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안 미로 특별전을 다녀와서 - 너저분한 여백에 관한 단상

 

 

  사실, 이제까지 미술 전시회에 가본 적은 거의 없다. 이번을 포함해서 한 세 번쯤? 그것도 한 번은 과거 여친이랑 그냥 잘 모르는 회랑에 들려서 거의 기억도 나지 않는다. 다른 한 번은 르네 마그리트 전시회였는데, 기대가 컸는지 실망감이 오히려 더 컸다. 그래서 전시회에 대한 내 기억은 거의 전무하다. 다만, 스무 살 때 한 선배의 선물로 ‘루오’ 화집을 선물 받아, 그때부터 다소간 그림에 대한 관심이 생긴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내 미술에 대한 관심이란 건 고작, 루오의 ‘거울 속에 비친 나부’를 보면서 느낀 자기연민과 유사하다. 그래서 피카소를 처음 이해할 수 있었던 것도 ‘우는 여인’이란 작품을 통해서였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입체적으로 내 개인의 감정을 투영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호안 미로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사실, 거의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이가 공자 왈 맹자 왈 하는 것과 똑같은 소리일 것이다. 다만, 이전에도 그랬고 또 지금도 그럴 수밖에 없기에, 여전히 나는 내 개인적 투영을 심하게 담은 전시회 소감을 적으려 한다. 왜냐하면 이번에는 그래도 무언가 스스로 간과할 수 없는 단상을 얻은 까닭이다.

    

 

  이번 전시회를 나는 크게 세 가지 그림 영역으로 분류하고 싶다. 첫째는 유아성에서 비롯한 추상적 세계에 대한 표현이고, 둘째는 그림의 시적 형상화에 관한 부분이고, 마지막으로 서양화된 동양화의 관점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여기서 두 번째와 마지막 이야기는 다소 연결되어 있다. 때문에 나중에 하기로 하고, 우선 첫 번째 이야기를 아주 짧게 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별로 할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말이 좋아 유아성에 비롯한 추상적 세계에 대한 표현이지, 그냥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계의 세계를 화폭에 담아 놓은 느낌이었다. 그것도 제목도 없이 거의 무제로 벌려놓아서, 도무지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게다가 개중에 몇몇은 피카소와 친분이 있어서 그런지, 피카소의 ‘빨간 의자에 앉아 있는 여인의 누드’의 형상과 닮아 있는 그림이 아주 많았다. 물론, 그냥 딱 봐도 닮았다는 게 아니라, 어떤 그런 여인의 형상을 다소 과장되게 그린 선들이 호안 미로의 형상에서도 많이 보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목이 없어서 그게 대체 뭘 그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설령, 제목이 있던 몇몇 작품들은 ‘새’나 ‘여인’이란 제목을 달고 걸어놓았지만, 거기서 개인적으론 어떤 단상을 떠올릴만한 것은 없었다. 아마 이 부분은 그림에 대해 거의 문외한인 나 같은 사람의 경우 대다수 그렇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다만, 중간에 스페인의 유명한 건축가 ‘가우디를 위한 도안들’이란 작품들은 개인적으로 가우디의 건축물에 대한 인상이 남아 있어 비교해보는 재미는 있었다. 그렇지만 이 역시 내 개인의 어떤 단상을 끄집어내기엔 어려웠다. 때문에, 지금부터는 내 개인적인 단상과 연결된 두 번째 세 번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둘째로 내가 분류해놓은 ‘그림의 시적 형상화’에 대한 부분은 호안 미로의 개인적 견해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호안 미로는 그림과 시의 경계를 특별하게 두지 않고, 시가 글로써 어떤 형상화된 작업을 추구한다면, 그림은 어떤 선과 형태로써 형상화된 작업을 추구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전시회 중간에 보면 어떤 문자들 옆에 형상들이 나란히 붙어있는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처음엔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불어였다. 사실, 스페인 화가라 불어를 썼으리라 전혀 예상하지를 못했는데, 뜻밖에 불어여서 그나마 해석하면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 물론, 내 불어 실력이란 게 애초에도 없는데다 아주 녹슬어, 앱으로 깔아놓은 사전을 겨우겨우 찾아가며 해석해야 하는 실력이지만, 그래도 그 덕에 조금은 옆에 형상들과 문자들의 관계에 대해 유추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가 있었다. 그렇지만 이 역시 쉬운 작업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호안 미로의 경우 문자 자체도 그림으로 이해한 탓에 너무나 흘려 그려서 알아보기 힘든 문자도 많은데다, 또 바로 그 이유로 문자의 의미 자체보다는 문자의 형상에 초점을 맞추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어떤 단상의 단초는 얻을 수가 있었다. 그림이라는 형상의 시적 가능성에 대한 단상을. 하지만 만약 내가 호안 미로의 동양적 시도의 그림들을 보지 못했다면, 이 또한 단초란 의미 그대로 감겨있거나 헝클어진 실의 첫머리일 뿐이었을 것이다. 불이 붙여지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도 없고, 쓸데도 없는, 그래서 애초에 그랬듯이 혼돈의 형태로밖에 영영 남을 수 없는.

