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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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이 책의 부제다. 아우슈비츠가 유대인을 집단으로 학살했던 수용소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400만 명의 목숨을 빼앗았던 비극의 현장이 바로 그곳이기도 하다.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그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생지옥을 만나게 된다는 곳. 유대인 학살을 이야기할 때마다 인용되어지는 굴뚝의 연기. 그 소각로나 카펫을 짜기 위해 머리카락을 모아두었다는, 그리고 고문실등 그야말로 광기의 역사를 전해주고 있는 곳이 지금은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는 것을 나는 지금에야 알게 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나치에게 희생된 사람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란다.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를 찾아가던 여행프로에서 그 때 당시 희생되었던 사람들의 두개골만 모아놓았던 위령탑이 떠오른다. 너무나 많아서 누가 누구인지를 가려낼 수 없어 그렇게 한곳에 모아 두었다고 하는데 그 탑의 이름이 영혼의 눈물이었다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아마도 그랬던 것 같다. 숙연해지던 참배객들의 표정이 생각난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폴란드가 그 곳을 보존하기로 결정한 것은 정말 뜻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은 바로 그 현장에서 살아남았다는 사람의 기록이다. 뒷부분의 부록을 읽다보면 그가 겪었던 일들을 전해야 한다는 의식만으로 버텨냈다는 말이 있다. 이 얼마나 냉혹하고 잔인한 현실인지...

공동샤워실... 이곳이 바로 위장된 가스실이었고 그곳에서 약한 사람이나 노인들, 어린아이들이 죽어갔다.  나치의 인종법에 의해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희생양이었다. 금니를 뽑아 금괴로 만들었다거나 머리카락을 모아서 카펫을 짰다거나 하는 것들은 이 책속에서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열차에 올랐던 사람들. 그들은 이미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배설물과 함께 먹고 자고 한다는 것이 사람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단지 화학을 전공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수용소에서의 마지막을 남들보다 나은 생활속에서 지냈지만 그가 보고 겪었던 일들을 말이나 글로 전해듣는 우리가 얼만큼이나 공감할 수 있을런지... "몇 개?" "650개"... 나치는 그들을 그렇게 불렀다. 어떻게 분노하지 않고도 사람을 때릴 수 있을까? 묻고 있는 그 심정은 오죽할까 싶기도 했다. 싸구려 상품들처럼 무자비하게 포개진 채 무를 향한, 아래쪽을 향한, 바닥을 향한 여행을 했다던 저자의 말은 상상할 수조차 없을 것 같다.

여행중에 그리고 그 후에도 끝도없는 절망의 나락에서 우리를 건져낸 것은 바로 이런 불편함, 구타, 추위, 갈증이었다. 살려는 의지나 의식적인 체념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서로에게서 희망을 보았다. 아니 서로를 바라보며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마음을 다졌을 것이다. 시간이 한방울씩 흐른다! 우리는 아직 죽지 않았다! 그 더딘 시간들을 견뎌낼 수 있게 해 주었던 버팀목은 무엇이 되었든 정말이지 단단했고 끈질겼다. 누구의 탓도 아니라고.. 누구를 탓해서도 안되는 거라고.. 옆 침대의 젊은이가 가스실로 가야하는 운명에 처했다고 해도 자신이 선발되지 않은 것에 대해 신께 감사하는 노인을 원망해서도 안된다고...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 이름은 174517.. 텅 빈 인간...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인간이기에 그렇게 잔인할 수도 있고, 인간이기에 그 잔인함을 견뎌낼 수 있었던 거라고.. 그래서 한번 더 생각해보면 이것이 인간이냐고 묻고 있는 주체는 가해자가 될 수도 있고 피해자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내가 인간임을 느끼게 하는 잔인하고 오래된 고통, 기억... 그 기억은 이미 오래전에 곁을 떠나가버린 지난 시절들이다. 뒤돌아보면 안타깝기만 한 그런 기억들이 그들을 버티게 해 주었던 것이 아니었다. 당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야 한다는 오직 한가지 신념으로 살아남았다는 그의 말은 정말이지 기가 막히다.  그런 기억들이 육체를 혹사시키고 배고픔에 주린 배를 쓸어내리고 곪아가는 상처의 아픔이 지독할수록 찾아오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혹독한 현실을 견뎌내야만 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런 기억은 오히려 사치였을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인간을 파괴하는 것은 창조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라고. 쉬운 일도, 간단한 일도 절대 아니지만 독일인, 당신들은 그 일에 성공했다고...

