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철학자들의 죽음 수업 - 무엇을 위해 살고, 무엇을 사랑할 것인가? 메이트북스 클래식 12
미셸 에켐 드 몽테뉴 외 지음, 강현규 엮음, 안해린 외 옮김 / 메이트북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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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를 두번 썼었다. 만약 죽음을 앞두고 있다면 무슨 말을 해야할까 싶어서. 첫번째 유서는 길었다. 그러나 두번째 유서는 많이 짧아졌다. 죽음의 순간에 필요없는 말들을 나열하고 있는 내 자신이 참 어리석게 느껴졌었다. 내일 세상이 망할지라도 오늘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은 많이 회자되는 말이다. 우리는 묻는다. 당신은 어떻게 할 거냐고. 나? 나는 어제처럼 그냥 살 것이다. 하루동안 할 수 있는 일이 뭐 얼마나 될까? 톨스토이도 말했다. 현재에 충실하라고.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의 소중함을 느껴보라고. 백세시대라는 요즘, 진짜로 백세까지 살게 될까봐 무섭다. 이 책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늙음과 죽음은 엄연히 다르다. 몽테뉴의 말이 시선을 끈다. 나는 빨리 늙기보다는 늙어 있는 시간을 최소화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내가 겪을 수 있는 가장 작은 기쁨의 순간까지도 움켜쥔다. (-51쪽) 빨리 늙고 싶어서 늙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러니, 혹은 그럼에도 노력하라는 말일 터다.

아주 오래 살다 죽은 사람이나 아주 일찍 요절한 사람이나, 그들이 잃게 되는 것은 정확하게 같다. 두 사람 다 오직 공통적으로 소유하고 있던 '현재'라는 것만을 잃을 뿐, 그가 소유할 수 없는 그 밖의 것은 잃을 수도 없다.(-89쪽) 아울렐리우스의 말이다. 백퍼센트 공감한다. 너무 현실적이어서 간혹 허무주의에 빠져 있는게 아닐까 싶은 생각에 나를 돌아볼 때가 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너무 이상적인 삶을 사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저런 말들로 위안 삼기도 한다. 그런 까닭으로 인간다운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는 욕심을 갖게 된다. 어떻게 죽는 것이 인간다운 것일까 생각해보게 된다. 어떤 의사는 책을 통해 이렇게 말했었다. 숨만 쉬면서 침대에 누워있는 삶은 인간다운 삶이 아니라고. 환자가 말을 할 수 있다면 아마도 죽음을 원하지 않겠느냐고. 노인들에게 물어보면 하나같이 같은 말을 한다. 자다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얼마 전 <지옥>이라는 영화에서 보았던 장면이 떠오른다. 죽음을 예고하는 순간이었는데 영화에서처럼 진짜로 죽음이 예고된다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렇다면 매 순간이 색다르게 다가올지도 모른다고. 죽음을 항상 곁에 두고 산다면 그다지 두렵지도 않을거라고.

이 책에서는 몽테뉴, 아우렐리우스, 세네카, 키케로, 톨스토이의 말을 빌어 죽음에 대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실제적으로 다가오는 말보다 이론적으로 다가오는 말이 더 많은 것같아 조금 아쉬운 마음도 있다. 마지막으로 키케로의 말을 마음에 새겨본다. 노인들이 탐욕스럽다는 말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다. 앞으로 남은 날도 많지 않은데 노잣돈 몇 푼 더 챙기자고 기를 쓰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을까? (-1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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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 (별빛 에디션) - 내 마음을 몰랐던 나를 위한 마음 사전
투에고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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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부터 ㅎ까지... 어디에선가 저 말을 본 적이? 있다. 광고! 저 문구가 생각난 건 이 책의 목차때문이다. ㄱ부터 ㅎ까지의 낱말을 이 책을 통해 만나게 된다. 간절함, 눈물과 이슬, 다시, 말 한마디, 방향성, 상념들, 얽다, 적당한 거리, 초연함, 판단력, 하루... 이런 식이다. 다 읽고 난 후? 아니, 읽으면서 이미 그런 느낌이 들었다. 이 책은 에세이보다 자기계발서에 가깝다고. 격려가 필요할 때, 나와 가까워지고 싶을 때, 다시 시작하고 싶을 때, 바람만 불어도 흔들릴 때, 삶의 가치를 생각할 때, 자신에 대한 확신이 필요할 때... 각 장의 낱말을 품고 있는 짧은 문장들이 그런 분위기를 품고 있다. 그만큼 우리네 삶은 거기서 거기란 말일까? 사는 곳만 다를 뿐이지 사람 사는 모습은 다 같다는 말을 떠올리게 된다. 책의 소개글처럼 따뜻한 위로를 받고 싶어서 시선이 갔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 공허해지는 ‘빈 위로’가 아니라, 나를 찾고 ‘진짜 위안’을 얻고 싶었다”는 것이 글쓴이의 말이라 한다. 하지만 책 속의 낱말을 통해서는 힘들었던 자신을 내색하지 않는다. 그저 책의 제목처럼 그 때의 나를 돌아보며 토닥거리고 있을 뿐이다. 나 역시 살면서 몹시 힘들다고 느꼈을 때 글쓴이처럼 심리서에 빠져들기도 했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며 가고 있는 길이 맞는가 확인해 보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에게 글쓴이는 언어로부터 치유를 얻었다고 말한다. 지금 힘겹게 느껴지는 것들이 지나버린 시간속에서 치유되지 못한 것들이라는 생각에 공감한다. 하지만 정의되어진 것들이 모두 진리와 통하지는 않는다. 그저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지만.

