞으로 관할서가카메아리 서와 도쿄 도 경찰 본부인 경시청이 합동으로 꾸리는 수사본부도 이 계급 체계가 있기에 올바르게 기능한다.(p.24-25)

  강력팀을 이끄는 주인공은 과거의 상처를 지니고 있다. 거부할 수 없는, 경찰이 되어야만 하는 운명! 그녀는 남다른 감각으로 사건의 보이지 않는 부분을 하나씩 풀어간다. 여기에는 요즘에 유행하는 페미니즘하고는 거리가 있다. 경찰이라는 가부장적인 구조 속에서 한 여성이 이런저런 핍박과 제한을 이겨내고 눈에 띄는 활약을 펼친다는 슈퍼우먼의 이야기가 아니다. 레이코는 여성성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매력이 있다. 다른 수사관은 논리적인 정황과 물증으로 사건을 끼워 맞춰간다면, 그녀는 감으로 예측하고 공간을 채워간다.

  레이코는 피해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입술이 닿을 만큼 최대한 가까이 얼굴을 갖다 댔다.

  "또 시작이네"

  코미네가 '변태'라고 말하고 싶은 듯한 얼굴로 말을 뱉었다. 하지만 그것은 레이코 식으로 행하는 피해자와의 소통 방법이었으며 빠뜨려서는 안 될 의식이었다. 누가 뭐라든 거르지 못한다.

  '알려줘. 당신이 마지막으로 무엇을 보았는지 내게 알려줘'(p.30)

  낚시터 수풀 사이에서 파란 천막과 비닐 끈으로 묶인 시체가 발견된다. 면도칼 혹은 커터 날에 의한 경동맥 절단, 마치 어떤 의식의 제물이라도 된 것처럼 시신의 복부는 절개되었다. 감식반이 출동하고, 경찰은 2인 1조가 되어 증거를 수집한다. 수사본부가 세워지고, 수사 회의에서 정보를 공유한다. 공을 세우기 위한 노력, 팀원 간의 경쟁... 사건을 조속히 해결해야 부담을 덜 수 있다. 만약 복부의 절창이 부패 가스가 차는 것을 미연에 방지한 것이라면, 유기 장소가 수풀 사이가 아니라 물속을 목적으로 했다면... 낚시터를 뒤져야 한다.

  언제든 한결같았다. 오쓰카는 눈에 띄는 성과를 내거나 큰 사건을 해결하는 데에 직접 공을 세운 적은 없었다. 오쓰카가 한 일을 꼽자면 결백한 인물을 용의자 목록에서 한 사람씩 삭제하는 작업뿐이었다. 사소한 작업이었지만 항상 누군가가 지켜보고 의미 있게 평가했다.

  지금은 그런 작업을 왜 했는지 이유도 충분히 알았고, 조직 수사에서 자기가 했던 일의 가치도 정확히 이해했다. 말하자면 소거법이었다. 누군가는 용의자의 범위를 좁히는 작업을 해야 한다. 이런 위치에 있는 한 범인 체포에 직접 공헌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죄 없는 사람을 밝혀내는 일을 누군가는 해야 하지 않는가. 누군가는 바깥 구멍을 메우는 작업을 맡아야 한다. 오쓰카는 그것이 자기 일이라고 믿었다.(p.178)

  기존의 범죄소설이 영웅적인 주인공을 그리고 있다면, 경찰소설은 조직 수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범인을 찾아내기 위해서 범인이 아닌 사람을 하나씩 지워가는 소거법이 적용되고, 팀원들이 물어오는 증거를 포괄해서 큰 그림을 완성해야 한다. 정보를 모아서 취합하는 수사 과정이 아주 잘 묘사되어 있다. 등장하는 수사관의 성격이 분명하고 개성적이다. 하나의 살인사건으로 연쇄살인의 징후를 포착하고, 희생자들은 하나같이 매월 둘째 주 일요일 밤마다 어디론가 외출한 흔적을 발견한다. 일명 스트로베리 나이트...

