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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 - 개정판
조나단 스위프트 지음, 신현철 옮김 / 문학수첩 / 199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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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통하여 책을 알게 된 케이스다. 그저 평범한 동화였을거라고 믿었던 걸리버여행기에 대해 다시한번 읽게 되었던 동기를 부여해주게 되었다는 건 나에게 큰 의미를 갖게 하기도 했다. 사실 큰사람들의 나라에 갔던 걸리버나 작은 사람들의 나라에 갔던 걸리버의 모습은 하나도 새롭지 않았다. 하지만 하늘을 나는 섬의 나라와 말들의 나라를 여행했던 걸리버의 모습은 또하나의 놀라움이었다. 읽기에 쉽지 않았던 이 책이 왜 어린이만을 위한 이야기로 소개되어져야만 했을까? 책속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세상은 큰사람들의 나라나 작은 사람들의 나라조차도 받아들이기에 편한 것만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내게 가장 큰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 하늘을 나는 섬의 나라였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지독한 팬임을 자처하는 나로써는 <천공의 성, 라퓨타>의 원작이 어찌 궁금하지 않았겠는가 말이다. 애니메이션은 곧잘 아이들만의 전용으로 치부되어지기도 하지만 하야오 감독의 작품은 차라리 어른들만을 위한 애니메이션이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다. 많은 것을 던져주며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해주는 그의 작품이 나는 참 좋기 때문이다.

일단은 이 책속의 세상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나는 허둥대야했다. 발음하기조차 힘겨운 지명이나 인명들이 우선을 껄끄러웠고 이야기속에 감춰둔 의미들이 너무 무겁기만 했다. 이 책을 이해하며 읽는다는 게 그리 쉽지 않았다. 그저 이야기의 흐름에 나를 맡긴 채 슬쩍 묻어가려고 했지만 그것조차도 쉽지 않았다. 특히나 하늘을 나는 섬의 나라를 여행할 때에는 내가 도대체 지금 어디에 있는지조차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잊으면 안되는 것들을 말해주고 싶었던 것일까?  사람이 진정한 사람으로써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되짚어주고 싶었던 것일까?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말들의 나라에서 돌아오고 싶어하지 않았던 걸리버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었던 것일까? 말들의 나라에서 내가 배웠던 것은 참으로 많았던 것 같다. 그렇다고해서 그 나라의 수준을 다 이해했다고는 말하지 못한다. 파내도 파내도 알 수 없을 것 같은 그 무엇들을 이 책은 너무나도 많이 안고 있다.

뒷부분의 해설에서 보면 이 소설의 잉태기간이 약 15년이었고 실제로 집필에 종사한 것도 5년 이상이 걸렸다고 하니 작가의 심적 무게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 책속에는 정치적인 배경이 참 많이 나온다. 그 모든 것들이 작가가 집필하는 동안에 일어났던 일이라고 하니 작금의 정치현실과 비교해볼 때  참 아이러니다. 작가가 성직자였다는 말에 또한번 놀란다. 책속에서 느껴지는 인간에 대한 폄훼나 혐오감은 그럼 뭐란 말인가.. 자연앞에 작아져야 할 인간의 오만함을 찍어 누르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직설적인 표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어내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 특히나  과학의 세계를 보여주고 싶어했다고 느껴지던 하늘을 나는 섬의 나라편에서는 도무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음을 인정해야 했다. 일종의 풍자소설일까? 부정부패가 난무하는 정치세계를 비꼬아 주고 싶었던 것일까?  마지막 여행지였던 말들의 나라에서 돌아와 말처럼 살기를 원했던 걸리버.. 그 걸리버의 마음으로 다시한번 힘겨운 여행길에 도전해 보고 싶다.

