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당 (무선) - 개정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9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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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카버의 소설과 작법 -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대성당>이란 작품의 자자한 명성 때문에 이전부터 읽어보고 싶던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을 이 번 기회에 읽을 수 있게 되어 처음부터 나는 매우 기대가 컸다. 아마도 제목에서 오는 아우라와 더불어 얼핏 들었던 마지막 장면에 대한 인상이 내게 크게 각인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자자했던 명성의 <대성당>을 구입하여, 첫 장을 읽어 내려가는 순간부터, 기묘한 예감에 휩싸였다. 왠지 이 작가의 작품이 내가 기대했던 바와는 달리, 별 것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었다. 그리고 사실, 지금 그의 <제발 조용히 좀 해요>,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까지 포함하여 대부분의 작품을 읽은 지금, 애석하게도 나는 나의 그 첫 예감이 적중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물론, 그 숱한 작품 가운데 인상에 남았던 작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성당>을 포함하여 몇 작품은 내게 어떤 여운 비슷한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그의 간결하면서도 디테일한 묘사 가운데 풍겨오는 현대적인 감각에서 내게 부족한 무언가가 있음 또한 발견하게 되었다. 그런데 뭐랄까... 이건 정말 하루키의 단편을 접했을 때 느낌과 흡사하다. 소년의 감성으로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를 읽고 그 여운에 한껏 취해 기대했던 하루키의 작품들은 내 기대를 무참히 산산조각 내버렸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물론 10년이 훨씬 넘게 지난 지금, 그리고 그 동안 단 한 편의 하루키 작품도 읽지 않은 내가 하루키에 대해 말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그러하기에 그저 지금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그 오래된 기억의 편린일 따름이다. 아니, 어쩌면 그 때문에 내가 지금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레이먼드 카버일 것이다.

 

 

  먼저, 그가 이야기하는 문장의 간결성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싶다. 사실, 이 부분에 관해선 딱히 할 말이 없다. 아마 작가라면 누구라도 문장을 간결하게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을 테니까... 그렇지만 한 작품 내에서 간결한 문장과 길게 늘어지는 문장의 배치를 구사하는 것은 작가적인 선택의 자유이다. 동시에 그러한 이유로 어떤 문장에 관해 기호를 가지는 것은 또한 독자의 선택의 자유이다. 만약에 간결한 문장만으로 이루어진 소설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는 두 가지 점 정도를 반영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는 작가들이 더 이상 만연체나, 화려체에 대한 집착을 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어떤 측면에서 분명 긍정적인 기능으로 작용할지는 모르겠지만, 사상에 대한 집착이라든가,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에 대한 회의가 만연하다는 반증이라고 내 개인적으론 분석해 본다. 둘째로, 대중의 집중력에 대한 부재를 의미하게 될 것이다. 물론, 작가는 실험적이고 어려운 작품으로 대중을 소외시켜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러한 작품들의 추구를 중단해서도 안 된다. 우리에게 지금은 대문호라고 일컬어지지만, 니체나 도스토예프스키, 카프카 등이 만약 그들의 문체와 정신을 글을 통해 실험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근대의 정신적인 풍요에 대한 역작용으로 나타난 오늘날의 정신적인 것들에 대한 평가절하조차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즉, 문학이 그리고 예술이 그 정신적인 선도자 위치에 대한 자리를 스스로 포기해야할 아무런 까닭이 없는 것이다. 물론, 쉬운 것을 추구하는 대중에 발맞추어야 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겠지만, 동시에 그러한 대중의 기호를 끌어올려야 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다.

 

 

  두 번째 이야기는 위의 이야기에 연장성상으로 묘사에 대한 중요성에 관한 부분이다. 하루키의 단편은 이제 거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카버의 경우 서두가 간결하면서도 세세한 묘사를 축으로 이루고 있다. 아니, 내 개인적으론 소설의 절정에서 결론까지, 거의 전반적으로 묘사를 축으로 두고 있지 않나 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런데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던 거 같다. 카버의 소설이 묘사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음에도 눈에 생생하게 그려지지 않은 아이러니한 이유가. 물론, 이 말은 약간의 과장과 풍자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의 뼈는 존재한다. 왜 소설이 이렇게까지 묘사에 집착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 그리고 이렇게까지 현대소설이 묘사에 집착하는데 왜 영화에게 그 문화의 왕좌를 물려줄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의문 등등. 위의 두 의문은 분명 아이러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진실이다. 물론, 많은 소설들은 묘사를 통해 분위기를 자아내고, 어떤 복선과 암시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런데 현대소설, 특히 카버의 소설에서 그런 작품들은 많지가 않다. 그렇다고 어떤 <의미>에 천착한 것도 아니다. 때론 왜 이런 소설을 썼을까, 하는 의문을 충분히 줄 만큼 아무도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어떤 사건과 정황에 대한 묘사로만 끝난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사건과 정황이 카프카 식으로 어떤 현대적 우화의 감각을 띠었는가, 하고 곰곰이 생각해 봐도, 난 그 연결고리를 쉽게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왜 묘사에 천착하는 것일까?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어서 소설의 축으로 삼은 것일까? 재차, 삼차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의미>에 관한 부분이다. 개인적으로 의미에 천착하는 성향이 있지만, 동시에 그런 이유로 소설이 의미에 천착할 까닭은 없다고 믿고 있다. 왜냐하면 소설이란 것이 앞에서 말한 단순히 사건과 정황에 대한 묘사로 끝나는 것도 안 될 상황이겠지만, 의미를 캐기 위한 수단과 도구가 되어서도 안 되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즉, 소설은 어떤 사건에 대한 기록일지도 아니고, 어떤 의미의 설파를 위한 선전도구도 아니라는 믿음이다. 그런데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는 소설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여야만 할까? 어떤 의미에서든, <의미>라는 이면을 가지고 있는 언어가, 그리고 그 언어작업의 결정판인 소설이 <의미>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은... 뭐랄까... 마치 내게는 소설의 궁극인 시와 소설이 합일된 작업처럼만 느껴진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존재 불가능한, 존재한다면 그러한 이상 속에서만 가능한 작업처럼 느껴진다. 물론, 이것은 지극히 내 개인적인 견해일 따름이다. 누구도 시와 소설이 합일되는 따위의 이상을 가지고 있지 않고, 또 그래야할 까닭도 없다. 하지만 이런 지극히 개인적인 믿음 때문에, 의미에 대해 자유로운 소설에 대해 나는 쉽사리 인정할 수가 없다. 그것은 매양 소설을 추구한 어떤 기록일지일 뿐이다.

 

 

  빙빙 돌아갔던 이야기를 정리하고 싶다. 앞에서 말한 대로 카버의 소설이 그렇게 간결하기만 하고, 묘사만 추구하는, 아무 의미 없는 기록일지라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그렇지만 그의 많은 소설이 그런 경향을 띠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느껴진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 또한 하나의 경향이고, 하나의 글쓰기일 것이다. 하지만 의미라고 표현하기엔 한정적인 정신적인 무엇과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하기엔 무리가 따르는 시적인 무언가를 이상으로 추구하는 내 개인으로선, 그의 소설의 경향과 작법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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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조네 사람들 김소진 문학전집 1
김소진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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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조네 사람들 - 똥뚯간에서 반짝이는 별 이야기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다는 속담이 있다. 아마도 이러한 속담이 나오게 된 그 저변은 무언가 기대치가 높을 때 그 기대만큼 채워지지 않는 우리들의 심리 때문일 것이다. 사실, ‘장석조네 사람들’의 경우, 예전부터 많이 들어오던 작품이라 내게도 이러한 기대치가 작용했다. 그리고 다행히도, 이 작품에게서 만큼은 이 속담이 내게 적용되지 않았다. 그만큼 읽는 재미가 쏠쏠하였고, 아직 이 작품을 되새기기엔 이른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무언가 가슴 속에 남는 작품이었던 거 같다. 뭐랄까... 걸지게 한 판 놀아재낀 기분이라고 하면 맞을까? 그러면서도 가슴 한 편에서 짠하게 남아 있는 여운은 우리네 특유의 해학과 설움이 곁들어진 마당놀이라도 본 기분마저 들게 한다.

