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의 문 - 2010년 제34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박민규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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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문 - 삶과 죽음에 관한 진부한 문학적 접근

 

 

  처음 소설을 접했을 때 첫 문두에 모택동의 혁명에 관한 이야기를 들먹이는 것이 무언가 폭력에 관한 문제의식을 지닌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읽어 내려가다 보니, 마치 진지했던 혁명가인 모택동이 이 시대에 하나의 상품으로 소비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해서, 혹 현대 시대의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소설인가 하고 다시 착각을 하였다. 그런데 웬걸,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들어, 집단자살과 낙태에 대한 이야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렇다면 처음에 뭐 땜시 거창하게 모택동에 혁명의 폭력의 당위성, 그리고 현대 시대의 그 폭력적 소비성에 대해 언급한 것일까? 전에 박민규 소설을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만 살짝 본 나로선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게다가 내가 가장 싫어하는 주제인 죽음에 관한 문제... 물론, 소설에서 삶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인 죽음을 간과하고 쓸 이야기는 거의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질문을 철학적인 접근이 아닌 문학적인 접근 속에서 삶과 철학을 어우른 질문을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할 것이다. 아니, 반드시 해야만 하는 작업일 것이다. 그러하기에 그 질문 방식을 어떤 식으로 취하고, 어떤 식으로 묘사할지가 문학적 화두의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 속에서 취한 방식에 대해, 글쎄 뭐랄까, 나는 도무지 긍정하고 싶지가 않다. 이런 이유로 두 가지 점에서 의문을 던져 보고자 한다.

 

 

  첫 번째로 이 소설이 취한 접근방식에 관한 직접적인 질문이다. 소설 속에서는 자살에 관해 최근 사회 문제가 되었던 집단자살에 관한 이슈를 통해 접근을 하고 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느낄 때, 이 소설 속에서 집단자살은 말 그대로 하나의 이슈로 끝나버린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집단자살 속에 있는 어떤 심리의식이라든가, 하다못해 주인공이 왜 집단자살을 선택했는지에 대한 설명조차 드러나 있지가 있다. 물론, 박민규 특유의 소설을 개인이 아닌 소외계층그룹에 대한 관심사로 돌리는 성향이 이곳에 묻어난 것이라면 일정 부분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집단자살에 대한 어떤 심각한 문제의식보다는 따뜻한 연민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도 한편으로는 긍정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제대로 된 접근의식을 갖지 못한 채 단지 소재로 채용을 한 것은 하나의 겉멋이나 허례로 밖에 느껴지질 않는다. 그리고 낙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 이 글속에서 낙태를 하는 여인의 낙태에 대한 당위성을 개인적으로 느낄 수가 없었다. 그저 이 또한 주인공의 자살충동의 근본적 이유의 하나로써 하나의 도구로 채택되었을 뿐, 근본적인 질문이나 문제의식을 느끼게 하기에는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전체적으로 이런 느낌을 갖게 된 것은 아마도 박민규 자체가 어떤 현상에 관해 문제의식을 갖고 그 저변에 대해 파헤치기보다는 연민하고 공감하려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일 것이란 추측을 해보게 된다. 그렇지만 그런 연민과 공감을 극대화하기에 이 소설이 선택한 방법은 너무 정공법이었다. 여타 다른 박민규 소설에서 드러난 어떤 특유의 해학이라든가 문학성이 이 글속에선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두 번째로 왜 하필 많은 박민규의 소설 가운데 이 소설을 이상 문학상에서 택했는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

 

 