부록 1 - 독자들에게 답하다부록 2 - 프리모 레비 연보 를 읽으면서 쓸쓸하게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던 그를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내가 모르고 지나쳤던 그 커다란 사건의 배경이나 그일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에 대한 이해를 돕기에는 충분했다. 이미 많은 시간이 흘러 지나가버린 기억들에 대해 묻는 이 시대의 사람들.. 그 사람들의 질문앞에서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 힘겨운 고통을 견뎌냈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 열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얼마나 먹먹해지던지... 그에게는 그 열흘이라는 시간이 백년은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해서 살아남은 이들중에서 나중에 서로 만남을 가진 이도 있지만 아픈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다며 만남을 원치 않았던 사람도 있다고 했다. 그럴 것이다. 아픈 기억은 잊고 싶어하는 것이 사람일테니... 영화 <쉰들러 리스트>나 <인생은 아름다워>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하는 제2차 세계대전이야기..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혹은 머물러 있는 시대에 따라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되는 것은 삶의 아이러니일까?  '이것이 인간인가' 라고 묻는 저자의 아픔속에서도 '인간'임을 인정했던 사람들도 있었음을 떠올린다. 그래서 아직은 우리에게 조금의 따스함이 남아있을 수 있는거라고...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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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으로 꼭 알아야 할 한국의 명품문화
하중호 지음 / 삼양미디어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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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 과연 무엇을 우리문화라고 하는 것일까? 단순히 옛 것만을 우리문화라고 부르는 것은 아닐게다. 보통은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것들이 우리문화라는 이름으로 다가온다. 솔직하게 말해 나는 우리문화라고 일컬어지는 옛전통에 대해 잘 모른다. 잘 모르면서도 주변에서 마주쳐야 하는 형식들에 대한 반감이 상당히 큰 편이기도 하다. 우리문화라고 하면 왜 유교문화라는 말부터 생각이 나는지..... 우리것을 알고 싶다는 욕심을 내세워 우리문화 따라잡기에 한발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중이다. 일상적으로 그냥 유물이나 유적이라고 치부되는 것들이 안고 있는 속뜻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내가 과연 얼만큼이나 알고 있는지, 제대로 알고나 있는 것인지 그것을 배우고 싶었던 까닭이다. 그냥 무심히 스쳐지났던 하나의 석등속에서 살아숨쉬는 옛숨결을 알아챘을 때의 놀라움이라는 것은 정말 대단했었다. 내가 몰랐던 것들,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으나 너무나도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하나를 배워도 제대로 배웠으면 했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명품문화라는 말에 솔깃해졌던 것은..

삼양미디어의 <상식으로 꼭 알아야 할~> 시리즈를 여러편 보았지만 느낌은 괜찮았다. 가끔씩은 방대한 양을 너무 간편하게 요약하는 건 아닐까 싶어 안타까울때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한 권의 책으로 만나는 여러 분야의 이야기는 충분히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 책속에서 만날 수 있는 것들은 그다지 색다른 느낌을 전해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살면서 쉽게 마주치기도 했고 주변을 통해 보고 듣는 것들이 많은 까닭이다. 그렇다고해서 가볍게 넘겨버리기에는 뭔가 부족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명품문화로써의 우리것을 해석하는 저자 나름대로의 시선이 새로운 까닭이다. 예절바른 옷차림이라는 것이 우리의 한복에서 이제는 양복으로 바뀌어버린 지금에도 저자는 각기 나름대로의 문화적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남의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결코 틀렸다거나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고 그 안에서 살아숨쉴 수 있는 우리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에는 백프로 공감한다. 

