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볼루션 맨 - 시대를 초월한 원시인들의 진화 투쟁기
로이 루이스 지음, 호조 그림, 이승준 옮김 / 코쿤아우트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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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보다도 털북숭이 그림이 더 시선을 끌었다. 딱 보면 원시인인데 시계를 찼다. 게다가 그의 앞에는 구두도 한켤레 있다. 털옷을 입고 시계를 차고 구두를 신고...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듯한 그림인데 이 소설이 딱 그렇다.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요즘의 언어로 우리 인류의 진화과정을 그려내고 있으니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책을 읽기전에 아주 당연한 듯이 진화론과 창조론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역시 인류는 진화론이지~. 시대를 초월한 원시인들의 진화 투쟁기, 라는 말에 백퍼센트 공감하게 된다. 이 책을 통해 인류의 문명에 대한 과정을 되짚어보게 되었던 시간이다. 재미있었고 나름 알찼던 시간이기도 했다.

 

인류의 진화 과정을 한 원시인 가족의 삶으로 축약한 이야기다. 그들은 현생인류다. 우리가 호모사피엔스라고 배웠던. 인류는 언제부터 지구에 존재했을까? 지금으로부터 약 200만 년 전으로 보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어디에서 처음 등장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주인공 에드워드의 가족과 그의 형 바냐, 동생 이안이 커다란 줄기를 이루고 그에 따라 아들 오스왈드, 어니스트, 알렉산더, 윌버, 윌리엄이 또하나씩 줄기를 쳤다. 원시인에게 무슨 저런 이름을? 하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시대를 초월한 이야기라고 이미 말했다. 에드워드는 과학자다. 끝없이 꿈을 꾼다. 그리고 끝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그에 반해 형 바냐는 자연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주의다. 요즘으로 치면 진보와 보수쯤? 여행가인 동생 이완으로 인해 세상의 이야기를 듣고 세상의 변화를 가늠하기도 한다. 이안의 여행기속에서 우리는 아프리카의 오스타랄로피테쿠스와 인도네시아의 자바원인, 중국의 베이징원인을 만나게 된다. 이 역시 우리가 배웠던 대로 가장 오래된 인류의 화석을 떠오르게 한다. 그쯤되니 재미있게도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 소설인지 조금은 의아스럽기까지 하다.

 

불을 얻기 전에는 선택권이 많지 않았다. 제우스의 불을 훔쳐서 인간에게 주었던 프로메테우스를 통해 인간이 불을 얻게 되는 이야기는 신화를 통해 자주 등장한다. 그 불로 인해 인간은 정말로 많은 것을 얻은 듯 하다. 인간보다 힘쎈 동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었고, 익힌 고기를 통해 더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도 있었으며 따뜻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가 보낸 판도라를 아내로 맞이하며 결국 인간에게 불행을 안겨주게 되었지. 어찌되었든 에드워드의 가족들을 통해 인류의 변천사를 바라보는 건 흥미로웠다. 신기하게도 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했다. 그것은 아마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 때문일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대화는 이미 원시인의 대화가 아니었던 까닭이기도 했다. 

 

"한 걸음 나아가는 거라고. 어쩌면 이 걸음이 인류에게는 큰 도약일 수도 있어. 그런데도 이게 자연법칙에 어긋난다고?"... "왜냐면 네가 한 짓은 어딜 봐도 '자연'스럽지가 않거든. 너도 한때는 대자연의 일부로서 자연의 축복과 재앙을 겪으며 희로애락 속에 살아가던 소박한 아이였어. 완벽한 공생관계 속에서 살며 느리지만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과 함께 그냥 동식물의 일원이었던 거라고." - 72쪽 -

"그냥 조금 더 빨리 진화하는 거에 불과하다니까."... "달라도 한참 다르다고! 우선 바뀌는 속도가 너무 빠르잖아. 원래 수백만 년이 걸려야 될 일을 고작 수천 년 사이에 하려고 난리치고 있다고. 만약 그 일이 진짜 꼭 필요하다면 모르겠다만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은데 말이야. 지구상 그 누구도 이런 말도 안되는 속도로 살아가지는 않아! 네가 진화라고 표방하면서 하는 짓은 실제 진화와는 완전히 달라. 그건 진화가 아니라 신세 좀 고쳐보려는 얕은 수작일 뿐이지." - 76쪽 -

"그 당시 인간들은 제 분수를 지키며 모든 일에 만족할 줄 알았다"... "그 사람들이 지금 어떻게 됐는지 알아? 다 멸종해서 화석이 됐어." - 199쪽 -

에드워드와 형 바냐의 대화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된다.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왔던 인류의 문명은 과연 옳았을까? 조금은 늦더라도 바냐의 말처럼 '자연'스러운 속도에 맞추며 살았다면 어땠을까?