  '이것이 바로 경찰!'

  경찰들 사이에서 형성되는 동료 의식은 단단했다. 평소에는 서로 시기하고 진급 경쟁에서 상대의 발목을 잡아도 동료 경찰이 위험에 처하면 하나로 똘똘 뭉쳐 구해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이 바로 경찰이었고 경찰 세계였다. 레이코는 이때 처음으로 그것을 실감했다.(p.215)

  연이어 발견되는 시체 더미... 누군가 잔혹한 살인 게임을 즐기고 있다.

  경찰은 대내적으로는 진급 경쟁으로 서로 앙숙인 것처럼 지내도 대외적으로는 서로를 보호하고 감싼다. 이것이 경찰 세계이다. 레이코는 이 세계에 들어오기를 간절히 원했고, 빠른 진급을 했으며, 지금은 연쇄살인을 추적한다.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는 과정과 현재를 살아가는 삶은 인간의 성장에 관해서이다. 소설은 드라마와 영화로도 제작되었다고 하는데, 평범한듯하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주인공의 매력과 카리스마를 제대로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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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등록자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7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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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 민경욱 역, [미등록자], 비채, 2018.

Higashino Keigo, [PLATINUM DATA], 2010.

  과거하고 비교해서 현대의 경찰 수사는 첨단의 방식으로 바뀌었다. 지문과 혈액형 대조에만 의존하던 과학수사는 CCTV 판독과 DNA 분석이라는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다. 그렇다면 미래에는 어떻게 변화하게 될까? 작가의 상상력은 'DNA 프로파일링'을 말하고 있는데, 사건 현장에서 발견한 체모를 가지고 직접 범인을 유추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등록된 DNA 데이터를 기반으로 친족 관계뿐만 아니라 얼굴, 신체 특징을 알 수 있다면... 점점 현실로 다가오는 우리 미래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여기에 어떤 문제는 없는 것일까? 영화 <플래티나 데이터>(2013.)의 원작,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미등록자]를 읽었다.

  "내 상상은 여기부터야. 그녀가 진찰받은 병원이 본인에게 알리지 않고 무단으로 DNA 샘플을 자네 연구소에 제출하고 있다. 그 병원만이 아니라 몇몇 병원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자네 연구소는 방대한 DNA 데이터를 갖추고 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위법행위이고, 거기 기초해 이뤄진 수사는 위법수사일 뿐이지. 그래서 나스 과장이 그렇게 말한 거야. 처음 용의자를 추리하는 과정에 문제가 있다고. 어때, 내 상상이?"(p.35)

  DNA 프로파일링을 완성하려면, 전체 인구의 유전자 데이터를 축적하고 있어야 한다. 범죄 해결과 예방을 이유로 개인 정보와 사생활이 간섭받는다면, 아니 국가의 통제라고 해아 하나... 논란의 여지가 있다. 시험 단계에서 경찰은 비밀리에 불법적인 데이터를 구축하고, 국회의 법안 통과를 기다리고 있다. 세금 추징과 같은 국가의 정보 이용이고, 또 몇몇 사건을 해결하지만... 수사 1과 형사 아사마 레이지는 뭔가 거리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

  "유감스럽지만 현 단계의 데이터베이스에서 이번 샘플과 높은 일치율을 보이는 것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특수분석연구소에서는 이번 샘플을 'NF13'으로 등록했습니다."

  "NF?" 아사마의 입에서 절로 질문이 튀어나왔다.

  "NOT FOUND의 약칭입니다. 이번 건과 마찬가지로 일치 대상을 찾지 못한 경우가 이제까지 열두 건 있습니다. 이번이 열세 번 째입니다."

  "뭐야. 도움이 안 되네."

  "지난 열두 건 중 여덟 건이 데이터베이스가 확충되면서 해결되었습니다. NF13의 정체 판명되 시간문제입니다."