 

 

  자기보다 곱절은 어린 성금 어매를 얻어 전전긍긍 눈치 보며 살아가는 오영감, 흑산도에서 논다니를 하던 여자를 들어앉혀 놓고 의처증에 걸린 겐짱 형제, 똥을 푸며 살고 있는 광수 애비와 비운의 육손이 광수형, 왕년에 갱도에서 광부로 일하던 폐병쟁이 진씨, 노름에 빠져 허망하게 돼지꿈을 날린 양씨, 반병신이 된 남편과 함께 살고 있는 쌍과부집 택이 엄마, 양공주 딸내미 때문에 코쟁이 사위를 맞이할 수밖에 없는 욕쟁이 함경도 아즈망, 일찍 지아비를 여읜 며느리와 함께 사는 길노인 그리고 양은 장수 끝방 최씨와 나주댁까지, 장석조네 아홉 집 식솔들의 이야기는 집안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변소에 아침이면 줄줄이 서서 기찻길을 만드는 우스꽝스런 풍경처럼 체면과 비위를 따지지 않는 원초적이고 진솔한 이야기이다. 그러하기에 어떤 의미에서 이 소설을 꿰뚫는 무언가를 발견하는 일은 전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변소라는 본능적인 장소 앞에선 누구나 각자 나름의 치열한 이유가 있고, 급박한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혹자는 이야기한다. 얘들 먼저 변소에 보내야 한다고. 그렇지만 아이들은 학교에 가면 더 깨끗하고 정돈된 변소를 사용할 수 있다. 그러하기에 지저분하고 더러운 변소는 어른들의 몫이면 족할 일이다. 즉, 그들의 시대로 끝을 맺어야 하는 바로 변소 같은 그렇고 그런 이야기가 장석조네 사람들 이야기인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변소 같이 더럽고 추접한 삶이라고 해도 꿈도 없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여기에도 다른 하늘과 마찬가지로 나름의 별이 뜨고, 별이 진다. 그리고 지금부터 나는 그 별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돌산 아래 채석장에서 채석장이 일을 하고 있는 박씨와 똥지게꾼 광수 애비 그리고 양은 장수 끝방 최씨가 모여, 나름의 사연을 갖고서 술 한 판을 벌인다. 박씨는 여름내 짬짬이 일군 무밭이 얘들 서리에 엉망이 되어 말짱 도루묵이 될까봐 전전긍긍하는 심정으로다, 최씨는 오영감네 성금 어매를 길쌈했을 때 품었던 흉금스러운 마음 때문에, 그리고 광수 애비는 장석조네 아랫집 갑석 아범네서 어수선하게 벌어지고 있는 굿판의 가짜 무당과 벌인 낯 뜨거운 정사와 밀약 때문에 무언가 켕기는 심정으로다 술을 마시고 있다. 그런데 이 게 일이 꼬일라믄 꼬인다고 그저 그 여편네와 다시 한 번 살갗이나 부빌 심산으로다 시키는 대로 한밤에 택이네에 몰래 사람 모양의 제웅을 파묻은 건데, 그걸로다 이 여편네가 지가 무신 영험한 신이라도 씐 양 무당 행세를 하는 것이다. 거기다 굿을 한답시고 그 집안사람들 몽땅 바깥으로 물리고선, 쇠붙이들을 모아 이불에 덮어두라고 하더니, 돈 되는 건 죄다 들고 튀어버린 게 아닌가! 그런데 요거일랑 상황이 매우 재미있다. 보통 다른 소설 같으면 여기서 켕기는 게 많은 광수 애비가 제 몸 하나 집어넣기 힘든 쥐구멍에 긴 꼬랑지랑 늘어뜨리고 숨던가, 가타부타 다른 상황이 주어져야 하는데, 되레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 게 아닌가! 그것도 전혀 켕기는 거 없는 사람만치로. 이쯤이면 남사시럽기라도 해야 할 텐데... 한 술 더 떠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별을 안주삼아 이바구를 까대는 것이다. 그것도 하나 남부끄러울 거 없는 박씨는 그저 무수한 별을 헤아리며 감탄만 할 뿐인데, 이 잡것들 같은 두 인사는 여기다 개똥철학까지 덧입히는 꼴이 제깐엔 여간 시답다. 양은 장수 최씨는 별은 자기 쟁개비들이라믄서 지가 물건 하나를 팔아도 그게 시시껍절하게 파는 게 아니라, 솥아! 국자야! 잘 가그래이, 가서 그 집 살림살이 본때 있게 빛내거라고 빌고 또 빈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파는 쟁개비들은 모두 그냥 국자나 솥이 아니라 오롯이 빛나는 별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한 술 더 보태서, 똥지게꾼 광수 애비는 별을 똥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거름으로 뿌린 똥을 먹고 자란 배추랑 무들이 밤새, 별이 내린 이슬을 먹고, 바람을 먹어가며 물이 차오르는데, 그런 별의 선물을 먹고 우린 또 똥을 누니까 별이 똥이라고 박박 우겨대는 것이다. 참 기가 찰 노릇이다. 그렇지만 그 밤 아이러니하게도 하늘에서 별똥 같은 별똥별이 떨어지고, 이에 셋은 기분이 달떠, 누구랄 거 없이 함성을 내지르며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이쯤 되면, 아마 이 소설이 이야기하고 싶은 바를 대강은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우리네 오만군상들이 각자 하나쯤은 숨기고 싶은 더러운 똥둣간 같은 이야기들을 품고 살지만, 여기선 그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찍찍 휘갈겨 쌓은 똥들이 이곳에선 별이 되어 하늘에서 총총거리며 되살아나는 까닭이다. 사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그 숱한 별들을 다 헤아릴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수많은 별들은 우리들이 찍찍 갈겨놓은 똥인 동시에 우리들에게 되돌아온 별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사실, 헤아린다 하여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 숱한 사연들을 다 모른다고 해도 누구도 탓할 이유는 없다. 그렇지만 유독 별이 총총히 빛나는 밤, 왠지 모르게 달떠오는 우리네 심정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 별에 환히 내비쳐진 자신의 사연들이 그 수많은 별들 중 하나 밖에 지나지 않는 실은, 그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에 왠지 모르게 위안을 얻는 까닭이 아닐까? 그러니 누가 돈을 갖고 튀고, 흉금스러운 마음을 품었다고 하여, 문제가 될 이유는 별로 없다. 오히려 그러한 사연들은 이곳에선 별처럼 반짝거리고 달떠 오른다. 비록 그것이 씻을 수 없는 것이라도 그 밤 그 순간만큼은 별똥 같은 별똥별이 되어 사라져갈 것이다. 그러면 그 밤 우리는 아무 이유도 없이 좋아서 거리를 내질러 보는 것이다. 비록 다음날이면 다시 그 아름다웠던 별똥별이 그득한 똥뚯간에 기차 모냥으로다 전전긍긍하며 줄을 서겠지만, 그 날 그 순간만큼은 잠시 내려두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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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와 나 - 2012년 제36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영하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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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와 나 - 도발에 관한 변명 혹은 예찬

 

 

  2001년 신경숙의 부석사를 끝으로 이상문학상 작품집과 작별을 고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달리 무슨 이유가 있었던 거 같지는 않다. 그저 그 때 내 자신은 졸업이란 믿겨지지 않는 현실 때문에 당면한 내 문제들로 자기똬리를 틀기에도 버거웠다. 물론 일종의 한국문학에 대한 내 개인적 매너리즘이 작용했던 것도 분명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할 여유조차도 없이 지금까지 10년을 내 스스로의 문제에만 쫓겨 살아 온 것이 더 자명한 진실일 것이다. 그 때문인지 10년 만에 접한 이 번 이상문학집은 내게 매우 낯설고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일단 표지부터 전혀 눈에 익지 않았고, 안에 작품을 풀어 놓은 배열순서마저도 생경했다. 물론 이러한 방식이 올해부터 적용된 것이라면 나뿐아니라 모두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대상 수상작이 김영하였기에 이런 단순한 편집방식마저 내겐 이채롭게 느껴졌던 것 같다.