책을 읽다가 '무드셀라 증후군'이라는 말에 시선이 갔다. 안 좋았던 일들보다 좋은 일들만 모아 '추억'이라 포장하며 그리워하는 일종의 퇴행 심리를 의미한다는데, 어쩌면 현대인들이 앓고 있는 병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습득한 정보를 한 달이 지난 뒤에는 21퍼센트밖에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 100퍼센트의 진실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한 줄의 문구에서 알 수 없는 위로를 받는다. 사람이 하루 평균 1만 2000~ 6만 가지 생각을 한다는 말은 놀랍다. 생각이 생각을 불러온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모양이다. 끝없는 상념들을 불러와 스스로 갇혀사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단어는 위로다, 라는 말로 시작했는데 에필로그에서도 언어의 한계는 곧 내 세계의 한계라고 글쓴이는 말한다. 뭐 그럴수도 있겠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면 그것은 공감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언어로 표현되어진다고 해서 그것이 완전할 수는 없을 것이다. ㄱ부터 ㅎ까지 한글의 자음 순서대로 글을 엮었다는 게 이채롭게 다가왔다. 작은 낱말 하나 하나를 살펴보면서 공감할 수 있는 부분도 많다. 다시 보니 ㄹ이 없다. 라면이나 라디오라는 낱말도 참 정겨운 말인데.....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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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을 위한 변론 - 무자비하고 매력적이며 경이로운 식물 본성에 대한 탐구
맷 칸데이아스 지음, 조은영 옮김 / 타인의사유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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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심각한 편견에 사로잡힌 동물이다. 우리는 어느 정도 자신과 연관되는 것을 좋아한다.(-32쪽)

저자의 말처럼 솔직히 우리는 식물과 직접적인 연관을 짓지 않는다. 나와는 상관없는 별개의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식물을 찾을 때는 한정적이다. 꽃이 필 때, 그리고 먹을 수 있는 열매를 줄 때. 하지만 식물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우리와 연관지어져 있다. 식물의 특징을 알게 되면 상당히 큰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굳이 저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기후변화의 시대를 살면서 식물이 인간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는가를 체험하고 있는 중이 아닐까 싶다. 식물에 의해 우리의 일상생활에 커다란 변화가 올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외면하며 살아가는 시대가 바로 지금이라는 말을 인정해야만 한다.


디펜바키아, 스킨답서스, 몬스테라... 식물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들어보았을 이름들. 그러나 저 식물의 잎에 독성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 것 같다. 심하면 장기 손상이나 죽음까지도 이르게 할 정도의 독성이라는 말에 놀랐다. 그것은 식물이 살아남기 위한 방어전략중의 하나일 뿐이니 인간의 입장에서 해롭다, 이롭다를 정의내릴 수는 없는 일이다. 자연다큐를 찾아볼 정도로 좋아하는데 동물보다는 식물쪽이 더 많은 관심을 끌게 된다. 물론 느린 시간을 빠르게 돌리며 보여주는 식물의 성장이 신비롭게 보여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그것보다는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들을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저마다 처해진 환경과 시절에 맞게 변화하며 살아남았던 식물의 역사는 정말 대단하다. 식물의 유혹을 견뎌내지 못한 사람들은 아마도 몇 번씩의 장례식을 거치고 거치며 식물의 삶에 대해 배우게 될 것이다. 식물을 위해 변론에 나선 저자의 마음이 와 닿는다.


