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선인장



어디에서 권태를 배운 걸까

물 한 모금 주지 않아도

뾰족한 오기로 깊숙이

뿌리 내려

온갖 화사한 꽃들이

갖은 교태를 부리며

벌과 나비를 모으던 시절에도

아무런 표정도 향기도 없이

꼬박 하루만 꽃을 피우던

꿋꿋한 정절은 어이하고

벌써 마른 몸짓으로 비스듬히

몸을 누이고 있는 걸까

모르게 목이 말랐던 걸까


속살을 감추었던 여인이

옷을 벗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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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세상에 인질은 나 하나

머리통에 총을 꽂고선

한걸음 한걸음 내딛으며

관자놀이 관통하지 못할

러시안 룰렛게임, 그리고

뇌수를 터뜨리는 총성의

짜릿한 쾌감, 극대화된

공포는 삶을 가장하기 위한

비극적 희극, 이제 우리

총 끝에 얹힌 연기 사이로

사라진 넋들을 추모해 보자!

아주 오래된 기억들, 몽상들, 불면들

망각하면 모든 건 소용없는 법

예리한 기억의 촉수들로 들쑤셔

한 방 한 방 터뜨리고

마법의 나무 치솟아 오르듯

환각의 새싹을 싹둑 잘라내면

남는 것은 오직 난무하는 문자뿐,

진실을 위해 그리고 완벽한 거짓을 위해

샤롯데의 눈물을 위해

총성을 울려라! 젊은 베르테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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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정



남몰래 혼자 담배를 피우러 다니던

학교 뒷길 옆 조그만 담벼락 위로

봄이면 새하얀 목련이 피어올랐습니다.

아직은 설운 바람에 잔가지를 털어내며

눈부신 햇살에 반짝거릴 때면

눈보다 새하얀 꽃잎은 파르르 떨리며

날아오를 듯 천천히

그렇지만 무겁고 거대하게

바닥으로 내려앉았습니다.

왜 그토록 눈부시게 새하얀 꽃잎이

붉게 물들어 퍼렇게 문드러져 가는지를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까닭도 모를 신음이 ‘아’하고 터져 나와

긴 읊이 되고 읊조림이 되어

목멤 같은 슬픔이 울컥 오금을 적시며

양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습니다.

무엇이 그토록 부끄러웠는지도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두려워 도망치듯 그 거리를 내지르며

연신 두 볼을 적시는 눈물을 닦아내며

겨우 멈춰선 어느 조용한 공원 벤치

누구도 오지 않을 그곳에서

불현듯 북받쳤던 울음을 엉엉 터뜨리며

그제야 단 한 번 밖에 오지 않을 내 생의 절정이

그렇게 끝나버린 것을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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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린 가지



저는 당신의 잘린 가지입니다.

말라 비틀어져 견디지 못하고 뚝 떨어져

썩어지지 못하는 무성한 더미들과 엉켜

활활 불살라져버린

당신 가슴 한 켠 한 밤 불 밝히는

사그라지지 않는 당신의 불꽃입니다.


저는 당신의 잘린 가지입니다.

시원한 그늘이 되어줄 푸른 잎사귀들로

바람결 따라 노래를 하면서도

거대한 줄기로 깊게 뿌리박아

거센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을

당신을 잘라버린 당신의 생채기입니다.


저는 당신의 잘린 가지입니다.

뿌리가 그리워 뿌리를 잘라내고

꽃이 그리워 꽃을 떨쳐내고

거센 바람에 날아올라

영영 돌아가지 못할 당신을 그리워하는

저는 당신의 잘린 가지입니다.


그리고 당신,

내내 그리운 당신은

저의 잘린 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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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혼



겨울 달빛에

앙상히 드러난 마른 가지들의

섬뜩한 빛깔들이

그림자 되어

가슴에 새겨진다.


활활 불타오르는 불빛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라

산산이 아스러지는 꿈, 꿔보지만

서린 바람에 분질러지지 못하고

견디어간다.


봄날에 젖은 기억들 되살아나면

썩어지는 꿈, 꿔볼 터인데

뻣뻣이 굳은 그 자태

휘어지지 못하고서 그대로

칼날 같은 바람을 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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