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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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tremely Loud & Incredible Close

- 쌍둥이 빌딩과 함께 추락한 영혼들을 위한 염 혹은 날아오르기 위한 몸짓

 

 

  ‘Extremely Loud & Incredible Close' 제목만큼 화려한 책 표지를 보고서, 처음 안을 대강 훑어 봤을 때, 많은 그림들과 난립하는 글자들을 보고서, 하이퍼텍스트를 떠올렸다. 아마 군대를 제대하고서 복학한 후 98년이던가, 99년이던가.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시인, 소설가, 평론가 등 각 분야의 최고의 문인 50명 이상이 모여서 ‘21세기 문학의 나갈 방향’, 뭐 이런 주제로 포럼을 했었다. 당시, 학교 신문사에 기자로 있던 후배가 문학동아리 회장이었던 내게 초정 티켓을 주어서 나는 우연히 참여할 수 있는 행운을 누렸었다. 그때 아마 처음으로 하이퍼텍스트에 대해 들어본 것 같다. 물론, 그 전에 장 보들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이니, 자끄 데리다의 ‘해체’, ‘차연’이니 하는 풍월들을 듣기는 했지만, 문학적 접근이라기보다는 철학적 접근에 가까웠고, 그에 따른 철학적 이해에 가까웠다. 여하튼 그때 들었던 이야기 중에 인상적이었던 내용은 이름만 들어도 다 알 듯한, 우리나라 최고의 시인, 소설가, 평론가들이 영화와 게임에 뒤처져 소외된 문학의 현실을 토로하며, 책 속에 인물에 따른 스토리 선택을 할 수 있는 설정의 소설이라든가, 문자와 함께 시각적, 청각적 기능을 병행할 수 있는 텍스트의 등장에 대해서 자못 심각하게 논의하였다는 사실이다. 동시에, 그런 하이퍼텍스트 소설의 등장이 결국은 영화와 게임에 문학이 스스로 자리를 내어주고, 이 시대에 더 이상 존재가치가 없다는 것을 자인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는 격분과 토로가 함께 줄을 이었다. 당시 문학에 갓 입문한 나로서는 그 이야기가 자못 충격적이기도 하였고, 사실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시가, 소설이 과연 하이퍼텍스트로 대치될 수 있을까? 지금도 나는 이 질문에 대해 무어라 대답해야 할 지, 잘 모르겠다. 다만, 등단을 했던 내 친동생이 자연스럽게 먹고 살 길을 찾아, 게임 시나리오 작가가 되고, 그런 동생을 통해 많은 문인들이 비록 게임의 어법과 문법 구조를 모르지만 그들의 이름을 빌려주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을 뿐이다. 어쩌면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이 소설은 이런 하이퍼텍스트의 기준에 거의 초기 단계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막상 소설을 읽어 보았을 때 절감했지만, 마지막 부분을 제외하고, 중간, 중간에 나오는 그 많은 사진들과 문자들의 배치는 그저 동화책의 그림 대신 넣어진 곁가지 수준이었다. 그러하기에 지금 나는 이 글을 통해 이 소설의 하이퍼텍스트 기능이나 관점을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문학적으로 이 글의 중심과 전혀 대치되어 있는 나의 중심에 관해, 그리고 역으로 하이퍼텍스트 기능을 문학적으로 잘 흡수시킨 마지막 몇 장에 관해 잠깐 서술하고 싶을 뿐이다.

 

 

  사실, 소설 중반까지 읽어 내려가기 전까지 나는 화자가 아홉 살짜리 꼬마 여자 아이인 줄 알았다. 개인적인 기질 상 어떤 표지의 내용이나, 역자의 이야기를 먼저 읽고, 소설을 읽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탓도 있고, 아마 역자가 남자가 아닌 여자였던 탓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그렇게 착각했던 이유는 처음의 몇몇 장의 문체에서 나는 아멜리에 노통의 ‘이토록 아름다운 세 살’을 떠올렸던 데다가, 화자의 상상력이 전혀 남성적이지 않은 여성적인 것이라고 일찍 단정해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반쯤 너무나도 명확하게 소년이라고 나오는 모습을 보고, 그만 어이를 상실해 버렸다. 어떻게 남자 꼬마 녀석이 그렇게 아버지한테 집착을 하고, 스포츠나 개구진 장난엔 도통 관심도 없고, 채식주의자에 무조건적인 평화주의자일 수 있는지. 그리고 취향은 또 얼마나 소녀다운지... 분홍색을 좋아하고, 노처녀 사감처럼 또래 아이들을 가르치고, 훈계하기를 좋아하다니.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물론, 아버지의 서재에서 우연히 발견한 열쇠의 비밀을 풀기위해 모든 Black들을 찾아다니는 그 모험정신과 엉뚱함은 곰곰이 생각해 보면 개구진 소년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그 외에 지나친 감성들, 숱한 강박과 두려움들은 소녀의 그것을 닮아 있었다. 게다가 사실 문체도 장 콕도의 영화에 나오는 부산한 여인들의 몸짓을 얼마나 닮아있는지, 난 작가도 여자라고 단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인터넷을 뒤져보니 다소 샌님처럼 생기긴 했지만 분명히 남자였다. 대체 왜 이런 착각을 했던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물론 내 주의력의 결핍과 사전에 내용을 알려고 하지 않는 나의 습성 탓일 게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잃어버린 내 소년 적의 감수성 탓일 것이다. 너무나도 오랫동안 남자는 이래야한다는 강박 속에서 나도 모르게 남자와 여자의 성역할을 구분해 왔고, 또 그 탓에 난 내게 없는 여성성에 대해 갈구하고 숭배하게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여성을 온전히 하나의 인격으로 받아들이는데 항상 장애가 되어왔다. 무언가에 대한 지나친 신격화는 역으로 그것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을 낳는다. 마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처럼. 그리고 그것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를 읽고 나서였다.

 

 

  ‘금각사’, 그 책은 동생의 소개로 처음 접하게 되었다. 사실, 당시 소설보다 시에 관심이 많았던 나로서는 그렇게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고 첫 장을 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한 장, 한 장 넘어갈수록 그만 나는 그 소설에 함몰해버리고 말았다. 아니, 전복당해 버렸다. 소설의 주인공이 금각사를 불태우는 절정의 페이지 속에서, 함께 불살라지고, 내 속에 오랫동안 두려움으로 숨어 지내던 뫼르소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내 속엔 테러리스트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2001년 911테러가 발생했을 때, 내 입가에선 교활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마치 내가 그 쌍둥이 빌딩에 들이받기라도 한 배후세력인양. 그래서 당시, ‘테러를 꿈꾸다’라는 제목으로 시를 쓰기도 하였다. 부끄럽지만 여기에 잠깐 그 시를 올려보고자 한다.

 

 

서쪽 멀리 먼 나라

여기저기에 테러가 발생했단다.

순간 입가에 드리운 교활한 미소가

동쪽 나라 사람들 피에 흐르는

콤플렉스처럼 번져 지고

힘으로 이루어낸 평화의 상징에

들이받은 배후세력처럼

수많은 죽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슴이 뛰고 있었다.

 

 

강 건너 남쪽 동네에선

고급 백화점이 무너진 적이 있었단다.

