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의 마지막 밤



끈적끈적했던 그 여름의 마지막

갑자기 단 하룻밤에 귀뚜라미 소리

미친 듯이 여기저기 울어대고

단 하룻밤에 스산한 바람과 함께

모든 별들이 희미해지고

단 하룻밤에 그 뜨겁던 태양은

모든 열기를 잃어버린 듯

이미 시들어버렸거나

혹은 오직 시들어 가기만을 기다리는 것처럼

모든 생각과 감정들이 결결이 얽히고 물들어

더 이상 방향을 찾지 아니하고

그대로 맨 바닥에 머리 자올 하나하나

길게 늘어뜨리고서 매몰된다면 함몰한다면

글쎄, 그러면 긴 겨울잠 끝에

어디 슬픔 같은 것이라도 피어나기라도 할까?

글쎄, 그러면 라면 사리가 콧구멍에 걸려

킁킁거리는 슬픔 따위를 말할 순 있을까?

혹은 목구멍에 들끓는 점액 덩어리를

그대로 그대 하얀 뱃살 위에 난사한 후

더욱 상스러운 것은 그대의 연민이라고

모두 쏟아낼 수 있을까?

갑자기 단 하룻밤에 서늘하게 식어버린

그대 몸뚱이에 옷을 입히고 꽃을 달고

단 하룻밤에 초점을 잃어버린

그대 눈가에 분을 바르고 별을 뿌리고

단 하룻밤에 시들어버린

그대 청춘에 생채기를 내고

단추를 여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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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나를 가장 좋아하는

그녀는

앙큼한 새침데기이다.

언제나 삐죽 나온 입술로

인사하며

귀찮다는 듯

인사도 잘 받지 않는

그녀는

행여 바빠서 잠시라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면

화가 나 삐쳐버리고

실수로 대꾸라도 하지 않으면

온종일 뽀로통한 표정으로

말없이 노려보다가

사탕 하나 휙 던져주고서

도도히 사라져버리는

그녀는

돈이 무언지도 모르는 것처럼

세상이 어떤지도 모르는 것처럼

이것저것 잔뜩 사재기고

여기저기 빚을 지고선

언제나 내게 손을 내미는

그녀는

.

.

.


미운 일곱 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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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예감



어서 빨리 늙어버리고 싶노라고

가을이 오기도 전

떨어질 낙엽을 생각하며

미처 낙엽이 떨어지기도 전

간절히 곤두박질치길 기도하던 그대,

봄이면 꽃잎이 떨어져 서럽다고

한아름 주어다 가슴에 꽂고서

여름이면 한낮에 찌는 태양 아래

희미한 숨결로 오들오들 떨며

연푸른 잎사귀 빛 바랜다 색 바랜다

무서워 비명을 지르고

이른 계절엔 겨울을 생각하며

손이 시리다고 발이 시리다고

어느 마른 나뭇가지에 엉겨 붙었다

금세 나풀거리며 달아나

먼 산 하늘 위로 나풀나풀

바람 따라 꽃이 되어 날아가

구름 위로 훨훨 날아가

나비처럼 풀잎처럼 

훨훨 날아가


그대, 그토록 꿈꾸던 겨울은 오지 않는데

어느 적에 하얀 눈이 되어

때묻고 비린 나를 묻어주시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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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레타령



드럽다고 우습게 여기진 마소

눈만 감았다 뜨면

불뚝불뚝 어지러워지는 세상

이 천한 몸뎅이로

문지르고 비벼주지 않으면

온갖 해묵은 격정들 어떻하것소

불뎅이처럼 뜨거운 꿈들

닦아내지 못하고 삼켜버리면

새까맣게 탄 속 어떻하것소


드럽다고 내버려두진 마소

이 천한 몸뎅이로 구석구석

새까맣게 때 묻은 온기

조금이라도 받아내려면

허옇고 찰지게는 아니더라도

몰겋게는 빨아야 쓰지 않것소

살갑고 애틋하게는 아니더라도

너무 야속하게 내버려두진 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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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나리



한 겨우내

너의 샛노란 빛은

유치한 것이라고

오직 투명하게

만발한 눈만이

진정 꽃 되는 빛이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건만,

아직 피어나지도 못한

네 마른 가지가

햇발에 반짝 거리며

설운 봄바람에 흔들릴 적에

나 그토록 외로워

너를 그리고 있었음을

그만 실소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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