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비오는 날에 일기



창밖엔 비가 내리고

너저분한 고물상에 종이들은

젖어 무게를 더해가고

고장 난 레코드판에서

덜컥거리며 나올 법한

러시아 노래를 듣다

200원짜리 자판기 커피에

담배 한 개비를 물고서

알 수 없는 상념에 빠져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한다.

다시 삶에 대해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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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안에 그녀



깊이를 잴 수 없는 파아란 바다 속

푸른 산호초를 보고 싶다고

어느 깊고 푸른 밤

차갑고 푸른 아이섀도 짙게 바르고선

파아랗게 풀려버린 그녀

푸르고 싱싱하게 반짝거리는 별처럼

바다 위를 떠돌다

파아랗게 질려

하얗게 푸른 파도 거품처럼

해변에 가닿지 못하고 둥둥, 둥둥

뿌옇게 푸른 저녁노을처럼

바다에 저물지 못하고 둥둥, 둥둥

내 안에 시퍼렇게 멍들어버린

푸른 그녀의 퍼어런 젊음

퍼어런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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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선화물들이다

 

 

내 너를 탐한 것은

꺾을 수 없던 까닭일까?

소름끼치도록 어여쁜 자태로

나려진 너의 나락에

신음 같은 긴 읊이

경탄이 되어 울려 퍼지다

읊조림이 되어 넋두리가 되어

묻혀 지고

다시 피고 질 네 죽음을

시샘하여 손끝 닿은 곳곳

한 자락 한 자락 으깨지어

물들어 간다

연붉은 자죽 곱게 빻아져

상처의 흔적도 없이

시리게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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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내리는 날에 Fantasy

 

 

아직 동 터 오르기 전 고요한 미명에

문득 내 하잘것없던 시들이 생의 양식이었다던

그대의 이름을 나지막이 읊조려 본다.

무거운 공기가 차분하게 바닥으로 가라앉고

생 흙먼지 냄새가 예민한 코끝을 간질인다.

아무런 생의 기미를 눈치 챌 수 없던 시절

그대와 함께 걷던 이 거리를 가로지르며

나는 천천히 어두컴컴한 지하로 들어선다.

자동차 배기가스가 배인 뿌연 벽, 찌든 탁자

10년 지나도록 바뀌지 않은 낡은 기기, 낡은 사람들......

이곳의 것들은 모두가 너무 오래되고 낡아버렸다.

비가 오려는 날이면 어디가 쑤신 노인들은

마디마디마다 온통 시리다며 불평을 토해내고

종일 킁킁거리던 내 코는 하나씩, 하나씩

성마른 잎사귀 같은 말라비틀어진 코털들을

하얀 휴지조각 아래 풀어낸다.

그리고 이젠 너무 푸석해진 그대는 더 이상

그 어떤 생의 기미에도 관심이 없는 듯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고, 그렇게 생에 파묻혀

우리가 그 시절 서로에게 단단히 약속했던 것처럼

더 이상 서로에게서 고통스럽지 아니하며

더 이상 그 많던 헛된 열망들로 우리 스스로를

소비하거나, 증오하지 아니하고

더 이상 서로를 그리워하지도 않지만

나는 이 곳, 낡고 오래된 기억들을 등지고

멀리 그대를 떠나갈 것이다.

툭, 툭, 툭,

살금살금 비가 내리고

생 흙먼지 냄새를 씻겨내고

가지가지마다 방울지고

거리거리마다 스며들고

언젠가 그대와 함께 걷던 그 거리에

꽃들이 피어나고 다시 꽃들이 만발하고

오직 새 하얀 꽃들만 온통 흐드러질 때

그대도 사라지고

그대와 함께 꿈꾸었던 나도 사라지고

그 헤아릴 수 없던 우리의 노래도 시도 사라지고

그 무엇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새 하얀 꽃들만 온통 흐드러질 때

그대를 등지고 떠나가는 그 걸음으로

문득 나는 내 보잘것없던 시를 사랑했던

그대의 이름을 나지막이 읊조려 볼 것이다.

그렇게 멀리 그대를 떠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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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밭에 허수아비

 

 

듬성듬성 푸른 하늘

샛노랗게 말라비틀어진 밀밭에

황량한 바람이 지나치고

검게 하늘을 물들였던 까마귀

더 이상 훔쳐 먹을 것이 없다고

더 이상 벗겨먹을 한 터럭

남아 있지 않다고

멀리 머얼리

날아가 버린다.

 

하늘 끝 검게 물들어

선홍빛 노을 지평선 밑으로

가라 앉는다.

 

그래! 모두 떠나가 버려라!

그러나 여기 썩어 문드러질 몸뚱이 하나

남겨두고서 떠나가 버리면

이 권태로운 긴 밤

나는 대체 어찌 잠들란 말이냐?

 

칠흑 같이 어두운 밤

내 살을 갉아대던 까마귀 닮은

서늘한 바람

까악까악 우짖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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