"인간은 과거로 퇴행할 수도 있고, 미래로 나아갈 수도 있지. 하지만 제자리에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분명히 말해두지만, 우리 원시인이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뿐이야. 바로 앞으로 나아감으로써 진정한 인간으로 우뚝 서고, 역사를 창조하며 당당히 문명을 이끌어가는 거지!" - 200쪽 -

여기서 잠깐 묻고 싶어진다. 진정한 인간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그래서 지금의 우리는 진정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 책띠에서 보았던 한줄의 문구가 떠오른다. 나는 아버지를 잡아 먹었다, 라는. 어니스트를 포함한 가족들은 불의 발견 그 이상의 진보를 막기 위해 아버지를 잡아먹었다. 이 책은 전혀 코믹하지 않다. 1960년에 출간되었지만 지금까지도 제목을 바꿔가며 6번이나 개정 출판되었다는 걸 보면서 10년뒤에 다시 이 책이 개정 출판된다고해도 지금과 같은 반응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우리 인간이 꿈꾸는 것은 무엇일까?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토록 앞만 보고 달려가는 것일까? 우리는 왜 아버지를 잡아먹었을까? /아이비생각

자연의 흐름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사실 잘 알 수 없거든. 하지만 중요한 것은 현실적으로 유효한 법칙을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거지. (-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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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다른 나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9
임현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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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의 제목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었다. 남이 보는 나와 내가 보는 나의 차이점이랄까? 틀림보다는 다름을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을까? 뭐, 이런 생각? 그런데 도입부부터 신기하게 빠져드는 나를 발견했다. 특별할 것도 없는 어느 여자의 이야기. 마치 내 얘기 좀 들어보실래요? 하면서 시작하는 듯한 그런 느낌을 전해 받았다. 서술형식은 여자와 남자의 시점과 생각이 서로 교차된다. 남편과 아내로, 그리고 남자와 여자로. 부부이면서 어쩌면 남처럼. 생각보다 몰입도가 좋았다. 책장을 넘길수록 왠지 조심스럽게 읽어야 할것만 같았다. 그들의 이야기를 하나라도 놓쳐서는 안될것처럼. 어느날 문득 나와 똑같은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얼굴도 이름도 삶의 패턴까지도 똑같은 또하나의 내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흔히 자신과 똑같은 사람을 도플갱어라고 하는데 그것은 또하나의 나를 만나는 일종의 심령현상을 일컫는다고 한다. 다시말해 타인은 볼 수 없지만 스스로 자신과 똑같은 대상, 즉 환영을 보는 것을 말한다. 도플갱어를 만나면 머지않아 죽게 된다는 건 소설이나 공포영화의 소재일 뿐이며, 현대의학에서는 정신질환의 일종으로 보고 있다고 하는 걸 보면 그리 아름다운 말은 아닌듯하다.

 

이 책의 話者는 소설가다. 어쩔 수 없이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글로 옮기며 살아간다는 소설가의 말처럼 책속의 話者 역시 아내의 주변이야기를 쓰고 있는데 읽다보면 시간과 공간이 살짝 어긋나기 시작하고 소설속의 남자가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현실속의 남자가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지나친 문장을 다시한번 읽게 되는 순간이 온다. 작품해설에서 이런 말이 보인다. 이전 소설들에서도 그래왔듯이 임현은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는 서술적 의식의 불명확함, 그리고 아이러니한 이야기톤에 천착하는 작가다. 임현은 그저 텍스트의 의미를 열어두고 독자에게 의미를 떠넘기기 위하여 서술을 복잡하게 만드는 작가가 아니다. <당신과 다른 나>는 불확실한 삶과 허구의 경계를 탐문하는 것처럼 보인다... 문득 궁금해진다. 임현의 소설집이라는 <그 개와 같은 말>이란 작품이. 그 작품에 실린 여러편의 단편들이 모두 모인 작품 같다는 말이 시선을 끈다.