인성을 키워주는 한국의 명품예절부터 품격을 높이는 인사라거나 이제는 많이 잊혀져가고 있는 한국의 세시풍속에 얽힌 깊은 의미들을 하나하나 짚어주고 있다. 효를 중요시했던 우리민족이었기에 감히 물리칠 수 없는 제사문화, 그리고 우리가 고쳐야 할 의식이나 문화들은 어떤 것이 있는가 세세하게 잘 보여주고 있다. 남녀가 사랑을 해서 함께 살기 위해 하는 예식을 말할 때 결혼이 맞을까 혼인이 맞는 말일까?  결혼結婚은 맺을 결結, 장가들 혼으로 신랑이 장가드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싶다. 그렇다면 혼인婚姻이라는 말은 무엇일까? 장가들 혼, 시집갈 인으로 신랑신부가 장가들고 시집간다는 뜻이니 결혼이 아니라 혼인이 당연히 맞는 말일게다. 그런데 한자사전에서는 혼인할 혼이라거나 혼인 인으로 나온다. 옛 뜻의 와전일까? 아니면 현대생활에 맞게 바뀌어버린 것일까? 그것이 궁금하다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이어지는 혼인에 대한 설명이 재미있다. 혼인을 혼례라 하였던 뜻을 보면서 시간에 쫓기는 우리의 예식문화를 다시한번 생각하게 된다. 저녁에 장가들어 그날을 충분히 쉴 수 있게 해 주었다던 우리 선조들의 따스한 마음이 놀라울 뿐이다.