  사실, 이 글을 읽은 후 나는 조금은 기대했던 박민규에 대해 크게 실망할 뻔했다. 만약 그 이후 그가 쓴 다른 단편들을 보지 않았다면 난 분명 그렇게 판단했을 것이다. 전에 읽었다고 잠깐 언급한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도 실제로 제대로 읽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왜냐하면 당시 나는 다른 스터디의 합평 책으로 이 책이 채택되어 어쩔 수 없이 읽었는데, 것도 그 주에 유난히 무슨 일들이 겹쳐 합평 글을 쓰는 것은 고사하고, 스터디 시작하기 30분 전에 발췌독으로 대충 훑어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뭐 소설에 대해 느낌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냥 줄거리 파악하고, 아 박민규는 비 오는 날 갑자기 당기는 200원짜리 자판기 밀크커피에 담배 한 대 같은 느낌이구나 하는 정도였다. 그렇다고 내가 박민규를 결코 무시한건 아니다. 왜냐하면 난 그 느낌 때문에 한동안 잊고 살았던 시를 다시 쓴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렇지만 그 정도의 독서로 박민규에 관심을 갖고 알고 있다고 하기엔 무리라고 이야기해야 맞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 스터디 누군가의 필사본을 통해 난 이번 기회를 통해 진짜 박민규를 접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내가 느낀 점은 박민규를 단순히 비오는 날 당기는 200원짜리 싸구려 커피와 담배 한 대만으론 취급할 순 없다는 사실이다. 일례로 같은 죽음의 문제를 다뤘어도 그의 소설 ‘근처’에선 근처라는 문학적 뉘앙스를 통해 죽음의 문제를 색다르게 접근하고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누런 강 배 한 척’과 ‘낮잠’에선 한 발짝 더 나아가 이를 끈끈하고도 풋풋한 노년의 로망스와 인간애로까지 확장시키고 있다. 그런데 ‘아침의 문’에서 선택한 방법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앞에서 잠깐 밝혔듯이 무언가 정공법을 택한 것 같은데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듯 끼를 부리고 있지 않은가? 기왕지사 정공법을 택했다면 좀 더 치밀함과 처절함을 가지고 질문해 들어가는 것이 맞을 텐데, 이 글속에선 난 그런 끈끈함을 도저히 느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문학성 또한 정공법을 택한 까닭인지 단순한 도식과 구조를 이용해 죽음과 생명에 대해 표현을 한 것으로밖에... 다른 무언가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 이 번 기회를 통해 박민규라는 작가를 알게 된 이유 때문인지, 그래서 더욱 그 아쉬움을 금할 길이 없다. 그리고 그의 글 중 이렇게 가장 떨어지는 그답지 않은 글을 이상 문학상을 준 이들에게 솔직히 독설을 퍼붓고 싶은 마음까지 든다. 굳이 꼭 이렇게 진부한 방식으로 그것도 쉽게 다룰 수 없는 삶과 죽음이란 거창한 문제를 다뤄야지만 작가로서 인정을 해주는 건지, 이렇게 굳이 깊이에의 강요를 통해 자유롭고 번뜩이는 한 작가의 어깨에 힘을 잔뜩 실어줘야만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으로 질문 한 가지를 더 던지고 싶다. 문학이란 게 과연 무엇일까? 삶과 죽음 이 모든 것을 다루는 것이라면 철학도 있고, 심리학도 있고, 예술도 있는데, 왜 꼭 우리는 문학이어야만 하는가? 그것은 어떤 문학이 지닌 특유의 문학성이란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문학성이란 걸 꼭 하나의 천편일률적인 틀과 잣대로 들이밀어야만 하는 것일까? 무언가 또 아쉽고 아쉬워 의문이 내내 남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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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여, 나뉘어라 - 2006년 제30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정미경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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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여, 나뉘어라 - ‘이상’에 관한 진실과 거짓 혹은 고백과 부인

 

 

  글이란 왜 쓰는 것일까? 근래 잘 써지지 않는 글을 억지로 쓰면서, 또 지워가면서 나는 혼자서 되뇌어보곤 한다. 다가설 수 없는 먼 수평선에 대한 동경? 혹은 너무 가까워서 감지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가령 예를 들면 늘 쓰고 있어서 손이라 평소에 지칭하기 쉽지 않은 그런 대상에 관한, 치열한 도리깨질? 내 내면 속에서 오랫동안 존재했던 이 두 가지 물음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질문이다. 아름다움을 향한 인간 내부의 고유의 속성, 영원히 그 아름다움을 소유하고 싶어서 그냥 있는 그대로 바라보거나, 치열하게 부서뜨려 자연적인 그 형태를 자신만의 자의적 형태로 바꾸어내고 싶은 본능들... 물론, 여기서 나는 이런 고차원적인 글쓰기에 관한 본질에 관해 정의를 내리려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나눠진 밤의 사이를 가로질러 부인하고 싶지만, 차마 세 번 부인할 수 없던 어떤 대상에 관한 보고서인 이 글에 대해 막연히 내 감정을 써내려가고자 할 뿐이다.

 

 