솔직하게 말한다면 이 책을 읽고 난 뒤의 감상노트를 정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무엇이 어떻게 나에게 다가왔었는지, 무엇을 어떻게 내가 따라 갔었는지를 잘 알지 못하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책이 단순하게 어린이용 도서로 읽혀졌다는 것이 이해할 수 없다는 거다. 작자가 의도하고 있었던 그 무엇, 너무도 깊고 단단했던 그 무엇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걸리버는 돌아왔지만 나는 아직도 그 여행길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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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아름다운 것들이 참 많다.
보아주지 않아도 소롯이 제 몫을 다하는 아름다움의 미학..
세상엔 아름다워야 할 것들도 참 많다.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오롯이 제 몫을 다할 때의 아름다움..

살다보면 가끔씩 아름다워야함에도 불구하고 아름답지 못함을 볼 때가 있다.
그런 날이면 예고없이 마주치는 아름다움의 의미앞에서 미안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저마다의 가슴속에 살아있을 아름다움이
때로는 삶의 여정속에서 퇴색되어진 채 버려질 때가 있다.



그 누구의 탓도 아니다. 그저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를 탓하고자 한다.
어린 아이들마져 동심을 잃어가고 있는 이 세상을 살아내는게 그리 녹녹치만은 않을것이기에
그저 세상탓을 하며 허허 웃고 말아야지 한다.
저 어린 아이들의 색동옷속에 묻혀진 잃어버린 날의 추억은 어디로 갔을까?
무심하게 그저 무의식의 순간속에서 하나씩 잃어가고 있는 우리의 그 무엇..
그 무엇떄문에 오늘 나의 가슴이 오후 내내 서늘했다.
아직은 저마다의 욕심이 아름답게 보여지지 않았던 탓이다.

꼭두각시춤이 시작되었을 때 사진기를 들이대며 운동장으로 몰려가던 학부모들의 모습이 나를 슬프게 했다 몇번씩이나 반복되어지던 말, 운동장밖으로 나가 주세요 아이들의 안전이 우려됩니다.... 겨우 몇걸음 움직였을 뿐이다 그 누구의 탓도 아니다 그저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를 탓하고자 할뿐, 그저 세상탓을 하며 허허웃고 말뿐..../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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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왜 무엇이든 믿고 싶어할까?
마르틴 우르반 지음, 김현정 옮김 / 도솔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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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무엇인가를 찾아보게 되면 어떠한 가치관, 종교, 사람, 사실 등에 대해 다른 사람의 동의와 관계 없이 확고한 진리로서 받아들이는 개인적인 심리 상태이다..라고 나온다. 아주 철저하게 개인적인 감정일 따름인데도 불구하고 그 믿음이란 말이 주는 의미는 확실히 넓고도 깊다. 왜일까? 그것은 아마도 마음이란 게 담겨있는 까닭이 아닐까 싶은데.. 요즈음에 와서 믿음이라는 의미가 왠지 종교적인 색채로만 보여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무리한 생각일까? 사람과 사람사이의 믿음보다는 아무래도 종교적인 것을 들이댈 때의 믿음이란 말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것 같다. 나는 평소 종교인들을 보면서 혹은 나 자신을 돌이켜 볼 때에도 사람들은 왜 무엇이든 믿고 싶어할까? 하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어찌 되었든 그 믿음이란 것을 붙잡게 되면 막무가내형으로 바뀌어가는 모습을 많이 보기도 했다. 왜일까? 무엇이 그토록 사람들을 막무가내로 변하게 만드는 것일까?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제목은 그동안의 내 물음표에 대한 마침표를 찍어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느것에 확실하게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는 것은 욕심이라는 말로 책장을 덮어야 했다. 그것 역시도 저마다의 느낌이 다를 수 있는 받아들이는 사람의 차이일테니까 말이다.