여기저기 기적에 굶주렸던 열망들이

부활한 영웅들에게 그리스도들에게

온갖 뉴스로 난사되어질 때

북쪽 동네에 사는 내 궁핍함은

옹졸하고 한 많은 기도로

전복을 꿈꾸는 찌든 아이처럼

모두를 경멸하고 있었다.

 

 

이마 위 살짝 번진 미열이

새어나갈 곳을 찾지 못하고

배꼽 한 치 아래 불거진

구멍을 뚫고서 폭발하고 싶단다.

여기저기 비릿한 조명 아래 늘어선

여신들의 자태를 일그러뜨리고

돋아나는 음울처럼

거세된 애욕들이

서쪽 나라와의 거리 때문에

남쪽 동네와의 차이 때문에

소외된 육체의 두려움 때문에

허공에 적을 두지 못하고

테러를 꿈꾸다

 

 

  그 당시 한 번은 또 이런 일이 있었다. 학교를 등교하기 위해 버스를 탔는데, 그 버스가 그만 신호등에서 그 스피드를 멈추질 못하고, 하얀 불로 바뀌어 길을 막 건너려는 소녀를 들이받았다. 순간, 소녀의 육체가 일그러지고, 버스기사가 밖으로 뛰쳐나갔다. 버스에 있던 모든 사람들도 그 순간 모두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모두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나 어느 누구 하나 감히 그 오그라든 육체를 부둥켜 울부짖을 순 없었다. 단 한 사람, 오직 그 무겁고 거대했던 스피드로 소녀를 들이받았던 버스기사를 제외하곤. 그 때, 난 불현듯 그런 생각을 했다. 누군가를 할퀴지 않는다면, 도리질 하지 않는다면 평생 누군가를 진정 사랑할 수 없을 거라고. 문학이란 게 어쩌면 이런 것일 거라고. 그 무거운 스피드 혹은 부둥켜안은 절규, 무력감.

 

 

  그러나 정녕 그것밖에 할 수 없는 것일까? 어떤 하나의 의미가 몸짓이 되어, 누군가를 위한 기도가 되고 염이 될 순 없는 것일까? 소녀의 죽음 없이, ‘그 날 나는 버스를 타고 등교했다.’라는 그 하나의 평범한 일상만으로 소설을 말할 순 없단 말인가? 정녕?

 

 

  처음 9살짜리 꼬마의 시선 탓인지 가벼웠던 소설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시선을 통해 존재와 부재의 경계선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911테러라는 그들의 끔찍했던 현존에게로 한 걸음씩 다가선다. 덩달아 비밀의 열쇠도 그 자물쇠의 주인을 찾아간다. 엄청나게 시끄럽게 찾아 헤맸지만, 믿을 수 없을 만큼 가까이 존재했던 주인에게로. 그렇지만 그 모든 것은 기막힌 우연이었을 뿐이다. 그 자물쇠의 주인이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우연히 주인공의 아버지에게 그 열쇠가 들어있던 화분을 팔았었다는 사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화분 속에 아버지의 중요한 유품이었던 열쇠가 있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는, 어쩌면 말도 안 되는 설정. 그렇지만 그로 인해 서로가 얼마나 서로를 찾아 헤맸는지 그리고 그 우연한 만남을 통해 서로에게 부재한 아버지를 발견하게 된다는 이야기. 거기에 마지막 주인공이 오랫동안 부재했던 그의 할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관 뚜껑을 열고서 아버지에게 부재했던 아버지를 만나게 해준다는, 어쩌면 거룩한 종교의식 같고, 반대로 부재 속에서 존재를 찾으려 하는 작은 몸짓 같은, 염 혹은 기도. 마지막으로 소설은 모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아담과 이브의 시대 이전 부재의 시간으로 돌아가고, 동시에 떨어지던 아버지의 표상이 날아오르는 사진을 보여주며 끝을 맺는다.

 

 

  그러나 날아오를 수 있을까? 한 장, 한 장 펼쳐지는 책장의 그 사진들처럼 그 끔찍한 상흔들을 지우려는 몸짓들이 날아오를 수 있는 걸까? 우리의 끝없는 난립하는 이 문자들이 하이퍼텍스트를 넘어서 그렇게 훨훨 비행할 수 있을까? 결국, 소녀의 죽음 대신 소설 속에선 아버지의 죽음이 존재했고, 무거운 스피드의 버스 대신 911테러라는 역사적 사실이 대치된 건 아닐까? 아직도 내게서 쉬 지울 수 없는 테러리스트의 피는 허공에 적을 두지 못하고, 생생하게 찢기며 고통스러워하는 대상을 찾아 헤매고 있다. 그러나 언젠가 정녕 날아오를 수 있다면, 소녀와 아버지의 죽음을 그런 모든 상실들을 피할 수 있다면, 다시 신앙 없는 이 내 마음으로 기도하고, 염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럴 수 있다면, 정녕 그럴 수 있다면, 맘껏 추락해 볼 것이다. 날개가 돋아 오르기를 한량없이 꿈꾸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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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 [초특가판]
장예모 감독, 강문 외 출연 / 기타 (DVD)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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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 역사를 도구화하는 방법 배우기

 

 

 

 

  ‘병아리가 자라면 닭이 되고, 닭이 자라면 양이 되고, 양이 자라면 소가 되고, 소가 자라면 그 다음엔 뭐가 되는 거죠?’

 

 