  북구의 습기를 한껏 머금은 예테보리나 항구에 당도하여, 국경이라는 이름이 무색한 초소를 지나, 한없이 북쪽으로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어디 안데르센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운자 크레보’란 천국보다 아름다운 곳에 P는 천사 같은 그의 부인 M과 함께 살고 있다. P, 언제나 나에게 있어서 넘어설 수 없는 대상이었던 그, 그가 존재했기에 나는 항상 학창시절 2등이었고, 같은 외과의로서 그가 보여준 정점을 통해 나는 스스로 자신이 위치한 자리에 대한 자각을 할 수가 있었다. 때문에 그가 사라졌을 때, 나는 손쉽게 외과의라는 자신의 존재 위치를 벗어나, 영화판이라는 전혀 새로운 곳에 뛰어들 수가 있었다. 아니,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거리임과 동시에 이정표였던 그가 사라지게 되자, 나는 새로운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동안 그는 미국에서 또 다시 외과의로서 정점을 찍으며, 독창적인 논문으로 이름을 날렸고, 나는 나름의 작가주의 영화를 만들어 외국에서 인정받는 감독이 되었다. 하지만 의뭉스럽게도, 그는 또 갑자기 모든 정점을 찍었던 미국의 생활을 접고, 이곳 너무나도 낯설고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북구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유유자적하면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외과의였던 그의 전공을 ‘면역학’으로 바꾸면서, 이제는 환자들을 수술하는 의사가 아닌 새로운 의학 프로젝트를 개발하는 연구의로서... 그리고 마치 그 모든 삶이 농담이라도 되는 듯 그의 찌든 가난을 보여주는 자동차란? 글쎄, 삶에 모든 정점을 찍었기에 가능한 그만의 농담이라고 해야 할까? 게다가 그 농담 같은 삶의 표징을 넘어서 그가 착수하고 있는 ‘러브피아’라는 프로젝트는, 마치 무슨 영원히 사랑을 지속시켜 주는 콘돔 광고 같은 이름이지만, 영원한 사랑을 가능하도록 인간의 기억을 조작하는 프로젝트라고 하는데, 말하는 모양새가 사뭇 진지하여 차마 농담이라 폄하할 수가 없다. 아니, 그의 삶과 그 아우라는 늘 그 모든 허공에 뜬 이상들을 진짜처럼 바꾸어왔기에, 그 누구도 그렇게 폄하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내가 여기 북구에 온 것은 영화 시사회와 대학 강연이라는 허울 좋은 푯말이 있었지만, 실은 순전히 그를, 온전한 내 삶의 표징이었던 그를 만나고자 했던 이유였다. 그리고 그에게 그 10년이란 세월을 통해 변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러고 싶었다. 영화를 통해 자신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대화하고 싶은 욕망이 분명히 내부에 강렬하게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나의 영화에 별 관심이 없다. 자신의 영화시사회를 같이 가길 바랐지만, 그는 그저 전날 메이킹 필름을 보는 둥 마는 둥 할 뿐이다. 그리고 감추는 법 없이 모든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자신의 영화에 대해 비평을 해댄다. 그런데 거기에 단 한 마디도 보탤 수 없는 것은 그것이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왜 나는 감출 수 없었을까? 왜 그가 생각한 것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다시금 나는 그에 대한 한없는 콤플렉스를 느낀다. 개성적인 영화로 한국보다 유럽의 세간에 더 널리 이목을 끌어온 내 영화가 한 순간에 보잘 것 없는 삼류영화로 전락해버리는 순간이다. 이렇게 그 앞에 서면 나의 모든 존재는 한없이 위축되기만 한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서, 아니 그의 아내 M에게서 감춰진 비명의 소리가 들린다. M, 처음으로 자신이 감정을 느꼈던 대상, 그러하기에 어쩌면 10년 동안 P를 보지 아니한 것은 P에 대한 자신의 콤플렉스보다는 M에 대한 감정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P였기에 그는 아주 간단히 M을 포기할 수 있었다. 아니, 오직 P만이 M과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믿어왔다. 그런데 숨길 수 없는 M의 절규는 뭉크의 화실을 통해 들려온다. 대체 무엇이 M에게 비명을 지르게 만든 것일까? 그는 이야기한다. 뭉크의 화실에서 훔쳐온 ‘절규’와 ‘마돈나’에 관해, 비명을 지르고 있는 뭉크 자신을 빗댄 절규의 표정을 흉내 내며, 절정에 이른 M의 표정은 마돈나와 같다고 말한다. 그래서 성스러운 마돈나와 섹스를 할 수 없는 자신이 내어줄 건 자신의 마돈나 밖에 없다고. 그는 술에 잔뜩 취해 계속해서 그렇게, 절규의 표정을 흉내 내며, M을 비하함으로써 동시에 나를 비하한다.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그가 왜 이렇게 취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고, 그 취기어린 농담을 그가 이제껏 살아온 방식의 삶에 대한 가벼운 농담으로 결코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러기엔 그는 너무 취해, 이제 그의 삶 그 어떤 것도 되돌릴 수가 없게 변해버린 것이었다. 아니, 모든 것은 취기에 불과했다. 그의 ‘러브피아’란 프로젝트도, 그의 마돈나인 ‘M’도, 결국 모두 취기어린 어릿광대짓에 불과하다는 그 사실을 대체 어떻게 갑자기 믿고서, 받아들어야만 한단 말인가? 그렇지만 M의 끊임없는 비명은 P의 취기 속에서 비집고 새어나와, 결코 멈출 수가 없는 부피의 현실이다. 그리고 결코 내가 간여할 수 없는 비명과 절규이다. 그러하기에 나는 그 비현실적인 북구의 풍경을 담은 그림과도 같은 P와 M의 집을 빠져나온다. 그리고 술에 취해 여전히 자신을 찾는 P를 부인한다. 하지만 그의 모든 것을 부인할 수 없는 나는 세 번씩이나 그를 부인함으로써 그 모든 존재를 지워낼 수 없기에, 수화기를 내린 채 혼자서 중얼거린다. 그를 만나지 못한지 오래되었다고.