책장을 펼치면 세세한 소제목들이 우선 눈길을 끈다. 한번만 주의깊에 살펴본다면 그리 쉽지않게 써내려갔을 저자의 배려가 보이는 부분이기도 하다. 책의 내용은 총 13장으로 나뉘어져 사람이 어떻게 생각을 하고 영혼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사람의 무의식이 어떻게 행동을 결정하며 뇌의 구조적인 점을 들어가며 그것을 합리화시키고자 하는 의식에 대한 이야기들에서부터 이 책은 시작되어진다. 믿음이라는 것이 단순하게 이것이다,하고 정의내리기에는 뭔가 부연설명이 필요했기 때문이리라고 생각되어졌지만 초반부터 내가 읽기에는 약간의 따분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사람들이 왜 신비주의에 빠지는지, 종교가 태어나게 되는 배경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사람들이 왜 무엇이든 믿고 싶어 하는지를 저자는 성경의 재해석을 통하여 보여주려 하는 것 같았다. 얼핏 생각해보면 성경책을 아주 세분화하여 속속들이 밝혀내고 싶어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따분함때문에 책을 읽는 진도가 느렸다면 아마도 이쯤에서부터 이해의 속도에 탄력이 붙었던 듯 하다. 전설이나 설화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들과 복음서의 진위를 따져 물으며 그 이전부터 사람들의 무의식속에서 살아왔던 믿음의 실체를 아주 조금씩 보여주고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려웠다. 뇌의 구조라거나 알만한 사람의 이름을 빌어가며 실시했던 실험을 통하여 실례를 들어주고는 있지만 집중해서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는다면 다가오는 것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아 조금은 아쉽기도 했다.

오래된 관념은 당연히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관념은 뇌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으며, 의식에는 거의 접근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와 성서의 집필자들 역시 그들이 앞서 발견했던 관념들을 없애지 못하고 재해석했을 뿐이다.(110쪽)  어린시절에 교회 한번 안가본 사람이 있었을까?  그렇게 저렇게 이유를 붙인다해도 교회를 가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교회에 관한, 특히 예수나 성경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복음서는 창조적인 편집자의 창작물이라거나 맥락에 따라 달리 해석을 해야 한다거나 종교안에서 일어나고있는 모순점들 등..어른이 되어서 다시한번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우리가 마주쳐야만 했던 성경에 대한 재해석의 반론들은 종교인이든 무신론자이든간에 부지불식간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저 '그만큼은 나도 안다'는 식의 말쯤은 어디에서도 할 수 있을만큼만..  하지만 나는 이 책속에서 보여주고 있는 성경의 재해석분야에는 사실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내가 알고 싶었던 것은 성경의 재해석이 아닌 까닭이기 때문이다.  놀라웠던 점은 현대 종교 속에서도 살아 숨쉬는 고대 샤머니즘을 말해주는 대목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에게 있어 왔던 자칫 동화적인 이미지를 부여할 수 있는 부분들이 샤머니즘의 행태로  지금의 종교속에서도 버젓이 살아남았다는 것을 보면서 새삼스럽게 섬뜩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사람들은 아마도 필요에 의해 신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살아가는 현실에 의존하지 못하는 알 수 없는 불확실성에 대한 자구책으로 만들지는 않았을까? 그 불안함을 무엇인가를 통하여 혹은 누군가를 통하여 해결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신이라는 존재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여기 이 책속에서 그런 말을 발견하게 되었다. "인간은 자신의 관념에 따라 신을 창조했다"-루트비히 포이어바흐(133쪽)  시작할 때 말했던 것처럼 믿음은 철저히 개인적인 감정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믿는다고 하는 그 신에 대한 감정 역시 철저히 개인적인 감정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죽음뒤의 세상을 말하기에 앞서 일단은 자신의 마음에 평화가 깃들기를 바랐다는 것이 옳은 일인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누구나 평안을 원한다. 그것도 마음의 평안을.. 나 역시도 힘들고 어려울 때 누군가를 의지하고 있다거나 의지할 대상이 있다는 것이 커다란 위안이 된다는 것을 잘 아는 까닭이기도 하다. 더구나 그런 감정들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가질 수 있다면 더 좋지 않겠는가 말이다. 나와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을 만나게 되면 은연중에 마음을 열어 그 사람과 함께 공유하기를 꺼려하지 않는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 않을까? 하물며 제 안의 불확실성이라거나 불안감을 함께 나누며 이야기 할 수 있다는데에야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러다보니 하나둘씩 종교적인 모임이 생겨나게 되었을 것이고 또한 그 집단을 토대로 힘을 키우려하는 권력이라는 것도 생겨났을 것이라고 이 책에서도 말하고 있음이다.  이러한 종교단체들은 높은 참여율과 긴밀한 연대감, 엄격한 도덕규범, 막대한 자금을 신자들에게 요구함으로써 집단적인 불안감과 두려움 속에서 강력하면서도 안정적인 정체성,위기에 흔들리지 않는 세계해석과 시대해석,정돈된 가족구조, 연대감으로 구성된 긴밀한 조직망을 제공한다.(291쪽)