    

 

  호안 미로는 동양에서 서예를 하는 작업을 보고서 큰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중간에서부터 후반 마지막까지 그렇게 동서양을 아우르는 작품들이 대거 등장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동양의 서예와 많이 다른 것은 그 기법의 너저분함에 있다. 여기서 대다수가 느끼겠지만 이 말은 완전히 모순된다. 왜냐하면 동양의 서예란 무릇 여백을 담아내는 작업인 까닭이다. 즉, 완전히 깨끗하고 숭고하게 비어진 공간을 통해 담겨진 문자를 보여주는 작업이 동양의 서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웬 너저분함이란 말인가? 사실, 그림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이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이를 설명하기 위해 나는 다소 동양적 서예의 역에 대해 잠깐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앞에서 말한대로 동양의 서예는 여백이라는 완전무결한 빈 공간을 창조하는 작업이다. 그런데 호안 미로가 서양인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이해를 못했는지, 아니면 애초에 관념이 달랐는지, 호안 미로의 그림의 여백은 물감이 줄줄 흘러있고, 심지어는 여기저기 손바닥 자국까지 나타나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앞에서 말한 그대로 ‘너저분함’ 그 자체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러한 ‘너저분함’이 동양의 서예를 보고서 탄생할 수 있었을까? 그것도 가장 세밀하고 정밀하게 무언가를 표현한다는 일본의 서풍을 보고서. 사실, 이 부분에 대해 내가 알 수 있는 길도 없고, 설명할 수 있는 바도 전혀 없다. 때문에, 질문을 내 개인적 투영으로 바꾸어보고자 한다. 어떻게 ‘너저분함’이 여백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왜 이제까지 ‘너저분함’을 여백으로 이해하지 못한 걸까?

    

 

