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인 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 - 김춘수 탄생 100주년 기념 시그림집
김춘수 지음, 조강석 엮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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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라는 이름을 부르면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詩, '꽃'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외우고 싶지 않아도 외워진 詩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솔직히 말해 시인 김춘수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저 '꽃'이라는 시의 주인이라는 것 외에는. 저 시가 관념적으로 쓰여졌다고 평하기는 하지만 관념적이든 아니든 그저 말들이 갖는 의미가 좋아서 사랑하는 글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이 책을 선택했던 건 김춘수라는 시인을 잘 알아서도 아니고, '꽃'이라는 시를 좋아해서도 아니었다. 요즘 부쩍 힘들어했던 마음에 다가왔던 단 한마디, '시그림집'이라는 말이 좋았다. 시와 그림이 있는 책이라면 일상의 힘겨움에 대한 위로를 받지 않을까 하는 아주 이기적인 마음이 앞섰던 까닭이다. 김춘수라는 시인의 이력을 이제야 보게 된다. 김춘수가 1922년생이라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정식으로 창작 활동을 시작한 것이 1948년이라고 하니 해방 후의 일이다. 교수와 학장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고 11대 국회의원까지 지냈다는 말이 보인다. 그의 시에서 항일정신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이 새삼스럽다. 그러고 보니 학창시절에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이라는 시를 배웠던 기억이 난다. 그냥 글의 느낌만으로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가 있는가 하면, 저자의 이력을 알아야 이해가 되는 시도 있다. 책의 뒷부분에 작품 해설이 있긴 하지만 그의 시는 결코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널리 알려진 '꽃'이라는 시가 주는 느낌만으로 그의 작품을 대한다면 조금은 당혹스러울지도 모르겠다. 그림만이라도 편하게 다가왔으면 참 좋았을텐데... 글과 엮인 그림인 까닭인지 도무지 가까워지질 않는다. 알 듯 모를 듯 너무 어려웠던 시그림집. 어쩌면 책을 덮은 후 다시 보이는 책의 제목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며시 끄덕이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이비생각

내가 만난 이중섭

광복동에서 만난 이중섭은

머리에 바다를 이고 있었다.

동경에서 아내가 온다고

바다보다도 진한 빛깔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눈을 씻고 보아도

길 위에

발자욱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 뒤에 나는 또

남포동 어느 찻집에서

이중섭을 보았다.

바다가 잘 보이는 창가에 앉아

진한 어둠이 깔린 바다를

그는 한 뼘 한 뼘 지우고 있었다.

동경에서 아내는 오지 않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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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 허풍담 5 - 휴가
요른 릴 지음, 지연리 옮김 / 열림원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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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처음엔 이건 뭐지? 했다. 아무런 것도 느껴지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냥 단순히 살아가는 남자들의 허풍과 위세? 얼마전 보았던 다큐가 생각났다. 그린란드 유목민의 생활을 다루었던 프로그램이었는데 그 삶의 형태가 이채로웠다. 그들의 삶에는 여유가 있었다. 지구상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민족중의 하나. 뜨거워진 지구와 문명의 이기로 인해 이젠 그들에게 그들만의 생활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삶의 형태는 없다. 그래서인지 젊은이들은 민족의 삶을 포기하고 저마다의 목표를 안은 채 도시 생활을 즐기며 살고 있었다. 간혹 아버지의 삶, 혹은 할아버지의 삶을 그대로 이어받고 싶어하는 젊은이도 있었지만 녹아내리는 북극의 얼음이 냉혹한 현실을 말해주고 있던 장면을 통해 안타까움이 전해졌다. 눈이 없으니 더 이상은 썰매도 탈 수 없었다. 이 책에 눈길이 갔던 것은 아마도 그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예상하지 못했던 이야기의 전개 방식이 잠시 주춤거리게 만들었지만 하나 하나의 이야기가 쌓여가면서 슬그머니 빠져들기 시작했다. 어라? 이 책, 은근 재미있다. 문명 생활에 길들여진 사람들이라면 꿈속에서나 가능했을 그 남자들의 일상. 살짝 부럽기도 하다. 1년에 한 번 도착하는 보급선을 통해 다른 세상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서로의 집을 방문하기 위해서는 개 썰매를 타고 밤과 낮을 이동해야 한다. 해가 지지 않는 여름의 백야와 해가 뜨지 않는 겨울의 극야를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그들의 삶에서 알 수 없는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들도 사람인지라 혹독한 추위와 외로움이 괴롭다. 다큐 프로그램을 통해 보았던 유목민들의 삶을 되돌려 생각하게 된다. 그들은 모두가 친구였으며 모두가 가족이었다. 언제 어느 때 찾아가도 제 집을 찾은 나그네를 따스하게 맞이해 주던 그들의 모습. 길 떠난 누군가를 위해 곳곳에 지어진 천막, 천막 안의 생활 도구와 음식들. 함께 한다는 게 그리도 아름다운 것이라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된다.