  붉은 수수밭, 귀주 이야기, 책상 서랍 속의 동화 등으로 이미 중국의 대표적인 감독으로 자리 잡은 장예모 감독의 '인생'은 복잡다단했던 중국의 현대사 속에서 일반 서민들의 심리를 대변하고 있는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그 속엔 조금은 다르지만 중국과 같이 같은 아시아로서 그러한 과정을 겪었던 우리의 자화상이 그려져 있다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는 그 속에서, 모두는 아니겠지만, 역사라는 거대한 구조물의 억압 속에서도 삶에 대한 끝없는 긍정을 발견하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19세기 말, 서구세력의 침략으로 주변 모든 국가에게 하늘과도 같던 중국대륙이 흔들렸다. 그리고 그것은 20세기에 이르러 신해혁명으로 급전되어, 무려 8000년에 이르는 중국왕조의 역사에 종결을 고하게 되기까지 이른다. 우리의 주인공 ‘복귀’는 바로 그러한 시대 가운데 태어난 사람으로서, 영화 속에선 대대로 그 지역에서 행세하던 지주로서 첫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알다시피 그러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많은 기존의 지주들이 몰락했던 것처럼, ‘복귀’ 또한 몰락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왜냐하면 그 이전의 시대와 달리, 이제 중국이란 사회는 아직 감당키 어려운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신개념의 신시대이고, 그것은 누구든지 지주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자신의 조상들이 해왔던 대로 흥청망청 노름만 하던 ‘복귀’는 그러한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노름으로 집안을 파탄에 지경에 이르게 함으로써, 늙은 자신의 아버지를 화병으로 죽게 만들고, 늙은 어머니를 병들게 하는 것도 모자라, 자신의 부인을 떠나보내기에까지 이르게 된다.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인지, 하루아침에 변한 자신의 신세를 자각하고, (영화 속에서 ‘복귀’는 다시는 도박을 안 하겠다는 의미로 ‘부도’로 개명한다.) 새로운 사람이 된 ‘복귀’에게, 다시 그의 부인이 아이들을 데리고 찾아옴으로써, 이제 ‘복귀’는 ‘복귀’가 아닌 ‘부도’로서 새로운 삶의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그에게 새로운 사고방식, 지주로서가 아닌 이제 일반 민중으로서, 그 무엇보다 자신의 가족이 소중하다는 의식을 심어놓게 된다. 그리고 다시, 지루했던 중일전쟁이 끝나고 난 1940년대 후반, 중국은 국민당과 공산당간의 국공합작이 깨지면서, 내분이라는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고, 이 가운데 우리의 주인공 ‘부도(복귀)’ 또한 자연스럽게 엮이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우스운 것은 그가 어떤 사상이나 이념 등에 의해 어딘가에 선택을 하고, 투쟁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살기 위해 그 속에서 선택되어졌다는 사실이다. 말 그대로,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자연스럽게 엮여버린 것이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중일전쟁 직후, 지방이야 어떻든 간에, 중국을 좌지우지했던 것은 국민당이었다. 그러하기에 ‘부도’는 자연 힘없는 일반 서민으로서 국민당에 끌려가,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하지만 역사가 이미 우리에게 알려주듯이, 그 당시 무능했던 국민당은 그 처음 전선의 유리했던 국면과 함께 미국을 등에 업은 풍부했던 인적, 물적 자원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에게 패하게 된다. 그러면서 애초 자신의 처자식 걱정에만 몰두하고 전혀 전쟁에 관심이 없었던 ‘부도’ 또한 공산당의 포로가 되어, 자연스럽게 다시 공산당을 위해서 일하게 된다. 여하튼 이와 같은 과정 끝에, ‘부도’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공산당의 승리로 지주세력들이 사형을 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그러면서 과거 지주세력이었던 ‘부도’는 이에 공포에 질리지만, 공산당 정권 아래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방법을 깨닫게 되고, 다시 철저히 사회에 순응해 나간다. 그런데 뜻밖에도 영화는 우리의 생각과 달리 그러한 공산당 정권 아래 사회도 살만한 사회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가령 예를 들면, 1950년대 모택동은 중국이 경제적으로 서구에 비해 낙후되어 있음을 인식하고, 경제발전을 위한 무리한 계획을 설정한다. 목표 달성을 위해 모택동은 일반 민중들의 노동력을 무리하게 착취하는데, 그 속에서도 일반서민들의 모습은 이제까지와 전혀 다를 바 없이, 삶의 갖은 즐거움들을 발견하고 찾아내는 것이다. 심지어, 1960년대 모택동의 거대한 이상의 일환이었던 문화혁명을 기점으로 시작된 모택동 숭배 속에서도 그들의 삶은 전혀 억압되어 있거나,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영화 속에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부도’의 딸의 혼인식 날, 모택동의 초상화 앞에서 모주석 어록을 들고 사진을 찍는 ‘부도’와 ‘가진(부인)’, 그리고 그의 딸과 사위의 즐거운 모습을 통해 이를 드러내고 있다. 다만, 1960년대 후반 이르러 급격해진 문화혁명의 혼돈으로 인한 사회상에 대해선 장예모는 은근히 풍자를 하고 있긴 하다. 왜냐하면 당시 문화혁명은 사회의 기존 체제의 전복이란 미명하에 모든 권위와 전통 그리고 낡은 것이라 여겨지는 모든 것을 배척하였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말 못하는 ‘부도’의 딸이 임신하여 출산하던 날, 병원에는 오랜 경험으로 숙련된 늙은 의사는 하나도 보이지 않고, 젊은 간호사들만이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부도’의 딸의 생명을 앗아가게 만들고 만다. 영화의 마지막은 이렇게 산모의 죽음으로 출산된 ‘부도’의 손자와 사위 그리고 그의 부인 ‘가진’이 함께 딸의 묘소를 찾은 후, 같이 소담하게 식사를 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데, 거기서 새 시대의 표상이라 할 수 있는 손자는 ‘부도’에게 묻는다. 병아리가 크면 무엇이 되냐고? ‘부도’는 대답한다.

 

 

  '병아리가 자라면 닭이 되고, 닭이 자라면 양이 되고, 양이 자라면 소가 되고, 소가 자라면 네가 어른이 되지.'

 

 

  이제 이야기를 정리해 보아야 할 것 같다. 너무나도 자연스럽지만 은근히 위트 있는 영화, 아니 어쩌면 거대한 이념들에 좌지우지되는 우리 젊음에 독설을 퍼붓는 영화...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그러한 시대 변화 속에 혼돈과 투쟁정신, 아니면 진보를 향한 끝없는 갈망들 그런 것들이 대부분이겠지만, 이 영화 속에선 그러한 것들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너무나도 비굴해 보이는 ‘복귀’와 ‘가진’은 사실, 전혀 비굴하지도 그렇다고 밉살스러워 보이지도 않는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의 삶을 묵묵히 받아내며, 그 가운데 어른이 되고, 늙어갈 뿐인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 영화 속에서 공산주의니 혹은 민생주의니 왕조니 하는 것들은 그들에게 하나의 도구일 뿐, 삶 그 자체가 되어주질 못하고 있다. 물론, 닭보다는 양이 크고, 양보다는 소가 큰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크기의 변화일 뿐, 같은 종이 아니기에, 실질적인 변화는 아니라는 말이다. 사실 그러하기에 양이면 어떻고, 소면 어떻겠는가? 중요한 건 모든 그러한 과정 속에서 삶을 살아내는 것이고, 그렇게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즉, 여기서 역사란 것은 하나의 환경일 뿐, 우리의 중심이 되고 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우리가 앞으로 다가올 것이라 믿고 있는 새 우주 새 천년 시대에도 계속 될 것이라고 영화는 은근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진보를 믿고 죽어간 많은 이들에겐 미안하지만, 매우 자연스러운 우리의 모습이라고 공감하였다. 또, 진보를 향해 한없이 목말라하고 굶주려 있는 내가 이렇게 될 수 있기를, 이렇게 소담하게 어른이 되는 법들을 배워가기를, 우리 아버지들처럼 만큼만 살아지기를, 그럴 수 있기를, 지금 이 순간 잠시,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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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문학과지성 시인선 32
황지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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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밤바다에 인광을 찾아서

 

 

 

  황지우, 후배의 입에서 황지우의 시 얘기가 나왔을 때 내가 맨 먼저 떠올린 것은 그 인간만큼이나 꽤 난잡한 시들과 그의 육중한 몸뚱이 그리고 그 육중한 몸뚱이가 에로틱하다는 이인성 등이 문득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럼에도 내 기억 속에 황지우라는 시인은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라는 시로 각인되어 있는.......

 

 

  섣달 스무아흐레 어머니는 시루떡을 던져 앞 바다

의 흩어진 물결들을 달래었습니다. 이튿날 내내 청

태밭 가득히 찬비가 몰려왔습니다. 저희는 우기의

처마 밑을 바라볼 뿐 가난은 저희의 어떤 관례와도

같았습니다. 만조를 이룬 저의 가슴이 무장무장 숨

가빠하면서 무명옷이 젖은 저희 일가의 심한 살냄새

를 맡았습니다. 빠른 물살들이 토방문을 빠져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저희는 낮은 연안에 남아 있었습니다.