  우선, 위의 질문을 던지기 위해 내 개인적인 여백에 대한 이해에 대해 잠깐 밝히려 한다. 사실, 여백이란 단어를 떠올리기 전 내가 먼저 거쳐 간 단어는 ‘길 옆’이란 단어였다. 그리고 그 시작은 스무 살 때 혼자만의 여행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무작정 혼자 걸으면서 무언가 인생의 커다란 질문에 대해 생각하고, 깨달아 보려 했다. 그런데 그냥 걷는데, 어떻게 무언가가 막 떠오르고 심지어 해결되기까지 하겠는가? 다만, 무식하게 부산까지 걸으니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만은 알게 되었다. 정작 보름간 길을 걸었지만 그때까지 내가 본 것은 ‘길’이 아니라 ‘길 옆’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사실은 ‘길’을 존재케 하는 것은 ‘길’이 아닌 ‘길 옆’이란 사색을 해볼 수가 있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여백에 대한 집착이 생겨났다. 온전하게 옆자리에 비어 있음으로 문자와 그림들을 더 온전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여백이란 미, 아마 이 부분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영향으로 동양화를 자연스레 많이 접한 이유가 작용했을 것이다. 여하튼 그래서 여백에 집착하기 시작했는데, 이게 말이 좋아 여백이지, 정말 뜬구름 잡는 소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너무 고결하고 온전해서 다가서고 이해하기 힘들었다고 표현하면 좋을까? 때문에, 내게 있어 여백은 곧 허무덩어리로 전락해버렸고, 더 이상 다가설 수 없는 자리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호안 미로의 여백의 너저분한 표현을 보고서, 왜 내가 여백을 그토록 고결하게만 생각했는지에 대한 스스로의 인식의 한계에 대해 성찰하게 된 것이다. 사실, 여백의 집착에 대한 단초가 되었던 내 개인적 여행에서 본 ‘길 옆’은 그렇게 고결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사람내 푸근하게 풍기는 시골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의 얼굴이었고, 혹은 길가를 진동하는 거름내였다. 그런데 어찌돼먹은 내 관념이란 놈은 그런 것은 싹 잊어버리고, 모든 것을 고상하고 이상적으로만 포장하려고 하였는지, 지금에 와선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사실, 너저분한 것은 너저분한 것이고, 그렇다 해서 그것이 더럽거나 추한 것이 아닌 것을. 왜 모든 것을 극단으로만 추구하려 들었던 것일까? 물론, 호안 미로의 경우 나와 같은 사유의 경로를 통해 그러한 그림들을 그렸던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림의 시적 형상화라는 궁극적인 지점에서 바라봤을 때, 호안 미로에게 있어 굳이 여백이 동양의 서예나 그림처럼 완전무결하게 비어 있을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즉, 아마도 그는 즉물적으로 여백이란 공간을 해석함으로써, 여백의 너저분함과 모순들을 자연스럽게 표현했으리라 본다. 그리고 시란 결국 그러한 즉물적인 해석이거나 표현이라고 본다면, 그가 추구한 선과 모형의 시적 형상화는 분명 시라 말해도 좋은 것은 아닌지 잠깐 생각해보며, 동시에 나도 그러한 시를 꿈꿔보며, 전시회 다녀온 소감을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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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우산의 꿈

 

 

아직도 설운 추위 다 가시지 않은

3月의 초 봄날

꽃샘추위보다 더 꽃 센 바람에

샛노란 우산 하나 두둥실

사무실 창가 맞은편 나무 위에

자리를 틀었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나뭇가지 위 우산 내려앉지 않고

샛노란 빛깔이 잿빛 되어 녹빛 되어

어느 5月의 푸르른 날 아무 빛 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그토록 바라던 푸른 나무가 되는 꿈

이루어 두둥실 하늘로 올라간 걸까요?

아니면 그대로 나뭇가지가 되어

나무와 함께 대지에 뿌리내린 걸까요?

그러나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냥 어느 무심한 바람결에 떨어져

쓰레기통에 처박혀버렸을

구깃하고 꾀죄죄한 노란 우산의 꿈을.

하지만 시는 모든 이룰 수 없는

꿈의 노랫말이며

쓰레기통속에서도 푸르게 피어나야할

한 줄기 나뭇가지에 대한

덧없는 희망의 미련이거나 음률이기에

아직도 저는 눈감고

당신의 노란 꿈을 가만히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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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관한 아름다운 직유법

 

 

지금부터 사랑에 관한 아름다운

직유법을 말해보려 합니다.

첫사랑을 흔히 눈과 같다합니다.

아직 유년의 나뭇가지에

헐겁게 매달린 잎사귀들이

다 떨궈져

겨울을 맞을 준비를 하기도 전

흩날리며 내려와 지면에 닿지도 못하고

사라져 버리거나

너무 아득한 창공에서 녹아져

바라볼 수도 없을 테니까요.

때로는 걷잡을 수 없는 눈발들이 쌓여

우리는 아.름.답.다.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발길에 밟혀진 눈발의

구정물 같은 눈물과 빗물에 뒤섞여 내린

진눈개비 같은 사랑이

우리들 대부분의 첫사랑과 닮은꼴이겠지요.