잘못된 호칭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익숙해졌기 때문일까? 지금 사람들은  "자기야~"라는 호칭을 많이 쓴다. 나 역시도 "ㅇㅇ아빠"라는 호칭과  "자기야~"라는 호칭을 함께 얼버무려 쓴다. 그런데 이 책속의 호칭문화를 읽다보면 한쪽 구석으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보배처럼 여기고 내 몸과 같이 여긴다는 의미가 들어있는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여보"와 "당신"이라는 호칭이 그다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을 것 같다. 그처럼 서로가 서로를 불러주는 말 한마디에도 좋은 뜻이 담겨져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 걸 생각하면 우리 스스가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살아가고 있는건 아닌지 다시한번 되돌아보게 된다. 스스로를 소중하게 여길 때, 그리고 상대방을 소중하게 여길 때 '우리'가 소중해지지 않을까 싶어 하는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마치 <삼국유사>를 읽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했다. 우리의 세시풍속이나 제사문화에 얽힌 이야기들이 그렇다는 말이다. 단순히 아름다운 사랑만을 생각하게 만들었던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옛이야기속에서 찾아낸 효는 참으로 지극했다. 얼마전 극작가 신봉승님의 강연회에 다녀왔었다. TV로 만날 수 있었던 <조선왕조오백년>의 극작가이기도 하다. 제대로 된 글을 쓰기 위해 방대한 <조선왕조실록> 을 다 읽어보셨다고 하니 정말 대단하다. 519년 동안의 조선사를 하나하나 기록했다던 <조선왕조실록>.. 복잡하게 얽혀드는 현대사를 풀어나가기 위한 정답이 우리의 옛것속에 들어있다는 말씀에 공감할 수 있었다. 우리의 역사를 바로 알아야만 지금의 난세를 극복할 수 있는데도 우리는 역사를, 오래된 우리의 모습을 도외시하고 있다고... 이 책속의 글들처럼 아주 작은 것들부터 우리가 받아들이며 살아갈 수 있다면 좀 더 나아지는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저자의 말처럼 '한국분'으로 불리워질 것인지 '한국놈'으로 불리워질 것인가는 우리의 책임이다. 우리 것은 우리가 지켜야 한다는 말씀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을 것 같다. 아울러 쉽게 생각했던 우리문화에 대해 좀더 깊은 마음으로 다가서야 하리라는 다짐을 해 본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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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더 씨의 위대한 하루 폰더씨 시리즈 4
앤디 앤드루스 지음, 이종인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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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앤드루스라는 작가의 작품은 이 책부터 시작했어야 했을까?  작품의 성격이 '자기계발서' 인지라 어떤 것부터 읽어도 상관은 없겠지만 왠지 그러고 싶었었다. <선택>이나 <오렌지 비치>와 같이 이 책 역시 작가가 무엇을 말해주고자 함인지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다. 자기계발서... 그다지 유혹을 느끼지 못하는 부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최근에 읽었던 <오렌지 비치>는  생각보다 부드러웠다는 느낌이 남아 있다. 어린 시절부터 꼭 읽어야만 하는 것처럼 우리를 압박하는 것이 위인전이 아닐까 싶다. 그 위인전을 읽으면서 꿈을 키우고 어려움을 이겨내고 마침내는 성공하는 모습을 닮으라는 의미겠지만 사실 어린 시절에 읽는 위인전이 그다지 큰 감동을 전해주지 못한다는 것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뭐,다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부모의 욕심이 너무 지나쳐 요즘말로 아이를 잡는 결과가 나오게 된다면 그것은 모두에게 힘겨운 일이 분명할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내가 어린시절에 읽었던 위인전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된다. 아무래도 문화적인 차이때문일테지만 세계의 위인들보다는 한국의 위인들이 더 깊이 각인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가장 많이 회자되어지는 위인은 누굴까? 말할 필요없이 에디슨일 것이다. 달걀을 품어 병아리를 만들어보겠다고 했다던 그 이야기를 모르는 아이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엄청나게 이슈되고 있는 창의력이라는 것을 그런것에 빗대곤 하지만, 그리하여 엉뚱하고 호기심 많은 아이들을 제지하지 말라고 하지만 과연 그런 것들이 창의력일까 한번 생각해보게도 된다.  위인을 되기 위한, 혹은 성공하기 위한 일련의 법칙처럼 등장하는 자기계발서들의 목록은 거의가 비슷하다.  이 책속의 부제목에서처럼 말이다.