사라지는 식물과 생물 다양성의 유기적 관계를 고찰하다.

우리가 흔히 쓰는 '서식지 파괴'라는 말에 대해 다시한번 짚어준 점에 감사한다. 식물은 지구의 모든 생명을 책임진다. 동물을 말하기 전에 식물에 대해 먼저 말해야 하고 쓰러지는 거대한 나무숲을 말하기 이전에 식물을 먼저 말해야 한다는 말에 공감한다. 사람들이 말하는 그 서식지에 식물이 없다면 동물도 나무도 존재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가. 쪼개지고 나누어진 서식지에서는 다양한 생물이 살아갈 수 없다는 걸 이제 큰 소리로 말해야 한다. 어쩌면 이미 늦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이 책에서는 지금까지 식물을 주제로 나왔던 책들처럼 식물의 성장이나 방어전략등에 대해서도 많이 다루고 있지만 우리가 쉽게 보지 못하는 식충식물이나 기생식물과 같은 식물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흥미롭다. 식물이 어떻게 이동하는지, 살아남기 위해 어떤 전략을 만들어내는지, 그들만의 세계를 깊숙히 들여다보고 있다. 한 식물이 사라지면 그 식물에 연결되어진 모든 생물도 사라진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아이비생각


서식지가 망가지는 형태, 크기, 방식은 모두 다양하지만 거기에는 인간이라는 공통 요소가 있다. 지구의 구석구석을 빼놓지 않고 정복하려는 인간의 욕구로 인해 생물권이 큰 곤욕을 치르는 것이다. (중략)

서식지 파괴가 더욱 비극적인 이유는 우리 주변에서도 수없이 많은 자연경관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소규모 서식지 파괴는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받는데, 사람들이 주변의 작은 땅을 두고는 개발되어 마땅한 지역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숲을 베어 만든 주택과 잔디밭, 습지를 메워서 만든 쇼핑몰, 초원을 갈아엎어 만든 옥수수밭이 대표적이다. 대규모 서식지 파괴는 생태계를 작은 조각으로 파편화하고, 그 뒤를 이은 소규모 서식지 파괴가 남은 조각을 야금야금 해치운다.(-38쪽)

중요한 사실은 식물이 곧 서식지라는 점이다.(-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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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와 옐로 봄봄 아름다운 그림책 87
브리타 테켄트럽 지음, 김서정 옮김 / 봄봄출판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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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의 제목은 Blue. 그런데 거기에 노랑이 추가 되었다. 파랑색과 노랑색을 섞으면 초록색이 된다. 그 하나만으로도 이 책이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파랑색은 슬픔과 우울을 담고 있고, 노랑색은 희망과 행복을 담고 있다고 한다. 결국 슬픔이 희망을 만나 평화로워졌다는 말이다.

책의 소개글을 빌려 말해 보자면 이렇다.


블루는 가장 깊고 어두운 곳에 살았어요. 햇살이 절대로 닿지 않는 곳이었지요. 날고, 놀고, 노래하기는 이미 잊어버렸습니다. 어느 날, 못 보던 새 한 마리가 숲에 나타났어요. 날아가는 곳마다 황금빛이 휘날렸지요. 그 새의 이름은 옐로, 옐로는 블루에게 말을 걸었지만 블루는 듣지 못했습니다. 첫째 날, 둘째 날이 지나 셋째 날, 블루가 아주 잠깐 고개를 들었고 마침내 옐로가 블루 옆에 내려앉았어요. 블루의 마음속에 따스함이 차올라 아주아주 오랜만에 노래하기 시작했습니다. 두 새의 부드러운 노랫소리가 숲을 가득 채웠고, 마침내 블루가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올랐습니다.



햇살이 절대로 닿지 않는, 큰 나무 가장 낮은 가지에 블루가 있습니다. 다른 새들은 블루를 찾지 않았어요. 같이 놀자고 부를 생각도 하지 않았지요. 하지만 옐로는 달랐습니다. 날아가는 곳마다 황금빛이 휘날리고 내려앉는 곳마다 초록 이파리가 자라게 하는 옐로는 블루가 보지 못하는데도 계속 블루를 부릅니다. 조금씩 다가가서 블루가 마음의 준비를 마칠 때까지 옐로는 기다려 줍니다.