 

 

  자분자분 비가 내리고, 날짜를 착각해서 못 본 기말고사에서 F학점을 맞지 않기 위해 도서관에서 질척질척 몸뚱이를 비벼대며, 그래도 후배들과의 약속을 지키겠다고 처음 편 첫 장. 어떻게 된 게 첫 장부터 온통 한자투성이의 글귀들이 전면에 등장하고, 이 건 뭐 시를 읽는 것인지, 아니면 한자 찾기를 위한 것인지.......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기존에 내가 알고 있는 그의 시와 달리 겸손한 투의 이 시구들이 가슴 속에 무장무장 차오르고.......

 

 

  모든 근경에서 이름없이 섬들이 멀어지고 늦게 떠

난 목선들이 그 사이에 오락가락했습니다. 저는 바

다로 가는 대신 위안 장독의 작게 부서지는 파도 소

리를 들었습니다. 빈 항아리마다 저의 아버님이 떠

나신 솔섬 새울음이 그치질 않았습니다. 물 건너 어

느 계곡이 깊어가는지 차라리 귀를 막으면 남만의

멀어져가는 섬들이 세차게 울고울고 하였습니다.

 

 

  멀어져가는 섬들, 아버지, 그리고 솔섬의 새울음 소리, 가슴 속에 표현할 수 없는 막연한 그리움들 그렇지만 누군가 말했던 것처럼 지독하게 죽음을 닮아있는 듯한 그리움의 그림자들. 그러한 죽음의 그리움에 대해 시인은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차라리 그럴 수 없는 자신의 귀를 막아 버린 것일까? 그렇게 섬이 멀어져가는 것이 아닌 자신 스스로가 섬으로부터 멀어져갔지만,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세찬 그리움은 울고, 울고 또 그렇게 울어서 자꾸 자신을 흔들어 놓는데.......

 

 

  어머니는 저를 붙들었고 내지에는 다시 연기가 피

어올랐습니다. 그럴수록 근견의 겨울 바다는 눈부신

저의 눈시울에서 여위어갔습니다. 아버님이 끌려가

신 날도 나루터 물결이 저렇듯 잠잠했습니다. 물가

에 서면 가끔 지친 물새떼가 저의 어지러운 무릎까

지 밀려오기도 했습니다. 저는 어느 외딴 물나라에

서 흘러들어온 흰 상여꽃을 보는 듯했습니다. 꽃 속

이 너무나 환하여 저는 빨리 잠들고 싶었습니다. 언

뜻언뜻 어머니가 잠든 태몽중에 아버님이 드나드시

는 것이 보였고 저는 석화밭을 넘어가 인광의 밤바

다에 몰래 그물을 넣었습니다. 아버님을 태운 상여

꽃이 끝없이 끝없이 새벽물을 건너가고 있습니다.

 

 

  지독한 죽음과 그리움의 그림자, 그렇지만 거기에 흔들리는 시인을 어머니는 붙들었고, 시인은 건널 수 없는 바다를 건너지 않은 대신 흐릿한 빛이 비추는 인광의 밤바다에 몰래 그물을 넣는다. 그러고 나서 그제야 그는 그의 아버지를 먼 바다로 떠나보낸다.

 

 

  삭망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그러나 바람 속은 저

의 사후처럼 더 이상 바람 소리가 나지 않고 목선들

이 빈 채로 돌아왔습니다. 해초 냄새를 피하여 새들

이 저의 무릎에서 뭍으로 날아갔습니다. 물가 사람

들은 머리띠의 흰 천을 따라 내지로 가고 여인들은

선생을 위해 저 우기의 청태밭 넘어 재배삼배 흰떡

을 던졌습니다. 저는 괴로워하는 바다의 내심으로

내려가 땅에 붙어 괴로워하는 모든 물풀들을 뜯어

올렸습니다.

 

 

  그 발음처럼 삭막한 죽음을 닮아있는 음력 초하루의 바람이 불고, 이미 떠나갔지만 다시 환생할 혼들을 기리며, 살아있는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를 위한 염을 하고........ 시인은 이제 그 자신에게 남아있던 모든 괴로움들을 하나하나씩 뜯어, 깨끗하게 소멸시킨다.

 

 

  내륙에 어느 나라가 망하고 그 대신 자욱한 앞바

다에 때아닌 배추꽃들이 떠올랐습니다. 먼 훗날 제

가 그물을 내린 자궁에서 인광의 항아리를 건져올

사람은 누구일까요.

 

 

  모두 살자고 바다를 배신하고 내지로 돌아갔지만, 아니러니 하게도 내륙에 어떤 나라가 어떤 인과관계도 없이 갑자기 망했다. 그리고 그 대신 앞바다에서는 때 아닌 배추꽃들이 떠오른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나비 효과? 아니면 어차피 모두 죽음 앞에서는 예외가 없다는 그런 흔한 말? 그렇지만 여기서 시인은 바다로 건너가지 못한 대신 그가 넣었던 인광의 항아리를 다시 갑자기 화두로써 꺼내고 있다. 대체 무슨 연유일까.......

 

 

 

  처음, 혼자서 여행을 떠났던 것은 수능이 끝나고, 갓 스무 살이 된 해, 그러니까 아직 대학을 들어가기 전 1월 말쯤의 겨울이었다. 그 당시 나는 나 외의 모든 친구들이 재수를 해야 하는 상황, 그리고 가장 절친한 친구의 신앙에 대한 포기 선언, 게다가 그 당시 1년 중 가장 중요했던 문학의 밤 행사를 끝내고서 무언가 알 수 없는 허탈감에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사실 그렇지만 이제와 생각해 볼 때, 무엇 때문에 내가 그렇게 갑작스럽게 동해로 가는 밤 기차표를 무작정 끊고서, 홀로 여행을 떠났던 것인지 정확하게 기억은 나질 않는다. 다만, 그 당시 나의 돌발적인 행보는 꽤 존재적인 질문으로부터 비롯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하기에 애초에 내 여행의 목표나 어떤 계획은 존재하지 않았었다. 그저 떠나야한다는 강박감, 그것이 나를 움직였고, 그렇게 나는 생애 처음으로 나 혼자 이제까지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동해역이라는 곳에 저녁 5시쯤 당도하였다. 사실, 무작정 동해라고 해서 표를 끊었는데, 그래서 동해에 가면 바로 바다를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동해역이라는 곳에서 바다까지 가려면 차타고 한 20분 또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만 정말 무대책으로 온 나라 수중에 남아 있는 돈은 고작 돌아갈 때 차비와 바다로 들어갈 때의 차편 차비 외에는 1000원 남짓한 돈밖에 되질 않았다. 하지만 뭐 그게 대수랴? 내가 ‘죽느냐, 사느냐’라는 문제로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30분가량 정류소에서 기다렸다가 버스를 탔다. 그리고 당도한 곳이 바로 ‘추암 해수욕장’이었다. 날은 해가 짧은 겨울이라 그런지 벌써 어둑어둑해져 있었고, 매서운 칼바람이 달랑 마이 한 장 걸치고 온 내 몸뚱이를 후려쳤다. 그렇지만 탁 트인 바다를 보니, 정말 묵었던 가슴이 뚫리는 듯 시원하기 그지없었다. 정말로 모든 것을 여기에 던져 놓고 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1시간, 바다를 넋 놓고 원 없이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때부터 정말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로 모든 것이 돌변하기 시작했다. 일단, 점심 이 후 아무것도 먹지 못한 공복에 춥기는 얼마나 추운지, 너무 급작스럽게 와서 돈도 못 챙겨 오고, 달랑 마이 한 장 입은 것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런 후회도 잠시, 밤이 깊어갈수록 견딜 수 없는 추위는 생각 자체를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정말 그대로라면 사느냐가 아니라, 죽느냐로 모든 것이 변해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가진 돈 1000원을 가지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자판기 커피에서 100원짜리 유자차를 한 잔, 한 잔 퍼마시면서, 추위를 녹이고, 허기를 달래다가, 그것도 여의치 않아,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자동차들의 문을 건들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여기저기서 그 새벽에 커다란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하고, 개들이 마구 짓기 시작하고....... 이건 뭐 해도 해도 너무하지? 내가 뭐 자동차 훔쳐가는 것도 아닌데....... 그렇지만 다행히도 깊은 밤이라 그런지 누구 하나 깨는 이는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다시 바다로 가 모래를 덮고 잠시 누워서 견디다, 또 그것도 견딜 수가 없어서, 다시 과감하게 용기를 내어 어느 자동차 앞에 섰다. 그리고 행여 다시 경보음이 울릴까 하는 두려움으로 차문을 여는데, 이 게 어떻게 된 일인지, 나 같은 사람을 위해 누군가 맘 좋게도 문을 잠가두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차안으로 들어가 잠시 몸을 녹이는데, 역시 시동이 걸려있지 않아 그런지, 바람만 막아줄 뿐 춥기는 매한가지였다. 게다가 행여 차 주인이 올까 하는 심정에 제대로 눈을 부칠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잠깐 눈을 감았다 떠보니 시간이 후딱 1시간이 지나 버렸다. 그리고 시간은 어느덧 새벽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 1시간 정도만 버티면 그토록 기다리던 동해 앞바다의 일출을 볼 수 있으리란 희망이 생겨났다. 그래서 조심스레 차 밖으로 나와 다시 바닷가로 향하였다. 그리고 그토록 까만 어둠 속에서도 희미한 빛을 내며, 변화무쌍하게 색을 달리하는 바다에 함몰될 듯 경탄하며, 그 새벽이 지나가기를 기도하였다.

