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크린 기도



웅크려 있는 나에게

소리 소리들이 울려 퍼진다.

그토록 나를 사랑한다는

소리 소리들이 울려 퍼진다.

하지만 소리는 소리일 뿐이라오.

그런 소리 소리들일랑 하려거든

웅크린 내를 먼저

당신의 뜨거운 가슴 맞대어

꼬옥 안아줘 보시오.

웅크려 있는 내를 어느 누가

감히 품을 수 있단 말이오?

그래도 그 누군가 뜨거운 가슴으로

내 웅크린 가슴 맞대어

꼬옥 품을 수 있다면

나, 그 품에서 고이 잠들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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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산보



화창한 어느 봄날의 토요일 오전 11시

거리에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 재잘재잘거리고 있다.

나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선

끊임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다.

Then shall I start?

But, What am I supposed to do?

I'm not sure what the hell I'm doing here.

I don't belong here.

이렇게 푸르른 날이면 교복을 벗어 던지고선

담장 너머 어딘가로 훌쩍 떠나버리고 싶었다.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지 않는다.

산책을 나온 세련된 미시족 부인의 강아지가

자꾸만 귀찮게 내 뒤를 졸졸 따라오고 있다.

부인이 불러도 이 녀석 아는 척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편으로 가는 내 뒤만 졸졸 따른다.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교복을 입은 아이들을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세련된 미시족 부인이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내 뒤를 졸졸 따라오던 강아지가

부인에게 붙잡혀 어딘가로 끌려 가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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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의 이유



이해했다고 말했던 나의 모든 기억들을 부셔버린다

너를 처음 보았던 그 순간부터 차곡차곡 쌓여진 간격으로

마음껏 나래를 펴서 너를 자르고 붙이고 꿰매어 이제

너는 새롭게 태어난 의미들-너에게 결코 고백할 순 없어

너는 오직 나만의 부풀려진 모호한 꿈덩어리처럼 내 것

영원히 살아서 지울 수 없는 찰나의 형이상학적

이미지, 아우라, 신비, 경이로운 상심

헝클어진 토사물처럼 난잡하여도 아름다웠던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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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의 마음



진창에서만 피어나는

천한 태생의 꽃이라고

깊고 어두운 수렁 안에서만

절 찾지 마세요.


당신 곁에 가까이 피어나

가닿을 순 없어도

화사한 꽃밭에 어여삐 피어나

고이 드리울 순 없어도

여기저기 모르게 피어나

당신 발치에 부딪치는

옅은 파문처럼

고요히 물결치고 싶어요.

바람에 흔들려 흩날리는 벚꽃처럼

발그레 부끄러운 당신 머리 위로

황홀히 화환을 씌울 순 없지만

당신 머리맡을 밝히는

은은한 촛불처럼

고요히 흔들리고 싶어요.


진창에서만 피어나는

천한 태생의 꽃이라고

깊고 어두운 수렁 안에서만

절 찾지 마세요.

당신 가슴 안에 먼저

놓여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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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과 길옆 사이



어느 좁고 긴 길

후미진 가장자리

이름 모를 빌딩 아래

반짝이는 은색 테라칸

차가운 금속 커버 위로

고요한 바람이 머물고

흔들리는 잔 나뭇가지 잎사귀들

한 폭의 수묵화가 되어

반짝반짝 춤을 추며

덩실덩실 빤짝인다

내 이곳이 마냥 좋사오니

하나는 당신을 위하여 집을 짓고

하나는 나를 위하여 집을 지어

당신과 함께

내내 이곳에 머물며

반짝반짝 춤을 추며

덩실덩실 반짝이며

한 폭의 그림으로 남겨지고 싶사오니

영영 이곳을 떠나가지 마소서

찰나의 오롯한 꿈을 꿀 때

콧등을 스치며 떨어지는 나뭇잎들

고개 들어 바라보니

온통 벌레 먹어 숭숭 뚫려버린

잎사귀들

멀리서 들려오는 전기 조명공의

분주한 발걸음 소리들

좁은 골목골목을 누비는

작은 용달차의 시동이 꺼지고

서둘러 짐을 내리는 짐꾼들의

땀방울들

쇠붙이를 용접하는 용접공들로부터

붉게 빛나 오르는

수십 개의 작은 불티들

내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지

아직 모르지만

그 좁고 긴 길옆으로

다시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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