책을 읽다가 지은이의 이력을 찾아 보았다. 일생 동안 세계 곳곳을 탐험한 작가이자 탐험가인 요른 릴의 자전 소설이라 한다. 젊은 나이(19세)에 찾아갔던 그린란드 북동부의 매력에 빠져 그곳에서 16년이나 살았단다. 재미있는 것은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도, 자신이 쓴 글을 어딘가에 발표하겠다는 목표도 없었다는 것이다. 단지 자신과 함께 지냈던 북극 사냥꾼들의 이야기를 잊고 싶지 않아서 기록했을 뿐. 그래서인지 문장마다 순수함이 느껴진다. 쉽게 말하면 단편소설을 묶은 소설집이다. 한 사람이 하나의 이야기가 되었다. 그 하나 하나의 이야기들이 모여 북극이라는 커다란 배경이 되어 주고 있다. 책의 제목에 붙은 '5'라는 숫자 때문에 잠시 망설였었다. 시리즈로 나온 책이라면 앞을 모르니 이해하기가 힘들수도 있겠구나 싶어서.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탄력이 붙으니 빠르게 책장이 넘어갔다. 여유를 품은 남자들의 사는 이야기다. 마치 황당한 요정의 세계를 들여다본 듯한 느낌이랄까? 책의 소개글에서 보았던 것처럼 전편의 이야기들이 궁금해졌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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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 대여점 - 무엇이든 빌려드립니다
이시카와 히로치카 지음, 양지윤 옮김 / 마시멜로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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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는 팔백만의 신이 있다고 한다. 실제로 일본에 가보면 작은 신사들을 도처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데 가까이 가서 살펴 보면 동물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유명한 신사나 절의 입구에 버티고 서 있는 것들도 대부분은 동물의 형상이다. 그 중에서도 여우나 개, 너구리, 고양이 신이 모셔신 신들을 많이 보았다. 여우나 너구리는 사람들 사이에 살아있는 전설처럼 떠도는 이야기도 많다. 오래전의 영화 <게이샤>에서 배경으로 나왔던 후시미이나리신사앞에도 커다란 여우 두마리가 지키고 서 있다. 곡물의 신으로 기억하는데 맞는가 모르겠다.


여우나 너구리, 고양이 이야기가 많이 떠도는 것은 아마도 변신할 수 있다는 속설 때문이 아닌가 싶다. 둔갑하는 여우의 이야기는 우리나라에서도 전해져 내려온다. '여우누이'나 '구미호'처럼. 옛날부터 여우를 부릴 수 있는 여우술사가 대를 이어 내려오며 그 술사들에게 충성을 다 한다는 여우 이야기. 바로 이 책의 배경이다. 그 오래된 이야기를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외모지상주의에 결합시켜 이기적이고 모순적인 심리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한번 생각해 보았다. 외모를 바꾸고 싶을 때가 있었나?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외모보다는 능력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해 본 것 같다.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대부분 젊은 세대라는 점은 안타까움을 불러온다. 단순히 예쁘고 잘생겼다,라는 것은 잠깐의 효과일 뿐인데도 마치 그것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작금의 현실도.


외모를 대여해 드립니다... 하지만 명심하실 것은 아주 잠깐만이라는 것이지요. 겉모습만 잠깐 바뀌는 것이기 때문에 당신의 원래 모습과 함께 움직여야 한다는 조건이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참, 당신의 원래 모습과 멀리 떨어지게 되면 변신의 효과가 사라진다는 것도 잊지 마세요. 당연히 범죄에는 이용할 수 없습니다... <외모 대여점>이라는 책의 제목도 씁쓸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변신한 여우를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사실 책의 주제는 여우의 변신을 통해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이 따로 있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는 것. 타인의 입장에서 한번 더 생각해보라는 것. 보여지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 주제는 신선했을지 모르겠으나 깊이가 너무 얕다. 일본소설이 보여주던 무게감도 없어 이야기가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 든다. /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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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
주제 사라마구 지음, 김승욱 옮김 / 해냄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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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사상의 주요 흐름을 형성하는 정신과 육체의 이원론은 플라톤에서 유래합니다. 플라톤 시대의 그리스 지역에서는, 인간의 영혼은 원래 신적인 본성을 가졌는데 육체의 감옥에 갇히게 되면서 신성(神聖)이 훼손되는 위기에 빠졌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생 동안 영혼을 정화하는 일이 지상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플라톤에 따르면 인간 영혼의 원래 고향은 동굴 밖 형상들이 존재하는 빛의 세계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 영혼이 천상으로부터 추락해 동굴 속(현상세계)에 유배되어 육체라는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혜를 사랑하는 이성적인 영혼이 육체에서 비롯된 욕망과 감정을 극복해서 천상의 이데아를 깨쳐야 합니다. 이것이 정신과 육체의 이원론입니다.(글의 출처:네이버지식백과)