  아사마가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 정말 그럴까."(p.45-46)

  경찰청 특수분석 연구소 주임 분석원 가구라 류헤이는 DNA 정보 분석 시스템을 거의 완성해 놓았다. 그러나 한동안 사건 해결의 만능열쇠로 작용하던 DNA 프로파일링은 NF13... 열세 번째 NOT FOUND의 등장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살인 사건 현장에서 발견한 DNA는 어느 누구와도 일치하지 않는다. 모든 국민의 유전자 정보를 등록해 완벽하게 관리하는 일은 수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주장과 천재 수학자의 프로그램 개발로 NF13의 정체 판명은 시간문제라는 의견 대립은 아주 팽팽하다.

  "유전자는 인생을 결정하는 프로그램이다, 이게 자네의 지론이지."

  "인생이라는 프로그램의 근간을 이룬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다양한 정보를 얻고, 때로는 수정합니다. 하지만 어떤 정보를 삶에 활용하고 어떤 정보를 버릴 것인지는 결국 본인에게 주어진 초기 프로그램에 달려 있습니다."

  "그게 유전자다?"(p.60)

  인간의 범죄는 결국 유전자의 지배를 받는 것일까? 범죄를 저지르는 마음의 움직임까지 유전자와 관련이 있다고 믿는 가구라는 시스템의 완성을 앞두고 살인 누명을 쓴다.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모발 한 가닥, 유전자 분석을 하니 자기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철저한 과학 신봉자였던 그는 자신이 만든 시스템 안에서 누군가가 쳐 놓은 덫에 걸리게 된 것이다. 누명을 벗고 시스템의 오류를 바로잡아야 한다.

  "예술은 작가가 의식해서 만들어내는 게 아니다. 그 반대이다. 예술은 작가를 조종해 작품으로 이 세상에 나타난다. 작가는 노예다."(p.72)

  도대체 인간과 기계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구성 물질이 다르다는 것 외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을까.

  마음이란 존재할까. 그럼 마음은 무엇인가. 뇌라는 물질이 만들어 낸, 행동을 조절하는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닐까. 그 증거로, 뇌가 고장 나면 정신에도 지장이 생긴다. 뇌 속 물질을 보충하면 우울증이 완화된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가구라는 자기 손을 살펴봤다. 몇 시간씩 며칠씩 계속 바라보며 장기와 뇌와 혈액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사색의 대상은 세포가 되었다.

  얼마 후 그는 목표 지점에 도착했다. 그것이 유전자였다.(p.84)

  "범인이 정액을 남긴 이유 말이야. 지금까지는 BNA 수사 시스템 망에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범인이 단순히 욕망에 따라 저지른 짓이라고만 생각했어. 하지만 다른 의미가 있을 수도 있겠어. 정액을 남기면 경찰은 안심하고 초동수사를 게을리한다. 그 결과, DNA 수사 시스템뿐만 아니라 기존 수사망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p.260)

  누명을 쓴 도망자와 뒤를 쫓는 경찰 이야기는 스릴러와 로드 무비를 연상하게 한다. 유전자 분석 외에 다중인격 그리고 뇌를 전기 자극하여 쾌감을 얻는 도구, 과학 수사의 명과 암은 다소 철학적이다. 예술의 영역까지 침범하는 기술 문명, 인간과 기계의 근본 차이에 관한 질문, 유전자의 영향력... 여기에서도 데카르트의 명언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의 의미를 떠오르게 한다. 자유로운 생각의 유뮤, 이것은 인간과 기계를 구분하는 척도이다.

  어느 시대나 특권층은 존재하는 것인가 보다. 정치가와 고위직 사람들은 유전자 등록 시스템 안에서도 특별한 대우를 받는다. 혹시 모를 범죄와의 연결성을 근원부터 차단하기 위해... 그들은 그들만의 특권을 누리고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르는 사회 문제를 여실히 폭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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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센터 - 2018 제6회 수림문학상 수상작
김의경 지음 / 광화문글방 / 2018년 11월
평점 :
절판


김의경, [콜센터], 광화문글방, 2018.