이 책의 저자는 감리교, 장로교, 침례교, 여호와의 증인, 제칠일 안식일 교회등 수많은 기독교 종파의 탄생 배경에 대해 들려주고 있다. 그에 따르는 창시자의 예언까지도.. 그리고 그들이 현재 어떻게 구원활동을 하고 있으며 어떤 교리로써 사람들에게 다가가는지도. 그들이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어떠한 방법을 동원하고 있는지까지도 낱낱이 밝혀주고 있다. 결국 누가 더 많은 세력권을 형성하는가가 관건인 것처럼 느껴져 씁쓸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이 세상을 살아내기 위한 또하나의 방편이라면 그것조차 어쩔 수 없는 일임엔 분명할 것이다. 아주 오래전의 종교전쟁에서부터 지금 이 지구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끝도없이 치루어내고 있는 종교전쟁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나는 모든 선한 자를 구원하고 모든 악한 자를 벌하는 전지전능한 '마초', 그리고 투사인 하느님을 더이상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의 삶이 참혹하게 무너질 때 우리를 위해 눈물을 흘려주는 자비로운 하느님은 믿습니다."(316쪽)  늘상 하는 말이지만 종교는 필요악이다. 필요해서 만들었지만 그것에 의한 지배를 받게 되어버리고 만... 이 말을 앞세우며 나는 믿음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사람들이 왜 무엇이든 믿고 싶어하는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그러면서 나는 믿음이라는 말이 예전처럼 사람과 사람사이에 오가는 마음의 행로로 다시 부각되어졌으면 하는 생각도 해본다.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전지전능하신 신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참혹하게 무너져 지치고 힘겨울 때 눈물을 흘려주는 신을 믿는다는 말처럼... 결국 마음을 의지할 수 있는 곳이 필요한 듯 하다. 그래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누구나 외롭다고 말하는 모양이다. 외로움... 그것이 원죄의 업보일까? 알 수 없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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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종교를 믿지 않으면 영원한 지옥에 떨어진다'라고 위협하는 종교들은 받아들이지 않아도 되는 근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 위협을 하는 종교나 종파가 한둘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어떤 이슬람교 종파는 알라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주장하고, 어떤 기독교 종파는 예수와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가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이름도 잘 알지 못하는 종교들 중에서도 비슷한 주장을 하는 경우가 무수히 많지요. 그런데 이런 종교나 종파에 따르면 그들의 신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 자보다 다른 신이나 우상을 믿는 자를 더 미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의 신은 '질투하는 신'이기 때문입니다. 질투하는 신은 아무 신도 믿지 않는 자는 그래도 용서해 줄 가능성이 있는 반면 다른 종교를 믿는 자는 가차 없이 지옥에 보낼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협하는 신이 여럿인데 그 중 특정 신을 믿을 경우 한편으로는 지옥에 갈 가능성이 줄어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가능성이 오히려 늘어납니다. 운 좋게도 자기가 선택하여 믿은 신이 정말 존재하는 경우 그는 지옥에 가지 않겠지요. 하지만 자기가 믿은 신이 아닌 다른 신이 존재하는 경우 그는 괘씸죄에 걸려 1순위로 지옥에 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위협하는 신들 중 어느 한 신을 믿는 것이 줄서기 모험을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파스칼이 말한 것처럼 특정 신을 믿는 것이 '믿어서 사실이면 좋고 사실이 아니라도 손해 볼 것은 없는' 일인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런 줄은 잘못 서면 치명상을 입게 됩니다. 따라서 줄서기에 자신이 없다면 차라리 중립을 취하는 것이 영원한 지옥에 떨어질 가능성을 더 줄이는 방법일 것입니다. <중략>... 자기를 믿지 않는다고 영원한 지옥에 보낼 정도로 불합리하고 비도덕적인 신이라면 그 신이 자기를 믿는 신자라고 해서 지옥에 보내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불합리하므로 믿는다'라는 말이 있지만 철저한 불합리는 모든 인간의 예측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나는 열심히 믿었으니까 천국에 갈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단순하고 소박한 믿음일 뿐이지요.
 

