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여인의 키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7
마누엘 푸익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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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 여인의 키스 거대한 어머니의 품에 관해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쯤 우연히 이 영화의 비디오 케이스를 본 기억이 난다. 무작정 집을 나와서 노가다 판을 전전하면서 하루하루를 살면서, 저녁이면 비디오방에서 에로 영화를 보곤 했었다. 그때 우연히 이 영화의 비디오 케이스도 봤던 걸로 기억한다. 아니면, 한참 영화광인 어떤 선배를 따라 영화를 볼 때, 본 것 같기도 하고. 여하튼 어떤 여인이 거미줄 배경으로 가면을 쓴 채 있었던지, 정확한 그림이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무언가 조금 많이 야해 보였다. 그 때문인지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로 되어있어서, 내 기억 속에 거미 여인의 키스는 야한 영화? , 이런 식으로 이제까지 각인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심지어 얼마 전까지 이 영화가 원작이 있는 작품이라는 것도 사실은 잘 몰랐다. 거기에 덧보태 동성애를 다룬 작품이라는 것조차도. 사실 말이 나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내 대학 때만해도 해외 문학이라는 게 접하는데 일정부분 한계가 있었다. 그저 유럽의 고전정도만 소개되었을 뿐, 전공자가 아닌 이상 제 3세계 문학은 거의 접할 수가 없었다. 가까운 일본조차 겨우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소개되어, 히트를 치기 시작했을 정도이니,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래서 이번에 거미 여인의 키스를 읽으면서, 반드시 영화 또한 같이 보리라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결국 보지 못하고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다. 다운을 받지 못한 건 아니다. 게을렀기 때문이 가장 큰 이유고, 또 다른 이유는 영화를 보지 않더라도 무언가 말하고 싶은 바가 충분히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이 소설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서술방식이고, 두 번째는 내용의 구성방식이다. 마지막으로 소설 내 동성애에 관한 9개의 긴 각주가 등장하고 있다. 첫 번째의 경우는 읽다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단 한 마디의 문학적 지문이나 해설도 없이,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에게 영화 이야기를 해주는 서술방식을 취하다 보니, 매우 쉽게 읽히고, 문학적 서술방식이라기보다는 다소 연극적이고, 영화적 서술방식으로 느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 내용의 구성방식 또한 첫 번째 서술방식에서 그 이유가 기인한다. 이 소설은 희곡처럼 총 15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거의 대부분이 6편의 영화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그리고 각 이야기는 두 주인공의 과거와 현재, 나아가 미래와 엇물려 나름의 복선과 상징의 기능으로 작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첫 번째 표범 여인의 이야기의 경우는 거의 눈에 보일 정도로 주인공 몰리나의 현재와 미래를 예견하고 있다. 그리고 게릴라 청년의 관한 영화 이야기는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 발렌틴에 관한 이야기의 또 다른 변주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 마지막 기자와 여배우의 사랑 이야기는 몰리나와 발렌틴의 마지막 사랑에 관한 암시라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끝으로, 이 소설 내 사용된 9개의 긴 각주에 대해선 다소 해석의 여지가 많아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모르겠다. 그저 동성애에 관한 객관적 각주를 통해 저자의 나름의 생각을 표명하고 싶었던 건 아닌지, 개인적으로 생각해볼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이 소설을 읽고서 왜 내가 무언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겼는지 말해보고 싶다. 읽자마자 처음으로 든 의문은 이 소설이 왜 표범 여인의 키스가 아니라 거미 여인의 키스인가에 대한 물음이었다. 사실, 앞에서 이 소설에 등장한 영화 세 편 이야기를 했지만, 소설을 읽고 나서 가장 강렬하게 남은 이야기는 첫 번째 영화였던 표범 여인의 이야기였다. 왜냐하면 이야기 자체도 서두에 등장하는데다 자극적이기까지 하여 기억에 꼭 박히기도 하였고, 너무 생생하게 이 글의 두 주인공의 미래를 암시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로 나머지 영화에 관한 이야기가 다소 중복이거나 쓸데없는 페이지 낭비라는 느낌도 없지 않아 있었다. 물론, 지루한 감방 생활을 극명하게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장치라는 생각도 했다. 더불어, 어찌됐든 점진적으로 발전되어가는 둘의 관계를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영화 이야기가 크게 매개체가 된다는 점도 인지는 하고 있었다. 하지만 왜 마지막에 가서 생뚱맞게 거미 여인으로 몰리나가 상징이 되어버리는지 도무지 이해할 길이 없었다. 아예, 그럴 거면 처음부터 표범 여인이야기를 꺼내지를 말지, 거미 여인이란 말인가? 사실, 이 때문에 나는 이 소설에 대해 읽고서 바로 품평을 쓰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다. 그리고 이 탓에 영화를 보면 혹 이해가 되지 않을까 생각도 했었다. 그렇지만 여차저차 핑계로 내내 미뤘고, 그렇게 이 소설은 내 기억 속에서 별로 중요치 않게, 차츰차츰 잊혀졌다. 그런데 전혀 엉뚱한 곳에서 이 소설의 실마리를 얻게 되었다. 그것도 그동안 내게 다소간의 혐오대상으로 인식한 심리학책들을 읽으면서, 이 글의 거미 여인이 알게 모르게 어머니라는 여성성을 상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다소간의 꿈을 해석하는 정형적 공식이 적용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소설의 내용을 떠올려보면 주인공 발렌틴에게 거세된 어머니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금세 깨닫게 된다. 특히, 이 소설 내에서 이 부분에 대해 가장 도드라지게 나온 장면은 게릴라 영화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 속에서 상정된 부르주아 어머니와 발렌틴의 어머니는 일정부분 연장관계를 갖고 있다. 물론, 그 장면에서 발렌틴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려 하지 않는다. 마치, 자신의 어머니를 부정하려는 것처럼. 그러나 마지막쯤, 자신의 모든 존재를 몰리나에게 까발릴 때쯤, 발렌틴은 거세된 어머니 대신 자신의 옛 애인 마르타를 사랑했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한 마르타는 한때 자신의 혁명동지였지만, 나중에 그 집단을 빠져나와 원래 그녀 자신이 속했던 부르주아 집단으로 되돌아갔던 사실을 시인한다. 그 때문에 그녀와 결국 결별하게 됐지만, 발렌틴 그 자신이 그녀를 사랑했던 건 혁명동지로서의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위치, 다시 말해서 부르주아였던 어머니의 대리로써 사랑했을지도 모른다고 몰리나에게 토로하는 부분이 나온다. 결국, 이렇게 그는 어머니의 거세라는 애정의 결핍을 인정하게 되고, 마지막에 이르러선 몰리나를 통해 그 결핍을 충족하게 된다. 마치 거미 여인의 거미줄에 꼭꼭 옭아매져 옴짝달싹 할 수 없는 벌레처럼,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젖무덤에 푹 빠져 영영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그렇게.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소설이 단순히 동성애 문제로 뜨거운 화제가 되고, 논란이 되는 건 조금 우스운 현상인 것 같다. 그건 아마 이 소설을 제대로 읽지 못한 다수가 논하거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는 사람들의 이야기라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사실, 이 소설의 이야기 중심은 순수한 사랑에 관해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리고 그 반대급부로 혁명이 등장하고 있다. 물론, 반대급부인 혁명에 관해 이야기함에 있어선 다소 조심스러워 할 부분이 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반대급부로 혁명에 초점을 맞춘 것은 이 소설의 배경이 혁명의 중심지인 남미라는 사실도 있겠지만, ‘혁명속에 거세된 애정에 관한 이야기를 아마 저자가 하고 싶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어쩌면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애정을 통해 혁명의 시대를 살아간 남미의 젊은이들을 어루만져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고도 느껴졌다. 왜냐하면 애정만이, 오직 순수한 애정만이, 어머니와도 같은 바다보다 넓은 애정만이, 지치고 쓰러진 그들을 품어주고 안아줄 수 있으리라 저자는 믿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 사랑이 너무나 잔혹할 만큼 거대하여 모든 혁명의 에너지마저 무기력하게 만들지라도, 그리고 성적 소수자와 같이 무조건적으로 희생을 강요받는 어머니라는 대상을 상정하는 것일지라도, ‘혁명이란 거대한 조류 속에서 차마 불러보지 못한 어머니의 이름을 한 번은 불러보라고, 한 번쯤은 그 품을 기억해보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잠시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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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 여인 - 인터뷰 소설의 의의와 한계 ; 들뢰즈의 개념을 차용하여 해석하면서