 

 

  마지막 P를 세 번 부인하지 못한 주인공 ‘나’의 모습을 통해 내가 예수와 베드로의 설화를 떠올린 것은 비단 내가 신학생이었기 때문은 아니리라 잠시 믿어본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이러한 각도에서 해석하려는 우를 범하는 것은 내가 분명 그러한 존재였기 때문일 것이다. 여하튼 P라는 존재를 통해 내가 본 것은 하나의 표징과 이상이었다. 실제로 P가 말하는 ‘러브피아’라는 그 자체가 그 얼마나 이상적인 표징이란 말인가? 하지만 언제나 이상이란 것은 하나의 표징으로써 존재할 때 아름답고, 가치가 있다. 그런데 그것이 현실일 때 그 씁쓸한 허무함이란... 아니, 놓지 못한 이상의 추구라는 현실은 주위를 비명과 절규로 물들게 한다. 왜냐하면 하나의 이상은 분명히 만족되지 못한 현실의 자각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 글 속에서도 ‘러브피아’는 그러한 맥락의 복선을 깔아놓고 있다. 하나의 사랑에 대한 두 사람의 온도차, 그리고 지속될 수 없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위기, 이러한 현실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기반으로 P는 어쩌면 인간의 영역에선 함부로 꿈꿀 수 없는 ‘영원한 사랑’에 관해, ‘러브피아’에 관해 감히 발설한 것일 것이다. 하지만 그 이름이 글 속에서 표현되었듯이 무슨 콘돔 광고처럼 허황되고, 씁쓸하기 짝이 없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하나의 가벼운 농담이었으면 좋았을 그의 삶이 M이라는 현실 앞에서 한없이 무력하게 연신 길길이 비명을 지르는 것은 M으로 표상되는 그녀가 진짜로 마돈나이기 때문일까? 글 속에서 ‘나’는 어쩌면 그녀를, 그녀의 팔목을 통해 마돈나로 숭고하게 격상시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P'인 그는 그런 마돈나의 존재를 섹스도 할 수 없는 존재라고 폄하한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뭉크의 마돈나는 그런 성스러운 마리아의 관능적인 모습을 연상시키고 있다. 물론, M은 결코 그런 성스러운 관능을 간직한 마리아가 아닐 것이다. 그저 천국보다 아름다운 ‘운자 크레보’보다 서울의 텁텁한 공기가 그리운 하나의 평범한 여인일 뿐이다. 하지만 P라는 이상적인 표징의 존재와 더불어 그녀는 마돈나로 존재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P는 영원한 사랑을 믿는, 이상을 품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발상이며, 비현실적인 존재방식이란 말인가?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P'는 바로 그런 존재였다. 그리고 바로 그런 존재였기에 그 존재가치를 주위에 인정받았고, 그 빛을 발하였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그러한 빛이 언제까지 발할 수 있을까? 나는 부인한다. 망가져버린 P를, 결코 인정할 수 없다. 아니, 나조차 이렇게 그를 부인하고 있다. 하지만 세 번씩이나 부인할 수는 없다고 나는 고백한다. 왜냐하면 P의 존재는, ‘이상’이란 그 이름은, 비록 취기어린 어릿광대의 모습으로 현실 속에 존재할지라도 쉬 포기할 수 없는 이름인 까닭이다.

 

 

  두서없이 감정의 결대로 써내려온 품평을 이제 대충 정리해 보아야 할 거 같다. 아니, 맨 처음 질문으로 되돌아가야 할 거 같다. 왜 글을 써야 하는지... 왜 포기할 수 없는 ‘이상’의 구겨진 여백들을 놓지 못하는지... 나는 이 글의 ‘나’처럼 역시 쉬 대답할 수 없다. 아니, 쉬 부인할 수 없다. 대답할 수 없는 것이라면 부인해야 하는 그런 성질의 것이라고도 쉬 이야기할 수 없기에...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제스처는 부인할 수 없는, 한두 번 쉽게 현실이라는 굴레 앞에서 부인할 수밖에 없을지라도, 세 번 씩이나 그 모든 ‘이상’과 ‘꿈’들은 허황된 거짓에 불과하다고, 그런 놀음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밑도 끝도 없는 ‘글’이란 ‘이상’의 놀음을 하는 동안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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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단의 샛별 - 2014 신춘문예 당선소설집
한국소설가협회 엮음 / 한국소설가협회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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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로 간 파이어니어 - 포스트모던 글쓰기에 대한 소고

 

 

  모던이란 시대를 지나, 포스트모던이란 작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현대적인 글쓰기란 무엇일까? 너무 거창한 화두일지는 모르겠지만, ‘달로 간 파이어니어’란 짧은 단편을 다 읽고서, 내 안에 생긴 질문이었다. 아주 생소한 소재, 매우 간결하게 관념을 지워버린 문체, 그리고 분절된 의미들... 이런 세 가지 소스를 잘 엮으면, 아마도 이 글과 같은 포스트모던한 세련된 글이 될까?

