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었다.
기차역이 있는 바닷가 마을
첫사랑과 다니던 뒷동산, 절집
좁디좁은 골목길에 맞잡았던
너의 커다란 손
떠나던 날 본 너의 등

이작품이 끝나 외로웠다.
소녀가 여자가 되고 마을을 떠나 서글펐다.
다시 한번 고향역을 떠나야하는 날인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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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9-05-03 2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꽃을보며 달이 예쁘다 술이 달다 하고픈 밤이다. 다다이마 오카이리.
 

아이가 만들기교실에 가고 레스를 읽기로한다.
예전에 나는 책에 메모나 접기등을 거침없이 하는 편이었는데, 알라딘에 중고판매가 시작되고부턴 팔 책은 조심스럽게 읽는다.

레스는 첫세장을 읽고 모퉁이를 접었다.
그렇다 나는 모처럼 간직하고 싶은 이야기를 만났다.
예전에 페미니즘의 도전을 여러번 읽었는데 그때마다 줄친부위가 달라 나중에 보니 거의 전체가 쳐진 적이 기억났다. 그렇다 나는 지금 이책에 온갖 문장들이 옮겨적고 싶다.

여러 장면 속에 나를 보며 감탄 감탄 중에
아 이런 아이를 데리러 가야할 시간이군.
인생.


예전에, 레스가 이십대였던 어느 날에 그와 이야기를 나누던 어느 시인이 화분에 담배를 눌러 끄며 말했다. "넌 껍질이 없는 사람 같아." 시인이 그딴 소리를 했다. 대중 앞에서 자기 살가죽을 뒤집어 까는 게 직업인 사람이, 그가, 키가 크고 젊고 희망이 가득한 아서 레스가 껍질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넌 에지를 키워야 돼." 예전에는 오랜 라이벌 카를로스가 계속해서 그 말을 해댔지만 레스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못되게 굴라는 건가? 아니, 그 말은 보호책을 갖추라는, 세상에 맞서는 갑옷을 입으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사람이 에지를 ‘키울‘ 수가 있나? 유머감각을 ‘키우는‘ 데 한계가 있듯이 말이다. (중략)
뭐든 간에 레스는 전혀 배우지 못했다. 그가 사십대쯤에 해낼 수 있었던 일은 껍질이 무른 게의 투명한 등딱지와 비슷한 자기 감각을 어느 정도 길러내는 것 뿐이었다. -12쪽

뜨뜻미지근한 평론이나 무심한 모욕은 더 이상 그에게 상처를 줄 수 없었지만 실연은, 진짜 진정한 실연은 그의 얇은 가죽을 뚫고 예전과 똑같은 색조의 피를 낼 수 있었다. 아주 많은 것들- 철학, 급진주의, 기타 여러 패스트푸드 -이 지겨워지는 중년에 실연만은 어쩌면 그다지도 계속 따끔할 수 있을까? 그건 아마 레스가 계속 실연의 새로운 원천을 발견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바보 같은 어린 시절의 두려움도 그가 회피했을 뿐 사라진 건 아니었다 -12~13쪽

그들이, 그들 중 여러 명이 괜찮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사랑에 빠져봤다면 ‘괜찮은‘ 사람과는 살 수 없다. 그건 혼자 사는 것보다 못하다.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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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04-20 17: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책 살까말까 망설이던 중이었는데 사겠습니다!

무해한모리군 2019-04-22 12:28   좋아요 0 | URL
재밌게 읽으셔야 될텐데. 글이 재치있어요. 영어로 읽어보고 싶어요.

테레사 2019-05-24 13: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읽는 중...ㅎㅎ 노년의 삶이 어떤지 궁금해서...이제 노년을 걱정해야 할 나이라...세상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게..어쩌면 좋은 일인지도, 기쁜 일인지도..

무해한모리군 2019-05-24 16:45   좋아요 0 | URL
저는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더 많다는게 때로 너무 아득하게 느껴져요. 거울속에 나이들어가는 제가 때로 낯설고 ㅋㅋㅋㅋㅋ
 

책 뒷장에 있는 조세희 작가의 이책에 대한 소개말이 너무나 훌륭하다.

인문 md의 서평이 올해 마지막으로 귀기울이고 싶은 이야기로 이책을 고르게 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속지 너무나 취향이다. 손에 착 붙어 넘어가는 느낌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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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01 2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둘의 차이가 아니라 공통점이다. 부끄럽다는 것. 몽규와 동주는 서로 다른 이유를 말하며 함께 부끄럽다고 말한다. 둘 사이의 거리는 다시 아주 가까워진다. 투사건 시인이건, 식민지의 청년들은 그렇게 부끄러워하며 죽어갔다. 