 

 

  왼쪽 관자놀이 쪽이 지끈지끈거린다. 목구멍은 평소보다 약간 더 피운 담배 때문에 가래가 맺혀, 떠놓은 물을 자꾸 홀짝거리게 한다. , 사실 목구멍의 걸림은 내가 썩 그리 좋아하는 느낌은 아니지만, 관자놀이의 고통은 내게 있어선 특별히 살아있다는 자각을 일으키기에 그리 나쁜 기분만은 아니다. 오히려 무서운 건 의식하지 못하는 고통이고,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사로잡혀있는 온갖 망상들이라 나는 믿고 있다.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것들, 옳다 그르다란 관념들, 가족에 대한 환상들, 국가와 역사란 담론들 등등. 하지만 의식하고 있는 고통은 생생하다. 그리고 생생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자연스럽다. , 자연스러움은 자유롭다는 말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다. 물론, 마지막 이 논리들은 다소 불안정하다. 생생하다는 말이 자연스럽다에서 자유라는 개념으로 이전하기엔 불명확한 설명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혹은 너무 많은 설명들이 불필요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역으로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생생하지 못한 것들, 무의식적인 공포들 혹은 그 무엇들은, 모두 부자연스럽다는 사실이다. 그것들이 그 무언가를 억압한다는 그 이유로. 이렇게 부자연스러움과 자유롭지 못함은 등가를 이룬다.

 

  시작부터 장광설을 늘어놓은 듯싶다. 그것도 어떤 문학적 뉘앙스나 분위기를 담아내기보다는 무언가 철학적인 사설들에 가까운 썰들을. 사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나는 골머리 아픈 들뢰즈의 글들을 한 뭉탱이 읽었다. 왜냐하면 이문열의 리투아니아 여인에 대한 품평을 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주객이 전도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이 글을 이런 철학적 사유의 범주 아래 구분하여 평한다는 자체가 소설의 평과는 다른, 분명 이질적인 작업임에는 틀림없는 까닭일 게다. 그것도 거의 마지막 부분, 혜련과의 이별에서의 문화적 노마드라는 그 단 한 마디 말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는 건 내가 생각해도 좀 오버기는 하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고, 달리 이 글을 이해할 길이 없어서, 조금 더 상세히 말하자면, 왜 굳이 이런 망작을 썼는지 이해할 방법이 나로선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이 글에 들뢰즈의 사상을 대입시킨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다. 사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거의 마지막쯤 왔을 때 확연히 드러난 문화적 노마드란 어원 때문이었다. ‘문화적 노마드란 철학자인 질 들뢰즈와 정신분석자인 펠릭스 가타리가 공동작업을 한 책인 천 개의 고원에서 나온 말이다. 물론, 그 이전에 들뢰즈가 그의 대표저서 중 하나인 차이와 반복에서 노마드란 개념을 어느 정도 미리 잡아놓았다고 한다. 사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나는 그 두 책을 모두 다 제대로 읽지 못했다. ‘차이와 반복은 읽은 줄 알았는데, 자크 데리다의 다른 책과 혼동한 거 같고, ‘천 개의 고원은 예전에 불문 스터디를 할 때 어느 정도 읽기는 했는데, 중간에 모임 자체가 파토가 나면서, 자연스레 그 책 스터디도 중단되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분명 천 개의 고원에서 나온 노마드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할 것이다. 그 때문에 굳이 예전에 읽었던 질 들뢰즈의 논문들을 엮은 책들을 다시 들쳐보았다. , 그리고 그 결과는 아직도 이해불능이기는 하다. 그만큼 책들이 어렵고, 번역이 난삽하다. 아니, 체계 자체를 부정하면서 철학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이해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책의 개념이 담아낸 이야기가 줄곧 리투아니아 여인의 맥락과 연결된다는 사실이다.

