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가 시인이라면



만약에 그대가 진정 시인이라면

매일 동네 어귀에 트럭 한 대 대놓고서

20년 동안 한결같이 회를 팔아온 아저씨의

파닥파닥 물차 오르는 생선 대가리에

탕탕 칼을 쏘고 쓱싹쓱싹 배 가르는 소리를

시에 담아

다리에 실금이 가 입원한 어느 어머님의

못난 아들을 위해 따뜻한 밥 한 끼

차려주고 싶은 마음으로 몰래 병원에서 나와

둔탁둔탁 걸어오는 석고붕대의 저린 발자국 소리에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고

영원히 가 닿을 수 없는 타인인 그대와 나의

엷디엷은 층층 사이사이에 긴 다리를 놓아

그대와 나의 체온 사이로 영혼의 습도를 녹여서

겨울에 성에 낀 버스 창가에 그대 입김으로

한여름 하염없이 창밖에 뛰어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깊은 한 숨을 내쉬는 어느 아픈 소년의 숨결을 섞어

시를 적어 놓을 수 있을 텐데

만약에 그대가 진정 시인이라면

그렇게 세상의 모든 고통의 멍에와 슬픔의 결들 사이에서

한 마리 날아오르는 새가 되어 꿈이 되어

차창 밖 갇혀버린 풍경들 속에 풍경화가 되어버린

우리들의 잃어버린 표정들을 환하게 비추어

되살려 놓을 수 있을 텐데

우리가 모르게 흥얼거리는 못다한 노래들을 

한 없이 부르게 할 수 있을 텐데

 

그대가 진정 시인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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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꽃이 진 자리에서



허기진 숨결로 들어선

동네 어귀 산기슭에 배 밭

가슴 속 깊이 일렁이며

울컥, 싸하게 열리던 순간

천지사방에 온통 배꽃이

환하게 순백을 터뜨리고

문득 생애 처음으로 떠올린

먼 그대 생각

-당신과 함께 할 수 있다면

지금 이 순간 당신과 함께 할 수 있다면

흐드러진 꽃잎이 떨어지던 날

흐드러지게 뿌려지던 내 욕정의 관념들을

모두 뒤로 하고

배꽃 같이 환한 당신과 함께 할 수 있다면

사뿐히 즈려 감는 순백의 단꿈-

아스라이 사라지고

그늘 한 점 없는 배 밭 귀퉁이

언제 떨어진지도 모른

마른 아카시아 꽃잎들을 밟고서

배꽃처럼 너무 새하얘 다가설 수 없던 그대

이젠 고이 떠나가 주시기를

새하얗게 사라져 주시기를

내내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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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의 시작



며칠째 첫 태풍이 몰려온다는

소식이 머얼리서 들려왔습니다.

닫힌 창틈 사이를 비집고서

덜컥거리는 음습한 바람이 헤집고

어둠의 전조와도 같은 먹구름이

벌거벗은 나신의 형상을 하고서

그 까만 밤들을 하얗게 지새우도록

그 들뜬 공기들을 무겁게 가라앉도록

그 모든 거짓들을 순결한 진실이도록

간절히 갈망하였지만

나의 기도가 절망한 까닭은

그 어디에도 당신의 형상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당신은 눈, 코, 입이 사라져버린

얼굴이 되어, 관념이 사라져버린

도살된 고깃덩이처럼 뭉글뭉글

부푼 몸뚱이가 되어, 사라져버린

첫 태풍의 전조였을 뿐입니다.


다음 날, 바람이 헤집고 간 짙은 녹음 사이로

묵은 정액 냄새가 난자하였고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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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인



'쓰레기 투척금지'


핏빛 같은 뻘건 글씨로

도도한 척 경고하고 있지만

이미 때 묻은 그대 발치 아래는

난잡한 토사물덩어리 투성이들,

음식물 찌꺼기, 과자 봉지, 담배조각

구멍 난 팬티, 온갖 명명할 수 없는 이름들로

그대의 이름은 ‘쓰레기 투척금지’란

허명의 쓰레기장이란 이름.


며칠 후 누군가 다녀간 듯

그대 곁에 온갖 부유물들은 사라졌지만

아직 남겨진 잿빛 흔적들에

코끝이 아려오고

다시 며칠 새 그대 발치 아래는

무언가 채워 넣어야 할 아득한 구멍투성이

사방에 언놈들이 죄다 그대 발치 아래

엎드려져 있다.

측은히 지나치는 마음으로

보듬어 주고 싶지만

주머니 한 가득 코 푼 휴지조각을

어데 둘 데 없어

그대 품에 몰래 두고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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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터에서의 환상



저기 건장한 몸짓으로

그네를 타는 한 사내가 있다.

지상에 박힌 기둥 채

뿌리 뽑고자

혹은 마지막 지상에 연고를 둔

사슬을 끊으려

한없이 창공으로 창공으로

날갯짓 하는 행복한 사내가 있다.

마법의 주문과 같은 옹알이로

혼자 되물으며

일그러진 한쪽 입술을 벌린 채

헤픈 미소로 동문서답하는

저기 완벽한 자폐로 점철되어버린

우리의 가련한 어린왕자가

끝내 지상에 닻을 내리지 못하고

하늘의 별이 되어 반짝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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