결단을 내려야 했던 트루먼이나 멋진 지혜를 보여주었던 솔로몬의 선택이라거나 콜럼버스나 체임벌린처럼 행동하지 않는자는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수 없다는 법칙등 우리가 만나서 배워야 할 점이 있다고 생각되어지는 사람들은 꽤나 많다. 오늘을 행복한 사람으로 살겠다고 선택했던 어린 소녀 안네 프랑크, 매일 용서하는 마음으로 살겠다던 링컨, 하지만 내게 색다른 느낌을 전해주었던 것은 가브리엘이라는 대천사였다. 사람들이 마음먹고 계획을 세웠으나 혹은 아주 조금만 더 앞으로 나아갔더라면 분명히 성공했을 그런 일들을 관리하는 가브리엘... 우리가 살면서 마음 먹었던 것, 계획을 세웠던 것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리고 시작은 했으나 마무리 짓지 못한 일들은 또 얼마나 많았을지? 생각해보면 참 많다. 아쉬움일게다. 버려졌으나 차마 떠나지 못한 채 마음 한쪽 귀퉁이에 남아  웅크린 많은 꿈들을 그 대천사 가브리엘이 못내 아쉬워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믿음을 가지라고.. 끝까지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평생직장이 될 것이라고 믿어왔던 곳에서 쫓겨나 실직이라는 고통을 안게 된 폰더씨.. 그는 절망했다. 왜 나여야 하느냐고, 하필이면 왜 내가 그래야 하는거냐고 절규했다. 하지만 이 책은 되묻고 있다. 왜 너이면 안되는거냐고.. 왜 네가 그러면 안되는거냐고.. 누구나 한번씩은 외쳐보았을 그 절규속에서 놓치고 있는 것은 자신을 향한 믿음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늘 자신의 몫이었다는 걸 우리는 잊고 있는거라고.. 벌써 십년도 넘은 일이지만 바닥이라고 생각했었던 때가 있었다. 그러니 이제는 차고 올라가기만 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던 적이 있었다. 폰더씨처럼.. 하지만 나는 지금도 물 밑 작업중인 듯 하다. 아직은 아닌 모양이다. 그래서 이런 책에 대해 솔직하게 말해서 거부감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자기변명에 빠져서 산다. 영원히 헤어날 수 없는 선택의 늪에서 언제나 허우적거리고 있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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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라오가 좋아
구경미 지음 / 현대문학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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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갈까?"
"어디든 데려다 주세요"
그렇게해서 남자와 여자는 무조건 길을 떠났다. 바다가 보고 싶다던 그녀는 바다를 보고 있으면서도 바다가 보고 싶다고 했다. 그들의 움직임을 사람들은 쉽게 기억했다. 한국남자와 라오스여자... 아직은 아닐 것 같은데도 거리를 걷다보면 정말 많은 외국인들을 보게 된다. 얼마전까지만해도 그들을 신기한 동물보듯이 쳐다보았지만 그래도 지금은 많이 부드러워졌다는 게 맞는 말일게다. 그만큼 우리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다는 말도 되겠다. 그 남자는 라오스의 현장소장으로 근무했었다. 어느날 월급을 나눠주던 그 때에 강도가 들었고 그 강도의 총에 노동자 하나가 죽었다. 그 노동자의 유골함을 들고 찾아갔던 낯선 곳에 그 여자가 있었다. 스물세살의 그녀는 예뻤지만 삶의 현실은 비참했다. 그것이 그들의 어설픈 시작이었다.

그들은 변화를, 아니 변신을 원했을지도 모르겠다. 한국여자가 되기를, 그리고 라오스남자가 되기를.  각자가 그리던 변신의 형태가 많이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그남자와 그 여자가 공간이동을 통해 서로의 변신체가 되어준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그들이 변신을 원했던 이유는 결코 다르지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오랜 타국생활로 인하여 한국으로 돌아온 그남자는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했고 그야말로 신데렐라의 꿈을 안고 한국남자와 결혼했던 그녀의 꿈은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남자는 외로웠고 여자는 그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돈이 필요했다. 마음의 위안을 찾아 헤맸던 그들은 쉽게 여행이라는 이름을 내세워 탈출을 시도했다. 일상으로부터의 탈출... 누구나 꿈꾸는 그 유토피아... 외로움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는 어떤 모습일까 한번 생각해보게 되는 시간이었다. 사람은,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외롭다. 어디에도 자신의 마음을 내려놓지 못한 채 부유물처럼 그렇게 떠돌기만 하는 현실이라는 흐름속에서.. 그 흐름을 거스를 수 없는 사람들속에 그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곧바로 나의 화신으로 변신했다.

얼핏보면 그녀 아메이를 통해 다문화가정이라는 불편한 진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지지만 내게는 그것과는 무관하게 다가왔던 책이다. 사랑의 도피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뜨거운 열정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는데, 모든 것을 다 버리고 함께 떠날만큼 많이 사랑했던 여자도 아니었는데 오로지 그녀를 위해서 떠났다고 생각했던 남자의 참담함.. 멋진 코트와 자동차와 집을 줄 수 없었던 남자를 버린 것은 여자에게는 어쩌면 아주 당연한 일이었을 게다. 오로지 네가 원하는대로 다 해주었다던 그 남자의 말이 가슴속까지 파고 들지 못했던 것은 그여자의 말처럼 "내 마음을 당신 종은대로만" 해석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했다고는 하지만 결국은 모든것이 제 잣대로 재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래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군중속의 고독이라는 말을 아주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닐까 싶어지니까.