 

  이 소설에 줄기가 되는 인물은 딱 두 인물이다. 화자인 주인공과 혜련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 중심추는 화자 자체보다 혜련 쪽에 더 가있다. 왜냐하면 화자는 혜련을 이해하기를 원하고, 그 이유로 끊임없이 대화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거의 인터뷰와 가까운 형식으로, 혜련에게 화자는 끈질기게 ?’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혜련의 근원을 추적해간다. 인종적으로 외가인 리투아니아의 피와 친가인 한국의 피의 혼혈종이란 특수성과 더불어 환경적으로 미국이란 시민권을 가진 다국적 인간에 대한 어떤 동경과 의구심 혹은 호기심이 그 어떤 시작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질문을 해도 그녀에게서는 그가 원한 답을 원할 수가 없다. 리투아니아의 비극적인 역사 속에서 대탈출을 시도한 그의 어머니와 할머니 이야기에서도 그녀는 그녀 자신과 별 상관없다는 투이다. 아무리 화자가 민족적 정서를 얽어매려 해도 그녀 속에는 한때 그 모든 이민자들의 포용처였던 미국적 정서만 있을 뿐이다.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그저 다민족적인 사회 속에서 누구나 가진 비극적 설화이거나 역사의 편린? 사실, 그의 할머니와 이모들의 이야기만 해도, 우리가 생각하는 이산가족적 상봉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30년의 모진 세월을 돌아 돌아서 만난 모녀들의 불편한 이야기, 그 속엔 우리가 아는 그 어떤 짠함도 설움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온전히 미국적인 정서인가 하면 또 그렇지도 않다. 이혼 뒤 미국으로 돌아가 마치 미국인처럼 살 것처럼 결심하다가도, 주인공인 화자를 만나서 고국에 대한 향수를 불현듯 느끼고서는 다시 생기를 찾은 것처럼, 그녀는 늘 한국을 그리워한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삶은 늘 그녀에게 이질적인 생경함을 선물해준다. 그녀 자신이 먼저 그렇게 느끼기 앞서 타인들이 그녀를 그렇게 만든다. 화자는 그것을 인종적 호기심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한국인의 무의식 속에 자리 잡은 서구사회에 대한 열등의식으로 이해해보려 한다. 하지만 그녀는 단호히 그것이 아닌 하나의 민족주의라는 마술적 집단의식이 가진 배척정신으로 받아들인다. 그랬기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이제 생뚱맞게 인도를 가로질러 세계 곳곳으로 유랑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녀의 정서가 그런 유랑자의 정신과 맞닿아 있다고 화자에게 설명한다. 그런데 여기서 아이러니한 것은 유랑자인 그녀가 추구하는 바가 각 세계의 민속음악이라는 사실이다. 가장 근원적이면서도 분절적이고, 또 동시에 서로가 서로와 맞닿아 있는 그런 바다와도 같은 세계, 굽이굽이 파도가 각자 다르게 치면서도 함께 존재하는 넓은 바다와도 같은, 우리의 작은 품으로 도저히 다 담을 수 없는 그런 세계로 그녀는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화자는 그 세계와 그 정신에 대해 응원해준다. 그렇지만 글쎄, 그저 관망자일 뿐, 과연 그 자신이 받아들이고 있을지, 화자 자신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눈치이다.

 

  이 글에서 또 다른 하나의 키워드는 가정과 페미니즘이다. 화자는 책 중반에 자신의 결혼생활과 혜련의 이혼 과정에 대해 꽤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역시 어떤 의미로 들뢰즈와 연관되어 있다. 들뢰즈는 프로이드가 만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부정하는 인물이다. 아들은 어머니를 사랑하는 까닭으로 아버지와 원수라는 그리스의 오이디푸스 이야기는 프로이드가 우리 인간 무의식에 관해 설명하기 위해 이끌어낸 중요한 이론이다. 인간은 자신을 지배하는 가부장인 아버지에 대한 배신을 늘 도모한다. 그 이유로 자신이 한 가정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버지가 가졌던 모든 것들에 대해 아들은 늘 적대시했던 만큼 동경해왔다는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아버지의 가장 큰 재산은 어머니이다. 그 까닭으로 아들은 어머니의 다른 대리 표상으로 여자를 취한다. 이것이 인간의 기본 근저에 깔린 가정에 대한 욕구이다. 하지만 들뢰즈는 인간의 욕망을 가정에 국한해서 설명하는 프로이드를 비판한다. 인간의 욕망은 결코 그렇게 단순하게 가정이란 소꿉놀이에 얽매여 있을 만큼 한정적이지 않다.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하다. 그런데 프로이드는 인간의 욕망을 가정이란 울타리로 한정지음으로써 인간을 그 울타리 속에 억압해놓는다. 그 때문일까? 이 글의 화자 또한 가정은 이래야하지 않을까라는 자문을 늘 하고 있다. 어떤 동지와 함께 연극의 연장선처럼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남편은 이래야하고 부인은 이래야한다는 관념 하에 헤어 나올 수가 없다. 하지만 그가 사랑했던 여인들은 반문한다. 너도 그 지긋지긋한 가정이란 울타리를 나에게 들이미느냐고? 나는 나 자체로 자유롭게 존재할 수 없겠냐고? 그렇다면 그런 존재는 무엇이냐고 주인공은 묻는다. 이에 혜련이 보여준 답이 노마드이다.

 

  만약, 우리가 일상적으로 가지고 있는 욕구들, 가장 큰 욕구를 틀이나 체계와 같은 안정이라고 전제해보자. 아마, 가정도 이 틀과 체계 속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런데 이 최소한의 틀들이 다 무너진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존속할 수 있을까? 물론, 들뢰즈가 이 모든 체계의 전복과 기본 안전망 구축에 대한 부정을 한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이 결코 한정적이지 않다는 측면에서 철학자로서 그는 한없이 욕망에 자유로운 인간의 기본적인 틀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 그 이유로 체계에 대한 집착이 아닌, 체계와 체계 사이를 가로지르는, 그렇게 수 천 개의 욕망이란 이름의 고원 사이를 자유롭게 다니며 존재하는 유목민의 정신을 그의 철학 세계에 도입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 글속에서 화자는 이러한 들뢰즈의 유목민 정신을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결코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의 부인과의 결별은 일종의 페미니즘과의 반동이었다고 치자. 하지만 왜 거기서 한 번 더 깊이 들어가 혜련을 통해 들뢰즈의 노마디즘을 언급했음에도 혜련과 이별할 수밖에 없었을까? 그것도 무슨 상간의 추억이니 하는 돼먹지 않은 소리나 하면서. 왜냐하면 애초에 그 자신이 바뀔 리가 없다는 사실을 인지한 까닭이다. 그 이유로 글속에서 혜련 또한 주인공이 바뀌지 않을 거라고, 여전히 자신과 함께 해도 또다시 가정이란 소꿉놀이를 원하게 될 거라고 언급하고 있다. , 이 글은 애초부터 자신이 잘 이해할 수 없는 아니, 받아들일 수 없는 세계에 대해 대화해보고자 한 시도인 것이다. 그 이유 때문이었을까? 이 글엔 그러한 시도로써의 의의와 가치는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한계를 보이고 있다.

