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민화로 떠나는 신화여행 인문여행 시리즈 2
하진희 지음 / 인문산책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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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는 흥미롭다. 그중에서도 북유럽신화에서 느낄 수 있는 몰입도와 속도감은 대단하다. 우리가 재미있게 보았던 환타지영화에서도 북유럽신화를 모티브로 가져온 것들이 많다. 대표주자라면 단연코 <반지의 제왕>일 것이다. <니벨룽겐의 반지> 역시 북유럽신화의 일부다. 그런데 이제사 알게 된 것이 있다. 북유럽신화라고만 알고 있던 이야기가 사실은 노르드 신화라는 것이다. 스칸디나비아 신화와 게르만 신화를 이야기하는 것인데 특이하게도 한국어권에서는 북유럽신화라고 뭉뚱그려 말한단다. 하긴 그 지역에서 쓰이는 언어만해도 영어, 아이슬란드, 독일어, 노르웨이어, 에스파냐어, 덴마크어가 있다고하니 그들 나름대로의 이야기가 있었을 거라는 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하지만 학창시절부터 우리에게 쉽게 다가왔던 것은 그리스로마신화였다. 때문에 모든 신화의 시작은 그리스로마신화가 아니었나 싶은데 지역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탄생시키는 각각의 신화가 여러모로 흥미로운 것도 사실이다.

 

신화에 흥미를 갖기 시작하면서 우선 한국의 신화부터 읽게 되었다. 우리는 흔히 우리의 신화를 너무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마치 무속의 한 장르인양. 무속 역시 우리의 문화 저 밑마닥에서부터 탄생된 것인데도 불구하고. 오딘이나 토르, 제우스나 포세이돈과 같은 신화속의 이름은 잘 알면서 우리 신화속의 이름은 잘 모르는 것이 현실이다. 다행히 얼마전 인기를 끌었던 영화 <신과 함께>에서 우리신화의 단면을 다룬 까닭에 많은 사람에게 새롭게 인식되긴 했지만... 그러다가 중국과 일본신화를 접하게 되었고 인도신화를 읽게 되었다. 인도 신화는 정말이지 꽤나 흥미롭게 다가왔다. 인도는 힌두교의 나라다. 그러니 당연히 힌두신들의 이야기일 터다. 그 힌두문화에 불교문화도 들어있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인도의 문화를 민화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민화라하면 일반인들이 그린 그림을 말한다. 그러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일 것이다. 특이하게도 인도민화는 여백이 없다. 그림속의 여백에 담겨있는 의미가 좋아서 김홍도의 <주상관매도>란 작품을 좋아했었는데 역시 각 나라마다의 문화적 특징은 다른 모양이다.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어느정도는 배울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더구나 작가가 20여 년 동안 힘들게 수집한 희귀 작품들이라 하니 한번더 눈길을 주게 된다. 신비롭긴 하다.

 

행복감을 느끼며 사는 순위를 따져봤을 때 우리의 편견을 깨고 인도사람들이 1위를 차지했었던 기사를 본 적 있다. 카스트제도나 여러가지 인도의 사회적인 환경을 볼 때 그 안에서 행복지수가 높게 나왔다는 건 정말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을 행복으로 이끈 것은 종교적인 힘이었다. 현세의 고통은 내세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는... 틀림이 아니라 다름이니 그것을 옳다, 그르다로 판단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 책의 민화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자연과 인간을 따로 분리하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는 그들의 삶이 부러울 따름이다. 특히나 마지막 부분에서 다루었던 왈리족의 이야기는 정말 이채로웠다. 현재도 10월이면 디왈리축제를 한다고 한다. 인도에서 부와 풍요를 상징하는 힌두교의 여신 락슈미를 기념하여 해마다 열리는 디왈리는 빛이 어둠을 이긴 것을 축하하는 축제로 인도인은 디왈리 때 더 많은 빛을 밝히면 더 큰 행운이 온다고 믿는단다. 왈리부족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설화를 통해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모든 것이 조상숭배 사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도 특이하다. 왈리부족은 삶과 죽음이 별로 다르지 않고 옷을 바꿔 입는 것과 같다고 노래한다고 하니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윤회사상과 맞닿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부록으로 보이는 왈리부족의 그림이 시선을 끈다. 왈리부족은 작은 원과 두 개의 삼각형, 네 개의 선만으로 수많은 인체의 동작을 단순화시켜 자유자재로 표현하여 그림을 그린다. 동물과 식물도 마찬가지다. 따라 그리기에 도전해봐야겠다.