 

 

  먼저, 앞에서 언급한 생소한 소재에 관한 부분이다. 사실, 생소한 소재라는 그 자체는 어떤 의미에서 분명 글쓰기에서 환영받을만한 조건임에는 틀림없다. 왜냐하면 글이라는 것이 누군가 이야기한 것처럼 대리만족과 카타르시스를 추구하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생소한 소재 자체가 우리에게 특별한 경험의 세계로 데려다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생소함에 경험이 부재되어 있다면...? 물론, 개인적으로 나는 이 글을 쓴 이세은이란 젊은 작가를 모른다. 그러하기에 이 작가가 실제로 이러한 비슷한 경험을 근거로 하여 썼다고 한다면, 지금부터 내가 쓸 글들은 역으로 진실이 부재된 잡설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실제 사실이 어찌됐든, 경험의 부재를 가정으로 하여 나는 내 평의 논리를 구성해 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경험이 가정된다면, 차후에 내가 파고들어갈 ‘간결한 문체’와 ‘분절된 의미’에 대해 논리를 감히 펼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매우 개인적인 것이긴 하지만, 어찌됐든 이와 유사한 경험을 한 나로선, 이 글속에 경험을 공감하기에 쉽지 않은 구석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내가 시체를 치워봤다거나, 아니면 이와 유사한 직종에서 일 해보았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나는 그저 동물을 도살하는 일을 해보았고, 그러한 경험 속에서 자연스럽게 부패된 포유류를 몇 번 보았을 뿐이다. 하지만 이 일을 통해, 또 다시 자연스럽게 인간의 죽음과 살인욕구에 대해 관념적인 접근을 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내 자신이 이러했기 때문일까? 깨끗하게 관념이 배제된 문체 속에서 나는 생소한 소재가 갖는 경험의 부재를 여실하게 느끼곤 한다.

 

 

  글에 지나친 관념은 독이 된다. 그리고 포스트모던이란 의미 자체는 이미 ‘탈관념’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는 당연히 글쓰기에도 적용되어 글속에 ‘관념’ 자체가 어찌되었든 상관이 없다는 논리를 지지해 준다. 동시에 ‘관념’이 내포한 ‘의미’에도 그러한 논리는 적용된다. 그렇다면 글쓰기에 가장 중요시되는 요소는 무엇이 될까? 그것은 묘사이다. 관념이 깨끗하게 배제된 간결한 묘사. 때문에 여기서 ‘경험’이나 ‘진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애초에 ‘관념’과 ‘의미’를 배제한 글쓰기에서 그 ‘관념’과 ‘의미’를 지탱해 줄 ‘경험’과 ‘진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물론, 그 안에도 나름의 ‘진실’과 ‘의미’를 담보할 필요는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진실’과 ‘의미’가 없다면, 애초에 ‘글쓰기’ 자체가 ‘무용’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긴 논리가 작가의 ‘진실’과 ‘의미’가 분리된 글 자체 내에 ‘진실’과 ‘의미’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글’이라는 그 자체에 가장 충실한 논리이고, ‘글’이 스스로 지닐 수 있는 최상의 ‘권리’이자, ‘자유’이다. 하지만 그러한 ‘권리’와 ‘자유’ 속에 ‘책임’은 고스란히 배제되어 있다. 왜냐하면 글 쓰는 자에게 분리된 ‘글’이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까닭이다. 결국, 책임은 읽는 ‘독자’에게로, 그 ‘독자’가 내리는 ‘해석’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부터이다. ‘진실’도 없고, ‘의미’도 없는 글을 대체 ‘독자’가 어떻게 해석한단 말인가? 그리고 해석한다고 해도,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니, 그냥 심심풀이땅콩이라고 해도 누가 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 글의 구조는 사실 아주 간단하게 이루어져 있다. 시체를 치우는 두 남자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글은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지극히 사소한 감정과 관념이 배제된 묘사들로 채워져 있다. 하지만 글속에서 누구도 ‘의미’를 포기할 순 없는 법이다. 그래서 작가는 작중인물들의 무료한 일상을 깨뜨릴 대척점으로 ‘달로 간 파이어니어’와 ‘올리비아 밴슨’이란 인물을 이야기 곳곳에 끼워 넣는다. 정말 말 그대로, ‘끼워’ 넣는다. 왜냐하면 여기엔 어떤 치밀하게 구성된 ‘논리’나 ‘관념’이 필요 없는 까닭이다. 그냥 그 자체로 아마도 대개의 독자들은 그 두 대척점 사이와 간극과 염원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 간극과 염원을 치밀하게 논리와 의미로 채워간다는 게 더 이상스러울 것이다. 왜냐하면 분절된 언어로도 충분히 우리는 이를 눈치 챌 수 있고, 오히려 분절되어 있기 때문에 두 대척점이 자연스러운 까닭이다. 여기서 어떻게 새삼스럽게 새로운 ‘의미’와 ‘관념’을 말할 까닭이 무엇 있겠는가? 우리는 이미 우리의 분절을 받아들이고 익숙해져 있는 것을...