 

  첫째는, 정말 글 자체의 스토리가 빈약하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소설이 관념적인 구도 하에 쓰였다고 하더라도, 소설은 이야기 자체에서 철학적 함의를 끌어내고, 그 함의를 변주하여 문학적 감수성으로 재창조해야 한다. 그런데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인터뷰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물론, 애초에 내가 그런 선입견을 가지고 본 이유도 무시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 이문열의 화법에 너무 익숙해져 식상한 기분을 느끼기도 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스토리가 빈약해서는 소설적 의의를 찾기는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둘째는, 애초에 형이상학적 견지 하에서 들뢰즈의 개념을 가져다 쓴 것이 다소 문제가 되었다고 본다. 들뢰즈 자체가 거의 모든 형이상학을 부정한다. 형이상학이 가져다 쓴 모든 권력적 용어들, 이데아, 우리말로 아주 변용해서 이상, 신이라는 관념, 국가, 가정 등등, 이 모든 체계들을 부정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어차피 자신은 결코 변하지 않을 거라는 전제 하에 이런 개념을 혜련에게 반대급부로 주면서 병치시킨 건 무언가 아귀가 맞아보이질 않는다. 물론, 이런 설정 자체와 시도가 나쁘다는 건 아니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그런 시도는 좋다고 본다. 하지만 시도라는 것은 변화의 가능성을 두고 하는 것이 시도이다. 변하지 않을 두 관념을 그저 보여주기 위해 병치시키는 건 누구도 시도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마지막에 가서 들뢰즈 자신도 천 개의 고원에서 노마드의 개념에 대해 인터뷰할 때 가장 이해하기 힘들고, 쓰기 어려웠던 부분이 음악에 관련된 부분이라고 했는데, 그 부분을 그냥 거의 그대로 차용했을 뿐, 어떤 문학적 변주의 시도 자체도 하지 않고 있다. 거기다 내 입장에서 또 이해할 수 없었던 건 들뢰즈가 가장 거부했던 민족주의적 특성으로 혜련을 거의 소설 초반부터 특정 지으면서 노마드로 갈 수밖에 없었다고 귀결시키는 점이다. 물론, 작가 자신도 그 사실을 잘 알기에 혜련의 입을 통해 그 부분을 지적을 하고는 있지만, 애초부터 귀결이 너무 작위적으로 확정되어 있음엔 다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이야기를 대충 정리해봐야겠다. 이 글을 앞에서 나는 감히 망작이라고 표현했다. 아마 거의 순수하게 내 입장에서였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내 아쉬운 건 이문열이란 우리 문단의 거장이 무언가 새로운 시도를 하는데 주저하는 건 아닌가하는 내 의구심 때문이다. 물론, 글을 쓰기 위해 자신의 사상과 뿌리를 완전히 자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글이라는 범주는, 아니 조금 좁게 소설이라는 장르는 끊임없이 자신의 사상과 뿌리를 잘라내 왔기에 존속해왔다고 나는 믿고 있다. 그렇다면 조금 더 변해도 되지 않을까? 아무리 이 시대의 거장일지라도. 조금 더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변주를 시도해 봐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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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초상 또 다시 출발점에 서서

 

 

  아마 내가 젊은 날의 초상을 읽었을 때는 스무 살이거나 스물 한 살적인 거 같다. 중요한 것은 그때쯤 한창 치기어린 젊음의 열정으로 자신을 소비하던 나는 이 책의 주인공처럼 미친 듯이 책을 읽었고, 미친 듯이 방황을 갈구했으며, 미친 듯이 사랑을 탐했다는 사실이다. 특히나 전공이 신학이니 만큼, 밑도 끝도 없이, 아니 위도 한도도 없이, 사변적 진실을 추구했기에 당시의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을 읽고 꽤나 감동을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의 책을 폭식하기 시작했는데, 그 폭식이라는 것이 대개 그렇듯이 소화불량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그 때문인지 이 책을 읽으면서도 기억은 나는데, 무언가 흐릿한 인상만 계속 지속되었다. 그 이유는 아마 이렇게 생각한다. 첫째는, 내가 꽤나 이 책을 읽을 때 조소와 냉소의 시선으로 보았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왜냐하면 당시 내 또래에 비해 이 경험 저 경험이 많고, 다소간의 허황된 지식을 자랑하던 나로선, 자신을 비슷하게 투영하여 보여주는 이 글이 꼴 같지 않게 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 해 겨울의 장면에서 겨울 바다로 가는 여정과 화자가 느낀 감정은 내가 대학을 입학하기 전 혼자서 겨울에 동해 바다로 갔던 기억과 매우 닮아 있었다. 하지만 나의 기억은 이문열의 글처럼 그렇게 과장된 미사어구로 치장되어 있진 않았다. 물론, 당시 소설보다는 시에 대한 열정이 과해, 그 과정을 시로 짧게 압축한 나와 이문열의 차이긴 하겠지만, 뭐랄까, 이 전체적인 어투와 문체에 대한 거부반응이라고 말하면 좋을까? 소설 내내 거하고 과하게 나열해놓는 이문열식 문체에 나는 꽤 거북스러움을 느꼈으리라 두 번째 이유를 추측해 본다. 그리고 셋째는 스스로 그렇게 과신한 경험과 지식의 짧음에 대한 이유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예를 들어서, 가장 이 소설에서 흐릿했던 기억이 하구인데, 당시 나는 거의 아파본 기억이 없으므로 그러한 감정과 기질에 대해서 이해한다는 것이 사실상 거의 불가능했다. 실제로, 이 때문에 주위 사람들로부터 당시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 하나가 너는 몸이 튼튼해서 이해하지를 못해?’라는 말이었다. 그때 생각하면 사실 별스럽지 않은 말이었지만, 이제 완연히 병이 들고, 평생 이와 같은 상태에서 살아야 하는 상황이 되다 보니, 이제야 그 말에 중요성에 대해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육체적 우울함이란 정신적 예민함이 주는 고통과 절망과는 사뭇 다르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된 까닭이다. 그리고 친구들과의 치열한 논쟁과 문학회에 대한 일들은 사실 당시 내가 겪었던 일들은 아니었다. 그 일들은 차후에 겪었던 일들로, 어찌됐든 스물 살 적 나이에 서른을 훌쩍 넘긴 사람이 그 때를 기억하여 쓴 글에 대해 온전히 체감한다는 것, 어쩌면 그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을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하지만 이제는 내 나이가 소설을 쓴 이의 그 당시 나이를 넘었고, 경험 또한 더해져 많은 공감과 함께, 많은 생각들이 뇌리를 스쳐지나 간다. 왜 이문열일까? 왜 한국문학을 시작함에 있어 많은 사람들이 이문열이어야 했고, 나 또한 왜 그러했을까? 그리고 왜 지금 다시 무언가 새로운 출발을 함에 있어서 나는 다시 이문열을 보게 되는 것일까?