그렇게 좋다던 라오라오가 뭘까? 거두절미하고 술이다. 독한 술.. 마시면 강해지는 술.. 한마디로 화끈한 술.. 온 몸에 활기를 주고 뱃속에 용기를 주는 술.. 어쩌면 그 남자가 필요로 했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독함, 강함, 화끈함, 활기, 용기... 미적지근하게 살아지는 일상속에서 자신을 확 끌어당길 수 있는 그 무언가를 꿈꾸면서도 그 남자는 쉬고 싶었다. 온전히 쉬고 싶었다. 자신을 이방인처럼 대하는 가족들이 두려웠고 자신이 이방인처럼 느껴지는 직장에서의 시간들이 두려웠다는 말이다. 여기서 문득 기러기아빠를 생각하게 된다. 오랜 시간을 타국에서 고생하는거나 아내와 자식을 타국으로 보내놓고 혼자서 생활하는거나 별다른게 없을테니.. 단절을 보게 된다. 가족이라는 테두리안에서조차 부유물처럼 서로가 겉돌기만 하는 우리의 시대를 누가 만들었는가! 모든 것이 엉킨 실타래같다. 

상실감이었을 것이다. 무언가를 잃은듯한.. 그리하여 마음속에 텅 빈 풍선하나를 품고 살아가는 것같은.. 그 남자와 그 여자에게서 나는 상실감을 보았다. 그나마 있었던 것들도 하나씩 잃어버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던 남자의 여정이 처절한 서글픔을 자아냈다. 위안이 되어줄 수 있을거라 생각했었던 여자는 버렸던 제둥지로 다시 돌아가 버티고 있는데 자신만 모든 자리가 가시방석이었다. "내가 가야 다들 맘 편히 살 것 같아서" 라는 말이 서럽게 들려왔다. 그나마도 자신을 받아주고 안아주었다고 생각되는 라오스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정했으면서도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아보고 싶은 심정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선택했던 충동적 도피.. 그 도피는 우리의 마음속에 내재되어진 그 어떤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혼자 갈거야"
"그나마 라오스에 있을 때가 행복했던 것 같아" 
그 남자의 슬픈 목소리가 슬프다. 바다를 보고 있으면서도 바다가 보고 싶다고 말하던 그녀는 끝내 동행하지 않았다. 삶의 길이란 것이 혼자가야하는 것이 맞는데도 지독한 서글픔이 느껴지는 것은 왜인지... 예전의 가을은 가을다웠는데 올해 가을은 겨울을 닮았다던 그 남자의 말이 가슴 어딘가를 콕 찌르며 지나간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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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왜곡의 역사 - 성서비평학자 바트 어만이 추적한
바트 D. 에르만 지음, 강주헌 옮김 / 청림출판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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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 이상이라고 한다.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고 한다 - 로버트 퍼시그 ' ... 내가 일찌감찌 모셔두고도 아직 읽지 못하고 있는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펼치면 가장 먼저 마주치는 말이다. 사람들은 숨겨진 진실과 마주쳐야 할 때 가장 망설이게 되지 않을까? 그것이 불편한 진실이라면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무언가 숨겨진 것이 있을 것만 같다고 느껴질 때 사람들의 반응은 두가지다. 그게 무얼까? 궁금해하며 다가보는 부류가 있는가하면 아니야, 그렇지 않을거야 그럴리가 없어 라며 애써 모른 척하는 부류가 있다. 그렇게 본다면 바트 어만은 전자에 속한다. 그러나 그가 외치는 것은 정말 명쾌하다. 기독교를 버렸다고는 하지만 그는 철저한 기독교인이다. 다른 어떤 이의 믿음보다도 더 강한 믿음을 가진 존재일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개인적인 나만의 판단으로 볼 때 그의 그런 선택은 옳았다. 많은 이들이 그렇게 했어야만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진정한 종교의 모습을 찾아나가는 그의 믿음에 나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의 전작 <성경 왜곡의 역사>를 먼저 읽었다. 궁금했기에 망설임없이 다가갔고 그의 작품으로 인해 막혀있던 궁금증도 어느정도는 해결할 수 있었던 게 사실이다. 나는 무신론자다. 이렇다하게 내세울만한 나만의 종교가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종교를 무조건적으로 반대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형식과 방법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 너무나도 편파적인 상징성만 강조하는 현대 종교의 모습에서 환멸을 느낄때도 종종 있었다. 아무런 조건없이 그 상징적인 틀에 자신을 맞추어가는 모습이 어설프기도 하고 낯설기도 했다. 하나님은 성경을 쓰지 않았다. 성경은 여러 사람이 쓴 글을 모아놓은 책이다. 성경은 하나의 시각에서 쓰이지 않았다. (370쪽)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보진 못했지만 알고 싶었기에 나름대로는 많이 읽었다고 자부하는 나로써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모든 것은 만들어져 가는 것이다. 그 시대의 상황에 맞게.. 그리고 그 시대에 살고있는 사람들이 편리하도록.. 가끔 나는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성경은 신화일까? 아니라면 그냥 문학작품으로써의 존재가치가 있는 것일까?