 

중고서점에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여자, 그 여자는 교통사고로 죽은 자신의 남편과 너무 똑같다고 말했고 마음이 편치않았던 話者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게 된다. 그리고 곧 이상한 상황과 부딪히게 되고 서로의 사랑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부부는 서로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한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일이었을까? 자신의 이야기만큼은 쓰지 말아달라던 아내의 말을 무시했던 것부터였을까?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가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남들의 입에 오르내리거나 혹은 남의 잣대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나 자신을 향한 허탈과 허무가 너무 짙은 시대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수많은 가면이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는 까닭일지도 모르겠다고. 그래서일까? 열린 것도 아니고 닫힌 것도 아닌 상태에서 이 책은 끝나버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작가의 말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아무래도 나는 나를 너무 믿었던 것 같다. 남들에 대해서라면 자꾸 의심하고 불안해하면서 나와는 내가 너무 우호적이었던 거 아닌가. 그러니까 그런 내가 나를 믿지 못하게 된다면 이제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더 무얼 믿을 수 있나 그런 의심하는 마음으로 다시 한 편을 썼다. 라고.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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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지음, 안정효 옮김 / 소담출판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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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은 물리-화학적으로 평등하기 때문이죠."

"모든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을 위해서 일합니다."

"오늘 누려도 되는 즐거움을 절대 내일로 미루지 말아요."

"개인이 감정을 느끼면 집단생활이 비틀거려요."

"많은 사람들이 타락하는 것보다는 한 사람이 고통을 겪는 게 더 나은 선택이겠지."

"우린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지극히 간단하게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낼 능력을 갖추었어. 이단은 단순히 한 개인의 삶보다는 더 많은 것들을 동시에 위협해서 사회 자체를 공격하는 격이야. 그래, 사회 자체를 말이야."

"우린 사람들이 옛것에 끌리는 걸 원하지 않아요. 우린 그들이 새로운 것을 좋아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항상 과학이 최고라는 말을 하는대요. 그건 최면 교육의 표어입니다."

"신은 기계와 과학적인 의학과 보편적 행복과는 병립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선택을 해야만 합니다. 우리 문명은 기계와 의약품과 행복을 선택했어요."

"문명은 숭고함이나 영웅성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런 개념들은 정치적인 비능률성의 징후들이죠."

"사람들은 人性의 절반쯤은 병 하나에 넣어 가지고 다닐 수 있어요."

 

행복하고, 원하는 바를 얻으며, 얻지 못할 대상은 절대 원하지 않는... 모두가 잘살고, 안전하고, 전혀 병을 앓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늙는다는 것과 욕정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즐거운... 어머니나 아버지 때문에 시달리지도 않고, 아내나 아이들이나 연인 따위의 강한 감정을 느낄 대상도 없고 마땅히 따르도록 길이 든 방법 이외에는 사실상 다른 행동은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그런 세상에서 산다면 어떤 기분일까?연 그런 세계를 신세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런 세상을 바라보며 멋진 세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인간이 만일 행복에 관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다면 인생이 얼마나 재미있을까!' 라는 한 줄의 문장을 보면서 행복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행복... 昨今의 세상에서 그것은 인간이 모든 것을 바쳐가며 쟁취해야만 할 의미처럼 되어버린 듯 하다. 삶의 話頭랄까? 그런데 저 한줄의 문장처럼 인간이 만일 행복에 관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다면 정말 재미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그 행복이란 말의 의미를 왜곡하고 있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마치 자신이 만든 올가미에 자신이 걸려든 것처럼.