 

  사실, 위의 질문에는 약간의 어불성설이 있다. 왜냐하면 애초에 나는 이 글을 별로 읽고 싶지 않았고, 때문에 모임이 아니었다면 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로, 분명 병과의 일별을 꿈꾸며 이제 새로 시작해야 하는 지점에 서있는 것은 맞지만, 이 지점에서 사실 나는 이문열을 애초에 떠올리진 않았다. 그런데 우연과 우연이 더해져 이문열이 나의 시작이 되었다. 그것도 가장 그의 치기어린 소설인 젊은 날의 초상.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이란 참 이상한 존재 같다. 아니면 나라는 인간이 그런지도 모르겠다. 늘 무언가 구실을 찾고, 이유를 찾아, 정당화시키려는 기질이 있다고 말해야 할까? 어떻게든 말도 안 되는 두 가지를 끌어들여서 접점을 찾으려고도 하고, 때문에 우연을 필연이라 우기기도 한다. 그 까닭에 지금부터 어떻게든 필연으로 가고자 발버둥을 쳐보고자 한다.

 

  첫 번째는, 왜 이문열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한국 문학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논외로 치더라도, 내 개인이 왜 이문열로 한국 문학을 시작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를 지금 잠깐 생각해보고자 한다. 먼저는, 그 사변적인 문체의 동질성에서 찾아야 할 거 같다. 아니, 그보다 더 솔직하게 근본을 파고들면, 주제에 대한 동질의식에서 이유를 찾아야 할 거 같다. 일단, 한국 문학에서 내가 아는 한 이문열보다 더 치열하게 본질에 대해 고민하고, 관념적 주제에 대해 문제제기 해온 작가는 없다. ‘사람의 아들을 필두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황제를 위하여’, ‘금시조’, 그리고 최근에 호모 엑세쿠탄스에 이르기까지, 그의 정치적 사상이 어찌됐든 혹은 관념이 옳든 그르든, 가장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혹은 가장 타당한 보편성에 대해 그는 소설을 통해 줄곧 고민해왔다. 그 때문인지 늘 외국 소설의 거대담론에 익숙해있던 내게 이문열은 처음부터 친숙하게 느껴졌다. 동시에 그 이유로 자기 거울에 대한 일종의 혐오의식 또한 존재해왔다. 게다가 처음에 언급한 그 사변적인 어투와 문체, 비록 나이가 들면서 정제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과장법은 정말 보다보면 어지러울 지경이다. 특히, 지금 읽은 이 젊은 날의 초상엔 얼마나 망()이 많은지, 소망이나 희망이면 그만인 것을, 섬망, 미망, 열망, 갈망 등등, 끝도 없는 망()들 때문에 나 또한 새벽에 불현듯 깨 나의 망()과 또 다른 망()에 대해 생각해보지 아니할 수 없었다. 사실, 이것은 일종의 칭찬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동시에 너무 많은 한자어의 난립으로 소설 자체를 어렵게 만들었다는 질책이기도 하다. 어찌됐든 그럼에도 이문열은 이 두 가지 칭찬과 질시에 가까운 질책을 양립하여 넘어선 작가인 것은 분명한 거 같다. 비록 그가 한국 소설이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지 제시했다고 말하긴 힘들겠지만, 나와 같이 사변적인 인간에겐, 그리고 서구 학문의 찌끄러기에 길들여진 인간에겐, 어차피 거대담론은 피할 수 없는 문제이고, 그런 소설이 아니라면 무언가 허전함을 느낄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내게 있어 결국 한국 소설의 출발점은 역시 이문열일 수밖에 없다.

 

  두 번째로 왜 젊은 날의 초상이어야 하는가이다. 사실, 여기는 많은 어패가 있어서 어떤 장황설을 늘어놓든 변명에 불과할 것이란 진실을 먼저 전제하고 싶다. 왜냐하면 내 출발점은 애초에 사람의 아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우연히 찾아온 젊은 날의 초상에 대해 나는 또 다른 시작점이란 지점으로 큰 매력을 느끼고 있다. 그 첫째 이유는 내가 아직 내 이야기에 대해 정말 정직하게 풀어본 적이 없는 까닭이다. 물론, 지금까지 나는 열 개가 넘는 소설을 썼고, 거의 다 내 이야기를 했다. 정말로 순전히 내 이야기를. 그렇지만 정직하게 그리고 진지하게 내 자신을 바라보고 썼느냐하고 누군가 되묻는다면, 글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아니라고 밖에 말할 방도가 없지 않을까? 사실, ‘젊은 날의 초상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그의 다른 글보다 훨씬 덜 정제되어 있고, 때문에 과장과 치장으로 한껏 들떠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것은 그의 젊은 날에 대한 아린 향수이며, 그 아린 향수는 당시의 퇴폐적 낭만주의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니, 그냥 그의 미망에 들뜨거나, 섬망으로 휘몰아친 낭만주의라고 해두는 게 더 좋을 듯싶다. 그럼에도 그가 꼭 쓸 수밖에 없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부끄러운 자화상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바로 자신의 기반이며, 때문에 지금의 자신을 이루는 그 출발점이었던 이유에 있지 않을까? 그 이유로 나의 출발점 또한 젊은 날의 초상과 유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나는 이제야 정직하게 받아들이고, 거기서부터 출발해보려고 한다. 나 또한 모든 망()이 술이 되어, 낭만이 되고, 낭만이 자학이 되어, 밑도 끝도 없는 방황에 대한 열정으로 불타올랐던 그 시절에 대한 기억부터,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하니까, 그것이 내 진실이니까. 비록 그것이 나 자신만을 위한 하나의 아린 향수에 불과할지라도, 결국 거기서부터가 내 출발점이니까, 내 부인할 수 없는 거울이니까. 또 다시 시작해보련다. 문학에 대한 긴 여정을, 그와 함께 시작될 내 자신에 대한 과도한 연민과 끝 모를 허상에 대한 갈망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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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 붓다의 도에 다다른 살인자의 도