 

인도는 아직까지도 오랜 전통과 관습이 살아있다고 한다. 더구나 자연과 함께 어울어지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인도신화 속에는 삶의 여정에서 만날 수 있는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인간의 태어남과 죽음, 행복과 불행에 관해 혹은 축복과 저주에 관해. 그런데 희안한 것은 모든 신화의 이야기가 살짝 방향만 바꾸었을 뿐 형태는 비슷하다는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형태는 어디다 똑같은 까닭일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화는 한번쯤 읽어볼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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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5대 소설 수호전·금병매·홍루몽 편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이나미 리쓰코 지음, 장원철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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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서유기>, <수호전>, <금병매>, <홍루몽>을 중국의 5대소설이라 하는데 이들 작품이 후대에까지 이렇게 읽히는 걸 보면 중국 문학사에서의 영향력은 가히 짐작할 만 하다. <삼국지>나 <서유기>라면 학창시절부터 익히 들었거나 읽게 되었던 작품이지만 사실 <수호전>이나 <금병매>, <홍루몽>의 경우에는 <수호전>만 빼면 이름만 들었을 뿐이었다. 때문에 이 책을 통해 세 작품의 성격이나 특징을 제대로 알고 싶었다. 거기에 더해 박진감 넘치 속도 역시 느끼고 싶었다는 게 솔직한 표현일게다. 하지만 기대만큼 가까워질 수 없었다는 것도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작품의 원래 성격을 느끼기에는 너무 지루하다. 논문형식으로 작품을 분석하며 진행되다보니 더디기도 더디거니와 그 앞뒤의 흐름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는 말이다. 하지만 각각의 작품이 어떤 형식을 취했는가만큼은 제대로 알게 된 듯 하다.

 

학창시절에는 홍콩영화가 유행이었었다. 당시의 무협영화 중 <신용문객잔>이나 <황비홍>, <취권>등은 정말 재미있었으며 그 뒤를 이은 <백발마녀전>이나 <천녀유혼>과 같은 절절한 사랑이야기, <패왕별희>에서 보았던 경극의 형 태는 지금도 강한 느낌으로 남아있다. 여러 작품들이 있겠으나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던 중국풍의 영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 책이 바로 김용의 무협소설 <영웅문>이었다. 대륙을 종횡무진하던 강호의 협객들은 정말 박진감 넘치는 호흡으로 내게 다가왔었다. 그때 인기를 몰고 다녔던 홍콩배우들도 꽤나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초한지>는 또 어떤가! 사실 <삼국지>나 <수호전>, <초한지>와 같은 작품들은 당시 신문지면을 통해 연재되었던 故고우영의 만화를 통해서 재미를 느꼈다고도 할 수 있다. 故고우영씨가 그려주던 <수호지>속의 무송과 무대, 그리고 반금련의 이미지는 각인되다시피 남겨져 있어서 하는 말이다. 그런 작품들을 통해 중국의 4대 미인으로 꼽힌다는 서시, 초선, 우희, 양귀비와 같은 여인들의 이야기도 더불어 알게 되었고 그 이야기들을 통해 만들어지게 된 고사성어 역시 흥미롭게 다가왔었다. 어쩌면 그런 속도감을 바랬던 건지도 모를 일이지만 어쨌거나 이 책은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수호전>은 양산박으로 모여든 108인의 호걸들 이야기다. 그 안에서 뚝 잘라내 또 한편의 이야기로 탄생한 것이 <금병매>로 양산박의 호걸 중 하나인 무송의 형 무대의 부인인 반금련이 남편을 죽이고 사통했던 서문경이라는 남자와 혼인을 하면서 벌어지는 여인들의 암투를 다루고 있다. 다시말해 서문경이 취한 여인들의 이야기라는 말이다. 그에 비해 <홍루몽>은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전작이 에로틱한 사랑이라면 후작은 플라토닉 사랑쯤 되려나? 그것은 각자의 느낌이니 다르게 말할 수도 있을게다. 역자후기를 통해서도 <삼국지>가 역사소설이라면 <서유기>는 환상소설이며 <수호지>는 惡漢소설, <금병매>나 <홍루몽>은 풍속소설의 범주에 속한다고 말하고 있다. 짐작해보건데 <금병매>의 경우에는 풍속보다는 淫書에 가깝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작품을 통해 사회적으로나 시대적으로 여인들의 존재가치가 어떠했는지를 살펴볼 수도 있을 듯 하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궁금했던 것은 도대체 왜 중국의 5대 소설에 대해 이토록까지 분석을 했을까, 였다. 저자후기에서 말하는 바로는 이 작품들을 통해 중국 소설사의 흐름을 파악해보려 했다는 것이었는데 그 말을 통해 이 작품들이 과연 중국 문학사의 흐름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꽤나 높은 모양이라고 미루어 짐작해볼 따름이다. <수호지>의 181쪽에 이런 말이 보인다. 중국의 전통 문학 작품에서는 법술사, 유령, 요괴 등을 테마로 다룬 작품이 무수히 많으며 괴기스러운 것에 대한 편애가 현저하게 나타난다고. 그런 면이라면 일본도 만만치않다. 오래전에 읽었던 <산해경>이란 작품을 생각하게 한다. 어쩌면 같은 漢字文化圈으로써 어느정도는 상통하는 면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분야가 되었든 오랜 흐름을 파악할 수 작품들이 있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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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볼루션 맨 - 시대를 초월한 원시인들의 진화 투쟁기
로이 루이스 지음, 호조 그림, 이승준 옮김 / 코쿤아우트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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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보다도 털북숭이 그림이 더 시선을 끌었다. 딱 보면 원시인인데 시계를 찼다. 게다가 그의 앞에는 구두도 한켤레 있다. 털옷을 입고 시계를 차고 구두를 신고...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듯한 그림인데 이 소설이 딱 그렇다.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요즘의 언어로 우리 인류의 진화과정을 그려내고 있으니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책을 읽기전에 아주 당연한 듯이 진화론과 창조론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역시 인류는 진화론이지~. 시대를 초월한 원시인들의 진화 투쟁기, 라는 말에 백퍼센트 공감하게 된다. 이 책을 통해 인류의 문명에 대한 과정을 되짚어보게 되었던 시간이다. 재미있었고 나름 알찼던 시간이기도 했다.