 

 

  김영하를 처음 접한 건, 내가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였다. 그러니까 김영하란 작가의 작품이 열풍처럼 문학계를 강타한 후, 그 열기가 조금은 식어있을 때였다. 모두가 그렇게 느꼈겠지만 그의 등장은 그 시대의 분위기와 함께 어느 정도 예견된 수순이었다. 운동권 문학에서 후일담 문학으로... 그리고 나서, 그 다음 대안은 그러한 문학의 시대에서 완전히 탈피하는 길밖엔 남아있지 않았다. 마침 시대 또한 모두 탈근대를 넘어서 탈현대를 부르짖고 있었던 차라, 한때 문화의 선두주자라 자부하던 문학에서 1996년이 되어서야 김영하 같은 작가가 나왔다는 사실은 조금 늦은 감이 없지 않았다. 물론 그 전에 조금은 돌연변이 같은 유하라든가,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그러한 작업을 시도해보려고 숱한 자맥질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에 잘 편승했으리라고 추정해보는 우리의 문학계는 그들 보기를 돌같이 하였던가, 혹은 돌같이 그들을 바라보았던 거 같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우리의 금강석과도 같이 단단한 문학계가 발칙한 김영하를 선택한 것일까? 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작품에 손을 들어준 것일까? 아니, 내가 전혀 모르는 문학계는 논외로 치고, 왜 우리 세대는 김영하에게 열광했던 것일까?

 

 

  비록 지금 나는 김영하란 작가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하고 있지만, 실은 그의 작품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는다. 내 개인이 추구하는 바와 너무나 방향이 다른데다, 그가 논지를 이끌어 내는 방식이 맘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늘 도발을 하기를 원한다. 그러하기에 그의 글은 전혀 진지하지 못하고, 현란한 현학들로 가득차 보일 때가 많다. 이번 작품에서 그의 표현을 빌자면, 주인공의 철학하는 친구가 섹스파트너에 대해 정의 내렸던 것처럼 무언가를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하는 것이 그가 그의 작품을 통해 보여주는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도발은 항상 대중에게 어필한다. 그런 이유로 그 다수의 대중의 하나인 나 또한 그의 작품에 쉽게 도발당하며, 유혹된다. 왜냐하면 그의 도발은 바로 앞서 표현한 것처럼 달콤한 소비라는 허상이기 때문이다. 여기엔 어떤 고매한 정신도 정치적 목적도 특별한 신념도 필요 없다. 아니, 존재하지 않는다. 실상을 더 적나라하게 파고들면, 그의 도발은 단순히 섹스어필할 뿐인데다, 거기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인해 자기 파괴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여기엔 또 교묘하게도 어떤 엑스터시가 존재한다. 어떻게 이런 발칙한 도발과 자기파괴 속에서 영적인 황홀경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번 그의 작품 ‘옥수수와 나’는 그러한 지점을 슬며시 독자에게 드러내고 있다.

 

 

  아마도 이 소설은 모르긴 몰라도, 매우 자전적인 작가 개인의 욕망이 투사된 소설이라고 여겨본다. 사실 그렇지 않더라도, 이미 글속에 ‘나’라는 인물이 그러한 욕망을 글속에서 ‘글쓰기’의 과정을 통해 그대로 투사하고 있다. 자신의 광적인 팬인 편집장의 절세미녀 부인과의 섹스는 이 소설에서의 이러한 지점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단순히 여기서 그의 욕망은 머물지 않고, 한 차원 더 나간다. 글쓰기란 관념을 통해 소설이란 가상의 공간 속에서 그는 끊임없이 발기하고, 그것을 매개로 여자와 끊임없이 섹스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가장 기이한 것은 열흘이란 기간 동안 그는 잠도 자지도 않고 그러한 행위를 반복하길 바라는 것이다. 그렇게 관념이란 또 다른 짐승의 냄새를 펄펄 풍기며 그의 여신이자 섹스심벌인 편집장의 아내와 질펀한 정사를 열흘 동안 벌인 후, 그는 깊은 잠속에 빠져들기를 꿈꾸는 것이다. 마치 다음에 펼쳐질 죽음의 위기를 예견하듯이. 하지만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아이러니하게도, 늘 되풀이되는 그의 이러한 자기 파괴적인 권리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는 소설 서두부터 자신은 더 이상 옥수수가 아니라고 항변하고 있다. 그런데 닭들과 새들이 자신이 옥수수라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여전히 옥수수란 말인가? 아니면 더 이상 아니란 말인가? 그의 도발은 이제 끝났단 말인가? 아니면 도발에 대한 변명을 하길 원하는 것일까?

 

 

  결국, 그가 서두부터 늘어놓은 옥수수 우화는 어떤 의미에서 자기파괴에 대한 철저한 변명이란 생각을 문득 해보게 된다. 왜냐하면 그가 꿈꾸는 도발과 파괴는 열흘간의 관념과 실제의 섹스를 오가며 맛본 엑스터시에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와 같은 엑스터시를 맛볼 수만 있다면 그는 더 이상 아무 미련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현실이다. 그냥 잠들면 모두 끝인 줄 알았는데, 그는 깨어나야 한다. 그리고 심지어 그의 광팬이자 여신의 남편인 총을 든 편집장과 마주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총을 든 인물이 그의 광팬이었을까? 그리고 왜 그의 부인과 그는 섹스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여기서 잠깐 떠올려보면 이 인물들이 실제 작가의 현실을 은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창작이란 작업을 통해 그것이 자기파괴가 되었든 혹은 엑스터시가 되었든, 일단락 지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미련하게도 독자는 그렇지 않다. 그것이 허상과 거짓 위에 쌓여진 모래성인 것을 까맣게 잊고서, 작가에게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총을 들이미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새 닭이 되어 당신은 옥수수여만 한다고 강요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그때부터 황홀하고 아름다웠던 자기파괴는 사라지고, 흉폭하고 잔학한 파괴만이 남겨지게 된다. 작가는 원하던 원하지 않던 결국, 독자가 강요한 약을 먹어야만 한다. 그리고 종국엔 파괴되어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그가 옥수수가 아니라고 부르짖더라도.

 

 

  이제 대충 이야기를 갈무리해야 할 거 같다. 이 번 김영하의 ‘옥수수와 나’는 그의 글쓰기에 대한 나름의 고뇌와 고백을 담은 소설이라고 말해야 할 거 같다. 비록 그 방식이 여전히 도발의 방식을 채택하고 있고, 심지어 비겁한 변명의 형식을 취하고 있을지라도, 여전히 자기 자신을 파괴할 권리를 주장함으로써 아직 끝나지 않은 그의 저항을 표명하고 싶은 건지도, 그렇게 독자를 저주하며 스스로를 예찬하고 싶은 건지도,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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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 회복하는 인간 Convalescence 바이링궐 에디션 한국 대표 소설 24
한강 지음, 전승희 옮김, K. E. 더핀 감수 / 도서출판 아시아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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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인간 - 무척이나 더디고 아린 공감이라는 회복에 대해

 

 

 

  요 근래 나는 한강이라는 작가의 작품을 제법 읽었다. ‘몽고반점’을 기점으로 해서 ‘여수의 사랑,’ ‘노랑무늬 영원’, 그리고 그녀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까지. 아직, 비록 ‘채식주의자’와 ‘붉은 꽃 이야기’ 등은 읽지 못했지만, 어느 정도 그녀의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 읽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기점은 앞에서도 이미 언급했듯이, 순전히 ‘몽고반점’ 때문이었다. 소소한 일상적 소재에서 성적인 에로티시즘과 예술적인 원시성의 연결고리를 찾고자 한 파격적이고 실험적인 그 소설을 통해, 어쩌면 소설을 일종의 관념적 실험의 가상공간으로 인식하고 있는 나는 한동안 쉬 지울 수 없는 카타르시스까지 느끼게 되었다. 그 때문에 한국소설 가운데서는, 어떤 스터디 모임에서 토론하기 위해 쓴 품평을 제외하고는, 거의 최초로 내 자의로 감흥에 못 이겨 품평을 쓰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녀의 소설 중 더욱 나를 잔잔하게 파고든 소설은 그다음 읽은 ‘회복하는 인간’이었다.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전혀, ‘몽고반점’과 다른 이 소설의 매력에 대해 뭐라고 서두를 꺼내면 좋을까? 아니, 지금 또 다른 의미로의 회복을 꿈꾸는 내게 있어서 이 ‘회복하는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또 있을까? 더 이상 치기어린 자학이 아닌 혹은 타인을 향해 풀어내는 내 응어리이거나 고름덩어리가 아닌, 어쩌면 무척이나 더디고 아린 공감이란 회복에 대해, 마흔을 정확하게 내일 앞둔 이 시점에서 잔잔히 가슴에 스며들도록 천천히 풀어낼 수 있을까?