 

 

  내 개인에게 있어 ‘죽음’이라고 하면, 너무 커다랗고, 막연해서, 도무지 와 닿지도 않고, 그래서 표현함에 있어 어떤 금기와도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지 잘난 맛에 사는 시인이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라는 시집 제목부터 죽음 냄새를 펄펄 풍기면서, 첫 장에 내 놓은 위의 ‘연혁’이란 시는 ‘바다’와 ‘아버지’라는 이미지를 매개로 해서 지독한 ‘죽음’의 그림자를 피워대는데....... 내 선입견 때문인지는 몰라도 왠지 역겹기 그지없었다. 맨 처음 그의 다른 시집 ‘어느 흐린 날 나는 주점에 홀로 앉아 있을 것이다’를 대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자분자분 내리는 비 때문인지, 아니면 내 기억 속 밤바다의 추억 때문인지, 이 시가 가슴 속에서 떠나질 않고, 마치 어떤 숙제처럼 무언가 풀어내야함을 자꾸 속삭이는 것이다. 어두운 밤바다에서 인광의 항아리를 꺼내 올려 달라고, 아니 그 어두운 밤바다에 인광의 항아리를 반드시 집어넣어야 한다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내 뇌리 속에서 떠오른 것은 어쩌면 이 시에 짙게 자리 잡은 죽음의 바다가 죽음이 아닌 삶의 자리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다시금 해보게 되는 것이다. 선생의 자리 즉, 삶으로 돌아와져야 하는 자리, 그리고 죽음만큼 거칠고 흉포한 삶의 자리.

 

 

  청계천 2가. 횡단보도를 바삐 교차하는 사람들 사

이에서 (저쪽에서 이쪽으로) 그녀는 아이를 업고 나

타났다. 그 산이 게워낸 이물질인 듯한 하얀 안개꽃

을 아이가 쥐고 흔들어댔다. 거기서 무슨 은방울 같

은 소리가 났다. 맹인을 위한 신호 소리를 들으며

쌩쌩(生生?)한 사람들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먼저 넘

어갔다. 사라지는가 했는데 그녀는 다시 자동차 부

속품상 앞 잡상인들 틈에서 나왔다. 그녀는 한 번만

더 아이를 낳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그만두라고 했

다. 그녀는 한 번만 더 아이를 이 땅으로 보내고 싶

다고 했다. 나는 두 손을 그었다. 지금 보다시피 우

리는 서로의 발등을 밟고 있다고 나는 말했다. 뱃속

에서 아기가 죽어간다고 그녀는 화를 냈다. 이

오려면 으로 을 내려야 한다고 나는 말했다. 나

는 적십자사 헌혈차를 피해갔다. 그리고 뒤로 돌아

서서 그녀에게 정색하고 말했다. 그대 앞에 내 슬픔

이 좀 과했나보오. 그대 앞에 나의 심령과학적 자의

식이.

 

 

  ‘에서·묘지·안개꽃·5월·시외버스·하얀’이란 이 시집 가운데 시에서도 그는 5·18에서 죽은 여인을 연상시키면서 지독한 죽음에 대한 슬픔과 연민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의 그 죽음은 그냥 끝나버린 죽음이라고 하기엔 여인의 선생에 대한 욕구는 과하게 표현되어 있다. 물론, 여기서 시인은 정색하며 말한다. 그것은 단지 자신의 과한 자의식이라고. 그렇지만 동시에 그는 여인에게 하나의 단서를 남긴다. 땅, 몸, 닻.

 

 

  어쩌면 죽음에 관한 깊은 시적 염을 삶이란 전혀 반대되는 이미지로 과하게 엮어내고자 나는 지금 무리한 시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내 개인의 어떤 어둔 밤바다에서 인광을 찾아내고자 하는 염과 함께 더불어 시 자체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시를 통해 무언가를 실마리를 얻고자 하는 내 몸부림이 역시 과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스무 살 그 때로 돌아가 다시 추위에 바르르 떨며 어둔 밤바다 가운데 흐릿한 빛들을 바라다본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그 위에 꽃들이 둥둥 떠다니고 어떤 가련한 혼들이 잃어버린 몸뚱이로 땅에 닻을 내리는 환상을 바라다본다. 여전히 내지의 소식은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어떤 나라가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매일 어디선가 누군가는 굶어 죽어가고, 어디서는 정경들이 줄을 지어 구호를 외쳐대고....... 그런 모든 것들이 상관없다는 듯이 밤바다 위에 꽃이 피고, 서서히 날이 밝아온다. 1시간, 2시간........ 찬란할 줄만 알았던 일출... 흐릿한 날씨에 그런 일출은 도무지 나타날 기세가 없다. 땅으로 몸뚱이를 닻으로 내리려는 혼들도 이제는 밝아오는 햇살에 흐릿해져 간다. 바로 그 때 먼 구름 사이에서 붉은 햇살이 인광처럼 고개를 내민다. 그것이 무엇인지, 어떤 의미인지 도무지 알 길은 없다. 허나 왠지 모르게 가슴 속 한 켠에 저버릴 수 없는 삶의 희망의 자리를 하나 남겨 놓는다. 그리고 이제 나도 환상으로 둥둥 떠다니던 내 몸뚱이를 찾아 땅에 닻을 내린다. 집으로 돌아간다. 그렇지만 이제 매일 떠나가는 삶임을 그러한 여정임을 깨달아 안다. 마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라는 시집의 제목처럼, 새들이 뜨는 이 세상이 여전히 대지의 중력에 묶여 늘 그대로이지만, 그래서 언젠가 새들도 대지의 중력에 그대로 이 세상에서 떠버리겠지만, 하루라도 아니 지금 이 순간이라도 대지의 중력을 벗어나 떠있는 이 대기의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한 번 들이 마셔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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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1-13 0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풍장...과 연가와 같은 즐거운 편지˝ 사이의 그 거리..란...즐거운 편지로 만난 황지우.를
진정 내 안에 살게한 건..풍장을 알고 이후.부터..연가적 ..편지로는 가 닿지 못했던 그였다면..한 참이나..흘러..풍장을 그리는 그의 시를 알고..이후에는 편지 조차도 모두 그러안을..수있는 시인의 세계.확장.
나머지는 그저 허겁지겁..삼키기..바쁜..허기가되었다.고
 