 

<멋진 신세계>는 올더스 헉슬리가 1932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그 시대에 이렇게까지 앞서나가는 세상을 그릴 수 있었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이 책을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올랐던 작품이 조지 오웰의 <1984>였다. big brother에 의해 모든 것이 감시되는 사회. 하지만 소설이 곧 현실이 되어버린 시대에 우리는 지금 살고 있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꿈의 나라를 유토피아라고 한다면 지독히도 어두운 현실을 그려내는 걸 디스토피아라고 한다는데 <멋진 신세계>에서 그리고 있는 세상은 유토피아일까, 디스토피아일까? 그 판단은 오롯이 독자의 몫인 듯 하다. 신기하게도 <1984>나 <멋진 신세계>에서는 가족이란 의미의 공동체가 보이지 않는다. 태어남과 죽음까지 길들여지는 과정속에서 인간성이나 생각의 자유마저 빼앗긴 채 삶의 여정속에 머문다. 더 기가 막힌 것은 <멋진 신세계>가 그리고 있는 세상이다. 인간을 '맞춤형'으로 제품을 찍어내듯이 대량 생산을 하고, 하나의 난자에서 수십 명의 일란성 쌍둥이들이 태어난다. 자신의 삶에 어떠한 의문조차 품을 수 없도록 끝없이 반복되는 수면 학습과 세뇌를 받게 된다. 하지만 그런 세상에서 태어났지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자신의 삶에서 무언가 다른 것을 찾으려고 하는 존재가 하나 나타나고, 그가 이끄는 대로 시선은 야만인 구역으로 가게 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야만인 구역이라는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딱 지금의 우리라는 것이다. 놀라운 반전이 아닐 수 없다. 야만인 구역에서 원래 신세계에 살았던 여인과 그 여인의 아이를 만나게 되고 아이의 아버지가 신세계에 살고 있다는 걸 눈치 챈 그는 여인과 아이를 데리고 신세계로 돌아온다. 미래에서 과거로 갔고, 다시 과거에서 미래로 돌아온 셈이랄까? 이쯤에서 살짝 의문이 든다. 작가가 진심으로 보여주고 싶어했던 건 어떤 모습일까? 재수없으면 200살까지 살지도 모른다는 말이 떠도는 지금, 늙지도 않고 정신적 외로움도 느낄 수 없는 세상에서 노동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에 자극으로만 이루어진 오락을 즐기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정말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간혹 인간이 살기에 가장 좋은 형태의 국가는 공산주의라는 말을 하는 이도 있다. 사실 유토피아라는 말은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에서 비롯되었다. 그가 <유토피아>라는 작품속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전체주의 혹은 사회주의인 듯 보여진다. 모든 사람이 어느 정도 자기만족을 얻을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인간의 욕구와 수요를 억제하고 생산과 분배를 통제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어서 하는 말이다. 어쩌면 올더스 헉슬리가 말하는 멋진 신세계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다시 한번 돌이켜보라는 뜻은 아니었을까? 야만인으로 표현되는 우리의 모습속에는 인간성을 잃고 싶어하지 않는 처절한 몸부림이 보여지고 욕망과 이성은 끝없이 싸운다. <멋진 신세계>라고 말은 하지만 그 안에서도 평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순이다. 아무래도 인간의 운명속에서 모순은 피해갈 수 없는 길인 모양이다. <멋진 신세계>는 1932년에 발표되었고, <1984>는 1949년에 발표되었으며, <유토피아>는 자그마치 1516년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사는 모습은 똑같다는 말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무엇이 변하는 것일까? 인간은 또 무엇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인간은 행복의 의미를 어디에 숨겨두고 이렇게 찾아 헤매는 것일까? 혹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유토피아는 아닐까? /아이비생각

 