신앙적 접근만으로는 부족하다며 역사적인 증거를 들이대는 그의 반론은 듣기에 거북하지 않았다. 뭔가 불완전하다면 차라리 그런쪽으로라도 접근해가는 방식이 더욱 신선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가 말하고 있는 모든 모순들을 신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신학교에서 모두 배운다는 사실이었다. 그랬던 사람들이 목회자의 길을 걷는 교회에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조차도 묻고 있었다. 왜 그래야만 하는건지를..  무조건적인 반론이 아니다. 그가 하는 말들은 충분한 공감대를 형성한다. 그가 성경 속에서 찾아내는 모순들이 그렇다. 감히 묻고 싶어진다.  진실한 기독교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이여, 과연 당신도 그처럼 성경을 꼼꼼하게 읽어본 적이 있느냐고.. 무조건적인 믿음만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예수가 언제 죽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아니 그런 부분에 대해 한번이라도 의심을 품어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복음서마다 다른 예수의 행적에 관한 부분은 다시한번 읽게 되기도 한다. 설마하는 마음에서.. 예수는 정말 부활했을까? 사실 과학적인 논리를 들이대자면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성경속에 내재되어있는 모순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스물일곱권으로 되어있는 신약성서중에서 단 여덟권만이 정확한 저자를 알 수 있다는 말은 사실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이미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책이라는 전제를 달고 시작한 것이기에.. 그가 찾아낸 복음서의 차이점들조차 왠지 당연한 이치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그 많은 복음서들은 누가 썼을까? 책을 읽으면서 하나씩 벗겨지는 진실들이 내 눈앞에 펼쳐질 때마다 놀라움보다는 그럴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보다는 그래, 그럴수도 있겠구나 하는 마음이 생겨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가 하고 있는 모든 말들이 신앙적인 접근이 아니라 역사비평적인 접근 방식인 까닭이다. 시대적으로 다른 관점에서 다른 마음을 가지고 바라다보게 되니 당연히 다른 메세지를 전달할 수 밖에 없었을거라는 말이다. 그러니 성경의 위작생산은 작은 산업이었고 그것이 수익을 내지 못했을 경우에는 당연히 사라졌을거라는 말에도 백배공감할 수 밖에...