제이콥의 거짓말 - [할인행사]
피터 카소비츠 감독, 로빈 윌리암스 외 출연 / 소니픽쳐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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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콥의 거짓말 - 희망의 아이러니에 관해

 

 

 

 

  어느날 히틀러가 점쟁이에게 물었다.

 

  "내가 언제 죽을 것 같나?"

 

   점쟁이 왈

 

  "유태인 경축일 날입니다."

  

  히틀러 화들짝 놀라

 

  "아니 왜 하필 유대인 경축일인가? 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점쟁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의연한 태도로 말하길

 

  "당신이 죽는 날이 유태인 경축일 테니까..."

 

 

 

  살벌한 그 시기에 유대인들은 이런 사소한 유머와 때론 터무니없는 희망들로 자신들의 삶을 유지해 나갔다고 한다. 왜? 그렇게 도저히 희망이란 이름이 가당치도 않을 암담한 시대일수록 미약하게라도 붙잡고 늘어질 무언가가 필요했을 테니까... 영화 ‘제이콥의 거짓말’은 이러한 베이스 아래 유대인 제한구역인 게토 (게토는 포로수용소를 들어가기 전 단계로 제한적인 최소하의 생활을 보장하는 장소임) 안에서의 유대인들의 살벌한 삶을 코믹하게 엮어나가고 있다.

 

 