 

 

  소설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에 앞서 잠깐 스무 살 때 내가 처음으로 썼던 소설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무척이나 치기어린 자학 그 자체이었기에 그 이유로 실체 없는 소설적 대상에게 무척이나 공격적이었던 그 소설에 대해. 그 때문에 어쩌면 내 가장 아린 치부이면서도, 동시에 여전히 버릴 수 없는 애착으로 남아있는 그 소설에 대해. 사실, 내 첫 소설에 대해 이야기할 거리는 별로 없다. 이야기라는 담화 그 자체도 부재한데다, 그 이유로 구성 또한 애초에 부재한 소설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소설이 담아내고 싶었던 내용은 간단하다. 내 순수한 욕망에 관한 이야기였다.

 

 

  어느 날 거리에서 잠든 ‘나’는 깨어나 보니 존재하지도 않는 ‘내’ 누이의 얼굴을 닮은 여자와 마주치게 된다. 그러면서 여자와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섹스를 시작한다. 그리고 ‘나’는 그 섹스를 통해 궁극적인 환희를 맛본다. 그렇지만 궁극적인 환희는 또 다른 섹스에 대한 욕망을 낳고, 또 다른 섹스는 지속될수록 자연스럽게 ‘권태’를 낳는다. 아니, ‘나’는 환희의 절정의 순간, 더 이상 절정이 지속될 수 없음을 예감하고, 여자를 찢어 죽인다. 다만, 여기서 소설이라는 무차별한 자유의 공간적 허용에 의해 ‘나’는 ‘자신’의 커다란 성기를 부풀려 여자의 몸을 꿰뚫어 버리는 설정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반으로 두 동강난 여자를 ‘나’는 부풀어진 성기만큼 가득찬 두 손의 아귀힘으로 갈가리 찢으며, 여자의 난자한 몸뚱이를 보게 된다. 그리고 그 끔찍함에 여자의 찢겨진 한 덩어리 한 덩어리 모두 꾸역꾸역 씹어 삼키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역겨움에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구토를 한다. 한 번, 두 번, 세 번... 수십 번의 구토를 통해 여자를 게워내보려 하지만, 아무리 해도 여자는 ‘내’게서 깨끗하게 게워내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구토를 하면 할수록, 여자는 더욱 ‘내’ 안에 가득차오를 뿐이다. 그 때문에 ‘나’는 이제 ‘자신’을 스스로 찢어발기기 시작한다. 다리를 찢어발기고, 몸을 찢어발기고, 얼굴을 찢어발기고, 찢어발기는 손을 찢어발기고, 마침내 ‘나’는 ‘자신’의 몸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래서 바람이 되고 싶은 마음에 바람이 된다. 그리고 마음껏 이곳저곳을 날아다닌다. 그러다 어느 냇가에서 헤엄치고 있는 한 소녀를 만나게 된다. 소녀는 이제까지 한 번도 남자를 경험해보지 못한 풋풋한 소녀 그 자체이다. ‘나’는 장난삼아 바람의 애무로 소녀를 건드려본다. 그런데 거기에 반응하는 소녀의 몸짓에 그만 빠져들어, 거센 바람의 애무로 소녀를 절정에 빠져들게까지 만든다. 그러다 그것도 ‘권태’로워, 바위가 되고 싶은 마음에 바위가 된다. 바위가 된 ‘내’ 위로 흥건히 젖은 소녀가 곤히 잠든다. 그리고 소녀의 손녀가 그리고 또 손녀가, 그렇게 수많은 소녀와 소년들이 수없는 시간 속에서, 이제 바위가 되어 아무 감각도 시간도 잃어버린 ‘내’ 위를 지나쳐간다. 그러다 또 다시 그 모든 것이 ‘권태’로워진 ‘나’는 상상 속에 빠져든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는 신이 된다. 신이 된 ‘나’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를 만든다. 남자와 여자는 신이 된 ‘내’가 보기에 아름답다. 그리고 ‘내’가 만든 세상 또한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렇지만 남자와 여자는 다시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들이 또 사랑을 해서 세상은 이제 신인 ‘내’가 만든 남자와 아이의 자손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더 이상 그들에게 신인 ‘나’는 필요치가 않다. 그러하기에 그들은 협심하여 신인 ‘나’를 죽이기로 작정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더 이상 ‘자신’의 상상을 통제하지 못하고, ‘자신’이 만든 상상 속 인물들에게 붙잡힌다. 그리고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내’ 죄에 대해 심판을 받는다. 그런데 여기서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심판관이 ‘나’라는 사실이다. 거기서 순간 ‘나’는 이 모든 상상이 혼돈 속에 빠져버렸음을 직감하게 된다. 그리고 혼돈을 없애기 위해선 일곱 ‘구멍’을 뚫어야 한다는 옛 이야기를 떠올리고,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구멍’들을 뚫는다. 눈, 코, 입, 귀, 성기, 항문, 그리고 마음... ‘구멍’은 점점 커지고, 마침내 그 ‘구멍’ 속에 ‘나’는 혼돈과 함께 사라져간다. 그러다 ‘나’는 눈을 뜬다. 눈을 떠 바라본 공간은 ‘자신’의 방 천장이다. 자연스럽게 ‘나’는 일어나 세수를 하러 화장실로 향한다. 그리고 거울을 바라보며 이빨을 닦다, 갑작스레 ‘허탈’한 마음에 칫솔을 바닥에 떨어뜨린다. 그렇지만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천천히 바라보며, 커다란 ‘구멍’과도 같은 ‘허무’라는 그 무엇이 이제 ‘자신’을 안온히 지켜주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굳이, 지금 이 순간 내가 이 끔찍하게 난자한 토사물과도 같은 내 첫 소설을 떠올리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나는 지금 지극히 내 개인적인 공감과 회복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 가장 내 처음이었던 본질로 되돌아갈 필요성을 느꼈다고 하면 좋을까? 여하튼 이 소설은 정확하게 말하면 스무 살 때 신학대를 다닌 후 회의를 느껴, 부모님 몰래 2학년 1학기 등록금을 빼돌리고서, 무작정 집을 나와 1년 동안 방황을 하면서 구상을 하고 초안을 쓴 후, 정확하게는 군대를 제대하고서 스물 셋 때쯤 썼던 소설이다. 그러니까 감당할 수 없는 삶의 무게를 온 몸으로 체감한 후 쓴 소설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방황의 과정 속에서 나는 누군가를 절실하게 사랑한 후 헤어져보기도 하고, 또 방황을 위해 서울에서 목포까지 그리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무작정 걸으며 여행도 해보고, 그러다 학교 동아리 방을 근거지로 해서 한두 달 동안 책 속에 파묻혀도 보고, 자취를 하면서 생계를 위해 노가다를 하며 근근이 살아보기도 하고, 그러다 수도원으로 도피하여 몇 개월 동안 살다가 군대에 들어가 1년도 채 안 되어 허리를 다쳐 의가사제대를 하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아니, 이런 경험들은 하나도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런 경험들을 통해 내가 느꼈던 것은 내가 무언가 새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새처럼 나는 흉내를 내고 있다는 것을 절감했다는 사실이다. 그랬기 때문일까? 군대에서 허리가 다치고서 제대를 했을 때 내가 느낀 감정은 무언가 내 청춘이 찬란했던 만큼 너무 빨리 끝나버렸다는 허탈함과 동시에 그럼에도 무언가 회복해야한다는 강박감을 느끼는 미묘한 감정의 경계 사이에 있었다. 때문에 내 첫 소설은 그러한 내 개인적 절망과 회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너무 어렸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 때 그 나이만큼의 방식이었을까? 내 소설 속에서 나로 대변되는 ‘나’는 ‘구멍’과도 같은 ‘허무’ 사이로 도피해버림으로써 ‘회복’과 ‘공감’이 아닌 다시 ‘나’에게로 회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똬리를 뜨는 작업을 의미한다. 아니, 애초에 이 소설엔 어떤 ‘회복’과 ‘공감’이라는 키워드도 뉘앙스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나’로 가득 채워져 있을 뿐이다. 그러하기에 주인공인 ‘나’는 ‘나’를 탈피하기 위해 실체 없는 대상인 얼굴도 모르는 누이와 섹스를 하고, 그 속에서 느낀 ‘권태’감에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여자’를 죽이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을 발기발기 찢어버리기까지 한다. 그래서 마치 ‘자신’의 몸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것처럼 ‘바람’이 되고, ‘바위’가 되고, ‘신’이 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은 그 ‘자신’일 뿐이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키워드는 언제나 ‘권태’가 등장하고 있다. 다만, 여기서도 ‘내’가 ‘바람’, ‘바위’, ‘신’으로 대체된 것처럼, ‘권태’는 ‘구멍’과 ‘허탈’, ‘허무’로 변주되고 있다. 즉, 처음부터 끝까지 이 소설 속에는 ‘나’ 그리고 ‘권태’만이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 나머지 대상들은 모두 실체 없는 관념적 실험의 대상일 뿐이다. 그 때문이었을까? 나의 스무 살의 방황은 끝나지 않고 오래도록 연장되었다. 작년 38살이 되던 해, 21살 때 살았던 수도원을 다시 갔다가 오기까지. 장장 17년이라는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작년 수도원을 올라갔을 때, 어쩌면 모든 상황은 21살 때 상황과 비슷했다. 다시 여자와의 연애에서 실패했고, 갑자기 삶 그 자체에 대한 회의에 빠져 그냥 모든 생업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동시에 이제까지 내가 붙잡고 살아온 ‘신’이란 ‘화두’에 관한 밑도 끝도 없는 의문들이 들기 시작했다. 다만, 단 한 가지 달랐던 것은 ‘화두’의 차이였다. 21살 때는 말 그대로 막연했다. 오직, 하나의 길만이 존재하고 그래서 그 길 끝에 존재하는 신이라는 ‘진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에 내겐 신 자체에 대한 의문은 없었다. 하지만 그 길이며, 길 끝이자, 진리인 신 대한 내 마음의 ‘진실’에 관해선 의문투성이였다. 즉, ‘진리’ 그자체가 아닌, 갈피를 잡을 수도 없고 수시로 변덕스러운 내 ‘마음’에 관한 문제였던 것이다. 때문에 여행 도중에 ‘길’과 ‘길 끝’이 아닌, 그 ‘길’과 ‘길 끝’을 메우고 있는 ‘길옆’의 존재에 대해 깨닫게 되었을 때 나는 더욱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내 ‘진실’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 하고 버거운 판에 ‘길옆’이라니? 그 오만가지 풍경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길을 이루고 있는 것은 길이 아닌 ‘길옆 풍경’들이었다. 혼자 여행을 하는 젊은 애가 안쓰러워 밥을 챙겨주는 어르신들, 노가다 판에서 어린 나에게 삶의 무게를 가르쳐준 아저씨들, 나와 함께 스물 살의 방황을 하던 중고등학교 친구들, 함께 신에 대해 고민했던 선배들 등등. 마치 세상의 모든 고뇌를 짊어지려고 나 혼자 떠났던 여행이었건만, 그래서 나 혼자 걷고 방황하는 길이라고 생각했건만, 오히려 역으로 세상이 결코 나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할까? 더군다나 그것들은 내가 그때까지 믿고 있던, 그리고 알고 있던 ‘신’과 ‘구원’의 문제와는 전혀 별개의 문제로 내 가슴에 파고들었다. 그렇지만 집안의 반대를 뿌리치고 선택한 신에 대한 문제를 그렇게 간단하게 지울 순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처음엔 ‘길옆’이라는 그 오만가지 풍경들을 내 방황하는 ‘마음’이 빚어낸 ‘실체’가 아닌 단순한 ‘현상’으로 해석하려고 했었다. 그렇지만 계속되는 방황의 끝에 일종의 ‘천국에로의 도피’로 감행한 수도원에서 6개월의 생활은 너무나 생생했다. 그것은 단지 금세 피었다 지는 ‘꽃’이란 ‘존재’의 문제도, 그렇게 사라져가는 모든 ‘존재’의 ‘현상’의 문제도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그곳에서의 매순간은 살아있는 충만한 경험이었고, 동시에 ‘변화’라는 실재하는 ‘존재’ 그 자체였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살면서 나는 매일 조금씩 계절이 바뀌어가는 산의 빛깔을 보면서, 나뭇잎의 여린 잎맥들을 보면서, 함께 조금씩 변하고 조금씩 그 변화들을 수용하는 내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을 그 때 내가 제대로 내 삶으로 끌어들일 수 없었던 것은 수도원에서 나온 후 내 삶의 극명한 ‘변화’의 스피드를 따라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오자마자 한 달도 채 안 되어 군대를 가서 의가사제대를 하기까지, 그리고 다시 신학대에 복학하기까지, 나에겐 아직도 많은 방황과 시련이라는 큰 폭의 ‘변화’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는 차츰차츰 그곳에 대한 기억을 잊어버리게 되었다. 오히려, ‘변화’라는 그 자체에 휘둘리면서, 그렇게 차츰차츰 그곳은 내게서 먼 기억으로 멀어져갔다. 그러다 작년에 갑자기 모든 것을 잃고서, 아니 모든 것을 일부러 짓뭉개 놓고서, 문득 그곳이 떠올랐다. 다시, 천국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이 피어오른 것이다. 그렇지만 그동안 나는 너무나 변해버렸다. ‘신’ 자체에 대한 ‘화두’도 흐릿해진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었고, 그러니 당연히 내 마음의 ‘진실’이니 뭐니 하는 ‘화두’ 또한 남아있을 리가 만무했다. 더군다나, 신학대 때부터 교회를 안다닌지도 꽤 되어 벌써 방황한 햇수만큼 17년 동안 발길을 끊어, 예배도 미사도 더 이상 내게는 빛바랜 문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용기를 내어 수도원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다행히도 수도원은 그런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었다. 물론, 그 중간에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곳의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겠다는 서약을 거부하여, 1년 서약기간을 다 마치지 못하고 약 10개월 만에 내려와야 했지만, 여하튼 그곳에 사는 동안 나는 다시 21살 때처럼 나 자체로 온전하게 그곳에서 충실한 삶을 살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곳에 올라가기 전 내가 가지고간 두 가지 ‘화두’를 어느 정도 해결하였다는 사실이다.