책을 읽으면서 예수가 종말론적인 예언자였다고 강론하는 부분에서 나는 잠시 멈추어야 했다. 그리고 그가 들이대는 모든 정황들을 거부할 수 없었다. 성경이 완성되어지는 과정들... 초대교회의 정통성과 이단이 생겨나게 되는 배경들... 그렇게하여 살아남게 되는 종파와 배제된 종파들이 각자 처하게 되는 상황들... 그들이 제시했던 모든 근거들은 다분히 주관적이었다는 거였고, 중요한 것은 신약성서의 원전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는 거였다. 그리하여 지극히 인간적인 정서에 맞춰지는 과정으로 탄생하게 되는 성경!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독일이 자행했던 유대인 대학살이 그런 차원에서 생겨난 일이라는 것은 정말이지 분개할 일이다. 그들의 신이 그토록이나 선함을 주장했다면서, 그들의 신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다면서 그들은 그렇게 무서운 일을 저지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책속에서 언급되어진 말이기도 하지만 출애굽의 과정속에서 나타났던 모든 일들 또한 말할 수 없이 잔인했었다. 나 이외에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 오로지 나만! 을 외쳐대는 지독한 이기주의가 아니고 무엇이랴 싶다.  왠만한 종교는 다른 종교를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기독교를 제외하고!

마지막장에서 그는 기독교인이 만들어낸 것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훗날 예수를 따른 사람들을 지배한 믿음과 관점이 예수의 종교 자체와 사뭇 달랐다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는 하루아침에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여러 해석과 교리, 관점과 기준 등이 경쟁했고, 갈등과 다툼을 겪으며 오랜 시간에 걸쳐 탄생한 것이다. 기독교라는 종교는 역사적·문화적인 의미를 지닌 인간의 발명품이었다. 아마도 서구 문명에서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358쪽)  이토록이나 명쾌한 답을 보여주면서 에필로그를 통해 그가 다시한번 묻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은 가능한가?  그의 말을 빌어보자면 가능하다.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좀 더 강하고 깊은 믿음이 생겨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교회를 떠났을 뿐이지 자신의 믿음을 버린 것이 아니었다. 상징적인 것들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일 뿐이었다. 믿음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기독교를 통해 세례를 서너번은 받았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래도 내노라하는 교회에서 성찬식이라는 것도 몇 번씩 겪어보았다. 그렇다면 나는 그들의 말처럼 구원을 받았을까? 하지만 너무나도 형식적인 그런 행위들이 내게는 아무런 의미조차 전해주지 못했다. 나를 인도했던 사람의 마음속에 기쁨을 선사할 수 있었다는 것만이 유일한 나의 위안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교회의 정식구성원으로 자리매김했는가? 보다시피 그렇게 되지 못했다!  보여지는 것, 보여질 수 있는 것에만 치중하는 것이 문제는 아닐까? 종교를 통해 위안을 받을 수 있고 힘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진정 자신의 종교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종교일 뿐이지 타인의 종교와 연관성을 갖지는 못한다. 형식적이고 보다 자극적인 상징성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진정한 마음을 나누는 것이 우선은 아닐까? 기독교가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니 그런 믿음을 가진 이들이 잘못되었다고도 할 수 없다. 단지 무언가를 강요하기보다는 책임질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 하는 말이다. 

진실한 기독교도로써 바트 어만은 왜 이런 책을 써야만 했을까? 내심 궁금증이 일었다. 하지만 나는 이내 그 궁금증을 접었다. 바트 어만과 같은 사람들을 좀 더 많이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져보면서. 1인시위를 했던 고등학생이 있었다. 그 고등학생이 대학생이 되었을 때 당시 학교를 상대로 했던 소송에서 그는 이겼다. 실로 값진 승리였다. 미션스쿨이라 할지라도 기도나 예배를 모든 학생들에게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안건이었다. 그 학생에게 나는 진심으로 박수를 쳐 주었다. 하나님 자체에 대한 의문은 없다. 다만 성경에 언급된 하나님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뿐이다. 바트 어만의 말처럼 이미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 박제되어진 예수가 아니라 진실로 살아있는 예수를 보게 될 날이 오기는 올까? 예수가 어떻게해서 신이 되었는가를 찾아가는 과정은 흥미로웠다. 반감보다는 이해가 한발 앞섰던 시간이기도 했다.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무조건 배척하기보다 한번쯤은 읽어볼 만한 책일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믿음이 더 돈독해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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