  언제나 그런 건지도 모르겠지만 사건의 발단은 참 사소하고 지극히 우연한 돌발들로부터 시작된다. 먼저 화면엔 바람이 거세게 불고 도저히 잡힐 것처럼 보이지 않는 신문 한 장이 휘날리고 있다. 그리고 어떤 난세에도 전혀 튀어오를 것 같지 않은 평범한 소시민인 제이콥(로빈슨 윌리암스)은 그 신문을 부여잡으러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아마 아주 사소한 희망이라도 붙잡아보고 싶은 뜬금없는 우리의 모습일 것이다.) 문제는 그런데 그 신문 쪼가리 하나가 더럽게도 잡히지가 않더라는 것이다. 아무리 쫓아가도 이리저리 도망치는데, 결국 시간은 통금시간(오후 8시)에 가까워지고, 그만 제한구역의 경계선까지 와버리는데, 신문이란 하나의 붕 뜬 희망에 팔려 거기까지 밀려와버린 제이콥은 그만 그것도 잊었는지, 독일군의 탐조등 아래 자신이 드러나질 때까지 정신이 없다. 결국, 이런 사소한 일로 제이콥은 게토 바깥에 위치한 독일 장교 초소까지 끌려가게 되고, 거기서 가볍다고 하기엔 좀 위험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첫째는, 게토 바깥에 위치한 장교 초소에서 장교의 장난스런 시간끌기로 인해 통금시간인 8시가 지났다는 사실인데, 통금시간이 지나 게토 안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못 돌아 갈 경우 사형을 당한다는 상황이다. 둘째는, 그럼에도 독일 장교와 독일군들은 아무 잘못 없는 제이콥에게 아무런 통행증도 없이 다시 게토 안으로 들어갈 것을 명령한 상황이다. 즉, 제이콥은 일종의 목숨을 건 게임에 말려들게 된 것이다. 왜냐면 게토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이미 닫혔고, 그러하기에 들어가기 위해선 독일군 보초들과 탐조등을 피해야만이 무사히 자신의 집으로 귀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러한 연유로 이제 제이콥은 위기의 상황에 봉착하게 되는데, 언제나 그렇듯이 위기엔 희망의 전조 또한 드리워지게 된다. 첫째는, 장교의 초소에서 그는 아주 우연히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전선의 소식을 듣게 되는데, 그동안 아무런 소식조차 상상할 수 없던 절망에서 소련군이 자신의 게토 400km 근처에까지 와있다는 무언가 확실한 희망의 소식을 접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희망의 전조로 그는 게토 안에 무사히 들어오는 과정에 포로수용소로 끌려 들어가다가 탈출해온 한 유대 소녀를 만나게 되는데, 어찌 보면 이는 자신에겐 커다란 부담이며 위험일지도 모르지만, 실제는 아마 이는 앞에 첫 번째의 불확실한 희망보단 더욱 근거 있는 희망이라 말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껏 제이콥에겐 자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비록 아내가 있었다고 하나 총살당하였기에 그는 누구도 의지하거나 바라볼 대상이 없었다. 그런데 우연한 이 소녀와의 만남으로 그는 이제 누군가를 위해 자신이 살아남아야 하는 절실한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여담이지만 사실 이럴 때 보면 인간은 참으로 人이 아니라 人間임을 알 수 있는 거 같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결과적으로 제이콥은 오랜 탈출기로 쌓은 소녀의 노하우에 힘입어 무사히 집으로 귀가하게 된다. 그리고 이제 희망이란 근거 하에 새로운 삶을 맞이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왜냐면 희망이란 불안이나 절망 혹은 우울만큼 그 전염성이 장난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이건 되레, 엄청난 과장성을 띠고, 확대되어가는 경향이 있기도 하다. 그러하기에 제이콥 혼자만의 희망이란 결코 존재할 수가 없다. 전염을 통해 확대되어져야 만이 희망의 온전한 힘이 발휘되어지고, 아울러 제이콥이란 한 개인에게도 그것이 해당되어지게 될 테니까... 물론 그러하기에 어쩌면, 희망이란 것은 거짓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분명 거짓이다! 그러나 거짓만으로 끝나는 것은 결코 희망이 아니다. 희망은 되레, 거짓에 관한 믿음이며 신념이다! 그러하기에 희망 안에선 거짓도 진실도 아무런 가치가 없다. 오직 중요한 건 희망 그 자체이고 삶을 연장시키는 그 힘일 뿐인 것이다. 그래서 제이콥은 어쩔 수 없이 모든 이들이 희망을 짊어지고서 거짓을 증거하는 예언자가 되어 버리게 된다. 당연히 그가 의도했던 바는 아니었다. 단지, 너무나 절망에 휩싸여 어떤 삶도 쉬 포기해 버리는 동료들을 보며, 어쩔 수 없이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희망에 대해 발설했을 뿐인 것을 희망이란 그 자체가 커지고 스스로 알아서 자신을 증거해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건 사람들은 그런 막연한 희망이라도 무언가 잡혀지는 구체적인 근거들을 원하고 합리화시켜나가길 원한다는 사실이다. 그러하기에 그러한 도구로 희망의 발설자인 제이콥은 너무나 적절하였다. 왜냐면 추상적 관념인 희망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보이고 잡혀지는 사람이니까. 일말의 책임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제이콥은 열심히 거짓말을 하게 된다. 소련군이 곧 진군해 들어올 것이라고. 그리고 곧 우리는 해방될 것이라고. 매일 밤 벌어졌던 자살행각은 이제 사라지고, 이제 유대인들은 사실 터무니없지만 엄청난 희망에 근거하여 무력했던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파워를 얻게 된다. 비밀 결사대가 조직이 되기까지 하고, 다들 포기했던 삶을 무언가 다른 방식으로 분주히 꾸려가기 시작한다. 물론 이런 희망이 거짓이며, 이런 분주함이 위험함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들 모두 처음부터 그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마저 포기하기엔 그들의 삶의 기반은 너무나 빈약했고, 당연히 인정하고 싶지가 않았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결국 모두는 희망을 선택했다. 그 대가가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모두가 예감한 채. 그리고 역시 그 예감대로 아주 빨리 그 대가는 찾아왔다. 있지도 않은 라디오의 정체, 그동안 게토 안에 있던 모든 유대인들은 제이콥의 거짓말에 관한 희망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제이콥에게 라디오가 있을 것이라 상상해 냈었다. 그리고 제이콥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의 굶주린 요구를 채워주기 위해 본인이 라디오를 가장해야만 했다. 이에 관한 독일군의 수사가 시작되었고, 제이콥은 독일군에게 순순히 잡혀 들어가게 된다. 모두의 엄청난 희망을 남겨두고서... 그리고 자신만을 의지하고 있는 한 소녀의 희망을 남겨두고서... 왜? 저항 한 번 해보지도 못하고, 그리고 왜 그토록 간단하게 잡혀 들어갈 수밖에 없던 것이었을까? 상황은 다시 맨 처음 상황과 비슷한 연장선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제껏 신문이란 실상은 허공에 붕 뜬 언어들이 (언어는 언제나 사실이라는 통념이 있다) 가진 희망에 팔려 정신없이 쫓아가다 보니, 어느새 그는 다시금 독일군의 탐조등 아래 자신의 발가벗겨진 무력함이 폭로되어지게 되는 것이다. 즉, 자신의 희망이 애초에 거짓이었음을 인정해야만 하는 때가 온 것이다. 만일 그 희망이 진실이었다면? 그러나 영화는 애초에 모든 희망은 거짓이며, 그러하기에 한없이 무력한 것임을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그렇게 희망이란 게 어이없고 간단한 것일까? 여기서 영화는 다시금 희망에 관한 커다란 반전을 염두에 두고 있다. 무엇이냐면 희망 자체가 무력한 거짓이라도 희망에 관한 믿음과 신념은 진실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제이콥의 거짓말은 독일군에게 발각되었다. 그리고 모든 자신의 동포들 앞에서도 발각되었는지 모른다. 누구도 라디오를 본 적이 없으며, 동포들 앞에 끌려나온 제이콥은 거짓말쟁이라는 죄명으로 서있다. 분명, 모든 진실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그렇지만 제이콥은 끝까지 그 사실을 부인한다. 그리고 제이콥을 바라보던 유대인들의 얼굴도 역시 마찬가지다. 희망은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다. 어떤 삶의 출구도 없을지라도, 어떤 형태도 없는 막연한 희망이기에 무력하기 그지없을지라도, 희망은 언제까지나 존재해주어야만 하며, 희망 자체가 거짓일지라도, 그것만은 진실이어야만 한다. 그러하기에 제이콥은 자신의 거짓을 끝까지 밝히지 않고 처형을 당한다. 희망의 남겨진 조그만 몫을 모든 동포들에게 남긴 후,,, 이제 다시 무대는 맨 처음 상황과 별반 다를 바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제이콥과 함께 제이콥의 희망은 죽었고, 그와 함께 라디오의 비밀도 사라졌으며, 이제 유대인들은 제한구역을 떠나 포로수용소로 모두가 끌려가는 마당이다. 물론, 제이콥은 이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가지라는 메시지는 충분히 전달했을 것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어찌됐든 간에, 제이콥의 죽음과 함께 구체적인 희망의 근거는 사라지고,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막연한 희망에 관한 믿음만 남겨진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은 기적을 가져오는 것일까? 아니면, 희망과 믿음 어떤 것과도 상관없이 오게 되는 필연을 우리는 희망과 믿음에 근거하여 기적이라 부르는 것일까? 포로수용소로 끌려가는 기차가 50km를 채 지나기도 전 약속했던 소련군이 도달하고, 영화는 제이콥의 희망이었던 소녀에게서 다시 제이콥의 희망을 그대로 전이시킴으로써 마치 제이콥의 죽음을 부활처럼 남기며, 막을 내린다. 즉, 제이콥의 거짓말은 거짓말이 아니라 진실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이콥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게로의 희망의 부활이며, 전이였음을 밝히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영화는 그 긴 120분 동안 희망은 거짓일지라도 그 믿음은 진실이며 언제나 존재해야 만이 되는 것임을 제이콥의 거짓말을 통해, 그리고 마지막 소녀의 환상을 통해,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것 아닐까? 정말로 그 어떤 희망에 관한 가르침보다 근거 있고, 파워 있는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의문을 던져보고 싶다. 마지막 희망의 결론이 어떤 기적과 소녀의 환상일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제이콥이 그리고 그 소녀 자체가 희망이었던 까닭은 아닐까? 영화 전반적으로 암시만 두었을 뿐 두드러지게 드러나지 않았기에 자세히 나타나진 않지만, 희망의 막연함을 구체화시키는 것이 바로 사람이고 우리 자신일 것이다. 그러하기에 누군가에 말대로 나는 지금 '사람만이 희망이다.'라고 은근히 말해보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이 희망 될 수 있었던 이유들은 구체적인 우리의 절망들이 그렇게 만든 것임을 한 번 생각해보고 싶다.

 

 

 만일, 세계 2차 대전 당시 유대인이 아니라 해방되어 축복받고 선택받은 유대인의 관점에서의 희망이라면, 이런 방식으로 희망이 말해 질 수 있었을까? 아마, 분명 다를 것이다. 어쩌면 상황에 따라 희망의 이런 거짓은 욕망으로 변모하여 가장 사람을 무섭게도 만들기 때문에... 즉, 이 모든 베이스에 허공에 붕 뜬 거짓만큼 절실한 우리의 절망이 숨겨져 있었음을 잠시 기억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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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1-13 0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rik SATIE:Gnossienne No.4
같이 듣고 싶은..^^

몽원 2015-01-13 18:36   좋아요 0 | URL
저도 가지고 있는 음원이기는 합니다.^^

[그장소] 2015-01-13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몽원님 글 덕에 오랫만에 에릭사티를 청해들었어요. 요즘은 유툽이 좋아서 찾아 걸지않아도 비교적 좋은 음질로 들을수있어서..좋긴 좋구나..( 이런 간사한..ㅎ) 했더랍니다.저.곡은 야곱의 사다리˝ 라는 영화때문에 알게되었어요.
베트남전을 다룬 영화죠..오래전에 본 기억이 나요.엔딩에 울리던 곡을 찾다.닿은 곡였구요..
 
