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꽃이 진 자리에서



허기진 숨결로 들어선

동네 어귀 산기슭에 배 밭

가슴 속 깊이 일렁이며

울컥, 싸하게 열리던 순간

천지사방에 온통 배꽃이

환하게 순백을 터뜨리고

문득 생애 처음으로 떠올린

먼 그대 생각

-당신과 함께 할 수 있다면

지금 이 순간 당신과 함께 할 수 있다면

흐드러진 꽃잎이 떨어지던 날

흐드러지게 뿌려지던 내 욕정의 관념들을

모두 뒤로 하고

배꽃 같이 환한 당신과 함께 할 수 있다면

사뿐히 즈려 감는 순백의 단꿈-

아스라이 사라지고

그늘 한 점 없는 배 밭 귀퉁이

언제 떨어진지도 모른

마른 아카시아 꽃잎들을 밟고서

배꽃처럼 너무 새하얘 다가설 수 없던 그대

이젠 고이 떠나가 주시기를

새하얗게 사라져 주시기를

내내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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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의 시작



며칠째 첫 태풍이 몰려온다는

소식이 머얼리서 들려왔습니다.

닫힌 창틈 사이를 비집고서

덜컥거리는 음습한 바람이 헤집고

어둠의 전조와도 같은 먹구름이

벌거벗은 나신의 형상을 하고서

그 까만 밤들을 하얗게 지새우도록

그 들뜬 공기들을 무겁게 가라앉도록

그 모든 거짓들을 순결한 진실이도록

간절히 갈망하였지만

나의 기도가 절망한 까닭은

그 어디에도 당신의 형상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당신은 눈, 코, 입이 사라져버린

얼굴이 되어, 관념이 사라져버린

도살된 고깃덩이처럼 뭉글뭉글

부푼 몸뚱이가 되어, 사라져버린

첫 태풍의 전조였을 뿐입니다.


다음 날, 바람이 헤집고 간 짙은 녹음 사이로

묵은 정액 냄새가 난자하였고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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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인



'쓰레기 투척금지'


핏빛 같은 뻘건 글씨로

도도한 척 경고하고 있지만

이미 때 묻은 그대 발치 아래는

난잡한 토사물덩어리 투성이들,

음식물 찌꺼기, 과자 봉지, 담배조각

구멍 난 팬티, 온갖 명명할 수 없는 이름들로

그대의 이름은 ‘쓰레기 투척금지’란

허명의 쓰레기장이란 이름.


며칠 후 누군가 다녀간 듯

그대 곁에 온갖 부유물들은 사라졌지만

아직 남겨진 잿빛 흔적들에

코끝이 아려오고

다시 며칠 새 그대 발치 아래는

무언가 채워 넣어야 할 아득한 구멍투성이

사방에 언놈들이 죄다 그대 발치 아래

엎드려져 있다.

측은히 지나치는 마음으로

보듬어 주고 싶지만

주머니 한 가득 코 푼 휴지조각을

어데 둘 데 없어

그대 품에 몰래 두고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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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터에서의 환상



저기 건장한 몸짓으로

그네를 타는 한 사내가 있다.

지상에 박힌 기둥 채

뿌리 뽑고자

혹은 마지막 지상에 연고를 둔

사슬을 끊으려

한없이 창공으로 창공으로

날갯짓 하는 행복한 사내가 있다.

마법의 주문과 같은 옹알이로

혼자 되물으며

일그러진 한쪽 입술을 벌린 채

헤픈 미소로 동문서답하는

저기 완벽한 자폐로 점철되어버린

우리의 가련한 어린왕자가

끝내 지상에 닻을 내리지 못하고

하늘의 별이 되어 반짝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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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람의 소리



흔들리는 나뭇가지가

소리를 낸다.

우수수 낙엽이 떨어진다.

한 자락 한 자락

밟히어 가다

나부끼어 부딪치고

부딪치어 떨어지고

고요하고


어디에도 당신은

소리 내지 아니하였습니다.




2. 시



새하얀 종이 한 장

흠 하나 내지 아니하고

남아 있어 달라고

내 자국 깊게 드리운다.


뚝뚝 떨구어지여

깊게 번지어 스며들라고

그토록 추악해진 너를

어이하라고


내가 아닌 것들로

뒤범벅 되어버린

네 흔적의 그림자가

나를 머금는다.




3. 너와의 거리



너의 발자국 오는

공간의 소리를 듣고파

가만히 눈을 감는다.


설레는 바람이 슬며시

셔츠 사이로 불어들고

어느새 입맞춤 한지

나는 모르고 있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

고요한 침묵이 일어

문득 두려워진 나는

가만히 눈을 떠본다.


너는 있지 아니하고

너와 멀어둔 공간만이

내 발등 온 촉수에

맴돌아 언저리에 남는다.




4. 침묵의 이유



당신의 돌아서는 긴 그림자 끝에

치인

내 머리!


그만 북받치는 설움에

아무 말 하지 못하고

끝내

침묵을 터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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