 

인류의 진화 과정을 한 원시인 가족의 삶으로 축약한 이야기다. 그들은 현생인류다. 우리가 호모사피엔스라고 배웠던. 인류는 언제부터 지구에 존재했을까? 지금으로부터 약 200만 년 전으로 보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어디에서 처음 등장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주인공 에드워드의 가족과 그의 형 바냐, 동생 이안이 커다란 줄기를 이루고 그에 따라 아들 오스왈드, 어니스트, 알렉산더, 윌버, 윌리엄이 또하나씩 줄기를 쳤다. 원시인에게 무슨 저런 이름을? 하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시대를 초월한 이야기라고 이미 말했다. 에드워드는 과학자다. 끝없이 꿈을 꾼다. 그리고 끝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그에 반해 형 바냐는 자연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주의다. 요즘으로 치면 진보와 보수쯤? 여행가인 동생 이완으로 인해 세상의 이야기를 듣고 세상의 변화를 가늠하기도 한다. 이안의 여행기속에서 우리는 아프리카의 오스타랄로피테쿠스와 인도네시아의 자바원인, 중국의 베이징원인을 만나게 된다. 이 역시 우리가 배웠던 대로 가장 오래된 인류의 화석을 떠오르게 한다. 그쯤되니 재미있게도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 소설인지 조금은 의아스럽기까지 하다.

 

불을 얻기 전에는 선택권이 많지 않았다. 제우스의 불을 훔쳐서 인간에게 주었던 프로메테우스를 통해 인간이 불을 얻게 되는 이야기는 신화를 통해 자주 등장한다. 그 불로 인해 인간은 정말로 많은 것을 얻은 듯 하다. 인간보다 힘쎈 동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었고, 익힌 고기를 통해 더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도 있었으며 따뜻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가 보낸 판도라를 아내로 맞이하며 결국 인간에게 불행을 안겨주게 되었지. 어찌되었든 에드워드의 가족들을 통해 인류의 변천사를 바라보는 건 흥미로웠다. 신기하게도 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했다. 그것은 아마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 때문일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대화는 이미 원시인의 대화가 아니었던 까닭이기도 했다. 