책을 읽는데 엄청 오래 걸렸다. 처음엔 읽을 만 했다. 하지만 책장이 넘어갈수록 이 책을 괜히 읽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슬슬 밀려 든다. 사실 지금까지 읽었던 주제 사라마구의 작품이 쉬웠던 건 아니다. 전체적인 전개는 어렵지 않으나 그 흐름속에 담겨있는 의미가 상당히 크고 깊다. 평생을 도자기 빚는 일만 해 온 도공 시프리아노 알고르의 삶은 소박하다. 딸 마르타는 아버지의 눈길만 보고도 감정을 알아챌 만큼 살겹다. '센터'에서 경비원으로 일하며 열흘마다 집으로 오는 사위 마르살도 시프리아노 알고르에게는 소중한 사람이다. 이들은 곧 마르살이 '상주경비원'으로 진급을 하게 되면 '센터'에서 제공하는 아파트로 들어갈 계획이다. 이 책의 주요 배경은 그들이 살고 있는 자연스러운 곳 '외곽'과 모든 것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센터'이다. '센터'에는 쇼핑몰과 놀이동산 등이 있다. 하루가 다르게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중이다. 날이 갈수록 '센터'는 인간성까지 파괴해가며 자본주의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준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을 모두 팔고 싶지만, 우리가 반드시 팔아야 하는 물건을 여러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주신다면 더 좋겠습니다.. '센터' 전면에 붙여진 포스터의 말이다. !!! 도공 시프리아노 알고르는 자신의 집이 있는 외곽에서 도자기를 빚어 '센터'의 백화점에 납품을 하고 있었지만 팔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도자기를 매장에서 빼라는 연락을 받게 된다. 당장 일을 잃게 된 그가 궁여지책으로 택한 것이 찰흙인형이다. 마르타와 함께 인형 천 이백 개를 만들어야만 한다. 하지만 사위 마르살의 진급으로 인하여 '센터'의 아파트로 이사를 가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된 늙은 도공의 삶이 어찌 변할지는 알 수 없다.


책 속에 등장하는 두 개의 동굴은 상징성을 지닌 듯 하다. 시프리아노 알고르가 백화점에서 빼낸 도자기들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저장하는 마을 한쪽의 동굴과 아파트 지하에서 발견 된 또하나의 동굴이다. 두번째로 등장하는 동굴이 바로 플라톤의 동굴이란다. 약간은 뜬금없기도 하고 뭐지? 하는 기분도 든다. 플라톤이 <국가론>에서 다루었다는 이원론이라는데 쉽지 않다. 마지막부분에서 '센터'의 아파트를 나온 마르타와 마르살이 이미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에게 되돌아 오는 모습은 이채로웠다. 그리고 그들은 떠나기로 한다.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떠날 수 있을까? 아무리 '동굴'을 발견했고 또한 그 '동굴'속의 모습이 나 자신의 모습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해도 결국 '현실'을 떠나지는 못할 것이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아야 하는 것, 각박함 그 자체, 절실함 그 자체를. 삶의 또다른 이름은 '처절함' 혹은 '타는 듯한 목마름'이 아닐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해 본다.


중요한 것은 그야말로 기가 막힌 문장의 표현력이다. (여기서 또 한번 번역하시는 분들에게 존경을 표한다^^) 주제 사라마구의 작품은 많다. 그 작품들 중에서 <수도원의 비망록>, <이름없는 자들의 도시>, <눈먼 자들의 도시>, <눈뜬 자들의 도시>는 읽어보았다. 매혹적인 글 맛이 참 좋았었다. 인간의 허울을 어쩌면 그렇게도 신랄하게 벗겨내며 비판할 수 있는지 경이롭기까지 했었다. 꾸밈없는 직설적인 문체가 작품마다 상당히 독특한 맛을 느끼게 만든다. 현실인 듯 허구인 듯 겉과 속이 다른 인간의 속성을 마구 파헤치고 있음이다. <동굴>은 <눈먼 자들의 도시>와 더불어, 특정 시대와 장소를 넘어선 인간과 사회에 대한 보편적 성찰이라는 사라마구의 후반기 문학적 특징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라는 책의 소개글이 눈길을 끈다. 읽었던 작품들의 구성은 단순하다. 하다못해 등장인물도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고 싶어하는 메세지의 울림은 깊고 강하다. <눈먼 자들의 도시>를 읽고 난 후 <눈뜬 자들의 도시>를 읽지 않는다면 그건 이상한 일이다. 그만큼 인간의 속내를 잘 파헤친 글이 있을까 싶을 정도다. 인상깊은 구절이 너무 많아 어쩔 수 없이 밑줄을 그어가며 책을 읽었다. 이 책은 이제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책이 되었다. /아이비생각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말할 가치가 없거나, 딱 한 번만 말하면 되는 말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는 더 가치있는 다른 말의 자리를 차지해 버릴 것이다. 그 말이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 말이 불러올 수 있는 결과 때문에 그렇다.(-48쪽)