 

 

  첫째는, ‘신’과 ‘인간’ 사이에서 방황하는 내 문제였다. 신학대를 졸업하고서 나는 신학대학원 입학하지 않았다. 어차피 신학대를 다니는 동안 교회도 제대로 다니지 않은 내가 신학대학원을 올라갈 이유는 애초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내 진로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신학대학원 진학을 포기하고 목사로서의 길을 포기했기에 남들보다 더욱 내 진로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포기의 이유에 대해 내 나름의 절실한 고백이 필요했다. 그리고 나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포도나무 가지 비유’를 통해 나에게 필요한 고백의 단서를 발견하게 되었다. ‘포도나무 가지 비유’는 간단하다. 예수 그리스도가 포도나무의 줄기이기 때문에 그 줄기에 접붙여있지 않는 가지는 마르고 썩어서 포도나무 자체를 위협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로 접붙여있지 않는 가지는 잘려서 버려져 불태워지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한 마디로, 생명의 공급처가 되는 줄기에 가지는 접붙여져있어야만 살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내가 여기서 관심을 갖고 본 부분은 생명이 되는 줄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잘려질 가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잘려질 가지는 목마른 이유로 메마른다. 그 이유로 나무 자체를 위협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 가지가 잘려졌을 때 그 가지는 불꽃으로 피어나, 생생이 살아있는 나무에게 ‘죽음’이라는 혹은 한 발짝 더 나아가서 ‘희생’이라는, 생생한 표상으로 늘 되살아지게 된다. 물론, 이것은 ‘생명’과는 반대되는 관점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너무나도 정통적인 방식을 벗어난 문학적 해석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러한 해석을 바탕으로 ‘나는 잘린 가지다.’라는 고백을 통해, 과감히 신학대학원 진학을 포기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 고백을 바탕으로 내 길을 찾아가려하였다. 내가 불살라질 수 있는 곳, 새하얗게 불타 ‘죽음’이란 표상으로 타인들에게 생생이 살아질 수 있는 그런 곳... 그리고 나는 그곳을 내 문학적 길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막연했기 때문이었을까? 신학대를 졸업하고서 1~2년 동안은 나름 열심히 글을 쓰면서 몸부림쳤지만, 마치 잘린 가지가 불살라지기 전 바람에 날아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온전하게 뿌리내려 땅에 살지도 못하는 것처럼, 나는 생계와 글이란 현실 속에서 10년이 넘게 방황하며 글을 포기하게 됐다. 아니, 사실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실상 30대 들어와서 내가 쓴 글은 단 하나도 없었다.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하든 나는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글’이란 불살라질 공간인가? 아니면 ‘삶’이란 생생한 생활의 공간인가? 이 양단간에 물음 가운데 선택할 계기가 필요했다.