화양연화 (1disc) - [초특가판]
왕가위 감독, 양조위 외 출연 / 드림믹스 (다음미디어)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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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 가장 아름다운 시절에 대한 그리움

 

 

 

  사실 영화의 내용은 평범하기 짝이 없다. 어느 날 우연히 벽 하나를 두고 두 집안이 이사를 오게 된다. 젊은 남녀 두 부부... 쉽게 떠올리듯이 여기엔 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무언가 불륜의 전조가 드리워지고... 역시 예상대로 한 여자와 남자는 눈이 맞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부터가 재밌다. 왕가위는 바람난 두 남녀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이 사실을 알게 된 다른 두 내외 즉 양조위와 장만옥에게 시선을 고정시킨다. 아주 의도적으로... 문제의 원인인 이 두 사람의 부인과 남편에 관해선 목소리와 뒷모습 같은 배경적 의미 이외에 제대로 얼굴조차 비추지 않을 정도로. 그렇다면 왜 별로 재미도 없을 거 같은 바람난 남녀의 내외인 양가위와 장만옥에게 왕가위는 애틋한 시선을 보내었던 것일까? 사실 여기선 그전에 중경삼림이나 타락천사 등에서 보여주었던 왕가위의 시선과는 사뭇 다른 무언가를 느끼게 한다. 날카롭게 소외된 이들의 만남임에는 분명히 그 맥을 같이 하고 있지만, 왕가위는 도리어 이번엔 이 소외의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도시적인 미학 속에 머물렀던 그의 시선이 도시적인 향수로 전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다!`하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왜냐면, 제목 ‘화양연화’가 의미하는 바가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분명, 비련의 주인공일 수 있는 이 영화의 두 남녀 주인공에서 어떻게 왕가위는 그런 애틋한 그리움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일까?

 

 

  영화에서 두 남녀는 처음엔 단순히 서로의 부인과 남편을 되찾기 위해 만나기 시작했지만, 서로 점차 끌리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주위의 시선과 아시아의 도덕적 환경이란 무거운 압박 속에서 그들은 결연히 사랑의 도피를 할 만큼 용기 있는 주인공들이 아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에게 시작된 조그만 호감의 감정들을 끝까지 부인하고 싶다. 그러나 각자 부인과 남편에게서의 소외라는 상황과 주위의 시선에 대한 부담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감정을 사랑으로 발전시키게 되고, 급기야 이제 그들은 서로를 부인할 수 없게 된다. 영화 `화양연화`는 이런 미묘한 두 남녀의 세세한 감정들을 왕가위 특유의 논리와 감각으로 잘 포착해 내고 있다. 특히 영화 중 나오는 그들의 연습(다른 의미로 연극)은 그러한 두 남녀의 심리에 대한 역설적인 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처음 자신들의 부인과 남편의 불륜의 관계를 확인하던 밤, 그들은 어떻게 자신의 배우자들의 불륜이 이뤄졌는지 더 자세히 확인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상의 연극을 해본다. 슬며시 유혹하는 두 남녀의 시선은 이미 연극을 넘어선 실제에 가 닿고, 어느새 두 남녀는 마지막 연극 연습을 하고 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미 서로의 진실을 알아차린 미묘한 감정 속에서 헤어지기 연습을 해보는 것이다. 남자는 덤덤히 떠난다 하며, 이제껏 표현하지 못한 자신의 진실을 고백하고, 손 끝 쉬 범하지 못한 여자의 손목을 애처롭게 잡았다 놓으며 떠나간다. 슬픔을 견디는 듯 아무렇지 않은 표정 지어보려 홀로 떠나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여자는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참을 수 없는 격정으로 남자에게로 달려가 그 품에 안기며 엉엉 서러이 울어버리고, 남자는 연습이라며 여자를 달랜다.

 

 

 

 

 

 

 

  다른 진실을 가정하고 그 진실 속에 몰입하는 그들의 약간은 장난스러운 듯하면서도 처연한 연극은 그들의 시작과 끝을 너무나 분명한 현실로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즉, 그들이 한 것은 연극이 아니라 실제의 진실이었고 실제였다. 마지막 두 주인공의 이별신 연습은 영화 스스로 그것을 인정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이러한 지점이 드러나고 있다. 즉, 그들은 그들의 가장 불행스러운 시절들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만들어내고 싶었던 욕구들을 하나의 연극을 통해 맛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현실은 이러한 연극의 종영이 있어야지만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하기에 결국 연극은 막을 내리고, 두 주인공은 내려와 서로 각기의 길을 걸어야 했으며, 남겨진 무대를 두고 서로 엇갈린 걸음들로 찾아와 종종 들여다보고, 아쉬워하고, 그리워하는 것, 이것으로 끝을 맺어야 했다. 연극은 끝이 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가짜였기에 어쩌면 가장 아름다운 진실로써 그들에게 절실한 그리움으로 남겨지게 된다. 비록, 이 또한 하나의 또 다른 소외를 위한 몸부림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왕가위는 이러한 연극의 행위를 통해 낳아진 소외를 그 그리움을, 우리 삶의 각박한 소외의 또 다른 가능성으로 얘기하고 싶었던 건 아닌지...

 

 

  검은 커튼이 드리워진 꽉 닫힌 창문 사이로 한 개 시린 바람이 불어와 눈을 감은 눈가에도 빛이 어린다... 흐린 그림자 가뭇가뭇 어리어지고 그 사이 나도 모를 그리움이 피어올라 다시 보고 싶다. 그 때 그 시절... 끝나버렸기에 아름다운, 그토록 아름다운 그 시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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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1-13 0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는 이미 교감을 나눈 이가 있기에
더 함이 나눔보다..못할것같아서..

몽원 2015-01-13 20:49   좋아요 0 | URL

교감이라.. 좋네요^^ 이 글은 제가 거의 처음으로 썼던 품평인데... 10년도 넘은 시간 전에...
그 때 노블이란 문학 사이트에서 처음으로 이 글을 통해 저도 여러 사람과 글이란 도구를 통해 소통할 수 있게 된 계기를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름 의미가 있긴한데... 지금 보면, 살짝 부끄러운 ㅎㅎ

[그장소] 2015-01-13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도 안바래진 걸요.. 영화 다시봐도 전혀 촌스럽다거나 시대를 모르겠거나 하지않아요.그게..어색하지않음..세련됨..
같아요.저 영화는 은근하게 세련되고 은근하게 밝히고 은근하죠..사람들 속내같이.. 그래서 시간이 지나도..화양연화...여전할 수있다고..믿어요.^^

몽원 2015-01-13 21:08   좋아요 0 | URL

아~ 영화 말고요. 화양연화는 그 이후로도 5번 정도 더 봤습니다. 워낙 명작이라..
볼 때마다 새롭더군요. 더 아리고. 제 글이 살짝 부끄럽다는 의미였습니다.^^;; 하하;;

[그장소] 2015-01-13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같은 말을..ㅎㅎ
님의 글 역시 (아..부끄럽다...개인이 느끼는 감정을..) 주제넘게 아니다..그렇다..할 자격이 제게는 없지만..누구의 추억도 지나서 부끄러울..그런 기억은 아주 커다란
잘못이나..두고두고 후회할 만한 일이 아니면..대부분 미담으로 남겨지잖던가요..?.. ㅎ윽! 웹으로 가야..겠어요.
폰이 오늘 뭔가붎편한듯..