세상에 거짓이 얼마나 많은지, 어딘가에 진실이 조금 있기는 하겠지만, 진실은 계속 변한다. 그리고 진실일 가능성이 있는 것들은 우리에게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주지 않는다. 게다가 우리는 진실일 가능성이 있는 것들이 혹시 그럴듯한 거짓말은 아닌지 확인해 봐야 한다.(-117쪽)

삶이란 온갖 문제를 안고 있음에도 항상 균형을 사랑한다. 만약 삶이 모든 것을 마음대로 좌우할 수 있다면, 모든 구름 뒤에는 한줄기 밝은 빛이 있을 것이고, 오목한 곳에는 반드시 볼록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226쪽)

우리는 책을 선반에 꽂아두거나, 트렁크에 넣어두거나, 먼지가 쌓이고 좀이 슬도록 내버려두거나, 어두운 지하실에 처박아두기도 한다. 몇 년이 지나도록 눈길 한 번, 손길 한 번 주지 않을 때도 있다. 하지만 책은 전혀 개의치 않고 조용히 기다린다. 내용물이 조금도 사라지지 않도록 입을 꼭 닫은 채.(-248쪽)

곧 익숙해지겠지. 우리는 이 말을 자주 듣는다. 우리가 직접 이 말을 할 때도 있다, 곧 익숙해지겠지. 우리가 이 말을 할 때나 다른 사람들이 할 때나 진심으로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에겐 체념을 가능한 한 당당하게 표현할 방법이 달리 없다. 적어도 다른 방법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익숙해질 때까지 우리가 치러야 하는 대가가 얼마나 되는지 묻지 않는다.(-334쪽)

우리는 예절이라는 것의 그물망에 사로잡혀 있어, 예의 바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거미줄에 (-336쪽)

사랑이 사람들을 결합시켜 주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을 다 결합시켜 주는 건 아냐 (-3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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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산조각
정호승 지음 / 시공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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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산조각 / 정호승

룸비니에서 사온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마룻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목은 목대로 발가락은 발가락대로

산산조각이 나

얼른 허리를 굽히고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순간접착제를 꺼내 붙였다

그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 주시면서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가 있지

한 편의 詩가 우화로 태어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단다. 그래서 쓰게 된 책이라고 한다. 동화나 우화는 아주 작은 이야기를 통해 아주 큰 울림을 준다.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고 어렵지 않게 그 뜻을 헤아릴 수 있어서 좋은 것이 동화나 우화일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맑고 향기로운 생각속에서 만들어지는 게 동화나 우화일거라고도 생각했었다. 그래서 선뜻 이 책에 손을 내밀었다. 이 무더위를 가볍게 식혀줄 수 있을 것 같아서. 평소에도 자주 필사하곤 했던 <산산조각>이라는 시를 다시 한번 읽어보았다. 역시 좋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책을 읽는 내내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 라는 詩가 자꾸만 떠올랐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아마도 많은 사람이 암송하는 시 중의 하나 일 것이다. 그만큼의 가치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 ' 삶의 가치'다. 책띠의 말을 보자면 이렇다. 이 책은 인간의 삶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 가치인가, 그 가치를 통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우화의 방법으로 성찰해 본 것이다. 독자 여러분께서도 내 존재의 가치를 찾아 그 가치에 순명함으로써 뜻 깊은 인생을 완성하시길 기도한다... 작가의 말이라 한다. 그런데 왠지 부담스러운 느낌이 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조금은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모든 이야기의 말미에 그러니 너도 너의 가치를 알아 그 가치에 알맞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반복하고 있다. 작가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지 못하는 건 아쉬움으로 남았다. 똑같은 천으로 태어나 누구는 행주가 되고 누구는 걸레가 되었다는 것처럼 누구나 한번쯤은 본 적이 있고 들은 적이 있었을 이야기들이 이 책 속에 있다. 그럼에도 저마다의 가치가 다르다는 이야기... 삶이 무엇이냐고 묻는 이보다 구도의 길을 가고 싶은 사람에게 권해야 할 듯한 그런 느낌? 너무 큰 기대를 했었나? 물론 읽는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느낌은 다를 것이다. 답이... 너무 어렵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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