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나리



한 겨우내

너의 샛노란 빛은

유치한 것이라고

오직 투명하게

만발한 눈만이

진정 꽃 되는 빛이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건만,

아직 피어나지도 못한

네 마른 가지가

햇발에 반짝 거리며

설운 봄바람에 흔들릴 적에

나 그토록 외로워

너를 그리고 있었음을

그만 실소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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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와의 거리



푸른 원피스를 입고서

다소곳이 두 손 모아

옆 자리에 잠들어 있는

그녀와의 거리는 정확하게

달콤한 대기의 기운이

촉각으로 스쳐지나갈 만큼의

미묘한 간격


발뒤축부터 저려오는

긴장의 끈들을

여체의 능선으로 견뎌내다

발작적인 소름이 끼친

눈동자로 잠이 깨면

내 숨결 안으로 미끄러지는

머리 자올 하나 사이


버거운 관음의 시선

숨겨두고서 가만히 가 닿아

어깨에 얹혀 놓고 싶어도

완전한 타인으로 태어난

무거운 머리를

남겨두고서 떠나는

정거장에서의 미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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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 그 씁쓸함에 관하여



단단한 얼음집 지어 놓고

시뻘겋게 타오른 숯덩이

삼키우라고


천천히 녹아질 방울들

찬바람에 식혀

견디웁고

투명한 햇빛 내리 쬐

꽃잎 피어날 제

무너져 내리라고


두둥실 떠나려 가는

꽃잎처럼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게

사라져 버리라고

날개 잃고 다리도 없는

작은 새처럼

벼랑 위에 서서

바람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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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부활



사람에게는 일곱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호흡할 수 있지만

혼돈에게는 구멍이 없어

일곱 개의 구멍을 뚫으니

칠일 만에 죽고 말았다는

혼돈의 전설이 못내 사무쳐

가슴속 미세한 모공을 열어젖혀

한가득 들이킨 바람으로

구멍과 구멍을 합치고

또 구멍과 구멍을 합쳐서

이제 커다란 한 구멍이 되어

사라지려 사라질 때에

끝내 사라지지 못하고

여전히 바람을 느끼는

구멍과 구멍 사이, 바깥 허공의

희미한 경계

-이제 나는 아무런 구멍도 없이

살아있는 하나의 커다란 구멍 같은

혼돈이 되어

보고 듣고 먹고 호흡할지니

이제 내게 더 이상 그 누구도

그대들의 밑 모를 블랙홀 같은

목마른 구멍들을 짐 지우기 말기를

나의 매장을 통한

그대들의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질서의 음모들을 꿈꾸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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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타



눈 멀지 않았어도

커다란 어둠 속 촉각

세밀한 그림 만져내는 법

배워

소리 낼 수 있어도

소리 내지 않는 말들

그대 빚어내는 법

배워

단지 그대라는 이유로

눈 멀어 귀 멀어

버둥거리는 몸뚱이

긴 늪에서 헤엄하는 법

배워

절망을 모르는 어설픈 자맥질

낯설어 떠오를 줄 모르고

나락해가는 날들


그대 날 이대로

슬프게 내버려 두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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