유토피아는 '지금', '여기'에 없다는 것이지, 결코 실현될 수 없거나 발견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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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너의 문화사 - 매너라는 형식 뒤에 숨겨진 짧고 유쾌한 역사
아리 투루넨.마르쿠스 파르타넨 지음, 이지윤 옮김 / 지식너머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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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전만 해도 식사시간에 말을 한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대화가 식사시간에 이루어진다고 봐도 무방할 듯 하다. 밥을 먹으면서 말을 한다는 건 예의없는 행동이었으며 쩝쩝거리거나 소리를 내는 것 또한 예의없다고 가르쳤다. 그런데 그 매너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예의나 예절이란 말의 의미와 같을까? 물론 사전에는 예절을 영어로 manner라고 한다고 나와 있지만 뜻밖의 말도 보인다. manner의 어원은 이탈리아 어의 마니에라로, 개성적인 양식이나 필적을 의미함. 13~15세기의 프랑스 궁정 문학이나 이탈리아에서 '매너'라는 말은 보편적인 인간행동과 예술양식에 사용되는 말로서 영어의 '스타일'이라는 단어와 유사한 뜻을 갖고 있었음. 매너라는 말은 18세기까지는 원뜻 그대로 쓰이고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개성적 양식에 대신하는 ‘아류(亞流)’의 뜻을 내포한 모멸적인 말로 쓰이고 있음. 간혹 들려오는 매너리즘이라는 말이 그런 의미였던 모양이다... 각설하고 이 책은 그 매너라는 형식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오래전에 <만들어진 전통>이나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을 읽었었다. 나름대로는 상당히 많은 부분을 공감했던 기억이 있다. 기득권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우리는 인지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매너라는 형식의 뒷면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 신사의 품격처럼 여겨지고 있는 first lady는 문 뒤에 숨어있을지도 모르는 암살자들의 방패막이로 여성을 먼저 앞세웠던 것이 시초였다. 위생관념이 없었던 시절, 창 밖으로 버려지던 똥이나 오줌을 뒤집어쓰지 않기 위해 양산을 쓰기 시작했다. 그 더러운 오염물의 냄새를 조금이라도 없애기 위해 향수가 만들어졌으며 오염물을 묻히지 않기 위해 힐을 신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양산과 향수와 힐이 멋쟁이의 이미지가 되어버린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기사라는 이름으로 남자들만의 세상이 펼쳐지던 중세시대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같은 문화권 안에서도 사회계층에 따라 매너가 뜻하는 바가 달랐다'는 말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유럽뿐일까? 우리의 역사속에서도 많이 보여지고 있는 까닭이다. 기득권층은 자신이 마치 다른 존재인양 여러가지 예절을 만들어냈다. 우리가 지금 명절마다 치루는 그 제사형식도 그렇게해서 태어났다. 세상이 변하면서 그들만의 예절인 듯한 형식이 일반적인 것으로 탈바꿈한다. 그러다 남의 제삿상에 감놔라 배놔라 한다는 속담도 생겨났다. 그만큼 씁쓸한 느낌을 깔고 앉은 형식들이 많다는 말일 터다. 그런 까닭으로 이 책이 전해주고자 하는 메세지는 강하게 다가온다. 매너는 과연 누구를 위한 형식인가.

 

우리는 흔히 밥 한번 먹자는 말을 한다. 함께 밥을 먹는다는 건 어떤 관계를 형성하고 있거나 관계를 이루고 싶어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일수도 있다. 하지만 昨今의 '밥 한번 먹자'는 그저 스치듯 뱉어내는 형식적인 말일 때가 많은 듯 하다. 그만큼 관계를 맺는다는 게 어려워졌다는 뜻일까? 아마도 누군가에게 마음을 연다는 것이 두려워진 현실 탓이 아닐까 싶은데 혼자만의 생각일까? 책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밥을 함께 먹는다는 걸로 어떤 관계를 돈돈하게 만든다는 게 어려워진 세상이다. 9장에서 보여지는 디지털 중세시대의 이야기는 참 씁쓸하다. 사람들은 이제 SNS 공간에서 허세를 떨고 서로를 유혹하고 행패를 부린다. 중세 기사들의 무절제한 태도가 또다시 만개하고 있다... 그런데도 왜 중세법은 부활하지 않는거지? 프랑스 철학자 장 자크 루소는 과학과 예술은 인간의 자존심과 명예욕만을 충족시키기 때문에 인류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 루소가 보기에도 지금의 모습은 '시대의 인간성이 계몽시대 이전으로, 즉 소수에 대한 혐오 발언에 대중이 선동되었던 종교전쟁 시대의 수준으로 퇴보한 증거라고 여길수도 있다'는 말은 참으로 놀랍다. 인간이 매너를 통해 자신이 동물과는 다른 존재라는 걸 증명하고자 애썼다는 말은 공감할 수 없다. 동물과 다른 존재가 아니라 같은 인간을 상대로 너랑은 다른 존재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애쓴 것 같아서. /아이비생각

 