 

 

  이제까지 김영하에 대해서 제법 매력을 느끼고 있었지만, 늘 그의 도발 방식에 대해선 의문을 품고 있었다. 어쩌면 그의 첫 작품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소설이 내 뇌리 속에 너무 각인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 때문에 그동안 그의 작품을 품평한 글들을 찾아보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없고, 거의 그의 단편들에 관한 글들뿐이었다. 게다가 더 의뭉스러운 이놈의 기억이란 게 늘 그렇듯이, ‘옥수수와 나빼고는, 내 자신이 쓴 품평을 읽는데도 무슨 글이었는지 생각이 1도 나질 않았다. 그저 지금 이 글의 내 첫 문장과 비슷하게 그의 섹시한 매력은 인정하지만 도발하는 방식은 조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런 소리만 있고, 무언가 품평에 알맹이가 빠진 느낌이랄까? 이런 경우는 대게 두 가지 중 하나다. 첫 번째는, 내가 정말 집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정말 그 글이 알맹이도 없기 때문에 빙빙 돌리다보니, 그렇게 된 경우이다. 물론, 그 글을 아직 소화하기에 내 자신이 덜 여물었던 때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찌됐든 그동안의 나의 김영하에 대한 단상은 분명히 이런 키워드였다. ‘섹스어필’, ‘도발’, 그렇지만 무언가 알맹이가 없는?’ 그런데 이번에 살인자의 기억법을 보고서, 이제까지의 김영하에 대한 나의 고정된 이미지가 무너져 내렸다. 그는 이제 완연하게 섹스어필하고, 도발적일 뿐 아니라, 이제는 그 분야에 무언가 하나의 일가를 이룬 듯한 느낌이랄까? 물론, 오늘의 이 느낌으로 김영하의 글을 당분간 파기로 결정했기에, 조금은 섣부른 감은 없지 않아 있지만, 이 글 하나로만으론 충분히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는 느낌적인 느낌이었다.

 

  먼저, 글에 대해 전체적으로 말하기 전, 이 글에 대해 한 가지 내가 가지고 있는 전제적 몰입도가 존재했음을 밝히고 싶다. 그것은 내 개인이 알츠하이머는 아니지만 뇌 쪽에 문제가 있어서, 이제까지 몇 번 기억에 관한 실제적인 문제를 당면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영화로 처음 이 글에 대해 소문을 들었을 때 흥미를 느꼈었고, 이에 누군가와 만나기로 한 약속을 굳이 서점으로 해서, 미리 약속 시간보다 빨리 와 이 책을 골라 읽었다. 그리고 그 첫 장부터 나는 이 글에 몰입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이런 개인적인 이유들과 함께 또 다른 이유들로.

 

  첫째, 나는 이 소설이 구성하는 문장방식에 대해 주목하고 싶다. 아니, 어쩌면 이 소설의 구성방식이라고 말하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내러티브가 존재하지만, 동시에 철저하게 파괴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아예 처음부터 이 소설은 그냥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시적인 문장들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사유적 문장들이라고 해야 하나? 사실, 둘 다 온당한 표현은 아니란 생각은 든다. 그렇지만 그 중간적 공간 속에서 문장들은 점층적으로 쌓여서 하나의 소설의 내러티브를 구성해나간다. 너무 길고 지루하지 않게, 물론 다소간의 반복이 존재하긴 하지만, 소설의 소재가 알츠하이머인 만큼 충분히 이 부분은 고려해볼만한 요소이다. 그리고 이러한 반복 또한 점층적 구성 속에서 심지어 나중엔 수미상관적인 기법으로 온전한 하나의 원을 이룬다. 물론, 지금 이 소리들이 다소간의 허공의 붕 뜬소리처럼 들릴 거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내용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나중에 조금 더 보충한다면, 지금의 이 이야기가 다소간의 타당성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해본다.

 

  내용적인 측면에서 이 글은 사실은 간단하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살인자가 26년 동안 살인을 하지 않게 되었다가, 다시 살인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 중간에 교묘한 이중 삼중 장치들이 마련되어져 있다. 존재하지 않았던 딸에 관한 이야기, 딸과 결혼하고 싶다는 박주태라는 남자의 이야기, 주인공은 그 박주태를 최근 그 지역의 연쇄살인 사건의 주모자라 여기고서 기를 쓰고 그와 딸을 떼어놓으려 한다. 그리고 역시 존재하지 않았던 안형사와 동네 개새끼 이야기 등등, 어쩌면 주인공이 알츠하이머 환자이고, 게다가 살인자이기에 추정할 수 있는 이런 매우 당연하고 뻔한 장치들이 존재한다. 아니, 그렇지만 실은 존재했던 딸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26년 전 자신이 지워버리려고 했던 기억 속에 존재했던 딸에 관한 살인 이야기, 그는 그때 그녀의 엄마를 죽이고서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전복된 차와 함께 그의 뇌는 문제를 일으켰고, 어쩌면 그 자리에서 그대로 그렇게 멈춰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사의 진단 아래 26년 동안 멈춰있던 뇌가, 살인에 대한 본능이, 그 추억이 되살아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는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 그렇다면 그 누군가는 누구일까?

 

  글속에선 그가 죽인 그의 딸이 그의 실제 딸이 아니라 그를 헌신적으로 돌보던 요양보호사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까지 그 지역의 연쇄 살인범으로 단언한 박주태는 실은 자신을 의심하던 경찰이었다. 게다가 그가 안형사였다고 밝힌다. 하지만 주인공은 분명히 안형사와 박주태를 다른 인물로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또 어떻게 자신이 자신의 딸을 모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현실은 결국 그 지역 연쇄 살인범은 그 자신이었다는 사실이다. 사실, 여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책을 몇 번 더 읽으면 지금의 이 구성이 날실과 씨실처럼 잘 엮인 그런 구성이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애초에 그가 죽이고자 한 인물들은 이런 주위의 배경과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가 붙잡고 외우던 반야심경 속엔 이런 말이 있다. 그러므로 공 가운데는 물질도 없고, 물질은 결국 배경일 뿐이다. 느낌과 생각과 의지작용과 의식도 없으며, 살인을 하는데 그는 본능만 존재했다. 형체와 소리, 냄새와 맛과 감촉과 의식의 대상도 없으며, 그의 살인의 대상은 그야말로 무차별적이었다. 거기엔 결코 선악의 구별도 그 원인도 없었다. 그러하기에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없어짐과 괴로움을 없애는 실도 없으며,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었다. 결국, 그의 살인은 공으로 가기 위한, 그 자신을 향한 도리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그의 기억 속에 달라붙은 딸과 갖가지 형상들마저 지워내고서 온전히 공으로 가고자 하는, 살인자로서의 장인 정신! 아니, 살인도심!

