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선화물들이다

 

 

내 너를 탐한 것은

꺾을 수 없던 까닭일까?

소름끼치도록 어여쁜 자태로

나려진 너의 나락에

신음 같은 긴 읊이

경탄이 되어 울려 퍼지다

읊조림이 되어 넋두리가 되어

묻혀 지고

다시 피고 질 네 죽음을

시샘하여 손끝 닿은 곳곳

한 자락 한 자락 으깨지어

물들어 간다

연붉은 자죽 곱게 빻아져

상처의 흔적도 없이

시리게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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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내리는 날에 Fantasy

 

 

아직 동 터 오르기 전 고요한 미명에

문득 내 하잘것없던 시들이 생의 양식이었다던

그대의 이름을 나지막이 읊조려 본다.

무거운 공기가 차분하게 바닥으로 가라앉고

생 흙먼지 냄새가 예민한 코끝을 간질인다.

아무런 생의 기미를 눈치 챌 수 없던 시절

그대와 함께 걷던 이 거리를 가로지르며

나는 천천히 어두컴컴한 지하로 들어선다.

자동차 배기가스가 배인 뿌연 벽, 찌든 탁자

10년 지나도록 바뀌지 않은 낡은 기기, 낡은 사람들......

이곳의 것들은 모두가 너무 오래되고 낡아버렸다.

비가 오려는 날이면 어디가 쑤신 노인들은

마디마디마다 온통 시리다며 불평을 토해내고

종일 킁킁거리던 내 코는 하나씩, 하나씩

성마른 잎사귀 같은 말라비틀어진 코털들을

하얀 휴지조각 아래 풀어낸다.

그리고 이젠 너무 푸석해진 그대는 더 이상

그 어떤 생의 기미에도 관심이 없는 듯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고, 그렇게 생에 파묻혀

우리가 그 시절 서로에게 단단히 약속했던 것처럼

더 이상 서로에게서 고통스럽지 아니하며

더 이상 그 많던 헛된 열망들로 우리 스스로를

소비하거나, 증오하지 아니하고

더 이상 서로를 그리워하지도 않지만

나는 이 곳, 낡고 오래된 기억들을 등지고

멀리 그대를 떠나갈 것이다.

툭, 툭, 툭,

살금살금 비가 내리고

생 흙먼지 냄새를 씻겨내고

가지가지마다 방울지고

거리거리마다 스며들고

언젠가 그대와 함께 걷던 그 거리에

꽃들이 피어나고 다시 꽃들이 만발하고

오직 새 하얀 꽃들만 온통 흐드러질 때

그대도 사라지고

그대와 함께 꿈꾸었던 나도 사라지고

그 헤아릴 수 없던 우리의 노래도 시도 사라지고

그 무엇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새 하얀 꽃들만 온통 흐드러질 때

그대를 등지고 떠나가는 그 걸음으로

문득 나는 내 보잘것없던 시를 사랑했던

그대의 이름을 나지막이 읊조려 볼 것이다.

그렇게 멀리 그대를 떠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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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밭에 허수아비

 

 

듬성듬성 푸른 하늘

샛노랗게 말라비틀어진 밀밭에

황량한 바람이 지나치고

검게 하늘을 물들였던 까마귀

더 이상 훔쳐 먹을 것이 없다고

더 이상 벗겨먹을 한 터럭

남아 있지 않다고

멀리 머얼리

날아가 버린다.

 

하늘 끝 검게 물들어

선홍빛 노을 지평선 밑으로

가라 앉는다.

 

그래! 모두 떠나가 버려라!

그러나 여기 썩어 문드러질 몸뚱이 하나

남겨두고서 떠나가 버리면

이 권태로운 긴 밤

나는 대체 어찌 잠들란 말이냐?

 

칠흑 같이 어두운 밤

내 살을 갉아대던 까마귀 닮은

서늘한 바람

까악까악 우짖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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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F 우뚝 솟은 건물 현관 앞엔

당신들의 차량을 주차할 수 없습니다.

갓길 귀퉁이에 차량을 정차하시고

당신들의 등짐은 로비를 피해

2F 화물칸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여

운반하십시오.

여보쇼! 이 무거운 짐을 도로서부터

2F까지 들고 올라가라는 소리요?

네, 이 현관 앞바닥은 얼마 전

대리석으로 새로 단장하였습니다.

어디서 굴러먹었을지도 모를

당신들의 차바퀴 흔적을

남길 순 없습니다.

나 원 참, 더러워서. 좋소!

그럼 왜 1F 로비에 있는 엘리베이터는

이용할 수 없다는 거요?

보십시오. 로비는 아무런 짐 없이

정장을 입은 고객들을 위해

저희가 에스코트하는 장소입니다.

문지기인 우리도 정장을 입고 있습니다.

에이 시발 세상 더럽고 좆같네!

누가 고작 문지기인 당신들에게

아무런 짐 없이 정장을 입을

권리를 주었단 말이오?

 

 

 

 

 

2.

 

이제는 먼 이국인들의

한낱 봄 마실 거리가 되어버린

어느 찬란했던 왕조의 화원

그 문 앞을 어떤 사내가 서성거리고 있다.

완연한 봄빛에 물든 신록들이

바람에 잔가지를 털어내며

이름 모를 새들이 지지배배 울어대며

오직 노인들만은 자신들을 부르는

그 언어를 이해하고서

그 안 벤치 위로 자리를 틀고 있다.

미친 듯이 교미하거나 구애하고 싶은

비둘기 한 쌍도

노인들이 남긴 부스러기를 따라

탐욕스럽게 크르르르 울어대며

그 안 벤치 아래 자리를 틀고 있다.

짧은 다리로 앳되게 총총거리며

어떤 희망의 소식을 찾아 헤매고 있는

까치 한 무리들도

까악까악 까마귀처럼 울어대며

그 안 나뭇가지 위로 자리를 틀고 있다.

모두 그곳을 지나치거나

그 안 어딘가에 자리를 틀고 있다.

그러나 오직 그 어떤 사내 하나만은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이 모두

그곳으로부터 기인하고 있음을 직감한 채

그 문 앞을 서성거리고 있다.

 

‘누구든 들어오세요!

이곳은 과거라면 당신들이

꿈꿔보지도 못했을 왕의 화원입니다.

그러나 저에게 길을 묻진 마세요!

저는 오직 그 문 안에 들어설 수 없는

단 한 사람, 그 어떤 사내

이곳의 문지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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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유병

 

가끔은 어느 몽환의

거리도 걸어보자꾸나

춤추는 다리 위에서

네 춤추는 다리 사이로

팔은 하늘을 향해

힘껏 뻗쳐도 보아라

네 그래도 머릿넋에

관통하는 상쾌함이 없거든

맘껏 몽환의 가시밭길에서

괴성을 지르며 달려도 보아라

순간 다리에 흥건히 젖은

네 피를 보거든

슬쩍 웃어 보이며 뒹굴어도 보자꾸나

네 심장에 네 머릿넋에

드디어 한 개 바람이 관통하면

맘껏 웃으며

이 네 피를 다 흘려보아라

마지막 한 줌의 피를 다 토하거든

순간 멎어버린 네 심장에

피 같은 눈물을 뿌리며 온 몸을 적셔

어느 몽환의 거리에서 뛰쳐나와

새벽의 언덕에 올라

그대로 영영 잠들어 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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