국가가 폭력을 독점하고 난 뒤부터 사람들은 서로를 좀 더 조심히, 그리고 절제하며 대하기 시작했다. 이 현상은 국가 권력의 중심, 즉 궁궐에서부터 확연하게 나타났다. 궁궐 사람들은 정확한 예법에 통달해야만 했다. 엄격한 궁중 에티켓이 만사를 규정했다. 궁궐에서 성공하는 유일한 길은 그 에티켓에 통달하는 것이었다. '에티켓'은 원래 프랑스 궁궐에서 입장을 허가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이름표를 뜻하는 단어였으나 점차 '사회가 허용한 태도'를 일컫는 개념으로 확장되었다. (-1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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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완벽한 가족
애덤 크로프트 지음, 서윤정 옮김 / 마카롱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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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ll me i'm wrong...내가 틀렸다고 말해요, 이 책의 원제다. 그냥 책을 다 읽고나니 원제가 궁금했을 뿐이다. 한동안은 그렇게 멍하니 있었다. 그리고 생각난 말, 완벽했다! ... 반전이라는 말은 상당히 매혹적인 느낌을 갖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반전은 이야기의 흐름속에서 어느정도는 숨어있는 모습을 들켜버리곤 한다. 그래서 흠, 그게 반전이었다는 거야? 라는 의구심을 불러올 때가 많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반전이라는 말의 속성에 끌려들게 된다. 이 책은 반전이란 말의 진정한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정말 끝내주는 반전이었다, 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다. 어떠한 반전을 노리기 위해 꼬인 실타래처럼 이야기를 끌고 가지도 않는다. 작가와의 심리전에서 KO패를 당한 느낌이다.

 

전업주부인 메건과 교사를 하고 있는 크리스에게는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은 아기 에비가 있다. 비록 크고 멋지진 않지만 안식을 찾을 수 있는 집도 있으며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은 도시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그야말로 전원생활을 오롯이 즐길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흔히 평화로운 곳이라고 말하는. 이야기의 흐름은 메건과 크리스의 시선이 겹쳐지며 그들의 일상을 그려낸다. 그리고 가끔은 그들이 정말 행복했었던 한 때와, 혹은 조금은 불행했다고 말할 수 있는 한 때를 오간다. 마치 두사람의 일기를 훔쳐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산후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는 메건은 아이를 낳고 멀어진 듯한 부부관계에 예민하다. 그리고 부쩍 이상한 행동을 하는 남편 크리스는 아내 메건의 그 예민함이 너무 버겁다. 그런 와중에 마을에서 두명의 소년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남편의 수상쩍은 행동때문에 메건은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만약 크리스가 범인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크리스가 정말 살인범일까?

 

가족들 간의 정치라는 게 이래서 무섭다. 아무도 진심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모든게 정보를 끌어내고 시험해보고 반응을 살펴보기 위해 고안된 베일에 가려진 말들이다. 정말 슬픈 일이다. 왜 서로에게 솔직할 수 없는 거지? 그러면 제임스 본드 같은 허풍쟁이가 모두 사라질 텐데. (-25쪽) 메건이 엄마와 전화로 이야기하며 생각했던 부분이다. 가족이라면 정말 서로에게 솔직해야 하는 것일까? 이야기의 흐름속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가족간의 엇박자가 껄끄럽게 다가온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인 동시에 누구나 외면하며 살았을 그런 부분인 까닭이다. 살면서 나를 가장 아프게 만드는 건 바로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가족이기 때문에, 혹은 친구이기 때문에 괜찮을거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이해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메건의 저 말은 결코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어떤 상황이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심을 담은 대화가 아닐까 싶어서.

 

알 수 없는 비밀을 품고 있는 남편과 그 비밀로 인해 남편을 의심하는 아내. 완벽해보였던 그들의 삶에 무엇이 문제였던 것일까?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 알게 된다. 우리에게 가족이란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그리고 가족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에서 무엇을 되돌아보아야 하는지를. 사랑은 그저 좋은 것을 사주고 맛있는 걸 먹는 순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모든 순간을 배려해주고 관심을 가져주는 게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을. 작은 것까지도 함께 울어주고 기뻐해주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이비생각

 

모든 사람이 행복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다들 문제를 안고 있다. 힘든 일을 겪고 있고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다. 다들 그렇게 살아간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을 향해서 조금씩 나아가는 동안 우리는 그 문젯거리를 고치려고 노력한다. 문젯거리는 우리에게 인생에 집중할 수 있는 힘을 준다. 병적이다.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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