 

"한 걸음 나아가는 거라고. 어쩌면 이 걸음이 인류에게는 큰 도약일 수도 있어. 그런데도 이게 자연법칙에 어긋난다고?"... "왜냐면 네가 한 짓은 어딜 봐도 '자연'스럽지가 않거든. 너도 한때는 대자연의 일부로서 자연의 축복과 재앙을 겪으며 희로애락 속에 살아가던 소박한 아이였어. 완벽한 공생관계 속에서 살며 느리지만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과 함께 그냥 동식물의 일원이었던 거라고." - 72쪽 -

"그냥 조금 더 빨리 진화하는 거에 불과하다니까."... "달라도 한참 다르다고! 우선 바뀌는 속도가 너무 빠르잖아. 원래 수백만 년이 걸려야 될 일을 고작 수천 년 사이에 하려고 난리치고 있다고. 만약 그 일이 진짜 꼭 필요하다면 모르겠다만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은데 말이야. 지구상 그 누구도 이런 말도 안되는 속도로 살아가지는 않아! 네가 진화라고 표방하면서 하는 짓은 실제 진화와는 완전히 달라. 그건 진화가 아니라 신세 좀 고쳐보려는 얕은 수작일 뿐이지." - 76쪽 -

"그 당시 인간들은 제 분수를 지키며 모든 일에 만족할 줄 알았다"... "그 사람들이 지금 어떻게 됐는지 알아? 다 멸종해서 화석이 됐어." - 199쪽 -

에드워드와 형 바냐의 대화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된다.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왔던 인류의 문명은 과연 옳았을까? 조금은 늦더라도 바냐의 말처럼 '자연'스러운 속도에 맞추며 살았다면 어땠을까?

"인간은 과거로 퇴행할 수도 있고, 미래로 나아갈 수도 있지. 하지만 제자리에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분명히 말해두지만, 우리 원시인이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뿐이야. 바로 앞으로 나아감으로써 진정한 인간으로 우뚝 서고, 역사를 창조하며 당당히 문명을 이끌어가는 거지!" - 200쪽 -

여기서 잠깐 묻고 싶어진다. 진정한 인간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그래서 지금의 우리는 진정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 책띠에서 보았던 한줄의 문구가 떠오른다. 나는 아버지를 잡아 먹었다, 라는. 어니스트를 포함한 가족들은 불의 발견 그 이상의 진보를 막기 위해 아버지를 잡아먹었다. 이 책은 전혀 코믹하지 않다. 1960년에 출간되었지만 지금까지도 제목을 바꿔가며 6번이나 개정 출판되었다는 걸 보면서 10년뒤에 다시 이 책이 개정 출판된다고해도 지금과 같은 반응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우리 인간이 꿈꾸는 것은 무엇일까?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토록 앞만 보고 달려가는 것일까? 우리는 왜 아버지를 잡아먹었을까? /아이비생각

자연의 흐름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사실 잘 알 수 없거든. 하지만 중요한 것은 현실적으로 유효한 법칙을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거지. (-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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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다른 나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9
임현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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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의 제목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었다. 남이 보는 나와 내가 보는 나의 차이점이랄까? 틀림보다는 다름을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을까? 뭐, 이런 생각? 그런데 도입부부터 신기하게 빠져드는 나를 발견했다. 특별할 것도 없는 어느 여자의 이야기. 마치 내 얘기 좀 들어보실래요? 하면서 시작하는 듯한 그런 느낌을 전해 받았다. 서술형식은 여자와 남자의 시점과 생각이 서로 교차된다. 남편과 아내로, 그리고 남자와 여자로. 부부이면서 어쩌면 남처럼. 생각보다 몰입도가 좋았다. 책장을 넘길수록 왠지 조심스럽게 읽어야 할것만 같았다. 그들의 이야기를 하나라도 놓쳐서는 안될것처럼. 어느날 문득 나와 똑같은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얼굴도 이름도 삶의 패턴까지도 똑같은 또하나의 내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흔히 자신과 똑같은 사람을 도플갱어라고 하는데 그것은 또하나의 나를 만나는 일종의 심령현상을 일컫는다고 한다. 다시말해 타인은 볼 수 없지만 스스로 자신과 똑같은 대상, 즉 환영을 보는 것을 말한다. 도플갱어를 만나면 머지않아 죽게 된다는 건 소설이나 공포영화의 소재일 뿐이며, 현대의학에서는 정신질환의 일종으로 보고 있다고 하는 걸 보면 그리 아름다운 말은 아닌듯하다.