(중략)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울지 않았다는 것 말이다. (중략) 그 한가지 답은 '흑백'에 있었다. 역사적 사실성을 높이기 위해 사용했을 흑백이 오히려 나에게는 이 영화에 완전히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는 효과를 발휘했다는 것. 이 영화의 흑백에는 묘한 인공성이 있다. 이 흑백은 깨끗했고 아련했으며 그래서 아름다웠다. 이 사실이 뜻하는 바는 단순하지 않다. 어쩌면 <동주>의 흥행 성공이 이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이 영화에서 동주는 제 삶이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부합하는 것인지를 진지하게 성찰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와 같은 삶의 형식이 사회적으로도 가치 있는 것인지를 고민하면서 내내 괴로워한다. '진정성'에 대한, 즉(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진실한 삶에 대한 이 고민은 '속물성'이 지배하는 오늘날의 한국 사회가 점점 잃어가고/잊어가고 있는 것이라는 진단이 내려진 지도 오래됐는데

(중략)

그러나 그러기에는 일제강점기라는 시대가 우리에게서 너무 멀다. 그 시대는 공간적으로 말하면 일종의 역사적 유적지다. 나는 이 영화의 깨끗하고 아련했던 '흑백'이, 제작진의 의도와는 다르게, 마치 액자처럼 윤동주를 과거의 시간 속에서 방부처리하는 데 기여했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시대의 고통으로부터는 안전거리를 유지한 채 안심하고 감동받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102~105쪽


영화를 많이 보는 편이 아닌데 이준익 감독의 영화를 제법 많이 본것에 새삼 놀랐다. 그의 장점중 하나는 껄끄러운 주제를 관객이 외면할 정도의 불편함은 주지 않고 풀 수 있다는 것이리라. 신형철 작가의 영화 동주에 대한 평의 이부분이 좋아 옮겨둔다.  


오늘도 크고 작은 부끄러움에 몸서리치는 소심한 내가 싫고, 다른 한편으론 점점 무심한 어른이 되어갈까봐 두렵다.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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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어도 당신은 그게 무엇에 쓸모가 있는 거냐고 묻지 않는군요. 나를 화나게 하는 질문이거든요. 

 우리는 무엇이든 쓸모가 있어야 하는 사회에 살고 있어요. 그런데 <쓸모가 있다>는 동사는 <뭔가의 노예가 된다>는 어원을 갖고 있죠. 그리고 자유의 개념을 구현하는 동물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새예요. (중략) 인간에게 새들의 무사태평을 제안했거든요. 그 무사태평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예요. 왜냐하면 사실 새들의 자유는 전혀 무사태평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새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우리가 정말로 자유로워질 수 있긴 한데, 그것이 무척 어렵고 불안을 야기한다는 사실이예요. 새들을 보면 늘 주변을 살피죠. 공연히 그러는 게 아니예요. 자유란 원래 불안한 거예요. 우리와는 반대로 새들은 그 불안을 받아들여요.]

(중략)

 [내 얘기에 관심없죠?]

 [아뇨, 아주 교훈적이네요.]

 <교훈적>. 그는 그 말을 참아 내기가 힘들었다. <교훈적>, 그 말은 마치 욕설처럼 들렸다.


- 151~153쪽


다른 교훈

자연이 한 대상에 아름다운 이목구비를 새기고 

예술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색조로 칠한다 해도,

하나의 가슴을 민감하게 만드는 데는

그 어떤 자연의 선물들도 사랑이 발견하게 하는

단 하나의 보이지 않는 매력보다 못하노니.


- 역자의 <고수머리 리케> 번역에서 224쪽


 아주 오랜만에 아멜리 노통브의 책을 읽었다. 신입사원들에게 강의할 때 즐겨 그녀의 소설속 한장면을 인용하곤 한다. 의욕에 차 회사에 입사한 주인공이, 온갖 단순업무에 시달리며 밤새 장부를 맞추고 맞추다 정신을 놓고 아침에 나채로 서류더미에서 발견되는 장면이다. 그녀의 자전적 소설인 바, 우리가 모두 알다싶이 그 회사를 때려치운 끝에 이렇게 훌륭한 작가가 되었다. 아니다 싶으면 과감하게 버릴 줄 알아야 한다고.


전문가들에 따르면 왕따의 피해자가 되는 학생들은 대부분 자기표현이 적은 친구들이란다. (원래 성격이 아니라 왕따의 결과 그렇게 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지만) 여하튼 이 소설의 여주인공, 우리나라였으면 천사처럼 예쁜데 말한마디 않는 그녀의 고등학교 생활은 대재앙이였을 것이다. 학교에서 초식동물로 살아가는 것은 매우 미묘한 균형이 필요한 일이다. 여기에 몹시 못생겼지만, 지나치게 똑똑한 남자주인공은 어떤가? 새만 쳐다보는 초천재가 남자동년배들에게 인기가 있을까?? 그의 진중한 태도가 먹혔는지 여자들에게는 인기가 있다는 설정은 다소 의아하다. 


여하간 그가 어떤 사람이건 사랑은 서로에게서 미친듯이 사랑스러운 점을 발견한다. 일찍히 김춘수님이 말씀하셨지 않는가 이름을 불러주어 꽃이 된다고. 예수께서도 말씀하시길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 했다.


신작을 읽고 아 내가 왜 이 작가의 책을 그만 읽게 되었는지 기억이 난 소소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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