 

.......

 

  사실, 마지막 반야심경의 구절을 처음과 똑같이 되돌려놓아 글을 완성한 것을 보고, 나는 일종의 당혹감 비슷한 전율을 느꼈다. , 이 인간이 정말 제대로 하나 건졌구나. 이제 더 이상 장난으로 도발하지 않고, 일심을 다해, 도를 논하기까지 하는 구나. 때문에 그 다음 문장을 보고선, 작가의 의도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덧대기를 해놓은 것 같아 보였다. 왜냐하면 반야심경으로 끝을 맺어버리면 이 글이 너무 철학서적 같을 테니까. 마치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통해 예수의 언어를 모방함으로써 전면 부인한 것과 같이, 붓다의 언어를 통해 붓다를 부인하는 모양새가 될 테니까. 물론, 여기서의 살인이 어떤 비유를 말하는 건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한 종교나 철학의 오의를 통해 하나의 글을 종결짓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러할 경우 대부분 종교와 철학이 문학을 집어삼키기 쉬운 까닭이다. 하지만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은 하나의 소설로 붓다의 근본불교의 중요한 경서를 가지고 놀았다. 아니, 가지고 날았다. 어쩌면 그저 장치적 기법으로 하나의 농담처럼 사용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한 농담일지라도 뼈를 단단히 붙여 누군가의 폐부를 찌를 만한 힘이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 아니, 이런 글 한 번 써본다면 시원하지 않을까? 그 저의가 어떻든 간에.

 

 

p.s

 

  글을 다 읽고 여운이 심해, 영화를 보았다. 하지만 영화는 눈에 잘 들어오질 않았다. 분명 좋은 영화이기는 한데, 영상으로 텍스트를 담아낼 순 없는 이유 때문일까? 아니면 영화가 이 글의 본질적인 살인의 도보다는 나름의 내러티브를 구성하려 했던 이유 때문일까? 이유가 어찌됐든 책을 본 사람이라면, 영화를 통해 무언가를 기대하기는 힘들리란 생각을 해보았다. 그저 글에 대한 여운을 되새김질 한다면 모를까, 아니 사실 그마저도 힘들었지만. 그래도 영화가 나쁜 영화가 아니었음은 이야기해야겠다. 그냥 이 p.s 쯤이라 생각하면 좋을 거 같다. 불필요하지만 가끔 더 읊조리거나 덧대고 싶은 그런 인간의 심리, 뭐 대충 그렇지 않을까? 이 소설의 김영하의 마지막 단락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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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렐의 발명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5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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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렐의 발명 - 아름다운 순간이 영원으로 지속되기를 바라는 인간의 염원

 

 

  5개월 만에 켠 넷북은 먼저 오랫동안 V3가 업데이트 되지를 않아 피시의 보안상태가 위험함을 가르쳐준다. 물론, 이 메시지가 매우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멘트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의례적임에 못지않게 자못 관료적이기까지 한 나는 굳이 V3를 업데이트 하고 정밀검사와 최적화까지 진행한다. 그와 동시에 5개월 만에 문학이라고 일컫는 문자들을 읽어 내려간다. 늘 그렇듯이 제대로 읽어낼 수 있을까?’ 혹은 문자를 이해할 수 있을까?’ 이런 온갖 상념들과 함께.

 

  이 소설의 모든 초점이 마지막에 맞추어진 까닭인지 몰라도, 처음에 사실 나는 다소간의 혼란 가운데 글을 읽어야만 했다. 주인공이 사형을 받은 까닭도 잘 모르겠고, 그렇다고 굳이 무인도에, 그것도 매우 위험하다고 알려진 무인도로 도망친다는 설정이 너무 작위적인 것 같았다. 게다가 서두의 보르헤스가 말한 모험 소설? 물론, 나는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와 쥘 베른의 지구 속 여행을 어릴 때 읽어본 적이 있다. 그런데 단지 주인공이 무인도에 있다는 이유 빼고 이게 무슨 모험 소설인지,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갑작스런 한 무리들의 등장, 그런데 여기서 더 웃긴 건 주인공이 어떤 노이로제인지 몰라도 그 무리들이 자신을 체포하러 왔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그동안 자신의 생활 거주지였던 고지대의 박물관과 예배당을 포기하고, 거의 늪지라고 말할 수 있는 저지대로 도망간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조수간만의 차이로 밀물 때면 물에 젖은 채로 일어나고, 저지대의 늪지에서 식물 뿌리들로 연명하는 등, 웃지 못 할 해프닝들이 연속적으로 발생한다. 그러다 그는 그녀를 발견한다. 포스틴, 집시처럼 관능적인 몸매로 색색의 스카프를 두르고서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석양을 바라보는 여자. 개인적으로 나는 여기서 주인공이 그 여인에게 사랑에 빠지는 설정을 처음으로 공감할 수 있었다. 어떤 여인의 묘사나 분위기 때문이 아니라, 그 공간에서 그리고 너무나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들 속에서 그가 기댈 수 있는 존재를 찾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니까. 게다가 관능적이고 늘 석양을 바라보는 분위기 있는 이성이라면 그 어떤 남자가 쉬 사랑에 빠지지 않겠는가? 하지만 소설은 언제나 그렇듯이 여기에도 덫을 놓아둔다. 모렐, 포스틴과 모렐의 관계는 이 소설 속에서 명확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모렐이 포스틴에게 구애하고 있다는 사실이고, 단지 그 이유로 주인공이 극심한 질투에 빠진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 주인공은 점점 이성을 상실해간다. 대담하게 포스틴에게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꽃으로 작은 화단을 만들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포스틴은 그를 향해 아무런 대꾸도 없고, 주인공의 화단에 대해서도 그 어떤 시선도 보내지 않는다. 게다가 포스틴에 대한 끝없는 갈애 때문에 결국 몰래 잠입한 박물관에서 우연히 마주친 모렐과 포스틴의 친구들조차 그에게 그 어떤 시선을 주지 않는다. 마치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순간, 여기서 나는 프랑스 소설인 벽을 드나드는 남자를 떠올렸다. 그렇지만 주인공은 그 현상에 대해 자신이 낮 동안 섭취한 이상한 뿌리로 인한 환각이 아닐지 의심한다. 아니, 심지어 모든 것이 꿈이거나 거짓이 아닐지 의구심을 갖기 시작한다. 하지만 마지막 모렐의 연설을 통해 환각의 정체는 드러난다. 환각은 자신이 아닌 그들이었다. 그런데 그 환각엔 시각적인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뿐만 아니라, 촉각과 후각, 한 발자국 나아가서 공감각의 이미지까지 재현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허상들은 주기적으로 늘 반복되어 나타난다. 순간이 영원으로 남겨진다는 염원을 품고서. 대체 이 말도 안 되는 설정을 통해 소설가 아돌프 비오이 카사레스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여기서 나는 두 가지 사실을 조금 더 주목해보고 싶다.