 

 

  사실, 지금까지 내가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이러한 글쓰기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어떤 한편으로 분명, ‘글’ 자체에 무한한 자유와 권리를 주는데 지지하고 있는 포스트모던주의자이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일까? 역으로 이러한 생경한 소재를 전면적으로 내세워 묘사에 치중한 글쓰기를 표방한 글들에 허무함을 느끼곤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글쓰기 속에서 글 자체가 지닌 ‘자유’와 ‘권리’를 얻기 위한 몸부림과 생존의지를 느끼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사실, 포스트모던이란 말도 ‘모던’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분절된 글쓰기도 전형적 글쓰기에서 비롯된 것이라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뿌리에 대한 염원과 동시에 어떤 염증도 없이 분절되기만 한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맨 처음 누군가 시도했다면 그것은 그것으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너무나 많은 이러한 시도가 있어왔고, 이제는 너무 익숙할 만큼 이 방식이 존재한다면, 조금 더 글속에 치열함과 진실을 시도해보는 것도 작가정신이 아닐까? 그것이 독자에게 어떻게 읽히든, 그러한 책임의식을 가져야 하는 것이 진정한 작가정신이란 의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잠깐, 감히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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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 시인선 80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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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들

 

 

 

감당하기 벅찬 나날들은 이미 다 지나갔다

그 긴 겨울을 견뎌낸 나뭇가지들은

봄빛이 닿는 곳마다 기다렸다는 듯 목을 분지르며

떨어진다

 

 

그럴 때마다 내 나이와는 거리가 먼 슬픔들을 나는

느낀다

그리고 그 슬픔들은 내 몫이 아니어서 고통스럽다

 

 

그러나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

 

 

 

  아주 오래 전부터 기형도의 수많은 시들 가운데 나는 이 시와 10월이란 시를 유독 좋아하였다. 하지만 10월의 경우, 시의 1절에서 ‘그러나 내 사랑하는 시월의 숲은 아무런 잘못도 없다.’ 이후, 2절에서의 ‘자고 일어나면 머리맡의 촛불은 이미 없어지고 하얗고 딱딱한 옷을 입은 빈 병만 우두커니 나를 쳐다본다.’란 구절이 언제나 내 마음 속에 걸림돌이 되었다. 아마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것은 기형도란 시인과 내 속에서 꿈꾸고 있는 시적 자아가 충돌을 일으키는 지점인 까닭일 것이다. 왜냐하면 내게 있어서 시는 언제나 수평선 너머 무언가에 대한 그리움이거나 혹은 완전히 모순적으로 내 개인의 내적 자아를 할퀴고 도려내는 열망인데, 기형도란 시인에게 있어서 그것은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일 뿐인, 추악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비평가였던 고 김현 선생님의 말을 빌면, 이것은 너무나도 도저한 어둠이다. 그 때문인지, 그의 시들은 대부분 춥고 어두운 밤 겨울의 날씨들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그나마 추억을 기념하는 그의 가을의 시들조차 얼마나 황량하기 그지없는지... 언제나 죽음의 편에 서있기만 하다. 그럼에도 왜 내 젊은 날 나는 자석처럼 기형도의 시에 이끌렸던 것일까? 이해하지도 못하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그 도저한 어둠속으로... 그리고 어느덧 시간이 훌쩍 흘러, 어언 십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시어 한 구, 한 구에서 총성을 듣는다. 마치 내 관자놀이에서 터지는 극대화된 쾌감처럼 혹은 절망처럼... 내가 도저히 갈 수 없는 길을 그가 갔기 때문일까? 아니면 나의 어둠이 그의 감당하기 벅찬 겨울의 긴 터널을 지나 봄빛을 기다렸다는 듯이 분질러져, 또 다시 다가올 계절에 관한 희망을 머금고 있는 까닭일까? 하지만 그 희망은 나뭇가지에서 툭, 툭 떨구어진 눈발처럼 지면에 닿으면 금세 사그라질 물기를 가득 머금은 슬픔과도 같다. 그리고 그 슬픔들은 내 몫이 아니어서 고통스럽다. 왜냐하면 나는 그 눈발을 관조하는 대상이거나 혹은 상상하는 한낱 이방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처럼, 나는 모든 눈발을 훌훌 털어낸 무슨 딱딱한 덩어리처럼 달아날 수 없는, 오래된 습관이거나 관념뿐인 것이다. 그래도 계절은 다시 오고, 나는 죽은 나뭇가지 위에 우연히 새 한 마리가 내려앉는 꿈을 꾸거나 혹은 결국엔 툭 분질러져버린 가지가 썩어 그 위로 이끼들이 자라나고, 그 이끼들 틈새로 온갖 잡초들이 피어올라, 언젠가 또 한 그루의 나무가 자라나길 너무나도 간절히 망상하고 있다. 그 추악하게 말라비틀어진 죽은 가지의 날렵함을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너무나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말을 빌자면, 무엇인가 할 말이 있다는 듯이, 그의 육체 속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그 거추장스러운 무엇을. 밤마다 어둠 속에 모여드는 청년들의 욕망 속에서, 그 같은 종류의 쾌락 속에서... 내 젊은 날의 길바닥을 뒹굴며 토악질을 하던 그 구토물 속에서... 그 한 가닥의 연민을, 나는 본다. 내 속에서, 그리고 기형도의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 속에서.