 

 

  둘째는, ‘천국’에 관한 문제였다. 당시 내가 수도원을 올라가는 일은 어떤 핑계와 이유를 대더라도 도피나 다름없었다. 말 그대로 다시금 ‘천국에로의 도피’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만약 내가 그러한 도피를 그 전에 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래도 괜찮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이미 21살 때 그곳으로 도피를 했고, 또 그 도피를 통해 무언가 나름 얻은 바가 있었다. 물론, 17년이란 시간 동안 모든 것이 퇴색되어버려, 그곳에서 느꼈던 내 충만했던 감정을 재현해낼 어떤 기억도 흐릿했지만, 중요한 것은 이미 나는 그곳이 내게 있어 ‘천국’이었다는 기억을 갖고서 그곳으로 향한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21살 때와는 사뭇 다르다. 아무리 내가 그때를 ‘천국에로의 도피’라고 표현했다고 해도, 그 당시엔 나는 그것을 예감하지 못했다. 그저 끝없이 이 공간 저 공간으로 공간이동을 하다 보니, 그곳이 천국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살면서 깨닫게 된 것 뿐이었다. 그렇지만 이번엔 분명히 그곳이 천국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천국에 대한 배반의 화두를 가지고 있는 내가, 접붙여진 줄기로부터 벗어난 ‘잘린 가지’인 내가, 그곳에 들어간다는 것은 말 그대로 이율배반이었다. 때문에 내게는 그곳에 들어갈 명분이 필요했다. 물론, 모든 삶을 일부러 뒤엉키게 만든 후 감정이 이미 그곳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의미도 명분도 무의미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스무 살 때처럼 그렇게 막연하게 그곳으로 향하는 내 걸음이 나는 두려웠다. 그래서 천국에 대한 화두를 다시금 떠올리기 위해 내 안에 오래된 물음이었던 도스토예프스키를 펼쳐 들었다. 거기에는 두 가지 물음이 존재했다. 하나는 성경에 나오는 광야에서 마귀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유혹의 장면이다. 산 위에 있는 예수에게 마귀가 다가가 이야기한다. “여기에서 떨어져 보라. 그러면 성서에서 나온 대로 당신의 하느님께서 당신이 돌부리에 채이지 않도록 지켜주시지 않을 것이지 않느냐?”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한다. “사단아, 물러가라. 성서에선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치 말라고 하였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묻는다. 왜 그리스도는 그때 산에서 떨어지지 않았을까? 만약 그 때 그가 모든 중력의 법칙을 거스르고 산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면, 그리고 털 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면, 인간들은 뿌리박힌 대지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완벽한 몸을 얻었을 텐데. 동시에 그때 그가 돌을 떡으로 바꾸었다면 인간은 배고픔을 극복하기 위해 노동해야 하는 인간의 숙명의 굴레로부터도 자유로워졌을 텐데.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가 마귀에게 절하여 세상의 모든 권세와 부귀를 가지게 되었다면, 인간도 신으로부터 벗어나 모두 완벽한 천국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동시에, 그 때문에 도스토예프스키는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천국에 대해 반박한다. 왜냐하면 그 천국은 존재하더라도 인간의 한계 밖에 주어져 있어 이해할 수도 없고, 그 이유로 인간에게 침 뱉을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지 않는 그런 천국이란 이유로. 때문에 나는 수도원에 올라가면서 내내 생각했다. 과연 내가 이 천국에서 침 뱉을 수 있을까? 나에게 그런 권리가 있는 걸까?

 

 

  내가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해 답을 얻은 것은 의외로 아주 작고 사소한 경험에 의해서였다. 내가 수도원에 올라갔을 때는 1월쯤이었다. 그곳은 강원도 태백에 산골짜기에 위치해 있어서, 그맘때쯤이면 눈이 엄청나게 내린다. 그 때문에 한동안은 눈을 삽으로 퍼내는데 종일 시간을 허비해야하기도 한다. 그리고 3월 때쯤이면 조금은 이르지만 봄맞이 준비를 해야 한다. 강원도의 겨울 산속 생활이란 게 대개 그렇게 비슷한 패턴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 봄맞이 때쯤 해서 내게 한 가지 작업이 맡겨졌다. 간단하게 말하면, 한 건물 뒤편의 땅을 파서 수로를 내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수도원이 50년 가까이 되면서 지층이 겹겹이 쌓여 그 건물 뒤편 땅이 건물보다 1미터 넘게 올라가, 봄이 되면 겨울에 쌓이고 얼었던 눈이 자연스럽게 해동되면서, 건물 안에 스며들기 때문이었다. 사실, 말이야 간단했지만, 일은 그렇게 간단치가 않았다. 왜냐하면 땅이 너무 꽁꽁 얼어붙어, 드릴도 들어가질 않았고, 곡괭이도 전혀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직 삽질만 가능했는데, 파야할 깊이가 1미터가 넘고, 길이가 10미터가 더 되니, 10년 넘도록 모든 사람들이 알고서도 손을 놓고 있었던 터였다. 거기다 건물 뒤편이 한 사람이 들어갈 자리 밖에 되질 않아서, 여러 사람이 작업할 수 있는 공간도 아니었던 것도 한 몫 거들었다. 때문에 자청하긴 했지만, 나는 약 보름 동안 말 그대로 건물 뒤편에서 나 홀로 사투 아닌 사투를 벌여야만 했다. 그런데 어이가 없던 것은 언 땅도 만만치 않은데, 건물 뒤편이 암반이라서 그런지 땅속에 얼마나 큰 돌덩어리가 많은지, 이건 거의 언 땅이 아닌 돌과의 전쟁이 되어버렸다. 그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는 돌에 대한 내 질문 중 한 가지 답을 얻게 되었다. 무엇이냐면, 돌은 돌로서 존재해야 한다는 아주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땅을 파면 팔수록 돌은 자연 사라지고, 진흙이 범벅이 되어 있었는데, 바로 그 이유로 그곳이 배수가 안 되었기 때문이다. 즉, 돌이 흙 가운데 섞여 있어야 자연스럽게 배수가 되고, 물이 스며들 공간이 존재하는데, 흙만 존재하는 공간엔 흙과 물이 뒤섞여 진흙탕을 만들어 놓을 뿐, 물이 흐를 수도 그렇다고 다른 어딘 가로 빠져나갈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건물의 방수를 위해 나는 진흙탕을 밟으며, 돌을 파내며, 또 파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갔다. 내 온 몸은 돌과의 사투로 여기저기 긁힌 상처투성이였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나는 ‘돌’이란 존재의 또 다른 관념적 이유를 발견해냈다. 그것은 내 개인에게 있어선 예수가 마귀의 시험 때 산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돌’이란 것은 무릇 자연스럽게 사람이 부딪쳤을 때 사람을 다치게 하는 사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고난과 시련을 거부하고 산 아래로 예수가 떨어졌다고 생각해 보자. 그리고 털 끝 하나 다치지 않은 채 그 땅 위에 안착했다고 생각해 보자. 대체 그렇다면 우리에게 ‘돌’이란 시련과 고난의 의미는 무엇이 되겠는가? 동시에 그와 같은 이유로 ‘돌’이 ‘빵’이 되어버린다면, 우리의 대지는 우리의 삶은 무엇을 위한 삶이 되겠는가? 만약, ‘돌’이 그렇게 사람을 다치게 만드는 강도가 없고, ‘빵’이 될 수 있는 자유로운 사물이라고 치자. 그래서 온 세상에 널려있는 ‘돌’이란 ‘부귀’와 ‘권세’를 우리가 이 땅에서 모두 손쉽게 얻을 수 있다고 또 가정해보자.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고, 이해 불가한 세상 아닐까? 그리고 그 때문에 누구도 침 뱉을 수 없는 세상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천국은 분명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하는 인간의 삶을 벗어난 그 무엇이 아닐 것이다. 아니, 도리어 우리 삶 가운데 자연스럽게 녹아져 있는 ‘돌’이란 시련과 고통일 것이다. 즉, 돌이 돌이듯이 천국도 자연스럽게 우리의 삶 그 자체일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이곳에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너도나도 모두 침을 뱉을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권리일까? 당연히 우리에게 주어진 권리일까? 사실, 아직도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선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나에게 그런 권리가 있더라도 내가 그곳에 침 뱉을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수도원에서의 삶을 통해 막연하게나마 느끼게 되었다. 동시에, 내가 그동안 얼마나 상처받지 않기 위해 조심스러운 걸음을 걸었는지 되새겨보게 되었다. ‘글’이란 불살라질 공간을 찾는다고 고백해놓고서, 마음속으로 얼마나 그곳을 두려워했는지, 얼마나 나도 모르게 불살라질 공포에 시달렸지, 내내 생각해보게 되었다. 대체 무엇을 두려워했던 것일까? 그리고 왜 나는 그곳에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천국에 쉽게 침 뱉을 수 없을 거라고, 그런 인간일 거라고 믿게 된 것일까?