 

이 책의 話者는 소설가다. 어쩔 수 없이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글로 옮기며 살아간다는 소설가의 말처럼 책속의 話者 역시 아내의 주변이야기를 쓰고 있는데 읽다보면 시간과 공간이 살짝 어긋나기 시작하고 소설속의 남자가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현실속의 남자가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지나친 문장을 다시한번 읽게 되는 순간이 온다. 작품해설에서 이런 말이 보인다. 이전 소설들에서도 그래왔듯이 임현은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는 서술적 의식의 불명확함, 그리고 아이러니한 이야기톤에 천착하는 작가다. 임현은 그저 텍스트의 의미를 열어두고 독자에게 의미를 떠넘기기 위하여 서술을 복잡하게 만드는 작가가 아니다. <당신과 다른 나>는 불확실한 삶과 허구의 경계를 탐문하는 것처럼 보인다... 문득 궁금해진다. 임현의 소설집이라는 <그 개와 같은 말>이란 작품이. 그 작품에 실린 여러편의 단편들이 모두 모인 작품 같다는 말이 시선을 끈다.

 

중고서점에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여자, 그 여자는 교통사고로 죽은 자신의 남편과 너무 똑같다고 말했고 마음이 편치않았던 話者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게 된다. 그리고 곧 이상한 상황과 부딪히게 되고 서로의 사랑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부부는 서로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한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일이었을까? 자신의 이야기만큼은 쓰지 말아달라던 아내의 말을 무시했던 것부터였을까?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가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남들의 입에 오르내리거나 혹은 남의 잣대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나 자신을 향한 허탈과 허무가 너무 짙은 시대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수많은 가면이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는 까닭일지도 모르겠다고. 그래서일까? 열린 것도 아니고 닫힌 것도 아닌 상태에서 이 책은 끝나버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작가의 말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아무래도 나는 나를 너무 믿었던 것 같다. 남들에 대해서라면 자꾸 의심하고 불안해하면서 나와는 내가 너무 우호적이었던 거 아닌가. 그러니까 그런 내가 나를 믿지 못하게 된다면 이제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더 무얼 믿을 수 있나 그런 의심하는 마음으로 다시 한 편을 썼다. 라고.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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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지음, 안정효 옮김 / 소담출판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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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은 물리-화학적으로 평등하기 때문이죠."

"모든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을 위해서 일합니다."

"오늘 누려도 되는 즐거움을 절대 내일로 미루지 말아요."

"개인이 감정을 느끼면 집단생활이 비틀거려요."

"많은 사람들이 타락하는 것보다는 한 사람이 고통을 겪는 게 더 나은 선택이겠지."

"우린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지극히 간단하게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낼 능력을 갖추었어. 이단은 단순히 한 개인의 삶보다는 더 많은 것들을 동시에 위협해서 사회 자체를 공격하는 격이야. 그래, 사회 자체를 말이야."

"우린 사람들이 옛것에 끌리는 걸 원하지 않아요. 우린 그들이 새로운 것을 좋아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항상 과학이 최고라는 말을 하는대요. 그건 최면 교육의 표어입니다."

"신은 기계와 과학적인 의학과 보편적 행복과는 병립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선택을 해야만 합니다. 우리 문명은 기계와 의약품과 행복을 선택했어요."

"문명은 숭고함이나 영웅성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런 개념들은 정치적인 비능률성의 징후들이죠."

"사람들은 人性의 절반쯤은 병 하나에 넣어 가지고 다닐 수 있어요."

 

행복하고, 원하는 바를 얻으며, 얻지 못할 대상은 절대 원하지 않는... 모두가 잘살고, 안전하고, 전혀 병을 앓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늙는다는 것과 욕정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즐거운... 어머니나 아버지 때문에 시달리지도 않고, 아내나 아이들이나 연인 따위의 강한 감정을 느낄 대상도 없고 마땅히 따르도록 길이 든 방법 이외에는 사실상 다른 행동은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그런 세상에서 산다면 어떤 기분일까?연 그런 세계를 신세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런 세상을 바라보며 멋진 세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인간이 만일 행복에 관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다면 인생이 얼마나 재미있을까!' 라는 한 줄의 문장을 보면서 행복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행복... 昨今의 세상에서 그것은 인간이 모든 것을 바쳐가며 쟁취해야만 할 의미처럼 되어버린 듯 하다. 삶의 話頭랄까? 그런데 저 한줄의 문장처럼 인간이 만일 행복에 관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다면 정말 재미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그 행복이란 말의 의미를 왜곡하고 있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마치 자신이 만든 올가미에 자신이 걸려든 것처럼.