 

 

  끝으로 군대를 제대하고 학교를 복학한 후, 기형도를 읽고서 썼던 시를 여기에 덧붙여 두고 싶다. 그 시를 통해서 언젠가 다시 읽을 기형도에 대한 미련을 여기에 남겨두고자 한다.

 

 

 

기형도를 읽다

 

 

 

아주 조금씩

그렇게 무겁게

내어뱉은 읊조림들로

깊은 전철역 통로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 길은 언제나

바람이 맺혀 있었다

 

 

검은 외투를 부여잡으며

거리로 뛰쳐나오면

푸르른 하늘에 비친 어둠

무서워...

하지만 검은 외투는

때묻지 않은 잿빛으로

오래 닳고 닳을 수가 있어

 

 

그토록 푸른 하늘을 지나

다시 깊은 낭하로 들어서면

바람이 검은 외투에 맺혀

내내 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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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살기 온우주 단편선 2
곽재식 지음 / 온우주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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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살기 - 잘된 이야기, 담화란 무엇일까?

 

 

  너무 오래간만에 읽은 또, 뜻밖에 너무 재미있던 소설이라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모르겠다. 사실, 보통의 경우, 글을 읽고 나면, 글의 전체적인 맥락과 그림이 잡히고, 그 다음 그 글에 대한 비평의 질문들을 다듬어가기 마련인데, 이번 경우와 같이 시간에 쫓겨서 읽은, 그런데 너무 재미있었던 글에 대해서 평하기란 여간 난감하기만 하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이 경우엔, 지금과 같이 글을 써가면서 이 글에 대해 비평을 해나가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는 듯하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 글에 대해 내가 비평하기 까다로운 또 다른 이유는 이 글이 지금까지의 시적인 형상화 작업을 담아내려 했던 단편들과 달리, 하나의 이야기 그 자체로 글을 풀어내는 장편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글이 왜 내게 그토록 재미있고 잘된 글이라고 느껴졌고, 또 그 때문에 왜 비평하기가 까다로워진 것일까?

 

 

  첫째로, 서두에도 잠깐 읊었지만, 이 글이 하나의 잘 짜인 이야기라는 점이다. 그것도 어떤 시적 형상화라든가, 어떤 교훈을 억지로 담아내려고 하지 않은, 이야기 그 자체로 승부수를 건 글이라는 점에서 이 글은 여타 다른 소설보다 더욱 소설의 본질인 이야기 구조 즉 담화 자체에 충실한 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맨 처음 이 글을 읽어내려 갈 때는, 조의 우랑의 충직함과 고구려라는 사회 구조의 모순을 대비시키면서, 현재 우리 사회에 대한 풍유적인 글이라고 예상하고 읽어내려 갔다. 그런데 이야기가 중후반 부를 넘어가면서 또 하나의 의로운 대인이라 할 수 있는 “안국군”이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꼬여 들어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여기에 정당한 법제도로 대변되는 고구려라는 사회와 야만성을 대변하는 숙신족이 교묘하게 대비되면서, 이야기의 갈피를 어디로 잡아야 할지 더욱 어려워졌다. 그리고 솔직히 이 부분에는 묘한 민족적 감정도 뒤섞여, 글의 어떤 명확한 방향을 의도적으로 흩트리는 점도 있다. 어찌됐든 이런 양극의 모순 속에서, 글이 더욱 모순으로 치닫고 있는 것은 초두부터 의인으로 대두되던 “조의 우랑”과 “안국군”의 어떤 인간적인 면모의 부각에 있다. 사실, “조의 우랑”의 경우, 어떤 면에선 마지막까지 이 부분이 드러나지 않고 숨겨져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가 믿는 고구려의 법대로 의롭게 행동했을 뿐인데, 너무나도 억울한 일들을 지속적으로 당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는 이 글의 또 다른 측면에서 의인이라 말할 수 있는 “안국군”을 계략에 빠뜨려, 억울한 죽음에 이르게 한다. 물론, 여기엔 “안국군”의 잘못이 크기는 하다. 그는 그의 형수를 너무나 연모하여, 그것이 잘못인지 알면서도, 형수의 사치와 개인적 호사로운 생활을 묵과하였다. 아울러, 고구려에 대한 지나친 충성심으로 숙신족에 대해 너무나 가혹한 처사를 행함으로써,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한 많은 원한들을 샀다. 이 때문에 그는 “조의 우랑”의 계략에 말려들을 수밖에 없었고, 또 그 때문에 그 계략에 대해 변명할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조의 우랑”의 모든 행위가 옳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하기엔 “안국군”의 고구려에 대한 행적과 충심은 너무나 절실한 진심인 까닭이다. 때문에 우랑은 한 여인에게 시를 통해 읊게 함으로써 안국군에게 경고하지만, 안국군은 이를 무시하고 지나친다. 왜냐하면 안국군이 비록 개인적인 모순은 있다 할지라도, 고구려에 대한 그의 충심은 진심이기에, 그는 스스로 부끄러울 까닭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의 이런 지나친 충성심에 대한 떳떳함은 스스로의 덫이 된다. 왜냐하면 그는 그 충성심 때문에 숙신족에게 너무 가혹했고, 또 그 떳떳함으로 인해 스스로에게 너무 자만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한 것은 “조의 우랑”도 그러한 부류의 인간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하기에 그는 아마도 “안국군”의 이런 성격을 더욱 잘 알아, 계략으로 이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어떠하든지 간에 “안국군”의 고구려에 대한 충심은 과거의 우랑 자신과 같이 진심이건만, 그는 그의 개인적 원한으로 인해 한 나라의 너무나 커다란 한 인물을 모함에 빠뜨려 죽음에 이르게까지 한다. 때문에 그는 스스로 벼슬길을 마다하고 숙신족과 함께 산속의 동물을 사냥하며, 생을 연명해 간다. 그리고 그 어느 해 너무 추운 겨울 날, 동물 한 마리 잡기도 어려워져, 그가 죽인 “안국군”이 다스리던 단로성으로 다시 복귀한다. 거기에는 오랜 세월 그가 처음 단로성을 왔을 때 구해준, 바로 그 때문에 이 모든 복잡한 사건의 발단이 된 숙신족의 한 여인이 이제는 목소리를 잃은 벙어리가 된 채 바둑알을 귀에 걸고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서로를 알아 본 그 둘은 마치 이 모든 사연의 설움을 풀어내기라도 할 듯이 한참을 부둥켜안고 서러워 우는 것이다. 한바탕 덧없는 긴 생의 걸진 놀이마당을 끝내고자 하는 엔딩 신처럼.

