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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왜 무엇이든 믿고 싶어할까?
마르틴 우르반 지음, 김현정 옮김 / 도솔 / 2008년 3월
평점 :
믿음이 무엇인가를 찾아보게 되면 어떠한 가치관, 종교, 사람, 사실 등에 대해 다른 사람의 동의와 관계 없이 확고한 진리로서 받아들이는 개인적인 심리 상태이다..라고 나온다. 아주 철저하게 개인적인 감정일 따름인데도 불구하고 그 믿음이란 말이 주는 의미는 확실히 넓고도 깊다. 왜일까? 그것은 아마도 마음이란 게 담겨있는 까닭이 아닐까 싶은데.. 요즈음에 와서 믿음이라는 의미가 왠지 종교적인 색채로만 보여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무리한 생각일까? 사람과 사람사이의 믿음보다는 아무래도 종교적인 것을 들이댈 때의 믿음이란 말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것 같다. 나는 평소 종교인들을 보면서 혹은 나 자신을 돌이켜 볼 때에도 사람들은 왜 무엇이든 믿고 싶어할까? 하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어찌 되었든 그 믿음이란 것을 붙잡게 되면 막무가내형으로 바뀌어가는 모습을 많이 보기도 했다. 왜일까? 무엇이 그토록 사람들을 막무가내로 변하게 만드는 것일까?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제목은 그동안의 내 물음표에 대한 마침표를 찍어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느것에 확실하게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는 것은 욕심이라는 말로 책장을 덮어야 했다. 그것 역시도 저마다의 느낌이 다를 수 있는 받아들이는 사람의 차이일테니까 말이다.
책장을 펼치면 세세한 소제목들이 우선 눈길을 끈다. 한번만 주의깊에 살펴본다면 그리 쉽지않게 써내려갔을 저자의 배려가 보이는 부분이기도 하다. 책의 내용은 총 13장으로 나뉘어져 사람이 어떻게 생각을 하고 영혼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사람의 무의식이 어떻게 행동을 결정하며 뇌의 구조적인 점을 들어가며 그것을 합리화시키고자 하는 의식에 대한 이야기들에서부터 이 책은 시작되어진다. 믿음이라는 것이 단순하게 이것이다,하고 정의내리기에는 뭔가 부연설명이 필요했기 때문이리라고 생각되어졌지만 초반부터 내가 읽기에는 약간의 따분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사람들이 왜 신비주의에 빠지는지, 종교가 태어나게 되는 배경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사람들이 왜 무엇이든 믿고 싶어 하는지를 저자는 성경의 재해석을 통하여 보여주려 하는 것 같았다. 얼핏 생각해보면 성경책을 아주 세분화하여 속속들이 밝혀내고 싶어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따분함때문에 책을 읽는 진도가 느렸다면 아마도 이쯤에서부터 이해의 속도에 탄력이 붙었던 듯 하다. 전설이나 설화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들과 복음서의 진위를 따져 물으며 그 이전부터 사람들의 무의식속에서 살아왔던 믿음의 실체를 아주 조금씩 보여주고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려웠다. 뇌의 구조라거나 알만한 사람의 이름을 빌어가며 실시했던 실험을 통하여 실례를 들어주고는 있지만 집중해서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는다면 다가오는 것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아 조금은 아쉽기도 했다.