 

<멋진 신세계>는 올더스 헉슬리가 1932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그 시대에 이렇게까지 앞서나가는 세상을 그릴 수 있었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이 책을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올랐던 작품이 조지 오웰의 <1984>였다. big brother에 의해 모든 것이 감시되는 사회. 하지만 소설이 곧 현실이 되어버린 시대에 우리는 지금 살고 있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꿈의 나라를 유토피아라고 한다면 지독히도 어두운 현실을 그려내는 걸 디스토피아라고 한다는데 <멋진 신세계>에서 그리고 있는 세상은 유토피아일까, 디스토피아일까? 그 판단은 오롯이 독자의 몫인 듯 하다. 신기하게도 <1984>나 <멋진 신세계>에서는 가족이란 의미의 공동체가 보이지 않는다. 태어남과 죽음까지 길들여지는 과정속에서 인간성이나 생각의 자유마저 빼앗긴 채 삶의 여정속에 머문다. 더 기가 막힌 것은 <멋진 신세계>가 그리고 있는 세상이다. 인간을 '맞춤형'으로 제품을 찍어내듯이 대량 생산을 하고, 하나의 난자에서 수십 명의 일란성 쌍둥이들이 태어난다. 자신의 삶에 어떠한 의문조차 품을 수 없도록 끝없이 반복되는 수면 학습과 세뇌를 받게 된다. 하지만 그런 세상에서 태어났지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자신의 삶에서 무언가 다른 것을 찾으려고 하는 존재가 하나 나타나고, 그가 이끄는 대로 시선은 야만인 구역으로 가게 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야만인 구역이라는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딱 지금의 우리라는 것이다. 놀라운 반전이 아닐 수 없다. 야만인 구역에서 원래 신세계에 살았던 여인과 그 여인의 아이를 만나게 되고 아이의 아버지가 신세계에 살고 있다는 걸 눈치 챈 그는 여인과 아이를 데리고 신세계로 돌아온다. 미래에서 과거로 갔고, 다시 과거에서 미래로 돌아온 셈이랄까? 이쯤에서 살짝 의문이 든다. 작가가 진심으로 보여주고 싶어했던 건 어떤 모습일까? 재수없으면 200살까지 살지도 모른다는 말이 떠도는 지금, 늙지도 않고 정신적 외로움도 느낄 수 없는 세상에서 노동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에 자극으로만 이루어진 오락을 즐기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정말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간혹 인간이 살기에 가장 좋은 형태의 국가는 공산주의라는 말을 하는 이도 있다. 사실 유토피아라는 말은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에서 비롯되었다. 그가 <유토피아>라는 작품속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전체주의 혹은 사회주의인 듯 보여진다. 모든 사람이 어느 정도 자기만족을 얻을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인간의 욕구와 수요를 억제하고 생산과 분배를 통제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어서 하는 말이다. 어쩌면 올더스 헉슬리가 말하는 멋진 신세계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다시 한번 돌이켜보라는 뜻은 아니었을까? 야만인으로 표현되는 우리의 모습속에는 인간성을 잃고 싶어하지 않는 처절한 몸부림이 보여지고 욕망과 이성은 끝없이 싸운다. <멋진 신세계>라고 말은 하지만 그 안에서도 평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순이다. 아무래도 인간의 운명속에서 모순은 피해갈 수 없는 길인 모양이다. <멋진 신세계>는 1932년에 발표되었고, <1984>는 1949년에 발표되었으며, <유토피아>는 자그마치 1516년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사는 모습은 똑같다는 말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무엇이 변하는 것일까? 인간은 또 무엇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인간은 행복의 의미를 어디에 숨겨두고 이렇게 찾아 헤매는 것일까? 혹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유토피아는 아닐까? /아이비생각

 

유토피아는 '지금', '여기'에 없다는 것이지, 결코 실현될 수 없거나 발견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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