제6회 수림문학상

  직업은 신으로부터의 소명이라는 인식으로, 나는 직업으로 사람을 가리거나 판단하지 않는다. 직업의 의미는 돈을 버는 경제활동인 동시에 자아의 실현이고 봉사의 기회라고 한다. 모두 다 대통령일 수 없고, 또 모두가 청소부일 수 없듯이... 사회가 굴러가는 울타리 안에는 어느 하나 소홀한 것 없는 다양한 직업이 필요하다. 그런데 자기 일을 부정하고 하루라도 빨리 그곳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하는 청춘이 있다. 1588 번호로 시작해서 전국 어디서나 주문할 수 있다는 유명 피자의 콜센터 직원들은 인격을 파괴하는 감정 노동에 시달린다. 작가의 경험에서 비롯한 소설 [콜센터]는 우리 시대 젊음의 생존 투쟁, 꿈과 사랑을 향한 처절한 도전기이다.

  강주리

  우용희

  최시현

  박형조

  하동민

  시대의 반영이라는 현실감과 함께 독특한 구성이 매우 돋보이는데, 콜센터에서 일하는 이십 대 다섯 명의 남녀는 하나씩 자기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들은 신체 어디에 장애가 있거나 남이 다 가는 대학을 가지 못한 것이 아니다. 굳이 다른 점이 있다면, 졸업 후에도 취업 준비를 집에서 지원해 줄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이다. 강주리는 취업을 준비하며 그나마 앉아서 일하기에 육체 피로가 적을 것이라는 이유로 콜센터에 들어왔다. 그러나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절대 만만치 않다. 우용희는 밥벌이를 위해 주중에는 콜센터에서 일하고 주말에는 도서관을 찾는다. 집안의 도움으로 일주일 내내 도서관에서 살았던 남친은 대기업에 들어가고 둘의 관계는 조금씩 서먹해져 간다. 최시현은 아나운서를 꿈꾸고 있다. 콜센터에서 가장 빛나는 목소리를 가졌지만, 900대 1의 경쟁률을 뚫기에는 점점 한계가 느껴진다. 박형조는 두 해를 콜센터에서 일하고 나서 모은 돈으로 한 해를 공무원 시험에 집중할 예정이다. 그에게 연애 감정은 사치이고 낭비이다. 하동민은 콜센터에서 일하다가 지금은 피자 배달을 한다. 밀려드는 주문과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도로를 누빈다.

  콜센터 구성원은 80퍼센트가 대학생과 휴학생 그리고 졸업한 지 얼마 안 되는 취업준비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머지를 서른 살 이상의 미혼 여성과 아줌마, 그리고 여고생이 차지하고 있었다. 여고생의 경우 부모동의서가 있어야 한다는데 엄마 도장을 슬쩍해 찍어 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감아주는 눈치였다. 지금처럼 크리스마스를 앞둔 때에는 여고생까지 아쉬워할 만큼 콜센터는 인력 이탈이 잦았다.(p.9)

  전광판은 시간 단위로 카운트가 되는데 전화를 많이 받는 순서로 이름이 떴다. 한 시간 동안 14통의 전화를 받자 2등이었던 주리의 이름이 1등 자리로 올라섰다. 주리는 후름라이드를 타고 높은 곳에서 거침없이 빠르게 내려온 것처럼 짜릿했다. 1등이라니. 무언가에서 1등을 해보기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하지만 금세 침울해졌다. 서류 통과도 못하고 있는 취준생 처지라 고작 이런 것에 기뻐하는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서였다.(p.12)

  콜센터는 나름의 체계를 가지고 직원을 압박 관리한다는 것, 콜센터에 근무하는 대부분은 대학생과 휴학생 그리고 취업준비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 연말에는 인력 이탈이 잦다는 것, 직원들은 쉬는 시간이면 옥상에 올라가 담배를 피운다는 것, 콜센터는 빨리 그만두고 싶으나 섣불리 그만둘 수 없는 직업이라는 것... 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 중의 하나는 다른 인생을 살아볼 수 있어서이다. 나의 이십 대는? 그 연장선에 서 있는 현재의 삶은? 소설 안에서의 나는 어디에서도 탈출구를 찾을 수 없다.