 

 

 

  당신은 직경 일 센티미터 남짓한 구멍들을 보고 있다.

  당신의 부어오른 양쪽 복숭아뼈 아래, 정강이에서부터 내려온 인대가 발등으로 막 꺾어지는 자리에 그 구멍들은 뚫려 있다. 왼쪽의 구멍 안으로 보이는 회백색 물질을 가리키며 의사가 말한다.

  왜 화상을 입자마자 바로 처치를 안 한 거죠? 오른 쪽은 괜찮은데, 여기 왼쪽 피부 조직은 좀 심각합니다.

 

 

  소설 ‘회복하는 인간’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이 서두로 미루어 보았을 때, 분명 이 소설은 아주 작고 사소한 상처에 관한 이야기임을 직감하게 된다. 그런데 2인칭 시점으로 소설을 구사함으로써, 어쩌면 이 소설이 1인칭 화자 자신의 상처가 아닌 2인칭 타자의 상처와의 공감에 대한 이야기임을 슬며시 예감해보게도 된다.

 

 

  당시의 언니가 투병하던 마지막 삼 개월 동안 당신은 그녀를 거의 만나지 못했다. 그녀가 당신을 만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당신과 그녀가 이미 오래전부터 소원한 사이였기 때문이었다. 하나뿐인 친자매였음에도, 당신은 그녀의 병세에 대한 모든 소식을 어머니로부터만 전해 들었다.

 

 

  평소 병이나 상처에 무감했거나 무심했던 ‘당신’은 그로인해 사소한 화상을 방치함으로써, 다소 큰 상처로 번지게 만들어버린다. 그 때문에 일에 집중할 수도 없고, 걷는 것도 힘겹다. 그리고 주말이면 이제 죽어버린 언니를 대신해 ‘당신’ 하나만을 바라보는 부모님을 찾아가야 하지만, 왠지 가고 싶지가 않다. ‘당신’의 화상을 통해 갑자기 부재한 언니가 문득 떠올랐기 때문일까? 그렇지만 ‘당신’에게 있어서 언니는 부재라는 슬픔보다 일종의 부채감으로 남겨진 존재이다. 대체 왜?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일까?

 

 

  언젠가 당신은 스스로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당신과 언니, 둘 가운데 누가 더 차가운 사람이었는지.

 

 

  .........................................(중략).........................................

 

 

  금방이라도 눈발이 쏟아질 것 같은 오전이었다. 그녀가 소파수술을 마치고 나올 때까지 당신은 대기실에 앉아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수술실에서 나온 그녀를 당신이 멈칫멈칫 부축하려고 하자 그녀는 짜증을 냈다. 병원을 나와 당신이 택시를 잡자, 그녀는 뒷자석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나 좀 누울게. 넌 앞에 앉아.

 

 

  .........................................(중략)..........................................

 

 

  당신의 언니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당부할 필요가 없었다. 당신이 그 비밀을 언제까지나, 부모는 물론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고 끝까지 짊어질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 수 있는 만큼 온 힘을 다해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당신의 언니는 그날 이 이후 당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았다. 당신과 말을 섞으려 하지 않았고, 눈조차 제대로 맞추려 하지 않았다. 그 후 수년간 당신은 그녀의 마음을 다시 얻기 위해 애썼지만, 어떤 노력도 부질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한순간 그녀에게서 돌아섰다.

 

 

  이 때부터였다. 언니와의 관계가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사이가 되어버린 것은. 언니가 결혼을 하고 형부와 함께 다 같이 가족모임을 할 때도 ‘당신’이 나타나면 언니의 얼굴이 어두워지기 시작한 것은. 그리고 그러면 그럴수록 ‘당신’ 자신도 ‘당신’의 마음을 더욱 차갑고 단단하게 얼려버리기 위해 노력한 것은. 그리고 ‘당신’의 언니가 가족 모르게 병원의 차에 실려 오가고 있었을 때도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고서 신나게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미칠 듯한 쾌감을 느꼈던 것은. 그 때문일까? 한 때 ‘당신’의 모든 것이며, 기쁨 그 자체였던 자전거를 ‘당신’은 내내 외면한다.

 

 

  이제야 살아나네요.

  당신의 왼쪽 발목의 구멍 속에서, 회백색 조직 가운데 샤프심으로 찍은 것 같은 불그스름한 점 하나가 생긴 것을 보고 의사가 말하리라는 것을 당신은 모른다.

  아주 진행이 더디긴 하지만, 일단 이게 살아난 걸 보니 수술은 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중략)..........................................

 

 

  정말 더디네요. 이렇게 더딘 것도 드문 케이스인데요.

  이제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얼굴의 의사가 미간을 모으며 헛웃음을 웃으리라는 것을 모른다.

 

 

  어찌됐든 상처는 회복되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상처와 상관없이 삶이 살아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정말로 깊은 마음속 상처를 우리는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 것일까?

 

 

  그 어떤 것도 모르는 채 당신은 계속 페달을 밟고 있다.

 

 

  .........................................(중략)..........................................

 

 

  그러나 당신은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려간다.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헬멧에 고글을 쓰고 마스크로 코와 입을 가린 자전거 레이서들을 피한다. 발목에 통증이 느껴진다. 삐었기 때문인지 화상 때문인지 분명하지 않다. 어쨌거나 더 달릴 것이라고 당신은 생각한다. 당신이 기쁨을 두려워한 것은 불필요한 일이었다. 당신은 기쁨을 느끼지 않는다.

 

 

  한동안 죄책감으로 외면했던 자전거를 타며, ‘당신’은 깨닫게 된다. 더 이상 자전거가 ‘당신’에게 기쁨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그렇지만 ‘당신’은 계속 더 달려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당신’에겐 아직 남겨진 많은 삶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에겐 지금 절망하고 좌절할 시간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래야 ‘당신’이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을 알지 못한 채 당신은 갈대밭 가장자리에 누워 있다. 자전거는 천변의 바위 위로 나동그라져 세차게 헛바퀴가 돌고 있다. 허공에서 떨어지는 순간 당신은 본능적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손과 팔꿈치의 피부가 벗겨진 게 분명하다. 땅에 부딪친 어깨와 골반이 뻐근하게 아파 온다.

 

  이따위, 라고 중얼거리며 당신은 축축한 흙 위에 누워있다. 회백색 구멍 속의 상처 따위는 이제 느껴지지 않는다. 흙이 들어간 오른쪽 눈이 쓰라리다. 이 모든 통각들이 너무 허약하다고, 당신은 수차례 두 눈을 깜박이며 생각한다. 지금 당신이 겪는 어떤 것으로부터도 회복되지 않게 해달라고, 차가운 흙이 더 차가워져 얼굴과 온몸이 딱딱하게 얼어붙게 해달라고, 제발 다시 이곳에서 몸을 일으키지 않게 해달라고 당신은 누구를 향한 것도 아닌 기도를 입속으로 중얼거리고, 또 중얼거린다.