오래된 관념은 당연히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관념은 뇌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으며, 의식에는 거의 접근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와 성서의 집필자들 역시 그들이 앞서 발견했던 관념들을 없애지 못하고 재해석했을 뿐이다.(110쪽) 어린시절에 교회 한번 안가본 사람이 있었을까? 그렇게 저렇게 이유를 붙인다해도 교회를 가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교회에 관한, 특히 예수나 성경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복음서는 창조적인 편집자의 창작물이라거나 맥락에 따라 달리 해석을 해야 한다거나 종교안에서 일어나고있는 모순점들 등..어른이 되어서 다시한번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우리가 마주쳐야만 했던 성경에 대한 재해석의 반론들은 종교인이든 무신론자이든간에 부지불식간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저 '그만큼은 나도 안다'는 식의 말쯤은 어디에서도 할 수 있을만큼만.. 하지만 나는 이 책속에서 보여주고 있는 성경의 재해석분야에는 사실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내가 알고 싶었던 것은 성경의 재해석이 아닌 까닭이기 때문이다. 놀라웠던 점은 현대 종교 속에서도 살아 숨쉬는 고대 샤머니즘을 말해주는 대목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에게 있어 왔던 자칫 동화적인 이미지를 부여할 수 있는 부분들이 샤머니즘의 행태로 지금의 종교속에서도 버젓이 살아남았다는 것을 보면서 새삼스럽게 섬뜩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사람들은 아마도 필요에 의해 신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살아가는 현실에 의존하지 못하는 알 수 없는 불확실성에 대한 자구책으로 만들지는 않았을까? 그 불안함을 무엇인가를 통하여 혹은 누군가를 통하여 해결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신이라는 존재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여기 이 책속에서 그런 말을 발견하게 되었다. "인간은 자신의 관념에 따라 신을 창조했다"-루트비히 포이어바흐(133쪽) 시작할 때 말했던 것처럼 믿음은 철저히 개인적인 감정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믿는다고 하는 그 신에 대한 감정 역시 철저히 개인적인 감정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죽음뒤의 세상을 말하기에 앞서 일단은 자신의 마음에 평화가 깃들기를 바랐다는 것이 옳은 일인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누구나 평안을 원한다. 그것도 마음의 평안을.. 나 역시도 힘들고 어려울 때 누군가를 의지하고 있다거나 의지할 대상이 있다는 것이 커다란 위안이 된다는 것을 잘 아는 까닭이기도 하다. 더구나 그런 감정들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가질 수 있다면 더 좋지 않겠는가 말이다. 나와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을 만나게 되면 은연중에 마음을 열어 그 사람과 함께 공유하기를 꺼려하지 않는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 않을까? 하물며 제 안의 불확실성이라거나 불안감을 함께 나누며 이야기 할 수 있다는데에야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러다보니 하나둘씩 종교적인 모임이 생겨나게 되었을 것이고 또한 그 집단을 토대로 힘을 키우려하는 권력이라는 것도 생겨났을 것이라고 이 책에서도 말하고 있음이다. 이러한 종교단체들은 높은 참여율과 긴밀한 연대감, 엄격한 도덕규범, 막대한 자금을 신자들에게 요구함으로써 집단적인 불안감과 두려움 속에서 강력하면서도 안정적인 정체성,위기에 흔들리지 않는 세계해석과 시대해석,정돈된 가족구조, 연대감으로 구성된 긴밀한 조직망을 제공한다.(291쪽)
이 책의 저자는 감리교, 장로교, 침례교, 여호와의 증인, 제칠일 안식일 교회등 수많은 기독교 종파의 탄생 배경에 대해 들려주고 있다. 그에 따르는 창시자의 예언까지도.. 그리고 그들이 현재 어떻게 구원활동을 하고 있으며 어떤 교리로써 사람들에게 다가가는지도. 그들이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어떠한 방법을 동원하고 있는지까지도 낱낱이 밝혀주고 있다. 결국 누가 더 많은 세력권을 형성하는가가 관건인 것처럼 느껴져 씁쓸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이 세상을 살아내기 위한 또하나의 방편이라면 그것조차 어쩔 수 없는 일임엔 분명할 것이다. 아주 오래전의 종교전쟁에서부터 지금 이 지구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끝도없이 치루어내고 있는 종교전쟁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나는 모든 선한 자를 구원하고 모든 악한 자를 벌하는 전지전능한 '마초', 그리고 투사인 하느님을 더이상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의 삶이 참혹하게 무너질 때 우리를 위해 눈물을 흘려주는 자비로운 하느님은 믿습니다."(316쪽) 늘상 하는 말이지만 종교는 필요악이다. 필요해서 만들었지만 그것에 의한 지배를 받게 되어버리고 만... 이 말을 앞세우며 나는 믿음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사람들이 왜 무엇이든 믿고 싶어하는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그러면서 나는 믿음이라는 말이 예전처럼 사람과 사람사이에 오가는 마음의 행로로 다시 부각되어졌으면 하는 생각도 해본다.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전지전능하신 신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참혹하게 무너져 지치고 힘겨울 때 눈물을 흘려주는 신을 믿는다는 말처럼... 결국 마음을 의지할 수 있는 곳이 필요한 듯 하다. 그래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누구나 외롭다고 말하는 모양이다. 외로움... 그것이 원죄의 업보일까? 알 수 없다. /아이비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