엊그제 읽은 책『 살아있는 날의 선택 』의 95~97쪽에 나와 있는 대목이다.
이 글은 post it이라고 하기엔 좀 그런 면이 없지않아 있는 듯 하다.
하지만 나름대로 나의 견해와 일치되는 면이 있어 슬며시 고소함을 느끼기도 했기에 여기에 적어본다.
단순히 비종교인들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작자는 '질투하는 신'이라고 정의를 내렸지만 나는 '이기적인 신'이라고 늘 말을 했었다.
사랑을 이야기하고 죽음뒤의 평안을 이야기하는 모든 신들에게서 '오직 나하나만' 이라는 컨셉을 발견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 까닭이기도 하다.
천국에 가면 금방석이 깔려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주변에서 자주 만나기도 하지만
도대체 그 어떤 것들이 저 사람을 저렇게 만들 수 있는가 생각하다가
결국 나는 그 사람이 믿는 신이 너무도 이기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이기적인 신이 아니었는데 그것을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여러번 해 보았다. 아마도 후자가 맞을 것 같은데...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한번 물어나보자. 이단이니 사이비니 하는 사람들에게 당신들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그들 역시 사랑이라고 말할 것이며 죽음뒤의 천국을 말할 게 뻔하다.
거두절미하고 모든 것은 자신의 몫이다. 죽음뒤의 세상을 인정하거나 인정하지 않거나.
단순하고 소박한 믿음일지 모르지만 그런 믿음의 가치 역시 자신만의 몫인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제각각의 생각과 선택을 가진 채 살아간다.
그러니 그냥 나름대로 살아가게 놔둘일이다.
세상속에는 모두에게 적용되어지는 것도 있지만 하나에게만 적용되어지는 것들이 더 많은 것 같다.
나 하나에게만 적용되어지면 그만인 것들을 마치 모두에게 적용되어져야 하는 것처럼 말하지는 말자.
그것 또한 이기적인 것이므로...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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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날의 선택
유호종 지음 / 사피엔스21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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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을 보았을 때 나는 또하나의 자기계발서일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책을 펴 목차를 살펴보는 동안 놀랍게도 죽음을 준비하기 위한 우리의 선택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았다. 부록으로 보여지는 WILL-PAPER 속의 유언장이나 의식이 분명할 때의 의료조치에 대한 요청서 등등.. 우리가 평소에는 전혀 관심조차 갖지 않는 그런 소재였던 것이다. 어떤 내용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well-being 이란 말이 우리의 생활속에 자리잡은지가 얼마나 되었을까? 지금은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well-being을 꿈꾸며 살아갈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는 well-dying 을 말하고 있었다. well-being과 well-dying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한번 생각해 보았다. well-being을 사전을 찾아보면 육체와 정신의 건강이 조화를 통해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는 삶의 유형이나 문화를 통틀어 일컫는 개념이라고 나와 있다. 그렇다면 well-dying 역시 그런 뜻으로 쓰여진 건 아닐까? 좀 더 행복하고 아름답게 죽기 위한 삶이나 문화를 우리곁에 가까이 두는 것 말이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죽음 뒤의 세계에 대한 우리들의 관심이 비대해진 것만은 사실인 듯 하다. 하지만 그 죽음 뒤의 세계를 향한 맹목적인 것들로 인하여 우리 곁에는 종교라는 허울이 너무 난무하는것 같아 때로는 씁쓸하기도 하다. 언제였는지 남편과 죽음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던 기억이 났다. 나는 물론 죽음뒤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주의였지만 남편은 달랐다. 그도 그럴것이 유교적인 관습속에서 살아온 집안의 장남이었으니 말해 무엇하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야 하는 것이니 절대로 무덤은 쓰지 말고 화장을 해달라고 말했다가 우리집안에 화장은 없다고 큰소리로 맞받아치던 남편의 얼굴이 떠올라 슬며시 또한번 웃음이 났다. 하지만 그렇게 완강하던 남편도 지금은 화장을 인정하고 있다. 이 책속에서도 죽음으로 이르는 혹은 죽음 뒤의 세상이 있다고 믿는 종교적인 관념이 너무 과하지 않느냐는 식의 대목이 보인다. 그런 맹목적인 믿음보다는 살아있을 때, 조금이라도 힘이 있을 때 나의 죽음으로 인하여 생겨날 문제들에 대해 좀 더 냉철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위한 대안을 마련해 놓는 것이 더 현명한 일이라고 작자는 말하고 있음이다. 하지만 죽음을 공포스럽고 혐오스러운 이미지로 받아들이는 우리의 현실이 그런 일들을 밖으로 드러내기 꺼려하니 더욱 더 힘든 과제가 되어가고 있다고 안타까워하고 있는 작자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었다.