누군가는 그래도 어느 먼 산

누구에게도 밟히지 않고 소복이 쌓여있을

눈밭의 설원을 이야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그 설원의 눈밭에

첫 발자국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 긴 겨울을 이겨낸

봄의 꽃들로 사랑에 관한 노래를 합니다.

연두 빛 분홍 빛 샛노란 빛깔들로 빚어진

총 천연의 사랑에 관한 빛깔을 노래합니다.

그렇지만 채 한 달이 되기도 전

떨어지는 꽃잎을 보며

우리는 사랑하는 이의 발길에 흩뿌려지는

꽃노래를 부릅니다.

가시는 걸음마다 사뿐히 지르밟으시라고

짓물러진 꽃잎의 노래를 부릅니다.

혹은 무겁게 떨어지는 한 잎의 꽃잎이거나

나중에 떨어지는 꽃잎의 생경한 풍경을

노래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도 보지 못한 누구도 보지 못할

꽃잎에 관한 사랑의 노래를 말이지요.

그러나 어쩌면 사랑은 짓물러진 꽃잎

그 자체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음을 알기에

죽도록 매달리지 아니하고 나락하여

밟히고 문드러진 어느 여인의

깊은 음부 같은

그리고 그 곁에 누구도 모르게

부러져 꽂혀있는 꽃줄기 같은

어느 당신의 성기일기도

그런 것이 사랑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라.고.요? 전.혀. 아.름.답.지. 않.다.고.요?

그럼 당신의 사랑에 관한 직유법을 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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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지어

 

 

전철 역 출구 앞에

허름한 외투를 걸친

할머니 한 분이

노오란 꽃을 팔고 있어요.

아무렇게나 자른 듯한

박스 위로 두껍게

‘프리지아’라고 써놓았어요.

프리지아, 발음이 예뻐서

자꾸 불러보게 되어요.

티 하나 없이 샛노란

그 환한 모습이 떠올라

자꾸 웃음지어 보여요.

어쩌면 그늘 하나 없는

순결한 당신을 닮아

자꾸 떠올리나 봐요.

어쩌면 깨끗한 향기가

당신의 체취와 비슷해

자꾸 생각나나 봐요.

프리지아, ‘아’ 발음이 예뻐요.

‘아’하고 신음하며 경탄하는

당신을 자꾸 떠올리게 되요.

프리지어, ‘어’ 발음이 싫어요.

‘어’하고 그냥 수긍하고

뒤돌아선 나 같아서 답답해요.

그냥 당신을 프리지어가 아닌

프리지아라 기억 할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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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시인이라면



만약에 그대가 진정 시인이라면

매일 동네 어귀에 트럭 한 대 대놓고서

20년 동안 한결같이 회를 팔아온 아저씨의

파닥파닥 물차 오르는 생선 대가리에

탕탕 칼을 쏘고 쓱싹쓱싹 배 가르는 소리를

시에 담아

다리에 실금이 가 입원한 어느 어머님의

못난 아들을 위해 따뜻한 밥 한 끼

차려주고 싶은 마음으로 몰래 병원에서 나와

둔탁둔탁 걸어오는 석고붕대의 저린 발자국 소리에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고

영원히 가 닿을 수 없는 타인인 그대와 나의

엷디엷은 층층 사이사이에 긴 다리를 놓아

그대와 나의 체온 사이로 영혼의 습도를 녹여서

겨울에 성에 낀 버스 창가에 그대 입김으로

한여름 하염없이 창밖에 뛰어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깊은 한 숨을 내쉬는 어느 아픈 소년의 숨결을 섞어

시를 적어 놓을 수 있을 텐데

만약에 그대가 진정 시인이라면

그렇게 세상의 모든 고통의 멍에와 슬픔의 결들 사이에서

한 마리 날아오르는 새가 되어 꿈이 되어

차창 밖 갇혀버린 풍경들 속에 풍경화가 되어버린

우리들의 잃어버린 표정들을 환하게 비추어

되살려 놓을 수 있을 텐데

우리가 모르게 흥얼거리는 못다한 노래들을 

한 없이 부르게 할 수 있을 텐데

 

그대가 진정 시인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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