조금씩 달라지는 블루의 모습에 마음이 울컥해진다. 세상에~ 옐로가 어떻게 알고 왔을까?


아이들에게 이야기책을 읽어줘야 할 나이에 그림책을 보고 있다. 이상한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편견이다. 그림책과 만화책이 아이들의 전용이라는 생각은 빨리 버려야 한다. 문화는 멈춰있지 않고 늘 변하는 까닭이다. 아이들보다 오히려 어른에게, 그것도 삶에 지친 어른들에게 꼭 필요한 책이 그림책이다. 단순한 이야기와 밝고 예쁜 그림이 치유의 약이 된다. 심리학적인 면을 살펴보더라도 그림으로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는 프로그램이 있을 정도다. 이 책을 처음 본 순간부터 마음을 빼앗겼다. 어느 날부터인가 그림책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생각하는 동화 시리즈만큼이나 마음을 일렁이게 하는 그림책이 너무 많다. 지금도 여전히 인터넷 서점을 기웃거린다. 그림책을 보려고. 그림책은 직접 보고 느낄 수 있을 때 그 진정한 가치를 발휘하는 것 같다. 우와~ 이 책, 너무 좋아!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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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2-10-05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무도 새도 전체적으로 색감이 화사하고 눈 부십니다. 좋은 그림책이네요.

아이비 2022-10-26 13:46   좋아요 1 | URL
때로는 그림책이 마음에 위로를 주기도 한답니다. 그래서 좋아요.
늦었지만 댓글 주신 마음에 감사드려요. 늘 평안하시길요 ^^
 
꽃인 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 - 김춘수 탄생 100주년 기념 시그림집
김춘수 지음, 조강석 엮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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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라는 이름을 부르면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詩, '꽃'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외우고 싶지 않아도 외워진 詩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솔직히 말해 시인 김춘수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저 '꽃'이라는 시의 주인이라는 것 외에는. 저 시가 관념적으로 쓰여졌다고 평하기는 하지만 관념적이든 아니든 그저 말들이 갖는 의미가 좋아서 사랑하는 글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이 책을 선택했던 건 김춘수라는 시인을 잘 알아서도 아니고, '꽃'이라는 시를 좋아해서도 아니었다. 요즘 부쩍 힘들어했던 마음에 다가왔던 단 한마디, '시그림집'이라는 말이 좋았다. 시와 그림이 있는 책이라면 일상의 힘겨움에 대한 위로를 받지 않을까 하는 아주 이기적인 마음이 앞섰던 까닭이다. 김춘수라는 시인의 이력을 이제야 보게 된다. 김춘수가 1922년생이라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정식으로 창작 활동을 시작한 것이 1948년이라고 하니 해방 후의 일이다. 교수와 학장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고 11대 국회의원까지 지냈다는 말이 보인다. 그의 시에서 항일정신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이 새삼스럽다. 그러고 보니 학창시절에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이라는 시를 배웠던 기억이 난다. 그냥 글의 느낌만으로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가 있는가 하면, 저자의 이력을 알아야 이해가 되는 시도 있다. 책의 뒷부분에 작품 해설이 있긴 하지만 그의 시는 결코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널리 알려진 '꽃'이라는 시가 주는 느낌만으로 그의 작품을 대한다면 조금은 당혹스러울지도 모르겠다. 그림만이라도 편하게 다가왔으면 참 좋았을텐데... 글과 엮인 그림인 까닭인지 도무지 가까워지질 않는다. 알 듯 모를 듯 너무 어려웠던 시그림집. 어쩌면 책을 덮은 후 다시 보이는 책의 제목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며시 끄덕이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이비생각

내가 만난 이중섭

광복동에서 만난 이중섭은

머리에 바다를 이고 있었다.

동경에서 아내가 온다고

바다보다도 진한 빛깔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눈을 씻고 보아도

길 위에

발자욱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 뒤에 나는 또

남포동 어느 찻집에서

이중섭을 보았다.

바다가 잘 보이는 창가에 앉아

진한 어둠이 깔린 바다를

그는 한 뼘 한 뼘 지우고 있었다.

동경에서 아내는 오지 않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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