죽음.. 사실 나는 죽음이란 의미를 그렇게 두려운 존재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내일 당장 내게 죽음이 온다해도.. 남겨지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를 하지않는 지독히도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남편의 핀잔을 들었던 때도 있었지만 이 책속에서 말하고 있는것처럼 '있음'과 '있었음'의 차이일 뿐이다. 현재형 또한 과거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왜 인정하지 않는지.. 작자의 말처럼 '있었음'을 인정하기만 하면 될 것을.. 언제였는지 TV를 통해 식물인간으로 정말 오랜 세월을 살아내고 있는 사람의 경우를 본 적이 있다. 그 때 내가 이렇게 말했었다. 혹시라도 내가 저런 경우가 된다면 나를 도와 준다고 생각하고 저렇게는 만들지 말아달라고.. 저것은 환자를 위한 마음이 절대 아니라고.. 단지 가족이란 이름으로 '도리'를 따지는 형식일 뿐이라고.. 사람이 사람으로써의 역할을 하지 못하며 일년을 산들 무엇하고 십년을 산들 무엇하겠느냐고.. 지금 내가 생각해보아도 차가운 말임에는 분명하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도리'보다는 '편히 죽을 수 있는 권리'가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서 나는 의학계에서 '안락사'를 인정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갖고 있기도 하다.

이 책속에서 말하고 있듯이 '호스피스'제도가 우리나라에서도 하루빨리 자리를 잡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죽음에 이르는 순간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  내게도 그런 순간이 왔을 때 아무렇지도 않게 함께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여러번 했었다. 책을 읽으면서 우리의 사회관념이 아직까지도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일까?  나는 또다시 유교적인 관념을 탓하고 만다. 작자의 말처럼 나도 죽음에 대해 준비하는 과정을 다시한번 생각해 봐야겠다. 살아있을 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다시한번 진지하게 생각하며 부록으로 나와 있는 것들을 채워보는 시간을 한번 가져보리라..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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