 

  첫째, 이 소설 서두에도 나오지만 이 소설의 배경인 무인도는 매우 위험한 곳으로 표현되고 있다. 특히, 서두에 교묘하게 주인공에게 이 섬을 소개해준 이탈리아 상인을 통해 이 섬을 조사했던 증기선 선원들이 모두 전염병에 걸렸다고 말하면서, 그들의 손톱과 발톱, 머리카락이 빠지고 피부와 눈의 각막이 죽어버렸다고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 주인공의 죽음의 형상에 대한 복선을 미리 깔아놓은 셈이다. 물론, 이 글속에서 주인공은 그런 이야기들을 모렐이 자신의 영원한 예술품인 자신과 자신 친구들의 이미지들을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소문을 냈을 거라고 추측한다. 동시에 그렇게 형상화된 모렐과 그의 친구들이 모두 자신과 같은 최후를 맞이했을 거라는 직감을 갖는다. 그러면서 이미 존재하지 않는 포스틴을 사랑하는 자신의 비참함에 대해 절감한다. 그러함에도 그는 포스틴과 자신의 영원한 형상을 남기기 위해 모렐의 발명품을 통해 자신을 이미지화하여 포스틴과 사랑에 빠진 한 남자를 그 섬에 남겨두었다. ,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를 실체화하여 영원히 반복되는 거짓 형상으로 자신을 남겨둔 것이다. 자신의 목숨과 바꿔서. 대체 무슨 이유로 그렇게까지 한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쉽게 예술의 영원성이니 혹은 인간의 순간이 멈추지 않고 영원으로 지속되기를 원하는 본능이니 하는 생각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것 말고 달리 이 소설의 설정들과 주인공의 행위들을 설명할 수 있는 그 어떤 언어들은 없다. 그렇지만 이 소설이 보여준 것은 그 차원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절심함의 차원에 있었다는 생각을 문득 해보게 된다. 누구나 쉽게 사진을 찍고, 영상을 남기고, 녹음을 해서 우리의 이미지를 이 세상에 남기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촉각과 후각, 한 단계 더 나아가 공감각까지 가세한 영원한 형상이 존재한다고 해보자. 그리고 이 소설의 설정처럼 실상 그것은 현재로선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가 신이 아닌 이상. 그러하기에 여기엔 대가가 필요하고, 그 대가는 소설 속에서 처참한 죽음의 형상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소설 속 인물들은 모렐도 그랬고, 주인공도 그랬고, 모렐이 만든 거짓 소문이겠지만 어쨌든 모든 이 섬을 조사했던 증기선 선원들조차도 자신들이 영원 속에 남겨지기를 선택했다. 만약 내 자신이라면 어떠할까? 과연 나는 순간의 영원한 지속성을 위해 내 자신을 포기할 수 있을까? 그것이 소위 말하는 예술이며 문학일까? 사실, 잘 모르겠다. 나는 너무 거창한 이야기들은 경계하는 편이니까. 그렇지만 그 절실함만큼은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본다.

 

  둘째로, 내가 주목한 부분은 포스틴의 존재이다. 그렇지만 사실 이 부분은 거의 여담에 가깝거나 편지의 추신과도 유사한 부분이다. 말 그대로 포스틴은 포스틴으로 남겨두어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소설의 저자는 다소 포스틴에게 의미를 부여한 장면이 있다. 마지막에 가서 주인공은 포스틴에게 베네수엘라라는 거창한 국가의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자신의 사형이 다소간의 정치적 상황과 엇물렸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조금 인터넷을 뒤져보았다. 1940년대 베네수엘라 정치적 상황에 대해. 하지만 인터넷에 나온 내용은 거의 없었다. 사실, 베네수엘라 하면 떠오르는 것은 세계에서 가장 미스 유니버스를 많이 배출한 나라, 카라카스의 고원, 정치적으로는 차베스 정도? 내 개인적으로는 그러하다. 그런데 우리나라 1940년대도 잘 모르는 내가 베네수엘라 1940년대를 알아보려고 하니, 당연히 단편적인 지식밖엔 얻을 수가 없었다. 이 소설 속에 아마 발렌틴 고메스라고 인용된 비센테 고메스30년간의 독재, 그리고 그 독재를 통해 베네수엘라의 저장된 많은 석유들이 외국 자본으로 유출되었다는 사실, 뭐 이 정도? 하지만 이 정도로 왜 주인공이 포스틴에 거창한 베네수엘라라는 명칭을 달았는지는 다소 공감할 수 있었다. 그런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베네수엘라일지라도 그 국가가 연주되면 뜨거워졌던 그의 가슴처럼 무언가 함의적인 이중성을 포스틴에게 부여하고, 이를 통해 조금 더 포스틴의 추상성을 구체성으로 표현하고 싶었으리라 여겨본다. 마치 우리의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가 진짜 나무의 뿌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포스틴에게 나름의 시적 형상화 작업과 함께 정치적 함의가 들어갔을 것이라 예상해본다. 하지만 이미 이십대부터 포스트모던 시대에 살았던 나로선 포스틴의 추상성 쪽이 조금 더 낭만적이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동시에 다른 구체성으로 포스틴을 시적으로 형상화하는 방향은 없었을까하는 아쉬움도 있다.

 

  이제 이야기를 정리해보아야겠다. 한 마디로 좋은 소설이었고, 신선한 충격이었다. 방향은 다소 다르지만 이와 비슷한 구상의 소설을 현재 계획하고 있는 나로선 좋은 공부도 되었다. 동시에 그동안 백 년의 고독픽션들등을 통해 당혹스러움을 느꼈던 라틴 문학의 환상적 리얼리즘에 대해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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