 

 

 

  이제 이야기를 정리해 보아야겠다. 글의 서두에서 내 지루한 청춘의 이야기를 마구 벌려놓은 데다가 깔끔한 한강 작가의 ‘회복하는 인간’을 연결지려 하니, 지금 이 순간 막막하기만 하다. 그렇지만 너무나도 극단적으로 다른 두 이야기를 비교해봄으로써, 어쩌면 나도 내 회복의 단서를 발견할 것 같다는 예감도 가져보게 된다. ‘회복하는 인간’은 글의 줄거리를 설명하면서 이미 이야기했듯이, 철저하게 2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내 첫 소설에서 순전히 ‘나’라는 틀에서 이야기 구성을 꾸려간 극단적 1인칭 시점과는 완전하게 대칭하는 자리에 위치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문인지, 처음부터 이 소설은 철저하게 자신의 상처를 통해 타인의 상처를 끌어들이는 타자적인 시선과 이타적인 품을 가지고 출발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자신의 상처가 더욱 지속되고 커지길 바람으로써, 역으로 타인의 아픔과 고통에 대한 공감을 더욱 이끌어내며 글을 맺고 있다. 물론, 어떤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공감이 아닌 그저 자학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 인간의 고통이 타인의 고통으로 전가된다는 것은 실상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예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전쟁터에서 손톱이 깨진 병사가 바로 옆 총에 맞고 팔 하나가 날아가 전우를 보고도, 자신의 고통 때문에 전혀 전우의 고통을 인지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숱하게 들어오지 않았던가? 이렇게 본다면 분명, 타인을 향한 누군가의 자학적인 몸부림은, 기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병 때문에 그리고 기아 때문에 숱하게 죽어가는 아프리카 아이들을 위해 내가 하루 한 끼 굶는다고 하여 그 아이들을 단 한 명이라도 구할 수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이미 죽어버린 언니를 위한 자학이라면, 대체 무슨 소용이 있다 말할 수 있을까? 그러하기에 우리는 이 부조리한 세상에 침을 뱉고, 어떻게든 세상을 바꾸어보고자 몸부림친다. 분명, 이것은 옳은 일이다. 그리고 분명히 단순히 자학하고 무력하게 기도하는 것보다는 한 걸음 더 나아간 실천적인 행위임에 틀림없다. 여기에 대해서 나는 어떤 반론도 내세울 논리도 없고, 철학도 없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 출발점에 대해 나는 이야기하고 싶다. 타인에 대한 깊은 공감 없이, 어떤 의미로는 자학으로 치닫기까지 하는 공감이 없이, 세상을 바꾸고자 한다면 그것이 타인을 지배하고 조종하고 싶은 권력욕과 다를 바가 대체 무엇일까? 물론, 그렇게 해서라도 이 세상을 올바르고 정의롭게 바꿀 수 있다면, 내가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전부 허공에 붕 뜬 이야기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 개인은 세상을 이루고 있는 것은 정치적인 제도도 사회적인 구조도 아니라고 믿고 있다. 왜냐하면 내가 오랜 방황을 하면서 본 것은 길옆을 이루고 있는 오만가지 풍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풍경들은 거의 전부 한 사람, 한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때로는 슬프고 고통스러운 얼굴로, 때로는 기쁘고 즐거운 얼굴로. 그리고 그 한 사람 한 사람으로 이루어져있는 풍경들이었기에 쉽게 다가설 수 없었고, 그 이유로 오랫동안 아마도 나는 그 거리감에 당혹스러워하며 두려움을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다시 내 안으로 그만 똬리를 틀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들이 나에게 철저하게 타인이기에 풍경으로써 비추인 것처럼, 나 또한 그들에게 하나의 풍경일 뿐 그 이상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사람은 풍경이 아니다. 함께 공존하는 존재들이고, 그러하기에 함께 기쁨도 슬픔도 나누어야할 존재들이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것이 비록 자학일지라도 아니면 때론 상처 주는 행위일지라도, 일단 다가서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먼저 타인에 대한 공감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회복이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세상이 차츰차츰 무척이나 더디고 아리겠지만 바뀌어가고 회복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세상의 일원으로서 내 자신의 회복을 그리고 내 주위의 회복을 누구를 향한 것도 아닌 기도로 자꾸만 중얼거려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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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1-01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선..님의 글을 보니
이상..오감도 -이상한 가역반응이-생각이나요. 멋진 글 잘 일고 갑니다.
새해 입니다
모쪼록 원하는 것들 이루는 한해 되시길..

몽원 2015-01-06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길고 지리멸렬했을 텐데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종종 뵈었으면 좋겠네요^^
꾸벅
 
동경 한국 3대 문학상 수상소설집 7
오정희 외 지음 / 가람기획 / 199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윤동주의 참회록을 통해 바라본 오정희의 동경

 

 

  처음, 오정희의 ‘동경’이란 제목을 보았을 때, 문득 나는 윤동주 시인의 ‘참회록’의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년 일개월을

  무슨 기쁨으로 바라 살아 왔던가

 

 

  그렇지만 오정희의 ‘동경’은 저자 자신도 밝혔듯이 자신의 늙은 조부모에 대한 안타까운 심경과 시선으로 써내려간 노년의 고독과 죽음에 관한 문제이다. 그러하기에 아무리 위대한 시인이었다고 해도 이제 갓 24살 된 청년의 눈에 비친 윤동주의 ‘동경’이 오정희의 ‘동경’과 같을 리는 만무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노년의 눈으로 아직 세상을 쉬 바라보기를 꺼리는 아니, 아직 그럴 수 없는 나는 윤동주의 ‘동경’을 통해 오정희 ‘동경’을 이해해보고자 한다.

 

 

  오정희의 ‘동경’ 속에서 거울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은 지난날을 바라다보는 자기반성의 의미를 지니면서도 동시에 지난날에 대한 회피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노인들은 반성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반성을 요구하는 새로운 삶이 그들에겐 기다리고 있지 않다. 그러하기에 자신의 과거를 자꾸 들추는 옆집 계집아이의 거울 빛은 그들에겐 거북스럽고, 두려운 빛일 뿐이다. 왜일까? 그들의 아들인 영노를 자꾸 되새기기 때문에? 아니면 더 이상 같이 산 지난 세월이 기억이 나질 않아 꿈같다는, 그것도 마치 흉몽스러워 맥을 자꾸 빚어야 잠을 들 것만 같은 이유 때문에? 아니면 아직도 익숙지 않은 자신의 틀니처럼 혹은 아내의 백발처럼, 그렇지만 받아들여야만 하는 미구의 죽음을 직면해야 하는 두려움을 회피하고 싶어서? 쉬 공감이 가지 않는 이 이유들을 잠깐 접어두고 다시 윤동주의 ‘참회록’으로 넘어가 본다.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한다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오정희의 ‘유년의 뜰’에서 거울은 집안에서 유일하게 닳지 않은 가구로 집안에 놓인 것이 아니라, 마치 모든 집안을 그 속에 넣고 있는 듯 묘사되어지고 있다. 물론, 오정희의 다른 소설에서 ‘거울’의 이미지를 가져오는 것은 부질없는 짓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를 통해 여성 작가인 오정희에게 있어서 ‘거울’은 남다른 의미가 있음을 짐작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어머니가 자신을 가꾸던 공간, 집안에서 유일하게 빛나던 물건. 이러한 귀중한 물건이 그렇지만 ‘동경’ 속에선 무덤의 이미지와 엇물려 표출되고 있다. 특히, 영노를 묻었을 때를 회상하는 장면 속에서 그는 그의 아들의 육체를 묻은 것이 아니라 한 조각 거울을 묻은 것은 아닌지 반추하고 있다. 여기서 어떤 도식처럼 그 상징하는 바를 도출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그것은 기억이다. 가장 빛났기에 부끄럽고 아팠던 그런 고백이다.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분명, 글 속에서 그는 노인들은 반성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역으로 생각해 보면 그들은 너무 오랫동안 자신들의 거울을 봐온 것 아닐까? 그래서 이제는 그 거울 속에서 어떤 찬연한 빛을, 온 집안을 집어 삼킬 듯한 그 빛을 보기보다는 오래 전 그 어느 때부터 그 어느 것도 지속시키지 못한 빛의 속성, 기억이라는 찬란하지만 찬란하기에 순간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그런 빛과 같은 기억의 속성들을 이미 깨달아 버린 것은 아닐까? 아니, 그 강렬한 빛에 너무 오래 노출되어 이젠 자연스럽게 시력을 잃게 되어 거울을 바라볼 수 없게 된 건 아닐까? 그렇지만 그 오래 닳고 닳은 거울 속에 묻어버린, 그렇게 사라져버린 어떤 흐릿한 윤곽의 뒷모습이 왜 소설을 보는 내내 아른거렸던 걸까?

 

 

  거울 속 볼 수 없는 뒷모습은 슬프다. 게다가 그 거울이 천연덕스럽게 번들거리는 빛이 아니라 오래된 구리거울이라면 그 흐릿한 윤곽만큼 뒷모습을 슬프게 비출 것이다. 그러하기에 어쩌면 그 오래되고 외로운 그 뒷모습을 이미 알아버린 사람이라면 더 이상 거울을 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눈을 감아도 이미 어른거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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