 

 

  부차적으로, 이 글이 잘된 글이라고 여긴 두 번째 이유는 개인적으로 읽어 내려감에 있어서 역사적 배경지식이 크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럴듯하게 읽혔다는 점이다. 이는 글쓴이의 충분한 역사적 배경에 대한 검토와 적용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글이 그러한 점이 부족할지라도, 어디까지나 이것은 하나의 역사적 담론을 숙고하기 위한 소고가 아니라, 소설이라는 점에서 그럴만한 개연성을 글 안에 담아내기만 한다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즉, 소설적 이야기 형식 속에서 역사라는 틀을 빌려, 삶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여줄 수만 있다면, 소설은 충분히 그 기능을 다한 것이라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다만, 그러한 이유로 마지막 부분에서의 감동적인 삽입은 개연성이란 측면에선 다소 부족해 보이는 지점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이 글이 현대의 배경이 아닌 과거의 역사란 모티브를 가져다가 쓴, 그리고 복잡한 현대를 살아가는 현재 우리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나라의 설화를 풀어가는 전통적인 방식을 재현하려 했다는 점에서, 마지막 부분은 하나의 한풀이나 살풀이 혹은 한바탕 걸지게 논 놀이마당을 끝내는 뒤풀이로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덧붙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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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2015-01-14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졸저의 작가 곽재식입니다. 심도 있고 훌륭한 글에 진심으로 감사 말씀 올립니다.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습니다. 글 읽다 보니 한가지 기억나는 것이, 이 책으로 출판되기 1~2년 전에 다른 출판사에서 책을 내려고도 준비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재미있었던 것이 그때 출판사에서 같이 읽으셨던 분들이 여자는 안국군이 더 멋있다, 남자는 우랑이 그래도 더 멋있다로 성별로 양분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애초에 제가 글쓰기 시작할 때는 우랑이 그래도 착한 주인공역할, 안국군은 어쨌거나 그래도 악당 역할로 정해 놓고 시작했는데,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살을 더해서 꾸미다 보니, 나중에 독자님들이 보시고 말씀해 주실 때에는 안국군도 나름대로 비극적인 주인공 느낌이 난다고 하셔서, 그 점도 재밌었습니다.

몽원 2015-01-14 15:36   좋아요 0 | URL

먼저, 저자가 친히 읽으주시고 칭찬해주시니 영광스럽고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이 글을 읽었을 때는 수도원에서 몇 개월 살다가 잠깐 내려와서 수도원에 올라가기 전 참가하던 문학 모임에서 합평작으로 이 글을 선정해서, 휴가나왔다 급하게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모임 앞두고 한 두세 시간 전에요^^;; 그래도 재밌게 읽었던 탓에, 나름 재밌게 글을 써내려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래도 한 가지 죄송한 것은 그 때가 2년 전인데 책이 아직 출판되지 않았던 탓인지, 제가 수도원에서 내려와 급했던 탓인지, 직접 책을 구입해서 읽지 못하고, 모임에서 누군가 올려준 필사본인지, 아님 인터넷 주소에 올라온 글인지, 하하;; 한글판으로 올라온 글을 프린트 해서 읽은 점이 좀 죄송스러운 마음이 있습니다. 책은 웬만하면 사서 보는 게 예의일 텐데 말이죠.^^;

여하튼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좋은 글 계속 부탁드립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