  "인내심이겠지."

  용희 생각에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건 그야말로 인내심 말고는 없었다.(p.26)

  동민이 사장에게 오만 정이 떨어져나간 것은 사실 한참 되었다. 사장이 돈밖에 모르는 인간이라는 사실이야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심지어 헬멧은 운전하는 데 방해가 되니 눈비 오는 날에만 쓰라고 하는 인간이었다. 그래도 뭔가 배울 게 있다고 생각해서 지금껏 붙어 있었다. 사장의 피자는 전국 최고, 아니 세계 최고의 맛이었다. 언젠가는 베스트피자를 넘어서는 피자 체인점을 만들겠다는 포부가 우습지 않을 정도로 피자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만들었다. 같은 체인점 피자인데도 사장이 만든 피자는 어딘가 달랐다. 동민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지금까지 버텼지만 그 무언가는 결국 아르바이트생들의 땀과 눈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p.96-97)

  잠시 희망이라는 게 있었던 것일까? 아니 막연한 기대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청춘을 담보로 다른 누군가의 배를 불리고 있었다. 등장하는 다섯 인물은 자기의 일을 하고 싶어 한다. 인내심 하나로 귓가에 파고드는 감정의 배설물을 홀로 처리하는 게 아니라, 그러면서도 제대로 된 대우조차 받지 못하는 삶에서 벗어나 존중받기를 원한다. 가정에서 사회에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다가오는 크리스마스는 전쟁 같은 폭풍 주문을 예견하는데, 이들은 짜릿한 일탈을 계획한다.

  여전히 주리의 몸속에서 두 개의 마음이 충돌했다. 여기만큼 몸이 편안한 일자리도 없다는 마음과 지금 당장 그만둬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하지만 주리가 선택한 것은 형조와 함께 바다를 보고 싶다는 마음이었다.(p.110)

  주리는 한숨을 길게 내쉰 후 말했다.

  "그냥 좀 멈추고 싶었어. 건전지처럼 기 빨리는 순간을. 콜센터에서 일하는 동안 내내 그랬거든. 이게 대체 뭔가. 돈을 받는다는 것 말고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게 뭔가. 그저 돈을 벌려고 시간을 버리고 있다. 낭비하고 있다. 그러니까 내 청춘을 이곳에서 낭비하고 있다......"(p.149)

  "아무런 의미를 못 찾겠어. 콜센터에서 일하다 보면 나라는 존재가 깎여 나가는 것 같아. 그리고 다시는 깎여 나간 것들을 보충할 수 없을 것 같아. 아무리 애써도 의미를 부여할 수가 없어. 그래서 여기까지 따라온 거야. 어떻게든 막아보고 싶었어. 더 이상 깎여 나가지 못하게."(p.180)

  몸도 마음도 멍투성이, 목소리 폭력으로 상처받은 영혼... 무엇보다 다른 대안은 보이지 않는다. 콜센터에서 일하는 청춘의 신음이 귓가를 울린다. 우리는 왜 콜센터에서 일하는 사람을 무시하게 된 것일까? 개인적으로 두세 가지가 떠오르는데... 하나는, 부동산 정보를 제공한다는 텔레마케터의 무차별적인 스팸 전화가 콜센터의 이미지를 깎아내렸다. 다른 하나는, 무한 서비스 경쟁으로 소비자의 목소리에 무조건 귀 기울여야 한다는 사업 방침 때문이다. 또 다른 하나는, 콜센터에 전화질하는 미친 변태들이 있다...

  우리 시대 청춘의 고뇌는 아련하고 애잔하다. 그들 모두 꿈을 이룰 수 있기를...

  앞으로 실생활에서 콜센터 직원의 사소한 실수는 그냥 넘어가는 것으로 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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