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



언제나 전 당신께로 서서히 밀려 들어가

철썩 미끄러져 내리고만 싶습니다.

비록 당신이 한 개 바위처럼 단단하여

그 누구도 꿰뚫을 수 없다 하여도

비록 내가 하얀 거품처럼 연약하여

쉽게 침잠해버릴 수밖에 없다 하여도

언제나 전 당신께로 서서히 밀려들어가

철썩 부서져 내리고만 싶습니다.

비록 변덕스럽고 매정한 바람이

어디로 데려갈 지 알 순 없지만

비록 내가 하늘 위의 새처럼

자유로이 나래를 펼칠 순 없지만

언제나 전 당신께로 서서히 밀려들어가

철썩 허물어져 내리고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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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를 꿈꾸다



서쪽 멀리 먼 나라

여기저기에 테러가 발생했단다.

순간 입가에 드리운 교활한 미소가

동쪽 나라 사람들 피에 흐르는

콤플렉스처럼 번져가고

힘으로 이루어낸 평화의 상징에

들이받은 배후세력처럼

수많은 죽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슴이 뛰고 있었다.


강 건너 남쪽 동네에선

고급 백화점이 무너진 적이 있었단다.

여기저기 평화에 굶주렸던 열망들이

암울한 시대의 징조로 되살아난 영웅들에

온갖 뉴스로 난사되어질 때

북쪽 동네에 사는 내 궁핍함은

옹졸하고 한 많은 기도로

전복을 꿈꾸는 찌든 아이처럼

모두를 경멸하고 있었다.


이마 위 살짝 번진 미열이

새어나갈 곳을 찾지 못하고

배꼽 한 치 아래 불거진

구멍을 뚫고서 폭발하고 싶단다.

여기저기 비릿한 조명 아래 늘어선

여신들의 자태를 일그러뜨리고

돋아나는 음울처럼

거세된 애욕들이

서쪽 나라와의 거리 때문에

남쪽 동네와의 차이 때문에

소외된 육체의 두려움 때문에

허공에 적을 두지 못하고

테러를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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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봄날에 설움



봄날에 바람이 불어와

엷은 셔츠 사이로

시리게 스미어 든다.


햇발에 마주선

따스한 돌담에 기대어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눈물을 머금는다.


섞이지 못하고 한 가득

그렇게 시리도록

그렇게 따스하게


손 끝 하나 댄

그 한마디만으로도

터져버릴 듯

움츠려 눈물을 삼키우려다




2. 아스팔트에 핀 꽃



왜 이곳에 피어나

또 나를 슬프게 하는가?

찬연히 흐드러진

하이얀 꽃잎

붉게 젖어

썩어지는 그 자태

나는 보지 못했네.

바람을 기다리는가?

어느 하늘가에 닿아

검게 물들려

흔들리고만 있나?

차라리 내 발에 밟히어

짓뭉개 지려나?




3. 침묵의 이유



어느 무심한 돌담

여기저기 꽃송이 몇 개

어느새 피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또

슬퍼집니다.


이제 깊은 침묵에 잠겨

감은 두 눈 사이로

스며든 햇발에

나도 모르게

잠들 수도 있겠지만


당신은

볼수록 그리운 존재입니다.

다가서면 두려운

내 마음 때문에

시가 되어버린 당신을 위해

바람이 세차게 불 그날까지

이제 다시 침묵에 잠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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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켜는 밤



한량없이 비가 내리는 새벽녘이면

온종일 나른한 몸뚱이 흠뻑 적셔

거리를 나뒹굴며 환성을 내지르고 싶지만

축축이 젖은 옷가지를 빨며 눈물을 짜낼

어머니, 당신이 문득 생각이 나

어느 처마 밑에 힘없이 웅크려

비가 그치길 기다려봅니다.

그러나 어머니! 비가 너무 많이 내려요.

그리고 집은 너무 멀어 보이지가 않아요.

애매히 태우는 담배 한 개비

다 타들어가지 못하고 젖어

바닥에 그대로 곤두박질치고 싶지만

다시 집나간 아들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며

아직 불빛을 차단하지 않을

어머니, 당신이 문득 생각이 나

비 사이로 내달려봅니다.

그러나 어머니! 옷이 너무 많이 젖었어요.

그리고 너무 밝은 형광등이 무서워요.

서성이는 걸음으로 되돌아서며

어머니, 당신께 마지막 기도를 올려봅니다.


어머니! 비가 오는 날이면 촛불을 켜두세요.

무겁게 젖은 옷가지가

밤새 말라 불살라질 수 있도록

뚝뚝 떨구어지는 촛농이

당신의 눈물을 대신해 흘러내릴 수 있도록

어머니! 제발 마지막 촛불은 꺼뜨리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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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내내 맺혀있던 코를 푼다.

정액 같은 콧물이 물속에서

방황을 한다.

들끓어 오르는 가래침을 뱉는다.

정액 같은 점액질이 물속에서

침식해 간다.

-왜 정액 같은 그네들이 아름답지 않은가?

아직 한 번도 생명을 잉태하지 못한 

영롱한 빛깔은 누렇게 곪아 사라지는 

허공의 신비

한껏 물먹은 네 육체에 멍울처럼 스민

죽은 생명의 관음하는 

몸부림들

네 손에서 정액 냄새가 난다.  

네 입술은 언제나 하얗게

소름끼쳐 있다.

너를 입맞춘 이빨을 닦는다.

하얗게 뻐끔거리는 거품들에서

시린 향기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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